Todos os capítulos de 달빛이 낮게 내린 밤에: Capítulo 21 - Capítulo 30

30 Capítulos

제21화

정시연은 굵은 삼 밧줄을 몇 번이고 단단히 감았다. 한 번 두를 때마다 조금의 틈도 남지 않도록 힘껏 조여 맸다.매듭을 짓는 솜씨가 여간 야무진 것이 아니었다. 먼저 줄 끝을 이로 물어 팽팽히 당긴 뒤, 다시 감아 조이고 마지막에는 좀처럼 풀리지 않는 단단한 감아매듭을 지었다. 가느다란 두 손이 삼 밧줄 사이를 쉴 새 없이 오갈 때마다 곧고 선명한 손마디가 드러났다.배한설은 넋을 놓고 그 손을 바라보았다. 손가락 사이로 스며든 햇살이 바닥에 잘게 부서지고, 걷어 올린 소맷자락 아래로 가늘지만 단단한 손목이 드러났다.한참을 구경하던 배한설은 저도 돕고 싶은지 삼 밧줄 뭉치로 손을 뻗었다. 그러나 어린아이의 힘으로는 팽팽하게 당길 수 없어, 줄이 손안에서 자꾸만 느슨하게 늘어졌다.그 모습을 본 정시연이 빙그레 웃으며 몸을 숙여 아이를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배한설의 작은 손바닥에 줄 끝을 쥐여 주고는 그 위로 제 손을 겹쳐 함께 힘껏 당겼다.줄이 팽팽해지자 정시연은 손을 놓고 아이에게 매듭을 맡겼다.“그대로 꼭 누르고 계세요.”배한설은 고개를 끄덕이고 힘껏 매듭을 눌렀다. 얼마나 온 힘을 다했는지 조그만 손가락 끝이 하얗게 질릴 정도였다.긴 널빤지에 삼 밧줄을 꿰어 그네에 매달았을 무렵에는 어느덧 해가 서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정시연은 흔들림 없이 고정된 널빤지를 손바닥으로 두어 번 두드려 본 뒤, 배한설을 향해 환하게 웃었다.“도련님, 한번 앉아 보세요.”회화나무 잎새 사이로 스며든 석양이 잘게 부서진 금가루처럼 정시연의 얼굴과 땀에 젖은 귀밑머리 위로 내려앉았다. 곁에서는 아만이 연신 “메에” 소리를 내며 울어댔다.배한설은 이날을 평생 잊지 못할 것만 같았다.아이는 정시연의 손을 꼭 붙잡고 그녀의 부축을 받아 조심스럽게 그네에 올라앉았다.민취가 배한설을 찾아 뒤뜰로 왔을 때, 아이는 이미 그네를 타며 한껏 신이 나 있었다. 허공으로 높이 솟구칠 때마다 짧은 두 다리가 힘차게 흔들렸고, 뒤에서는 정시연이 눈을 반짝이며 웃는 얼굴로 그네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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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화

큰일이었다.정시연은 본능적으로 품 안의 아이를 끌어안고, 제 등이 먼저 땅에 닿도록 몸을 틀었다. 순간 눈앞이 새카매졌다.그러나 각오했던 통증은 찾아오지 않았다. 땅에 떨어지기 직전, 무언가 단단한 것이 그녀의 몸을 받아 낸 듯했다.조심스럽게 눈을 뜬 정시연은 눈앞에 드리운 서늘한 검은 눈동자와 마주쳤다.배지혁이 재빨리 손을 뻗어 그녀를 받아 낸 것이었다. 긴 팔이 뒤에서 허리를 감싸고, 넓은 손바닥은 아랫배를 단단히 받쳤다. 그렇게 그는 추락하던 정시연과 배한설을 한꺼번에 품 안으로 끌어올렸다.그 여파로 정시연의 등이 걷잡을 수 없이 그의 품에 부딪혔다. 어깨뼈가 배지혁의 단단한 가슴에 닿았다. 얇은 배자 너머로 전해지는 그의 체온은 놀라울 만큼 서늘했다.정시연의 머릿속이 다시 한번 새하얘졌다.머리 위로 내려앉는 사내의 기척이 그녀를 온통 에워싸고 있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순간,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리기 시작했다.그러나 그녀를 더욱 당황하게 한 것은 따로 있었다.방금 전의 충격으로 젖이 흘러나와 옷깃 앞섶을 적신 것이다. 코끝에 익숙한 젖내가 은은하게 번지자 정시연의 귓가에서 웅 하는 소리가 울렸다.그녀는 몸을 움츠리며 황급히 배지혁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서두르는 바람에 배한설을 내려놓자마자 중심을 잃었고, 발끝으로 치맛자락을 밟으며 미끄러져 그대로 땅바닥에 넘어질 뻔했다.배지혁이 멈칫하며 손을 내밀었다.그러나 정시연은 흙바닥을 한 바퀴 구르더니, 거의 기어가다시피 허둥대며 그와의 거리를 벌렸다.배지혁이 미처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그녀는 이미 멀찍이 떨어져 두려움에 질린 채 무릎을 꿇고 있었다.진흙 위를 구른 탓에 온몸은 흙먼지투성이였고, 까마귀 깃처럼 검은 머리카락은 흐트러져 귀밑에 어지럽게 들러붙었다. 가슴께까지 고개를 깊이 숙이자 가느다란 뒷목이 고스란히 드러났다.그 희고 가는 목덜미 위로 어느새 발그레한 기운이 번져 귀밑까지 붉게 물들었다.놀라고 겁먹은 모습이었다.배지혁을 마주할 때마다 마치 고양이 앞에 선 생쥐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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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화

그제야 정시연의 얼굴에 웃음이 피어났다.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제가 할 줄 아는 건 남들에게 내세울 만한 것도 못 됩니다. 그저 시골 아낙들이 손으로 만드는 자질구레한 것들뿐이지요.”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니 해는 어느새 완전히 저물어, 마지막 빛 한 점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도련님께서 자라 더 넓은 세상을 보고 많은 것을 알게 되시면, 그때는 저를 촌스럽고 견문도 얕은 사람이라 여기실 겁니다.”주방현이 그랬던 것처럼…….“아닙니다.”배한설이 갑자기 말을 잘랐다.아이는 걸음을 멈추고 정시연을 올려다보았다. 어린 얼굴에 좀처럼 보기 힘든 진지한 빛을 띤 채, 한 글자 한 글자 힘주어 말했다.“저는 언제까지나 누님이 대단하다고 생각할 겁니다.”잠시 머뭇거리던 배한설이 이내 덧붙였다.“제 아버지만큼이나 대단하다고 생각할 거예요.”정시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아이를 바라보았다. 줄곧 팽팽하게 굳어 있던 등이 그제야 서서히 풀렸다.가슴속 깊이 얼어붙어 있던 마음마저 따스하게 녹아내리는 듯했다.*저녁 무렵 배한설의 식사를 모두 시중들고 나자, 민취는 목욕물을 데우고 아이를 씻겨 옷을 갈아입히느라 분주하게 움직였다.그동안 정시연은 연탑에 앉아 기름등잔 하나를 밝히고 배한설의 겨울옷에 수를 놓았다.어머니는 이름난 자수장이였지만 정시연은 그 솜씨를 조금도 물려받지 못했다. 바느질을 할 때마다 어딘가 서툴고 엉성해 좀처럼 남 앞에 내놓을 만한 모양이 나오지 않았다.그녀는 손에 든 옷을 몇 번이나 고쳐 가며 한창 수놓기에 몰두했다. 그러느라 민취가 언제 다가와 연탑 맞은편에 앉았는지도 알아차리지 못했다.곁에서 기척이 들리자 정시연의 손이 멈추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민취의 눈치를 살폈다.저녁에 있었던 일로 꾸지람을 들을까 내심 불안했던 것이다. 그러나 민취는 바늘과 실을 집어 들더니 전혀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정 어멈, 오늘 밤에는 젖을 평소보다 넉넉히 짜 두세요. 내일부터 휴일이니 이틀 동안 집에 다녀오셔도 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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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화

창밖에는 가랑비가 쉴 새 없이 내리고 있었다.주방현은 식탁 앞에 앉아 군주와 함께 아침 식사를 들었다. 고요한 대청 안에는 두 사람이 말없이 움직이는 젓가락과 그릇이 맞부딪치는 맑은 소리만 간간이 울렸다.정시연이 집을 떠난 지 보름이 지나자 군주는 새로 숙수를 고용해 주씨 부저의 식사를 맡겼다. 하루 세끼를 모두 책임지는 자로, 본래 궁에서 일했던 데다 솜씨도 이름나 한 달 품삯만 무려 은자 오십 냥에 달했다.정시연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귀한 몸이었다.예전에 정시연이 주씨 부저에서 하루 세끼를 차릴 때는 은자 한 냥조차 들지 않았다.식사가 절반쯤 끝났을 무렵, 주방현은 아삭하게 익힌 연근 한 점을 집어 절반가량 베어 물었다.입맛에 맞지 않았다.목울대를 느릿하게 움직여 간신히 삼킨 그는 남은 연근을 그릇 한쪽에 내려놓았다.그 모습을 본 군주의 손길이 멎었다. 주방현의 그릇에 남겨진 연근을 바라보던 그녀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주 공자, 제가 새로 들인 숙수가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맑은 목소리에는 제법 다정한 염려가 묻어났다.“요즘 들어 젓가락을 드는 횟수도 부쩍 줄었고, 사람까지 조금 야윈 듯하네요.”주방현은 그저 온화하게 웃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답했다.“아직 입맛에 익지 않아서 그런가 봅니다.”정시연이 만들던 음식은 짜지도 싱겁지도 않아 언제나 그의 입맛에 꼭 맞았다. 그런 음식에 오랫동안 길들여진 탓인지 다른 이가 차린 것은 아무리 귀한 재료를 썼다 해도 좀처럼 맛이 나지 않았다.군주는 턱을 살짝 치켜든 채 연근 한 점을 집어 입에 넣었다.“간이 싱거워서 입에 맞지 않나 보군요.”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은 그녀가 주방현을 똑바로 바라보았다.“짠 음식은 부두에서 배를 타거나 몸을 써서 일하는 천한 장사치들이나 먹는 것이에요. 이제 경성에 왔으니 주 공자도 그런 습관은 고치셔야지요.”그러고는 가볍게 덧붙였다.“연회에 나갔다가 고관대작들에게 웃음거리라도 되면 곤란하잖아요.”넓은 대청 안이 순식간에 싸늘한 침묵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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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화

아마 밖에서 적잖이 고생하다가 여비마저 떨어져 더는 버티지 못하고 돌아온 것이리라.그렇다면…… 이번에는 주인도 쉽사리 용서하지 않을 터였다.가랑비는 여전히 처마 끝을 두드리며 맑고 경쾌한 소리를 냈다. 강희는 서둘러 우산을 펼쳐 들고 빠른 걸음으로 주방현의 뒤를 따랐다.그때 앞서가던 주방현의 발걸음이 갑자기 멎었다.훤칠한 몸이 주씨 부저 대문 앞에 우뚝 멈춰 섰다.주방현은 멍하니 눈앞의 여인을 바라보았다. 정시연이 기름종이 우산을 받쳐 든 채 빗속에 서 있었다.그는 정시연이 집을 나간 뒤 보름 동안 이곳저곳을 떠돌며 말할 수 없는 고생을 했으리라 여겼다. 행색도 초라하기 짝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그러나 예상과 달리 정시연에게서는 초라한 기색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전보다 더욱 곱고 아름다워 보였다.가느다란 몸으로 우산을 받쳐 든 그녀가 고개를 들어 주방현을 바라보았다. 촘촘한 빗줄기가 드리운 장막 너머로 서 있는 모습은, 마치 강남의 풍경을 고스란히 품고 온 듯했다.멀리서 주방현을 발견한 정시연이 성큼 다가와 그의 팔을 움켜잡았다. 그 바람에 손에 들고 있던 기름종이 우산이 그대로 바닥에 떨어졌다.차가운 빗방울이 이마 위로 내려앉았다. 물방울은 눈썹뼈의 부드러운 선을 타고 흘러 속눈썹 끝에 맺혔다.빗물이 광대뼈를 훑고 지나가자 젖은 피부가 희미하게 빛났다. 도톰한 두 뺨은 물기를 가득 머금고 막 피어나려는 꽃봉오리처럼 탐스러웠다.이내 빗방울은 턱 끝을 타고 흘러내려 가느다란 목덜미를 지나 옷깃 속으로 스며들었다. 젖은 소매는 팔뚝에 달라붙어 가녀린 선을 고스란히 드러냈다.우산도 없이 비안개 속에 서 있는 정시연의 모습은 두 사람이 처음 만났던 날과 꼭 닮아 있었다.안개비가 자욱하던 산비탈 아래에서, 그녀가 우연히 쓰러진 그를 발견했던 바로 그날과.주방현은 넋을 잃은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가슴속에서 심장이 느릿하게 뛰는 소리만 유난히 또렷하게 들렸다.한 번. 그리고 또 한 번.그때 정시연의 쉰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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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화

정시연은 다급히 곁채로 달려갔으나 방 안은 텅 비어 있었다.어찌 된 일인지 몰라 발만 동동 구르던 그때, 이웃방에 머물던 오 어멈이 뜰로 들어왔다. 그녀는 보물이가 다른 처소로 옮겨 갔다며 새로 머무는 곳을 알려 주었다.정시연은 오 어멈이 가르쳐 준 길을 따라 별채로 향했다.도착하고 보니 새로 옮긴 곳은 예전의 곁채보다 훨씬 넓었다. 정시연은 문틀을 붙잡고 조심스럽게 안을 들여다보다가 그 자리에 멈춰 섰다.주씨 부저의 침실이 이토록 넓고 환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제야 처음 알았다.자신이 머물던 비좁고 어두운 곁채와는 무엇 하나 닮은 구석이 없었다.새로 들인 유모도 아이를 정성껏 돌보고 있었다.정시연이 문턱을 넘어 안으로 들어서자, 막 젖을 먹은 보물이가 이 유모의 품에 안겨 입가로 보글보글 거품을 내뿜고 있었다.문 앞에 망연히 서 있는 정시연을 발견한 이 유모가 잠시 멈칫했다. 이내 정시연이 누구인지 알아차리고 다정하게 웃었다.“보물이의 친어머니시지요?”이 유모는 품 안의 아이를 내려다보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보물이가 어찌나 순한지 몰라요. 저는 여태껏 이렇게 손이 안 가는 아이는 처음 봤답니다. 밤에도 울지 않고 웃기만 해요.”그 말을 들은 순간 정시연의 코끝이 찡해지며 눈시울이 붉어졌다. 몸 옆으로 늘어뜨린 손가락이 가늘게 떨렸지만, 빗물에 젖은 몸을 모두 닦기 전까지는 감히 아이를 안지 않았다.물기를 말끔히 닦은 뒤에야 정시연은 조심스럽게 보물이를 품에 받아 들었다.곧바로 아이의 옷을 들춰 몸을 구석구석 살폈다. 피부에 발진 하나 없이 깨끗한 것을 확인하고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보물이도 어머니를 알아보았다.아이는 짧고 통통한 두 팔을 힘차게 흔들며 정시연을 향해 까르르 웃었다. 아직 이 하나 돋지 않은 말간 잇몸이 환히 드러났다.이 가엾은 아이는 무엇이 그리도 좋아 늘 웃기만 하는 걸까.정시연은 보물이를 가슴 깊이 끌어안은 채 팔을 가볍게 흔들어 달랬다. 말랑하고 통통한 뺨이 젖을 찾으며 가슴께를 이리저리 파고들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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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화

그러나 다음 순간, 제 말에 정시연이 고개를 들자 주방현은 곧바로 후회했다.보물이에게 제대로 된 이름을 지어 주고 싶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군주가 있는 지금, 아이에게 주씨 성을 줄 수는 없었다.보물이를 돌볼 유모를 따로 들인 것만으로도 군주는 이미 못마땅해했다. 이름 모를 어멈의 딸에게 그가 지나치게 마음을 쓴다고 여겼기 때문이다.그런데 아이에게 주씨 성까지 붙여 준다면, 군주가 의심을 품을지도 몰랐다.정시연은 줄곧 고개를 든 채 주방현의 낯빛이 변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손끝이 희미하게 떨렸으나, 입에서 나온 목소리는 더없이 차분했다.“그래서요?”창밖에서는 빗줄기가 점점 거세지고 있었다.붉은 입술 사이로 흰 이를 드러낸 정시연의 얼굴을 바라보던 주방현은 불현듯 목울대를 움직였다.“그러니 우선은…… 보물이에게 강희의 성을 따르게 하는 게 어떻겠느냐. 강희가 양녀로 들인 아이라고 하면 될 테니.”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럽고 온화했다. 그러나 그 말을 하는 동안에도 주방현은 정시연을 바라보지 않았다. 그저 손가락으로 보물이를 어르며 말을 이었다.“걱정하지 말거라. 훗날 반드시 본래 성으로 되돌려 줄 테니.”보물이에게 강희의 성을 따르게 하겠다고?정시연은 지친 듯 두 눈을 감았다.짙은 무력감이 가슴속에서 밀려왔다. 이제는 그가 무슨 말을 하든 더는 듣고 싶지 않았다.그녀가 문득 그의 이름을 불렀다.“주방현.”그제야 주방현이 고개를 들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그는 정시연이 웃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그런데 웃음을 머금은 채 바라보던 그녀의 눈에서 이내 눈물이 굴러떨어졌다.정시연은 한없이 진지한 주방현의 눈을 마주 보았다. 목구멍 깊은 곳에서부터 시린 설움이 치밀어 올랐다.사실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경성에 들어온 뒤로 그가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늘 지금과 같은 것이 담겨 있었다.은근한 경시와 얕잡아 보는 기색.그래서 그녀의 보물이마저 어미와 다를 바 없이, 하찮고 가벼운 존재로 취급받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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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화

어멈이 머리 위에 받쳐 들었던 지우산을 거두자, 군주는 치맛자락을 살짝 들어 올리고 침방 안으로 들어섰다.눈부시게 화려한 옷차림은 별채의 소박한 살림과 조금도 어울리지 않았다.군주는 턱을 살짝 치켜든 채 방 안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이윽고 고개를 돌려 정시연의 얼굴을 바라보던 그녀는, 그 아름다운 얼굴을 확인하자 입가에 걸린 웃음을 서서히 거두었다.“정 어멈이 이미 주씨 부저를 떠났다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편이 좋았을 텐데. 그토록 요란하게 나가 놓고 이제 와 다급히 돌아오다니. 스스로 제 몸값을 떨어뜨리는 꼴로밖에는 보이지 않는군.”말 한마디 한마디가 채찍처럼 날아와 정시연을 사정없이 후려쳤다.그런데도 정시연의 마음은 기이할 만큼 고요했다.오랜 고통 끝에 무감각해진 것이 아니었다. 그저 눈앞의 모든 일이 이제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비록 자신의 처지가 바람만 불어도 휘청이는 부들가지와 같아 군주의 눈에는 한없이 보잘것없어 보일지라도, 정시연은 적어도 스스로를 양심 있는 사람이라 여겼다.화리하기 전, 모든 진실을 군주에게 밝혀 주고 싶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 끝까지 속는 일만큼은 없도록.정시연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군주와 시선을 마주했다. 눈빛은 잔잔하고 흔들림이 없었다.“저는 주방현이 정식으로 혼인 절차를 밟아 맞아들인 부인입니다. 보물이는 그의 친딸이고, 저희의 혼서도 여전히 강남 관부에 남아 있습니다.”그가 처자식을 버렸다는 사실도, 황제를 기만하고 윗사람을 속였다는 사실도 모두 말할 생각이었다.그런데 군주는 잠시 멈칫하더니, 뜻밖에도 웃음을 터뜨렸다.곧이어 날카롭게 벼린 목소리가 정시연을 향해 쏟아졌다.“부인이면 어떻다는 것이냐? 이곳은 경성이다. 본 군주가 손가락 하나만 까딱해도 너 따위는 죽을 수 있어! 네가 낳은 아이를 내세워 주 공자의 알량한 연민을 얻었으니, 이제는 본 군주에게 위세라도 부리겠다는 것이냐? 고작 계집아이 하나일 뿐이다. 너와 마찬가지로 그 목숨은 길가의 풀잎보다 못해!”정시연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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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화

그의 눈 깊은 곳에는 짙은 실망이 어려 있었다.주방현은 정시연이 바깥세상의 험난함을 몸소 겪었으니, 순순히 주씨 부저로 돌아온 뒤에는 더는 철없는 고집을 부리지 않으리라 생각했다.경성에는 발에 차일 만큼 귀인이 넘쳐났다. 눈부시게 번화한 이 경성의 영화도 실은 수많은 사람의 뼈를 쌓아 올려 이룬 것이었다.정시연은 자신을 떠나서는 이곳에서 결코 살아남을 수 없었다. 마치 자신이 군주의 비호 없이는 관직에서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는 것처럼.아무도 그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군주조차 마찬가지였다.오직 주방현과 정시연만이 같은 처지였다.그러니 정시연이 돌아오기만 하면 자신을 이해해 줄 줄 알았다.그렇기에 주방현은 정시연이 이유도 없이 집을 나간 일을 책망하지 않고 너그러이 용서해 주었다. 다정한 말로 달래고, 시종들 앞에서는 꾸짖는 일조차 삼갔다. 자신은 이만하면 그녀를 충분히 아껴 주었고, 체면 또한 부족함 없이 세워 주었다고 여겼다.그런데 정시연은 여전히 철이 없었다.제 처지를 깨닫고 돌아와 놓고도 만족할 줄 모르고, 도리어 자신에게 낯빛을 붉혔다.그동안 자신이 너무 오냐오냐하며 버릇을 잘못 들인 것이 분명했다.주방현은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눈에 남은 것은 이제 짙은 실망뿐이었다.정시연이 언제부터 이렇게 변해 버렸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군주께서 청산을 백록서원에 들이기 위해 얼마나 애쓰셨는지 알고 있느냐? 그곳에서 수학하면 청산의 앞날은 탄탄대로나 다름없다! 그래서 내가 그토록 다급하게 나갔던 것이다. 헌데 너는 또 심술을 부리며 군주께 대들었다지!”정시연은 주방현이 쏟아 내는 모진 말을 잠자코 들었다. 그러다 천천히 눈을 들어, 자신을 실망스럽게 바라보는 그의 시선을 마주했다.가슴속에서 또다시 깊은 무력감이 밀려왔다.너무도 지쳤다.주방현과 한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 온몸의 기운이 모조리 빠져나가는 듯했다.정시연은 그가 결국 이곳으로 찾아와 한바탕 화를 퍼부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시골에 살던 시절의 주방현은 언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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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화

주방현은 오랫동안 정시연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 깊은 곳에 어린 진심을 확인하자, 돌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긴 침묵이 내려앉았다.고요한 방 안에는 주방현 자신의 거친 숨소리만 들려왔다.“경성에 들어오더니 귀한 집 여인들이나 하는 짓을 배운 모양이구나. 화리를 하겠다고?”정시연의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그러나 한 자 한 자 분명한 목소리로 대답했다.“화리는 경성의 귀한 여인들만 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그녀는 잠시도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존엄을 지닐 자격이 군주에게만 있는 것도 아니고요.”그러자 주방현이 코웃음을 쳤다. 이내 그의 목소리가 돌연 사납게 높아졌다.“네가 화리서를 읽을 수나 있느냐? 제 이름 석 자는 알아보기나 해? 내가 먹여 주고 입혀 주며 은자까지 쥐여 줬건만, 너는 여전히 세상 물정을 모르고 팔자 좋은 소리나 지껄이는구나! 네가 군주라도 되는 줄 아느냐? 화리하고 나면 그 얼굴을 밑천 삼아 기루에 몸이라도 팔 셈이야?”말 한마디 한마디가 귓속을 날카롭게 파고들었다.정시연은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어 버린 채 그 자리에 굳어 섰다.비록 두 사람의 사이가 화리를 논할 만큼 돌이킬 수 없이 망가졌다 해도, 주방현이 이토록 모진 말로 자신을 짓밟으리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기루에 몸을 파는 여인이라니.수많은 말이 가슴을 틀어막아 숨을 쉴 때마다 목구멍이 쓰라렸다.심장은 둔중하게 욱신거렸다. 말로는 다 표현할 수도, 어디에도 쏟아 낼 수도 없는 고통이었다.격렬한 충격에 젖이 또다시 배어 나와 그녀의 옷섶을 흠뻑 적셨다.너른 침방 안이 삽시간에 고요해졌다.정시연은 여전히 넋이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서 있었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주방현의 목울대가 천천히 움직였다.분노를 이기지 못해 지나친 말을 내뱉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그는 정시연에게 두어 걸음 다가갔다. 그러고는 긴 팔을 뻗어 그녀를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정시연의 머리 위에 턱을 얹은 주방현이 다시 온화한 목소리로 달랬다.“……그런 뜻으로 한 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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