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시연이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배한설이 수레에서 허둥지둥 기어 내려왔다.금실로 수놓은 작은 가죽신을 신은 아이는 곧장 정시연에게 다가와, 호기심 어린 얼굴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양이랑 말을 할 줄 아는 것이냐?”정시연의 눈가에는 아직 웃음기가 남아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몸을 낮춰 아이와 눈높이를 맞추고, 새까만 눈동자를 바라보며 진지하게 대답했다.“병아리도 부화시킬 줄 알고, 새끼 낳는 개도 돌볼 줄 알아요. 산돼지를 잡는 법도 알고요. 산돼지는 어릴 때가 제일 귀여워요. 몸에 알록달록한 무늬도 있거든요.”배한설은 세상에 다시없을 기이한 이야기를 들은 듯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입을 벌렸다.“개도 사람처럼 새끼를 낳느냐?”아이는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다가와 정시연의 소매를 꼭 움켜쥐었다.“너는 어떻게 그렇게 대단한 것이냐? 나도 닭과 돼지를 키우고 싶다!”천진한 목소리를 듣는 순간, 정시연은 문득 멈칫했다.“그게 대단한 일인가요? 저도 손 놓은 지 오래되긴 했는데…….”주방현을 만난 뒤로 그녀는 너무도 많은 것을 잊고 살았다.강남 특유의 나긋한 말씨도, 고향 들녘에 끝없이 펼쳐졌던 논밭도 어느새 기억 속에서 흐려졌다. 하늘이 그토록 높고 땅이 그토록 넓다는 사실도, 마을 사람들이 입을 모아 자신을 대단하다고 칭찬했던 일마저도 어느새 까맣게 잊고 말았다.정시연은 목수 일도 제법 잘했다. 손수 엮은 그네는 튼튼하고 흔들림이 없어 아이들이 마음껏 뛰놀아도 끄떡없었다. 술을 빚는 솜씨도 좋아, 그녀가 담근 쌀술은 그윽한 향이 돌고 맛이 부드러웠다.돼지를 잡는 일이라면 마을에서도 손꼽히는 솜씨였다.칼을 쓰는 손은 빠르고 피를 빼는 솜씨는 정확했다. 돼지의 몸을 속속들이 알았기에, 단 한 순간도 더 고통받지 않도록 해 줄 수 있었다.하지만 주방현은 그런 일을 천하고 불결하다 여기며, 비천한 자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했다.경성에 온 뒤에도 그는 정시연이 강남 시골 출신이라는 사실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게 했다. 심지어 고향 말투를 쓰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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