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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dos los capítulos de 햇빛 속의 칼날: Capítulo 11 - Capítulo 20

21 Capítulos

제11화

밤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살을 에는 듯한 차가운 기운이었지만, 그의 가슴속에 타오르는 초조함과 점점 선명해지는 두려움은 식히지 못했다.별원의 문은 반쯤 닫혀 있었다.문을 거칠게 밀자 문짝이 벽에 부딪히며 묵직한 소리를 냈다.방 안에는 불이 켜져 있지 않았다. 오직 창문으로 스며든 차가운 달빛만이 고요하고 쓸쓸한 방 안을 비추고 있었다.침상은 마치 처음부터 주인이 없었던 것처럼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었고, 탁자 위에는 며칠 전 그가 사람을 시켜 보내온 진귀한 물건들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동해의 진주, 비취 머리장식, 양지옥 팔찌, 금실로 수놓은 옷... 그 귀한 물건들은 조금도 손대지 않은 채 그대로 놓여 있었다. 달빛 아래 화려한 빛을 내고 있었지만, 그 위에는 이미 얇은 먼지가 내려앉아 있었다.그녀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았다.서정호는 방 안을 몇 바퀴 돌았다.심장은 보이지 않는 손에 세게 움켜잡힌 듯 점점 조여와 그는 숨을 쉬기조차 힘들 만큼 아팠다.그 순간, 차가운 물결처럼 밀려온 공포가 순식간에 그를 집어삼켰다.아니다. 그럴 리 없다.그녀는 분명 아직 있을 것이다.그저 자신에게 화가 나서 숨어 있는 것이다. 예전처럼 숨바꼭질하자는 듯이.그는 침상으로 달려가 미친 듯이 이불을 걷어내고, 베개를 뒤집어 보았다.그때, 크지 않은 낡은 철제 상자 하나가 침상 구석에 조용히 놓여 있는 것이 보였다.그 안에는 그가 기대했던 서신도, 남겨둔 물건도 없었다.오직 한 줌의 재뿐이었다.그녀는 작은 미련 하나조차 남기지 않고 자신과 관련된 모든 것들을, 그녀가 한때 소중히 여겼던 모든 정표를, 온 마음을 다해 건넸던 마음과 함께 뜨겁고 생생했던, 어리석기까지 한 기억들까지 모조리 태워버렸다.“정시월...”서정호는 침상 곁에 무릎을 꿇고, 재가 담긴 상자를 두 손으로 받쳐 든 채 그녀의 이름을 중얼거렸다.오랫동안 외면해 왔던 가슴속 빈자리가 이제야 차가운 바람을 들이마시는 듯 온몸의 뼈마디가 시릴 만큼 아팠다.한때 눈에 담긴 모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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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화

그 후 닷새 동안 진북왕부의 사람들은 지옥에 떨어진 듯한 나날을 보냈다.서정호는 마치 미쳐버린 짐승처럼 날뛰었다.서정호는 거의 잠을 자지 않아 눈에는 섬뜩한 핏발이 가득했고, 성정은 극도로 거칠어져 있었다.게다가 조금이라도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생기면 바로 분노가 터져 나와 왕부의 모든 이들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눈치만 살폈다.하지만 정시월은 마치 바다에 떨어진 물방울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암위들은 경성을 샅샅이 뒤졌다. 가능한 곳은 모두 조사했고, 심지어 군부와 강호의 정보망까지 동원했지만 정시월의 옷자락 하나 찾지 못했다.그저 어렴풋이 알아낸 것은, 정시월이 관아를 나온 뒤 장신구를 팔아 말 한 필을 마련했고, 한 차례 서쪽 성문 부근에 모습을 드러냈다는 사실뿐이었다. 그 뒤로는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서정호의 인내와 이성이 모두 한계에 다다르려던 순간, 옥 쪽에서 소식이 전해졌다.그해 납치 사건에서 놓쳤던 도적 하나가 이웃 마을에서 범행을 저지르다 붙잡힌 것이다.도적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수년간 묻어두었던 비밀을 털어놓았다.거의 동시에, 서정호의 명으로 옥의 옛 사건을 철저히 조사하던 암위들도 두꺼운 사건 기록 사본을 가져왔다.서재 안은 촛불로 환했다.서정호는 눈앞에 펼쳐진 두 가지 물건을 바라보았다.하나는 도적이 직접 서명하고 지장을 찍은 상세한 자백서였고, 다른 하나는 형부와 대리사 관인이 찍힌 사건 기록 사본이었다.그는 천천히, 한 글자 한 글자 빠짐없이 읽었다.읽을수록 서정호의 얼굴은 점점 창백해졌다. 핏기가 모두 사라졌고, 마침내 입술마저 새하얗게 질렸다.자백서를 쥔 손가락은 힘이 들어가 심하게 떨렸고, 종이는 더는 견디지 못할 듯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냈다.기록 위의 차가운 글자들은 가장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한 줄 한 줄 서정호의 심장을 난도질했다.“죄인 정시월은 옥에 들어간 첫 달 비파골을 꿰뚫는 형벌을 받아 무공을 모두 잃었다. 형 집행 명령은 한비마마의 인장으로 내려졌으며, 담당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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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화

박해주는 떨리는 손으로 자백서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 내용을 확인하는 순간, 얼굴에서 마지막 남은 혈색마저 모조리 빠져나갔다.“아니... 아닙니다! 왕야, 제 말을 들어보십시오! 이건 모함입니다! 저 도적들이 아무 말이나 지어내 저를 끌어들이는 것입니다! 누군가 저를 해치려는 것입니다! 맞아요, 정시월입니다! 분명 저에게 앙심을 품고 사람을 시켜 저를 모함하는 것입니다!”박해주는 바닥에 엎드려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한 채 서정호의 옷자락을 붙잡으려 했다.하지만 서정호는 거칠게 발길질해 박해주를 걷어찼다.힘이 어찌나 거셌는지 박해주는 비명을 내지르며 바닥을 굴렀다.“모함이라?”서정호는 웃었다.하지만 그 웃음은 울음보다 처참한 것이, 끝없는 비참함과 자기 자신을 향한 조소가 서려 있었다.“그럼 이 사건 기록들은 무엇이냐? 이 혈서들은 무엇이냐? 이것도 정시월이 오 년 전부터 옥졸들을 매수하고, 네 유모를 매수해서 미리 써둔 뒤 너를 모함하려 한 것이냐?!”“박해주!”그는 한 걸음 내디뎌 박해주 앞으로 다가갔다.그리고 허리를 숙여 그녀의 옷깃을 움켜쥐고 그대로 들어 올렸다.핏발 선 두 눈이 박해주를 매섭게 꿰뚫었다.“내 눈을 똑바로 보고 말해라! 절벽에서 벌어진 일도 네가 꾸민 것이냐? 옥에서 시월이가 겪은 고문도 네가 시킨 것이냐? 시월이가 내게 보낸 구원의 혈서를 네가 가로채 없앤 것이냐?! 그날 추락 사건도 네가 스스로 뛰어내린 것이냐?! 말해라!!!”서정호의 분노에 찬 고함에 들보 위의 먼지마저 후두둑 떨어졌다.박해주는 서정호의 눈에 서린 섬뜩한 살기에 혼이 빠질 듯했다.결국 목구멍까지 올라왔던 모든 변명은 그대로 막혀버렸다.끝났다.증거는 이미 명백했다.서정호는 더 이상 자신을 믿지 않을 것이다.거대한 공포가 지나간 뒤, 체념에 가까운 광기가 박해주의 마음을 집어삼켰다.박해주는 갑자기 울음을 멈추더니 나직히 웃기 시작했다.차차, 그 웃음은 점점 커지고 날카로워졌다.뒤틀린 쾌감이 가득 담긴 웃음이었다.“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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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화

박해주는 호위들에게 끌려갔다. 그녀의 웃음소리와 저주는 복도 안에 한동안 메아리쳤다.서정호는 더 이상 버티지 못했다. 몸이 휘청하더니 그대로 뒤로 쓰러졌고, 끝없는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서정호는 고열에 시달리며 꼬박 사흘 동안 의식을 잃었다.어의가 왔다가 돌아가고, 다시 찾아오기를 반복했다. 얼마나 많은 약탕을 먹였는지 알 수 없었지만 들어간 만큼 토해냈다.이를 악물고 미간을 깊이 찌푸린 모습은, 도무지 벗어날 수 없는 악몽 속에 갇힌 듯했다.꿈속에는 온통 정시월뿐이었다.좋았던 모습, 나빴던 모습, 웃던 모습, 울던 모습, 생생하게 살아 있던 모습, 죽은 듯 고요했던 모습...그리고 마지막에는 차갑게 식은 재가 담긴 그 상자 앞에서 멈춰 섰다.사흘 뒤, 서정호는 가까스로 눈을 떴다.마치 혼을 빼앗긴 사람 같았고, 지옥의 불길 속에서 한 차례 태워진 듯했다.눈가는 깊게 패였고, 광대뼈는 도드라졌으며, 턱에는 푸른빛이 도는 수염이 가득했다. 한때 옥처럼 서늘했던 눈동자에는 이제 깊이를 알 수 없는 집착 어린 광기만이 남아 있었다.서정호는 더 이상 소리치지도, 분노하지도 않았다.그저 침묵한 채 손에 쥔 모든 힘을 아낌없이 끌어모았다.그리고 거대한 그물을 펼치듯 천하 곳곳으로 뻗어 나가, 정시월이라는 여인을 찾아 나섰다.단서가 하나둘 모여들었다.정시월은 경성을 떠나 북쪽으로 향했다.그곳은 정씨 가문의 본적이 있는 방향이었고, 또한... 정 노장군이 묻힌 방향이었다.그녀는 아버지 곁으로 돌아가려는 것이다.서정호는 즉시 명을 내려 행장을 준비하게 했다.서정호는 직접 정시월을 찾아 나설 생각이었다.출발하기 전, 서정호는 지하 감옥을 찾았다.박해주는 가장 깊은 곳에 갇혀 있었다.한때 여리고 온화했던 여인은 이제 머리는 헝클어지고 얼굴은 초췌했으며, 눈빛은 흐려져 예전의 모습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박해주는 서정호를 보자 먼저 움찔했다.그러나 곧 신경질적인 웃음을 터뜨렸다.“어머, 왕야께서 오셨습니까? 왕야의 보물은 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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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화

바로 그때였다.먼지를 뒤집어쓴 암위 하나가 급히 달려와 한쪽 무릎을 꿇었다.“왕야! 소식이 있습니다!”서정호는 다급히 몸을 돌렸다. 그의 눈에 순식간에 섬뜩한 빛이 번뜩였다.“말해라!”“북쪽 청석진에서 보내온 밀보입니다. 보름 전쯤, 마을에 젊은 여인이 하나 나타났는데, 생김새가 왕비마마와 칠팔 할 정도로 비슷했다고 합니다. 몸에는 상처가 있었고, 혼자 동쪽 끝 회춘당에서 약을 지어 갔다고 합니다. 다만...”암위가 잠시 머뭇거렸다.“다만 무엇이냐?!”서정호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확인해 본 결과, 그 여인은 혼자가 아니었던 듯합니다. 회춘당의 당직 의원 한 사람과 꽤... 가까운 사이로 보였다고 합니다. 그 의원은 여인을 극진히 보살폈고, 자주 여인이 머무는 곳을 드나들었다고 합니다. 두 사람의 관계가... 상당히 가까워 보였다고 합니다.”서정호의 눈빛이 순간 굳었다.그리고 그 안에 더욱 어둡고, 더욱 집요한 폭풍이 서서히 일렁였다.'가깝다고?'자신은 미쳐버릴 듯 그녀를 찾아 헤매고 있는데, 그녀는 다른 사람과 “상당히 가까운 사이”라고?'아니다. 그럴 수 없다.'서정호는 말 위에 올랐다.몸이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탓에 순간 휘청했지만, 곧 자세를 바로잡고 고삐를 힘껏 움켜쥐었다.“즉시 출발한다! 청석진으로 간다!”서정호가 말 옆구리를 걷어차자 준마는 길게 울부짖으며 북쪽을 향해 질주했다.그 뒤로는 피어오른 짙은 먼지는 마치 서정호의 마음속에서 타오르는 초조함과 곧 터져 나올,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한 용암 같았다.북쪽으로 향하는 길은 길고 험난했다.서정호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달렸다.좋은 준마 세 마리가 연이어 쓰러질 정도였다.차가운 바람과 서리가 서정호의 얼굴에 흔적을 새겼고, 비단옷에는 먼지가 내려앉았다.눈 밑에는 짙은 그늘이 드리웠지만, 오직 두 눈만은 섬뜩할 만큼 빛났다.그 안에는 거의 집착에 가까운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서정호는 역참 하나, 마을 하나를 지날 때마다, 심지어 길가의 작은 찻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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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화

“짝——!”뺨 때리는 소리가 돌연 찻집 안에 울려 퍼지자, 한가롭게 이야기를 나누던 몇몇 길손들이 놀라 고개를 돌렸다.그곳에는 줄곧 말없이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사내가 있었는대, 초췌한 얼굴 속에서도 감출 수 없는 귀한 기품이 흐르는 사내였다.그런데 서정호가 방금 자신의 뺨을 세게 내리친 것이었다.얼마나 힘껏 때렸는지 입가에는 순식간에 피가 흘러내렸다.하지만 서정호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듯, 그저 타오르는 불꽃만을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서정호의 눈에는 감당할 수 없는 고통과 후회가 가득했다.그날 밤.황량한 들판과 산길 사이, 살을 에는 듯한 찬 바람이 몰아쳤다.서정호는 홀로 모닥불 곁에 앉아 있었다.불빛은 핏발 선 서정호의 눈과 턱에 아무렇게나 자란 수염을 비추고 있었다.서정호는 품 안쪽에 숨겨두었던 작은 보자기를 꺼냈다.그 안에는 철제 상자에 남아 있던 재와, 타다 남은 향낭 조각이 들어 있었다.거칠어진 손끝이 조심스럽게 새까맣게 그을린 천 조각을 어루만졌다.차갑다.마치 마지막 순간 자신을 바라보던 그녀의 눈빛처럼.“시월아...”서정호는 텅 빈 허공을 향해 중얼거렸다.갈라지고 부서진 목소리는 차가운 바람이 스치자 금세 흩어졌다.“그때 나는... 정말 네가 감당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네 무공이... 네 무공이...”서정호는 목이 메어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몰랐다.서정호는 처음부터 아무것도 몰랐다.그저 정시월이 장군 가문의 딸이고, 무예가 뛰어난 사람이라고만 알았다.하지만 정시월의 비파골은 이미 꿰뚫렸고 무공은 모두 폐해져, 평범한 사람보다도 약한 몸이 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몰랐다.“그 생선도... 잊고 있었다... 네가 먹지 못한다는 걸... 정말 잊고 있었다...”서정호는 얼굴을 감싸 쥐었다.뜨거운 눈물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나와 얼굴에 묻은 먼지와 뒤섞였다.“일부러 그런 게 아니다... 나는 그저...”그저 무엇이었을까?정시월을 외면하는 것이 익숙했다.언제나 정시월이 자신의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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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화

그는 스물다섯, 여섯쯤 되어 보였다.곧게 뻗은 체격에 온화한 기품이 흐르고, 훤하고 깨끗한 이목구비는 마치 산속의 맑은 샘물과 숲 사이를 스치는 바람 같았다.그의 손에는 거친 도자기 그릇 하나가 들려 있었는데 그 안에서는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구진웅이었다.구진웅은 등나무 의자 곁으로 다가가 자연스럽게 몸을 낮추었다. 그리고 약그릇을 옆 작은 탁자 위에 내려놓은 뒤, 매우 조심스러운 손길로 정시월의 다친 발을 받쳐 들었다.이어 감겨 있던 깨끗한 천을 천천히 풀기 시작했다.서정호의 심장이 세차게 움찔했다.숨이 가빠졌다.그 발바닥에는 여전히 끔찍한 분홍빛 새살과 짙은 흉터가 남아 있었다.하지만 분명 극진한 보살핌을 받은 흔적이 있었다.찻집에서 길손들이 말했던 “성한 살이 하나도 없다”는 모습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나아져 있었다.구진웅은 약물에 적신 부드러운 천으로 상처 주변을 하나하나 조심스럽게 닦아냈는데, 그 손길은 마치 세상에 하나뿐인 귀한 보물을 다루는 듯했다.정시월의 미간이 아주 미세하게 찌푸려졌다.“조금만 참거라. 곧 끝난다.”구진웅은 곧바로 정시월의 불편함을 알아차리고 손길을 더욱 부드럽게 했다.목소리는 온화했고,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힘이 있었다.“이번에 구한 설련연고가 전보다 효과가 좋구나. 조금만 더 바르면 흉터도 많이 옅어지고, 걸을 때 통증도 훨씬 줄어들 것이다.”정시월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정시월의 미간이 풀렸다.그리고 눈을 떠 자신의 발을 바라보다가, 다시 구진웅을 올려다보았다.그 눈빛에는 온전한 신뢰와 평온함이 담겨 있었다.“감사합니다, 오라버니.”정시월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바람을 타고 서정호의 귀에 또렷하게 들어왔다.오라버니라는 호칭은 차가운 바늘처럼 예고 없이 서정호의 심장을 찔렀다.순간 날카롭고 끊임없는 통증이 밀려왔다.정시월은 한 번도 그런 목소리로 자신을 ‘오라버니’라고 부른 적이 없었다.정시월은 항상 서정호를 ‘왕야’라고 칭했다.그 안에는 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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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화

“아니다! 나는 동의하지 않았다! 그건 성립되지 않는단 말이다!”서정호는 다급히 정시월의 말을 끊었다. 격한 감정에 목소리가 높아졌고, 그 안에는 감출 수 없는 두려움이 묻어났다.“시월아, 내가 잘못했다! 이제 모든 걸 알았다! 박해주가 저지른 일들, 옥에서 있었던 일, 절벽에서 벌어진 일까지... 모두 내가 어리석었던 탓이다! 내가 눈이 멀었던 탓이다! 내가 너에게 죄를 지었다!”“나를 용서해 주면 안 되겠느냐? 우리 다시 시작하자. 앞으로는 너에게만 잘하겠다. 오직 너만 믿고, 너만 아껴주겠다...”서정호는 앞뒤도 맞지 않는 말을 쏟아냈다.며칠 동안 쌓여온 후회와 고통, 그리움을 조금도 숨기지 않고 모두 토해내며, 마지막 남은 한 줄기의 희망이라도 붙잡으려 했다.하지만 정시월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을 뿐이었다.감동해서가 아니었다.그저 평온한 일상을 누군가 헤집어 놓았다는 불쾌함에 가까운 반응이었다.정시월은 자신에게 다가와 팔을 붙잡으려는 서정호의 손을 바라보았다.그리고 아주 미세하게 몸을 뒤로 물렸다.마치 불쾌하고 더러운 것을 피하듯.“왕야의 마음은...”정시월은 고개를 들어 서정호의 고통과 애원으로 일렁이는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그리고 한마디 한마디 또렷하고 차갑게 말했다.“제가 감당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돌아가십시오. 그리고 왕야의 사촌 여동생을 잘 돌보십시오. 두 분이야말로 천생연분입니다.”“나는 해주에게 마음이 없다!”서정호가 낮게 울부짖었다.그 말은 마치 칼날처럼 서정호의 심장을 깊이 찌른 듯 고통이 밀려왔다.“내 마음속의 여인은... 너다! 내가 인정하지 않았을 뿐이다! 시월아, 나를 봐라... 제발 나를 봐라... 지금 내 모습이 보이지 않느냐? 나는 이 시간 동안 죽는 것보다 못한 삶을 살았다. 밤낮으로 너만 생각했고, 후회 때문에 미칠 것만 같았다! 한 번만 기회를 다오. 단 한 번만이라도... 내가 너에게 보상할 기회를 줘. 내가...”“보상이요?”정시월이 갑자기 서정호의 말을 끊었다.입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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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화

구진웅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여전히 겸손하면서도 당당한 태도를 유지했다.“구진웅이라고 하오. 이리저리 떠돌며 의술을 펼치는 의원일 뿐이오. 내가 아는 것은 이곳에서 몸을 추스르고 있는 정시월은 이제 누구에게도 구속받지 않는 몸이라는 것이오. 만약 계속 억지를 부리며 환자의 안정을 해친다면 나도 좌시하지 않겠소.”구진웅의 손끝에 든 은침이 차갑게 빛났다.“오라버니.”정시월이 갑자기 손을 뻗어 구진웅의 소매를 살며시 붙잡았다.그 모습은 완전한 신뢰와 의지가 담긴 행동이었다.정시월은 서정호를 향해 다시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마치 그는 정시월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는, 스쳐 지나가는 존재일 뿐인 것처럼.“들어갑시다.”정시월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서정호의 귀에는 또렷하게 들렸다.“상관없는 사람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상관없는 사람.짧은 한마디였다.하지만 가볍게 흩어진 그 말은 독을 바른 비수처럼 서정호의 심장에 깊숙이 박혔다.그리고 그 안을 휘저으며 피투성이 상처를 남겼다.그는 눈앞에서 정시월이 구진웅의 소매를 잡고 들어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구진웅이 조심스럽게 정시월을 부축하는 모습도 보았다.문턱을 조심하라고 낮게 일러주는 모습도 보았다.그리고 정시월이 소박한 집의 문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았다.“끼익.”얇은 나무문이 서정호의 눈앞에서 조용히 닫혔다.그 문은 서정호와 그의 모든 후회, 애원, 고통을 완전히 다른 세상으로 갈라놓았다.햇살은 여전히 따뜻했고, 작은 뜰은 여전히 고요했다.하지만 서정호는 자신이 마치 얼어붙은 설원 한가운데 서 있는 듯했다.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서정호는 낙운진의 한 허름한 객잔에 머물렀다.그리고 매일 날이 밝기도 전에 그 작은 뜰 앞을 찾아가 영혼을 잃은 석상처럼 말없이 그곳을 지켰다.해가 떠오를 때부터 해가 질 때까지.그리고 별이 가득한 밤하늘 아래까지.서정호는 보았다.정시월이 잠에서 깨어나 구진웅의 부축받으며 천천히 뜰 안을 걸으며 재활하는 모습을.아직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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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화

“왕야—!!”정시월은 그가 온 힘을 다해 밀친 탓에 비틀거리며 안전한 바위 위로 넘어졌다.무릎과 팔꿈치가 바닥에 쓸려 살갗이 벗겨졌고, 화끈거리는 통증이 밀려왔다.절벽 아래는 구름과 안개에 휩싸여 끝이 보이지 않았다.정시월은 서정호가 이미 산산이 부서져 계곡 아래로 떨어졌다고 생각했다.그 순간, 아래쪽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마른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날카로운 소리와 억눌린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정시월은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았다.서정호는 그대로 계곡 아래로 떨어진 것이 아니었다.다행히 절벽 벽면 밖으로 비스듬히 뻗어 있던 고목 하나에 걸려 있었다.하지만 그 고목은 그의 추락 충격과 무게를 견디지 못하는 듯, 위태로운 소리를 내며 뿌리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그의 몸은 허공에 매달려 있었다.등과 팔에는 날카로운 바위에 긁힌 상처가 수없이 생겼고, 온몸은 피투성이였다.서정호는 아직 살아 있지만 상황은 매우 위태로워 언제라도 아래로 떨어질 수 있었다.구진웅 역시 절벽 끝까지 달려왔다.상황을 확인한 구진웅은 표정이 무거워졌다.“시월아, 여기서 움직이지 말고 기다리거라. 바줄을 찾고 사람을 불러야겠다.”구진웅은 곧바로 결정을 내리고 마을 쪽으로 달려가려 했다.구조 과정은 손에 땀을 쥐게 했다.마을의 사냥꾼들과 장정들이 밧줄을 들고 달려와 온 힘을 다한 끝에, 중상을 입은 서정호를 절벽 아래에서 끌어올릴 수 있었다.절벽 위로 끌어올려졌을 때, 서정호는 온몸이 피로 물들어 있었다.왼쪽 다리는 골절되어 하얀 뼈가 드러났고, 갈비뼈 두 대도 부러져 있었다.몸에는 성한 곳이 거의 없었다.서정호는 이미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하지만 정신을 잃은 순간에도 그의 입술은 계속해서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미간은 굳게 찌푸려져 있었고, 마치 끝없는 악몽 속에 빠진 듯했다.“시월아... 가지 마라... 미안하다... 미안하다...”끊어질 듯한 중얼거림이 고통스러운 신음과 함께 이어졌다.구진웅은 그 자리에서 응급 처치를 했다.부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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