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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99번의 용서: Chapter 1 - Chapter 10

10 Chapters

제1화

오늘은 L그룹이 성동지구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따낸 것을 축하하는 자리였다.그리고 내가 간 수술을 마치고 퇴원한 지 사흘째 되는 날이기도 했다.그런데 이희연의 연하 비서가 샴페인 탑을 쓰러뜨리는 바람에, 술이 협력사 사장의 몸에 쏟아졌다.이때, 이희연의 첫 반응은 비서 장이천을 자신의 등 뒤로 물러나게 한 것이었다.그리고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내게 지시 아닌 지시를 했다.“유 사장님께 어서 사과드려.”나는 순간 멍해졌고 이 상황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협력사 사장도 눈살을 찌푸리며, 화난 얼굴로 장이천을 가리켰다.“이 사장님, 잘못은 비서분이 저질렀으니, 저는 비서분의 사과를 받아야겠네요.”그러나 장이천은 눈시울을 붉힌 채, 구해 달라는 듯이 이희연의 옷소매를 잡아당겼다.마치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일이라도 당한 모습이었다.이희연은 부드럽게 장이천의 손을 토닥인 뒤, 앞뒤 가리지 않고 나를 바라보았다.“뭘 멍하니 서 있어? 어서 유 사장님께 술 올려.”“한 잔으로 안 되면 두 잔, 두 잔으로 안 되면 석 잔이라도 올려. 잘못했으니 오늘 반드시 유 사장님 화를 풀어 드려야 해.”이희연은 내가 갓 퇴원한 몸이라 술을 마시면 안 된다는 사실도 잊고 있었다.아니, 어쩌면 애초에 관심조차 없었는지도 몰랐다.주위 사람들은 수군거릴 수밖에 없었다. 나를 바라보는 눈빛마다 저런 대접을 받을 사람이 아니라는 기색이 역력했다.이 자리에 있던 모두가 다 이건 내 잘못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또한 이희연이 어떻게 해서든지 장이천을 감싸고 돌 작정이라는 것도 누구나 다 알 수 있었다.나는 거절하려고 했지만, 이희연은 예상이라도 한 듯 나를 향해 입 모양으로 말했다.“화해 쿠폰.”그 시절 나와 결혼하기 위해 이희연은 99번 프러포즈를 했고, 나 역시 99 번을 거절했다.이쯤 되면 포기할 줄 알았다. 하지만 100번째가 되던 날, 이희연은 내 가족과 친구들을 전부 불러 모아놓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맹세했다.“우혁아, 나는 평생 너 하나만 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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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이희연의 손을 붙잡은 장이천의 눈에는 웃음이 가득했다.“알겠어요, 사장님. 사장님은 저한테 정말 잘해 주시네요.”‘그래, 너한테는 참 잘해 주지.’마신 술이 뒤늦게 목구멍을 자극하자, 그 얼얼함에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괜찮아.’나는 스스로에게 말했다.‘어차피 이제 두 장밖에 안 남았어.’술자리가 끝난 뒤, 나는 늘 하던 대로 조수석 문을 열려고 했다.그러나 손잡이에 손이 닿기 무섭게 찰칵하고 문이 잠기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이어 이희연은 차창을 내리고 차갑게 나를 바라보았다.“택시 타고 가. 차 세차한 지 얼마 안 됐는데, 당신 술 냄새가 진동해서 냄새 때문에 미치겠어.”이희연은 아무래도 내 몸의 술 냄새가 왜 나게 된 것인지를 잊은 듯했다. 눈에 어린 혐오감은 밤거리의 네온사인보다도 더 번쩍거렸다.평소 같았으면 나는 아마 허둥지둥 물을 마시고 울면서, 술 조금 마신 것뿐이라서 냄새도 별로 안 날 거라고 구차하게 변명했을 것이다.그게 아니라면 길 한복판에서 무너진 채, 붉어진 눈으로 왜 아까 장이천 대신 사과하라고 했냐며 따졌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조심해서 가.”이희연은 핸들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이 풀린 듯, 저도 모르게 나를 힐끗 보았다.“당신...”이희연이 막 말문을 떼는 순간, 장이천이 웃으며 나를 밀어냈다.“사장님, 저 정리 다 했어요. 우리 가요.”장이천은 이희연의 정장 재킷을 걸치고 있었고, 셔츠에 밴 술 자국에서는 코를 찌르는 알코올 냄새가 풍겼다.아까 샴페인 탑을 쓰러뜨릴 때 술에 젖은 모양이었다.하지만 이희연은 조금도 싫어하는 내색이 없었다. 직접 차 문을 열어 주는 것으로도 모자라서, 장이천이 걸친 재킷을 조심스레 여며 주기까지 했다.“밖에 추워. 감기 걸리지 말고.”그 모든 걸 마치고 나서야 내가 있다는 걸 떠올린 듯 돌아보았다. 이희연의 눈빛에 켕기는 듯한 기색이 스쳤다.“오해하지 마. 이천이 갓 졸업해서 아직 뭘 모르니까 조금 더 챙겨 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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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전화를 끊은 뒤, 나는 담담하게 컴퓨터를 껐다.“아무것도 아니야. 교수님이랑 이혼 관련된 일 얘기 좀 했어.”이혼이라는 말에 이희연의 안색이 확 변하더니 곧바로 내 앞으로 달려들었다.“이혼이라니? 당신 나랑 이혼하려고?”나는 뒤로 물러서면서 대충 얼버무렸다.“아니야. 어느 사건 때문에 그래. 교수님이 내 의견을 물어보신 거야.”이희연은 그제야 한숨을 돌리며, 손에 든 종이 가방을 내밀었다.“너 주려고 사 왔어.”종이 가방에 찍힌 로고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케이크 가게의 것이었다.결혼 전, 이희연은 나를 화나게 할 때마다 이 가게로 달려가 케이크를 사 오곤 했다.워낙 유명한 가게라서 갈 때마다 두 시간씩 줄을 서야 했다.그런데도 이희연은 나를 달래겠다고, 비가 오든 바람이 불든 내가 먹고 싶다는 말 한마디면 직접 달려가서 줄을 섰다.가끔은 그 모습이 안쓰러워서 심부름 대행이라도 부르라고 하면 이희연은 이렇게 말했다.“여보, 괜찮아. 당신을 위해서라면 난 뭐든지 기꺼이 할 수 있어.”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졌고, 나도 모르게 환하게 웃으며 종이 가방을 받아 열었다.“아직 기억하고 있을 줄은...”“이게 뭐야?”나는 충격에 휩싸인 채 이희연을 바라보았다. 마음속에서는 불길한 예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가방 안에 든 것은 내가 생각한 케이크가 아니라 술 냄새가 밴 옷 두 벌이었다.하나는 이희연의 정장 재킷, 다른 하나는 장이천이 오늘 밤 입었던 셔츠였다.내 추궁에 이희연은 드물게 조금 멋쩍은 기색을 보였다.“장 비서 옷이 더러워졌잖아. 어차피 당신은 집안일 하는 게 익숙하니까, 한 벌 빠나 두 벌 빠나 그게 그거다 싶어서 그냥 다 가져왔어.”말을 마친 이희연은 또 무슨 생각이 났는지, 이내 당당해졌다.“정 그러면 화해 쿠폰 한 장 더 쓰지 뭐. 어차피 아직 잔뜩 남았잖아. 당신도 그렇게 속 좁게 굴 거 없어.”하려던 모든 말이 그 한마디에 목구멍에서 콱 막혀 버리면서, 확실하게 말해 주고 싶었다.‘이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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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나는 흠칫 굳어졌다가 나도 모르게 내 손을 내려다보았다.오랜 시간 집안일을 한 탓에 손은 확실히 많이 거칠어져 있었다. 그러니 이희연의 눈에 차지 않는 것도 당연했다.더는 듣고 싶지 않아서, 나는 조금 볼썽사나운 꼴로 화장실로 도망쳤다.10분 뒤, 이희연이 문을 두드렸다.“여보, 회사에 일이 생겨서 잠깐 다녀와야 하니까 먼저 자.”“응.”난 대충 알겠다고 대답했다.그리고 이희연이 막 문을 나서려는 순간, 내가 불쑥 입을 열었다.“당신 안 돌아올 거면 화해 쿠폰 한 장 쓸래?”이희연을 바라보는 내 눈가에는 미처 닦아 내지 못한 물기가 아직 남아 있었다.이희연은 발걸음을 멈추더니 곧바로 몸을 돌렸다.“그래.”이희연은 나를 향해 웃어 보였는데 한결 가벼워진 표정이었다.“걱정하지 마. 12시 전에는 꼭 들어올 테니까, 화해 쿠폰 쓸 일은 없을 거야.”5년 전과 크게 다르지 않은 그 얼굴을 바라보며, 나는 쓰라린 마음을 억누르고 가볍게 웃었다.“그래, 기다릴게.”12시까지 세 시간이었다.나는 웃돈을 얹어 심부름 대행을 부르고, 케이크 하나를 사다 달라고 부탁했다.곧 이희연의 비서가 SNS에 글을 올렸다. 아직도 야근 중이라면서, 회사에 자기 혼자만 남았다는 푸념이었다.그러자 이희연에게서 메시지가 왔다.[방금 회사 도착했어. 금방 갈게.]12시까지 두 시간이 남았을 때, 앨범을 정리하다가 이희연이 나에게 프러포즈하던 사진 한 장을 발견했다.갑자기 센티해진 나는 SNS에 글을 하나 올렸다.[어느새 우리 벌써 5년이네.]이희연은 금세 답을 달았다.[5년뿐이겠어?]동시에 야경 사진 한 장도 보내왔다.[오늘 밤하늘이 참 예뻐서 네 생각이 났어.]그러나 나는 답하지 않았다.사진 배경에 찍힌 고층 빌딩이 회사 근처가 아니라 시내 한복판에 있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거기에는 이 도시에서 가장 로맨틱한 분위기라는 연인들의 레스토랑이 있었다.장이천도 참지 못하고 나에게만 보이도록 설정한 게시물을 SNS에 올렸다.[첫사랑이랑 결혼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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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나는 휴대폰의 진동을 무시하고 그대로 전원을 꺼 버렸다.그렇게 나와 이희연의 5년간의 결혼 생활은 완전히 끝을 향해 치달았다.호텔에서 내 메시지를 본 이희연은 미친 듯이 답장을 보내기 시작했다.[이혼? 장난하지 마. 그 많은 화해 쿠폰이 어떻게 벌써 다 떨어져?][내가 보낸 선물이 마음에 안 들어? 그럼 다시 골라 줄까?][여보, 전화 받아. 우리 차분하게 얘기 좀 하자.][왜 전원을 껐어? 진짜 화났어?]이희연은 내가 자신을 상대해 주지 않으리라는 걸 끝내 믿지 못했다. 마치 포기를 모르는 사람처럼 몇 번이고 전화를 걸었다.39번째 차가운 안내음을 듣고 나서야 이희연은 마침내 당황하기 시작했다.“그럴 리 없어. 그럴 리가 없어. 분명 나올 때까지만 해도 아무렇지 않았는데...”이희연의 머릿속에 화해 쿠폰 이야기를 꺼내던 남편의 모습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토록 담담하던 모습, 담담하다 못해 마치 이미 마음이 떠나 버린 사람 같던 남편의 모습 말이다.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이희연은 재빨리 옷을 집어 들어 몸에 걸쳤다.그러나 장이천이 이희연의 목에 팔을 감으면서, 응석을 부리듯 품속으로 파고들었다.“사장님, 오늘은 밤새 저랑 같이 있어 주기로 했잖아요.”이희연은 다급하게 장이천을 밀쳐 내고는 해명도 한마디 없이 황급히 뛰쳐나갔다.오는 길 내내 이희연은 계속 내게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이고 반복해서 전화를 걸었지만, 나는 단 한 번도 받지 않았다.집에 들어선 순간, 걸음이 너무 급했던 탓에 이희연은 바닥에 흩어진 깨진 유리를 밟고 말았다.유리가 바닥에 쓸리며 날카로운 소리를 내자, 그제서야 이희연은 발 밑의 물건이 뭔지 알아차렸다.바로 우리의 결혼사진이었다.바닥 가득한 유리 조각이 사진 속 두 사람의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잔뜩 긁어 놓았다. 산산조각이 난 모습이 박살 난 우리의 결혼생활과 꼭 닮은 모습이었다.이희연은 천천히 몸을 숙여서 바닥에 쓰러진 결혼사진을 주운 뒤, 그 위에 붙은 유리 부스러기를 조심스레 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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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그리고 다시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벽면 가득한 진열장 안에는 이희연이 내게 해 준 선물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니, 완전히 똑같은 손목시계 3세트가 진열장 한가운데에 나란히 놓여 있었다.그중 한 세트의 영수증 날짜는 바로 어제였다.이희연의 머릿속에 문득 어제 비서에게 보낸 A 브랜드의 ‘연인의 다리’ 시계가 떠올랐다.장이천의 야윈 몸을 본 순간, 이희연은 곧바로 사람을 프랑스로 보내서 주문 제작을 맡겼다.그리고 그날 밤 바로 남자의 눈앞에 대령시켰다.값어치로 보나 정성으로 보나, 눈앞의 진열장 하나를 가득 채운 물건들을 아득히 뛰어넘는 것이었다.이 순간, 이희연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언제부터였을까? 남편을 향한 유일했던 사랑이 똑같은 것만 되풀이하는 값싼 성의 표시로 변해 버린 게...’그날 밤, 이희연은 거실에 앉아 술장에 있던 술을 모조리 비웠지만 원하는 답은 끝내 찾지 못했다.이희연이 회사에 막 모습을 드러내자 장이천이 뒤따라 들어왔다.“사장님, 어제 그 계약서예요.”서류를 책상에 내려놓은 장이천은, 익숙한 걸음으로 이희연의 곁으로 다가가서 한 손을 어깨에 얹었다.예전 같았으면 두 사람 사이에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은근한 시그널이었다.그런데 지금 이희연은 문득 어딘가 불편함을 느꼈다.이희연은 곧 몸을 똑바로 세우고 앉아서 서류를 펼쳤다. 하지만 한 페이지를 보기도 전에 곧바로 미간을 찌푸렸다.가장 기초적인 내용조차 두서없는 말만 잔뜩 늘어놓았고, 전문성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다.회사를 파산까지 몰고 갈 수도 있는 위약 조항들은 말할 것도 없이 그야말로 허점투성이였다.예전에는 계약서를 이희연에게 넘기기 전에, 내가 서류 하나하나를 세 번씩 꼼꼼히 검토하며 회사의 이익을 해칠 만한 위험을 전부 걸러 냈다.그런데 지금 이 계약서는...이희연은 서류를 책상에 거칠게 내던지며, 얼음장 같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이 서류 누가 만든 거야? 어떻게 이런 기본적인 업무 능력조차 없을 수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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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마음속으로 끊임없이 자신을 다독여 보았지만, 여전히 비어 있는 내 자리를 볼 때마다 이희연은 초조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업무를 처리하는 손길마저 건성이 되어 갔다.텅 빈 내 자리를 바라볼수록 이희연의 마음속 불안은 점점 더 무거워졌다.결국 참지 못하고 인사팀 본부장을 불러들였다.“사장님, 무슨 업무 지시라도 있으신가요?”“김우혁 본부장 오늘 휴가 냈어요?”이희연은 눈앞의 서류를 내려다보면서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입을 열었다.인사팀 본부장은 잠시 어리둥절해하더니 의아한 얼굴로 이희연을 바라보았다.“김우혁 본부장님은 퇴사하셨는데요?”“뭐라고요?”서류에 사인하던 이희연의 손이 멈칫하면서, 새하얀 종이가 펜 끝에 찢겨 나갔다.“언제 일이죠? 누가 승인했어요? 왜 나는 모르고 있는 거죠?”인사팀 본부장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입을 열었다.“어제 저녁에 사직서를 내셨고, 오늘 아침에 사장님이 직접 승인을 누르셨잖아요.”그 말에 이희연은 벼락이라도 맞은 사람처럼 그 자리에서 굳어 버렸다.곧이어 컴퓨터를 열고 메일함을 단숨에 훑어 내리다가, 떨리는 손으로 단 한 통뿐인 사직서를 클릭했다.그리고 마침내 이름란의 김우혁 석 자를 확인한 순간, 마음속에서 거대한 공포심이 소용돌이 치면서 지나갔다.“지금 당장 이 사직서 철회해요! 당장!”인사팀 본부장님은 이마의 식은땀을 훔치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사장님, 절차가 이미 다 끝났습니다.”사무실 밖에서 장이천이 서류 한 장을 들고 들어왔다. 눈빛에는 방금 전의 억울함 따위는 흔적도 없었고, 오히려 어딘가 즐거운 기색마저 감도는 것 같았다.“사장님, 팩스 왔어요.”종이 위에 큼지막하게 적힌 ‘이혼 협의서' 글자를 훑은 이희연은 힘없이 의자에 도로 주저앉았다.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정신을 추스른 이희연은 휴대폰을 꺼내서 친한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목소리는 잔뜩 잠겨서 갈라졌다.“부탁 하나만 하자. 이 팩스 보낸 ID, 어디서 발신된 건지 좀 알아봐 줘.”전화를 끊은 이희연은 퇴근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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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국경을 넘는 사업조차, 이희연은 가장 신임하는 내게 미리 사인해 둔 계약서를 들려 보내서 처리하게 할 정도였다.[대체 무슨 일인데? 갑자기 외국엔 왜 가려고?]전화기 너머에서 이유를 캐묻자, 이희연은 잠시 침묵하다가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남편이 떠났어.”[어?]전화기 너머는 적잖이 놀란 눈치였지만, 뜻밖에도 더 캐묻지도 않았다.“하나만 물어보자. 지난 3년 동안, 너희도 다들 내가 비서랑 선을 넘었다고 생각해? 내가 남편한테 못 할 짓을 한다고 생각한 적 있어?”그 말에 전화기 너머의 친구는 침묵에 잠겼다. 침묵은 때로 가장 정확한 대답이기도 했다.“알겠어.”이희연은 쓰디쓴 얼굴로 입을 열었다.“내가 잘못했어. 장이천이 나타난 뒤로 나도 모르게 걔한테 끌렸어.”“걔가 가끔은 어릴 때 남편 모습 같았거든. 밝고 환해서...”“그래도 두 사람을 헷갈리면 안 되는 거였는데.”“지난 2년 동안, 남편이 준 99번의 기회를 내가 다 써 버렸어.”“난 헤어질 생각 같은 건 단 한 번도 해 본 적 없어. 그런데 이제는 그 사람이 나를 원하지 않아.”끝에 이르자 이희연의 목소리는 낮게 잠겼다. 목이 메이면서 잔뜩 억누른 흐느낌이 배어 나왔다.전화기 너머 친구는 한참을 침묵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그래, 알겠어.]전화가 끊어지고, 문자 하나가 휴대폰에 들어왔다.[팩스는 여기서 발신된 거야. 직접 가서 물어보면 소식 정도는 들을 수 있을 거야.]10시간의 비행 끝에, 나는 무사히 프랑스에 도착했다.비행기가 도착하자, 교수님이 로펌 동료들을 데리고 마중을 나와서 나를 뜨겁게 환영해 주었다.파리에 온 것은 이번이 세 번째였다.예전에는 출장 때문에 왔던 터라, 계약서에 사인을 마친 그날로 곧장 돌아오라는 호출을 받곤 했다.이제는 일에 쫓길 압박이 없으니 마음이 그렇게 홀가분할 수가 없었다.오늘부터 나는 오직 나 자신을 위해 살면 되니까.그리고 이희연은 영원히 이곳을 찾아내지 못할 테니까.“우혁아, 네가 돌아와서 정말 기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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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지난 2년 동안 내가 장이천한테 지나치게 마음을 쏟은 건, 걔한테서 9년 전의 당신 모습을 봤기 때문이야. 그래서 내가 그 사람을 좋아하는 거라고 착각했어.”“근데 당신이 떠나고 나서야 알았어. 좋아한다는 건 그저 허상일 뿐이었다는 걸. 내가 사랑한 사람은 처음부터 끝까지 당신이었어.”나는 조소를 머금은 채 이희연을 바라보면서, 속에서부터 올라오는 메스꺼움을 억지로 누르면서 참았다.이희연의 자기 도취적인 애정 고백은 계속되었다.“이 몇 년 동안 당신이 어떻게 해 왔는지 내가 전부 다 지켜봤어. 어쩌면 당신이 일에서 보여 준 능력이 나한테는 부담으로 다가왔는지도 몰라.”“당신이 변했다고 느꼈어. 지나치게 이성적이고, 강압적이라서 꼭 차갑고 무정한 기계 같았어.”“그래서 장이천이 나타났을 때 나도 모르게 다가가고 싶었어. 그 사람한테서 처음 만났을 때의 당신을 다시 본 것 같았으니까.”“여보, 난 이혼하기 싫어. 당신을 잃는 건 더더욱 싫어.”“당신을 위해서 내가 공포까지 이겨 내고 비행기를 타고 온 걸 봐서라도, 한 번만 용서해 주면 안 될까?”말을 하면서 이희연은 하염없이 눈물을 쏟았다. 그러나 내 마음은 한겨울처럼 찬바람이 쌩쌩 불기만 했다.‘이런 사람이 내가 사랑했던 여자라니.’이미 마음은 다른 사람에게 주고도, 여전히 자신이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려고 했다.심지어 불륜을 저지른 원인을 나에게 돌리려고까지 했다.내가 강압적이고 이성적이라서, 그래서 내가 변했다고 말했다.내가 부담을 느끼게 해서 그래서 장이천을 좋아하게 되었다는, 이런 같잖은 말까지 들먹이면서.한때 하늘 끝까지 치켜세우던 내 장점들이, 이제는 이희연이 어쩔 수 없이 불륜을 저지르게 된 원인이 되어 있었다.‘정말 우습기 짝이 없네.’“잘못은 잘못이야. 잘못을 저질렀으면 그 대가를 감당할 용기도 있어야지.”“사과 한마디로 용서가 된다면, 이 세상에 법은 왜 있고 경찰은 왜 필요하겠어?”“이희연, 우리는 이미 끝났어.”말을 마친 나는 이희연을 지나쳐서 로펌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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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일에 지칠 때면 가끔 리구리아 주의 어촌 마을에 가서 일주일씩 머물다 오기도 했다.1년이 지나자 나는 로펌의 파트너 변호사가 되는 데 성공했고, 커리어를 착실하게 쌓아 올렸다.모든 것이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이따금 건물 아래에서 이희연의 그 슬픈 표정을 마주치고, 재수가 없다고 느끼는 것만 빼면 말이다.헤어져 지낸 1년 동안, 이희연은 99부의 이혼 협의서를 받고도 끝내 사인하려 하지 않았다.그 옛날 물불 안 가리고 나를 쫓아다니던 그 뻔뻔한 용기를 다시 꺼내 들었다. 내 동정심을 자극하고, 그렇게 해서 다시 합치자는 승낙을 받아 낼 셈인 듯했다.처음에는 내 마음에도 약간 파문이 일긴 했다.하지만 동료가 전해온 소식을 본 뒤, 나는 그 빌어먹을 동정심을 확실하게 눌러 꺼 버렸다.이희연은 내 부모님을 찾아가 모든 일을 낱낱이 털어놓으며, 눈물·콧물로 자신의 후회를 쏟아 냈다.다만 이희연이 잊은 것이 있었다. 자식의 성격은 부모를 닮는 법이라는 것을.‘내 눈에 모래 한 톨도 못 들어가는데, 하물며 감히 내 부모님 눈에 모래를 뿌리려 들다니.’이야기를 다 들은 어머니는 곧바로 이희연을 내쫓았다. 그리고 곧바로 내게 전화를 걸어서 이혼 결정을 지지해 주었다.불안하게 흔들리던 내 마음은 그렇게 완전히 굳어졌다.그날 이후, 회사 건물 아래에서 이희연의 모습은 두 번 다시 보이지 않았다.그리고 2년 뒤, 나는 국내 사건 하나를 맡게 되었다.별거 2년이 지나 이혼이 이미 성립되었다는 걸 확인한 뒤, 나는 마침내 귀국행 비행기에 올랐다.비행기가 착륙했을 때, 부모님은 밝고 자신감 넘치는 내 모습을 보고 비로소 졸이던 마음을 내려놓았다.“그동안 지민이가 매일 네 사진이랑 영상을 보내 준 덕분에, 우리도 마음 놓고 지냈지.”나는 고개를 돌려 뒤를 보면서, 입가에는 조용히 미소를 머금었다.“선배, 타인의 사생활을 침해하면 어떻게 처리해야 하죠?”코끝을 만지작거리는 신지민의 귓불은 피가 맺힐 듯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특별한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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