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mua Bab 계약연애의 독소조항: Bab 11 - Bab 19

19 Bab

제11화. 친구였던 기억들

그날 밤, 서율은 거실 테이블 위에 푸른색 우산 사진을 띄워놓고 있었다.중학교 입학식 날 친구가 찍어준 오래된 사진이었다. 갑작스러운 소나기 속에서 도현은 우산을 거의 서율 쪽으로 기울이고 있었고, 자기 교복 어깨는 절반이나 젖어 있었다.그때는 단순히 무뚝뚝한 친절이라고 생각했다.대학 공모전 준비로 사흘 밤을 새웠을 때 책상 위에 놓인 캔커피와 초콜릿, 첫 회사 면접 날 새벽에 도착한 ‘평소처럼만 해’라는 메시지, 소개팅 전날마다 이상하게 생기던 도현의 급한 용무까지. 기억을 되짚을수록 진심과 의도가 한 장면 안에서 엉켰다.서율은 사진을 확대했다가 줄였다.우산을 씌워준 마음까지 덫이었을까. 아니면 좋아했기 때문에 다정했고, 좋아했기 때문에 선을 넘었을까. 어느 쪽도 마음 편한 답은 아니었다.“그 사진 아직도 가지고 있었네.”도현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서율은 놀라지 않았다. 휴대전화를 테이블에 내려놓고 소파 맞은편을 가리켰다.“앉아. 물어볼 게 있어.”도현은 셔츠 소매를 접은 채 맞은편에 앉았다. 평소라면 먼저 결론을 예측했을 눈이 오늘은 서율의 입만 기다렸다.“우산 씌워준 건 진짜였어?”“진짜였어.”“무슨 뜻으로?”“네가 감기 걸릴까 봐. 그리고 같이 걷고 싶어서.”“공모전 때 커피 놓고 간 건?”“네가 또 아침을 거를 것 같아서.”“소개팅 날마다 연락한 건?”도현의 답이 처음으로 늦었다.“그건 방해하려고.”서율은 짧게 웃었다. 기쁘지 않은 웃음이었다.“어디까지가 친구였는지 묻고 싶은데, 네 답을 들을수록 더 모르겠어.”도현이 손을 맞잡았다.“내 행동은 친구였을지 몰라도 이유는 아니었어.”“그 말을 멋있게 만들지 마.”서율이 바로 잘랐다.“나한테 잘해준 기억을 네 집착의 증거로 쓰지 말라고. 내가 그때 행복했던 것까지 빼앗기는 기분이니까.”도현의 시선이 내려갔다.“미안해.”“사과 한 번으로 정리하려고도 하지 마.”“정리하지 않을게.”서율은 화면을 다시 켰다. 사진 속 열네 살 도현은 지금보다 훨씬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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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화. 와인 한 잔의 빈틈

주말 저녁, 펜트하우스 거실 테이블에는 도현이 꺼내둔 레드 와인과 크리스털 잔 두 개가 놓여 있었다. 서율은 첫 잔을 너무 빨리 비웠고, 도현이 말리기 전에 두 번째 잔까지 절반쯤 마셨다.목 안이 따뜻해지자 하루 종일 눌러둔 질문들이 더 선명해졌다. 도현은 멈추라는 말을 듣고 멈췄고, 과거의 개입은 숨기지 않겠다고 했다. 그런데 계약서는 여전히 금고 안에 있었고, 두 사람은 같은 집에서 서로의 다음 행동만 살피고 있었다.“그렇게 빈속에 급하게 마시면 금방 취할 텐데.”샤워를 마친 도현이 검은 린넨 셔츠 차림으로 맞은편에 앉았다. 젖은 머리칼 끝에서 물이 한 방울씩 떨어졌다. 그는 서율의 잔보다 얼굴부터 살폈다.“취하기라도 해야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견딜 것 같아서 그래. 너한테 숨 막히게 감시당하는 이 비참한 현실을!”서율이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와인 잔을 쥔 채 날카롭게 쏘아붙였다.술기운이 오른 서율의 뺨이 붉었다. 셔츠 단추 하나가 느슨해진 것도 모르고 잔을 내려놓다 손끝이 미끄러졌다. 와인 한 방울이 입술 끝에서 턱선을 타고 쇄골 위로 떨어졌다.‘뚝-’붉은 점 하나가 흰 피부 위에서 번졌다. 도현의 시선이 그 자리에 멎었다. 잔을 쥔 손가락도, 호흡도 함께 멈춘 듯했다.그는 서율의 손에서 잔을 받아 테이블 멀리 내려놓았다. 서두른 동작이었지만 유리가 부딪치지는 않았다.“도, 도현아……?”서율이 놀라 뒤로 물러서자, 도현이 그녀의 양어깨를 붙잡아 소파 등받이에 기대게 했다.가죽 소파가 깊게 꺼지고 도현의 그림자가 서율 위로 내려앉았다.“네가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니라는 건 아는데, 지금은 침착하기가 어렵다.”도현의 뜨거운 숨결이 입술 가까이 닿았다. 그가 쇄골 위 와인 자국으로 고개를 내리자 서율이 가슴을 밀었다.“하지 마.”도현은 즉시 멈췄다. 양어깨를 잡았던 손도 놓고 한 걸음 물러섰다.“정말 싫어?”서율은 답하지 못했다. 싫다는 말은 이미 했는데, 막상 그가 떨어지자 남겨진 거리가 이상하게 차갑게 느껴졌다.“무서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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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화. 맞선남의 집착

월요일 오전, 루미나의 대회의실에서는 해외 생활가전 브랜드의 리브랜딩 최종 제안이 한창이었다.서율은 전면 스크린 앞에 서서 마지막 시안을 넘겼다. 주말 내내 머릿속을 헤집던 도현의 입맞춤과 계약 조항은 회의실 문밖에 밀어두었다. 적어도 일할 때만큼은 누구의 딸도, 누구의 연인도 아닌 한서율 팀장이었다.“제품의 기능을 설명하는 데서 끝내지 않고, 사용자의 하루를 바꾸는 장면으로 연결했습니다. 본국 캠페인과 국내 론칭을 같은 언어로 묶을 수 있는 안입니다.”바이어가 고개를 끄덕이려던 순간, 테이블 위 휴대전화가 짧게 진동했다.[1층 보안실입니다. 이 이사라는 분이 팀장님을 찾으며 소란을 피우고 있습니다. 경찰 신고 전 확인 부탁드립니다.]서율의 손끝이 굳었다. 차단한 번호 대신 회사로 직접 찾아온 모양이었다.“잠시 쉬었다가 질의응답 이어가겠습니다.”바이어 측 실무자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물었지만 서율은 표정을 흐트러뜨리지 않았다.“개인적인 방문객 문제입니다. 제 팀이 시안 설명을 이어갈 테니 검토 부탁드립니다.”팀원에게 레이저 포인터를 넘기고 회의실 문을 닫는 순간에야 손바닥에 식은땀이 밴 것을 알았다. 그래도 자기 회사 로비를 피해 다닐 생각은 없었다.침착하게 회의를 정리한 서율은 본부장에게 진행을 맡기고 로비로 내려갔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기 전부터 고성이 들렸다.“한서율 나오라고 해! 차도현 그 자식이 시킨 거지? 감히 내 연락을 전부 막아?”이 이사는 술 냄새를 풍기며 경비원 둘 사이에서 몸부림치고 있었다. 넥타이는 반쯤 풀려 있었고 눈은 충혈돼 있었다. 로비에 모인 직원들이 휴대전화를 들자 그는 손가락질부터 했다.“다 꺼! 찍는 놈은 가만 안 둬.”서율은 사람들 앞에서 등을 굽히지 않았다.“이 이사님. 여기는 제 직장입니다. 지금 나가세요. 더 소란을 피우면 업무방해와 스토킹으로 신고하겠습니다.”“스토킹?”그가 비웃으며 성큼 다가왔다.“네 집안이 우리 돈으로 연명하는 주제에 어디서 큰소리야? 차도현이 뒤에 있으니까 세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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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화. 변호사의 잔혹함

경찰이 이 이사의 팔에 수갑을 채우는 동안에도 그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었다.“내가 누군지 알고 이래? 우리 대일물산이 세륜에 맡긴 사건만 몇 개인데!”도현은 바닥에 떨어진 서류를 한 장씩 주워 봉투에 넣었다. 동작은 느긋했지만, 그가 읽어 내려가는 문장은 칼날처럼 정확했다.“대일물산의 여러 물류 자회사를 이용한 허위 매입, 해외 페이퍼컴퍼니로 빠져나간 420억 원, 임원 명의로 감춘 차명계좌. 세륜이 맡았던 민사 사건에서는 이해충돌 통지와 함께 사임했습니다. 그 뒤 외부 제보 자료와 공개된 회계자료를 별도로 검토해 한 달 전 수사기관에 넘겼죠.”이 이사의 안색이 창백해졌다.“헛소리하지 마. 증거가 어디 있어?”“당신이 지난주 술자리에서 전무에게 보낸 음성 파일에 대부분 들어 있더군요. 나머지는 내부 제보자가 제출했고.”도현이 휴대전화 화면을 돌려 보였다. 뉴스 속보에는 대일물산 본사와 대표 자택에 대한 동시 압수수색이 시작됐다는 문구가 떠 있었다.“오늘 오전에 영장이 집행됐습니다. 당신 아버지는 참고인이 아니라 피의자 신분이고, 출국금지 조치도 끝났습니다.”“네가…… 우리 회사를 노렸어?”“회사가 아니라 범죄를 겨냥했습니다.”도현은 안경을 올려 쓰며 이 이사를 똑바로 바라봤다.“그리고 한서율 팀장에게 보낸 협박은 별도입니다. 합의 여부는 피해자가 결정합니다. 당신은 직접 연락하지 마십시오. 접근금지 조치도 오늘 안으로 신청할 수 있게 준비하겠습니다.”경찰이 이 이사를 끌고 가자 로비를 채우던 직원들이 길을 비켰다. 그가 마지막까지 고함을 질렀지만 유리문이 닫히자 소리는 단숨에 잘렸다.경찰이 이 이사를 끌고 간 뒤에야 서율은 굳었던 어깨를 내렸다. 손목에는 손가락 자국이 붉게 남아 있었다. 도현이 손을 뻗다가 멈췄다.“봐도 돼?”서율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손목을 조심스럽게 받쳤다. 방금 전 이 이사의 관절을 꺾던 손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힘이 얕았다.“부었어. 병원부터 가자.”“회의 중이야. 내가 빠지면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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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화. 비밀의 서재

병원에서 단순 타박상 진단을 받은 뒤에도 서율의 의심은 가라앉지 않았다.펜트하우스로 돌아오자 도현은 대일물산 사건과 관련한 긴급 화상 회의에 들어갔다. 서재 안쪽 문이 닫히고 변호사들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율은 거실 소파에 앉아 냉찜질 팩을 손목에 댄 채 오늘 일을 되짚었다.한 달 전 접수된 고발장.자신이 도움을 청하기 전부터 완성돼 있던 계약서.게스트룸에서 일부러 치운 침대와 자신의 치수에 맞춰 준비된 옷.우연이라 부르기에는 방향이 너무 정확했다.서율은 냉찜질 팩을 내려놓고 서재 앞으로 갔다. 평소 생체 인식으로 잠겨 있던 문이 오늘은 완전히 닫히지 않은 채 손가락 하나가 들어갈 만큼 벌어져 있었다. 화상 회의 때문에 급히 들어가며 잠금을 놓친 듯했다.들어가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과 확인해야 한다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서율은 결국 문을 밀었다.은은한 원목 향이 밴 서재는 도현답게 빈틈없이 정리돼 있었다. 사건별로 분류된 바인더, 날짜순으로 정렬된 메모, 잠금 표시가 붙은 서랍. 책상 위에는 대일물산 압수수색 진행표가 펼쳐져 있었다.서율은 다른 사건 서류에는 손대지 않았다. 시선이 멈춘 곳은 책장 가장 아래쪽, 검은색 가죽 바인더였다.[PROJECT : HAN SEO-YUL]자신의 이름이 영문으로 새겨져 있었다. 손목의 통증도 잊은 채 바인더를 꺼냈다. 첫 장에는 한성엔지니어링의 채무 구조와 부모의 개인 보증 내역이 도표로 정리돼 있었다. 다음 장에는 루미나의 프로젝트 일정, 서율이 자주 이용하는 출퇴근 동선, 부모가 접촉한 맞선 후보들의 신상까지 이어졌다.그중 이 이사의 이름에는 붉은 표시가 붙어 있었다.옆에는 월별 갱신 기록이 적혀 있었다. 서율이 부모와 통화한 날, 이 이사의 비서가 호텔을 예약한 날, 도현이 처음 계약서 문구를 손본 날까지 날짜가 촘촘하게 이어졌다. 누군가의 사건 기록을 보는 것처럼 건조한 표였다. 그런데 기록 대상은 자신의 하루였다.[대일물산 장남. 충동성 높음. 부친의 비자금 구조 접근 가능.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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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화. 설계된 덫

서율은 도현의 얼굴에서 농담이나 과장을 찾으려 했다. 아무것도 없었다.“얼마나 했어?”목소리가 뜻대로 나오지 않았다. 서율은 숨을 한 번 고르고 다시 물었다.“어디까지 네가 만든 일이야?”도현은 바닥에 떨어진 서류를 줍지 않았다.“네 아버지 회사는 이미 부실했어. 빚을 만든 건 내가 아니야. 하지만 채권자들이 상환 위험을 알아차리게 자료를 흘렸고, 자금 회수 시점을 앞당겼어. 위기를 네 앞까지 끌어온 건 나야.”“막을 수 있었는데 일부러?”“그래.”“대일물산은?”“이 이사 쪽에 한 대표가 혼담을 찾고 있다는 정보를 전달했어. 그 집안의 비리를 파고들 명분이 필요했고, 네 부모가 가장 강하게 밀어붙일 상대라는 것도 알았으니까.”서율의 뺨이 하얗게 질렸다.“그 사람이 내 앞에서 무슨 짓을 할지도 알았어?”도현의 턱이 굳었다.“오만하고 폭력적인 인간이라는 건 알았어. 오늘처럼 직접 손을 댈 거라고는 판단하지 못했다. 그건 내 오판이야.”“오판?”서율이 헛웃음을 뱉었다.“나는 네 계획표의 변수였어? 다치지 않을 거라고 계산했는데 계산이 틀린 거야?”“서율아.”“내 이름 부르지 마.”그녀가 손을 들었다. 뺨을 때리려던 손목을 도현이 반사적으로 붙잡았다. 서율의 눈빛이 굳는 순간 그는 곧바로 손을 놓았다.“미안해.”“지금 그 말이 나와?”서율은 잡혔던 손목을 가슴 앞으로 끌어안았다.“넌 내가 가장 믿는 사람이었어. 그래서 계약서를 제대로 읽지도 않고 사인했어. 그런데 그 믿음까지 네가 계산한 거잖아.”“맞아.”도현의 답은 짧았다.“네가 부모에게서 벗어나려면 힘이 필요했고, 나는 그 힘이 내가 되길 원했어. 다른 누구에게도 가지 못하게 하고 싶었다.”“그래서 출구를 없앴어?”“그래.”“그게 사랑이야?”서율의 목소리가 갈라졌다.“내가 선택한다고 믿게 만들고, 실제로는 네가 정해놓은 길만 걷게 하는 게?”도현은 한동안 대답하지 못했다. 서율이 알고 있던 차도현이라면 어떤 질문에도 논리를 세웠다. 이번에는 논리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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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화. 불발된 도망

캐리어 바퀴가 대리석 바닥을 긁는 소리가 길게 이어졌다.서율은 현관만 바라봤다. 도현이 복도 한가운데 서 있었지만 길을 완전히 막지는 않았다. 한 걸음만 옆으로 비키면 지나갈 수 있는 거리였다.“비켜.”“나갈 수 있어.”도현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았다.“현관 비밀번호도, 엘리베이터 키도 그대로야. 막지 않겠다.”“그럼 왜 서 있어?”“마지막으로 확인할 게 있어서.”그가 캐리어 손잡이에 손을 얹었다. 서율이 즉시 뿌리치자 캐리어가 옆으로 넘어졌다. 안에서 제대로 잠그지 못한 화장품 파우치와 서류 몇 장이 카펫 위로 쏟아졌다.“손대지 마.”도현은 그대로 손을 들고 물러섰다.“미안해.”서율은 허리를 굽혀 물건을 주웠다. 손이 떨려 작은 향수병 하나를 두 번이나 놓쳤다. 도현이 움직이려다 멈추는 것이 시야 끝에 보였다.“네 휴대전화 백업과 위치 공유 권한은 전부 해제했다.”그가 현관 콘솔 위에 서류 봉투와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내가 지정했던 기사와 경호도 철수시켰어. 네가 어디로 가든 확인하지 않겠다.”“당연한 걸 돌려주면서 선심 쓰는 척하지 마.”“알아.”도현은 말없이 서 있었다.서율은 물건을 다시 넣고 캐리어를 일으켰다. 현관 앞까지 갔을 때 도현이 뒤에서 말했다.“다만 오늘은 네 부모 집으로 가지 마. 이 이사 사건 때문에 기자들이 움직이고 있어. 한성엔지니어링 쪽에도 취재가 붙었다.”“그것도 네가 만든 상황이잖아.”“내가 시작한 수사는 맞아. 하지만 취재를 흘리진 않았어. 네 안전을 위해서라도 사람이 많은 호텔이나 루미나 법무팀이 잡아주는 곳으로 가.”서율은 손잡이를 잡은 채 멈췄다.“끝까지 관리하려고 하네.”“관리하려는 게 아니라 경고하는 거야. 선택은 네가 해.”그 말이 낯설었다. 불과 며칠 전까지 도현은 선택을 주는 척하며 답을 정해놓았다. 지금은 처음으로 문을 열어둔 채 결과를 감수하려 하고 있었다.서율은 현관문을 열었다. 전용 엘리베이터 앞까지 나가 호출 버튼을 눌렀다.서율은 뒤에서 발소리가 따라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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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화. 10년 치의 갈증

“19살 봄, 네가 벚꽃 아래서 다른 애한테 고백받던 날이었어.”도현은 손가락을 맞잡은 채 말을 이었다.“네가 거절하고 내 옆에 앉아서 아무렇지 않게 딸기우유를 마셨지. 그때 처음 알았어. 네가 다른 사람을 좋아하게 되는 장면을 나는 견딜 수 없다는 걸.”서율은 그날을 기억했다. 도현은 평소보다 말이 없었고, 딸기우유 빨대를 괜히 구겨놓았다.“그래서 고백을 안 했어?”“친구로 남으면 적어도 계속 볼 수 있으니까.”도현이 마른 웃음을 흘렸다.“비겁했지. 네가 소개팅을 할 때는 상대를 알아봤고, 위험한 소문이 있는 사람은 네 친구를 통해 자연스럽게 끊어냈어. 네 회사에 들어가려던 투자사 중 평판이 나쁜 곳도 막았고.”“사진학과 선배 말고는 안전한 사람에게도 손댄 적 없어?”“연락을 끊게 만든 사람은 그 한 명이 전부야. 하지만 너 모르게 알아본 사람은 더 있어.”“명단은?”“네가 쓰라고 한 목록에 전부 적었어. 조사 의뢰 내역과 원자료도 네가 확인하게 넘기겠다.”서율은 그의 말을 기억해 두듯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내 일까지 건드렸어?”“루미나의 결정에는 손대지 않았어. 네 실력으로 얻은 자리라는 걸 아니까. 대신 네게 손해를 끼칠 사람만 뒤에서 조사했다.”“그걸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는데?”“알면 네가 나를 경계할 테니까.”서율은 입술을 다물었다. 도현은 자신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관계의 절반을 몰래 차지해왔다. 좋은 결과가 있었다고 방식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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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화. 계약서의 파기

도현은 계약서를 두 손으로 펼쳤다.첫 장에는 ‘가짜 연인 대행 표준계약서’라는 제목이 반듯하게 찍혀 있었다. 그 아래로 제3조, 제7조, 제9조가 이어졌다. 처음 읽었을 때는 전문 용어에 가려 보이지 않던 문장들이 이제는 노골적인 욕망처럼 보였다.“잠깐.”서율이 손을 뻗자 도현이 멈췄다.“찢기 전에 말해. 이 계약서 말고도 사본이 몇 개야?”“개인 암호화 저장소에 파일 하나, 금고에 보관용 사본 하나. 파일은 방금 삭제했고, 저장소 삭제 기록과 금고 사본은 내일 네가 고른 변호사 앞에서 확인하겠다.”“공증이나 별도 인증은 받았어?”“아니. 네가 서명한 뒤에도 외부 절차는 밟지 않았어.”“왜?”도현의 시선이 종이 위로 떨어졌다.“효력이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으니까. 제3자가 문구를 보면 바로 문제 삼았을 거야.”서율은 허탈하게 웃었다.“결국 나 하나 속이려고 만든 무대였네.”“그래.”도현은 변명 없이 인정한 뒤 계약서 첫 장을 찢었다.찌익.깨끗한 종이가 가운데서 갈라지는 소리가 거실에 길게 울렸다. 그는 멈추지 않았다. 서율의 서명이 찍힌 마지막 장까지 한 장씩 잘게 찢었다. 급하게 구기거나 분노를 과시하지도 않았다. 자신이 쌓은 덫을 스스로 해체하듯, 조항과 서명과 인장을 차례로 없앴다.종이 조각이 유리 테이블 위에 쌓였다.서율은 그중 자신의 이름이 반쪽만 남은 조각을 집었다. 서명 당시의 다급함이 손끝에 되살아났다. 그녀는 조각을 다시 내려놓고 투명한 봉투를 가져와 전부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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