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정략결혼을 피하려 15년 지기 남사친이자 스타 변호사 차도현에게 가짜 연애를 부탁한 한서율. 하지만 그가 내민 계약서는 우연한 구원이 아니었다. 동거와 스킨십, 해지 불가 조항까지 모두 10년의 짝사랑을 완성하기 위해 도현이 설계한 덫이었다. 배신과 집착 끝에서 서율은 계약이 아닌 자신의 선택으로 그를 다시 마주한다.
View More호텔 최고층 프라이빗 다이닝 룸은 지나치게 조용했다. 냉방기 소리와 은식기가 닿는 소리만 또렷했다. 맞은편 남자는 최고급 수입차 스마트키와 블랙 카드를 테이블 가운데에 보란 듯이 올려놓고, 서율을 상품의 상태라도 확인하듯 훑었다. 숨길 생각조차 없는 오만함이었다.
“한서율 씨, 솔직해집시다. 한 대표님 회사, 이번 분기 어음 못 막으면 부도 위기라면서요?”
남자의 입꼬리가 비뚤어졌다.
“어차피 한 씨 집안에서 당신을 내 앞에 앉힌 이유가 뻔하잖아요. 고상한 척 굴지 말고 결혼 날짜부터 잡죠. 내 조건은 간단해요. 회사 그만두고 가사에 전념할 것. 그리고 내 사생활에는 일체 간섭하지 말 것.”
서율이 쥔 천 냅킨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손바닥에 손톱 자국이 남았지만 표정은 바꾸지 않았다.
집안의 강요로 끌려 나온 자리였다. 부모는 서율의 커리어와 삶을 집안 사업의 자금줄을 대줄 담보쯤으로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서율에게 루미나 팀장 자리는 5년 동안 실적과 야근으로 쌓아 올린 자기 삶의 첫 영역이었다. 그 자리를 집안의 부채와 맞바꿀 생각은 없었다.
“이 이사님, 착각이 심하시네요.”
서율은 의자를 뒤로 밀고 일어났다.
“아버지 회사 빚은 경영진이 책임질 일입니다. 당신처럼 천박한 거래를 결혼이라 부르는 사람에게 제 인생을 넘길 생각도 없고요.”
“뭐? 한서율! 너 지금 제정신이야? 감히 누굴 차?”
맞선남의 거친 고성을 뒤로한 채, 서율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호텔 복도로 걸어 나갔다. 하지만 엘리베이터를 타고 로비로 내려오는 내내 심장이 터질 듯 요동쳤다. 맞선을 엎었다는 소식이 들어가면 당장 오늘 밤 집안에서 어떤 폭풍이 몰아칠지 뻔했다.
‘도망치는 것만으로는 안 돼. 부모가 함부로 밀어붙이지 못할 방패가 필요해.’
혼자만의 힘으로는 집안의 집요한 정략결혼 압박을 끊어낼 수 없었다. 적어도 부모가 감히 건드리지 못할 막강한 배경을 지닌 사람, 그리고 누구도 의심할 수 없는 확실한 남자가 필요했다.
혼란스러운 머릿속에서 단 하나의 얼굴이 떠올랐다.
차도현.
국내 3대 로펌 중 하나인 ‘세륜’의 최연소 파트너 변호사이자, 15년 동안 가장 가까이에 있던 친구. 서율은 떨리는 손으로 도현의 번호를 눌렀다. 신호음이 두 번 채 울리기도 전에 통화가 연결되었다.
— 서율아.
수화기 너머 도현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낮고 안정적이었다. 목까지 차올랐던 숨이 그제야 조금 내려갔다.
“도현아…… 나 지금 네 사무실로 가도 돼?”
— 어디야. 맞선 자리는 끝난 건가?
“박차고 나왔어. 더는 못 참겠어. 제발 도와줘, 도현아. 나 지금 너밖에 없어.”
잠시 정적이 흐르고, 수화기 너머로 바스락거리는 서류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
— 1층 로비 데스크에 말해둘게. 바로 올라와.
서초동 세륜 로펌 28층에 내리자 도현의 비서가 육중한 집무실 문을 열어주었다. 은은한 원목 향과 차가운 공조 바람이 감도는 넓은 집무실 안, 도현이 야경을 등진 채 서 있었다.
큰 키에 빈틈없는 네이비 쓰리피스 슈트. 은테 안경 너머의 시선은 서율이 얼마나 급한지 이미 계산을 끝낸 사람처럼 침착했다.
“꼴이 엉망이네, 한서율.”
도현은 말없이 따뜻한 차부터 서율의 손에 쥐여주었다. 차가운 손가락에 온기가 닿았다. 15년 동안 문제가 생길 때마다 가장 먼저 찾은 사람이 늘 도현이었다.
“도현아, 나 집에서 완전히 내쳐질 것 같아. 이번 맞선 엎은 거 알면 아버지가 회사까지 찾아와 일을 못 하게 만들겠다고 협박하셨거든.”
서율은 간절한 눈빛으로 도현을 올려다보았다.
“내가 집안 압박에서 벗어날 때까지만…… 딱 반년만 내 가짜 애인 행세 좀 해주면 안 될까? 네가 내 상대라면 부모님도 손 못 대. 변호사 비용이든 뭐든 내가 다 갚을게.”
도현의 손끝이 서율의 어깨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도현의 시선이 잠깐 아래로 떨어졌다. 난처한 표정은 너무 짧아서 준비된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서율아. 나는 변호사야. 아무런 법적 근거도 없는 구두 합의로 대외적 연기를 하는 건 내 원칙에 맞지 않아.”
“도현아, 제발…… 너 말고는 아무도 없어.”
서율이 도현의 슈트 소매를 붙잡으며 매달렸다. 도현은 깊은 고민에 빠진 사람처럼 안경을 벗어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안경을 벗은 맨눈에 낯선 빛이 스쳤지만, 서율은 매달리느라 보지 못했다.
“정말로 감당할 수 있겠어?”
“응. 뭐든 할게. 진짜 부탁이야.”
도현이 집무실 안쪽 전용 회의실로 향하는 묵직한 이중문을 열며 나직하게 말했다.
“좋아. 그럼 공식적으로 비즈니스 계약부터 체결하지. 안으로 들어와.”
서율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문턱을 넘었다. 등 뒤에서 문이 닫히고 도어록이 짧게 울렸다. 그러나 그때 서율의 귀에는 도현이 도와주겠다는 말만 남아 있었다.
결혼식이 끝난 밤, 펜트하우스 침실에는 옥상에서 가져온 흰 꽃 몇 송이만 놓여 있었다.서율은 무거운 귀걸이를 빼 화장대 위에 내려놓고 베일을 풀었다. 거울 속으로 도현이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턱시도 재킷은 벗었지만 셔츠 단추는 여전히 목 끝까지 단정했다.“새 조항 이야기해 봐.”서율이 먼저 꺼내자 도현이 작은 종이를 내밀었다.“진짜로 써왔어?”“검토를 받아야 하니까.”서율은 종이를 펼쳤다. 제목은 거창했다.[영구 독소조항]제1조. 한서율은 평생 차도현의 품을 1초도 벗어날 수 없다.제2조. 차도현도 한서율이 부르면 즉시 돌아온다.제3조. 문을 잠그거나 연락을 끊는 방식으로 싸우지 않는다.위약금. 그날 안에 먼저 사과하고, 화해할 때까지 같은 식탁에 앉아 있을 것.서율은 끝까지 읽은 뒤 웃음을 참지 못했다.종이 아래에는 서명란이 두 개 있었지만 인장 칸은 없었다. 도현은 만년필도, 붉은 인주도 준비하지 않았다. 대신 연필 한 자루를 옆에 놓아두었다. 언제든 지우고 다시 쓸 수 있다는 뜻이었다.“위약금이 영원한 사랑 아니었어?”“청구 기준이 너무 불명확하잖아.”“끝까지 변호사답네.”“최종 문구는 네가 정해.”서율은 도현이 놓아둔 연필을 집었다. 제1조의 ‘한서율’ 앞에 줄을 긋고 ‘두 사람은’이라고 고쳤다. 이어 ‘차도현의 품’을 ‘서로의 품’으로 바꿨다.[두 사람은 평생 서로의 품을 1초도 벗어날 수 없다.]“이러면 물 마시러도 못 가는데?”도현이 묻자 서율이 제3조를 가리켰다.“제3조가 있잖아. 물 마실 때 막으면 바로 위반이야.”“법률 해석이 훌륭하네.”“변호사 남편한테 배웠지.”서율은 위약금 아래에 한 줄을 더 적었다.[단, 사랑은 위약금이 아니다. 매일 마음 가는 만큼 줄 것.]도현이 문장을 읽고 한동안 말이 없었다.“마음에 안 들어?”“너무 마음에 들어서.”도현은 서율이 보는 앞에서 종이를 접어 침대 옆 서랍 첫 칸에 넣었다. 서랍은 닫지 않았다. 서율이 손을 뻗으면 바로 꺼낼 수 있는 자리였다
혼인신고를 마치고 계절이 바뀐 뒤, 펜트하우스 옥상 가든에서 작은 결혼식이 열렸다. 도현은 처음에 호텔 전체를 빌리겠다고 했고, 서율은 하객 명단부터 줄였다.준비 과정에서도 두 사람은 여러 번 부딪쳤다. 도현은 경호 동선을 세 겹으로 짰고, 서율은 하객이 결혼식보다 보안 검색을 더 오래 하겠다며 절반을 지웠다. 도현이 신부 대기실 앞에 변호사 두 명을 세우려 하자 서율은 그들을 축의대 담당으로 돌려보냈다. 도현이 세운 계획에서 서율이 절반을 지우면, 둘은 남은 절반을 다시 함께 짰다.결국 초대된 사람은 루미나 동료와 가까운 친구들, 세륜에서 도현을 오래 지켜본 몇 명뿐이었다. 양가의 체면을 위한 자리는 하나도 없었다.맑은 겨울 하늘 아래 투명 캐노피가 옥상 바람을 막고, 난방기 사이로 흰 꽃과 짙은 초록 잎이 버진 로드를 따라 이어졌다. 서율은 장식이 과하지 않은 실크 드레스를 입었다. 거울 앞에서 마지막으로 베일을 정리하던 팀원이 감탄했다.“팀장님, 진짜 예뻐요. 그런데 차 변호사님 아까부터 입구만 보고 있던데요? 도망갈까 봐 그러는 사람처럼.”“이제 도망가도 쫓아오지 말라고 교육 끝냈어.”서율이 웃자 팀원도 따라 웃었다.문이 열리고 음악이 시작됐다. 서율은 누구의 손에 이끌리지 않고 혼자 걸었다. 부모를 대신할 사람을 세우지 않았다. 자신의 삶을 자신이 선택한다는 의미로 정한 입장이었다.버진 로드 끝에서 도현이 기다리고 있었다. 흠잡을 데 없는 턱시도 차림이었지만 표정은 전혀 정돈되지 않았다. 눈가가 벌써 붉었다.서율이 앞에 서자 그가 손을 내밀었다.“잡아도 돼?”하객들 사이에서 웃음이 번졌다. 서율은 그의 손을 꽉 잡았다.“오늘은 물어보지 않아도 됐는데.”“습관이 됐어.”주례는 없었다. 두 사람이 직접 쓴 서약을 서로 읽었다.도현이 먼저 종이를 펼쳤다.“나 차도현은 겁이 나도 당신 앞을 막지 않겠습니다. 말하지 못한 마음을 계약서 뒤에 숨기지 않고, 질투하면 질투한다고, 두려우면 두렵다고 먼저 말하겠습니다. 당신이 돌아오고
다음 날 오전, 두 사람은 서초구청 가족관계등록 창구 앞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서율은 가방에서 혼인신고서를 직접 꺼냈다. 증인 서명은 서율이 부탁한 대학 동기와 도현이 부탁한 로펌 동료에게 각각 받아두었다. 담당 공무원이 서류를 확인하는 동안 도현은 법정 선고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손을 무릎 위에 모으고 있었다.“두 분 신분증 확인하겠습니다.”절차는 놀랄 만큼 평범했다. 도현이 그토록 집착했던 ‘법적 관계’는 화려한 인장도 긴 계약서도 없이, 두 사람이 같은 자리에서 같은 의사를 확인하는 것으로 시작됐다.담당 공무원이 증인 서명과 주소, 빠진 기재사항이 없는지 차례로 확인했다. 처리 완료 안내는 문자로 갈 거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서율이 몇 가지 절차를 묻는 동안 도현은 옆에서 조용히 기다렸다. 예전의 도현이었다면 ‘같은 주소’라는 문구 하나에도 의미를 부여했겠지만, 지금은 서율이 질문을 마칠 때까지 끼어들지 않았다.“접수하시겠습니까?”공무원의 마지막 확인에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봤다. 서율이 먼저 답했다.“네.”도현은 반 박자 뒤 같은 대답을 했다. 화려한 선언도, 법률 용어도 없었다. 몇 가지 확인 질문과 서명, 접수 도장이 전부였다.접수증을 받은 서율이 창구에서 일어나자 도현이 물었다.“실감 나?”“아직. 너는?”“접수됐다는 문장을 열 번쯤 읽고 싶어.”“또 조항 만들 생각 하지 마.”“참고 있어.”구청을 나선 두 사람은 건물 앞 계단에서 잠시 멈췄다. 서율이 먼저 손을 내밀자 도현이 손가락을 맞물렸다. 둘은 근처 작은 식당으로 가 늦은 아침을 먹었다. 도현은 샴페인이나 호텔을 예약하지 않았다. 서율이 중요한 날일수록 평범한 밥을 먹고 싶다고 한 말을 기억한 것이다.회사로 돌아가기 전, 서율은 접수증을 반으로 접어 도현의 지갑에 넣었다.“이건 네가 가져.”“괜찮아?”“응. 계약서처럼 숨기지만 않으면.”도현이 지갑을 닫으며 웃었다.그날 저녁 펜트하우스에는 촛불도 꽃도 없었다.서율은 회사에서 받은 축하 케이크 상자를 식
두 달 가까이 흘러, 초가을 비가 통창을 잔잔하게 두드리던 저녁이었다.서율은 퇴근 직전 도현에게서 짧은 메시지를 받았다.[오늘 저녁, 집에서 식사해도 될까? 준비하고 싶은 게 있어.]예전의 도현이라면 이미 모든 일정을 정해놓고 통보했을 것이다. 서율은 회의를 마친 뒤에야 메시지를 확인하고 답했다.[좋아. 조금 늦게 도착해.]펜트하우스 다이닝 룸에는 과한 장식 대신 작은 촛불과 흰 리시안셔스가 놓여 있었다. 서율이 좋아한다고 지나가듯 말했던 꽃이었다. 도현은 짙은 그레이 슈트 차림으로 테이블 곁에 서 있었다. 평소 법정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손가락을 몇 번이나 접었다 펴고 있었다.“긴장했어?”서율이 가방을 내려놓으며 묻자 도현이 솔직하게 답했다.“많이.”“무슨 잘못을 또 했길래?”“아직은 안 했어.”도현은 의자를 빼주고 맞은편에 앉았다. 식사가 끝날 때까지 평범한 이야기가 오갔다. 서율의 신규 프로젝트, 도현이 맡은 항소심, 한성엔지니어링 구조조정 진행 상황. 디저트가 치워진 뒤에야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서율은 테이블 아래에서 도현의 구두 끝이 미세하게 움직이는 것을 봤다. 준비한 말을 머릿속으로 여러 번 되풀이하는 버릇이었다. 계약서를 내밀던 날의 여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결과를 통제할 수 없는 사람만이 보이는 긴장이었다.도현은 무릎을 꿇지 않았다. 대신 서율과 같은 눈높이로 맞은편 의자에 앉아 작은 벨벳 상자와 서류 봉투를 꺼냈다.“서율아. 먼저 말할 게 있어.”“응.”“이 서류는 네가 오늘 사인하지 않아도 되고, 사인한 뒤에도 제출 전까지 언제든 없던 일로 할 수 있어.”그가 봉투에서 혼인신고서를 꺼냈다. 증인란과 주소란은 비어 있었고, 도현의 이름만 배우자 칸 한쪽에 적혀 있었다.“구청에 내기 전에는 아무 효력 없어. 내일 바로 제출하지 않아도 되고, 네가 원하는 만큼 보관해도 돼.”서율은 서류보다 도현의 설명을 먼저 들었다.“계약서 아닌 거 확실해?”“조항 없어.”“자동 갱신도?”“혼인은 갱신하는 제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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