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 최고층 프라이빗 다이닝 룸은 지나치게 조용했다. 냉방기 소리와 은식기가 닿는 소리만 또렷했다. 맞은편 남자는 최고급 수입차 스마트키와 블랙 카드를 테이블 가운데에 보란 듯이 올려놓고, 서율을 상품의 상태라도 확인하듯 훑었다. 숨길 생각조차 없는 오만함이었다.“한서율 씨, 솔직해집시다. 한 대표님 회사, 이번 분기 어음 못 막으면 부도 위기라면서요?”남자의 입꼬리가 비뚤어졌다.“어차피 한 씨 집안에서 당신을 내 앞에 앉힌 이유가 뻔하잖아요. 고상한 척 굴지 말고 결혼 날짜부터 잡죠. 내 조건은 간단해요. 회사 그만두고 가사에 전념할 것. 그리고 내 사생활에는 일체 간섭하지 말 것.”서율이 쥔 천 냅킨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손바닥에 손톱 자국이 남았지만 표정은 바꾸지 않았다.집안의 강요로 끌려 나온 자리였다. 부모는 서율의 커리어와 삶을 집안 사업의 자금줄을 대줄 담보쯤으로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서율에게 루미나 팀장 자리는 5년 동안 실적과 야근으로 쌓아 올린 자기 삶의 첫 영역이었다. 그 자리를 집안의 부채와 맞바꿀 생각은 없었다.“이 이사님, 착각이 심하시네요.”서율은 의자를 뒤로 밀고 일어났다.“아버지 회사 빚은 경영진이 책임질 일입니다. 당신처럼 천박한 거래를 결혼이라 부르는 사람에게 제 인생을 넘길 생각도 없고요.”“뭐? 한서율! 너 지금 제정신이야? 감히 누굴 차?”맞선남의 거친 고성을 뒤로한 채, 서율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호텔 복도로 걸어 나갔다. 하지만 엘리베이터를 타고 로비로 내려오는 내내 심장이 터질 듯 요동쳤다. 맞선을 엎었다는 소식이 들어가면 당장 오늘 밤 집안에서 어떤 폭풍이 몰아칠지 뻔했다.‘도망치는 것만으로는 안 돼. 부모가 함부로 밀어붙이지 못할 방패가 필요해.’혼자만의 힘으로는 집안의 집요한 정략결혼 압박을 끊어낼 수 없었다. 적어도 부모가 감히 건드리지 못할 막강한 배경을 지닌 사람, 그리고 누구도 의심할 수 없는 확실한 남자가 필요했다.혼란스러운 머릿속에서 단 하나의 얼굴이 떠올랐다.차도현.
Last Updated : 2026-08-28 Read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