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계약연애의 독소조항: Chapter 1 - Chapter 10

19 Chapters

제01화. 숨통을 조이는 덫

호텔 최고층 프라이빗 다이닝 룸은 지나치게 조용했다. 냉방기 소리와 은식기가 닿는 소리만 또렷했다. 맞은편 남자는 최고급 수입차 스마트키와 블랙 카드를 테이블 가운데에 보란 듯이 올려놓고, 서율을 상품의 상태라도 확인하듯 훑었다. 숨길 생각조차 없는 오만함이었다.“한서율 씨, 솔직해집시다. 한 대표님 회사, 이번 분기 어음 못 막으면 부도 위기라면서요?”남자의 입꼬리가 비뚤어졌다.“어차피 한 씨 집안에서 당신을 내 앞에 앉힌 이유가 뻔하잖아요. 고상한 척 굴지 말고 결혼 날짜부터 잡죠. 내 조건은 간단해요. 회사 그만두고 가사에 전념할 것. 그리고 내 사생활에는 일체 간섭하지 말 것.”서율이 쥔 천 냅킨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손바닥에 손톱 자국이 남았지만 표정은 바꾸지 않았다.집안의 강요로 끌려 나온 자리였다. 부모는 서율의 커리어와 삶을 집안 사업의 자금줄을 대줄 담보쯤으로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서율에게 루미나 팀장 자리는 5년 동안 실적과 야근으로 쌓아 올린 자기 삶의 첫 영역이었다. 그 자리를 집안의 부채와 맞바꿀 생각은 없었다.“이 이사님, 착각이 심하시네요.”서율은 의자를 뒤로 밀고 일어났다.“아버지 회사 빚은 경영진이 책임질 일입니다. 당신처럼 천박한 거래를 결혼이라 부르는 사람에게 제 인생을 넘길 생각도 없고요.”“뭐? 한서율! 너 지금 제정신이야? 감히 누굴 차?”맞선남의 거친 고성을 뒤로한 채, 서율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호텔 복도로 걸어 나갔다. 하지만 엘리베이터를 타고 로비로 내려오는 내내 심장이 터질 듯 요동쳤다. 맞선을 엎었다는 소식이 들어가면 당장 오늘 밤 집안에서 어떤 폭풍이 몰아칠지 뻔했다.‘도망치는 것만으로는 안 돼. 부모가 함부로 밀어붙이지 못할 방패가 필요해.’혼자만의 힘으로는 집안의 집요한 정략결혼 압박을 끊어낼 수 없었다. 적어도 부모가 감히 건드리지 못할 막강한 배경을 지닌 사람, 그리고 누구도 의심할 수 없는 확실한 남자가 필요했다.혼란스러운 머릿속에서 단 하나의 얼굴이 떠올랐다.차도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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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02화. 완벽한 표준계약서

프라이빗 룸의 문이 닫히자 복도의 발소리까지 끊겼다.도현은 가죽 암체어를 서율의 맞은편으로 끌어당겨 앉더니, 서랍 안에서 묵직한 가죽 바인더 하나를 꺼내 테이블 중앙에 내려놓았다.바인더가 테이블에 닿는 소리가 짧게 났다. 도현이 표지를 열자 세륜 로고가 워터마크로 들어간 수십 장의 문서가 모습을 드러냈다. 구두 약속을 정리한 각서 수준은 아니었다.“……이게 다 뭐야?”서율이 동그랗게 뜬 눈으로 두꺼운 계약서를 내려다보았다.“가짜 연인 대행 계약서. 네가 원하는 결과를 내려면 말보다 문서가 낫겠지. 서로 어디까지 할지 미리 적어둔 거야.”도현의 목소리는 사건의 쟁점을 정리하는 변호사처럼 차분하고 건조했다. 그는 만년필 뚜껑을 돌려 열며 서율의 앞으로 서류를 밀어주었다.“우리가 어설프게 입을 맞췄다가 양가 부모나 업계 사람들에게 꼬리를 잡히면, 네 부모는 바로 연극이라고 몰아붙일 거야. 그러면 정략결혼 압박은 더 거세져. 내 이름까지 걸린 일인 만큼 빈틈없는 합의가 필요해.”서율은 빠르게 목차를 훑어내렸다. 전문적인 법률 용어로 빼곡하게 채워진 수십 개의 조항들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조항이 왜 이렇게 많아? 그냥 사람들에게 사귄다고 말하고 가끔 파티에 같이 가는 거 아니었어?”“한서율.”도현이 나직하게 서율의 이름을 불렀다. 안경을 벗은 그의 깊고 짙은 눈동자가 서율의 시선을 집요하게 옭아맸다.“너를 정략결혼 시장에 팔아넘기려는 네 부모님과 그 뒷배들이 그렇게 만만해 보여? 그들은 우리가 진짜로 깊은 관계인지 확인하려고 뒷조사를 하고, 집과 회사에 남은 생활 흔적까지 뒤질 거야. 어설픈 연기로는 단 일주일도 못 버텨.”도현의 논리는 반박할 틈을 주지 않았다. 그가 미리 대비하라고 한 일은 늘 문제가 생기기 전에 끝나 있었다. 서율은 그 익숙한 정확성을 신뢰했다.“핵심 조항만 짚어줄게.”도현의 가늘고 긴 손가락이 서류의 몇몇 조항을 짚어나갔다.“제3조, 계약 기간 중 타인과의 사적 만남이나 소개팅, 맞선 등 일체의 이성 접촉을 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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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03화. 원 베드룸의 법칙

청담동 최고급 레지던스 45층 펜트하우스.도어록에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서자 커다란 통창 너머로 서울의 야경이 펼쳐졌다.서율의 눈에는 풍경보다 먼저 색이 들어왔다. 회색 대리석, 검은 가죽, 흰 벽. 세 가지 색만 허용한 듯한 거실에는 쿠션 하나도 비스듬히 놓여 있지 않았다. 차도현이 사람과 사건을 정리하는 방식 그대로였다.“네 짐은 드레스룸 안쪽 비워둔 칸에 넣으면 돼.”도현은 슈트 재킷을 벗어 거실 소파 등받이에 걸치고 셔츠 소매를 걷어 올렸다. 서율은 캐리어를 끌며 복도 안쪽으로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100평이 훌쩍 넘는 구조인 만큼 침실이 최소 3개는 있을 터였다. 손님용 침실에 짐을 풀고 당분간 도현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지낼 생각이었다.두 번째 게스트룸까지 열어본 순간, 가구가 덜 들어온 게 아니라 일부러 비워둔 공간이라는 걸 알았다. 방 2개에는 침대나 침구 대신 붙박이장과 책상만 놓여 있었다. 불을 켜고 구석구석 둘러보아도 사람이 누워 잘 수 있는 공간은 오직 복도 끝의 마스터 베드룸 하나뿐이었다.“……도현아.”서율이 마스터 베드룸 문가에 선 채 굳은 얼굴로 도현을 불렀다.도현은 얼음을 띄운 위스키 잔을 들고 복도 끝까지 왔다. 서율이 어느 문부터 확인했는지 이미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왜 그래? 방이 마음에 안 들어?”“마음에 들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잖아. 다른 방들에 침대가 하나도 없어. 가구 배치가 덜 된 거야?”“아니. 일부러 침대를 들이지 않았어. 처음부터 네가 들어올 가능성까지 생각해 둔 집이니까.”도현은 담담한 목소리로 위스키를 한 모금 넘겼다. 얼음이 부딪히는 청량한 소리와 함께 그의 목울대가 매끄럽게 오르내렸다.“그럼 난 어디서 자? 설마 소파에서 자라는 건 아닐 테고.”“저기 있는 킹사이즈 침대에서 자면 되지. 성인 두 명이 누워도 공간이 넉넉해.”도현의 턱 끝이 마스터 베드룸 중앙에 놓인 넓은 킹사이즈 침대를 가리켰다.서율은 침대와 도현을 번갈아 봤다. 15년 동안 친구로 지냈어도 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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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04화. 제7조 스킨십 트레이닝

오전 7시, 거실 커튼은 정확히 절반만 열려 있었다.서율은 밤새 침대 가장자리에 붙어 잔 탓에 굳은 목을 주무르며 나왔다. 도현은 이미 짙은 회색 슈트를 갖춰 입고 소파에 앉아 있었다. 타이의 매듭도, 태블릿 옆에 놓인 커피잔의 각도도 흐트러진 데가 없었다.“일어났어?”“네 침대가 생각보다 좁더라.”“킹사이즈인데.”“네 어깨가 넓으니까 그렇지.”도현의 입가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 서율은 밤새 그가 쿠션 경계를 넘지 않았다는 사실을 굳이 말하지 않았다. 새벽에 한 번 눈을 떴을 때도 도현은 오른쪽 끝에 누워 있었고, 손은 이불 밖으로 나와 있었다. 지키겠다고 한 선은 실제로 지켰다. 그래서 더 혼란스러웠다. 말로는 자신을 원한다고 하면서 행동은 기다릴 줄 아는 남자였다.서율이 드레스룸으로 향하려 하자 그가 태블릿을 내려놓았다.“오늘 저녁 한영그룹 창립기념 파티, 기억하지?”서율의 발이 멎었다. 부모와 이 이사 쪽 사람들이 모두 오는 자리였다.“네 옆에서 웃어주면 되는 거 아니야?”“손도 제대로 못 잡으면서?”“누가 못 잡는대?”도현은 소파 맞은편을 가리켰다.“앉아. 손부터 확인하자.”“확인?”“제7조 신체 접촉 훈련.”“말을 꼭 그렇게 해야 해?”“다른 이름이 필요하면 네가 정해.”도현은 손바닥을 펼쳐 서율 앞에 내놓았다. 억지로 잡아끌지 않고 기다렸다. 서율은 그 손과 그의 얼굴을 번갈아 보다가 손끝을 올렸다.도현의 손가락이 천천히 사이로 들어왔다. 어깨동무나 악수와는 전혀 다른 감각이었다. 손바닥 전체가 맞닿자 열이 손목 안쪽으로 번졌다.“잠깐. 너무 세.”그의 힘이 즉시 풀렸다.“이 정도?”“……응.”“기억해. 파티장에서는 네 손이 먼저 굳으면 들킨다.”“내가 긴장한 걸 누가 그렇게 자세히 봐?”“나는 봐.”대답이 너무 빨라 서율이 고개를 들었다. 도현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그녀의 엄지 관절을 한 번 쓸었다.도현은 손을 든 채 몸을 반쯤 돌렸다.“걸을 때도 해보자. 팔짱을 끼면 네 보폭이 짧아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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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05화. 상류층 사교 파티

그랜드 하얏트 서울의 그랜드 볼룸은 금빛 조명과 검은 턱시도, 보석이 박힌 드레스로 가득했다.서율은 입구에 서자마자 공간의 색과 시선부터 읽었다. 버건디 실크 드레스는 도현의 검은 턱시도 옆에서 의도한 것처럼 선명했다. 그가 고른 조합이라는 사실이 뒤늦게 조금 얄미웠다. 자기 옆에서 가장 눈에 띌 색까지 계산해 둔 티가 났다.“긴장하면 손에 힘부터 들어가.”도현이 팔을 내밀었다.서율은 잠깐 그를 노려본 뒤 팔짱을 꼈다.“이 정도면 자연스러워?”“조금 더 가까이.”“욕심내지 마.”말은 그렇게 했지만 서율은 스스로 반 걸음 붙었다. 홀 안으로 들어서자 대화가 끊겼다가 낮은 웅성거림으로 번졌다.“세륜 차도현 변호사 맞지?”“공식 파트너를 데려온 건 처음 아닌가?”도현은 수십 쌍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얼굴로 걸었다. 서율의 허리에 놓인 손만은 그녀가 속도를 늦출 때마다 함께 느려졌다.연회장 중앙에는 서율의 부모와 이 이사가 앉아 있었다. 아버지는 잔을 내려놓았고, 이 이사는 핏발 선 눈으로 두 사람의 맞잡은 팔을 노려봤다.한 대표가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도현은 서율의 허리에 손을 얹은 채 먼저 고개를 숙였다.“인사는 식이 끝난 뒤 따로 드리겠습니다.”예의 바른 문장이었지만 접근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뜻은 명확했다. 한 대표는 주변 시선을 의식해 다시 앉았다. 서율은 도현의 손등을 한 번만 두드렸다. 떼라는 신호가 아니라, 방금 도움을 알아들었다는 표시였다. 도현의 엄지가 아주 잠깐 움직였다.“보여?”도현이 물었다.“응.”“돌아갈래?”서율은 부모 쪽을 한 번 더 보고 고개를 저었다.“아니. 여기까지 왔는데 왜.”중견 그룹 회장이 다가와 두 사람을 번갈아 봤다.“차 변호사, 옆의 분은 처음 뵙는군.”도현은 서율의 손을 감싸 들었다.“한서율 씨입니다. 루미나 디자인 에이전시 팀장이고, 제가 오래 좋아한 사람입니다. 지금은 정식으로 만나고 있습니다.”서율은 자신의 직함을 먼저 말해준 데서 잠깐 시선을 멈췄다. 계약서에는 없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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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06화. 제3조 위약벌 발동

마이바흐 안에서는 내비게이션 안내음만 간헐적으로 들렸다.도현은 파티장에서 탄산수만 마신 덕분에 직접 운전하고 있었다. 그는 강남대로를 지나는 동안 한 번도 서율 쪽을 보지 않았다. 핸들을 쥔 손이 평소보다 높게 올라가 있다는 것만 분노를 드러냈다.펜트하우스에 들어서자 도현은 문을 닫고 잠금장치를 걸었다. 타이를 풀어 던지는 대신 반듯하게 접어 콘솔 위에 놓았다. 그 침착한 동작이 오히려 서율을 긴장시켰다.“도현아, 아까는 고마웠어. 부모님도 당분간은…….”“그 사람 연락, 왜 차단하지 않았어?”도현이 말을 잘랐다.“갑자기 온 걸 어떻게 해. 답장도 안 했어.”“답장 여부는 쟁점이 아니야.”“그럼 뭔데?”도현의 시선이 서율의 클러치로 내려갔다.“내가 불쾌하다는 게 쟁점이지.”“그건 계약 위반이 아니라 네 기분이잖아.”서율이 바로 받아치자 도현의 턱이 굳었다. 그는 손을 내밀었다.“휴대전화 줘.”“싫어. 내 거야.”서율은 클러치를 가슴 쪽으로 끌어안았다. 도현은 빼앗지 않았다. 대신 손바닥을 편 채 말했다.“그 번호, 지금 차단해.”“명령하지 마.”“부탁으로 들을 생각은?”“부탁하는 얼굴이 아닌데.”“그럼 문장을 고치지.”도현은 이를 악문 채 한 단어씩 말했다.“그 사람이 다시 연락하지 못하게 막아줬으면 좋겠어.”“이유는?”“네가 불쾌한 일을 겪지 않게 하려고.”“절반짜리 답.”서율은 물러서지 않았다. 도현의 눈이 가늘어졌다.“나머지 절반은 내가 보기 싫어서.”“그게 솔직하네.”서율은 그를 노려보다 직접 휴대전화를 꺼냈다. 메시지를 캡처해 별도 폴더에 보관한 뒤 번호를 차단했다. 차단 완료 표시가 뜬 것을 확인한 뒤 화면도 제 손으로 잠갔다. 도현이 증거 보존부터 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듯 눈을 내리자 서율은 화면을 곧바로 가슴 쪽으로 돌렸다.“보여달라고 하지 마. 이건 내 휴대전화야.”“알겠어.”“그리고 비밀번호도 바꿀 거야.”도현의 표정이 굳었지만 막지 않았다. 서율은 그의 앞에서 새 번호를 입력하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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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07화. 친구라는 가면의 균열

“10년째라고?”서율의 목소리가 작게 갈라졌다.도현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방금 전까지 가까웠던 열기가 빠지자 현관의 찬 공기가 피부에 닿았다.“네가 19살이던 봄부터.”“그런데 한 번도 말 안 했잖아.”“말하면 네 옆에 남을 수 없을 것 같았어.”“그래서 친구인 척했어?”도현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친구라는 자리는 안전했으니까. 네가 누구를 좋아하는지 제일 먼저 들을 수 있었고, 위험한 사람이 접근하면 자연스럽게 막을 수도 있었어.”“막았다고?”서율의 얼굴에서 남은 온기가 사라졌다.도현은 서율을 마주 본 채 말했다.“대학 때 너한테 계속 술을 권하던 선배, 회사 초년생 때 거래를 핑계로 연락하던 실장. 뒷조사해서 문제가 있는 사람은 네 주변에서 치웠어.”“치웠다는 말, 사람한테 쓰지 마.”서율의 목소리가 차가워졌다.“누구에게 무슨 말을 했는데?”“선배의 폭행 전력을 학생회에 넘겼고, 그 실장이 접대비를 빼돌린 자료는 회사 감사팀에 보냈어.”“그 사람들이 잘못한 것과 네가 내 뒤에서 결정한 건 별개야.”“알아.”“아니, 지금 처음 듣는 사람 얼굴 앞에서 너무 쉽게 안다고 하지 마.”도현은 입을 다물었다. 서율이 다시 입을 열 때까지 손가락만 느리게 접었다 폈다.“내가 부탁했어?”“아니.”“그럼 보호가 아니라 간섭이야.”서율의 말이 현관에 또렷하게 울렸다. 도현의 손가락이 천천히 말렸다.“알아. 그래도 멈추지 못했어.”“왜? 내가 네 물건이라서?”“내 것이길 바랐으니까.”서율은 한동안 말이 나오지 않았다. 도현은 자신을 지켜본 시간과 감시한 시간을 구분하지 못한 채 같은 문장에 담고 있었다.“계약서도 그래서 만든 거야?”“네가 내게 먼저 와줄 기회라고 생각했어.”“내가 도움을 청한 순간에도 내가 얼마나 무서운지는 안 보였어?”도현의 눈이 흔들렸다.“보였어.”“그런데도 이용했네.”“그래.”도현의 시선이 아래로 떨어졌다. 그 짧은 인정이 차라리 더 아팠다. 다정한 위로를 건네던 손과 계약서를 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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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08화. 출근길의 소유권

다음 날 아침, 루미나 본사 앞은 출근 차량과 직장인들로 붐볐다.서율은 목까지 잠근 화이트 셔츠와 슬랙스 차림으로 회전문을 향했다. 쇄골에는 자국이 남지 않았지만, 전날 도현의 입술이 머물렀던 자리가 괜히 의식됐다. 밤새 같은 침대에서 쿠션 벽만 바라본 탓에 눈도 뻑뻑했다.도로변에서 짧은 경적이 울렸다.검은 마이바흐의 운전석 문이 열리고 도현이 내렸다. 아침 햇살 아래 다크 네이비 슈트와 은테 안경은 평소의 차도현으로 돌아온 듯 반듯했다. 주변 직원들이 걸음을 늦추기 시작했다.“세륜 차도현 변호사 맞지?”“한 팀장님이랑 어제 파티 기사 난 사람?”서율은 빠르게 도현 앞으로 갔다.“네가 여긴 왜 와?”“두고 간 게 있어서.”“또 그 말이야?”도현의 시선이 서율의 입술에 잠깐 머물렀다.“사람들이 보고 있어. 연인처럼 보이려면 인사는 해야겠지.”“어떤 인사?”“네가 정해.”어젯밤의 약속을 기억한 답이었다. 서율은 회사 유리문 너머로 동료들의 얼굴이 줄지어 붙은 것을 봤다. 도망치면 소문은 더 커질 터였다.“짧게.”“입술?”“그걸 또 확인해?”“중요하니까.”서율은 도현의 재킷 깃을 잡아 자신 쪽으로 조금 당겼다. 허락을 알아들은 그가 허리를 감쌌지만 힘을 주지는 않았다.입술이 닿았다.처음에는 정말 짧았다. 서율이 예상보다 빨리 떨어지는 온기를 따라 한 박자 더 머물자, 도현도 같은 만큼만 돌아왔다. 쌉싸름한 박하 향과 따뜻한 숨이 섞였다.주변에서 작은 탄성이 터졌다.서율이 먼저 물러났다.“끝.”도현의 엄지가 아랫입술 가까이 올라왔다가 닿지 않고 내려갔다.“오늘 몇 시에 끝나?”“모르겠어. 바이어 수정 회의 있어.”“오후 6시에 오겠다.”“통보하지 마.”도현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그럼 오후 5시 50분에 물어볼게. 와도 되는지.”“내가 답하면 와.”“알겠어.”도현은 그제야 차로 돌아갔다. 회사 앞에서 공개적으로 입을 맞춘 사람치고는 순순한 퇴장이었다.회전문 안으로 들어서자 직원들의 시선이 한꺼번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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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09화. 욕실 앞의 대치

퇴근 뒤 펜트하우스 욕실에는 뜨거운 수증기가 가득했다.서율은 샤워기 아래에서 하루 종일 이어진 질문들을 씻어내듯 오래 서 있었다. 차도현과 언제부터 만났는지, 결혼할 건지, 파티 기사 속 ‘오랫동안 좋아한 사람’이 정말 자신인지. 업무로 돌려세워도 질문은 틈만 나면 돌아왔다.휴대전화에는 도현의 메시지가 세 개 와 있었다.[도착했어?][저녁은 먹었어?][답이 없어서 기다리는 중이야.]마지막 문장을 읽고도 바로 답하지 않았다. 오후 내내 메시지가 올 때마다 반응하는 습관부터 들이고 싶지 않았다. 대신 샤워를 마치고 수건으로 머리를 감싼 뒤 짧게 보냈다.[씻고 나왔어. 기다리지 마.]전송 표시가 뜨자마자 욕실 문을 열었다.복도 벽에 기대 있던 도현이 몸을 일으켰다. 네이비 셔츠의 소매는 걷혀 있었고, 안경은 손에 들려 있었다.“왜 여기 있어?”“문 두드리면 싫어할 것 같아서.”“답 없다고 욕실 앞에서 기다리는 것도 정상은 아니야.”“그건 인정해.”도현의 시선이 젖은 머리칼과 단단히 묶인 가운 매듭을 차례로 지나갔다.“머리부터 말려. 감기 걸려.”“내가 할게.”“드라이어만 가져다줄까?”서율은 잠시 생각하다 파우더룸을 가리켰다.“말리는 것까지만.”도현은 스툴 뒤에 서서 드라이어를 켰다. 따뜻한 바람과 함께 손가락이 머리칼 사이를 지나갔다. 그는 목덜미에 닿지 않도록 젖은 끝만 들어 올렸다. 의외로 능숙한 손길에 서율이 거울로 그를 봤다.“이런 것도 잘하네.”“대학 때 네가 공모전 준비하다 소파에서 자면 내가 말려줬잖아.”“그땐 수건만 던져줬어.”“기억을 미화했군.”“너한테 유리한 쪽으로만?”“그럴 가능성이 높아.”도현이 너무 진지하게 답해 서율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드라이어 소리 사이로 익숙한 농담이 오가자 굳어 있던 어깨가 조금 내려갔다.서율이 피식 웃는 순간 드라이어 소리가 멎었다.거울 속 두 사람의 시선이 맞았다. 도현은 화장대에 양손을 짚지 않았다. 대신 한 발 뒤에 선 채 물었다.“어제 입 맞춘 자리,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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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통제받는 일상

다음 날 아침, 도현은 커다란 의류 상자를 들고 드레스룸에 나타났다.서율은 해외 바이어 후속 회의에 입을 크림색 블라우스와 네이비 스커트를 침대 위에 펼쳐둔 참이었다.“그 옷 말고 이거 입어.”상자 안에는 목선이 높은 원피스와 발목까지 내려오는 슈트가 들어 있었다. 원단과 재단은 훌륭했지만, 사람보다 방어벽을 먼저 디자인한 옷 같았다.“한여름에 이걸?”“회사 사람들이 네 목을 계속 볼 테니까.”“자국도 없는데?”“그래도 시선이 싫어.”서율은 원피스를 들어 자신의 몸 앞에 대봤다가 바로 상자에 넣었다.“네 질투 때문에 내 옷이 바뀌지는 않아.”“계약서 제3조에는…….”“그 조항으로 내 직업용 옷장까지 압류할 생각이면 소송해.”도현이 입을 다물었다. 서율은 자신이 골라둔 블라우스를 들어 보였다.“대신 재킷은 입을게. 회의실 냉방이 세니까.”“그건 나한테 양보하는 거야?”“아니. 내 건강을 위한 선택이야.”도현은 상자를 닫으며 아주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알겠어.”주방에는 호밀빵과 수프, 샐러드가 준비돼 있었다. 도현은 서율이 자리에 앉자 도시락 배달 계획까지 꺼냈다.“낮 12시에 기사에게 점심을 보내게 했어.”“오늘 팀원들이랑 먹기로 했는데.”“취소해.”“싫어.”두 글자에 도현의 커피잔이 멈췄다.서율은 빵을 한 입 베어 물고 덧붙였다.“보내고 싶으면 다 같이 먹을 수 있게 여섯 개 보내. 혼자 먹으라는 지시는 안 받아.”도현은 잠깐 계산하듯 생각했다.“팀원이 여섯 명이야?”“나까지 일곱.”“일곱 개 보내지.”“디저트는?”“원하는 게 있어?”“묻는 태도는 합격. 마카롱 말고 과일.”도현의 입가가 미세하게 풀렸다.그러나 퇴근 이야기에서는 다시 통제하려는 버릇이 나왔다.“오후 6시 5분에 차를 댈 거야. 그때 정문으로 내려와.”“어제 말했지. 수정 회의 끝나는 시각 몰라.”“그럼 내가 로비에서 기다리겠다.”“회사로 올라오지 말고, 끝났는지 계속 묻지도 마.”서율은 포크를 내려놓고 도현을 똑바로 봤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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