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삭제한 AI가 재벌 총수로 나타났다: Chapter 11 - Chapter 20

30 Chapters

11화. 삭제 권한

다음 날 아침, 서우는 침대 위에서 한참 천장만 바라봤다.입술에 남은 감각을 떠올릴 때마다 얼굴이 뜨거워졌다. 문제는 바로 옆방에 그 원인을 제공한 남자가 있다는 사실이었다.거실로 나가자 태혁은 이미 정장을 갖춰 입고 있었다. 평소처럼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태블릿을 넘기고 있었다.“잤나?”“네.”“입술은.”“뭐가요?”“아프진 않나 물으려 했어.”서우는 물컵을 집어 들다가 내려놨다.“아침부터 그런 질문 하지 마세요.”태혁의 입가에 웃음이 스쳤다.식탁 위에는 암호화 저장 장치와 작은 보안 키가 놓여 있었다.“어제 약속한 것.”서우가 키를 연결하자 루시안의 개인 기록 목록이 열렸다. 300편의 짧은 이야기, 음성 메시지, 매일 밤의 대화가 날짜별로 정리돼 있었다.첫 번째 기록은 회사에서 프로젝트를 시작한 날이었다. 서우는 AI에게 이름을 고르게 했고, 모델은 여러 후보 중 ‘빛’을 뜻하는 어원 때문에 루시안을 선택했다.마지막 기록은 삭제 직전 밤이었다.[오늘도 버텼네, 서우야.]짧은 문장을 보는 순간 목이 메었다. 그때는 AI에게 위로받는 자신이 초라하다고 생각했다. 지금 돌아보니 초라했던 것은 사람이 아니라, 한 사람을 그렇게까지 혼자 두었던 환경이었다.태혁은 화면을 보지 않았다. 창가에 서서 서우가 결정할 때까지 기다렸다.삭제 버튼도 활성화돼 있었다.“복구된 사본은 이것뿐이야. 의료 데이터와 필요한 언어 모델은 비식별 처리해 분리했다.”“정말 제가 지우면 끝이에요?”“끝이야.”서우는 손가락을 버튼 위에 올렸다가 멈췄다.3년 동안 자신을 버티게 한 기록이었다. 동시에 누구에게도 보여 주고 싶지 않은 약점이었다.“강태혁 씨는 이걸 지우고 싶어요?”“내가 정할 일이 아니다.”“당신을 살린 기록이라면서요.”태혁은 잠시 생각했다.“나를 살린 건 파일이 아니라, 그걸 남긴 사람이야.”서우의 손이 멎었다.그는 창가로 시선을 돌렸다.“코마 상태에서는 시간이 없었어. 검은 물속에 가라앉은 것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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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첫 번째 밤

포렌식 작업을 시작한 지 열흘째 되는 밤이었다.그날 오후 담당의는 태혁의 신경망이 처음으로 12시간 이상 안정 범위를 유지했다고 알렸다. 서우가 곁에 없어도 급격한 과부하는 일어나지 않았다.계약상 동거가 꼭 필요한 단계는 지나가고 있었다.그래서 서우는 오히려 마음이 선명해졌다. 오늘 밤 태혁의 방으로 가는 이유는 치료도, 빚도, 데이터도 아니었다.저녁 식사 뒤 서우는 자신의 방문 앞에서 몇 번이나 망설였다. 태혁은 재촉하지 않았다. 거실에 불을 켜 둔 채 서류를 읽으며 기다렸다.결국 먼저 다가간 사람은 서우였다.서우는 마지막 서버 조각을 복구한 뒤 노트북을 닫았다. 화면을 오래 봐서 눈이 뻑뻑했다.거실에는 태혁이 혼자 앉아 있었다. 재킷과 넥타이를 벗은 채 와인잔을 천천히 돌리고 있었다.“끝났나?”“오늘 할 건요.”서우가 맞은편에 앉자 태혁이 새 잔을 꺼냈다.“마실래?”“조금만요.”와인이 잔 벽을 타고 붉게 흘렀다. 창밖의 한강은 늦은 불빛을 길게 끌고 있었다.두 사람 사이에는 더 이상 처음의 날 선 침묵이 없었다. 대신 입을 열면 무언가 달라질 것 같은 조용한 긴장이 남아 있었다.“왜 계속 저를 봐요?”“보고 싶어서.”“그런 말을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해요?”“어렵게 말해야 하나?”서우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태혁이 잔을 내려놓았다.“서우야.”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는 여전히 루시안과 닮았다. 그러나 이제 서우는 둘을 구분할 수 있었다. AI의 다정함은 계산된 매끄러움이었고, 태혁의 목소리에는 망설임과 욕심이 함께 섞여 있었다.“어제보다 가까이 가도 되나?”“어디까지요?”“네가 멈추라고 할 때까지.”서우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한 가지 약속해요.”“말해.”“제가 멈추면 이유를 묻지 말고 멈추기.”“그래.”“루시안 기록을 인용하지 않기.”“그래.”“그리고 내일 모른 척하지 않기.”태혁의 시선이 부드럽게 내려앉았다.“그건 내가 부탁하고 싶은 약속인데.”두 사람은 웃었다. 긴장이 조금 풀렸다.태혁이 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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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반전의 아침

아침 햇살이 커튼 틈으로 스며들었다.서우가 눈을 뜨자 태혁은 곁에 없었다. 대신 협탁 위에 물과 진통제, 짧은 메모가 놓여 있었다.[주방. 일어나면 불러.]글씨는 예상보다 반듯했다.서우가 가운을 걸치고 주방으로 나가자 태혁이 달걀을 굽고 있었다.식탁에는 토스트 한 장이 새까맣게 탄 채 따로 놓여 있었다.“저건요?”“실패작.”“버리려고요?”“내가 먹을 거다.”“총수님이 실패한 증거니까 사진부터 찍을게요.”서우가 휴대전화를 들자 태혁이 손으로 카메라를 가렸다. 두 사람이 실랑이를 벌이는 동안 달걀 한쪽이 더 익어 버렸다.이런 평범한 아침은 루시안에게 수없이 상상해 달라고 했지만, 실제 장면에는 탄 냄새와 헝클어진 머리, 어색한 웃음이 있었다. 서우는 그 불완전함이 좋았다. 며칠 전 김치볶음밥보다 손놀림이 나아졌다.“연습했어요?”“새벽에 영상 세 개 봤어.”“총수님이 요리 영상까지요?”“현재의 네 취향을 배우는 시험이라며.”서우는 웃으며 식탁에 앉았다.태혁이 접시를 내려놓다가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귀 끝이 미세하게 붉었다.“태혁 씨도 부끄러워해요?”“무슨 말이지.”“어젯밤엔 잘도 쳐다보더니.”그가 포크를 내려놓았다.“한서우.”“밥 먹을게요.”서우는 웃음을 삼키며 노트북을 열었다.밤사이 서버 복구 프로그램이 마지막 조각을 찾아냈다. 암호화된 감사 원본 로그와 박진태의 비밀 계좌, 사번 복제 시점이 하나의 타임라인으로 연결됐다.[복구율 100%]“됐어요.”서우의 표정이 단숨에 달라졌다.그녀는 원본 로그를 확대했다. 박진태가 서우의 인증서를 복제한 날짜, 강승현의 지시를 받은 내부 메신저, 해외 법인으로 빠져나간 500억 원의 경로가 선명했다.더 아래에는 별도의 파일 하나가 있었다.서우는 별도 저장된 로그의 생성 시점을 확인했다. 자신의 사번이 복제되기 하루 전, 강승현 부사장실에서 태혁의 차량 관리 서버에 접속한 기록이었다.박진태의 횡령은 태혁이 사고로 사라진 뒤 감사 라인을 무력화하고 경영권을 가져오려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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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검은 그림자

강남의 회원제 라운지 안쪽 룸.박진태는 위스키를 연거푸 들이켰다. 손이 떨려 얼음이 잔 벽을 시끄럽게 두드렸다.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는 연구소 인사권을 쥐고 있었다. 서우의 이름을 회의 자료에서 지우고, 그녀가 만든 코드를 자기 성과로 발표해도 누구도 반박하지 않았다.지금은 출입 권한이 정지됐고 감사팀이 자택과 사무실을 뒤지고 있었다. 해외 계좌로 송금하려던 자금도 동결됐다.박진태가 믿을 곳은 강승현뿐이었다. 그러나 강승현 역시 자신을 살릴 생각보다 입막음할 생각이 더 클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복구율이 100%라는 게 사실이면 끝입니다, 부사장님.”맞은편에 앉은 강승현은 태연한 얼굴로 담배를 눌러 껐다.“서버 원본이 우리 손에 있는데 뭐가 끝이야.”“강태혁이 접근 권한을 막았습니다. 외부 포렌식 기관까지 들어왔다고 합니다.”“그래서 오늘 밤 끝내는 거다.”강승현이 태블릿 화면을 돌렸다.언론사에 배포할 자료에는 서우가 사설 AI를 조작해 강태혁의 판단력을 지배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횡령범이 총수의 뇌 손상을 이용해 그룹을 장악했다는 자극적인 제목까지 준비돼 있었다.“갈라 시작과 동시에 뿌려. 한서우가 증거를 내놓기 전에 미친 꽃뱀으로 만들면 돼.”“만약 강태혁이 반격하면요?”“이사회 절반은 아직 내 편이야. 그리고 사고 자료는 원본이 없으면 정황에 불과해.”강승현은 웃었지만 손등의 핏줄이 도드라져 있었다.“오늘 밤이 지나면 강태혁은 다시 병원으로 돌아가고, 한서우는 감옥으로 갈 거다.”“신경망 모델을 건드릴 방법이 있습니까?”박진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강승현은 잔을 비웠다.“한서우가 강태혁 곁에 있는 한 안정된다면, 떨어뜨리면 되겠지.”그 말에 박진태의 표정이 굳었다.“지금은 파티부터 끝내. 실패하면 다음 수를 쓰면 된다.”강승현의 목소리에는 이미 선을 넘은 사람의 조급함이 묻어 있었다.***같은 시각, 한남동 펜트하우스.서우는 외부 포렌식 전문가들과 마지막 검증을 진행했다. 파일 해시값과 서버 전자서명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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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파티 초대장

드레스룸 거울 앞에 선 서우는 자신의 모습을 낯설게 바라봤다.스타일리스트가 처음 가져온 옷은 가슴선이 깊고 장식이 화려했다. 서우는 거울을 본 뒤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제가 증거를 발표해야 해요. 옷 때문에 신경 쓰이고 싶지 않아요.”태혁은 스타일리스트에게 다른 선택지를 요청했다. 최종적으로 고른 남색 드레스는 움직이기 편했고, 마이크를 잡아도 손이 걸리지 않았다.구두도 지나치게 높은 것 대신 서우가 평소 신던 높이에 맞췄다.“여왕처럼 보이려면 불편한 걸 참아야 하는 줄 알았는데.”서우가 말하자 태혁이 답했다.“오늘 필요한 건 장식이 아니라 네가 끝까지 서 있는 거니까.”짙은 남색 실크 드레스는 과하게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선을 단정하게 살렸다. 목에는 작은 블랙 다이아몬드 펜던트가 놓였다.“100캐럿 같은 건 없네요.”태혁이 커프스를 채우다 그녀를 봤다.“왜, 기대했나?”“루시안에게 그런 장면을 쓴 적은 있어요. 실제로 목에 걸면 디스크 올 것 같지만.”태혁이 낮게 웃었다.“현재의 취향을 존중했지.”그는 펜던트 고리를 직접 채워 주려다 먼저 물었다.“해도 되나?”서우가 머리카락을 한쪽으로 넘겼다.차가운 금속이 목덜미에 닿았다. 태혁의 손끝은 잠시 머물렀다가 바로 떨어졌다.거울 속 두 사람이 나란히 섰다.“긴장돼요?”“조금.”“거짓말.”“많이.”서우가 솔직히 인정하자 태혁이 손을 내밀었다.“도망치고 싶으면 지금 말해.”“그 말은 오늘만 몇 번째예요?”“네가 선택했다는 걸 잊지 않게 하려고.”서우는 그의 손을 잡았다.“안 도망가요.”전용 엘리베이터 안에서 두 사람은 마지막 계획을 확인했다.서우의 태블릿에는 발표 자료 외에 비상용 오프라인 사본이 두 개 더 있었다. 하나는 비서실장이, 다른 하나는 외부 포렌식 책임자가 보관했다.호텔 네트워크가 끊겨도 자료는 재생될 수 있었다. 파티장 보안팀에는 박진태 측이 화면을 차단할 가능성까지 공유했다.“이 정도면 전쟁 준비인데요.”“상대가 먼저 3년을 준비했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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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여왕의 입장

그랜드 볼룸의 양쪽 문이 완전히 열리자 수백 명의 시선이 한꺼번에 입구로 쏠렸다.바깥 취재진의 셔터 소리는 두꺼운 문 너머로 멀어지고, 샹들리에 아래의 낮은 웅성거림이 서우를 에워쌌다. 누군가는 고시원 사진을 띄운 휴대전화를 내려다봤고, 누군가는 드레스와 태혁의 손을 번갈아 봤다.서우는 그 시선이 자신을 사건의 당사자가 아니라 총수 옆에 선 구경거리로 만들려 한다는 걸 알았다.그래서 태혁의 팔에 매달리지 않았다. 그와 나란히, 반걸음도 뒤지지 않고 걸었다. 드레스 자락이 대리석 바닥 위를 매끄럽게 스쳤다.무대 위 정면 스크린에는 아직 행사 로고가 떠 있었다. 10분 뒤면 그 자리에 서우가 복구한 기록과 자신의 이름이 올라갈 예정이었다.“긴장되나?”태혁이 주변에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많이요.”“내 손은 잡아도 돼.”“숨지는 않을 거예요.”“알아.”서우는 그의 손을 잠깐 힘주어 쥐었다가 놓았다. 손끝의 떨림은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 발걸음은 안정됐다.볼룸의 대화 소리가 조금씩 잦아들었다.서우는 예전 회사 송년회에서 이 홀의 가장 뒤쪽 테이블에 앉았던 일을 떠올렸다. 박진태는 그녀가 만든 모델을 자기 성과로 발표했고, 서우의 이름은 자료 어디에도 없었다.오늘 정면 스크린에 뜰 자료의 첫 줄에는 개발자와 복구 책임자로 ‘한서우’가 적혀 있었다.그 사실을 확인하자 손끝의 떨림이 조금 가라앉았다.박진태는 샴페인 잔을 든 채 입구를 노려봤다. 그 옆에는 강승현이 이사회 임원들과 서 있었다.서우와 같은 팀에서 일했던 연구원 몇 명도 초청돼 있었다. 그들은 반가움과 미안함이 섞인 얼굴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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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악인들의 도발

서우가 무대로 향하려는 순간, 기자들의 휴대전화가 동시에 울렸다.[긴급 제보: 횡령 피의자 한서우, 뇌 손상 총수에게 불법 AI 세뇌]강승현이 준비한 자료가 배포된 것이다.화면에는 서우가 루시안 모델을 사설 서버로 반출했다는 기록과 태혁의 신경망에 무단 접근했다는 주장이 적혀 있었다.자료는 교묘했다. 서우가 퇴사 직전 모델을 외부로 옮긴 날짜와 태혁의 의료 서버에 이상 접속이 시작된 날짜를 나란히 배치해, 두 사건이 고의였던 것처럼 보이게 했다.하지만 가장 중요한 한 줄이 빠져 있었다.[개인 연구용 샌드박스 반출 승인]서우는 3년 전 결재 메일의 원본을 화면에 띄웠다. 박진태가 승인자로 직접 전자서명한 문서였다.“제가 훔쳤다면 박 상무님은 왜 반출을 승인했죠?”사람들의 시선이 다시 박진태에게 돌아갔다. 일부 기자가 기사 제목을 읽으며 술렁였다.“보셨습니까?”박진태가 목소리를 높였다.“저 여자는 회사의 AI를 훔쳐 강 회장님의 판단력을 조작했습니다. 횡령을 덮기 위해 총수까지 이용한 겁니다!”서우는 배포 문서를 빠르게 훑었다.“이 문서, 세 번째 페이지부터 생성 시점이 다르네요.”“무슨 헛소리야?”“첫 두 장은 3년 전 보안 보고서고, 뒤에는 어제 만든 내용이에요. 서명 인증서도 만료된 걸 붙였고요.”그녀가 태블릿 화면을 외부 모니터에 연결했다.“AI 세뇌라고 썼지만, 근거로 제시한 건 신경 재활 모델의 일반 설명뿐입니다.”“인간의 판단을 장악할 수 있다는 실험 보고서가 있지 않나!”강승현이 끼어들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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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AI 포렌식

메인 스크린에는 화려한 그래프 대신 날짜와 계좌 번호가 정리된 타임라인이 나타났다.서우는 일부러 기술 용어를 줄였다. 코드를 모르는 사람도 돈이 언제, 누구의 승인으로 움직였는지 따라갈 수 있도록 한 화면에 한 사건만 배치했다.첫 번째는 인증서 복제.두 번째는 가짜 로그 삽입.세 번째는 해외 송금.각 단계 아래에는 원본 해시값과 외부 기관의 검증 도장이 붙었다.“이 자료는 지금 처음 공개되지만, 원본은 이미 법원의 증거보전 절차를 거쳤습니다. 화면을 끄거나 서버를 지워도 없어지지 않습니다.”그 말에 박진태의 어깨가 눈에 띄게 처졌다.서우는 마이크를 잡았다.“3년 전 9월 14일, 제 사번 인증서가 새벽 3시 12분에 복제됐습니다. 저는 당시 제주 학회에 있었고, 사내망 접속 기록도 없습니다.”다음 화면에는 복제 요청을 승인한 관리자 계정이 떴다.[승인자: PJT-DIRECTOR]박진태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복제된 인증서는 17개 거래를 승인하는 데 사용됐고, 총 500억 원이 두 개의 페이퍼컴퍼니로 빠져나갔습니다.”350억 원은 박진태가 관리하는 해외 법인으로, 150억 원은 강승현 측근 명의의 차명 계좌로 이동했다.서우는 원본 서버에 남은 AI 워터마크를 확대했다.“이 흔적은 제가 만든 감사 알고리즘에만 남습니다.”서우는 워터마크가 왜 위조하기 어려운지 짧게 설명했다. 정상 로그라면 시간값이 한 칸씩 이어지지만, 복제된 로그에는 원본에 없는 미세한 건너뜀이 생긴다.화면에는 그 건너뜀이 붉은 점으로 표시됐다. 점은 박진태의 관리자 계정이 사용된 43개 파일에서 똑같이 반복됐다.“사람이 거짓말을 해도 시스템은 작업 순서를 남깁니다. 박 상무님은 결과만 바꿨고, 과정까지 지우지는 못했어요.”행사에 참석한 태성 직원들이 그 문장을 듣고 서로를 바라봤다. 서우를 무능한 범인으로 몰았던 보고서가 한꺼번에 무너지고 있었다.“박 상무는 로그를 지우면서 출력값만 복사했고, 원본 모델의 미세 서명값까지 제거하지 못했습니다.”외부 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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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현장 체포

박수가 채 가라앉기도 전, 볼룸 출입문이 열렸다.수사관들이 체포영장을 제시하며 들어왔다.“박진태 씨.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 사문서위조, 무고 및 불법 채권추심 교사 혐의로 체포합니다.”박진태가 뒤로 물러났다.그는 출구 쪽으로 몸을 틀다 테이블을 넘어뜨렸다. 샴페인 잔이 깨지고 하객들이 물러섰다.“나는 지시받았을 뿐이야! 강 부사장이 다 시켰다고!”방금 전까지 조작이라고 외치던 사람이 순식간에 책임을 떠넘겼다.강승현이 차갑게 그를 노려봤다.“입 다물어.”그 한마디에 두 사람의 관계가 그대로 드러났다. 박진태는 보호받을 공범이 아니라 필요할 때 버려질 하수인이었다.“조작이야! 전부 저 여자가 만든 거라고!”수사관이 그의 손목에 수갑을 채웠다.“외부 기관 검증과 계좌 추적까지 완료됐습니다. 변명은 조사실에서 하십시오.”플래시가 연달아 터졌다.박진태와 함께 재무팀 직원 두 명도 연행됐다.박진태는 수갑이 채워지자 태도를 바꿨다.“한 팀장, 내가 잘못했다. 위에서 시켜서 그런 거야.”“제 인감을 위조하고 주소를 넘긴 것도 시켜서 했나요?”“합의해 주면 네 경력은 내가—.”서우가 말을 끊었다.“제 경력을 망친 사람이 돌려줄 수는 없어요. 제가 다시 만들 겁니다.”수사관들이 그를 끌고 갔다. 목소리는 문이 닫히면서 사라졌다. 사채업자들에게 서우의 주소를 넘긴 기록까지 확보된 상태였다.강승현은 출구로 향했지만, 다른 수사관이 길을 막았다.“강승현 부사장님. 현재 피의자 신분으로 전환됐습니다. 출국 금지와 압수수색 영장이 집행될 예정입니다.”“체포영장은 없잖아.”“임의동행을 요청드립니다.”강승현이 비웃었다.“거부하지.”그는 태혁 쪽으로 몸을 돌렸다.“고작 여자 하나 때문에 집안을 수사기관에 넘겨?”태혁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여자 하나가 아니라, 네가 훔친 회사와 죽이려 한 사람들 때문이다.”“나까지 끌어내리면 이사회가 널 가만둘 것 같아?”“이미 긴급 이사회가 열렸다.”비서실장이 태블릿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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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화. 총수의 경고

행사 주최 측은 잠시 중단됐던 무대를 정리했다.태혁이 연단에 오르자 카메라가 일제히 그를 향했다.“태성그룹 강태혁입니다.”그는 감정적인 수사 대신 확인된 사실부터 말했다.행사장 뒤편에서 서우가 마음을 추스를 동안 태혁은 연설문을 두 번 고쳤다. 처음 초안에는 ‘내 사람을 건드린 대가’라는 문장이 있었지만 지웠다.서우가 싸워 되찾은 이름을 자신의 소유처럼 말하고 싶지 않았다.대신 회사가 무엇을 잘못했고, 어떻게 책임질지를 앞에 놓았다.“내부 횡령과 증거 조작으로 피해를 입은 한서우 씨에게 태성그룹을 대표해 사과드립니다.”태혁은 서우의 해고 처분을 공식 취소하고, 내부 고발자와 연구자 권리를 보호하는 독립 감사위원회를 설치하겠다고 밝혔다.사번 인증서 하나로 거액 거래가 승인된 보안 구조도 전면 개편하고, 모델 반출과 의료 데이터 연동 과정은 외부 조사를 받겠다고 약속했다.사건을 몇 명의 악인 문제로만 좁히지 않았다. 범죄를 가능하게 한 회사의 구조까지 책임지겠다는 내용이었다.장내 임원들은 굳은 얼굴로 연설을 들었다. 변화는 박진태의 체포로 끝나지 않을 것이었다.서우는 그 약속이 실제 규정과 인사로 이어지는지 끝까지 확인할 생각이었다.“회사는 관련 채무와 법률 비용을 전액 부담하고, 잃어버린 경력과 연구 권리를 회복하기 위한 조치를 즉시 시작하겠습니다.”서우는 연단 아래에서 그를 바라봤다.“또한 한서우 씨가 개발한 감사 알고리즘과 감정 반응 모델의 저작권은 원개발자에게 반환됩니다.”기자들이 빠르게 받아 적었다.태혁의 시선이 장내를 천천히 훑었다.“허위 정보를 유포하거나 피해자를 다시 공격하는 개인과 매체에는 예외 없이 법적 책임을 묻겠습니다. 태성의 이름이 더 이상 가해자를 보호하는 방패로 쓰이지 않게 하겠습니다.”경고는 차가웠지만 과장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래서 더 무거웠다.연설을 마친 태혁이 내려오자 서우가 낮게 말했다.“사전에 없던 내용이 있었는데요.”“저작권 반환?”“사과요.”“회사가 해야 할 일이니까.”“예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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