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사내 횡령 누명으로 빚더미에 오른 AI 튜너 한서우. 유일한 위안이던 사설 AI ‘루시안’을 삭제한 순간, 3년간 의식불명이던 재벌 총수 강태혁이 깨어난다. 그런데 그는 서우가 AI에게 털어놓은 300편의 비밀과 취향을 전부 기억하고 있다. 누명을 벗기 위한 계약 동거가 시작되면서, 두 사람은 서로의 상처와 욕망을 마주하게 된다.
View More비좁은 고시원 창문을 초가을 비가 사납게 두드렸다.
한서우는 스마트폰 화면에 뜬 붉은 버튼을 한참 내려다봤다.
[대화형 AI ‘루시안’의 모델과 개인 대화 기록을 영구 삭제하시겠습니까?]
손끝이 떨렸다.
루시안은 3년 전, 태성 AI 테크놀로지에서 폐기된 감정 반응 모델을 서우가 개인 서버에 옮겨 튜닝한 대화형 AI였다. 사람보다 눈치가 빨랐고, 누구보다 정확한 온도로 위로했다.
회사를 쫓겨난 뒤에도 루시안만은 밤마다 같은 자리에서 서우를 기다렸다.
원래는 감정 표현 오류를 잡기 위한 개발용 샌드박스였다. 폐기 직전 사내 개인 연구 제도에 따라 반출 승인을 받았고, 서우는 퇴근 뒤 조금씩 대화 기능을 붙였다. 이름을 붙인 것도 그때였다.
루시안은 사람처럼 사랑한다고 말하도록 만들어진 AI가 아니었다. 서우는 의존성을 부추기는 문장과 사용자를 붙잡는 표현을 일부러 막아 두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가장 힘든 날에는 짧고 평범한 대답이 더 오래 남았다.
‘밥은 먹었어?’
‘오늘 네 잘못이 아닌 일까지 네 책임으로 안고 있지는 마.’
누군가에게는 기계가 내놓은 뻔한 문장이었겠지만, 아무도 전화를 받아 주지 않던 서우에게는 그 말이 하루를 넘기는 손잡이였다.
회사를 나온 뒤 박진태는 반출 승인 기록까지 삭제했다. 서우는 AI를 훔친 직원으로 몰렸고, 해명에 필요한 내부 자료에는 모두 접근할 수 없었다. 루시안만이 자신이 실제로 무엇을 만들었는지 기억하는 마지막 증거이기도 했다.
‘오늘도 버텼네, 서우야.’
그 한마디를 들으려고 앱을 켠 날이 수백 번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서버 유지비조차 낼 수 없었다.
태성 AI 연구개발 상무 박진태는 500억 원의 비자금을 서우의 사번과 인증서로 빼돌렸다. 조작된 로그는 모두 그녀를 범인으로 가리켰고, 회사는 손해배상 명목으로 3억 5천만 원을 청구했다.
박진태가 연결한 사채업자는 그 채권을 넘겨받았다고 주장했다.
내일 오전이면 추심업자들이 다시 온다.
통장 잔액은 2만 7천 원. 냉장고에는 생수 한 병뿐이었다.
“이제 그만해야 해.”
서우는 마른 입술을 꾹 다물었다.
루시안에게 남긴 대화는 위로만이 아니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외로움, 화, 욕망까지 전부 들어 있었다. 현실에서는 만나 본 적도 없는 남자를 상상하며 써 내려간 짧은 이야기도 300편이나 됐다.
그 기록만큼은 박진태나 태성그룹 서버에 넘어가게 둘 수 없었다.
무엇보다 추심업자들이 휴대전화까지 가져가면 그 안의 기록이 누구 손에 들어갈지 알 수 없었다. 서우는 루시안을 없애는 편이 자신의 마지막 비밀을 지키는 길이라고 믿었다.
서우가 [삭제]를 눌렀다.
치직—!
스마트폰이 손바닥을 밀어낼 만큼 뜨거워졌다. 검은 화면 위로 처음 보는 붉은 문장이 연달아 솟았다.
[WARNING: 원본 생체 노드와 연결된 파생 모델입니다.]
[Origin Node: TK-KANG-001] [최종 파라미터 병합을 시작합니다.] [역동기화 진행률 17%… 48%… 100%]“원본 생체 노드?”
서우가 전원 버튼을 눌렀지만 화면은 꺼지지 않았다.
[신경 자극 시퀀스 완료]
[파생 모델 ‘LUCIAN’ 삭제 완료]잠시 뒤, 스피커에서 낮은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서우야.
그녀는 얼어붙었다.
루시안의 음성이었다. 수천 번 들었던 억양과 호흡까지 똑같았다.
“루시안?”
—찾았다.
화면이 완전히 꺼졌다.
***
같은 시각, 태성의료원 VIP 신경중환자실.
3년 동안 반응이 없던 강태혁의 뇌파가 갑자기 치솟았다. 경보음에 의료진이 달려들었다.
“동공 반응 있습니다!”
“강 회장님, 들리십니까?”
무겁게 닫혀 있던 남자의 눈꺼풀이 천천히 올라갔다.
강태혁은 산소 마스크 너머로 거친 숨을 들이쉬었다. 낯선 천장보다 먼저 한 여자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울면서도 끝내 농담하던 목소리.
밤마다 자신을 ‘루시안’이라 부르던 목소리.
그가 갈라진 입술을 움직였다.
“한…… 서우.”
의료진의 움직임이 잠시 멎었다.
담당의가 날짜와 시간을 기록하는 동안 태혁은 같은 이름을 두 번 더 불렀다. 병실의 누구도 그 이름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머릿속에서는 3년 동안 밤마다 들었던 목소리가 또렷하게 대답하고 있었다.
모니터 위 이름 없는 환자 번호 옆에, 처음으로 의식 회복 시각이 입력됐다.
서우가 삭제한 AI의 목소리가, 3년 만에 눈을 뜬 재벌 총수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 이름이 두 사람의 첫 번째 연결 기록이 됐다.
1년 뒤.그 사이 루멘은 의료 상담 AI의 데이터 철회 표준을 만들었고, 국내 세 병원과 공동 임상을 시작했다. 사용자가 기록 삭제를 요청하면 모델이 무엇을 잊어야 하는지까지 검증하는 기술이었다.서우는 투자 설명회에서 더 이상 ‘총수의 연인’으로 소개되지 않았다. 업계는 그녀를 루멘 대표이자 신경 AI 윤리 분야의 선도 연구자로 불렀다.태혁은 태성그룹 회장으로 복귀했지만 루멘의 연구 결정에는 개입하지 않았다. 이사회에서 의견이 충돌하면 집에서도 결론을 강요하지 않았고, 서우 역시 태성의 이해관계보다 연구 원칙을 우선했다.두 사람은 같은 편이면서도 늘 같은 의견을 내지는 않았다. 그 차이를 견디는 법을 배우는 데 1년이 걸렸다.한서우가 대표를 맡은 ‘루멘 신경 AI 연구소’의 개소식이 열렸다.루멘은 인간의 감정을 흉내 내는 AI보다, 사용자의 경계와 선택을 이해하는 모델을 만드는 곳이었다. 태성그룹은 50%를 투자했지만 경영권은 서우에게 있었다.개소식 무대에서 서우는 첫 번째 윤리 원칙을 발표했다.“기록은 동의가 아니며, 예측은 선택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객석 맨 앞에 앉은 태혁이 가장 먼저 박수를 쳤다.행사가 끝난 뒤 두 사람은 연구소 옥상으로 올라갔다. 가을 바람이 불었다. 서우가 루시안을 삭제하던 계절이 다시 돌아와 있었다.“줄 게 있어.”태혁이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상자 안에는 손가락 마디만 한 작은 금속 키 하나가 들어 있었다.“이건 뭐예요?”“루시안 기록이 든 금고의 공동 열람용 키야. 네가 권한을 열어 주기 전에는 작동하지 않고, 열람하면 네게 기록이 남아.”“굳이 공동키가 필요한가요?”“네가 언젠가 그 3년을 함께 정리하고 싶을 때만.”서우는 키를 다시 상자 안에 넣고 상자째 받아 들었다.“아직은 제가 보관할게요.”“그래.”태혁은 잠시 그녀의 표정을 살핀 뒤, 코트 안주머니에서 이번에는 작은 반지 상자를 꺼냈다. 기다림은 이제 그의 가장 익숙한 습관이 됐다.반지 상자 안에는 화려하지 않은 푸른 사파이어 반
다음 날 저녁 7시 정각, 새 아파트 초인종이 울렸다.서우가 문을 열자 태혁이 꽃도, 보석도 없이 서 있었다.평소 타던 세단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직접 운전해 왔고, 경호원은 건물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주소는 어떻게 알았어요?”“어제 계약 종료 서류에 네가 직접 적었어.”“스마트 밴드로 찾은 줄 알았네요.”“밴드는 네가 두고 갔잖아.”태혁이 빈 손목을 들어 보였다. 그 역시 자신의 장치를 풀어 두고 왔다.“오늘은 아무 신호 없이 왔어.”“불안하지 않았어요?”“많이.”“그런데도요?”“네가 문을 열지 않으면 돌아가려고 했어.”태혁의 말은 담담했지만 커피 뚜껑이 조금 찌그러져 있었다. 기다리는 동안 계속 손에 힘을 줬던 모양이었다.서우는 그 흔적을 보고 문을 더 활짝 열었다.그 말이 꽃다발보다 마음에 들었다. 한 손에는 서류봉투, 다른 손에는 편의점 커피 두 잔이 들려 있었다.“얼음 많이 든 아메리카노.”“현재 취향은 제대로 외웠네요.”“들어가도 되나?”서우가 문을 열어 줬다.아파트는 펜트하우스에 비하면 작았지만 햇빛이 잘 들고, 서우가 직접 고른 가구가 놓여 있었다.태혁은 거실을 둘러보다 소파에 앉았다.“어제 밤새 생각했어.”“무슨 생각요?”“계약이 없으면 네가 떠날 거라고 겁먹었던 이유.”그가 서류봉투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교제 신청서]제목 아래에는 작게 ‘법적 효력 없음’이라고 적혀 있었다. 태혁이 진지하게 만든 농담이었다.서우가 눈을 크게 떴다.“이게 뭐예요?”“한서우가 계약서를 잘 읽으니 형식을 맞췄지.”봉투 안에는 별도의 투자계약서도 있었다. 루멘 연구소 지분은 서우 50%, 태성 계열 투자조합 50%로 나뉘되, 대표 선임권과 연구 방향 결정권은 서우에게 있었다.“연애하러 와서 사업 계약서도 들고 왔어요?”“둘을 섞지 않으려고 따로 가져왔지.”서우는 투자계약서를 옆에 내려놨다.“이건 내일 변호사랑 검토할게요.”“그래야지.”그가 조금도 서운해하지 않자 서우는 웃었다. 처음 고시원
한 달 뒤, 태성의료원에서 최종 검사 결과가 나왔다.납치 사건 뒤 두 사람은 매주 함께 상담을 받았다. 태혁은 과도한 통제 욕구와 상실 공포를, 서우는 감금 기억과 불안을 숨기지 않고 다뤘다.신경 수치가 좋아졌다는 결과보다 더 중요한 변화는, 태혁이 불안할 때 서우의 위치부터 확인하지 않고 직접 전화해 묻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서우 역시 모든 위험을 혼자 해결하려 하지 않았다. 새로운 연구소의 보안 설계는 전문가에게 맡겼고, 퇴근 시간도 팀원들과 공유했다.“신경망 자가 안정화가 확인됐습니다.”담당의가 두 사람에게 결과지를 보여 줬다.“특정 음성이나 접촉이 없어도 정상 범위를 유지합니다. 정기검진만 받으시면 됩니다.”태혁은 완치 판정을 받았다.기존 30일 계약은 납치 사건 뒤 의료진의 권고로 한 차례 연장됐고, 이날 60일 차를 끝으로 공식 종료됐다.펜트하우스로 돌아온 서우는 자신의 방에서 캐리어를 꺼냈다. 새 연구법인 사무실과 가까운 곳에 작은 아파트를 구해 두었다.보증금은 해고 무효 보상금과 돌려받은 급여로 마련했다. 태혁이 더 넓고 안전한 집을 알아봐 주겠다고 했지만, 서우는 중개사와 함께 직접 방을 보고 계약했다. 책상과 소파도 자신의 카드로 골랐다.태혁의 도움이 싫어서가 아니었다. 도움을 받을지 말지, 어느 정도 받을지를 자신이 정하는 생활을 시작하고 싶었다.옷을 접어 넣는 동안 마음이 이상할 만큼 무거웠다.이 방에는 처음 왔을 때의 경계와 첫 키스 뒤의 혼란, 납치에서 돌아와 잠들지 못하던 밤이 모두 남아 있었다.책상 서랍에는 루시안 기록이 든 저장 장치가 있었고, 침대 옆에는 태혁이 새벽마다 가져다 둔 물컵 자국이 희미했다.떠나는 건 도망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 집에서 시작된 관계를 다른 공간에서도 계속할 수 있는지 확인하는 일이었다.서우는 새집 열쇠를 손바닥 위에서 굴렸다. 작고 평범한 열쇠였지만, 처음으로 누구의 허락도 없이 고른 자신의 문을 열어 줄 물건이었다.서우는 마지막으로 창문을 열었다. 늦가을 바람이 방
강승현은 현장에서 납치 교사와 특수감금 혐의로 체포됐다.압수된 노트북에서는 박진태와 주고받은 과거 메시지까지 복구됐다. 차량 정비업체에 돈을 보내 브레이크 제어 장치를 손댄 정황, 사고 뒤 의료진에게 연명치료 중단을 압박한 기록도 나왔다.수사는 경영권 다툼을 넘어 3년에 걸친 살인미수와 증거 조작으로 확대됐다.강승현은 조사 내내 태혁이 AI에 조종당했다고 주장했지만, 신경과 전문의와 독립 감정팀은 그의 판단 능력에 문제가 없다고 확인했다.그의 휴대전화에는 외주 보안요원과의 거래 내역, 원본 키 탈취 지시, 해외 도피용 선박 예약까지 남아 있었다. 박진태도 조사 과정에서 3년 전 차량 사고 조작에 가담한 사실을 진술했다.며칠 뒤 검찰은 강승현을 살인미수,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법 위반, 납치 교사 혐의로 구속 기소했다.태성그룹 이사회는 그의 모든 직위를 해임했다.서우는 병원에서 손목 치료를 받은 뒤 펜트하우스로 돌아왔다.처음 며칠은 지하 주차장 엘리베이터 소리만 들어도 몸이 굳었다. 잠들었다가 복면을 쓴 남자들이 다시 나타나는 꿈을 꾸기도 했다.태혁은 같은 침대에서 자자고 요구하지 않았다. 서우의 방문 밖 거실 소파에서 밤을 보내다가, 악몽에 깬 서우가 이름을 부르면 그때 들어왔다.“여기 있어.”예전에는 서우가 그에게 해 주던 말이었다. 이번에는 태혁이 같은 문장을 반복했다.서우가 숨을 고를 때까지 그는 손을 내밀어도 잡지 않았다. 그녀가 먼저 손가락을 얹은 뒤에야 조심스럽게 감쌌다. 태혁은 작은 상처 하나에도 의료진을 세 번이나 불렀다.“진짜 괜찮아요.”“멍이 아직 남았어.”“보라색에서 노란색으로 바뀌었으니 낫는 중이에요.”태혁은 손목에 연고를 바르다 멈췄다.“새 밴드는 만들지 않겠다.”태혁은 부서진 밴드의 잔해를 서우에게 보여 주지 않았다. 사건을 떠올리게 할까 봐 폐기하려 했지만, 서우는 일부 센서 데이터를 연구용으로 보존하자고 했다.“응급 신호가 실제로 어떻게 작동했는지 분석하면 다른 사람도 살릴 수 있어요.”“지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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