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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불온한 정착: Chapter 11 - Chapter 20

322 Chapters

11화

사라의 시선이 천천히 아래로 떨어졌다.입술이 몇 번 달싹였지만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결국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뿐이었다.“……죄송해요.”재희는 눈물을 닦지도 않았다.사라는 고개를 숙인 뒤 상철을 바라봤다.혹시 한 번쯤은 자신을 봐주지 않을까.그런 기대가 아직 남아 있는 자신이 우스웠다.하지만 상철의 시선은 끝까지 아들의 사진에만 머물러 있었다.사라는 애써 입꼬리를 올렸다.“갈게, 오빠.”서후에게 작은 인사를 남기고 돌아섰다.붙잡는 사람은 없었다.추모공원을 빠져나올 때까지 사라는 울지 않았다.그날 오후.“오빠, 오늘 저녁에 사라 부르자.”외출 준비를 하던 강수가 서희를 돌아봤다.“민사라?”“응. 셋이 같이 밥 먹자.”“갑자기?”“친구랑 밥 먹는데 이유가 있어야 돼?”서희가 웃으며 강수의 팔을 잡았다.“같이 장 보러 가자. 사라 좋아하는 거 해주게.”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집 근처 대형마트였다.카트를 미는 건 강수였고, 그 안을 채우는 건 대부분 서희였다.“고기는 이거.”고기 한 팩.“새우도 좋아하고.”새우 한 팩.“버섯도.”강수가 어느새 절반 가까이 찬 카트를 내려다봤다.“다 민사라 먹일 거냐?”“응.”“너보다 많이 먹겠는데.”“사라 진짜 잘 먹어. 몸만 작지.”서희가 웃으며 다시 채소를 골랐다.오늘이 무슨 날인지 그녀는 알고 있었다.민서후의 기일.오랜 친구인 만큼 사라의 과거도 알고 있었다.어린 시절 여러 번 입양과 파양을 반복했다는 것.일곱 살에 서후의 집으로 입양되어 그곳을 진짜 가족이라고 믿었다는 것.그리고 서후가 죽은 뒤 다시 혼자가 되었다는 것도.그래서 오늘만큼은 사라를 혼자 두고 싶지 않았다.그렇다고 그 이야기를 강수에게 할 생각은 없었다.사라의 상처였다.친구라는 이유만으로 대신 꺼내 보여줄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었다.“술도 사자.”서희가 주류 코너로 방향을 틀자 강수가 카트를 세웠다.“또 마시려고?”“사라 오는데 술이 빠지면 섭섭하지.”“둘 다 적당히 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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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사라는 제 뺨을 손바닥으로 한번 쓸더니 아무렇지 않게 신발을 벗었다. “아, 이거?” 묻기도 전에 먼저 나온 말이었다. 서희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벌레.” “벌레?” “응. 완전 큰 거.” 사라는 두 손가락을 벌려 크기까지 설명했다. “얘가 자꾸 내 얼굴 앞에서 얼쩡거리잖아. 그래서 내가 죽인다고 이렇게.” 짝―! 제 손바닥으로 허공을 내리치는 시늉을 했다. “했는데.” 사라가 잠깐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걔는 날아가고 내가 내 뺨을 때렸어.” 정적이 흘렀다. 강수의 눈썹이 천천히 올라갔다. “……벌레를 잡다가?” “네.” “네가 네 얼굴을 때렸다고?” “네.” 사라는 당당했다. “걔가 생각보다 빨랐어요.” 서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사라를 오래 봐온 만큼 알고 있었다. 저건 거짓말이었다. 그리고 굳이 저렇게까지 우스운 거짓말을 한다는 건 지금은 아무것도 묻지 말아달라는 뜻이었다. 서희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래서 벌레는?” 강수가 물었다. “놓쳤죠.” “너만 맞고?” “그러니까 열받는다니까요.” 사라가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거실로 들어갔다. “와, 냄새 미쳤다. 나 진짜 배고파.” 강수는 그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봤다. 말이 될 리 없었다. 하지만 옆에 선 서희가 더 이상 묻지 않는 것을 보고 그 역시 입을 다물었다. 식탁에 앉은 사라는 언제 그랬냐는 듯 눈을 반짝였다. “이거 다 나 먹으라고 한 거야?” “응.” “김서희, 나랑 결혼할래?” “나 유부녀야.” “아, 맞다.” 사라가 강수를 힐끗 봤다. “경쟁자가 너무 세네.” “밥이나 먹어.” 강수가 고기를 사라의 앞접시에 내려놓았다. 사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저씨가 구웠어요?” “왜.” “의외라서.” “뭐가.” “회장님도 고기를 구울 줄 아는구나.” “고기 굽는데 직급이 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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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시간이 꽤 늦었는데도 사라는 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소파 한쪽을 차지하고 앉아 서희가 깎아준 과일을 하나씩 집어 먹으며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술도 제법 마셨다.평소라면 취기가 오를수록 더 시끄러워졌을 텐데 오늘은 이상하게 얌전했다.물론 사라 기준에서였다.“아저씨.”“왜.”“저거 재미없죠?”맞은편에 앉아 있던 강수가 화면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네가 보자며.”“제가 재미있다고는 안 했잖아요.”“그럼 왜 틀었어.”“혹시 재미있을까 봐.”강수가 어이없다는 듯 사라를 바라봤다.서희가 옆에서 웃음을 터뜨렸다.“사라 원래 저래. 영화도 예고편 보고 재미없을 것 같다고 해놓고 끝까지 봐.”“중간에 재미있어질 수도 있잖아.”“그래서 재미있어진 적 있어?”“없어.”너무 당당한 대답에 서희가 다시 웃었다.사라도 따라 웃었다.잘 먹고, 잘 떠들고, 잘 웃었다.조금 전까지 있었던 일은 전부 잊은 사람처럼.하지만 강수는 이제 그 웃음을 전부 같은 것으로 보지 않았다.술잔이 비었는데도 한참 동안 다시 채우지 않는 손.휴대전화 화면을 몇 번 확인하면서도 누구에게도 연락하지 않는 모습.그리고 가끔 대화가 끊어질 때면 멍하니 허공에 머무는 시선.그럴 때마다 사라는 누군가 자신을 보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다시 웃었다.밤 열한 시가 가까워졌다.서희가 시간을 확인했다.“사라야, 늦었는데 내가 택시 불러줄까?”“응?”사라가 휴대전화를 들었다가 내려놓았다.평소 같으면 벌써 일어나 가방부터 챙겼을 시간이었다.어디서든 잘 놀았고, 떠날 때가 되면 미련 없이 일어나는 게 민사라였다.그런 사라가 오늘은 이상하게 꾸물거렸다.쿠션 모서리를 만지작거리던 사라가 서희를 올려다봤다.“서희야.”“응.”잠깐 망설였다.아주 잠깐.“나 오늘 자고 가도 돼?”서희의 얼굴에서 웃음이 멈췄다.강수의 시선도 사라에게 향했다.사라는 두 사람의 반응을 보더니 금세 능청스럽게 웃었다.“왜 그렇게 봐? 싫으면 간다?”“아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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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새벽 두 시가 넘어가자 넓은 집 안은 완전히 고요해졌다.거실에 남아 있던 술병과 접시는 이미 치워진 뒤였고, 서희가 내준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사라는 손님방 침대에 엎어진 채 깊이 잠들어 있었다. 낮부터 제대로 먹지 못한 데다 저녁 내내 술까지 마신 탓인지 베개에 머리를 대자마자 잠든 참이었다.그렇게 모두가 잠든 줄 알았던 시간.끼익―고요한 안방에서 낮은 소리가 새어 나왔다.“하흣…….”서희가 급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하얀 베개 위로 흩어지고 가쁜 숨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바로 곁에 있는 강수의 넓은 어깨를 붙잡은 손에도 힘이 들어갔다.끼익, 끼익―침대가 다시 낮게 울었다.“오빠…….” “왜.”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은 강수의 낮은 목소리와 달리 서희의 목소리는 잔뜩 흐트러져 있었다. 서희는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가 겨우 고개를 들었다.“살살해줘…… 집에 사라 있어.”강수는 별로 신경 쓰이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자잖아.”“그래도…… 하, 들으면 어떡해.”“방 멀어.” “오빠는 진짜…….”서희가 민망한 듯 그의 어깨를 살짝 밀었다. 그러나 강수는 그런 서희의 손을 잡아 제 쪽으로 당겼고, 금세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다시 사라졌다.결혼한 뒤에도 강수와 서희의 관계는 나쁘지 않았다.오히려 좋은 편이었다.강수에게 서희는 자신이 살아온 세계와는 전혀 다른 여자였다. 피와 폭력이 당연했던 사뇌파의 보스에게 아무 조건 없이 웃어주고, 얼굴의 흉터를 보고도 무서워하기보다 아프지 않았느냐고 먼저 물었던 여자. 처음에는 그 부드러움이 낯설었고, 나중에는 그 따뜻함을 놓치고 싶지 않아 결혼했다.서희 역시 그런 강수를 사랑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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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아침 햇살이 거실의 커다란 통유리를 타고 길게 들어올 무렵, 주방에서는 구운 달걀과 베이컨 냄새가 퍼지고 있었다. 앞치마를 두른 서희는 프라이팬을 뒤집는 한편 따뜻하게 데운 국의 간을 확인했고, 식탁에는 이미 씻고 나온 강수가 반듯한 셔츠 차림으로 앉아 있었다.그의 손에는 요즘 보기 드문 종이신문이 펼쳐져 있었다. 경제면을 훑던 강수는 옆에 놓인 잔을 들어 서희가 직접 갈아준 토마토 주스를 한 모금 마셨다.“오빠, 계란 하나 더 먹을래?”“됐어.”“아침은 제대로 먹어야지.”“먹고 있잖아.”서희는 입으로는 잔소리하면서도 강수의 접시에 구운 달걀 하나를 더 올려놓았다. 강수 역시 익숙한 일인 듯 아무 말 없이 신문을 한 장 넘겼다.그때 손님방 문이 열렸다.복도 끝에서 나타난 사라의 몰골은 처참했다. 눈은 제대로 뜨지도 못했고, 밤새 베개와 싸우기라도 한 듯 긴 머리카락은 사방으로 뻗쳐 제비집을 만들어놓았다. 서희가 빌려준 넉넉한 티셔츠 차림으로 비척비척 걸어온 사라는 빈 의자를 당겨 강수의 맞은편에 털썩 주저앉더니 그대로 식탁에 이마를 박았다.“사라야, 잘 잤어?”“아니.”잠에 절어 웅얼거리는 목소리에 서희가 뒤를 돌아봤다.“왜?”“고양이 때문에 늦게 잤네.”신문을 넘기던 강수의 손이 딱 멈췄다.“고양이?”아무것도 모르는 서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우리 집에 고양이가 어디 있어?”사라가 식탁에서 얼굴을 아주 조금 들었다. 잠에 취한 눈이 신문 너머의 강수를 향했다가 다시 스르르 감겼다.“있던데.”“어디?”“몰라. 발정 났는지 새벽에 계속 울더라고.”신문 한쪽이 미세하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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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주말이 끝난 월요일 아침, CH건설 회장실 앞 비서실은 출근 시간부터 분주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회장실 출입문과 가장 가까운 곳에는 비서실장 한정민의 데스크가 있었고, 바로 옆에는 보조 비서 민사라의 자리가 붙어 있었다.정민은 태블릿에 띄운 일정표와 모니터를 번갈아 보며 강수의 하루 일정을 확인하는 중이었다. 오전 아홉 시 임원 보고를 시작으로 협력업체 미팅과 현장 보고까지 빼곡하게 잡힌 일정 사이에 변경된 시간을 체크하는 그의 손은 쉴 틈이 없었다.그 옆에서 사라는 핫바를 먹고 있었다.출근길 편의점에서 사 온 핫바를 한 손에 들고 야금야금 베어 먹는 모습이 한가롭기 짝이 없었다.“민사라 씨.”“네.”“아침 식사는 밖에서 하고 들어오라고 했습니다.”“이거 식사 아닌데요.”“그럼 뭡니까.”“핫바.”정민이 말없이 사라를 바라봤다.“왜요. 맞잖아요.”저런 태도와 달리 정민이 출근하자마자 부탁한 자료는 이미 정리해 메일로 보내놓은 뒤였다. 일머리는 빠르고 눈치도 좋은데 하는 짓은 도무지 비서답지 않은 여자였다.그때 엘리베이터 도착음이 울렸다.정민이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고, 사라도 핫바를 문 채 고개를 돌렸다. 검은 정장을 입은 강수가 긴 보폭으로 복도를 걸어오고 있었다.“좋은 아침입니다, 회장님.”정민이 인사했다.사라는 핫바를 든 손을 살랑살랑 흔들었다.“하이, 들소.”강수의 걸음이 멈췄다.정민의 고개가 천천히 사라에게 돌아갔다.“……들소?”강수는 말없이 사라를 내려다봤다. 주말 아침 제 집 식탁에서 자신을 들소라고 부르며 웃어대던 여자가 그 별명을 회사까지 들고 왔다.“민사라.”“네?”“회사다.”낮고 짧은 한마디.사라는 그제야 핫바를 내려놓고 언제 장난쳤느냐는 듯 허리를 꾸벅 숙였다.“좋은 아침입니다, 회장님.”강수는 눈을 가늘게 떴다가 그대로 회장실로 들어갔다.문이 닫히자 정민이 사라를 돌아봤다.“왜 들소입니까?”“실장님은 몰라도 돼요.”“왜요?”사라가 남은 핫바를 입에 넣으며 씩 웃었다.“비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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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덕배의 시선이 강수에게 꽂혔다.조금 전까지 삼십억이 사라진 장부를 들여다보던 얼굴에는 어느새 장난기가 번져 있었다. ‘들소’라는 단어가 누구를 가리키는지는 굳이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이 건물 안에서 감히 차강수에게 저런 별명을 붙이고, 그것도 회장실 문밖에서 아무렇지 않게 떠들 여자는 민사라밖에 없었다.덕배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억지로 삼키며 입꼬리를 씰룩였다.“형님, 벌써 이쁜이 맛보셨어요?”정민이 고개를 숙였다.괜히 눈이 마주쳤다가는 웃음이 터질 것 같았다.강수는 아무런 표정 없이 담배 연기만 천천히 뱉었다. 그러다 서늘한 눈을 들어 덕배를 한번 바라봤다.“뒤지고 싶냐.”“아니, 그게 아니라 들소라잖아요.”“닥쳐.”덕배가 결국 큭큭 웃었다. 사라가 왜 하필 들소라는 별명을 붙였는지 혼자 별의별 상상을 다 하는 얼굴이었다. 강수는 더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듯 재떨이에 담배를 눌러 껐다.그런데 회장실 밖의 소란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오히려 조금 전보다 목소리가 커지고 있었다.“아니, 그니까 우리 형님 찾아오는데 무슨 예약이야!”낯선 남자의 거친 목소리가 문 너머까지 울렸다.덕배의 웃음이 조금 옅어졌다.정민 역시 미간을 좁혔다.밖에서는 사라가 자신의 데스크 앞을 막아선 덩치 큰 남자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사뇌파의 말단 조직원인 남자는 강수를 만나겠다며 막무가내로 비서실까지 올라온 참이었다. 자신이 누구 밑에서 일하는지를 몇 번이나 떠벌렸지만 사라에게 그런 건 아무 의미가 없었다.“그러니까 그 형님인지 동생인지 만나려면 먼저 약속을 잡으시라고요.”“야, 너 내가 누군지 몰라?”“네. 모르는데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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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바닥에 떨어진 마카롱 옆으로 사라의 구두 끝이 반걸음 밀렸다.조금 전까지 말로만 으르렁거리던 남자가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사라의 어깨를 거칠게 밀친 탓이었다. 작은 몸이 휘청거리자 사라는 데스크 모서리를 짚어 가까스로 중심을 잡았다.순간 표정이 싹 지워졌다.“너 지금 나 밀었냐?”“그러게 누가 주둥이를 함부로 놀리래?”남자가 다시 한 걸음 다가왔다.사라는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훌쩍 큰 남자를 올려다보면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소매를 걷어붙이며 턱을 까딱했다.“왜. 이번엔 때리게?”“이게 진짜 겁대가리가 없네.”남자의 손이 올라가려던 순간이었다.철컥.회장실 문이 열렸다.먼저 나온 정민의 얼굴이 굳었고, 그 뒤를 따라 나오던 덕배 역시 웃음기 하나 없는 눈으로 상황을 훑었다. 마지막으로 모습을 드러낸 강수의 시선이 남자의 올라간 손에서 시작해 데스크를 짚고 선 사라에게 닿았다.비서실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남자의 얼굴이 굳었다.“……형님.”사라는 눈을 깜빡였다.강수는 대답하지 않았다.시선이 사라의 어깨에 잠깐 머물렀다가 바닥에 처참하게 떨어진 분홍색 마카롱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다시 남자를 향했다.“뭐 하는 거냐.”낮은 목소리였다.남자가 급하게 손을 내렸다.“아닙니다, 형님. 제가 급하게 말씀드릴 게 있어서 왔는데 이 여자가 자꾸 막아서…….”“이 여자가?”사라의 눈썹이 확 올라갔다.“야. 내가 예약하고 오랬지 언제 오지 말랬어?”“넌 좀 빠져.”“싫은데?”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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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강수의 눈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남자는 회장실 문이 닫힌 것을 한 번 확인한 뒤 조금 전보다 목소리를 낮췄다. 비서실에서 사라와 악을 쓰며 싸우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차강수 앞에 선 지금, 그는 사뇌파의 가장 아래에서 움직이는 조직원일 뿐이었다.“다른 쪽 애들이었습니다. 처음 보는 놈들이었는데 하 부장이 직접 차에 태웠습니다.”“어디서.”“인천 쪽입니다. 새벽 두 시쯤이었습니다.”덕배가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하 부장은 사뇌파에서 십 년 가까이 밥을 먹은 놈이었다. 관리하는 사람도, 움직이는 돈도 적지 않았다. 그런 인간이 제 밑의 조직원들에게조차 알리지 않고 외부 사람을 만났다면 가볍게 넘길 일은 아니었다.더구나 지금 삼십억이 비었다.“얼굴은 봤어?”정민의 물음에 남자가 고개를 저었다.“멀어서 제대로는 못 봤습니다. 근데 차 번호는 찍어놨습니다.”휴대폰을 건네받은 정민이 사진을 확인했다. 검은 세단 한 대가 어둠 속에 희미하게 찍혀 있었다.강수는 화면을 잠깐 내려다봤다.“하 부장은 네가 본 거 아나.”“모를 겁니다.”“모르게 해.”짧은 말이 떨어졌다.“평소처럼 붙어 있어. 누구 만나고 어디 가는지만 확인해. 혼자 뭘 하려고 들지는 말고.”“네, 형님.”“가봐.”남자가 허리를 숙이고 회장실을 빠져나갔다.문이 열리자 자기 데스크에 앉아 모니터를 보던 사라가 고개를 들었다. 남자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그녀의 시선은 곧장 그의 손으로 향했다.“내 오천 원.”남자가 황당한 얼굴로 멈췄다.“형님이 줬잖아.”“그건 회장님 돈이고. 버린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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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화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온 말에 강수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덕배가 몸을 앞으로 기울였고 정민 역시 강수의 얼굴을 살폈다. 좀처럼 표정이 변하지 않는 남자였기에 미세하게 좁혀진 미간만으로도 전화 내용이 심상치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어디야.”잠시 상대의 말을 듣던 강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거기 있어. 움직이지 말고.”통화가 끊겼다.“뭐랍니까?”덕배가 묻자 강수는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하 부장 밑에 있던 놈 하나가 죽었어.”덕배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완전히 사라졌다.“누가 죽였답니까?”“모른다.”강수는 정민이 들고 있던 휴대폰을 가져가 조금 전 말단 조직원이 찍어온 검은 세단 사진을 다시 확인했다. 하 부장이 외부 사람들과 접촉한 바로 다음 날, 그의 밑에서 장부 쪽 일을 돕던 사람이 죽었다. 우연이라고 보기에는 시기가 너무 절묘했다.“하 부장은요?”“자기가 발견했대.”덕배가 헛웃음을 흘렸다.“냄새나는데.”“그러니까 직접 본다.”강수가 재킷을 집어 들었다.정민도 곧장 움직였다. 조금 전까지 회장과 비서실장으로 앉아 있던 두 사람에게서 회사원의 흔적은 순식간에 사라졌다.덕배가 먼저 문을 열었다.회장실 밖은 언제 소란이 있었냐는 듯 평온했다.사라는 자기 데스크에 앉아 새로 사 온 마카롱 상자를 열어놓고 있었다. 조금 전 받아낸 오천 원까지 보태 점심시간도 되기 전에 아래층 카페를 다녀온 모양이었다.강수가 걸음을 멈췄다.“일 안 해?”“하고 있는데요.”사라는 모니터에서 눈도 떼지 않은 채 분홍색 마카롱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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