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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불온한 정착: Chapter 1 - Chapter 10

14 Chapters

1화

탁, 탁―늦은 밤, 청담동 80평대 고급 아파트 안방에는 흐트러진 침구가 부딪히는 소리와 뜨겁게 뒤엉킨 두 사람의 거친 숨이 은밀하고 밀도 높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은은한 무드등 아래, 거대한 체구의 남자가 작은 여자의 하얀 몸을 완전히 가리듯 내려다보고 있었다.37세, 국내 굴지의 CH건설 회장이자 전국 최대 조직 사뇌파의 보스 차강수.벗어 던진 와이셔츠 아래 드러난 구릿빛 상체에는 칼에 베이고 찔리며 살아온 흔적인 오래된 흉터들이 어지럽게 남아 있었다. 하드 투블럭 아래 오른쪽 얼굴을 길게 가로지른 흉터까지 더해진 그는 가까이 다가가는 것만으로도 상대를 얼어붙게 만드는 남자였다.그런 강수의 품 안에서 거리낌 없이 가쁜 숨을 흘리고 있는 여자는 25세의 민사라였다.“하아…… 오빠.”사라의 가느다란 허벅지가 강수의 몸 양옆으로 벌어져 있었다. 하얀 팔은 넓은 어깨를 감싸 안았고, 160cm의 작은 몸은 189cm에 달하는 그의 거대한 체구 아래 거의 가려질 정도였다.강수의 커다란 손이 가느다란 허리를 움켜쥐고 제 쪽으로 바짝 끌어당겼다.순간 사라의 입술 사이로 뜨거운 숨이 터졌다.입술이 맞닿았다.처음에는 짧았던 입맞춤이 금세 거칠고 짙어졌다. 사라가 그의 목덜미를 끌어안으며 더 가까이 달라붙자 강수 역시 작은 몸을 품 안에 단단히 가뒀다. 떨어졌다 다시 맞닿는 입술 사이로 가쁜 숨이 뒤섞였다.“잠깐…… 숨 좀 쉬자.”사라가 겨우 얼굴을 돌리며 웃었다.강수가 그녀의 붉어진 입술을 엄지로 천천히 훑었다.“네가 먼저 매달렸잖아.”“내가 언제?”뻔뻔하게 눈을 동그랗게 뜨는 얼굴을 보던 강수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올라갔다.세상 사람들은 좀처럼 볼 수 없는 웃음이었다.피비린내 나는 세계에서 평생을 살아온 차강수가 유일하게 경계를 풀어버리는 사람.민사라.3년 동안 어디에도 매이지 않고 세상을 떠돌던 여자였다. 오는 남자를 막지 않았고 떠나는 남자를 붙잡지도 않았다. 한곳에 오래 머무는 것조차 답답해하던 사라가 지난 1년 동안 처음으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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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강수의 시선이 사라의 얼굴에 오래 머물렀다.사진 속에서 몇 번 본 여자였다.서희가 휴대전화를 들이밀며 자랑하듯 보여주던, 3년째 세계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니는 친구. 어느 날은 태국 바닷가에 있다가 한 달 뒤에는 유럽의 작은 골목에서 웃고 있었고, 또 어느 날은 이름조차 생소한 도시에서 술잔을 들고 있었다.한곳에 붙어 있지 못하는 애라고 했다.오는 남자 안 막고 가는 남자 안 잡는 애라며, 서희는 사라 이야기를 할 때마다 걱정 반 웃음 반이었다.그런데 직접 마주한 민사라는 사진보다 훨씬 작았고, 훨씬 눈에 띄었다.무엇보다 겁이 없었다.강수의 얼굴에 길게 자리 잡은 흉터를 처음 본 사람들은 대부분 시선을 피했다. 덩치에 한 번 눌리고, 눈빛에 두 번 움츠러들었다.사라는 정반대였다.고개를 한껏 젖힌 채 대놓고 그를 구경하고 있었다.“생각보다 더 크시네요.”강수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뭐가.”“키요.”사라가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하고는 그의 오른쪽 얼굴로 시선을 옮겼다.“흉터도 사진에서는 잘 안 보였는데.”처음 보는 남자의 흉터를 저렇게 빤히 바라보는 여자도 처음이었다.강수가 낮게 물었다.“안 무섭나?”“뭐가요?”“나.”잠깐 눈을 깜빡이던 사라가 피식 웃었다.“제가 왜요?”정말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강수가 묘한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던 순간, 안방 문이 열렸다.“여보……?”헝클어진 중단발에 잠이 덜 깬 얼굴로 나온 서희가 강수를 발견하자마자 환하게 웃었다.“왔어?”강수의 분위기가 눈에 띄게 누그러졌다.“왜 나왔어. 자지.”“목말라서.”휘청거리는 서희가 다가오자 강수는 익숙하게 허리를 받쳤다. 조금 전까지 사라를 내려다보던 차가운 얼굴은 온데간데없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고, 술기운으로 붉어진 볼까지 손등으로 가볍게 쓸었다.“얼마나 마신 거야.”“조금.”“이게 조금 마신 얼굴이야?”말은 타박하면서 목소리는 한없이 부드러웠다.그 광경을 지켜보던 사라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서희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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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가는 동안 강수는 더 이상 흉터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사라 역시 눈치 없이 같은 질문을 두 번 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대신 조수석에 올라타자마자 안전벨트를 매고 창밖을 바라봤다.잠시 뒤 검은 세단이 조용히 청담동을 빠져나갔다.차 안에는 강수에게서 풍기는 묵직한 스킨 향이 희미하게 배어 있었다. 사라는 창문에 머리를 기대고 가끔 옆을 흘끗거렸다.운전하는 모습도 성격 그대로였다.말이 없고, 움직임에 군더더기가 없었다. 한 손으로 핸들을 잡은 채 정면만 바라보는 옆얼굴에는 오른쪽을 길게 가로지른 흉터가 선명했다.무섭다기보다는 이상하게 궁금한 남자였다.“회장님.”“왜.”“서희 진짜 좋아하죠?”강수의 시선은 여전히 전방에 있었다.“갑자기 그건 왜 묻지.”“그냥요. 서희가 맨날 남편 자랑하거든요.”사라가 피식 웃었다.“처음에는 열두 살이나 많은 아저씨랑 무슨 재미로 사나 했는데, 오늘 보니까 알겠네.”신호에 걸린 차가 멈췄다.강수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아저씨?”“서른여섯이면 저한테 아저씨 맞죠.”기가 막힌 듯 바라보는 강수 앞에서 사라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잠시 뒤 신호가 바뀌자 강수가 다시 차를 출발시켰다.“주소.”사라가 주소를 불러주고는 웃음을 삼켰다.서희가 왜 남편을 무뚝뚝하다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말은 정말 재미없게 하는데 이상하게 사람 말을 전부 들어준다.그렇게 도착한 사라의 집 앞.차가 멈추자 사라는 안전벨트를 풀었다.“오늘 고마웠어요.”강수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사라는 문을 열었다가 다시 몸을 돌렸다.“아, 그리고 회장님.”강수가 바라봤다.사라가 장난스럽게 웃었다.“사진보다 실물이 훨씬 섹시해요.”쾅.하고 싶은 말만 던진 사라는 그대로 문을 닫았다.강수는 한동안 운전석에 앉아 멀어지는 작은 뒷모습을 바라봤다.기가 막혔다.처음 보는 남자에게 흉터가 왜 생겼냐고 묻고, 열두 살 많은 아저씨라 놀리더니 마지막에는 섹시하다는 말까지 던지고 사라졌다.강수의 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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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사라는 순간적으로 주변을 훑었다. 비서실 직원들의 시선이 자신과 강수에게 동시에 꽂혀 있었다. 여기서 며칠 전 술 취한 서희를 집까지 데려다줬다가 그의 차를 얻어 타고 귀가했다는 사실까지 줄줄이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더군다나 상대는 친구의 남편이기 전에 이 회사의 회장이었다. 사라는 곧바로 생긋 웃었다. “회사에서는 처음 뵙습니다, 회장님.” 능청스러운 대답이었다. 강수의 눈이 가늘어졌다. 저 작은 머리로 상황 판단은 제법 빠른 모양이었다. “그렇군.” 짧은 한마디를 남긴 강수가 그대로 회장실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자 사라는 그제야 작게 숨을 내쉬었다. 옆에 있던 한정민이 묘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회장님하고 아는 사이입니까?” “제 친구 남편이에요.” “……회장님이요?” “네.” 사라에게는 너무 당연한 대답이었지만 한정민에게는 아닌 듯했다. 잠시 그녀를 바라보던 그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개인적인 친분은 회사에서 드러내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저도 그럴 생각이에요.” “다행이군요.” “근데 실장님.” “네.” “원래 말투가 그렇게 딱딱해요?” 한정민이 처음으로 말을 잃었다. 사라는 아무렇지 않게 자기 자리로 향했다. 그날부터 본격적인 업무가 시작됐다. 사라가 맡은 일은 회장 일정 보조와 회의 자료 정리, 방문객 응대, 비서실 공통 업무였다. 자유롭게 세계를 돌아다니다 대기업 비서실에 앉아 있는 모습만 보면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았지만 의외로 일머리는 빨랐다. 한 번 설명한 업무는 곧잘 기억했고 모르는 것은 바로 물었다. 눈치까지 빨랐다. 문제라면 입이었다. “실장님, 회장님 오늘 회의 몇 개예요?” “다섯 개입니다.” “와, 저렇게 살면 안 답답한가.” “민사라 씨.” “네. 일할게요.” 입은 쉬지 않으면서 손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그 모습을 회장실 유리 너머에서 강수가 몇 번이나 바라봤다는 사실을 사라는 몰랐다. 오전 회의 자료를 들고 처음 회장실에 들어갔을 때도 마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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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강수가 액정 화면을 내려다보는 사이, 옆에 앉아 있던 사라의 휴대전화도 곧이어 울렸다.[김서희]― 사라야, 우리 남편도 거기 있지?사라는 피식 웃으며 옆을 돌아봤다.강수 역시 자신을 보고 있었다.“왜.”“서희가 회장님 거기 있냐는데요?”“있다고 해.”“말 안 해도 그럴 건데요.”사라는 곧바로 답장을 보냈다.― 응ㅋㅋ 내 옆에 앉아 있어. 걱정 마. 내가 술 적당히 먹여서 보내줄게.답장은 거의 즉시 돌아왔다.― 우리 남편 술 세거든? 네 걱정이나 해ㅋㅋ 재밌게 놀아사라가 화면을 강수에게 보여줬다.“아내분께서 회장님 말고 제 걱정이나 하라는데요?”“틀린 말은 아니군.”“저 진짜 술 세다니까.”“아까부터 그 말을 제일 많이 하고 있어.”“못 믿겠으면 끝까지 있어보시든가.”사라는 보란 듯 소주잔을 비웠다.강수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올라갔다.그 뒤로 회식 분위기는 빠르게 달아올랐다.그 중심에는 단연 사라가 있었다.입사한 지 며칠밖에 되지 않았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처음에는 회장이 합석했다는 사실에 눈치를 보던 직원들도 사라가 끊임없이 말을 붙이고 술잔을 부딪치자 하나둘 긴장을 풀었다.“자, 실장님도 한잔!”“저 마시고 있습니다.”“그건 술이 아니라 입술만 적시는 거잖아요.”“민사라 씨.”“왜 자꾸 이름만 불러요. 좋아해요?”푸흡―누군가 마시던 술을 뿜을 뻔했다.한정민이 미간을 짚었고 사라는 깔깔거리며 웃었다.강수는 말없이 잔을 기울였다.시끄러운 사람을 좋아하지 않았다.정확히는 필요 이상의 말과 행동으로 제 시선을 끄는 사람을 귀찮아했다.그런데 사라는 이상했다.쉴 새 없이 웃고 떠드는데도 거슬리지 않았다.오히려 사라가 웃으면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눈이 갔다.3년 동안 세계를 떠돌았다는 여자는 여행지에서 겪은 이야기도 많았다. 유럽에서 기차를 잘못 타 전혀 다른 도시까지 갔던 이야기부터 현지인들과 술을 마시다 날이 밝았던 이야기까지.“그럼 영어 잘하시겠네요?”직원 하나가 묻자 사라가 고개를 갸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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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노래가 끝난 뒤에도 한동안 사라를 향한 박수가 이어졌다.“진짜 반칙 아니야? 노래까지 잘하면 어떡해!”“앵콜! 한 곡 더!”“싫어요. 비싼 여자는 한 곡만 부르는 거예요.”사라는 능청스럽게 마이크를 내려놓고 자리로 돌아왔다.그리고 자연스럽게 강수와 눈이 마주쳤다.조금 전부터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눈이었다.“왜 그렇게 봐요?”강수는 대답 대신 술잔을 내려놓았다.“나 먼저 간다.”직원들이 일제히 몸을 일으켰다.“들어가십시오, 회장님.”강수는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 재킷을 챙겼다. 그러다 사라 앞을 지나치기 직전 걸음을 늦췄다.“적당히 마셔.”사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회장님도 잔소리해요?”강수는 대꾸하지 않고 룸을 나갔다.문이 닫히자 사라는 피식 웃었다.“서희 남편 아니랄까 봐.”그 뒤로도 술자리는 한참 이어졌다.자정을 넘기자 하나둘 고개를 떨구기 시작했고, 결국 멀쩡하게 서 있는 사람보다 취한 사람이 많아졌다.한정민은 택시를 잡아 직원들을 차례대로 태워 보냈다.마지막 직원까지 떠나고 나자 거리에 남은 사람은 정민과 사라뿐이었다.“민사라 씨도 택시 잡아드리겠습니다.”“실장님.”“네.”사라가 손가락 하나를 세웠다.“한잔 더?”정민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바라봤다.“아까 술 세다는 말, 진짜였습니까?”“이제 믿어요?”“그만 마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싫으면 저 혼자 가고.”사라가 뒤돌아 걷기 시작했다.몇 걸음 가지도 않아 정민의 한숨이 들렸다.“어디로 갈 겁니까.”사라가 뒤돌아 활짝 웃었다.“포장마차!”---새벽 한 시가 넘은 시간.두 사람은 길가 포장마차에 마주 앉아 있었다.김이 오르는 어묵탕과 소주 두 병.회사에서 단정한 수트를 입고 있던 정민은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고, 사라는 재킷을 의자에 걸쳐놓은 채 잔을 기울였다.“실장님은 여자친구 없어요?”정민의 손이 멈췄다.“있습니다.”“오.”사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있구나.”“왜 의외라는 표정입니까?”“맨날 회사에서 회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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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그날 아침 이후에도 두 사람 사이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정민은 여전히 비서실장이었고, 사라는 보조 비서였다.회사에 들어서면 서로 존댓말을 썼고 업무가 시작되면 전날 밤 어디에서 누구와 있었는지는 관심 밖이었다.다만 가끔.퇴근 시간이 겹친 날 눈이 마주치거나 술 한잔을 함께한 밤이면 굳이 말로 약속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같은 곳으로 향하는 날이 생겼다.그뿐이었다.연애도, 사랑도 아니었다.서로 외로운지 묻지도 않았고 관계에 이름을 붙이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저 서로 원할 때 만나 즐기고, 다음 날이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갔다.사라에게는 오히려 그래서 편했다.정민에게 여자친구가 있다는 사실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오늘은 안 됩니다.”퇴근 준비를 하던 정민이 먼저 말하자 사라가 고개를 들었다.“내가 뭐랬어요?”“눈이 말하고 있습니다.”“자의식 과잉이네.”사라가 피식 웃었다.“여자친구 만나러 가요?”“네.”“그럼 빨리 가요. 기다리겠다.”그게 끝이었다.다음 날 출근한 정민에게 어제 뭐 했냐고 캐묻지도 않았고 여자친구와 연락한다고 질투하지도 않았다.붙잡지 않는 여자.오는 사람을 막지 않고, 떠나는 사람도 잡지 않는 게 민사라였다.그래서 정민에게도 사라는 편했다.몸을 섞었다고 자신의 여자 행세를 하지 않았고 평소에는 친한 동생처럼 굴었다. 때로는 말 많은 직장 후배였고, 술자리에서는 죽이 잘 맞는 친구였으며, 서로 원하는 밤에만 조금 다른 관계가 될 뿐이었다.무엇보다 두 사람 모두 그 관계를 이성적인 감정으로 착각하지 않았다.정민에게 사라는 재미있고 편한 녀석이었다.사라에게 정민 역시 마찬가지였다.며칠 뒤 오후 두 시.서울 강남의 한 호텔 비즈니스 라운지에서는 CH건설과 대형 자재 협력업체의 외부 미팅이 진행되고 있었다.긴 테이블 상석에는 강수가 앉았고 오른쪽에는 정민, 그 옆에는 사라가 자리했다.사라는 태블릿 화면을 켜놓은 채 오가는 내용을 빠르게 기록하고 있었다.납품 단가와 공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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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예정보다 일찍 도착한 해외 본사 담당자는 두 명이었다.협력업체 상무가 난처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원래대로라면 전문 통역사가 동석한 상태에서 신규 자재 제안 미팅을 진행해야 했지만, 갑작스럽게 일정이 당겨지면서 준비가 꼬인 상황이었다.“통역이 삼십 분 정도 늦는다고 합니다. 회장님, 잠시 휴식하셨다가…….”“그럴 필요 없어요.”태블릿을 내려놓은 사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강수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왜.”“제가 하면 되잖아요.”사라는 너무 당연한 말을 한다는 얼굴이었다.“영어 할 줄 아나?”“네.”“어느 정도.”사라가 잠깐 고민하더니 어깨를 으쓱했다.“안 굶어 죽을 정도?”한정민이 미간을 짚었다.“민사라 씨.”“왜요. 진짜인데.”강수는 말없이 사라를 바라봤다.회의실 안에서까지 장난기가 사라지지 않는 여자였다. 그러나 조금 전 납품 일정 문제를 해결할 때만큼은 누구보다 빠르게 자료를 파악했다.“해봐.”허락이 떨어지자 사라는 곧바로 해외 담당자들에게 다가갔다.그리고 입을 연 순간.정민의 표정이 미묘하게 달라졌다.겨우 여행 회화나 가능한 수준이 아니었다.사라의 영어는 자연스러웠다. 상대의 빠른 말에도 머뭇거리지 않았고, 농담이 섞이면 웃으며 받아쳤다. 3년 동안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사람들과 부딪쳐온 시간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말투였다.무엇보다 놀라운 건 그다음이었다.신규 외장재의 내구성과 공급 조건에 관한 설명이 시작되자 사라는 상대의 말을 듣는 동시에 핵심을 정리해 강수에게 전달했다.“기존 제품보다 내후성이 강화됐고, 이번에 제안하는 제품은 고온이나 습도 변화에 따른 변형률을 낮춘 제품이래요. 국내 현장 적용 전에 샘플 테스트도 가능하고요.”강수가 물었다.“최소 발주 수량은.”사라는 즉시 영어로 질문을 전달했다.상대의 대답이 이어졌다.“기본 조건은 오천 제곱미터인데 CH건설과 장기 공급계약을 전제로 하면 첫 발주는 삼천까지 낮출 수 있답니다.”“납기는?”또다시 질문이 오갔다.“계약 후 여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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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사라의 얼굴에서 아주 잠깐 웃음이 사라졌다.언제나 장난기부터 떠오르던 눈동자가 아래로 떨어지고, 입가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씁쓸함이 스쳤다.고작 몇 초.정민이라면 그냥 지나쳤을지도 모를 만큼 짧은 순간이었다.하지만 강수는 봤다.그리고 사라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고개를 들었다.“여행 갈 돈 떨어져서요.”밝은 목소리였다.“3년이나 돌아다녔더니 통장이 텅텅 비었어요. 다시 벌어야 또 떠나죠.”옆에 있던 정민이 헛웃음을 흘렸다.“그래서 취업을 했다고요?”“돈 없으면 벌어야죠. 실장님은 돈 많아요?”“적어도 민사라 씨처럼 여행으로 탕진하진 않습니다.”“그게 얼마나 재밌는데.”사라는 태연하게 웃으며 태블릿을 가슴에 끌어안았다.“아무튼 CH건설 월급 괜찮더라고요. 열심히 모아서 또 떠날 거예요.”“언제.”강수의 질문에 사라가 눈을 깜빡였다.“뭐가요?”“언제 다시 떠날 거냐고.”“글쎄요.”사라는 천장을 올려다보며 잠시 생각했다.“돈 모이면?”가벼운 대답이었다.그런데 강수는 이상하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왜 그런지는 자신도 몰랐다.입사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직원이 언젠가 회사를 그만두고 여행을 떠난다는 게 이상할 일도 아니었다.더구나 사라는 서희에게 귀가 닳도록 들었던 여자였다.한곳에 오래 머물지 못하는 사람.마음이 가는 곳이 생기면 떠났고, 싫증이 나면 또 다른 곳으로 움직였다.정착이라는 단어와 가장 어울리지 않는 여자.그게 민사라였다.“회장님.”“왜.”“표정 왜 그래요?”사라가 고개를 기울였다.“제가 벌써 퇴사한다고 할까 봐 걱정돼요?”“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맞네.”“민사라.”“네, 회장님. 열심히 일하겠습니다.”사라는 능청스럽게 허리를 숙였다.정민이 한숨을 내쉬며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두 분 회사에서도 이러시면 제가 먼저 퇴사하겠습니다.”“실장님 돈 많다면서요. 퇴사해요.”“제가 언제 돈 많다고 했습니까?”“그럼 같이 다녀요. 제가 여행 코스 짜드릴게.”“싫습니다.”“여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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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회사로 돌아가는 차 안.사라는 창밖을 바라보며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렸다.아까 스팸이라고 둘러댄 전화. 받지 않았지만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잠시 후 짧은 진동과 함께 문자가 도착했다.[장재희]― 오늘은 오지 마. 서후도 네가 오는 거 원하지 않을 테니까.화면을 바라보던 사라의 입가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아주 잠깐이었다.곧 휴대전화를 뒤집어 무릎 위에 내려놓자 옆에 앉은 강수가 낮게 물었다.“왜.”“뭐가요?”“표정.”사라는 금세 입꼬리를 올렸다.“배고파서 그래요.”앞에 앉은 정민이 돌아봤다.“민사라 씨, 조금 전에 밥 두 공기 먹었습니다.”“실장님은 눈치가 없어.”“거짓말을 좀 그럴듯하게 하십시오.”“한창 클 때잖아요.”“스물넷입니다.”사라가 정민의 뒤통수를 향해 혀를 내밀었다.평소의 민사라였다.강수도 더는 묻지 않았다. 다만 휴대전화를 쥔 작은 손에 유난히 힘이 들어가 있다는 것만 눈에 담았다.다음 날 아침.휴일인데도 사라는 일찍 눈을 떴다.화려한 옷들로 가득한 옷장 앞에서 한참을 서 있다 단정한 검은색 원피스를 꺼냈다. 옅게 화장을 마친 뒤 거울 속 자신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렸다.잘 웃는 민사라.아무렇지 않은 민사라.“됐어.”집을 나선 사라는 꽃집에서 흰 국화를 사고 작은 케이크 하나를 샀다.매년 똑같았다.오지 말라는 연락을 받는 것도.그래도 가는 것도.추모공원에 도착한 사라는 익숙한 길을 따라 걸었다.그리고 한 자리 앞에 멈춰 섰다.민서후.사진 속 젊은 남자는 여전히 환하게 웃고 있었다.사라는 흰 국화와 케이크를 내려놓고 그 앞에 쪼그려 앉았다.“오빠.”손끝으로 사진을 살며시 쓸었다.“나 왔어.”대답이 돌아올 리 없는데도 사라는 익숙하게 말을 이어갔다.“엄마는 또 오지 말래. 나 진짜 미움 많이 받지?”피식 웃은 사라가 무릎을 끌어안았다.“그래도 나 약속 지키고 있어.”스무 살이 되면 함께 떠나기로 했었다.둘이서 세상을 돌아다니며 살자고.서후는 떠나지 못했지만 사라는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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