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씨 가문의 미래는 윤미 손에 달렸다. 앞으로 너희들도 전부 윤미의 눈치를 보며 살아가게 될 건데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예전처럼 대하냐? 눈과 머리가 달려 있는지 의문이군. 세상이 변한 것도 모르고 살고 있어?”정일범은 이은화의 호된 질책에 입도 떼지 못했다.결국 이은화는 그들에게 퇴근 후 병원에 저녁을 갖다 주라는 명령을 내렸다.집안 보스의 명령인데 어찌 거역할 수 있겠는가? 정일범은 급히 정군호에게 전화를 걸어 주방 아줌마에게 급히 음식을 준비해 병원으로 가져오도록 했다.그렇게 부자 넷은 함께 이윤미를 보러 왔다.결국 정군호의 잔소리는 정일범 형제들에게 또다시 퍼부어졌다. 정군호는 이미 전에 고향으로 돌아가 이씨 가문의 혼란한 시기를 피하라고 수차례 말했었지만 세 아들은 듣지 않고 오직 손자들만 고향으로 보냈던 것이다.적어도 후손들은 보호할 수 있으니 다행이었다.정군호는 아들들의 고집을 꺾지 못한 채 스스로도 강성을 떠나지 않고 남아있었다.이은화는 손자들이 전부 시골로 내려간 사실을 알고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다만 며느리들에게 고향에서 설을 쇠게 하고 굳이 강성으로 올 필요 없다는 말만 덧붙였다.정군호는 아내의 이 언급이 일종의 암시라고 읽었다.이은화와 이경혜의 싸움은 연말 전에 결판이 날 것이다.두 사람 중 한 명은 반드시 쓰러질 것이고 새해까지 끌지 않겠다는 의지인 듯했다.공적이든 사적이든 정군호는 이은화의 승리를 바랐다.비록 이은화가 그를 ‘늙은 내시’로 만들어 버렸더라도 그들 사이에는 자식들이 있고 손자들도 많았다.이씨 가문이 이은화의 손에 남는 한 그의 혈육들은 행복하고 안전하게 살아갈 터였다.하지만 만약 이은화가 패배한다면?이씨 가문의 모든 것은 이경혜의 손아귀로 돌아갈 것인데 그의 자식들과 손주들이 좋은 날을 보낼 리 있겠는가.지금 가지고 있는 그깟 재산만으로도 잘만 운영하면 괜찮은 삶을 살 수 있을 것이지만 문제는 그들이 제대로 운영하지 못해 뒤에서 뒷수습해주는 이은화가 없으면 빠르게 몰락해 결국
아이러니했다.피붙이 가족들은 그녀를 함정에 빠뜨리려 했지만 적대 관계인 하예진 일행은 오히려 그런 음흉한 수를 쓰지 않았다.정군호가 입을 열었다.“윤미야, 이건 나와 네 오빠들의 작은 성의야. 우리는 한 가족이고 네가 입원했으니 어찌 안 와볼 수 있겠어? 아버지도 나이가 들어 체력이 달리고 게다가 앞서 오랫동안 입원까지 했으니 널 돌볼 여력이 없구나. 하지만 네 오빠들은 젊고 힘이 있으니 얼마든지 널 돌봐줄 수 있어. 오빠들이 널 돌보는 게 불편하다면 네 형수님을 불러와 함께 있게 해도 되잖아. 자꾸 방 비서님에게 폐 끼치지 말고. 방 비서님은 어쨌든... 외간 남자잖니.”정군호는 일부러 ‘외간 남자’라는 단어를 강조했다.딸에게 방윤림과 거리를 둘 것을 상기시키려는 의도였다.병원 사람들은 사정을 모르고 아마 방윤림을 이윤미의 남편으로 여기고 있을지도 모른다.정군호는 방윤림을 좋아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가주 곁에 있는 특별 비서들을 증오했다. 그가 매번 도혁찬을 볼 때마다 공손하게 예의를 차리고 때로는 형제처럼 친하게 대했지만 사실 그의 마음속에서 가장 혐오하는 인물이 바로 도혁찬이었다.그리고 가장 증오하는 사람 역시 그였다.이유는 간단했다.도혁찬은 전군호보다도 이은화에게 더 체면이 섰고 그녀의 신뢰와 의존을 훨씬 더 받고 있었으며 무슨 일이든 도혁찬과 상의했다.그러나 정작 남편인 그에게는 무엇이든 철저히 숨겼다.정군호가 아는 것들은 이은화가 알려준 것이 전부였고 이은화가 원하지 않는다면 그는 절대 알 수 없었다.그리고... 방윤림이 이윤미를 바라보는 눈빛 속에 감추어진 감정을 정군호가 모를 리 없었다.정군호는 딸이 방윤림과 어떠한 관계든 맺는 것을 원치 않았다.방윤림은 아무것도 없는, 그냥 이윤미의 곁에 붙어 있는 개에 불과했다.정일범도 말을 이었다.“맞아, 윤미야. 형수님들을 불러와서 너를 돌보게 하자. 같이 있으면 수다도 떨고 집안 이야기도 나눌 수 있잖아. 방 비서님도 바쁠 텐데 자꾸만 신세를 지게 하면
강성의 한 병원.방금 식사를 마치고 병실 밖을 산책하려던 이윤미는 문 앞에서 정군호와 정일범 형제들과 마주쳤다.그들도 막 병실로 들어오려는 참이었다.정일범은 손에 보온 도시락 몇 개를 들고 있었고 정일군과 정일호는 함께 과일이 가득 담긴 큰 바구니를 들고 있었다.정군호는 큰 꽃다발을 안고 있었다.이윤미를 본 순간 그들은 본능적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마치 처음 보는 사람처럼 낯선 눈빛이었다.“왜 또 오셨어요?”이윤미가 차가운 표정으로 먼저 입을 열었다.그녀는 옆으로 물러서서 가족들이 병실로 들어갈 길을 내주었다.방윤림은 화장실에서 도시락 용기들을 씻고 있었다.이윤미는 하루 세끼를 오직 방윤림이 준비한 것만 먹었다. 그가 가져오는 음식을 제외한 다른 사람이 가져온 것은 입도 대지 않았다. 다시 한번 이은화에게 당할까 두려워 배달음식도 감히 먹지 못했다.병원에서 며칠을 누워있었지만 의사들은 여전히 이윤미가 어떤 약에 중독됐는지 검출하지 못했다고 했다. 하지만 그녀는 의사들이 매수당해 진실을 말하지 못하는 것으로 의심했다.‘요즘 의학이 이토록 발달했는데... 며칠이나 검사했는데도 내 몸속에 잔류 물질이 무엇인지 아직도 못 찾았다고? 그럴 리가!'그들의 말은 일단 믿지 않기로 했다.이윤미의 몸은 이미 80% 회복된 상태였다. 그 약이 자신을 그냥 잠들게 하고 사지를 무력하게 만들 뿐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는 것만 알면 그뿐이었다.그녀는 독을 씻어내기 위해 매일 깨어난 후 물을 많이 마셨고 그렇게 며칠만 버티면 서서히 정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아무래도 이윤미에 대한 모정이 남아있는 모양이었고 진짜로 죽이려는 것은 아닌 듯했다.이은화는 이윤미가 자신의 친딸이 아니었으면 진작 몇 번이고 죽였을 거라고 말했었다.병실 문 앞에 서 있는 네 사람을 본 방윤림은 무표정으로 인사만 하고는 씻은 도시락 용기들을 들고 작은 휴게실을 지나 병실 안으로 들어가 긴 카운터 위에 도시락을 올려놓았다.그 카운터는 침대 끝에 놓여 있었는데 침대와는 조금 거
예준일은 마치 홀아비처럼 집에 남아 정겨울이 돌아오는 날 만을 기다려야 했다.이번에도 먼 길을 떠나는 아내가 언제 돌아올지 알 수 없는 일이다.정겨울이 이번에 출장 가는 이유는 단 하나, 바로 한성근의 전속 의사 겸 간호 역할을 하기 위함이었다.다른 세외고수들도 함께하는 자리라 예준일도 뭐라 말할 수 없었다.“비서 할아버지께서 성씨 가문에 무사히 돌아가시면 바로 돌아올게요.”정겨울은 남편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제가 없는 동안 훈이 좀 잘 돌봐줘요. 생각해 보면 우리 아들 참 불쌍해요. 금수저로 태어났지만 엄마는 항상 자리를 비우고 보모 손에만 맡겨지니... 당신도 평일에는 바쁘니까 밤에라도 좀 신경 써줘요.”예준일이 대꾸했다.“뭐가 불쌍해? 그 훈이는 태어날 때부터 이미 세상 반을 가진 거나 다름없는데. 오히려 행복한 놈이지. 게다가 스승님께서 항상 옆에서 돌봐주시잖아. 나라는 아빠가 안중에도 없는데 내가 왜 필요해? 스승님이 달래서 재우면 그만이야.”김청산이 돌아오니 예준일의 삶은 한결 편해졌다.솔직히 그는 김청산이 예진 리조트에 정착했으면 했다. 그들 부부가 함께 장인을 모실 수 있을 테니까.어르신은 평생 자식 없이 정겨울이라는 제자 하나만을 딸처럼 키우셨는데 은퇴한 지금, 딸과 사위의 집에서 편히 지내시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게다가 김청산이 예진 리조트에서 살면 예훈이도 잘 돌봐주었기에 아빠인 예준일이 신경 쓸 일도 없어져 아내와의 둘만의 시간을 더 많이 가질 수 있었다.그야말로 일거양득이었다.장인어른께 효도하겠다더니 결국 자신이 편한 것만 생각하는 거였다.흠... 부부가 한 집안에 든 게 우연이 아니었나 보다.“지금은 일이 있어 따라갈 수 없어. 바쁘지 않으면 같이 갔을 텐데.”예준일이 아쉬워하자 정겨울은 단호히 말했다.“당신도 회사 일이 바쁜데 따라오지 않아도 돼요.”아마 정겨울은 자유로운 날개에 너무 익숙해진 모양이었다. 그들 부부가 함께 휴가를 떠날 때를 제외하면 어디로 가든 예준일이 따라오는 것을 무척 싫어했다
정겨울이 하예정에게 물었다.“집에 가져갈 게 있으면 말해요.”하예정은 고개를 저었다.“저도 오늘 막 와서 가져갈 건 없어요.”전태윤이 그녀와 우빈을 데리러 오면 그때 시댁 식구들을 위한 선물을 사 가려고 했다.정겨울도 웃으며 말을 이었다.“아! 예정 씨는 오늘 온 거죠? 저도 짐을 다 챙겼으니까 우리 얼른 내려가서 밥 먹어요. 식사 끝나면 출발해야 하거든요.”모연정도 하예정에게 말했다.“가요. 내려가요. 넷째 도련님께서 오늘 직접 요리하신다고 하니까 우리 겨울 씨네 댁에서 한 끼 해결해요.”예씨 가문의 여러 식구는 서로 사이가 아주 좋아 자주 함께 모여 식사를 했다. 하여 젊은이들이 누구 집에 가더라도 굶을 걱정이 없었다.이런 분위기는 전씨 가문과 비슷했다.정겨울이 입을 열었다.“직접 요리한다고 해봤자 평범한 집밥 몇 가지일 뿐이에요. 새로 바뀌는 메뉴도 없어요.”모연정이 농담을 던졌다.“그래도 전부 겨울 씨 입맛에 맞게 하는 거잖아요. 메뉴가 바뀌면 겨울 씨가 오히려 걱정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밖에 다른 여자가 생겼나 하고.”세 여자는 문을 나서며 계속 수다를 떨었다.정겨울은 자신 있게 대답했다.“우리 남편에게 하늘만큼 큰 용기가 있어도 밖에서 뒹굴 용기는 없을 거예요. 게다가 저처럼 똑똑하고 미모의 아내가 있는데 밖의 잡초 따위를 볼 여유가 어디 있겠어요?”만약 예준일이 감히 바람을 피운다면 그녀는 단숨에 그의 생식 기능을 상실하게 하여 평생 여자를 못 만나게 할 각오였다.정겨울은 이미 그녀의 수술칼이 죽음보다 더 날카롭다고 말해둔 적이 있다.한 방이면 그를 영원한 내시로 만들어 버릴 수 있다고 말이다.모연정은 시동생이 정겨울에게 늘 괴롭힘을 당하는 모습을 떠올리며 입을 틀어막고 낮은 소리로 웃었다.하예정이 말을 보탰다.“겨울 씨 남편은 겨울 씨만 봐도 행복해 죽을 판인데 바람 따위 필 리가 없어요. 그분이 겨울 씨를 보는 눈빛이 너무 열정적이라서 우리가 곁에서 보다가도 민망해서 오래 못 서 있을 정도거든요. 우리
하예정과 여운초의 관계가 아무리 좋아도 그녀와 심효진의 관계를 뛰어넘지는 못했다.심효진의 사소한 일이라도 하예정은 전부 알고 있었다. 어쨌든 십 년 넘게 함께한 절친이었고 한 몸처럼 가까운 사이였으니까.“저도 알아요. 우리 스승님도 운초 씨를 진찰해 보셨는데 따로 약을 처방해 주셨는지는 모르겠어요. 아직 여쭈어보지 못했거든요. 하지만 괜찮아요. 지난번에 보낸 약의 분량대로 다시 가져다주면 될 거예요.”여운초의 눈은 거의 다 나아지고 있었다.다만 체내의 한기를 완전히 제거하려면 시간이 좀 더 필요할 뿐이다.여운초에게 약을 지어줄 때마다 정겨울은 그녀가 안쓰러워 마음마저 아렸다.추미자는 정말이지 너무 잔인한 여자였다.전남편을 사랑하지 않았다 해도 여운초는 그녀의 친자식이고 열 개월을 품어 낳은 피붙이였다.여운초는 추미자를 많이 닮았다고 했다.여운별보다도 더 닮았지만 추미자는 여운초를 예뻐하지 않았다. 오히려 미워하면서 원망도 했고 여운초를 죽여 전남편의 핏줄을 끊어버리고 싶어 했다.추미자와 전남편의 결혼은 전남편의 잘못이 아니었다. 이는 집안에서 정해준 혼인이었고 그녀 자신이 거부하지 못했으면서 전남편에게 화를 풀었을 뿐만 아니라 시아주버니인 여태웅과 결탁해 남편을 죽인 뒤 바로 여태웅의 품에 안겼다.여씨 가문은 전성기 때 자산이 수천억을 넘는 확실한 재벌 가문이었다.하지만 추미자는 관성 상류 사회에서 환영받지 못했고 사람들의 미움까지 받았다.그 이유는 바로 그녀와 여태웅의 관계 때문이었다.추미자는 결혼 전부터 여태웅과 엮여 있었는데 정작 여태웅의 동생과 결혼해 여태웅의 제수가 되어버렸다. 그러다가 여태웅의 동생이 죽자 그녀는 서둘러 여태웅과 재혼했고 여씨 가문의 모든 것도 점차 여태웅의 손아귀에 들어갔다.상류 사회의 부인들이라면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그녀들은 추미자의 행동을 경멸하며 그녀의 비위를 맞추려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지위와 체면이 있는 부인들은 추미자를 외면해 버렸다.추미자는 일찌감치 가장 아끼는 딸 여운별을 전씨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