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럴 리가 없었다. 아무리 마음이 좋지 않다고 해도 울 정도는 아니었으니까 말이다.이때 지나가는 누군가가 얘기했다.“눈 온다.”안리영은 그 말을 듣고 얼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에서는 하얀 눈송이가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삼촌, 눈 와!”첫눈을 본 안리영은 순식간에 기뻐했다.조시언은 작게 대답하고 고개를 끄덕였다.“그러네.”“첫눈이야.”안리영은 조시언의 팔을 잡고 가볍게 흔들었다.“삼촌, 첫눈에 소원 빌면 이루어진대.”알콜에 취한 안리영은 고등학생이 된 듯 천진난만하게 얘기했다.“그럼 소원 빌어.”조시언은 그런 안리영을 보면서 얘기했다.안리영은 조시언의 팔을 잡고 흔들었다.“같이 빌자. 같이...”같이 뭘 빌면 좋을까?안리영은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생각하지 못했다.“삼촌이 한지은 씨와 결혼하지 않게 해달라고 빌어야겠어.”안리영이 갑자기 얘기했다.“뭐라고?”조시언이 안리영을 쳐다보았다. “내가 한지은 씨한테서 삼촌을 뺏지 못할 거라면서. 그럼 난 신한테 빌어야지. 그렇게라도 두 사람을 떼어놓을 수 있게.”“왜 갑자기 날 빼앗으려는 건데?”조시언이 물었다.예쁘게 꾸민 안리영의 입술 위로 눈꽃이 내려앉았다. 그리고 체온에 녹아 그대로 물방울이 되어 안리영의 입술을 적셔주었다.조시언은 마른침을 삼켰다. 아무 대답도 없는 안리영을 보면서 조시언이 캐물었다.“응?”차가운 눈꽃에 피부에 닿아 녹아버리자 안리영은 약간 간지럽다고 생각하고 혀로 입술을 핥았다.그 모습을 보면서 조시언은 더욱 열이 올랐다.안리영은 내려오는 눈꽃을 손에 담았다.“삼촌, 봐. 큰눈이 내려...”안리영은 대답하지 않고 조시언도 더 묻지 않았다. 그저 하늘을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눈이 더욱 세게 내리는 것 같았다.조시언은 안리영을 안고 차에 타려고 했지만 안리영이 조시언을 가볍게 치고 얘기했다.“싫어, 눈 맞을 거야.”안리영은 춥지 않았지만 조시언은 셔츠 한 장만 입은 터였다.그래도 안리영이 좋아하니 조시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
조시언은 안리영의 허락만 기다리고 있는데, 성공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하지만 조시언은 쉽게 대답해주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지금 안리영이 이렇게 물을 수 있는 것은 술기운 때문이다. 내일 술이 깨면 안리영은 또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것이다.하지만 안리영이 이런 말을 하는 걸 보면 애초부터 마음이 없었던 게 아니라 그저 걱정되어서 용기를 내지 못했던 것뿐인 것 같았다.“너 취했어. 난 네 삼촌이야.”조시언은 일부러 딱딱하게 굴면서 얘기했다.안리영은 피식 웃었다.“이제야 삼촌이라고 하는 거야? 날 좋아한다고 할 때는 그 생각을 못 한 거야?”조시언은 안리영이 취해서 이러는 것인지, 아니면 일부러 떠보는 것인지 몰랐다.하지만 어느 쪽이든지 쉽게 대답해주면 안 되었다. 그렇지 않으면 안리영은 쉽게 조시언을 포기할 것이니까 말이다.“이제는 알았어. 그래서 반성하는 중이야.”조시언의 말에 안리영이 멍해졌다.알았다니?그럼 원래 안 좋아했다는 건가? 그저 일시적인 충동이었다는 건가?그래서 지금 새로운 여자 친구를 찾은 건가?“그럼 내가 아무리 들이대도 성공하지 못할 거라는 뜻이네?”안리영은 약간 억울하고 아쉬운 듯 얘기했다.조시언은 시선을 내리고 멍해진 안리영의 표정을 보면서 얘기했다.“너 취했어.”“안 취했어.”안리영은 갑자기 반항하면서 목소리를 높였다.“아니, 넌 맨정신에 그런 말을 하지 않아. 내가 고백했을 때는 놀라서 바로 도망갔으면서.”조시언이 중얼거렸다.“놀란 게 아니거든. 난 그저... 그저...”안리영은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몰랐다.안리영은 조시언을 뚫어지라 쳐다보다가 물었다.“정말 한지은 씨를 좋아해?”“지은 씨는 좋은 여자야. 적극적이고 용감하지.”조시언은 애매하게 대답했다.안리영은 그동안 조시언이 다른 여자를 칭찬하는 걸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한지은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는 모습을 보니 조시언이 얼마나 한지은을 좋아하는지 알 것만 같았다.안리영도 한지은을 인정할 정도인
“삼촌.”안리영이 낮은 소리로 그를 불렀다. 조시언은 못 들은 척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안리영은 미간을 찌푸렸다.‘청력이 안 좋은 건가?’안리영은 손을 들어 조시언의 귀를 만지며 말했다.“귀는 장식이야? 내가 불렀잖아, 삼촌.”조시언은 그대로 멈추어 서버린 채 굳어버렸다.귀는 민감한 부위였다.“손 떼.”조시언이 낮은 소리로 얘기했다.“왜 날 무시하는 거야? 귀에 문제라도 생겼어?”안리영은 그렇게 얘기하면서 조시언의 귓불을 만지작거렸다.두껍고 말랑한 게 마치 미니 스트레스 볼 같기도 했다.조시언은 고개를 돌려 피하려고 했지만 안리영은 장난스레 잡고 놓지 않았다. 조시언이 안리영을 떼어내려고 할수록 안리영은 더욱 끈질기게 따라붙었다.결국 먼저 포기한 건 조시언 쪽이었다.“삼촌 귓불은 엄청 두껍네. 복귀인가 봐.”안리영은 술기운에 머리가 핑했다. 말로만 삼촌이라고 부를 뿐, 거의 친구를 부르는 것만 같았다.조시언은 그저 안리영을 안고 앞으로 걸어갔다. 말로는 싫다고 하면서도 발걸음은 느긋한 걸 보아하니 어쩌면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예쁘게 생겨서 뭐해. 쓸모도 없는데.”안리영은 조시언이 본인을 무시하는 것을 보고 입술을 비죽 내밀고 얘기했다.이때 마침 커플이 지나갔다. 그들은 조시언과 안리영을 힐긋 쳐다보더니 얘기했다.“나 돌아가서 다이어트 할 거야.”남자는 웃으면서 얘기했다.“다이어트 안 해도 돼. 내가 운동하면 되니까.”안리영은 멀어져가는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남자는 마른 체형이었고 여자는 약간 살집이 있었다. 만약 남자가 여자를 안아 들려면 남자는 근육을 키워야 하고 여자는 살을 빼야 했다.“삼촌, 만약 내가 저 여자처럼 살이 찌면... 혹은 나중에 임신해서 배가 나오면, 그래도 날 안아 들어줄 수 있어?”당연히 가능했다.하지만 조시언은 직접적으로 대답하지 않았다.안리영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됐어, 안을 수 있다고 해도 안 안아줄 거잖아. 여자 친구가 있으니까.”그 생각에 안리영은
조시언은 안리영을 데리고 떠났다. 안리영은 조시언의 뒤를 따라 걸으며 어깨 위의 커다란 외투를 매만졌다.옷에서는 조시언의 향기가 느껴졌다. 안리영은 저도 모르게 그 옷에 코를 파묻었다. 술을 많이 마셔서 그런지 머리가 약간 어지러웠다. 걷는 것도 쉽지 않았고 시야 속의 조시언도 자꾸만 흔들리는 것 같았다.하지만 밖에서 찬 바람을 맞으니 그 순간 정신이 들었다.외투를 꽉 껴입은 안리영은 그제야 조시언이 얇은 셔츠 한 장만 입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삼촌.”조시언은 들리지 않는다는 듯 앞으로 걸어갔다. 화가 나서인지 아니면 듣지 못한 것인지, 조시언은 그저 묵묵히 앞으로 걸어 나갔다.두 사람의 모습은 마치 잘못한 아이가 부모님의 뒤를 졸졸 따라가는 것 같았다. 따라잡을 수도, 멀리 떨어질 수도 없는 사이 말이다.날씨가 추워졌기에 이렇게 가다가는 감기에 걸릴지도 모른다. 안리영은 외투를 돌려주려고 총총 뛰어가다가 그만 앞으로 넘어져 버리고 말았다.무릎 쪽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안리영이 고통을 참으면서 겨우 숨을 돌렸을 때 커다란 그림자가 안리영을 덮었다. 익숙한 손이 안리영의 발목을 움켜잡았다.조시언은 차가운 눈빛으로 상처가 난 부위를 보더니 또 안리영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발목을 움직여보았다.아프긴 했지만 움직일 수는 있었다.“뼈는 괜찮아.”안리영은 의사기에 알 수 있었다. 조시언도 고개를 끄덕였다.조시언이 일어나려고 하는데 안리영이 갑자기 조시언의 셔츠 자락을 붙잡았다.“삼촌.”허리를 굽힌 채 서 있는 조시언은 바닥에 앉아 고개를 쳐들고 있는 안리영과 눈을 마주했다.두 사람은 그렇게 조용히 서로 대치했다.“삼촌, 나 좀 부축해줘. 못 일어나겠어.”뼈가 부러진 건 아니지만 아픈 건 아픈 것이었다. 게다가 지금은 술기운 때문에 정신이 몽롱해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마실 때는 아무렇지 않았는데 지금은 오락가락할 정도였다.두 잔만 마셔서 다행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진탕 마시고 바에서 쓰러졌을지도 모른다.조시언은 이를 꽉 깨물었다.
쨍그랑.술병이 깨지는 소리와 함께 남자의 얼굴에서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옆에서 지나가던 여자는 그 모습을 보고 새된 비명을 질렀다. 이윽고 남자의 동행이 와서 그 장면을 목격하고 바로 안리영에게 주먹을 휘두르려고 했다.안리영은 전혀 놀라지 않고 술병을 든 채 말했다.“덤벼봐, 어디 한번.”혼자였지만 그 기세만큼은 천군만마 같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다.바의 매니저는 그 상황을 보고 얼른 경찰에 신고했다. 안리영은 그대로 경찰서로 끌려갔다.다행인 것은 바에 CCTV가 있어서 남자가 먼저 시비를 걸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는 것이다.하지만 불행이라면 아마 안리영이 너무 과격하게 대응했다는 점, 그리고 상대방이 꽤 돈 있는 집안이라는 점이었다.“이 정도면 과잉방위입니다.”경찰이 결론을 내렸다.안리영은 의사였지만 법을 아예 모르는 게 아니었다. 그래서 피식 웃음을 흘리고 얘기했다.“술병도 과잉방위면 애초에 칼로 할 걸 그랬어요.”경찰은 안리영의 말을 듣고 표정을 구기더니 바로 안리영을 구속하려고 했다.“법적으로 해결해야죠. 만약 오늘날 구속한다면 내일 바로 인터넷에 당신들을 폭로할 거예요. 어디 한 번 끝까지 해봐요.”안리영이 이를 꽉 깨물고 얘기했다.인터넷으로 소식이 얼마나 빠르게 퍼지는지 아는 경찰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게다가 그는 안리영한테서 남다른 기세를 느꼈다.아무리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면 안 된다고 하지만 재벌과 거지를 구분하는 건 쉬웠으니까 말이다.경찰은 남자 쪽에서 들어오는 압박에 어쩔 수가 없었다. 하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안리영의 집안을 떠보고자 말했다.“가족한테 전화해서 여기로 오라고 해요. 그렇지 않으면 구속될 테니까.”“전 이미 성인이에요.”“부를 거예요, 안 부를 거예요?”경찰은 압수했던 핸드폰을 돌려주면서 물었다.예전에 이런 일이 생겼다면 안리영은 바로 조시언을 찾아갔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그렇다고 가족에게 전화할 수도 없었다. 괜히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
운전해서 돌아가는 길. 하늘은 이미 어두워졌고 도로 위에는 형형색색의 사람들이 가득했다.업무 때문이 아닌, 얼른 가족을 만나러 집으로 가는 모습이었다.안리영은 그런 사람들을 보면서 문득 조시언과 함께 살던 날을 떠올렸다.안리영이 그의 집에 갈 때마다 조시언은 소파에 앉아서 신문이나 텔레비젼을 보고 있지 않으면 주방에서 요리했다. 안리영은 그걸 보면서 별다른 기분을 느끼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다시 떠올리니 마음 한구석이 뭉클해지는 것 같았다.그 감정도 잠시, 안리영은 정신을 차렸다. 어쩌면 이제는 정말 적당한 사람을 찾아서 결혼해야 할지도 모른다. 매일 퇴근하고 돌아와서 같이 따뜻한 밥을 먹을 수 있는, 그런 사람 말이다.그 생각이 깊어질수록, 안리영은 춥고 외로운 집으로 돌아가기 싫어졌다. 집 아래에 도착한 안리영은 어두운 창문을 보면서 그대로 차에 앉아있었다.하지만 집에 가지 않으면 어디에 갈 수 있을까?할아버지 집?차에 앉은 안리영은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곧 눈이 온대! 너무 기대되지 않아?”“그러게 말이야. 큰눈이라던데, 내일 내가 데려다줄게. 위험하잖아.”“좋아. 내일 눈 오면 일찍 깨워줘. 같이 눈사람 만들자.”젊은 커플이 안리영 옆을 지나갔다. 손깍지를 낀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면서 안리영은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렸다.안리영은 고개를 꺾어 창밖의 밤하늘을 쳐다보았다.하늘엔 정말 별이 보이지 않았다. 정말 내일 눈이 올 것 같았다.안리영은 차에서 내렸다. 더 오래 앉아있다가는 이상한 생각을 할 것만 같아서였다.차에서 내린 안리영은 아파트 단지에서 나와 택시를 타고 바에 갔다.직업 특성상 술을 잘 마시지는 않지만 오늘은 왠지 사람 많은 곳에서 술 한잔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전에는 왜 사람들이 바에 가는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어쩐지 이해할 수 있었다.요즘 들어 일에 집중하다 보니 인생이 너무 무미건조했던 것 같다. 안리영은 상사가 본인의 업무를 덜어준 것에 고맙게 생각했다.안리영은 일단 가볍게 술 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