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뭘 어떻게 도왔으면 하는데?]변여름은 메시지를 확인하고 심장이 쿵쿵 뛰었다. 정말 본인이 허예나가 되어 당장이라도 양혁수를 만나고 싶었다.[정말 저를 도우실 건가요?]변여름이 다시 묻자 양혁수는 잠시 뜸을 들이며 말했다.[봐서.]변여름이 재빨리 타자하는데 양혁수가 말을 보탰다.[살인, 방화는 안 돼.]변여름은 핸드폰을 꼭 쥐었다.‘그러니까 돕는다는 거네. 살인, 방화만 아니면.’변여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으며 계속 질문을 이었다.[벌써 저택 정원에 추모식까지 마련해 뒀는데 내일 조문하러 올 거예요?][오전에 시간 되면 갈게.][오기 전에 꼭 연락해야 해요. 제가 마중 갈게요.]먼저 만나자고 하는 허예나에 양혁수는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그리고 이유를 알 수 없는 두근거림이 시작되었다. 사진으로 얼굴을 확인했으니 허예나의 얼굴은 이미 알고 있었으나 저도 모르게 내일의 만남이 기대되었다.양혁수는 이런 기대를 단순한 호기심으로 치부하였다. 온라인으로 만난 친구를 만나면 설레는 마음과 같은 거로 생각했다.[그래.]양혁수의 대답에 변여름은 입꼬리를 올렸다.[오늘은 더는 연락하지 못할 것 같아요. 엄마가 너무 속상해하셔서 곁을 지켜드려야 할 것 같아요.][응. 너도 일찍 쉬어.]평소와 다름없는 안녕이었지만 두 사람 사이 분위기는 사뭇 달라졌다.양혁수가 일정을 앞당겨 돌아온 건 허씨 가문에 조문하러 가기 위함이 맞았다. 더 솔직하게 말한다면 허예나의 처지를 생각하니 가문에서 당하고 있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비행기에 오르면서도 양혁수는 이런 자신이 어이가 없었다.한 번도 만난 적이 없던 여자에게 이렇게 마음을 쓰다니. 정말 말이 되지 않았다.하지만 주선으로 만난 사이이고 그동안 그렇게 많은 통화와 문자를 주고받았으니 정이 든 것도 당연했다.다른 한편, 변여름은 핸드폰을 내려두고 가슴이 너무 두근거려 잠에 들 수 없었다.두근거리는 이유를 굳이 꼽자면, 양혁수의 마음속에 허예나가 들어선 걸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하지
양혁수는 멍하니 셔터가 떨어지는 걸 지켜보았다. 작은 문부터 셔터까지 거리가 있었는데 죽을힘을 다해서 달리지 않는 이상 탈출하는 건 불가능했다.솔직히 말해 양혁수는 그렇게 전력 질주하는 게 귀찮았다.그리고 굳이 머리를 굴리지 않아도 셔터가 고장으로 인해 오작동한 게 아니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딸깍.셔터가 아예 닫히고 차고의 전등도 모조리 꺼졌다.순식간에 차고 안은 암흑이 되었다.‘허.’‘역시. 그러면 그렇지.’‘나를 먼저 만나자고 한 건 다 이유가 있겠어.’7년 전이었다면 양혁수는 바로 작은 문을 걷어차고 내키는 대로 움직였을 것이다.그러나 나이를 먹고 나니 인내심이 는 건지 어린아이의 수작에 그렇게 화를 내고 싶지 않았다.그래서 침착하게 핸드폰을 찾아 손전등을 켰고 켜자마자 작은 문의 손잡이가 움직이는 게 보였다.양혁수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고 문 뒤의 사람도 그 자리 그대로 멈췄다.잠시 침묵이 이어지고, 양혁수는 쯧 하고 소리를 내며 몸을 돌렸다.그리고 예상대로 문이 열렸다.조심스러운 발걸음 소리가 양혁수의 뒤로 들려왔다.“이게 네가 날 만나자고 한 이유야?”말을 마치자마자 등 뒤로 다가온 소녀는 바로 양혁수를 덥석 안았다. 자연스러운 손놀림이 마치 몇 번이고 시물레이션을 해본 것 같았다.“...”양혁수는 핸드폰을 들어 주변을 환하게 비추려 했다.그러나 등 뒤의 사람이 한 발 더 빨랐고 양혁수의 손을 잡고 핸드폰을 빼앗았다.양혁수는 당연히 핸드폰을 뺏기지 않으려 했다.하지만 순순히 핸드폰을 내어준 건, 차에서 내리며 외투를 걸치지 않아 얇은 셔츠만 입은 상태에서 등 뒤로 소녀의 말랑한 볼이 느껴져 반항할 의지가 사라진 것이었다.핸드폰을 뺏기고 2초 뒤 주변은 다시 캄캄해졌다.보통 캄캄한 게 아니라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양혁수는 차라리 두 눈을 감았고 속으로 욕을 읊조렸다.‘하. 미치겠네.’“손 풀어.”그리고 낮은 소리로 말했다.변여름은 고분고분 손을 풀고 망설임 없이 양혁수의 앞으로 다가갔다.
“지금이라도 전등 켜면 방금까지는 장난이라고 쳐줄게.”양혁수의 말에 변여름이 바로 말을 이었다.“오빠, 혹시 내가 못생겼을까 봐 걱정하는 거예요?”“그렇지 않으면 굳이 얼굴을 보이지 않을 이유가 있어?”변여름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저 양혁수의 손을 잡고 서서히 제 얼굴에 내려놓았다.“직접 만져보세요. 이목구비가 어떤지 확인해 봐요.”양혁수는 침묵했다.손끝에 닿는 온도는 조금 차가웠고 피부는 깐 달걀처럼 매끈하고 보드라웠다.소녀는 양혁수의 손에 얼굴을 비비며 제 이마와 코와 입술이 손에 닿도록 했다.“어때요?”변여름은 낮은 소리로 물었고 양혁수는 몰래 숨을 참았다. 그리고 입술을 꾹 다문 채로 손을 휙 뺐다.“눈, 코, 입은 제 위치에 있네. 그럼 못생긴 건 아니지 뭐.”“제대로 만져봐요.”소녀는 다시 손을 잡아당겨 제 머리 위로 내려놓았다.양혁수는 손가락을 움찔했고 손끝에 머리핀이 닿았다.변여름은 잠시 멈칫한 양혁수가 느껴졌고 말을 덧붙였다.“내가 산 머리핀인데 고양이 캐릭터예요.”“...”‘눈에 보이지도 않는데 무슨 말을 하는 거야.’그런 생각을 하며 양혁수는 또 손을 빼내려 했다.그러나 변여름은 그 손목을 잡고 절대 도망가지 못하게 했다.그렇게 잡힌 양혁수는 인상을 살짝 찌푸렸고 갑자기 유치한 생각이 떠올랐다.변여름은 양혁수를 계속 놀려주려 했으나, 예상과 달리 양혁수는 풀어 헤친 변여름의 머리카락을 한쪽으로 쓸어 넘겨주고 정확하게 귀를 잡고 힘을 주어 잡아당겼다.“...”“오빠!”양혁수는 장난이었으나 가빠진 상대의 숨소리에 바로 힘을 풀고 손을 거뒀다.이에 변여름은 입을 삐죽였다.‘왜 손을 거두고 그래. 조금 놀란 거지 만지지 못하게 하려는 거 아니었는데.’양혁수는 아예 손을 주머니에 꽂아 넣었다.“대체 뭐 하자는 거야?”“아무것도 아니에요. 추모식 말고 오빠 따로 만나고 싶어서 그랬어요.”변여름은 아주 솔직했고 제 감정을 전혀 숨기지 않았다.양혁수는 살짝 찌푸리던 인상을 풀었으나 일부러 계속 쌀
양혁수는 순순히 차에 올랐다. 사실 고분고분 차에 오른 건 빠르게 차 안의 전등을 켜버려 소녀를 깜짝 놀라게 할 생각이었다.그러나 차에 오르고 변여름은 양혁수의 옆자리에 찰싹 붙었고 점점 더 다가왔다.되레 당황한 건 양혁수 쪽이었고 밀어내지도 못해 몸을 살짝 옆으로 돌렸다.“지금 뭐 하는 거야?”“잠시면 되니까 그대로 움직이지 말고 계세요.”“바른대로 말해. 뭐 하려는 거야?”“설마 내가 허튼수작이라도 부릴까 봐 걱정하는 거예요?”“...”“그럼 내가 걱정하지 않게 됐어? 넌 정말 그럴 것 같단 말이지.”“최대한 참아 볼게요.”변여름은 한 손으로 양혁수의 어깨를 꾹 눌렀다.만약 양혁수가 반대 손을 뻗는다면 바로 품에 안을 수 있었다. 변여름이 조금만 더 과감한 사람이었다면 양혁수의 다리 위를 올라탈 수도 있었다.그 모든 가능성이 양혁수의 머릿속을 스치고 있는데 눈가에 천 조각이 느껴졌다.긴 천 조각은 정확하게 양혁수의 눈을 덮었고 은은한 향기가 풍겨왔다. 변여름은 조심스럽게 양혁수의 뒤통수에 매듭을 지었다.“이건 오빠 차니까 오빠가 전등이라도 확 켜버리면 내가 얼마나 놀라겠어요? 그러니까 혹시나 해서 오빠 눈을 가려야겠어요.”“...”‘대체 무슨 의심은 그렇게 많은 건지.’변여름은 점차 렌즈에 적응이 되어 어둠 속에서도 편하게 움직일 수 있었으나 주변이 온통 깜깜한 탓에 양혁수의 표정까지 보이지는 않았다.그래서 상상으로 눈을 가린 양혁수의 모습을 떠올렸고 부드러운 손놀림과는 달리 머릿속엔 아주 불순한 생각만 가득했다.지금이라도 전등을 켜고 그 모습을 눈에 담고 싶었다.“자. 다됐어요.”변여름은 못내 아쉬운 표정으로 손을 내렸다.양혁수는 두 손을 어디에 두면 좋을지 몰랐고 긴 한숨을 푹 내쉬었다.“얌전히 제 자리에 앉아. 안 그러면 전등 확 켤 거니까.”“네네. 알겠어요.”변여름은 아쉬운 마음을 숨기지 않았고 고분고분 옆자리에 앉았다.천 조작은 불편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이런 속박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양혁수는 당장
변여름은 아기 새에게 먹이를 먹이는 것처럼 양혁수에게 음식을 넘겨줬다.“배불러.”양혁수가 멈추라고 하자 변여름은 아쉬운 마음에 남은 과자 한 조각을 제 입에 넣었다.양혁수는 그래도 오늘 저택을 찾은 그 목적을 잊지는 않았다.“아버지 화장 날짜는 정했어?”“내일이에요.”양혁수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설마 다른 사생아가 찾아올까 봐 큰어머님이 급하게 화장 날짜를 잡은 거 아니야?”“네. 맞아요.”변여름은 허현무에 대한 질문에는 하나도 관심이 없었다. 어차피 허예나 본인도 허현무에게 남은 감정이 없었다.그래도 사건이 마무리된다면 변여름은 허예나 모녀가 편히 지낼 곳은 마련해 줄 것이다.양혁수는 허예나가 적어도 유산에 관해 얘기를 꺼내며 자신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한참이 지나도 허예나는 입밖으로 꺼내지 않았다.사방이 캄캄해 상대가 잘 보이지는 않아도 양혁수는 상대가 저만을 바라보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자신을 이곳으로 부른 이유가 유산 쟁탈이 아니라 고작 연애라니 믿을 수가 없었다.이런 생각을 하는데 변여름이 양혁수를 불렀다.“오빠, 차에 마실 물 있어요?”시간이 지날수록 양혁수는 허예나의 목소리가 점점 더 잠기는 걸 발견했다.그래서 손을 더듬어 생수를 찾아 허예나에게 건넸다.변여름은 생수를 받아쥐고 손쉽게 그 뚜껑을 열었다.그러나 이미 누군가 마신 건지 새 생수를 따는 소리가 들려오지 않자 두 사람은 모두 당황해 버렸다.생각해 보니 양혁수가 방금 마셨던 물 같았다.“앞에 있는 새 생수 가져다줄게.”변여름은 그 말을 무시하고 꿀꺽꿀꺽 물을 마셨다.그 물을 마시는 소리가 귓가에 아주 선명하게 들렸다.‘쯧.’그냥 물을 마셨을 뿐인데 긴장한 양혁수가 느껴져 변여름은 그 상황이 조금 웃겼다.변여름은 이런 양혁수를 빤히 보다가 생수 뚜껑을 닫고 양혁수의 손에 생수를 쥐여주었다.양혁수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생수를 원위치에 내려놓았다.그때, 변여름은 양혁수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고 양혁수가 고개를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거야?”양혁수가 차가운 목소리로 묻자 변여름이 대답했다.“잠깐 기대고 있는 것도 안 돼요?”“...”양혁수는 길게 심호흡하고 뒷말은 삼켰다.이에 만족한 변여름은 양혁수의 오른쪽 팔에 더 바짝 다가가고 깍지 낀 손에도 더 힘을 주었다.양혁수는 과감하게 다가오는 허예나의 행동에 조금 적응이 된 것 같았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 상황이 점점 의아하게 느껴졌다.왠지 허예나는 처음부터 자신을 노리고 지금껏 모두 계산된 행동으로 움직인 것 같았다.“예나야.”변여름이 눈을 뜨고 고개를 들어 양혁수를 바라봤다.양혁수도 변여름이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우리 혹시 전에 알던 사이이니?”의문문이었지만 왠지 확신에 찬 말투였다.변여름은 양심에 찔려 조금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그럼 날 기억은 해요?”“...”양혁수가 기억을 할 리가 없었다.그전에도 종종 이런 의심을 했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허예나를 과거에 만난 적이 없는 것 같았다.“넌 날 알고 있었던 거지?”양혁수는 질문을 바꿨다.하지만 변여름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자신에게 익숙함을 느끼는 양혁수에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양혁수는 정말 과거에 허예나와 친분이 있었는데 자신이 홀라당 잊어버리는 무례를 저질렀을까 걱정을 했다.한참 침묵이 흐르고 변여름은 솔직하게 말했다.“맞아요. 난 오빠를 알고 있었어요.”“그리고 오빠를 노리고 온 것도 맞아요. 주선 상대가 오빠가 아니었다면 돈을 억만으로 줘도 하지 않았을 거예요.”양혁수는 변여름의 말을 의심하지는 않았다. 대신 상대를 향한 호기심이 점점 더 커졌으며 왼쪽 손은 저도 모르게 조명 버튼을 찾았다.궁금증이 발동하는 순간 양혁수는 행동으로 옮겼다.고민하고 망설이는 건 전혀 양혁수다운 행동이 아니었다.대체 지금 눈앞의 이 사람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딸깍. 조명 버튼이 켜지고 주변이 환해졌다.갑자기 변덕을 부린 양혁수에 변여름은 헛숨을 들이마시었다.하지
진심으로 보이는 변여름의 말에 양혁수는 고개를 돌려 변여름을 바라봤다.천 조각으로 시야는 가려졌지만 왠지 시선이 마주친 기분이 들었다.변여름은 손을 들어 양혁수의 눈썹을 쓸었다.작게 소름이 돋은 양혁수는 변여름의 손길을 피하며 말했다.“그래. 네 말 믿을게.”변여름은 몰래 입꼬리를 올렸다.차고 밖은 점점 더 소란스러워졌고 시간을 확인한 변여름은 더는 지체하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가문 저택에서 제 멋대로 굴 수는 없었다.그래서 양혁수의 품에 안겨 있던 변여름은 뺏았던 양혁수의 핸드폰을 다시 돌려주고 안대도 다시 정돈하며 말했다.“오빠 나 이만 가봐야 할 것 같아요. 내가 내리기 전까지 안대 벗지 않기로 약속해 주면 안 돼요?”“알겠어.”변여름은 양혁수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물끄러미 바라봤다.“아까 오빠가 뱉은 말은 꼭 지킨다고 그랬잖아요.”“...”양혁수는 반박하지 않았고 변여름은 입꼬리를 올렸다.하지만 이렇게 떠나긴 아쉬웠던 변여름이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양혁수를 카메라에 담았다.이상함을 느낀 양혁수는 단번에 변여름의 손목을 낚아챘다.“뭐 하는 거야?”“사진 한 장만 찍으려고요.”변여름은 솔직하게 말했다.“너 지금 안 가면 바로 이 안대 벗어버릴 거야.”지금 양혁수가 하고 있는 건 평범한 천 조각이 아니었다. 검은색 레이스가 붙은 조각이 눈가를 감고 있는 모습이 얼마나 예쁜지 양혁수는 알지 못할 것이다.변여름은 알겠다고 대답은 했으나 손놀림은 더 빨라졌다. 손을 높게 들고 양혁수가 방심한 사이 빠르게 버튼을 눌렀다.찰칵 소리와 함께 플래시가 켜졌다.양혁수는 인상을 살짝 찌푸렸고 혼내기도 전에 변여름은 양혁수의 손아귀에서 도망쳐 빠르게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오빠. 나 진짜 가볼게요.”너무 가까워진 거리에 양혁수는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양혁수는 인상을 더 찌푸렸으나 감히 변여름을 혼내지는 못했다.그리고 긴 한숨을 뱉고 있는데 변여름이 안대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이건 첫 만남 선물로 오빠
기사가 돌아오고 양혁수는 무표정으로 안대를 외투 주머니에 숨겼다.“어디 다녀오신 거예요?”양혁수의 질문에 기사는 난처해하며 말했다.“오늘따라 배가 아파서 화장실 좀 다녀왔습니다.”잘은 모르겠지만 허씨 가문 도우미가 내준 차를 마시고 갑자기 배가 끊어지게 아팠다.양혁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이게 우연일 리는 없어. 누군가 수작을 부린 거지.’허예나는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하며 늘 낮은 자세로 보였지만 지금 보니 허현무 본처도 허예나의 상대가 되지 못할 것 같았다.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기사가 물었다.“추모식을 찾은 사람이 점점 많아지는데 지금 바로 들어가시는 게 어떨까요?”“그래요.”기사가 문을 열며 대수롭지 않은 말투로 말했다.“저기 가장자리를 지키는 사람이 바로 허씨 가문의 장남인데 소문에 따르면 아주 음흉하다고 합니다. 일반적인 장사는 돈이 안 된다고 더러운 일만 골라서 한다고 해요.”양혁수는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양혁수는 내부로 통하는 문이 아닌 다른 사람들처럼 정문으로 정원을 향했다. 그리고 방금 기사의 말을 곱씹으며 자기 생각이 틀렸다고 생각했다.허예나는 작은 수작은 부려도 허씨 가문 장남 같은 사람에게 걸린다면 죽어도 자신이 어떻게 죽음을 맞이한 건지 알지 못할 것이다.다른 한편 저택 안에서.변여름이 드디어 돌아오자 허예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금방 떠날 거니까 오빠가 가면 예나 씨도 나가세요. 괜히 마주치지 말고요.”“네. 알겠습니다.”변여름은 다시 작은 방으로 돌아가 창가에 기대 밖을 바라봤다. 감히 커튼을 완전히 열지는 못하고 작은 틈 사이로 밖을 훔쳐봤다.허예나는 이런 변여름을 힐끔대며 이상하게 생각했다.허예나와 변여름의 첫 만남은 사실 변여름의 납치로 시작되었다. 허예나는 이번엔 정말 죽겠구나 싶었는데 변여름이 갑자기 거액을 제시하며 거래하자고 했다.변여름은 돈을 건네며 한강시에서 가장 기세 높은 그 남자를 속이자고 했고 허예나는 속으로 변여름이 이 세상에서 가장 똑똑한 변태라고 생각했다.
맞은편에 앉은 양혁수는 그녀의 긴 침묵에 점점 더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또 내 말 안 듣고 밤늦게까지 일한 거죠?”“아니야.”대화가 시작되자 그녀는 자연스레 양혁수의 말에 휘말렸고 최대한 목소리를 낮춰 그 존재를 숨기려 했다.“몇몇 어른들과 프로젝트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너무 오래 얘기하게 돼서 널 깜빡했어.”“근데 목소리가 이상한 것 같은데요?”양지원은 그에게 더는 숨길 수 없다는 걸 깨닫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감기 기운이 좀 있어서 코가 막혔어.”“약 먹었어요?”“먹었어.”“믿을 수 없어요. 나중에 조 비서한테 직접 확인해 볼 거예요.”‘녀석, 예의가 없네. 내가 비서를 조 비서라 부르는 걸 흉내 내다니.’“아팠으니까 서두르지 말고 급하게 오지 마요. 괜찮아지면 차 타고 오세요.”양지원은 그의 말에 감동하여 말했다.“난 괜찮아. 내일은 안 돌아가고 모레 돌아갈게. 너 내 생일 케이크 만든다고 했지? 내가 돌아가면 같이 만들자.”“흥. 나 혼자서도 할 수 있어요.”“알겠어, 알겠어. 너 대단해”양혁수와의 통화를 마치자 머리가 맑아진 기분이었다. 양지원은 전화를 끊고 나서 양석진이 자신을 보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녀는 눈을 깜빡이며 그에게 미소를 지었다. 양석진은 손에 들고 있던 펜을 내려놓고 말했다.“케이크 만들 줄 알아?”양지원은 그가 그 부분에 집중하는 것에 조금 놀랐다. 사실 그녀는 케이크를 만들 줄 몰랐고 양혁수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겨우 케이크 반죽에 크림을 바를 정도였다.“방금 배웠어요.”그녀는 체면을 위해 거짓말을 했다.양석진은 약간 관심 있는 표정으로 등을 기대며 물었다.“혁수를 위해 배운 거야?”양지원은 고개를 끄덕이고 잠시 생각하다가 말을 꺼냈다.“가끔 혁수에게 간단한 쿠키나 타르트를 만들어줘요.”‘어차피 거짓말을 했으니 좀 더 과장해서 말해야지.’양석진은 눈썹을 치켜세우며 말했다.“쿠키?”“네. 틀로 찍어내기만 하면 돼요. 아주 간단해요.”양지원이 말했다.양석진은 고개를 숙이고
‘그럼 양석진 씨는 화병이 나서 쓰러지지 않을까?’양지원은 그의 속마음을 알 수 없었고 대신 양창수를 냉정하게 바라보았다.‘임신? 내가 어떻게 혼자서 그런 일을 할 수 있겠어?’잠시 생각해 보니 그녀와 오성호의 일은 양창수와 양석진 모두 몰랐을 것이고 아마 의사가 그녀의 상태를 물을 때 양석진도 그런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순간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으며 그녀는 침대 머리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양지원은 쓴맛이 나는 냄새를 맡고서야 비로소 눈을 떴다.양석진이 약 그릇을 가지고 왔고 그 안에 담긴 검은 탕약은 보기만 해도 쓴 맛이 날 것 같았다.양지원은 그것을 보고 얼굴에 거부감을 드러내며 예전처럼 싫다는 듯 피했다.“이게 뭐예요?”양석진이 물었다.“장 선생님께서 처방한 한약이야. 이걸 먹고 자면 좀 편할 거야. 내일쯤에는 나을 수도 있어.”“안 마실 거예요.”양지원은 단호하게 거절하며 말했다.“알약만 먹을 거예요. 의사 선생님에게 캡슐로 처방해 달라고 해요.”양석진은 그녀의 당연한 말투에 차가운 얼굴 아래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역시나 그대로구나.’“이 약은 좀 순해.”“순하다고요?”양지원은 의심을 담아 말했다.“이렇게 쓴데 마시는 것 자체가 자극이에요.”‘순하다니.’양석진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양창수는 옆에서 웃었다.“제발, 그냥 마셔요. 이 나이 먹고도 아직 쓴 게 무섭나요?”“나이?”양지원은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서른 넘은 사람이 포도를 훔쳐 먹는 사람도 있잖아요?”양석진은 얼굴을 돌려 반쯤 먹은 포도송이를 봤다.양창수는 침묵했다.“...”양지원은 그를 비웃으며 얼굴을 돌리다가 양석진의 집중된 시선과 마주쳤다.그는 참을성 있게 말했다.“다 못 마셔도 괜찮아. 최대한 마셔봐.”말을 마친 그는 그릇을 내밀었다.양지원은 눈살을 찌푸리며 기분이 좋지 않아 보였다.양석진은 이어서 말했다.“말 들어. 조금만 마셔.”‘알겠어.’양지원은 몸을 똑바로 하고 그의 손을
양지원은 양석진이 닭 다리를 집어 드는 모습을 보고 조용히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밖에서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한 채 그 흔한 닭 다리 하나에도 마음이 쏠렸구나 싶었다.그릇이 그녀 옆에 놓이자 그녀는 잠시 동작을 멈추었다. 고개를 들었을 때 그의 시선과 정확히 마주쳤다.양지원은 ‘오빠 드세요.’라고 말하려고 했다.그릇을 밀려던 찰나 그도 자신의 행동에 잠시 멈칫했고 그녀가 마음에 들지 않아 한다는 걸 느끼자 입술을 깨물며 조용히 그릇을 거둬들였다.양지원은 시선을 살짝 돌린 채 그의 손을 못 본 척 조용히 그릇을 먼저 가져갔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닭 다리를 조심스레 베어 물었다.양석진은 침묵했다.“...”그는 입술을 가볍게 깨물며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뜨거우니까 천천히 먹어.”그 말에 양지원은 눈앞의 닭곰탕에서 피어오르는 김이 유독 뜨겁게 느껴졌고 그 열기에 눈이 시린 듯 따가웠다.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눈물을 꾹 참고 낮은 소리로 대답했다.식사가 끝났을 땐 이미 어둠이 내려앉았다.돌아가는 길 험한 산길 탓에 양지원은 다시 몸이 불편해졌다. 오후에 흘린 땀과 에어컨이 틀어진 방에서 따뜻한 음식을 먹은 탓에 손끝과 발끝이 저릿했다.양석진은 동행한 이들이 회의의 세부 사항을 나누는 소리를 들으며 여러 질문을 던졌다.그러던 중 그의 상사에게서 전화가 왔고 사무실로 바로 복귀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양지원은 무심한 듯 물었다.“이렇게 늦었는데 아직도 일해요?”양석진이 대답을 꺼내기도 전에 옆 사람이 먼저 나섰다.“이보다 더 늦은 시간에도 일하세요. 의원님, 요즘 정말 바쁘시거든요. 쉴 틈도 없죠.”양지원은 머리가 더 아팠고 목 안쪽에서는 쓴맛이 올라왔다.눈을 뜨자 세상이 빙글빙글 돌았고 차에서 내리면 곧 괜찮아지리라 믿었다.차 문이 열리고 그녀는 겨우 정신을 가다듬어 내렸지만 발이 땅에 닿는 순간 다리가 풀렸다.귀가 어지러웠고 누군가 ‘양 대표님’이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단 한 사람만이 그녀를 ‘지원’이라 불렀
양창수가 이야기를 이어가는 동안 양지원은 조용히 그의 접시에 음식을 집어주었다. 그 모습은 마치 오랜만에 재회한 진짜 남매 같았다.갑자기 양창수가 물었다.“오 대표는 요즘 어때요?”양지원은 젓가락을 들고 있던 손을 멈추고 천천히 미간을 찌푸렸다.양창수가 물었다.“오 대표, 아직 숨 붙어 있어요?”양지원은 의문스러웠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양창수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고 눈빛에는 어쩐지 안타까움이 스쳐 지나갔다. “보아하니 아직 살아 있는 것 같네요.”양지원은 침묵했다.“...”양창수는 마치 평생 좋은 음식을 맛본 적이 없었던 사람처럼 허겁지겁 음식을 입에 쓸어 넣었다. 마치 배고픔이 아니라 무언가를 잊기 위해 먹는 듯했다.양지원은 그의 말에 집중하느라 뒤에서 누군가 내려오는 소리를 놓치고 있었다.양창수가 고개를 들고 시선을 돌리자 그녀도 따라 고개를 돌렸고 거기엔 양석진이 서 있었다.두 사람은 잠시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정적을 깬 건 양창수였다.“나한테 시킬 일이라도 있으세요?”양석진이 짧게 답했다.“먹고 올라와. 할 얘기가 있어.”말을 마친 그는 돌아섰고 곧 자리를 떠났다.양지원은 속이 묘하게 뒤틀렸다. 그 흔한 인사 한마디조차 없이 돌아서는 그의 뒷모습에 대체 뭐가 그리 대단한 건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양지원은 맞은편에 앉아 있는 양창수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불만을 감추지 못한 채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천천히 먹어요. 부족하면 더 시킬게요.”양창수는 그 말에 약간 놀란 듯 눈썹을 치켜세웠다.그는 입술을 가볍게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고 양석진의 뒷모습을 향해 말했다.“그럼 좀 늦게 올라갈게요. 지원이랑 조금 더 이야기할 거예요.”양석진은 어이없었다.“...”‘지원이?’양지원은 그의 뒤를 보며 그 표정을 보지 못했지만 양창수의 말 한마디에 기분이 풀리며 마치 뭔가를 빼앗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양석진은 양창수를 무시한 채 아무 말 없이 위로 올라갔다.그가 방을 나가자마자 양창수는 양지원
양지원은 양석진이 예전엔 어떤 사람이었는지 희미하게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 그가 살이 찐 건지 빠진 건지 분간하기 어려웠다.하지만 설명할 수 없는 마음의 저릿함은 그가 분명히 살이 빠졌음을 본능적으로 느끼게 했다.잠시 멍하니 서 있는 사이 양석진과 그의 일행이 어느새 그녀 앞에 다다라 있었다.그녀는 손을 꽉 움켜쥔 채 순간 말을 잃었고 그의 뒤에 서 있는 예전에 본 적 있던 용 국장의 얼굴을 보고서야 겨우 정신을 가다듬었다.용 국장 역시 그리 나이가 많지 않았고 서른네다섯쯤 되어 보였고 또래들 사이에서는 두각을 나타내는 인물이었다.하지만 양석진을 마주하면 그는 어딘가 빛을 잃는 듯했다.그가 먼저 운명 같은 우연이라며 말을 꺼냈다. 대운산을 사용한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정말로 이곳에서 회의가 잡혔고 그 책임자가 다름 아닌 양석진이었다.“양 대표님, 우연의 일치네요. 막 완공된 이 대회장의 첫 번째 사용자가 바로 당신 가족입니다.”양지원은 미소를 머금은 채 최대한 차분히 그를 바라보았다.‘오빠’라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그녀는 끝내 입을 다물고 대신 직함을 부르며 입을 열었다.“먼저 들어가서 쉬세요. 오늘은 더우니까요. 조금 후에 제가 임원분들을 모시고 천천히 둘러보시게 해드릴게요.”양석진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더는 머무르지 않고 돌아섰다.“2시에 출발하죠. 번거롭게 해드려 죄송합니다.”“...좋아요.”양지원은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을 안은 채 돌아서 앞장섰다.그 일행은 의외로 조용히 정리되어 있었고 마치 더는 움직이거나 말하고 싶지 않은 듯 각자의 방으로 들어가 쉬었다.15분도 채 지나지 않아 홀은 금세 고요해졌다.양지원은 아래층에 홀로 앉아 차를 마셨지만 입안에는 아무런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두 사람은 서둘러 스쳐 지나갔고 양석진은 그녀에게 단 한 마디를 남겼다.비록 이제는 서로 마주하는 일이 드물었지만 그녀의 시간과 기억은 여전히 십 년 전 어딘가에 머물러 있는 듯했다.그가 모든 것을 그녀를 중심으로
[청년기]“내일 돌아오는 거예요?”대운산으로 향하던 길 양지원은 집에 있는 양혁에게서 걸려 온 전화를 받았다.그녀는 감기에 걸린 지 이틀째였다. 아무것도 할 기운이 없었고 그나마 양혁수와 이야기하는 순간만이 마음을 조금 편하게 해주었다.“가능하면 돌아가려고 해.”몇몇 선생님들의 불만이 떠오르자 그녀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집에서는 좀 얌전히 지낼 수 없을까? 너 때문에 맨날 선생님 앞에서 얼굴을 못 들겠어.”한창 말썽꾸러기 시절을 지나 양혁수는 이제 누구에게도 귀여움을 받지 못하는 나이에 접어들었다.몇몇 선생님이 함께 교육을 맡으면 그는 종종 머리를 치켜들고 반항했다.“저 정도면 엄청 얌전한 편 아닌가요? 같이 농구도 하잖아요.”양지원은 눈동자를 굴리며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무더운 여름날 예민한 성격의 선생님들이 누가 그런 말썽꾸러기와 농구장에 나가고 싶겠는지 의문스러웠다.“알겠어. 어쨌든 조금만 얌전히 있어 줘.”“알겠어요. 엄마는 밖에서 몸조심하고 집에 오시면 제가 생일 챙겨드릴게요.”양지원은 말끝에서 묘한 안도감을 느꼈다.세상 어딘가에서 여전히 자신을 걱정해 주는 이 작은 녀석이 있다는 사실이 고마웠다.통화가 끝나자 차의 속도도 서서히 줄어들었고 비서가 조용히 말을 건넸다.“양 대표님, 먼저 접대소에서 잠시 쉬시는 게 좋겠습니다. 용 국장 쪽 점검팀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습니다.”양지원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대운산 관광 프로젝트는 오래전에 시작되었지만 그녀는 그동안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런데 최근 위쪽에서 이 지역을 외교 관련 주요 회의 장소로 활용하고 싶다는 연락이 들어왔다. 그건 분명 반가운 소식이었다. 하지만 ‘행궁’을 조성하려면 결국 관계자들의 사전 점검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양지원은 직접 사람들을 이끌고 일주일 전 이곳에 도착해 현장을 둘러보며 세세한 부분까지 하나하나 점검했다.최근 날씨가 너무 더워서 에어컨이 있는 곳과 뜨거운 태양 아래를 오가다 보니 체력이 많이 지쳐갔다.비서는 그녀의 얼굴 색
양지원은 화려한 의상에 휩싸인 채 기분이 한껏 들떠 있었다.그녀는 오빠의 팔에 살며시 팔짱을 끼고 자랑스럽게 말했다.“우리 오빠는 당연히 멋져요. 키도 크고 잘생기기까지 했는걸요.”진병수는 이마를 짚은 채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양석진은 길을 걸으며 양지원에게 사진을 찍지 말라고 했지만 현장에 도착하자 그녀의 간청을 뿌리치지 못하고 결국 두 세트를 함께 찍기로 했다.예복을 입고 양지원과 함께 거울 앞에 서자 주위에서 감탄의 말들이 흘러나왔다.그는 마음속에서 불안이 스멀거리자 양창수의 애매한 미소를 피하려 애써 시선을 돌렸다.결혼사진을 찍는 자리였지만 양지원에게는 가족사진을 남기는 느낌에 더 가까웠다. 그녀는 예쁜 옷을 입었으니 기념으로 사진을 남기고 싶었고 중간에 진병수에게도 함께 찍자며 부탁했다.“자, 신부가 신랑에게 키스해 주면 좋겠네요.”사진사가 말하자 양석진의 눈빛이 흔들렸고 양지원은 황당하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저기요. 이분은 제 오빠예요.”사진사는 머쓱하게 웃으며 말했다.“아. 깜빡했네요.”양창수가 장난스럽게 끼어들었다.“키스하는 게 뭐 어때? 얼굴에 하는 거면 괜찮아.”진병수도 거들었다.“나는 괜찮은 것 같은데.”“안 돼. 그건 너무 이상해.”양지원이 고개를 저으며 단호히 말했다.손명우가 조용히 제안했다.“카메라 각도를 조절해서 찍으면 돼.”양지원과 양석진은 동시에 외쳤다.“안돼.”순간 현장은 조용해졌다.“...”양지원은 웃으며 옆에 앉은 오빠를 바라보았다.“오빠, 우리 둘 진짜 잘 맞는 것 같아요.”그녀는 그의 팔을 감싸며 바르게 자세를 고쳤다.“오빠, 우리 사진 한 장 찍어요. 처음 오빠를 만났을 때도 가족사진 찍느라 소파에 나란히 앉았잖아요.”양석진은 잠시 시선을 피했다가 감정을 억누르며 부드럽게 말했다.“맞아. 그렇게 하는 게 제일 좋지.”두 남매는 동시에 고개를 들었고 찰칵하는 카메라 셔터 소리와 함께 그 순간이 고정되었다.수많은 사진 중 그 사진은 양지원이 가장 아끼는 사진이 되었
배가 콕콕 쑤시는 걸 제외하면 양지원은 꽤 신나게 놀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도 미소가 가득했다.위층으로 올라가려는데 양석진이 양창수를 뒤뜰로 불렀고 늦여름이라 뒤뜰에는 매미 소리가 귀를 울렸다. 양창수는 계단에 뚝 멈춰 섰다가 올 것이 왔음을 직감했다.뒤뜰에서 양석진이 말했다.“지원이 이제 어리지 않으니 지원이 앞에서 아무 말이나 쉽게 내뱉지 말았으면 해.”“내가 뭘 또 아무 말이나 했다고 그래요?”양석진은 시시콜콜 얘기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너 자꾸 까불면 바로 입대시켜 버린다?”양창수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마음대로 하세요.”양창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를 툭툭 털며 위층을 슬쩍 보다가 양석진에게 시선을 고정하며 말했다.“내가 헛소리했다 치죠.”그리고 몸을 휙 돌려 자리를 떠났다.양석진은 뒤뜰에 홀로 남아 사라지는 양창수의 뒷모습을 지켜봤다.의미심장한 양창수의 시선은 마치 오래된 전등처럼 깜빡깜빡하며 양석진의 마음을 괴롭혔다.양석진은 입술을 꾹 다물고 한참 그 자리에 서 있었다.그러다가 위층에서 양지원이 저를 부르자 천천히 위층으로 올라갔다.양석진은 그날 밤 또 불면증에 시달렸다. 하룻밤 내내 뜬눈으로 지새우는 건 양석진에게 있어 흔한 일이 되었다.어느 날부터인지, 양석진은 감히 누구에게도 고백하지 못할 감정이 생겼고 아무리 억눌러도 아무도 없는 새벽이 되면 감정이 스멀스멀 올라왔다.양석진도 이게 무슨 감정인지, 본인이 뭘 하고 싶은 건지 잘 몰랐다.그저 양지원만 떠오를 뿐이었다.어쩌면 양지원도 나이가 좀 더 들고, 각자 연인이 생기면 이런 감정이 사라지지 않을까 생각했다.그리고 그러한 가능성이 현실이 되기를 양석진은 늘 기도했고 한편으로 두려움을 느꼈다.그날 뒤로, 양석진은 며칠 동안 컨디션이 좋지 않았고 양지원의 걱정을 사지 않기 위해 최대한 집을 비우는 것을 택했다.그 시간이 점차 길어지고 더 이상 집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온 양석진은 바로 진병수의 연락을
양석진은 아무 내색하지 않고 양지원을 이끌어 조용한 곳으로 이동했다.“누가 너 괴롭혔어?”“아니요!”배는 자꾸 쿡쿡 쑤셔오고 멀리서 진병수가 모르는 여자를 껴안고 있는 걸 보면 양석진도 본인이 없는 곳에 저렇게 행동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더 배가 아팠다.엄마가 돌아가신 뒤로 아빠도 늘 여자들을 만나고 다녔다.양지원은 저런 행동에 큰 반감을 느꼈고 양석진도 같은 부류라고 생각하면 화가 났다.그런 생각을 하는데 양석진이 옆으로 다가와 낮은 소리로 물었다.“혹시 생리 시작한 거야?”“...”양지원이 아무 대답이 없자 양석진은 바로 눈치를 챘다.“여기 가만히 앉아 있어.”그리고 룸을 나선 양석진은 따뜻한 꿀물을 한 잔 가지고 돌아왔다.마침 두 사람을 지나치던 진병수는 꿀물과 화가 잔뜩 난 ‘공주님’을 번갈아 보며 혀를 쯧쯧 찼다.‘이게 동생이야? 딸이야?’따뜻한 꿀물을 마시자 몸이 녹아내렸고 양지원은 소파에 푹 기대앉았다.그리고 양석진의 시선이 느껴지자 입을 삐죽거리며 물었다.“아까 그 여자 누구예요?”양석진은 멈칫하다가 바로 상황 파악을 마쳤다.“연예인인데 골치 아픈 일이 생겼다고 하더라고. 사정이 딱해 보여서 병수더러 도와주라고 했었어.”양지원은 바로 시선을 흘렸다.“오빠는 다른 사람한테도 다 이렇게 친절해요?”“그 사람 연예인이 된 이유가 어머니 치료비를 벌기 위해서였어. 그런데 어머니를 결국 지키지 못했다고 하더라고.”양지원은 침묵했다.‘사정이 딱하긴 하네.’“그래도 오빠는 조심해야 해요. 아빠가 오빠를 정치인으로 키우려고 하는데 병수 오빠처럼 헤프게 행동하면 안 돼요.”양석진은 자신에게 훈수를 드는 양지원을 보며 며칠 전 양지원이 벌인 일을 떠올렸고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알겠어.”구석 자리에서 양석진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으니 양지원은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 그래서 양석진에게 청아에 대한 얘기를 더 들려달라고 했다.고개를 돌리니 어느새 양창수가 옆자리에 와 있었다.양지원은 양창수의 어깨를 툭 건드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