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석진은 바로 위층으로 올라가 샤워하려다 양지원을 발견하고 몇 번 힐끔거렸다.그리고 덤덤하게 어젯밤 잠은 잘 잤는지 물었다.“그럭저럭요.”특별한 것 없는 대화였지만 양석진이 자리를 뜨기 전에 혼잣말처럼 말했다.“원피스 잘 어울려.”얼떨결에 칭찬을 받은 양지원은 양석진이 위층으로 올라갈 때까지 물끄러미 쳐다봤고 아침부터 기분이 퍽 좋아졌다.‘예전보다 많이 스윗해졌어.’양지원은 겉으로는 티를 내지 않으려 했으나 식탁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벼웠다.만약 이 자리에 게걸스레 밥을 먹는 양창수만 없었다면 더 기분이 좋았을 것이다.어린 시절부터 양석진은 조용하고 차분한 성격이었다. 양창수는 이런 양석진의 경호원으로 키우기 위해 양홍두가 데리고 온 사람이었고, 양창수는 예나 지금이나 자신을 한 가족이라 생각하고 행동에 스스럼이 없었다.이른 아침부터 청양고추며, 빨간 국물이 있는 걸 보고 양지원은 이게 양석진을 위해 차려진 음식이 아니라는 걸 알아차렸다.양창수는 양지원을 만나 기쁜 마음을 숨기지 않았고 게걸스레 음식을 먹는 한편 양지원과 대화를 주고받으려 했다.“식사 자리에서는 사담하지 않는 게 맞아요.”그 말에 양창수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지원 씨 어릴 때, 말이 많은 걸로 혼날 때 내가 감싸줬던 걸 잊었어요?”“...”‘어휴, 말하지 말자.’드디어 양석진이 아래층으로 내려왔고 양석진이 자리에 앉자마자 양창수는 긴 한숨을 내뱉었다. 그러자 양지원과 양석진이 고개를 들어 양창수를 바라봤다.‘뭐야?’“우리가 이렇게 모여 아침을 함께 먹은 게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나요.”그 말을 뒤로 하고 식사 자리는 침묵이 이어졌다.양지원은 왠지 마음이 무거워졌다.양창수는 분위기를 띄워놓고는 또 반찬을 가득 집어 밥을 큰 술로 비워냈다. “...”‘그럼 그렇지.’양석진은 이미 습관이 된 건지 익숙하게 밥을 먹었다.양석진은 균형 잡힌 세 끼를 먹었고 자극적인 입맛보다는 영양소를 더 많이 따졌다.양지원은 양창수가 게걸스레 먹는다고 트집을 잡았지만,
양석진에게 잡힌 손을 양지원은 빠르게 빼냈다.양석진은 온기가 사라진 손끝을 바라보다가 얼굴이 발그레해진 양지원을 발견하고 표정을 굳히고 침착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양지원은 양석진을 힐끔댔고, 사실 힐끔이 아니라 노려보는 것에 더 가까웠다. 양석진이 방금 자신이 한 행동을 놀릴까 봐 잔뜩 긴장해 버렸다.양석진은 이 상황이 꽤 흥미롭게 느껴졌다.‘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왜 이렇게 긴장해? 얼굴이 붉어진 걸 몇 번 본 게 다인데.’양지원은 침을 꿀꺽 삼키고 애써 침착하게 챙겨온 약품을 정리했다.“방금 탕약을 먹었으니 이제 누워서 좀 쉬어요. 계속 불편하면 내일엔 전문가 불러서 제대로 마사지 받게 해줄게요.”“그럴 필요 없어. 내일에도 시간이 되면 네가 와서 좀 해줘.”“...”‘흥. 누가 해준대?’양지원은 말없이 양손 가득 약품을 들었고 바로 몸을 돌려세우려 하자 양석진이 말했다.“그냥 서랍 안에 넣어둬. 굳이 가져갈 필요 없잖아.”양지원은 고개를 끄덕이고 서랍에 넣은 뒤 서둘러 자리를 떠나려 했다. 그러나 침대에 누운 양석진이 쉽게 양지원을 놓아주지 않으려는 듯 또 대화를 이어갔다.양지원과, 양홍두, 그리고 양혁수의 근황도 물었고 더 이상 할 얘기가 없자 하다못해 오성호의 근황도 물었다.양지원은 흥 하고 콧방귀를 뀌더니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아직 그렇게 쉽게 죽지 못할 거예요. 지은 죄가 얼만데.”제 딸이 가문 밖에서 개고생을 한 걸 생각하면 지금이라도 오성호를 때려죽이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양석진은 고개를 끄덕였고 양지원은 오성호가 숨이 붙어있는 것에 양석진이 유감을 느끼는 거로 생각했다.그때 양석진이 진지한 얼굴로 양지원을 위로했다.“언젠간 떠날 사람이야.”“...”이제 대화는 충분했고, 시간을 확인해 보니 양석진이 방금 마신 탕약은 효과가 없는 것 같았다.“이만 쉬어요.”양지원이 다시 쉬라는 말을 꺼내자 양석진은 얌전히 침대에 누워 고개를 끄덕였다.“굿나잇.”양지원은 자신이 이 단어를 마지막으로
양석진은 양지원이 기분이 나빠졌다는 걸 눈치챘다. 소녀 시절부터 장애신 작가의 글이라면 빼놓지 않고 읽었던 양지원이었으나 이제 좋아하던 작가의 책에도 질투를 느끼는 모양이었다.“이 책에 무슨 문제라도 있어?”양석진이 덤덤하게 말했다.“난 좋은 책 같던데.”손을 수건에 닦고 있던 양지원의 손놀림이 조금 거칠어졌다.양석진은 장애신 작가의 책을 좋아하지 않았다. 소녀 시절 양지원이 그렇게 강력 추천을 하고 옆에 가져다 둬도 눈길 한 번 주지 않던 양석진이었다.양석진은 이런 양지원의 마음을 모르는 척하며 문학에 관한 생각을 이어갔다.“나이가 들고 보니 사랑 이야기들이 그렇게 절절하게 느껴지더라고. 장애신 작가의 글은 재평가가 필요해.”‘허. 아주 평론가 나셨네.’양지원은 박수라도 쳐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의원 일만 한 사람이 문학은 무슨.’‘아니지. 어린 직원이 선물한 건데 관심이 갈 법도 하지.’양지원은 닦은 수건을 휙 던지며 반박하려 했다. 하지만 오랫동안 좋아하던 장애신 작가를 이런 식으로 모욕하고 싶지는 않았다.그래서 다시 미소를 되찾고 이렇게 말했다.“오빠 취향 저격하는 그 친구도 참 대단한 사람인가 봐요.”“그래. 나도 꽤 눈여겨보는 친구지.”“기회를 잘 봐서 옆에 둬요.”“고민하는 중이야.”“...”양지원은 더 이상 대화하고 싶지 않아 방으로 돌아가려 했다.내일이면 돌아갈 예정이었고 집을 나서자마자 그 잡지들은 바로 버리겠다고 다짐했다.‘그럴 거면 왜 내 생일로 비밀번호를 한 거야? 정말 이상한 사람이라니까.’“지원아.”양석진이 양지원을 불러세웠고 양지원은 힐끔 쳐다봤다.그때, 양석진이 자리에서 일어나 잠옷을 챙겨입으며 덤덤하게 말을 이어갔다.“이 책을 선물한 건, 젊은... 남성이야.”양지원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하지만 곧 또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양석진의 지위와 스펙, 그리고 외모를 미루어봤을 때 젊은 여성이 아니라 남성도 얼마든지 대시를 할 것 같았다.양지원이 점점 더 인상을 찌푸리고 고민하는
하지만 양석진이 조용해진 걸 보아 나쁘지 않은 상황 같았다.“좀 편해졌어요?”양지원은 고민하다가 양석진에게 물었고 양석진은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조금만 더 힘을 줘도 될 것 같아.”“알겠어요.”‘지금도 부족하다고? 난 손목까지 뻐근할 정도인데?’양지원은 조금이라도 더 편하게 하려고 가까이 다가가 심호흡하고 행동을 이어갔다.양지원의 숨소리가 귓가에서 들려오고 힘을 주어 열심히 하고 있는 양지원의 모습이 절로 상상이 되었다. 고개를 돌리고 싶은 충동이 들었지만 가끔은 보지 않는 것이 더 자극될 때도 있었다.양지원은 생각보다도 침착한 모습이었다. 손을 얹은 표정도 차분했고 꽤 평온한 마음으로 이어갔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손목이 아파지자 점점 집중력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양석진이 행여나 불편하진 않을지 계속 신경 쓰이고, 뭐라도 말을 걸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으며 또, 예상보다 어색하지 않은 분위기에 은근히 안도하게 됐다.어느새 양석진은 꽤 오랫동안 말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양지원은 양석진이 잠이 든 줄 알고 손을 뚝 멈췄다.“오빠?”양석진은 마치 온몸에 석고를 바른 듯 미동도 없이 누워 있었지만, 마음속엔 온갖 건전하고, 건전하지 못한 생각들이 오가고 있었다. 그러다 귓가에 들린 양지원의 낮은 부름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양석진은 입술을 다물고 이마를 살짝 찌푸린 채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지었다.“왜?”“잠드신 줄 알았어요.”“안 잤어.”양지원이 자세를 고쳐 앉는 걸 보며 양석진의 시선이 양지원의 손목을 향했다.“손목 아파?”“조금은요.”양지원은 손목을 살짝 돌리다가 다른 손으로 바꿔 행동을 이어갔다.너무 세지도 않은 강도로 이어지다 보니 마사지보다는 다른 짜릿하고 간질거리는 감각을 자극했다. 양석진은 양지원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자꾸 이상한 상상을 하게 되었다.‘어휴.’이건 아니다 싶은 양석진이 두 눈을 뜨고 대화로 관심사를 돌리려 했다.그러나 양석진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양지원이 먼저 침대 옆에 둔 책을
양지원은 황당하다는 듯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나 이제 어린애 아니에요.”‘짓궂다.’최근 1년 동안 양시연 덕분에 그녀를 예전보다 자주 마주쳤지만 그럴 때마다 여전히 그들 사이에는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무언가가 흐르고 있었다. 서로 몇 마디를 주고받으며 조금씩 거리를 좁혀갔고 그는 그녀가 어색해하지 않도록 늘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그가 수면제를 다 마시자 양지원은 자리를 뜰지 아니면 이제야말로 양시연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망설였다. 그 아이는 더 이상 그녀 혼자만의 존재가 아니었고 양석진에게도 반드시 알아야 할 권리가 있었다.양석진이 먼저 그녀에게 물었다.“바빠?”‘응?’양지원은 의아해했다.양석진은 소파에 앉아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등을 그녀에게 내보였다.“온몸이 뻣뻣해서 불편해.”양지원은 조용히 숨을 고르며 그의 말 하나하나를 곱씹듯 마음속에서 되새겼다.“내가 마사지를 해줄까요?”“응.”양석진은 짧고 무뚝뚝하게 대답하며 덧붙였다.“내 방 침대 오른쪽 탁자 위에 오일이 있어.”양지원은 어이없었다.“...”‘정말 적극적이네.’그녀는 그가 이렇게 '격의 없이' 대해주는 것이 기뻤다. 정확히 말하자면 약간 들뜬 기분이었다. 그의 금고 속 물건들을 떠올리며 온갖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방으로 돌아와 짐을 정리하며 세찬 에어컨 바람이 불어왔지만 그녀는 이상하게도 더운 느낌이 들었고 숄을 벗어버리고 싶었다.그녀는 결국 숄을 벗었다. 거울 앞에 서서 그 숄을 바라보니 잠옷과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다.역시 이전에 입었던 긴 코트가 더 잘 어울렸다.객실로 돌아오니 거실에는 아무도 없었고 그녀는 침실로 들어가 그가 이미 목욕가운을 벗고 침대에 엎드려 있는 모습을 보았다. 허리 아래는 이불로 덮여 있었다.그녀는 잠시 시선을 돌린 후 침대 옆에 앉아 평소처럼 말했다.“척추가 좋지 않은 것 같네요. 병원에 가본 적 있어요?”양석진은 양지원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눈을 떴다.“가봤지만 별 효과는 없었어.”“푹 쉬지 않으
양석진은 잠시 생각한 뒤 말했다.“나 2층에 올라가서 샤워하고 옷 좀 갈아입을게. 넌 잠깐 여기 앉아 있어.”“아...네.”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지만 그가2층으로 올라간 뒤에야 자신이 그의 방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문득 떠올랐다.서둘러 2층으로 올라가 문을 열었을 때 아래층 거실에 서 있는 양석진의 뒷모습이 보였다.양지원의 캐리어는 침실 문 옆에 놓여 있었고 하이힐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벗어져 있었다. 갈아입은 드레스는 소파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양지원은 이마를 살짝 두드리며 설명했다.“나은설 씨가 여기서 자라고 했어요. 다른 방들은 전부 잠겨 있어서 들어갈 수 없었고요.”짐을 다시 옮기기 귀찮았던 그녀는 몸을 돌리며 마치 당연하다는 듯 덧붙였다.“오빠는 객실 방에서 자요. 내일 내가 떠나면 그때 다시 방으로 오면 되죠.”양석진은 그녀의 말투에 잠시 고개를 숙인 채 소매 단추를 풀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알았어.”그가 조용히 손님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양지원은 문틀에 기대선 채 미소 지으며 그를 배웅했다. 그리고 곧장 침실로 달려가 금고 근처의 장식을 제자리에 돌려놓고 특히 눈에 띄는 지문 자국은 꼼꼼히 닦았다.그때 아래층에서 다시 양창수가 그녀를 불렀다.양지원은 눈을 굴리며 긴 숄을 걸치고 아래로 내려가 무심한 듯 물었다.“또 뭐에요?”양창수는 웃으며 그릇을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옆에 놓인 한약을 가리켰다.“의원님의 수면을 돕는 한약이에요. 시간이 너무 늦어서 나은설이 2층에 올라갈 수가 없대요. 큰아씨 미안하지만 나중에 좀 올려줄래요?”그와 양석진의 관계를 생각하면 굳이 '의원님'이라고 부를 필요는 없었다. 게다가 양창수는 줄곧 ' 큰아씨'라는 호칭으로 은근히 비꼬는 태도를 드러냈다.양지원은 속으로‘나이 들어도 입은 여전하네’ 하고 생각하며 대꾸했다.“저한테 주세요.”양창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을 툭툭 풀며 문을 열고 나가면서 투덜댔다.“이 늙은이는 체력이 안 좋아요.
이 잡지들은 새것이 아니었고 분명 양석진이 이미 본 적이 있는 잡지들이었다.양지원의 머릿속에는 침대 머리맡에 앉아 그녀의 인터뷰가 실린 잡지를 진지하게 읽던 양석진의 모습이 떠올랐고 그 장면에 웃음이 터져 침대 위로 쓰러졌다.그 순간 그녀가 들고 있던 잡지에서 두 장의 사진이 살며시 흘러내렸다.‘응?’그녀는 사진을 집어 들다가 말고 잠깐 멈칫했다.오래된 색감을 고스란히 품은 결혼사진이었다.그녀는 양석진과 함께 소파에 앉아 있었다. 그는 정장을 차려입었고 그녀는 풍성한 드레스를 입은 채 환하게 웃고 있었다. 사진 속 양지원은 유난히 행복해 보였다.마치 시간의 틈새로 빨려 들어간 듯 그녀의 마음은 순식간에 그 시절로 돌아갔고 사진 뒷면을 뒤집자 예상대로 날짜가 적혀 있었다.‘이렇게 많은 시간이 흘렀구나.’눈가가 뜨거워졌고 그녀는 감정을 누르기 위해 살며시 눈을 감았다.그해의 기억이 또렷하게 떠올랐고 양석진은 물론 양창수와 그 무리의 모습까지도 생생했다.양지원은 코끝을 훌쩍이며 잡지를 내려놓고 떨어진 다른 사진 한 장을 집어 들었다.사진 속 그녀는 옆으로 누워 잠들어 있었고 누군가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그 손의 주인은 다른 손으로 사진을 찍은 듯했다.생각할 필요도 없이 분명 양석진일 것이다.그는 다른 누군가가 그녀의 그런 모습을 찍게 두지 않을 사람이다.사진 뒤를 넘기자 날짜가 적혀 있었는데 대운산 기지 공사 당시였던 것 같았다.‘쿵쿵쿵.’갑작스러운 노크 소리에 그녀는 놀라 벌떡 일어났다. 잡지를 재빨리 가방에 넣고 외투를 걸치며 급히 문 쪽으로 달려갔다.문을 열자 밖에는 나은설이 서 있었다.“무슨 일이에요?”나은설은 웃으며 말했다.“양석진 씨가 돌아오셨어요.”“네?”“바로 아래층에 계세요.”나은설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래층에서 양창수가 양지원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큰아씨?”그녀는 대답하지 않을 수 없었고 계단을 내려가다 보니 거실에 있던 사람과 시선이 마주쳤다.양석진은 외투도 벗지 않은 채 양지원이 내려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기다가 쓴웃음을 지으며 자신을 조용히 비웃었다.‘왜 자꾸 사람을 그렇게 추하게 몰아가지? 양창수가 양석진을 따라다닌다고 해서 둘 사이에 뭔가 있는 건 아니잖아?’양석진은 지금의 나이와 위치에 어울리지 않게 그의 사생활이 문득 궁금해졌다.양지원은 문득 눈을 뜨더니 몸을 반쯤 일으켜 무심결에 그의 침대 옆 탁자 서랍을 열었다.안에는 노트북과 시계 옷깃 단추 같은 작은 물건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모두 깔끔하게 정리되어 서로 섞이지 않았고 생활감이 느껴지는 남성용 물품은 보이지 않았다.양지원은 겉으로는 진지한 표정을 지었지만 속으로는 중얼거렸다.‘역시나 따분하군. 변한 게 하나도 없어.’그녀는 서랍을 닫고 다시 자리에 누웠다.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다.이제야 잠이 올 것 같았다. 양을 세기 시작한 지 세 번째쯤 어느새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원래는 낮잠 정도만 자려던 참이었지만 최근의 피로와 익숙한 그의 방 때문이었을까 눈을 떴을 땐 이미 오후 4시가 훌쩍 넘은 시각이었다.창밖으론 해가 지기 시작했지만 기온은 여전히 후텁지근했다.그 나은설이라는 똑똑한 소녀는 아침부터 더위를 식힐 간식을 준비해 두었고 저녁 식사 역시 놀랄 만큼 정성스럽게 차려져 있었다.하지만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양지원은 작은 디저트를 손에 쥔 채 아래층 거실에 앉아 영화 한 편을 틀었다.시계는 어느새 저녁 7시를 가리켰지만 양석진은 끝내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그녀는 더 이상 그가 오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다시 침실로 올라온 그녀는 지루함을 달래려 휴대전화를 확인했다.양지원은 이번 방문을 양석진에게는 알리지 않았고 오직 양창수에게만 조용히 귀띔해 두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양석진에게서는 단 한 통의 메시지도 오지 않았다.‘양창수라면 입이 가볍지 않으니 분명 전했겠지.’그녀는 그렇게 혼잣말처럼 생각했지만 이 모든 생각들이 그다지 의미 없다는 걸 알았다.‘어차피 나는 왔고 양석진이 알든 모르든 그건 이제 중요하지 않아.’그녀는 할 일이
나은설은 현장에서 들켜 멋쩍은 미소를 지었고 아무렇지 않은 척 자리를 벗어나려 했지만 양지원은 끝까지 시선을 거두지 않고 그녀를 바라보았다.‘왜 쳐다보는 거지?’나은설은 숨김없이 털어놓았다.“당신은 정말 아름다우세요. 잡지 속 모습보다 훨씬 더 우아하고 눈부셔요.”양지원은 침묵했다.“...”그녀는 칭찬에 말문이 막혀 그저 조용히 이렇게 말했다.“과찬이세요.”“아니에요. 정말 예쁘세요. 저도 이 헤어스타일 시도해봤지만 양지원 씨처럼 잘 어울리지 않더라고요. 드레스도 아주 정교하고 우아해요. 정말 잘 어울리세요.”양지원은 순간 당황했다.“...”‘이게 무슨 상황이지?’나은설은 적당한 선에서 칭찬을 멈추고 양지원의 피곤한 얼굴을 보고 조심스럽게 물었다.“큰아씨, 잠시 휴식하시겠어요? 방을 준비해 두었어요.”그 제안은 양지원 마음에 들었다.길에서 양석진을 어떻게 마주할지 고민하고 있었지만 그가 부재중이라면 굳이 마음을 소모할 이유는 없었다.밤에 한 번 더 마주칠 수 있다면 그때 조용히 인사를 나누고 아침에 편안히 떠나는 편이 나을지도 몰랐다.“그럼 안내해 주세요.”“네. 이쪽으로 오세요.”방은 2층 가장 안쪽에 있었다. 양지원이 나은설을 따라 들어서자 문틈 사이로 은은한 나무 향이 스며들었다.커튼이 드리워져 있어 눈 부신 빛은 조용히 차단되어 있었다.그녀는 작은 거실의 소파 앞에 서서 조선 시대의 느낌이 물씬 나는 고풍스러운 장식을 둘러보았다. 고요하고 평온한 공간은 아늑하고 편안한 분위기로 가득 차 있었다.“여기 괜찮으신가요?”나은설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양지원은 침실도 살펴보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나은설 씨는 가서 일 보세요. 저 신경 안 쓰셔도 돼요.”그 말에 나은설은 활짝 웃으며 크게 고개를 끄덕이고 조용히 나갔다.방 안에 조용히 혼자 남은 양지원은 시계를 풀어 아무렇게나 내려놓고 신발을 벗은 뒤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맨발로 침실 안으로 들어서며 불을 켜지 않고 곧장 침대에 몸을 눕혔다.나은설은 정말 준비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