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바로 근처에 있어요.”안시연은 핸드폰을 내려놓고 사람들에게 말했다.모든 사람은 그녀가 허세를 부린다고 생각해서 기왕 부릴 거면 끝까지 부려봐라는 태도로 그 남자의 등장을 부추겼다.“네, 곧 오실 거예요.”안시연은 온화하게 웃었다.“어떤 사람일지 너무 기대가 되네요.”사람들은 겉으로 이렇게 말하며 실제로는 안시연이 돌 들어 자기 발등 깨는 망신스러운 장면을 보려고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구혜은은 키득키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현란한 말솜씨로 어떻게든 교수님을 자리에 남겨두려 했고 교수님이 보는 눈앞에서 안시연을 망신시키려 했다.모두가 다시 자리에 앉자, 정이슬은 초조해하며 물었다.“너 그분 진짜 괜찮은 사람 맞아? 내놓을 만하지?”안시연은 음식을 꼭꼭 씹으며 입가를 살짝 닦더니 고개를 돌려 부드럽게 웃었다.“응. 괜찮은 사람이야.”“뭘 해? 그 사람.”안시연이 생각해 보니 정인 그룹의 기둥 산업은 꽤 많았다.“뭐든 조금씩 해.”정이슬은 어이가 없었다.‘휴, 이것저것 되는대로 하는 사람이 잘 돼봤자 얼마나 잘 되겠어.’그녀는 포기할 줄 모르고 계속 안시연에게 문자를 보내어 자기 남자 친구를 불러와 안시연의 체면을 세우는 데 도움을 주려고 아득바득 했다.안시연은 마음속으로 은근히 기뻤다.연정훈은 근처라고 말했지만, 전혀 나타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사람들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으며 안시연을 놀려대는 목소리도 점점 커져만 갔다.“후배, 혹시 우리 인원수가 너무 많아서 그쪽 남자 친구를 놀라게 한 건 아니죠?”안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그쪽으로 바라보았다.“고작 사람이 많은 걸로 놀라진 않을걸요.”“그렇다면...”정이슬은 입을 닦으며 말을 꺼낸 그 여학생을 바라보았다.“못생긴 거로 놀랄 수는 있지.”그 여학생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됐고, 다 같이 기다려 봅시다. 후배가 우리를 속일 순 없잖아요.”구혜은이 말했다.정이슬은 허위적인 그녀의 모습에 눈을 희번덕거렸다.안시연은 여전히 담담한 표정이었다.술잔을 주고
장 교수는 생일 연회를 성대하게 치렀는데, 빈방만 몇십 칸을 잡아두었다.안시연은 연정훈이 어떻게 마침 그녀가 있는 방으로 정확하게 들어왔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룸 안에 자리가 모자라 구혜은이 옆 칸 큰 룸으로 연정훈을 청하려 했지만, 그는 오히려 단호하게 거절했다.“아, 괜찮습니다.”온 방의 사람들은 모두 연정훈을 다른 방으로 보내고 싶지 않았다.그래서 다들 시선을 후에 들어온 안시연과 정이슬에게 주목했다.‘쓸데없는 사람이 왜 아까운 자리를 차지하고 있냐?’그런데 잠깐 사이에 스태프가 도착해서 현장에 자리를 몇 개 추가했다.안시연과 정이슬은 여자 테이블로 초대되었고, 연정훈은 그녀를 등진 자리에 앉았다.연정훈에게 잘 보이려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는데, 저마다 감히 무모하게 굴지 못했다.구혜은은 자신이 프로젝트 책임자라는 신분을 믿고 자신을 내세우기에 바빴다.“연 대표님, 저의 스승님 대신에 한 잔 올리겠습니다, 아낌없이 프로젝트 자금을 내주시고 항상 우리의 천문 사업을 지지해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장 교수도 입이 귀에 걸리도록 활짝 웃었다.“맞아, 연 대표께 돈을 너무 많이 쓰게 했어.”연정훈은 화려한 차림새 없이 일상적인 수트를 입었고 룸에 들어선 후 다른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정장 외투를 벗고 심플한 흰색 셔츠를 입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일언일행에서 남들이 쉽게 다가가지 못할 귀티가 배어 있다. 그의 오뚝한 콧날 위에 걸려있는 금테 안경이 원래 감정이 잘 드러나지 않는 몽롱한 눈동자를 가려 더욱 서늘하고 차가운 분위기를 자아냈다.구혜은이 술을 권하자, 그는 고개를 약간 끄덕이며 잔을 들었다.이런 행동이 그에겐 이미 충분히 체면을 세워준 것이었다.정이슬이 귓속말로 말했다.“쟤 얼굴 빨개진 것 좀 봐. 얼마나 흥분했으면 저래?”안시연은 미소를 지을뿐 말하지 않았다.구혜은 뿐만 아니라 이 테이블에 앉은 모든 사람이 연정훈을 주시하고 신경 쓴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그녀는 핸드폰을 꺼내 열어보니, 그와의 대화 기록은
안시연의 핸드폰이 울리는 순간, 사람들의 시선은 그녀에게로 집중되었다.정이슬도 처음에는 아마 우연의 일치일 것으로 생각했었다.그러나 사람들의 놀란 눈빛 사이로 연정훈이 몸을 돌려 그녀를 향했다.그는 인제야 안시연을 발견한 듯 의아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허탈하게 웃었다.“왜 이렇게 한참 동안 아무 말도 안 하고 잠자코 있었어?”안시연은 자신을 향한 사람들의 경악한 눈빛을 뚫고 그를 향해 밝게 웃으며 말했다.“교수님과 기분 좋게 얘기 중이니,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요.”“그래도 교수님께 먼저 술을 권해야지. 구석에 숨어 있는 건 예의가 아니잖아.”남자는 꾸짖는 말을 하면서도 안시연을 주시하며 은은하게 반짝이는 눈동자엔 진한 사랑으로 가득했다.안시연은 술잔을 들고 일어섰다.두 테이블 사람은 아직 뇌 정지 상태였다.그래도 장 교수가 제일 먼저 상황 파악이 되었고 안시연이 곁에 걸어 오자 그는 비로소 손바닥으로 이마를 ‘탁’ 치고는 말했다.“이 기억력 좀 봐, 어쩐지 혜은이가 날 욕하더라니. 아까 시연이가 남자 친구를 데려온다고 말했었는데 깜빡했네!”그는 말하면서 다시 안시연을 바라보았다.“이 계집애도 참, 왜 진작 말하지 않았어. 하마터면 웃음거리가 될 뻔했네, 허허. ”안시연의 발그레한 얼굴엔 수줍은 기색이 드러났다.“교수님 오늘 이렇게 바쁘신데 제가 어떻게 저의 일에 신경 써달라고 할 수 있겠어요.”“무슨 신경을 써, 이건 잘된 일이지!”장 교수는 연정훈이 술잔을 내려놓고 안시연에게 자리를 양보하려 하는 것을 보고 옆에 있는 구혜은를 툭툭 치며 다그쳤다.“혜은아, 시연이랑 자리를 바꾸는 건 어떨까? 저렇게 멀리 앉는 것도 불편하잖아.”구혜은의 안색은 똥을 씹은 듯 구겨졌다.그녀는 아직도 정신을 놓은 상태였다.‘안시연이... 연정훈의... 여자 친구라고?!’그녀는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고 시선을 돌리자 마침 안시연이 고개를 숙여 연정훈과 눈빛을 교환하는 것을 보았다. 남자의 그윽한 눈빛에는 그의 차가운 기질과 하나도 어
연정훈이 그 말을 묻고 안시연이 고개를 돌려 보니 구혜은의 얼굴은 겁을 먹은 듯 하얗게 질려 있었다.안시연은 깨 고소하면서도 연정훈이 정말 나쁜 남자라고 다시 한번 뼛속 깊이 느끼게 되었다.그녀가 구혜은과 얼마나 많은 악연이 엮여있는지 구혜은은 스스로 잘 알고 있다. 그런 안시연이 연정훈에게 자기에 관한 말을 꺼냈다니, 뒷담까진 아니더라도 무조건 좋은 말은 아니었다.“후배, 연 대표님께 내 얘기까지 했어?”구혜은은 애써 괜찮은 척하며 말했다.그러자 안시연은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어떤 속셈인지 전혀 알 수 없는 태도로 대답했다.“선배가 대학 다닐 때부터 잘 챙겨줬는데 어떻게 잊을 수 있겠어요.”말을 듣자 구혜은의 안색은 더 나빠졌다.장 교수도 눈치가 빠른 편이라 상황이 더 나빠지기 전에 얼른 수습하러 끼어들었다.“내 학생 중에서도 혜은이와 시연이는 제일 출중한 편이야. 혜은이는 일을 착실하게 잘 처리하고 시연이는 비록 우리 천문과 학생은 아니지만, 학창 시절부터 무엇이든 열심히 하려고 했고 한 사물을 깊게 파고드는 걸 좋아해 남다른 인상을 남겼었어.”안시연은 담담하게 대답했다.“과찬입니다.”그런데 그녀의 얼굴에 드러난 아쉬움은 감출 수 없었다.“학교를 떠난 뒤로는 천문학을 거의 접해본 적이 없네요.”“천문을 연구하는 데는 타고난 재능뿐만 아니라 끈기가 필요해.”연정훈이 그녀를 한 번 쳐다보며 말했다.“역시 넌 여러 전시회를 더 많이 보고 외부의 환경을 넓게 접촉해 보는 게 좋아.”그가 이 말을 꺼내자, 장 교수는 숨겨진 말뜻을 귀신같이 알아들었다.“그럼 마침 잘됐네, 이번 전시회에 혜은이가 시연이를 데리고 여러 군데 돌아보는 게 좋겠어.”구혜은은 어색하게 치켜드는 입꼬리를 억지로 누르며 말했다.“나?”“그래, 네가 이번 전시회를 주최하잖아, 접해 본 것도 많을 테니 네 시연 후배를 데리고 돌아보는 것도 괜찮지.”장 교수가 말했다.구혜은은 머뭇거리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제가 하기엔 좀...”“선배는 항상 일이 바쁘셔서
안시연은 구혜은의 사람됨 자체가 싫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와 따지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원래 바로 이 자리를 떠나려 했는데, 뜻밖에도 구혜은이 먼저 자신을 향해 걸어왔다.“후배, 이건 내 명함이야, 너 요즘 시간 되면 언제든지 연락해.”안시연은 어이가 없어서 가만히 서 있었다.그리고 명함을 받아 쥐고는 두말하지 않고 곧장 밖으로 걸어 나가 연정훈을 찾았다.‘구혜은 같은 사람은 여러 다른 환경에서 쉽게 어울릴 수 있긴 해.’그녀의 핸드폰은 정이슬이 연거푸 보내온 카톡으로 끊임없이 징징 울리고 있었다.“안시연, 너 지금 완전 핫해.”“세상에, 남자 친구가 연정훈이야? 아니, 절친인 나한테 진작 말하지 그랬어!”“난 또 모르고 내 관종 남자 친구를 부를 뻔했잖아!”안시연은 웃음을 금치 못했다.그녀는 정이슬에게 전화를 걸어 진심으로 감사를 표하고는 전화를 끊자마자 복도 모퉁이에서 진수빈을 만났다.“연 대표님은 이미 내려가셨는데 같이 가시겠습니까?”안시연은 연정훈의 일분일초가 매우 소중한 걸 알고 있었으므로 당연히 오래 머물지 않을 것을 예상했다.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말을 꺼냈다.“장 교수님께 인사드리고 바로 내려갈게요.”“알겠습니다.”안시연은 다시 룸으로 돌아왔다.오는 길에서 만난 여러 사람들은 이곳에 금방 왔을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과 태도로 그녀를 대했다.어떤 사람들은 심지어 모르는 사이지만 친한 척을 하며 다가와 그 자리에서 연락처를 주고받았다.장 교수의 부인마저 친근하게 “우리 시연이”라고 부르며 시간 날 때 집에 놀러 오라고 청했다.그냥 간단히 작별 인사를 하는 것만 해도 30분이 걸려 겨우 룸에서 나와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주차장 한가운데 검은색 벤틀리가 세워져 있었다.그녀는 종종걸음으로 달려가 차 문을 당겼다.연정훈은 좌석에 기대앉아 잠시 눈을 감고 쉬고 있었는데 소리를 듣고 눈을 떴다.그가 몸을 일으키려고 할 때 부 좌석의 여인은 차 문을 닫더니 뜻밖에도 옆에서 그를 꼭 껴안았다.이 심상치 않은 행동
진수빈은 차 밖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연정훈 곁에는 여인이 거의 없었고 그는 또 이런 일을 처음 해 봐서 차 쪽을 감히 쳐다보지 못했다.설령 이렇더라도 그는 여전히 차 속 여자가 겁을 먹은 아기 고양이처럼 깜짝 놀라 외친 나른한 비명을 듣고 말았다.“쯧.”그는 차와 좀 더 멀리했다.고개를 들자 멀지 않은 곳에서 걸어오는 한 사람이 그의 눈에 띄었다.그는 속으로 ‘아차’ 했다.양민아도 연회에 참석하러 오던 참이었으나 건물 아래층에서 진수빈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진수빈이 이곳에 있다면 연정훈도 당연히 이곳에 있을 것이었다.그녀는 웃으며 이쪽을 향해 걸어왔다.차 안, 안시연의 단정했던 옷차림은 어느새 인위적으로 흐트러졌고 그녀의 몸 위에 무겁게 누르고 있는 남자는 반대로 옷차림이 매우 단정했고 머리카락조차 흐트러지지 않았다. 다만 금테 안경 렌즈 뒤 그윽한 눈동자가 이미 한 층의 뜨거운 욕망으로 짙게 물들어 있었다.“교수님...”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나지막이 불렀다.몸이 욕망으로 근질근질했고 그의 뜨거운 손아귀에서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정신이 점점 혼미해지고 있는 그때, 갑자기 뒷좌석 창문 유리에 똑똑 하는 소리가 들렸다.그녀는 깜짝 놀란 사슴처럼 어쩔 줄 몰라 연정훈의 품에 꼭 기대어 그의 넓은 등판으로 자신의 몸을 가렸다.연정훈의 눈동자에 활활 타오르던 욕정은 찬물을 끼얹은 듯 순식간에 사라졌고 그는 언짢은 듯 눈살을 찌푸렸다.진수빈은 일을 나름 차분하게 처리하는 성격이라 절대 함부로 하지 않았다.그는 정장 외투를 가져와 안시연의 몸 위에 덮어주었다.“괜찮아, 걱정 마.” 안시연은 얼굴을 붉히며 다른 건 신경 쓸 겨를도 없이 몸을 돌려 재빨리 옷을 챙겨입었다.그녀가 거의 다 정리된 후에야 연정훈은 창문을 열었다.진수빈은 감히 안을 들여다 못 보고 몸을 약간 굽힌 채 말했다.“연 대표님, 양민아 씨가 오셨습니다.”안시연은 연정훈을 등진 상태로 동작을 잠시 멈추었다.그녀의 머릿속엔 한 사람의 모습이 떠 올랐고 한창
양민아는 태도가 온화하고 예의 바르게 물었지만, 그녀가 먼저 물었을 때 안시연은 말 못 할 불편함을 느꼈다.안시연은 입꼬리를 당기며 단호하게 거절했다.“아뇨, 좀 피곤해서 쉬고 싶어요.”이승우 한 명도 상대하기 어려운데 다른 몇 명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그녀와 이 사람들은 원래 한세상 사람이 아니어서 서로 어울리기 힘들었다.양민아는 웃으며 말했다.“그러면 시간 날 때 같이 전시회 보러 가자.”“그래요.”양민아가 몸을 일으키자, 안시연은 차에서 내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그런데 연정훈이 다가와 그녀가 문을 여는 동작을 막았다.“교수님?”양민아는 아직 멀리 가지 않았고 이 호칭을 듣고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뒤쪽을 바라보았다.안시연은 차창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시선을 위로 한 채 연정훈에게 물었다.“전 택시 타고 갈 테니 진 비서님께 교수님을 데려다 달라고 할까요?”“괜찮아.”연정훈은 차 문에 팔을 걸치고 그녀의 손바닥만 한 얼굴을 주시하며 진지하게 말했다.“난 차가 있으니 진 비서더러 널 데려다 달라고 해.”안시연은 자기도 모르게 양민아 쪽을 바라보았다.양민아는 그녀를 향해 빙긋 웃었다.‘하긴, 양민아 씨는 차가 없을 리가 없지.’안시연은 눈을 절반 감아 시무룩한 시선을 감춘 채 걸쳐있던 외투를 연정훈에게 건넸다.연정훈은 몸을 약간 숙였고 바로 그 순간 안시연이 갑자기 그의 소매를 잡아당겼다.그녀는 차창 밖으로 몸을 내밀어 남자의 입가에 입을 맞추었다.멀지 않은 곳에서 양민아는 이 달콤한 광경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그녀는 한순간 몸이 굳더니, 바로 진정하고 무표정한 채 시선을 돌려 호텔 안으로 들어갔다.차창 옆 안시연은 주춤주춤 물러서며 부끄러움을 감췄다.연정훈은 그녀가 두 손을 차 문에 놓고 머리를 숙이고 있는 앙증맞은 모습에 참지 못하고 손을 뻗어 그녀의 보드라운 머리카락을 어루만졌다.“아직 시간이 일러. 심심하면 병원에 가서 외할머니를 찾아뵈는 것도 좋아.”“네...”“하지만 저녁에는 꼭 일찍 집에 가
안시연은 그를 집 안으로 들인 뒤 먼저 물을 따랐다. 연정훈은 식탁 가장자리에 기대어 미간을 짚고 쉬고 있었다. 안시연이 물을 그의 손 옆에 놓자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천장 조명을 거슬러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말없이 일을 하며 안색은 평온했고 입술은 살짝 오므리고 있었다. 그는 손을 뻗어 그녀를 끌어안으려 했으나 그녀는 이미 몸을 돌리고 말했다.“과일 좀 씻어올게요”연정훈의 손은 허공을 잡았지만 그는 전혀 화내지 않고 입가에 살짝 미소를 띠었다. 안시연은 주방에서 일부러 시간을 끌었고 다시 나왔을 때는 방울토마토 한 묶음을 들고 있었다. 그녀는 연정훈의 맞은편에 앉았다. 연정훈은 천천히 그녀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리 와.”안시연이 그를 한 번 쳐다보았다. 그는 손으로 옆 자리를 가볍게 두드렸다.안시연은 결국 그의 말과 반대로 행동할 수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마치 자신이 그와 싸우자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녀는 그의 옆에 앉았으나 그의 품에 안기지는 않았다.연정훈은 다리를 꼬고 편안한 자세로 소파 등받이에 얼굴을 기댔다.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흐트러진 긴 머리카락을 살짝 쓸어올리며 농담조로 말했다. “낮에는 그렇게 네 얼굴에 자존심을 세워줬는데 밤에는 나한테 좋은 태도도 안 보여주는 거야?”안시연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녀도 자신의 태도가 지나쳤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고 입을 열려고 했지만 그는 이미 몸을 바로 세우며 그녀에게 다가와 그녀를 안았다.“기분이 안 좋아?”그의 뜨거운 눈빛에 안시연은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그를 쳐다보았다. “... 당신 몸에서 술 냄새 나요.”연정훈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그는 술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그녀를 더 품 안으로 끌어안았다.안시연은 말없이 그의 어깨에 기대었다.남자는 얼굴을 옆으로 돌렸고 따뜻한 숨결이 그녀의 얼굴에 닿았고 그녀에게 말했다.“앞으로는 일찍 올게, 기다리게 하지 않을게”그 순간, 그녀의 마음이 살짝 흔들렸다
침대 시트를 교체하지 않아 방안에는 아직도 그 향이 가시지 않았다. 양혁수는 단팥죽이 끓는 동안 서둘러 시트를 교체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단팥죽의 단 향이 코를 자극했다.양혁수는 한 그릇 따라 변여름에게 건넸고 변여름은 소파에 나른하게 누워 양혁수가 한입씩 떠먹여 주는 걸 삼켰다.그렇게 천천히 기운을 되찾은 변여름은 또다시 장난기가 발동했다.양혁수의 품에 안겨 양혁수의 핸드폰을 뒤적이던 변여름이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마주했다.양혁수는 변여름의 두 볼을 쭉 잡아당기며 이 순간의 행복을 즐겼다.그런데 변여름이 꽤 진지한 얼굴로 이런 질문을 하는 게 아니겠는가?“오빠, 정말 무슨 약이라도 먹은 거 아니에요?”양혁수는 인상을 팍 찌푸리다가 시간을 확인하고는 바로 무슨 의미인지 알아차렸다.싸늘해진 양혁수의 시선에 변여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약을 따로 챙겨 먹지 않은 거면 너무 오랫동안 금욕해서 그런 거 아니에요?”“...”양혁수는 변여름이 이어서 어떤 질문을 할지 눈에 뻔했고 미리 준비해 둔 떡을 집어 냉큼 변여름의 입에 넣었다.변여름은 입안 가득 우물거렸고 반쯤 남긴 떡은 양혁수가 처리했다.“계속 까불면 너 이거 다 먹일 거야.”변여름이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이 떡 전부요?”“...”역시 못 말리는 변여름이라 생각하며 양혁수는 입안 가득 떡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입술 도장을 꾹 찍었다.어느새 해가 뜰 시간이 되었지만 두 사람은 하나도 졸리지 않았다.한참 꼭 붙어 있다 보니 또 어느새 애매모호한 분위기가 흘러나왔다.양혁수는 변여름을 위해서라도 관심사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변여름이 핸드폰을 뒤적이며 말했다.“시연 언니가 아직 새해 인사를 보내지 않았네요?”질투하는 듯한 변여름의 말투가 오늘따라 더 귀엽게 느껴졌다.하지만 지금 말을 잘못하면 변여름이 삐질 게 뻔했으니 양혁수는 말을 가려서 하기로 했다. 그래서 한참 말을 골라 입을 열었다.“시연이는 새해 당일에 인사를 보내는 편이야. 우리 가족들도 대부분 그렇게 하거든. 너
거사를 치르기 전에 변여름도 나름 많은 조사를 걸쳐 충분히 준비를 마쳤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직접 겪어보니 실전과 이론은 큰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된다.변여름은 자신이 주동권을 잡으려 노력했지만 모두 가볍게 양혁수에게 들통이 나 물거품이 되었다.양혁수는 변여름의 두 손을 잡아 머리 위로 고정시켰고 변여름이 점차 반항할 생각도 하지 못할 때까지 꼭 붙잡아줬다.변여름의 머릿속에는 양혁수가 거친 숨을 내쉬며 귓가에 뱉은 말뿐이었다.“긴장하지 말고 힘 풀어.”긴장을 풀자 바로 쾌감이 이어졌다.처음 사과를 베어 문 에덴에 이런 기분이었을까, 변여름은 눈앞이 흐릿해지고 이 세상과는 단절된 쾌감만 느껴졌다.변여름은 나른하게 침대에 누웠고 잠시 의식을 되찾고 양혁수와 시선을 마주했다.양혁수는 변여름 이마의 땀을 닦아주고 또 달래듯 입술에 키스했다.금방 지나갈 소나기같았지만 또 벼락이 치고 폭우가 쏟아졌다.양혁수도 쾌감에 절여 절로 미소가 나갔지만 자꾸 변여름을 놀렸다.그러자 변여름이 바로 양혁수의 입술을 깨물었다.양혁수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두 사람의 자세를 바꿔 또 새로운 쾌감을 찾았다.변여름은 촉촉해진 눈가로 양혁수를 바라봤고 마치 처음 치즈를 선물 받은 고양이가 어디서부터 손을 대면 좋을지 몰라 망설이는 것 같았다.“네가 자세 바꾸고 싶다며?”양혁수는 손을 뻗어 변여름의 머리를 쓸어내리며 나른한 시선으로 유혹했다.“자, 네가 원하는 대로 해봐.”변여름은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아까도 변여름에게 기회를 줄 것처럼 굴다가 또 선수를 빼앗아 본인이 흐름을 주도했었다. 그렇게 반복되는 농락에 변여름은 이제 그럴 마음도 사라졌다.하지만 양혁수가 얌전히 누워주니 변여름은 또 덮칠 마음이 스멀스멀 생겼다.‘내가 잡아먹어야지!’서로를 탐닉하고 뜨거운 숨을 몰아 내쉬기를 반복했고 어느샌가 이불도 바닥 위로 떨어져 있었다.변여름은 저도 모르게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고 입술을 막아도 걷잡을 수 없었다.결국 변여름은 이불에 얼굴을 묻어버렸고 지금 본인
변여름은 낮에 물건을 뒤적이다가 양혁수가 서랍에 새로 준비해 둔 걸 발견했었다.양혁수가 참 보수적이라 생각했지만 변여름은 그런 점도 귀엽게 느껴져 눈치껏 본인이 준비한 물건은 서랍에 넣어두지 않았다. 뭐든지 차근차근 순서를 밟는 게 좋을 것 같았다.그러나 갑자기 자신을 안아 들고 위층으로 향하는 양혁수를 보며 변여름은 의아해졌다.‘오늘 밤엔 순정남이 아닌 건가? 아, 벌써 기대돼.’그러나 위층으로 올라가서 키스도 한참 했지만 시작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변여름이 양혁수의 품 안에서 기어 나오며 말했다.“오빠, 먼저 샤워나 할래요?”“...”‘이 흐름이 아닌데.’양혁수는 쯧 하고 혀를 차다가 변여름을 잡고 다시 아래에 깔았다.또 쉴 틈 없는 키스가 이어지고 변여름은 온몸이 나른해졌으며 입가가 얼얼해질 무렵, 양혁수가 마지막으로 입가에 뽀뽀하고 욕실로 향했다.변여름은 몰래 한숨을 푹 내쉬었다.‘그래. 내가 기다리지 뭐.’얌전히 침대에 누운 변여름은 다리를 달달 떨며 시간을 보냈다.그때, 양혁수가 준비해 둔 옷으로 갈아입고 걸어왔다.바로 변여름에게 다가간 양혁수는 순식간에 변여름을 이불 안에서 꺼내 안아 들었다.‘뭐야 샤워하러 간 거 아니었어? 또 준비한 게 있나 보네?’의아해하는 변여름의 생각을 읽고 양혁수는 입술에 도장을 꾹 찍고 욕실로 향했다.“같이 씻자.”변여름은 깜짝 놀라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욕실 안에는 뜨거운 김이 가득해 시야가 흐릿했다.양혁수는 어제 무슨 이유인지 안방에 새로 가구를 배송받았었다. 목재로 된 흔들의자였는데 하나는 안방에 두었고 특수 코팅을 거친 의자는 욕실에 두었다. 변여름은 안방에 둔 흔들의자에 누워 햇살을 느껴봤는데 그 기분이 아주 좋았다. 그러나 욕실에 둔 의자에 누우면 마치 발가벗겨진 생쥐 꼴이 되는 기분이 들었다.변여름은 욕실로 향하는 내내 별 별 난 생각이 다 들었지만 양혁수를 상대로 그런 음흉한 상상을 하면 안 된다고 자신을 채찍질했다.그러나, 변여름은 곧 자신의 상상이 틀리지 않았
누가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고양이 하나 때문에 그렇게 혼을 내던 오빠 친구가 오늘엔 제 옆에 앉아 평범한 여느 연인들처럼 자신을 잘 부탁한다고 인사하는 것을.변여름은 다른 사람에겐 흥미를 잃었고 오직 양혁수만 눈에 보였다. 그리고 너무 기분이 좋은 나머지 술이 술술 넘어갔다.회식을 끝내고 근처를 걸으니 거리에서 새해 느낌이 물씬 났다. 변여름은 양혁수의 손을 잡고 길을 걸으며 노래를 흥얼거렸다.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침대에 털썩 누워서도 양혁수의 이름을 불러댔다.“양혁수... 혁수 오빠...”대체 뭘 어떻게 더 해야 이렇게 커진 제 마음을 다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른다. 변여름은 정말 하늘만큼, 땅만큼 양혁수가 좋았다.올해는 양혁수가 근 10년 동안 가장 기대되는 새해라고 할 수 있다.새해에 맞춰 양홍두도 세운시로 향해 양지원과 함께 새해를 보내기로 했다.그리고 양혁수는 양지원에게 곧 변여름과 함께 세운시를 찾아 정식으로 인사를 드리겠다고 말했다.새해 전날, 집사는 양혁수의 기분이 퍽 좋은 걸 발견하고 다 같이 만두도 빚고 송편도 빚을 것을 제안했다.변여름도 아침 일찍 양씨 가문을 찾아 일을 거들었다.양혁수는 집 안팎을 돌아다니며 새해 분위기가 물씬 나는 조명이나 인테리어를 세팅했다.“조명을 켜기엔 아직 일러요. 조명은 오후부터 켜야 한다고 했어요.”변여름은 어디에서 들은 정보를 한 손에 만두를 쥔 채로 양혁수에게 말했다.양혁수는 사다리 위에 서서 말했다.“누가 그래? 우린 우리만의 법을 따르는 거야.”양혁수는 변여름을 달래듯 말했다.“꼬맹이는 얼른 가서 만두 빚고 있어. 예쁘게 빚으면 내가 새해 용돈도 챙겨줄게.”집사는 괜히 큰소리하는 양혁수를 보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양씨 가문 남자들, 누구 하나 큰소리할 수 있는 사람이 없을 텐데.’그러나 변여름은 고개를 끄덕였고 또 양혁수를 향해 손을 휘휘 저었다.사다리 아래까지 내려온 양혁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왜?”변여름은 바로 이때다 싶어 양혁수의 두 볼에
양지원은 바로 세운시로 돌아갔다.양씨 가문에는 오직 변여름과 양혁수만 남겨졌고 그날 밤부터 변여름은 아주 자연스레 양혁수의 방을 드나들었다.며칠 뒤면 새해인지라 연구실도 곧 휴가가 시작될 것이다. 변여름은 하루 시간을 내어 선물을 들고 연구실을 찾았다.선배들은 변여름이 영영 돌아오지 않을 줄만 알았는데 돌아온 변여름을 보며 아주 기뻐했고 선물을 받으며 어디에 다녀왔는지, 무엇을 했는지 물었다.“연애하고 왔어요.”솔직한 변여름의 대답에 사람들은 조금 당황했고 과거에 변여름에게 고백했었던 선배는 마음이 부서졌다.교수님은 변여름의 교제 상대가 누구인지 궁금해했다.“저희 오빠 친구예요.”‘그래. 오래 붙어있을수록 정분이 나는 법이지.’사람들은 변여름의 옆자리를 차지한 그 상대가 궁금했고 교수님도 한번 만나보고 싶다고 말했다.변여름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고 점심시간이 되자 도시락을 들고 양혁수를 찾아갔다.“회식?”양혁수는 변여름이 연구실 사람들한테 인기가 많은 게 의외라는 생각을 했다.하지만 좀 더 생각을 해보니 고작 며칠 사이에 얼굴도 보지 못한 제 비서와 사이좋게 지내는 걸 보며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변여름이 말했다.“남자 친구 생겼다고 말했거든요.”그러자 양혁수는 변여름이 자랑하고 싶어 하는 걸 바로 눈치챘다.그리고 불현듯 과거에 변여름이 연구실 선배한테 고백을 받았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변여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한두 사람이 아니었는걸요.”어깨를 으쓱거리는 변여름을 보며 양혁수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한두 사람이 아니었다?”“네!”“어떤 사람이었는데? 다들 똑똑할 거고, 뭐 잘생겼어?”“똑똑하기도 하고 잘생기기도 했죠.”옆에서 문서를 정리하던 비서가 그 말을 듣고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대표님, 예쁘고 요리도 잘하시는 여름 씨가 얼마나 인기가 많겠어요. 대표님이 조심하셔야겠네요.”변여름이 양혁수를 힐끔 훔쳐보자 양혁수가 바로 연기를 이어갔다.“그러게. 갑자기 짜증이 나서 입맛이 하나도
새벽이 되도록 양혁수의 방에는 열기가 뜨거웠다.딸깍.헤드 등을 켜고 변여름이 이불 안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고 주변을 살폈다.얼마 지나지 않아 양혁수가 화장실에서 돌아와 자연스레 변여름의 몸을 닦아줬다.변여름은 자꾸 양혁수를 훔쳐봤고 양혁수는 손을 뻗어 이런 변여름의 머리를 꾹 눌렀다.그러자 변여름은 양혁수의 베개에 얼굴을 묻고 비비며 입꼬리를 올렸다.이어 욕실에서 샤워 소리가 들려오자 왠지 양혁수가 만족하지 못해 홀로 해결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그런 생각을 하며 침대 옆 서랍을 열어보니 손목시계 따위만 있을 뿐 남은 콘돔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지 양혁수가 많이 자제한 것 같았다.‘이럴 줄 알았으면 집에 있는 걸 통째로 갖고 오는 건데.’그리고 그때 욕실 문이 열리고 양혁수가 돌아왔다.변여름은 얌전히 누워있다가 양혁수의 품에 꼭 안겼다.양혁수의 체향을 느끼며 변여름은 두 눈을 감고 얼굴을 비볐고 목 언저리에 뽀뽀하려 했다.그러나 양혁수가 변여름을 제지했다.“지금 뭐 해?”“왜요?”양혁수는 제 목에 있는 흔적을 가리켰고 새길 때는 몰랐지만 샤워하고 나니 따끔거리는 게 느껴졌다.변여름이 지난번처럼 또 정도 없이 세게 흔적을 남긴 모양이었다.하지만 이번 모양과 색깔이 너무 마음에 들어 변여름은 미안한 마음이 하나도 들지 않았다.“오빠 다음엔 반대편도 해줄게요.”“...”양혁수가 떨떠름한 표정을 하고 있는데 변여름이 취조하듯 방금 잠자리가 만족스러웠냐고 물었다.“오빠, 나 다른 것도 배웠는데 오빠만 좋다면... 읍!”양혁수는 바로 변여름의 입을 막았다.“...”‘풉. 부끄러워하긴.’양혁수는 본인이 오빠로서 리드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이 꼬맹이한테 놀아나고 있는 것 같았다.“잠이나 자!”그래서 고작 이런 일로 무게를 잡을 수밖에 없었다.‘흥. 오늘은 이만 물러선다.’변여름은 얌전히 몸을 돌렸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또 자꾸 치근덕거렸다.“오빠가 많이 보수적이라는 걸 알고 있는데요
변여름은 말재주가 뛰어났고 그대로 두면 분명 더 큰 소동을 일으킬 기세였다.양혁수는 그녀를 다잡아보려 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변여름은 밀고 당기기에 능했고 결국 늘 그가 그녀를 달래는 쪽이었다. 변여름을 제압하려면 그가 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녀를 유혹하는 것뿐이었다.하지만 서로가 진심을 담기 시작하면 결국 누가 누구를 먼저 유혹한 건지조차 흐려진다.어느새 그녀는 그에게 기대어 그를 천천히 침대로 이끌었다.양혁수는 조용히 누워 있었고 변여름은 이불 속에서 조심스레 머리를 내밀었다. 표정은 잔잔했지만 눈동자에는 설렘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그가 움직이기도 전에 그녀는 익숙한 듯 그의 팔을 벌리고 조용히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이내 그의 온기를 안은 채 잠이 들었다.양혁수는 차갑게 굴어보려 했지만 몸은 정직하게 그녀의 이마에 키스했다.키스가 끝나자 그는 스스로의 입을 때리고 싶을 만큼 후회가 밀려왔다.저녁이 되면 변여름은 양혁수 곁에서 말이 많아졌다. 그녀는 그와 감정을 나누고 일상의 소소한 이야기부터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까지 전부 들려주었다. 작은 머릿속은 놀라울 만큼 명확했고 양혁수가 확신하지 못하던 일들을 종종 먼저 짚어내곤 했다.그러다 보면 두 사람의 입술은 자석처럼 끌려붙었고 전에는 양혁수가 불씨를 조심스럽게 다룰 수 있었지만 지금은 더 이상 그럴 수 없었다.변여름을 집에 데려온 첫날 밤 양지원을 마주친 이후의 느낌은 이전과는 달랐다. 그녀를 몸 아래에 눕히고 얼굴을 감싸안은 채 키스하자 변여름은 그의 몸에 다리를 스치듯 비볐고 그는 순간적으로 치솟는 충동을 느꼈다.자신의 반응을 깨달은 그는 재빨리 움직임을 멈췄다.변여름에게 들킬까 봐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조명의 밝기를 낮추며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하지만 막 눕자마자 변여름의 부드러운 몸이 다시 양혁수의 품에 파고들었고 변여름은 그의 어깨에 기대어 그를 바라보았다.양혁수는 고개를 돌려 그녀의 시선을 마주했으며 단 한 번의 눈 맞춤으로 그녀가 이미 모든 것을 알
양혁수의 ‘착하지’라는 한마디에 변여름의 입꼬리는 하늘까지 닿을 듯 환하게 올라갔다.그녀는 사람의 마음을 꿰뚫는 데 능했고 사실 그가 자신을 놀리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특히 밤 11시 30분이 넘도록 그가 나타나지 않자 아마도 자신이 먼저 찾아오기를 기대하며 방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로 생각했다.‘아이고.’변여름은 그의 장난에 넘어가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간질이는 마음을 안고 그녀는 문가에 서서 발끝을 들어 여러 번 밖을 내다보았다.밤이 깊어 12시가 다 되어도 그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자 그녀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고 외투를 걸쳐 입은 채 문을 열고 나섰다.양씨 가문의 저택은 워낙 넓어서 그녀가 양혁수의 방에 닿기 위해선 한 층 아래로 내려가 길게 이어진 복도를 걸어야 했다.몰래 발걸음을 옮겨 문 앞에 선 그녀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문고리를 돌렸다. 예상대로 잠겨 있지 않았다.문을 열고 들어선 방 안은 숨 막힐 듯 어두웠다.침실은 더 깊은 어둠에 잠겨 있었고 그녀는 익숙한 감각과 뛰어난 시력에 의지해 침대를 더듬어 앉았지만 그 위에는 아무도 없었다.‘?’변여름은 숨을 죽인 채 주변을 감지했고 방 안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혹시 오빠가 나를 찾으러 간 걸까?’그렇게 생각하며 조용히 침대에서 내려왔다.작은 거실로 발걸음을 옮기던 중 무언가가 벽에 부딪히는 소리가 두 번 울렸다. 그녀는 즉시 멈춰 섰다.달빛이 비추는 거실 그 한쪽 소파 팔걸이에 몸을 기댄 양혁수가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그는 침실 문을 빠져나온 그녀가 멈추는 순간까지 눈을 떼지 않았고 입가에 짙은 미소가 번졌다.그의 손에는 라이터가 들려 있었고 그는 그것을 가볍게 던지며 조용히 그녀에게 다가갔다.변여름은 품에 안긴 이가 양혁수라는 걸 분명히 알고 있었지만 그가 갑작스레 뒤에서 안아오는 순간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이어진 그의 키스가 그녀의 옆얼굴에 가볍게 닿자 그녀는 본능적으로 숨을 멈췄다.양혁수는 평소 그녀가 마음껏 표현하게 두었지만 자신이 먼저 유혹
식사가 끝나자 양지원의 마음속에는 여러 감정이 스쳐 지나갔지만 이제야 비로소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식사 후 그녀는 아래층 소파에 편히 앉아 야경을 바라보며 시간을 재어 양석진에게 전화를 걸었다.위층에서는 양혁수와 변여름 사이에 또다시 작은 충돌의 기운이 맴돌기 시작했다.양지원이 집에 머무는 동안 양혁수는 변여름과 같은 방에 머무를 수 없었다.변여름은 몹시 언짢은 기분이었다. 그가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휴대전화에는 세 글자의 짧은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양혁수.]그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끝내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꽤 화가 난 모양이네. 성까지 붙여 부르다니.’풀네임으로 불린 건 처음이라 문득 그것도 꽤 재미있었다.수건을 툭 던지고 침대에 앉은 그는 변여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화났어?]잠시 후 변여름에게서 한 장의 사진이 도착했다.사진 속에는 줄에 매달린 막대 인형이 있었고 그 옆에서 날아온 주먹이 인형의 배를 강하게 가격하고 있었다. 인형 옆 상자에는 화살표가 가리키고 있었고 상자 안에는 ‘양혁수’라는 이름이 또렷이 적혀 있었다.양혁수는 순간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어디서 배운 거야? 너희 천재들은 이런 것도 다 할 줄 아는 거야?]예전에 변여름은 허예나의 이름으로 그와 채팅할 때 일부러 평범한 여고생처럼 꾸미며 어색하고 오래된 이모티콘을 보내곤 했었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그녀는 모든 걸 이해했고 재치 넘치고 독특한 이모티콘으로 그의 휴대폰을 장악했다.[이런 게 아주 유용하죠.]변여름이 말했다.[그러니까. 이제는 원격으로도 때릴 수 있지.]양혁수가 답장을 보냈다.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영상 통화가 걸려왔다.양혁수는 전화를 받았다.화면 속 변여름은 침대 머리맡에 기대 앉아 있었고 아마 두 손으로 휴대전화를 들고 있었는지 아래에서 위로 비추는 각도는 썩 좋지 않았다.양혁수가 웃으며 말했다.“집에 재밌는 공간 많잖아. 잠 안 오면 나가서 산책이라도 해.”“나가기 싫어요.”변여름은 기운 없이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