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시연은 찻잔을 내려놓고 그와 같은 잔잔한 눈빛으로 연정훈을 바라보았다.“사람을 시켜 음식을 가져오게 했는데 막상 그들이 무엇을 가져왔는지는 관심이 크게 없었나 봐요?”그녀는 입꼬리를 올리며 쓴웃음을 지었다.“점심 메뉴에는 탕수육이 없었어요.”비서는 땀을 뻘뻘 흘리며 당황했지만 연정훈은 여전히 아무 표정 없이 대답했다.“그러면 뭐가 있었는데?”“몰라요.”안시연은 무관심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잊어버렸어요. 그냥 한 번 본 거라.”“그랬더니?”“그랬더니 내가 싫어하는 것들만 가득해서 버렸어요.”비서는 그녀의 거침없는 발언에 숨을 들이켰고 연정훈 역시 아무 말 없었다.안시연은 눈을 깜빡이며 순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버리면 안 되나요?”연정훈은 대답 대신 물었다.“그럼, 점심은 뭐 먹었어?”“밖에서 먹었어요.”안시연은 손으로 턱을 살살 문지르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정훈 씨 카드로 200만 넘게 썼어요.”말을 마친 후 그녀는 입꼬리를 올리며 물었다.“연 대표님께서 그 돈이 아까우신 건 아니죠?”연정훈은 전혀 신경 쓰는 기색이 없이 오히려 그녀를 칭찬했다.“그럴 리가. 잘 썼어. 돈을 잘 쓰는 것도 능력이야.”비서는 어이가 없었지만 뭐라고 할 수 없었다.안시연은 어깨를 으쓱했다.연정훈은 일어나 그녀를 향해 걸어왔고 비서에게 눈길을 한 번도 주지 않은 채 말했다.“먼저 나가 있어.”비서는 도망치듯 급히 나갔다.소파에 앉아 있던 안시연은 연정훈이 가까이 오자 자리를 내주었고 연정훈은 그녀의 옆에 앉아 자연스럽게 그녀를 끌어당겨 무릎 위에 올렸다.안시연은 본능적으로 불편함을 느꼈지만, 곧 티를 안 내고 감추었고 그에게 살짝 미소를 지었다.연정훈은 소파에 기대어 손으로 그녀의 턱을 살짝 만지며 물었다.“어제 부승희와 재밌게 놀았어?”“네.”안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진심으로 기뻐하는 표정으로 말했다.“뭘 좀 많이 샀어요.”“뭘 샀는데?”그가 묻자 안시연은 그에게 구체적으로 말해 주었고, 그녀가
연정훈은 담배를 한 대 꺼내 피우며 뒤에 있는 정교하고 작은 가방을 말없이 바라보았다.안시연은 완전히 변했다. 더 예뻐지고, 더 순해졌으며, 조금 더 교활해졌다.연인의 입장에서 볼 때 그녀는 더욱 완벽해졌다. ‘하지만 뭐, 괜찮아. 어쩌면 우리 둘 사이에는 이렇게 하는 게 맞는 걸지도 몰라.’ 손에 있는 담배를 다 피웠지만 가슴 속의 답답함이 전혀 가시지 않자 그는 다시 하나를 꺼내 피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라이터를 무심코 내던지자, 테이블에 부딪히며 큰 소리가 났다. 그 소음에 그는 이마를 찡그리며 잠시 침묵하다가 손에 있던 담배를 재떨이에 꺼버리고는 휴식실로 들어갔다. 안시연은 서둘러 샤워를 하고 몸의 물기를 미처 닦지도 못했는데 갑자기 뒤에서 문이 열리자 그녀는 깜짝 놀랐다. 다음 순간 그녀의 몸은 남자에게서 뒤로 안겼다.그는 조용히 그녀의 목에 입을 맞추었고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피하려 했지만, 지금 자신의 신분이 떠올라 이를 악물고 그에게 몸을 맡겼다.그는 그녀를 안아 침대 위에 올려놓고 자기 몸으로 그녀를 완전히 덮어버렸다.그녀는 처음으로 그에게 불을 꺼달라고 요구하지 않았고 대신 손을 들어 조심스럽게 눈 위에 덮었다. 시야가 흐려지면 마음도 같이 마비될 거라는 생각이었다.그리고 그녀는 완전히 긴장을 풀고 적극적으로 그의 움직임에 맞추었다.연정훈은 그녀와 이런 일을 할 때 거의 산만해하지 않았고 모든 집중력을 두 사람 몸이 와닿는 부위에 놓곤 했다.매일 밤, 그는 벚꽃동 침실에서 자신을 그녀의 몸속에 깊이 담갔다.그는 자신이 진정으로 아끼고 사랑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몸이라고 생각했다.그러나 그녀의 양옆에 팔을 지탱하고 있을 때, 그는 살며시 그녀의 손을 떼고 몸을 숙여 그녀의 눈에 입을 맞추었다.눈이 마주치는 그 순간, 그녀는 그에게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아름다운 눈동자엔 여성 특유의 부드럽고 매혹적인 감정이 담겨있었다.이런 시선은 어떤 남자도 견디기 어려웠고 당장 덮쳐들었을 것이다.그런데 연정훈은 멈췄다.그는
안시연은 도대체 어떤 친척이 이렇게 중요한지 몰랐다. 그녀가 여러 번 제시간에 도착하겠다고 보장한 후에야 외할머니는 안심했다. 오후에 해야 할 일은 산더미 같았지만, 그녀는 바쁜 와중에 운전 학원 예약도 하고, 성진대의 각 전업과 수업을 훑어보고 관심 있는 것들을 모두 골랐다. ‘그래, 연애보다는 일이지.’ 연정훈을 머릿속에서 지우니 효율이 세 배는 더 높아졌다. 하지만 퇴근 시간에 주차장에서 그의 차를 보자 그녀는 다시 심리적 준비가 필요했다. 연정훈은 차 안에서 거울로 그녀가 제자리에서 기도 같은 것을 하는 모습을 보고 피식 웃었다. ‘내가 악마야? 기도까지 해야 해?’ 안시연은 마음의 준비를 끝낸 후 차 옆으로 뛰어갔다. 그녀가 문을 열고 차에 앉자마자 그녀만의 향기가 잔잔한 파도처럼 그에게 밀려왔다. 향은 너무 강하지 않았고 은은하게 코를 간지럽힐 정도였으며 연정훈은 오후의 피로가 싹 가셔지는 느낌을 받았다. “지금 병원 가려고?” “네!” 안시연은 그를 보지 않고 대답하며 지워진 메이크업을 수정하고 있었다. “외할머니가 집안 친척이라고 하셔서 아마 오래 있어야 할 것 같아요.” 그녀는 말하며 연정훈을 한번 쳐다보았다.“기다리지 않아도 돼요.” 연정훈은 노트북 화면을 보면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그는 입을 열었다.“빨리 끝내.”그는 분명히 그녀가 빨리 돌아오길 원하는 것 같았고 안시연은 그가 점심때의 일을 계속 이어서 할 것으로 추측했다. ‘하... 점심에 해주겠다고 할 땐 도망쳐버리고 내 소중한 저녁 시간까지 뺏네.’ 그녀는 한숨을 쉬며 알았다고 대답했다. 연정훈은 그 나지막한 목소리에서 그녀의 언짢은 심정을 눈치채고 거울을 통해 그녀를 쳐다보았다. 역시 여인의 아름다움은 성격과 비례하는 것 같았다. 그는 키보드를 누르며 다시 한번 강조했다.“30분.” 안시연은 이를 악물었다. 그녀는 평소에도 성격이 좋고 그에게 호의도 있었기에 이전에 당한 불쾌한 일들은
안시연은 엄마를 만나는 수많은 상상을 해봤지만 이렇게 뺨을 맞는 당황스러운 시작일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그녀는 얼굴을 감싸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왜 저를 함부로 때리는 거예요?” 드디어 양지원에게 맞은 그 한 대를 그녀의 딸에게 돌려주었다는 생각에 소현정은 속이 시원했다. 그녀는 친엄마의 가면을 쓰고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내가 네 엄마니까! 네가 부끄러움도 모르고 권력 있는 남자에게 몸과 마음을 맡기며 자존심도 없는 거 보니, 이 정도면 때릴 법하지 않아?!” 안시연은 화가 치밀어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녀는 눈앞의 여자가 자신의 엄마일 거라고 도저히 믿을 수 없었지만, 외할머니가 한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엄마, 엄마...’ 그녀는 눈시울이 한순간에 붉어졌고 허리를 곧게 편 채 말했다. “절 키운 적도 없으면서 저한테 함부로 말할 자격이 없어요!”소현정은 차가운 웃음을 지었다. ‘이 못된 년, 재수 없는 건 엄마랑 똑 닮았어.’ 그녀는 다시 한 대 더 때리려 했지만 안시연은 빠르게 몸을 피했다. “소현정 씨, 다시 손을 대시면 경찰에 신고할 거예요!” 소현정은 조금 놀라는 기색이었다. 그녀는 외할머니가 안시연에 대해 말하는 걸 들었을 때 그녀가 매우 착하고 말 잘 듣는 성격일 것으로 생각했지만, 안시연은 요즘 따라 너무 많은 고통을 겪었고 또 연정훈에게 금방 상처를 받았으므로 이미 자신의 원칙과 자존심이 너무 무너져버린 상태였다. 그런 그녀가 자신을 낳아 주기만 하고 직접 길러주지도 않은 잔인한 엄마에게 결코 비굴하게 굴 수는 없었다.“나는 네 엄마니까 때리든 말든 내 맘대로 하는 거야!”그녀는 여전히 자신의 신분으로 눌러보려 했지만 안시연은 완전히 화가 나 있었다.“당신은 내 엄마가 아니에요!”“나는 제삼자로 살고, 자식을 버린 엄마는 없어요!”그녀는 마치 그동안의 억울함을 한꺼번에 쏟아내듯이 소리쳤다.그녀는 외할머니의 손에 의해 자랐고, 어릴 때부터 아
안시연은 이전에 주지혁이 자주 외할머니로 자신을 위협하는 바람에 깊은 트라우마가 생겨 소현정의 말을 듣고 즉시 물러서며 되물었다. “외할머니께 말하려고요?” 소현정은 순간 당황했다. 그러자 안시연이 계속 말했다. “외할머니는 방금 심장 수술을 받으셨잖아요!” 소현정은 그녀가 진심으로 외할머니에게 감정이 있는 줄은 몰랐다. 그래도 이렇게 되면 이 감정을 이용해 안시연을 마음대로 컨트롤할 수 있을 것이었기 때문에 그녀는 은근히 마음이 놓였다. 그녀는 이렇게 생각하며 너무 직접적으로 나가지 않기로 했다. “시연아, 오해하지 마. 네 외할머니도 엄마의 엄마인데, 내가 어떻게 친엄마를 해칠 수 있겠니?” 안시연의 긴장된 몸이 조금 풀렸다. ‘그래... 지금 눈앞의 사람은 적어도 외할머니의 친딸인데, 그녀가 자신의 친엄마를 해칠 리가 없어.’ 소현정은 안시연의 태도가 누그러진 것을 보고 눈물까지 짜내며 계속 설득했다. 그러던 중, 말의 방향이 갑자기 바뀌었다. “너와 연정훈은...” 안시연은 한 번에 너무 많은 정보를 받아들여 다른 것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그녀는 눈을 감고 말했다. “내가 알아서 할게요!” 소현정은 내심 초조했다. 안시연이 연정훈 옆에 있는 한, 그녀는 하루 종일 걱정과 불안에 떨며 지낼 수밖에 없었다. 오성호는 M 국에 갔고 이런 일을 전화로 말할 수도 없었기에 그녀는 혼자서 괴로워하고 있었다.하지만 그녀는 더 이상 조급해 하지 않기로 했으므로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알았어, 더 강요하지 않을게.” 두 사람은 잠시 말없이 서 있었고, 외할머니는 그녀들이 말이 안 통할지 걱정해서인지 지팡이를 짚고 나왔다. 안시연은 휘청거리는 외할머니를 보더니 심장이 멎는 듯했고 재빨리 어르신을 부축하여 다시 병실로 들어갔다. 외할머니를 걱정시키지 않으려고 그녀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조용히 듣기만 했다. 외할머니는 그녀의 억울함을 알고 두어 마디 한 후 그녀를 잡고 눈물을 흘
안시연은 얼굴을 붉혔다.‘변태 아니야?’이틀 동안 그녀가 유일하게 진심으로 얼굴을 붉힌 이 순간, 연정훈은 매우 만족했다.그는 테이블 위에 손가락을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똑바로 말해.”만약 자신이 끝까지 말하지 않는다면 그는 정말로 이 조명이 밝게 비추는 곳에서 자신의 옷을 벗길 준비가 되어있다는 것을 그녀는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잠시 생각한 후 그녀는 사실을 절반만 말하기로 결정했다.“엄마가 때렸어요.”연정훈은 이때까지 안시연의 부모님이 전부 돌아가셨다고 생각해 왔기 때문에 이 대답은 그의 예상밖에 있었다.“엄마라고?”안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내리깔았다.별로 행복하지 않았던 가족생활은 그녀를 항상 우울하고 열등하게 만들었다.“엄마는 항상 밖에 나가 있었는데 갑자기 돌아왔어요.”“왜 때렸는데?”안시연은 고개를 들고 그와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당신 때문이에요.”연정훈이 말이 없자 안시연은 계속해서 말했다.“엄마는 제가 당신 차에서 내리는 걸 봤어요. 당신을 알아봤고 제가 당신의 애인을 하고 있다는 것도 물론 알게 되었죠.”그녀는 처음으로 이렇게 공개적으로 그들의 관계를 인정했다.연정훈은 미간을 찡그렸다.“때리고 나서는?”안시연이 대답했다.“저에게 당신과 관계를 끊으라고 했어요.”연정훈은 다시 침묵했다.그는 차를 한 모금 마시며 평온한 표정으로 물었다.“그래서, 네 결정은?”안시연은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제가 결정할 권리가 있나요?”그녀는 자신의 경지를 비웃는 듯 피식 웃었다.“저는 당신이 산 물건 아닌가요? 끊을지 계속할지, 당신이 정하는 거잖아요.”연정훈은 ‘사다’라는 표현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 말 뒤에 숨은 의미는 또 그를 조금 기쁘게 했다.‘그래, 안시연은 내 것이야. 어떻게 하든 그녀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내가 결정하는 거야. 그녀의 아름다운 눈이 그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 차 있든 말든, 그녀는 나를 떠날 수 없어. 다른 생각들은 모두 쓸모없는 걱정뿐이야.’“이리 와.”그가
연정훈의 한 마디 도발에 안시연은 화가 나 몸을 꽉 조였다.그녀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연정훈은 하마터면 참지 못하고 제압당할 뻔했다.항상 말 잘 듣던 집고양이가 날카로운 발톱을 내보냈다. 제대로 교육하지 않으면 정말로 그의 얼굴을 긁어버릴지도 모른다.연정훈은 그녀를 뒤집어 테이블 위에 눕혔다.안시연은 비명이 끊기지 않았고 테이블 전체가 그들의 움직임에 흔들릴 정도였다.그는 한 손으로 그녀를 붙잡고 다른 한 손으로 그녀의 입을 막았다.“좀 조용히 해, 이웃들이 네 소리에 놀라겠어.”안시연은 저도 모르게 몸을 떨며 눈은 이미 초점을 잃었고 가끔 숨 막히는 느낌도 들어 정말 미쳐버릴 지경이었다.그녀는 견디지 못하고 그의 팔을 세게 물었다.연정훈은 낮게 신음하며 힘을 약간 줄여 그녀에게 숨 돌릴 틈을 주었지만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다.안시연은 조금 더 버텨보려 했으나 결국 굴복하고 말았고 그에게 빌었다.연정훈은 가볍게 웃으며 그녀의 얼굴에 입맞춤하고 또 그녀의 얼굴을 돌려 상체가 크게 비틀어진 자세로 그녀와 키스했다.안시연은 이대로 그의 손아귀에서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세상 전체가 흔들리고 있었고 그녀는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하는 것을 들었다.“네 엄마 일은 내가 해결할게.”안시연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그녀는 촉촉한 눈을 가까스로 뜨며 테이블 가장자리를 꽉 잡고 애써 고개를 저었다.“안 돼요... 찾지 마세요...”“그럼, 네 엄마 말 듣고 나랑 헤어지려고?”안시연은 그 말속 경고의 뜻을 알아듣고 더 건드리지 않기로 했다.그녀는 숨을 헐떡거리며 입술을 깨물었다.“연 대표님께서 뭐든 가능하시다면, 다른 일을 도와주시면 좋겠어요.”연정훈은 가볍게 웃었다.‘역시 똑똑해졌어.’그는 그녀를 품에 안고 다시 의자에 앉아 몸을 기댔다.안시연은 몸이 굳어 있었고 조금만 움직여도 견디기 어려웠다.“무슨 일을 도와줄까?”안시연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저 조기 승진하고 싶어요.”연정훈은 고민도 안 하고 바로 대답했다.“다
안시연은 일어난 후 한 번도 연정훈에게 좋은 태도로 대한 적이 없었다.어젯밤의 모든 일은 그녀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섰기 때문이다.‘나쁜 사람...’전에 그를 매너 있는 신사와 연결 지은 자신의 시력에 문제가 있었는지 의심할 정도였다. 그는 정말 꼬리를 감추고 있는 늑대와 다름이 없었다.그녀가 토라져 연정훈과 말을 걸지 않자 그는 오히려 더 안심되었다.적어도 그녀가 애써 괜찮은 척, 화가 없는 척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게다가, 그들이 함께 지내는 동안 그는 한 번도 그녀의 화난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탕! 탕!그녀는 면 두 그릇을 작지 않은 힘으로 테이블 위에 올렸다.연정훈은 신문을 내려놓고 한 번 쳐다보더니 그저 웃고 싶었다.‘화가 단단히 났네.’그녀는 다양한 아침 메뉴 대신 평범해 보이는 면 두 그릇만 만들었고, 자신의 그릇에만 계란후라이를 하나 올렸다.‘화는 내는 방식이 왜 이따위야...’그의 동작이 잠시 멈추자 안시연은 그가 싫어하는 줄 알고 머리도 들지 않고 말했다.“오늘 몸이 안 좋아서 아침을 하고 싶지 않았어요. 드시기 싫으면 회사에서 드세요.”연정훈은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네 몸은 나 때문에 그런 거잖아, 내가 책임져야지. 네가 직접 만든 아침을 트집 잡을 정도로 양심이 없는 건 아니야.”안시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이를 악물며 그가 머리를 숙여 면을 먹는 동안 그를 한 눈 노려보았다.그리고 연정훈이 고개를 들자마자 그녀는 재빨리 시선을 깔고 계란후라이를 입에 쑤셔 넣었다.오늘의 계란후라이는 반숙으로 완벽하게 만들어졌고, 노른자가 입에서 톡 터지며 담백한 맛이 입속을 꽉 채우자 기분이 훨씬 좋아졌다.연정훈은 그녀의 표정이 한결 부드러워지는 것을 보았다.그때 한 가닥의 머리카락이 그녀의 귀 뒤에서 떨어져 그릇 안에 닿을 것만 같았다.그는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이 떨어지는 것을 막았다.그러자 안시연은 밥을 먹던 동작을 멈췄다.따스한 아침 햇살은 그녀의 오른쪽 얼굴을 뜨겁게 비
양혁수는 변여름을 품에 안은 채로 서재 창가에서 예쁜 노을과 노을이 비친 잔잔한 호숫가를 바라봤다.“시연 언니 컨디션은 괜찮아요?”변여름의 질문에 양혁수가 대답했다.“좋아 보이던데. 컨디션도 그렇고 기분이 아주 좋아 보였어.”변여름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또 양혁수를 쳐다봤고 양혁수가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왜 쳐다봐?”“오빠, 행복해요?”양혁수는 최근 몇 달 동안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낸 걸 떠올리며 품 안의 변여름을 꼭 껴안았다.“행복하지.”“정말요? 왜요?”“왜긴...”두 눈을 감고 잠시 뜸을 들인 양혁수가 대답했다.“아침에 누가 나한테 해물 제철 탕을 해준다고 했거든.”“...”변여름은 손을 뻗어 익숙하게 양혁수의 두 볼을 잡아당겼다.양혁수는 변여름이 뭘 하든 가만히 받아줬고 또 변여름의 이마에 짧게 키스했다.양혁수의 눈동자에는 오직 변여름만 담겼고 변여름을 향한 사랑이 말하지 않아도 느껴졌다.변여름은 입꼬리를 올린 채로 양혁수의 목에 팔을 걸었고 또 빠르게 떨어지며 말했다.“그러고 보니 오빠, 아직도 나한테 좋아한다는 말도 안 했잖아요.”양혁수는 아주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좋아해.”그리고 고민하다가 말을 고쳤다.“내가 널 좋아해.”변여름은 금세 헤벌쭉해졌고, 첫사랑이고 뭐고 잊어버린 채로 양혁수의 두 볼에 번갈아 뽀뽀했다. 그리고 양혁수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인 듯 품에 안고 떨어지지 않았다.“오빠.”양혁수는 고개를 살짝 숙여 이어질 변여름의 말을 기다렸다.“난 오빠가 너무너무 너무 좋아요.”양혁수는 이런 변여름의 머리를 쓰다듬었고 나란히 소파에 기대앉았다.‘아, 삶이 이렇게 행복할 수도 있구나.’‘너무 행복해.’한강시에서의 삶은 점점 더 흥미진진해졌다. 몇 년 전만 해도 양혁수는 사람을 자주 만나지 않았지만 변여름과 함께한 뒤로 변백호네 가족이 시도 때도 없이 집을 들락거렸다.변여름은 한강시 연구실에서 고작 6개월의 시간을 보냈지만 벌써 성공적으로 데이터를 확보했다.그래서 남은 6
변여름은 2층 베란다에서 뛰쳐나오며 양혁수와 양지원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마침, 요즘 한가한데 여름이 데리고 경인시로 놀러 갈게요. 시연이도 볼 겸.”‘한가하긴! 고양이 배변도 아직 치우지 않았는데!’고개를 돌린 양혁수는 변여름이 입을 삐죽이고 있는 게 보였다.그래서 핸드폰을 잠시 귀에서 떼고 변여름을 향해 걸어오며 말했다.“서재 다 치워뒀으니 거기에서 논문 보면 돼.”“네.”변여름은 무표정으로 고개를 휙 돌렸고 쿵쿵거리며 서재로 들어갔다.양혁수는 피식 웃었고 통화를 종료한 양지원은 다시 영상 통화를 걸어왔다. 화면에는 양지원뿐만 아니라 양시연도 함께였다.막 아이를 낳았지만 양시연은 컨디션이 꽤 좋아 보였고 죽을 먹는 중이었다.양지원이 핸드폰을 넘기자 양시연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지금 퇴근하는 거야?”“막 집에 도착했어.”핸드폰 너머로 아이들이 재잘대는 소리가 들려왔고 양승윤과 다른 아이들도 함께 있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양혁수가 잠시 숨을 고르다가 말했다.“축하해. 잘생긴 아들에, 귀여운 딸까지 생긴걸.”과거에는 도저히 입 밖으로 내뱉기 힘들었지만 정작 하고 보니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양시연은 양혁수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너도 축하해.”“엄마한테서 전해 들었어. 너랑 여름이 말이야.”양혁수는 창밖의 핑크빛 노을을 보며 가슴이 쿵쿵 뛰는 걸 느꼈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서재로 발걸음을 옮겼다.“우리 공주님 보여줄까?”“좋아.”화면을 돌리자 침대 끝에 앉은 연정훈이 아이를 안고 있었다. 주변에는 양승윤을 제외하고 꼬마가 둘이나 더 있었다.“아빠, 나도 안아보고 싶어요!”“삼촌! 예지도 안아볼래요!”‘참 시끌벅적하네.’양시연이 연정훈을 낮게 부르자 연정훈이 딸을 품에 안고 걸어왔다.그리고 화면을 통해 양혁수는 연정훈과 시선이 마주쳤고 두 사람은 무언의 시그널을 주고받았는지 또 표정을 찡그렸다.연정훈은 예전처럼 차가웠지만 제 딸을 볼 때에는 입꼬리가 내려올 줄을 몰랐다.“시간 되면 경인시로 놀러와. 시
“그 사람도 별반 다를 게 없어요. 낳아준 어머니는 뒤로 하고 장모님한테 왔잖아요.”양혁수가 투덜거리며 말했다.양시연을 향한 감정이 남아있지 않더라도 양혁수는 늘 연정훈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변여름은 조용히 그 옆에서 눈치를 살폈다.그러다가 며칠 전 변여름과 진지하게 나눴던 첫사랑 얘기가 떠오른 양혁수는 오늘 이 기회를 빌려 변여름에게 장난을 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변여름은 크게 화도 내지 못하고 입만 삐죽일 것이다.저녁 시간이 다 되어가고 연정훈이 전화를 걸어 거의 집에 다 와간다고 알렸다.변여름은 양혁수의 손을 잡고 뒤뜰에서 잡초를 손질하는 양석진의 옆으로 다가갔고 갑자기 이렇게 말했다.“오빠, 우리 산책하러 가요.”양혁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지금?”“네!”“곧 다 모일 텐데 밥 먹고 산책하러 가자.”그러자 변여름이 고개를 푹 숙이더니 눈앞에 보이는 잡초를 마구잡이로 휙 잡아 뽑았다.양혁수는 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웃음을 꾹 참았다.그때 누군가 양혁수를 불렀고 두 사람은 다시 거실로 돌아가야 했는데 변여름이 갑자기 양혁수를 벽으로 툭 밀쳤다.그러자 양혁수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벽에 기댄 채로 변여름의 턱을 잡고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첫사랑을 잊는 방법은 첫사랑을 다시 만나는 거라며? 현실보다 상상 속 첫사랑이 더 완벽하고 이쁠 테니까.”“...”‘짜증 나.’양혁수가 변여름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며 말했다.“이건 네가 말했던 거잖아.”“...”“그런데 지금 표정이 왜 그렇지? 설마 한번 뱉은 말을 다시 주워 담고 싶은 거야?”변여름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말했다.“세상에 영원한 정답은 없는 거니까요.”“그래도 어쩔 수 없잖아. 계속 피해 다니며 만나지 않을 수도 없고.”“나 질투 난다는 말이에요.”“내가 평생 시연이 좋아한다고 해도 괜찮다고 했던 사람이 누구더라?”“그건 예전이잖아요!”“그럼 지금은?”‘지금은...’변여름은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발뒤꿈치를 살짝 들어 양혁수의
새벽 다섯 시가 다 되어서야 양혁수는 변여름을 껴안고 잠이 들었다.아침이 되어도 아무도 두 사람을 깨우지 않았고 실컷 자고 일어나니 어느새 아침 열 시가 넘어가고 있었다.두 사람은 잠에서 깬 뒤에도 한참 침대에서 뭉그적거렸고 양혁수가 먼저 몸을 일으켜 아래층으로 내려가 간단하게 먹을 음식을 준비했다.양혁수가 음식을 챙겨 돌아왔을 때, 변여름은 세수하고 다시 침대에 누워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양혁수가 침대 끝자락에 앉으며 변여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뭐라도 좀 먹고 다시 자.”변여름은 지금 자신의 옷차림이 어떤지 전혀 상관하지 않고 바로 이불에서 빠져나와 양혁수의 품에 안겼다.양혁수는 서둘러 변여름의 옷매무시를 정리해 주고 눈을 감고 있는 변여름에게 한 입씩 떠먹여 줬다.변여름은 몇 입 먹더니 금방 싫증을 느꼈고 양혁수는 변여름이 남긴 걸 입에 넣었다.그런데 양혁수가 아침을 먹는 사이 변여름이 품에서 잠이 들어버렸다.‘그렇게 졸린가?’양혁수는 변여름을 다시 이불 안에 넣어주고 옷을 갈아입은 뒤 헬스장을 다녀왔다.돌아와서 샤워를 마쳤을 때도 변여름은 아직 깨어나지 않았다.양혁수는 침대 앞으로 다가가 곤히 잠든 변여름을 바라봤고 젖은 머릿결이 마를 때까지도 시선을 떼지 못했다.그러다가 본능을 못 이긴 양혁수는 수건을 내려두고 침대 옆자리로 올라갔다.변여름은 금세 이상한 점을 눈치챘고 귓가에 들려오는 양혁수의 뜨거운 숨소리에 몸을 돌려 품에 안기며 말했다.“오빠...”양혁수는 숨을 고르다가 변여름에게 속삭였다.“어디 불편한 곳은 없어?”“없어요...”변여름은 온몸에 열기가 돌았고 저도 모르게 양혁수의 어깨를 깨물었다. 양혁수가 작게 신음 소리를 뱉자 변여름도 점점 이성을 잃게 되었고 눈가가 빨개진 채로 물었다.“우리 새해 인사드리러 가야 하지 않아요?”“필요 없어. 친척들도, 친구들도 많지 않아서 상관없어.”변여름은 마지막 남은 이성으로 말했다.“우리 세운시로 가야 하잖아요.”양혁수는 새해 인사 따위는 이제 안중에 없었다.
침대 시트를 교체하지 않아 방안에는 아직도 그 향이 가시지 않았다. 양혁수는 단팥죽이 끓는 동안 서둘러 시트를 교체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단팥죽의 단 향이 코를 자극했다.양혁수는 한 그릇 따라 변여름에게 건넸고 변여름은 소파에 나른하게 누워 양혁수가 한입씩 떠먹여 주는 걸 삼켰다.그렇게 천천히 기운을 되찾은 변여름은 또다시 장난기가 발동했다.양혁수의 품에 안겨 양혁수의 핸드폰을 뒤적이던 변여름이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마주했다.양혁수는 변여름의 두 볼을 쭉 잡아당기며 이 순간의 행복을 즐겼다.그런데 변여름이 꽤 진지한 얼굴로 이런 질문을 하는 게 아니겠는가?“오빠, 정말 무슨 약이라도 먹은 거 아니에요?”양혁수는 인상을 팍 찌푸리다가 시간을 확인하고는 바로 무슨 의미인지 알아차렸다.싸늘해진 양혁수의 시선에 변여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약을 따로 챙겨 먹지 않은 거면 너무 오랫동안 금욕해서 그런 거 아니에요?”“...”양혁수는 변여름이 이어서 어떤 질문을 할지 눈에 뻔했고 미리 준비해 둔 떡을 집어 냉큼 변여름의 입에 넣었다.변여름은 입안 가득 우물거렸고 반쯤 남긴 떡은 양혁수가 처리했다.“계속 까불면 너 이거 다 먹일 거야.”변여름이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이 떡 전부요?”“...”역시 못 말리는 변여름이라 생각하며 양혁수는 입안 가득 떡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입술 도장을 꾹 찍었다.어느새 해가 뜰 시간이 되었지만 두 사람은 하나도 졸리지 않았다.한참 꼭 붙어 있다 보니 또 어느새 애매모호한 분위기가 흘러나왔다.양혁수는 변여름을 위해서라도 관심사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변여름이 핸드폰을 뒤적이며 말했다.“시연 언니가 아직 새해 인사를 보내지 않았네요?”질투하는 듯한 변여름의 말투가 오늘따라 더 귀엽게 느껴졌다.하지만 지금 말을 잘못하면 변여름이 삐질 게 뻔했으니 양혁수는 말을 가려서 하기로 했다. 그래서 한참 말을 골라 입을 열었다.“시연이는 새해 당일에 인사를 보내는 편이야. 우리 가족들도 대부분 그렇게 하거든. 너
거사를 치르기 전에 변여름도 나름 많은 조사를 걸쳐 충분히 준비를 마쳤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직접 겪어보니 실전과 이론은 큰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된다.변여름은 자신이 주동권을 잡으려 노력했지만 모두 가볍게 양혁수에게 들통이 나 물거품이 되었다.양혁수는 변여름의 두 손을 잡아 머리 위로 고정시켰고 변여름이 점차 반항할 생각도 하지 못할 때까지 꼭 붙잡아줬다.변여름의 머릿속에는 양혁수가 거친 숨을 내쉬며 귓가에 뱉은 말뿐이었다.“긴장하지 말고 힘 풀어.”긴장을 풀자 바로 쾌감이 이어졌다.처음 사과를 베어 문 에덴에 이런 기분이었을까, 변여름은 눈앞이 흐릿해지고 이 세상과는 단절된 쾌감만 느껴졌다.변여름은 나른하게 침대에 누웠고 잠시 의식을 되찾고 양혁수와 시선을 마주했다.양혁수는 변여름 이마의 땀을 닦아주고 또 달래듯 입술에 키스했다.금방 지나갈 소나기같았지만 또 벼락이 치고 폭우가 쏟아졌다.양혁수도 쾌감에 절여 절로 미소가 나갔지만 자꾸 변여름을 놀렸다.그러자 변여름이 바로 양혁수의 입술을 깨물었다.양혁수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두 사람의 자세를 바꿔 또 새로운 쾌감을 찾았다.변여름은 촉촉해진 눈가로 양혁수를 바라봤고 마치 처음 치즈를 선물 받은 고양이가 어디서부터 손을 대면 좋을지 몰라 망설이는 것 같았다.“네가 자세 바꾸고 싶다며?”양혁수는 손을 뻗어 변여름의 머리를 쓸어내리며 나른한 시선으로 유혹했다.“자, 네가 원하는 대로 해봐.”변여름은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아까도 변여름에게 기회를 줄 것처럼 굴다가 또 선수를 빼앗아 본인이 흐름을 주도했었다. 그렇게 반복되는 농락에 변여름은 이제 그럴 마음도 사라졌다.하지만 양혁수가 얌전히 누워주니 변여름은 또 덮칠 마음이 스멀스멀 생겼다.‘내가 잡아먹어야지!’서로를 탐닉하고 뜨거운 숨을 몰아 내쉬기를 반복했고 어느샌가 이불도 바닥 위로 떨어져 있었다.변여름은 저도 모르게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고 입술을 막아도 걷잡을 수 없었다.결국 변여름은 이불에 얼굴을 묻어버렸고 지금 본인
변여름은 낮에 물건을 뒤적이다가 양혁수가 서랍에 새로 준비해 둔 걸 발견했었다.양혁수가 참 보수적이라 생각했지만 변여름은 그런 점도 귀엽게 느껴져 눈치껏 본인이 준비한 물건은 서랍에 넣어두지 않았다. 뭐든지 차근차근 순서를 밟는 게 좋을 것 같았다.그러나 갑자기 자신을 안아 들고 위층으로 향하는 양혁수를 보며 변여름은 의아해졌다.‘오늘 밤엔 순정남이 아닌 건가? 아, 벌써 기대돼.’그러나 위층으로 올라가서 키스도 한참 했지만 시작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변여름이 양혁수의 품 안에서 기어 나오며 말했다.“오빠, 먼저 샤워나 할래요?”“...”‘이 흐름이 아닌데.’양혁수는 쯧 하고 혀를 차다가 변여름을 잡고 다시 아래에 깔았다.또 쉴 틈 없는 키스가 이어지고 변여름은 온몸이 나른해졌으며 입가가 얼얼해질 무렵, 양혁수가 마지막으로 입가에 뽀뽀하고 욕실로 향했다.변여름은 몰래 한숨을 푹 내쉬었다.‘그래. 내가 기다리지 뭐.’얌전히 침대에 누운 변여름은 다리를 달달 떨며 시간을 보냈다.그때, 양혁수가 준비해 둔 옷으로 갈아입고 걸어왔다.바로 변여름에게 다가간 양혁수는 순식간에 변여름을 이불 안에서 꺼내 안아 들었다.‘뭐야 샤워하러 간 거 아니었어? 또 준비한 게 있나 보네?’의아해하는 변여름의 생각을 읽고 양혁수는 입술에 도장을 꾹 찍고 욕실로 향했다.“같이 씻자.”변여름은 깜짝 놀라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욕실 안에는 뜨거운 김이 가득해 시야가 흐릿했다.양혁수는 어제 무슨 이유인지 안방에 새로 가구를 배송받았었다. 목재로 된 흔들의자였는데 하나는 안방에 두었고 특수 코팅을 거친 의자는 욕실에 두었다. 변여름은 안방에 둔 흔들의자에 누워 햇살을 느껴봤는데 그 기분이 아주 좋았다. 그러나 욕실에 둔 의자에 누우면 마치 발가벗겨진 생쥐 꼴이 되는 기분이 들었다.변여름은 욕실로 향하는 내내 별 별 난 생각이 다 들었지만 양혁수를 상대로 그런 음흉한 상상을 하면 안 된다고 자신을 채찍질했다.그러나, 변여름은 곧 자신의 상상이 틀리지 않았
누가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고양이 하나 때문에 그렇게 혼을 내던 오빠 친구가 오늘엔 제 옆에 앉아 평범한 여느 연인들처럼 자신을 잘 부탁한다고 인사하는 것을.변여름은 다른 사람에겐 흥미를 잃었고 오직 양혁수만 눈에 보였다. 그리고 너무 기분이 좋은 나머지 술이 술술 넘어갔다.회식을 끝내고 근처를 걸으니 거리에서 새해 느낌이 물씬 났다. 변여름은 양혁수의 손을 잡고 길을 걸으며 노래를 흥얼거렸다.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침대에 털썩 누워서도 양혁수의 이름을 불러댔다.“양혁수... 혁수 오빠...”대체 뭘 어떻게 더 해야 이렇게 커진 제 마음을 다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른다. 변여름은 정말 하늘만큼, 땅만큼 양혁수가 좋았다.올해는 양혁수가 근 10년 동안 가장 기대되는 새해라고 할 수 있다.새해에 맞춰 양홍두도 세운시로 향해 양지원과 함께 새해를 보내기로 했다.그리고 양혁수는 양지원에게 곧 변여름과 함께 세운시를 찾아 정식으로 인사를 드리겠다고 말했다.새해 전날, 집사는 양혁수의 기분이 퍽 좋은 걸 발견하고 다 같이 만두도 빚고 송편도 빚을 것을 제안했다.변여름도 아침 일찍 양씨 가문을 찾아 일을 거들었다.양혁수는 집 안팎을 돌아다니며 새해 분위기가 물씬 나는 조명이나 인테리어를 세팅했다.“조명을 켜기엔 아직 일러요. 조명은 오후부터 켜야 한다고 했어요.”변여름은 어디에서 들은 정보를 한 손에 만두를 쥔 채로 양혁수에게 말했다.양혁수는 사다리 위에 서서 말했다.“누가 그래? 우린 우리만의 법을 따르는 거야.”양혁수는 변여름을 달래듯 말했다.“꼬맹이는 얼른 가서 만두 빚고 있어. 예쁘게 빚으면 내가 새해 용돈도 챙겨줄게.”집사는 괜히 큰소리하는 양혁수를 보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양씨 가문 남자들, 누구 하나 큰소리할 수 있는 사람이 없을 텐데.’그러나 변여름은 고개를 끄덕였고 또 양혁수를 향해 손을 휘휘 저었다.사다리 아래까지 내려온 양혁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왜?”변여름은 바로 이때다 싶어 양혁수의 두 볼에
양지원은 바로 세운시로 돌아갔다.양씨 가문에는 오직 변여름과 양혁수만 남겨졌고 그날 밤부터 변여름은 아주 자연스레 양혁수의 방을 드나들었다.며칠 뒤면 새해인지라 연구실도 곧 휴가가 시작될 것이다. 변여름은 하루 시간을 내어 선물을 들고 연구실을 찾았다.선배들은 변여름이 영영 돌아오지 않을 줄만 알았는데 돌아온 변여름을 보며 아주 기뻐했고 선물을 받으며 어디에 다녀왔는지, 무엇을 했는지 물었다.“연애하고 왔어요.”솔직한 변여름의 대답에 사람들은 조금 당황했고 과거에 변여름에게 고백했었던 선배는 마음이 부서졌다.교수님은 변여름의 교제 상대가 누구인지 궁금해했다.“저희 오빠 친구예요.”‘그래. 오래 붙어있을수록 정분이 나는 법이지.’사람들은 변여름의 옆자리를 차지한 그 상대가 궁금했고 교수님도 한번 만나보고 싶다고 말했다.변여름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고 점심시간이 되자 도시락을 들고 양혁수를 찾아갔다.“회식?”양혁수는 변여름이 연구실 사람들한테 인기가 많은 게 의외라는 생각을 했다.하지만 좀 더 생각을 해보니 고작 며칠 사이에 얼굴도 보지 못한 제 비서와 사이좋게 지내는 걸 보며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변여름이 말했다.“남자 친구 생겼다고 말했거든요.”그러자 양혁수는 변여름이 자랑하고 싶어 하는 걸 바로 눈치챘다.그리고 불현듯 과거에 변여름이 연구실 선배한테 고백을 받았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변여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한두 사람이 아니었는걸요.”어깨를 으쓱거리는 변여름을 보며 양혁수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한두 사람이 아니었다?”“네!”“어떤 사람이었는데? 다들 똑똑할 거고, 뭐 잘생겼어?”“똑똑하기도 하고 잘생기기도 했죠.”옆에서 문서를 정리하던 비서가 그 말을 듣고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대표님, 예쁘고 요리도 잘하시는 여름 씨가 얼마나 인기가 많겠어요. 대표님이 조심하셔야겠네요.”변여름이 양혁수를 힐끔 훔쳐보자 양혁수가 바로 연기를 이어갔다.“그러게. 갑자기 짜증이 나서 입맛이 하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