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동안 지속된 배서준과의 혼인 관계는 남설아가 몸과 마음의 모든 존엄을 갈아먹으면서 이어온 악연이었다. 남설아는 사랑이 없는 이 관계에 적어도 정은 남아있을 거라 믿었다. 그렇게 버텨오던 어느 날이었다. 두 사람을 이어주는 유일한 끈이었던 아이의 병세가 위독하다는 소식이 전해지던 날, 그 사람이 자신의 첫사랑을 위해 거액의 돈을 썼다는 기사가 연예 뉴스 헤드라인에 실렸다. 두 비보가 눈앞에 놓인 순간부터 남설아는 배서준의 사모님 노릇을 때려치우기로 했다. 쓰레기 같은 그 남자는 모든 매체를 매수하여 눈이 쌓인 바닥에 무릎을 꿇고 붉어진 눈으로 첫사랑에게 돌아와 달라고 애원했다. 그 순간, 남설아는 다른 남자의 손을 잡고 모습을 드러냈다. 새로운 남자의 등장을 모두에게 알리는 순간이었다.
view more[배서준: 나는 너를 미워하지 않아. 하지만 절대 용서하지도 않을 거야. 네가 잃은 건 사업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인 거야.]짧은 몇 줄뿐이었지만 배서준은 숨이 막혔다.사람의 마음... 예전엔 자신이 가장 능숙하게 다루면서도 가장 가볍게 여겼던 것이었다.편지는 떨리는 손에서 미끄러져 떨어졌지만, 다시 집을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그는 그저 멍하니 작은 창문만 바라봤다. 창밖의 오동나무에서 잎이 빙글빙글 돌며 떨어져 땅 위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그건 그들이 처음 만났던 계절, 마찬가지로 오동잎이 흩날리던 때였다.하지만 이제는 그때의 시절도, 그때의 사람도 다시는 없었다.가슴은 텅 빈 듯했고 손에 잡히는 것도 없었다. 결국 그는 모든 걸 잃은 패자가 되고 말았다.저녁이 내려앉은 강씨 가문의 오래된 저택 잔디밭, 장미꽃과 불빛이 어우러져 은은한 향과 분위기를 자아냈다.공기에는 꽃향기와 하객들의 잔잔한 대화, 그리고 감미로운 음악이 흘렀다.남설아는 샴페인 빛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바닥을 스치는 드레스 자락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부드럽게 흔들렸고 조명 아래 한층 더 우아하게 빛났다.그녀는 강연찬의 팔에 팔을 걸고 천천히 레드카펫을 걸어갔다. 그 끝에는 꽃으로 장식된 화려한 아치형 문이 기다리고 있었다.강연찬은 짙은 색 예복 차림으로 한층 더 당당해 보였다. 그는 고개를 숙여 남설아를 바라봤고 그 눈빛엔 따스함이 가득했다.모여든 하객들은 대부분 재계에서 이름난 인사들이었다.그들의 시선은 두 사람에게 향했고 호기심과 축복이 함께 담겨 있었다.아치형 문 아래, 강영수는 한복 차림을 하고 당당하게 서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번졌다.두 사람이 그 앞에 서자 강영수가 힘 있는 목소리로 장내에 인사를 건넸다.“여러분, 귀한 걸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그는 두툼한 족보를 펼쳐 들고 또렷하게 말했다.“오늘 우리가 모인 건, 한 가지 큰 경사를 함께 맞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강씨 가문의 족보는 대대로 이어져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 자
강씨 가문의 오래된 저택 서재에는 낡은 책 냄새와 목제 가구 특유의 향이 은은히 배어 있었다. 두툼한 커튼 틈새로 스며든 빛줄기가 책장 사이로 흩어져 그림자가 잔잔하게 흔들렸다.강연찬은 책상 앞에 서서 바른 자세로 서 있었다.강영수가 손을 들어 책상 위의 짙은 색 나무 상자를 그의 쪽으로 밀었다.“이건 네 할머니가 평생 끼고 다녔던 거야. 남양으로 떠날 때도 늘 가지고 있었지.”단단한 나무로 조각된 상자는 세월을 머금은 듯 매끈하게 닳아 윤기가 돌았다.강연찬은 그것을 받아 조심스레 뚜껑을 열었다. 바랜 벨벳 위에 오래된 반지가 고요히 놓여 있었다.구식 디자인이었는데 중앙에는 짙푸른 보석이 박혀 있었고 반지 안쪽에는 ‘영원히 함께’라는 영어 문구가 작게 새겨져 있었다.“설아 그 아가씨 말이다.”강영수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늘 엄격하던 얼굴에 드물게 미소가 번졌다.“그 기죽지 않는 기세가 네 할머니 젊었을 때와 똑 닮았어.”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창밖을 바라보았다.“내일 약혼식에는 상계에서 이름 있는 사람들을 모두 불렀다. 그 사람들 앞에서 분명히 보여줄 거다. 우리 강씨 가문의 손주는 남에게 기댈 줄밖에 모르는 여자가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그 애는 스스로 하늘이 될 수 있는 큰 사람이야.”강연찬은 반지를 들어 올렸다. 차갑고 묵직한 금속, 그 속에 깃든 보석의 온기가 손바닥에 스며들었다.“할아버지... 설아는 정말 특별합니다. 그 말씀의 의미를 저도 잘 압니다. 설아는 최고로 좋은 것들을 받아야 마땅합니다.”목소리에 미묘한 떨림이 스쳤다.“그래.”강영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눈빛에서 흐뭇함이 새어 나왔다.“이 반지는 단순한 증표가 아니다. 두 사람이 함께 짊어져야 할 삶의 무게를 새긴 상징이지. 네 할머니는 내 아내였지만 동시에 세상을 함께 헤쳐 나간 동반자였어. 난 설아에게서도 그럴만한 힘을 봤어. 너에게도, 강씨 가문에도 필요한 힘 말이다.”그는 의자에 깊숙이 몸을 기댔다.“강씨 가문이 순탄하기만 했던 건 아니다. 앞으로는
강연찬은 말없이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그녀의 뺨에 묻은 피와 눈물을 조심스레 닦아주었다.그녀는 왜 울고 있었을까. 서유라 때문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일까. 정작 남설아 자신조차 알 수 없었다.“서유라...”남설아가 입을 열었다. 목이 바싹 말라 목소리가 갈라졌다.“서유라가... 왜 날 막아선 거지?”그 질문은 커다란 돌덩이처럼 가슴을 짓눌렀다.강연찬이 그녀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그의 손바닥은 건조했지만 따뜻했다.“그건... 서유라가 깨어나면 직접 물어보면 돼.”한 달 뒤, 일반 병실.남설아가 문을 열고 들어섰다. 강연찬은 늘 그렇듯 조용히 그녀 뒤를 따랐다.서유라는 침대에 기대앉아 있었다. 안색은 전보다 나아졌지만, 여전히 창백했다.남설아가 들어서는 걸 보자 그녀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예전처럼 날카롭거나 계산적인 기색은 사라지고 지친 기운만 남아 있었다.“왔어?”서유라가 먼저 힘없는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남설아는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몸은 좀 어때?”“죽기야 하겠어.”서유라가 입꼬리를 올렸다. 웃는 것 같기도, 아닌 것 같기도 한 표정이었다.“걱정해 줘서 영광이네.”“왜 날 구한 거야?”남설아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똑같은 물음이었다. 서유라는 곧바로 답하지 않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햇살이 부드럽게 쏟아지고 새가 지저귀고 있었다.한참 뒤, 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도 몰라. 아마 더 이상 빚지고 싶지 않아서였겠지.”짧은 한숨이 흘렀다. 그 속에 깊은 피로감이 느껴졌다.“배서준은 이미 예전의 배서준이 아니었어. 여기까지 오게 된 건 내 탓도 크지. 애초에 품지 말아야 할 마음을 품었으니... 됐다, 더 말해 뭐 하겠어.”잠시 침묵하던 그녀가 다시 고개를 돌려 남설아를 바라봤다.“내 철부지 동생, 서도현 기억하지? 겉으론 날 위하는 척하면서 뒤로는 배서준과 손잡고 별짓을 다 했어. 배건 그룹이 해외에 숨겨둔 것들, 배서준이 빼돌린 돈에 대해... 내가 조금은 손에 넣었어.”서유라는 천천히
“남설아...”서유라의 목소리는 너무 약했고 숨이 끊길 듯 말 듯 했다. 말 한마디 할 때마다 붉은 피가 입가에서 흘러내렸다.“이번은... 내가 갚는 거야. 너한테 진 빚... 다 갚았어. 그러니까 앞으로는 제발... 나를 좀 살려줘...”그 말을 끝으로 그녀의 눈빛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흐려졌다. 빛을 잃은 눈은 더 이상 초점을 잡지 못했고 호흡도 완전히 끊겼다.서유라의 몸이 힘없이 남설아 위로 무너져 내렸다. 뜨겁고 끈적한 피가 드레스에 빠르게 번져갔다. 코를 파고드는 건 무겁고 진한 피 냄새였다.남설아는 서유라를 끌어안은 채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하는 것 같았다.사방에서는 비명과 울부짖음이 뒤엉켰고 바깥에서는 사이렌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움직이지 마!”“총 내려놔!”경호원들이 나서기 전에 경찰 특수 요원들이 들이닥쳤다.순식간에 검은 양복 차림의 경호원들이 제압당했고 배서준 역시 두 사람에게 땅바닥에 꺾여 눌렸다.거친 카펫에 얼굴이 쓸리며 먼지가 묻었고 손에 들고 있던 권총은 바닥에 떨어져 멀리 굴러갔다.“놔! 이거 당장 놔!”배서준은 목이 터질듯 소리쳤다. 솟구친 핏줄이 울퉁불퉁하게 목 위로 드러났다.그러나 그의 두 눈은 오직 문 쪽만을 향했다.들것을 들고 뛰어든 의료진이 서유라를 남설아의 품에서 떼어내 실었고 곧장 문밖으로 달려 나갔다.배서준은 그 장면을 멍하니 지켜봤다. 들것이 문밖으로 사라지자 구급차의 사이렌 조명이 반짝였다.그 빛이 그의 충혈된 두 눈 속에서 흔들렸다.‘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혼란스러운 머릿속에 오래된 기억 하나가 불쑥 떠올랐다. 처음 서유라가 배씨 가문에 들어섰던 날, 자신을 올려다보던 소심한 눈빛과 떨리던 목소리가 생각났다.“배... 배서준 씨.”그 눈에는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이 있었다. 그리고 아주 작지만 분명한 동경의 빛이 있었다.그 눈빛은 언제부터 달라져 버린 걸까. 아니다. 그걸 바꿔버린 건 바로 자신이었다.배서준 스스로 그 순수함을 더럽히고 산산이 깨뜨려 버렸다.경찰차 사
남설아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지만, 얼굴에는 조금도 티가 나지 않았다. 그녀는 발걸음이 빨라졌다. 남설아는 옆에 있던 사회자에게 낮게 인사를 건넨 뒤, 무대 뒤편 출입구를 향해 서둘렀다.그녀가 막 문 안으로 한 발을 들이려는 순간이었다.“쾅!”연회장 양쪽의 거대한 문이 밖에서 벌컥 열렸다.커다란 굉음에 모두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사람들이 상황을 채 파악하기도 전에 한 남자가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헝클어진 머리, 풀어진 넥타이, 손에는 검은 권총을 움켜쥔 채였다.배서준이었다.핏발 선 눈은 광기에 젖어 있었고 몸 전체에서는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꺅!”주위에 있던 여자들이 비명을 질렀고 순식간에 연회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사람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쳤고 의자와 테이블이 뒤집히며 접시와 잔이 산산조각이 났다.“남설아!”배서준이 목이 터지게 소리쳤다. 총구는 덜덜 떨렸지만, 남설아를 정면으로 겨누고 있었다.“거기 서! 왜, 왜 나한테 이러는 거야? 왜 내 모든 걸 빼앗아 간 거냐고! 배건 그룹은 내 거야! 내 거라고!!”눈은 붉게 충혈되었고 목소리에는 울음이 섞여 있었다. 분노와 원망, 억울함이 뒤엉켜 쏟아져 나왔다.“그때 네가 얌전히 이설 그룹을 내놨더라면... 배건 그룹 사모님 노릇이나 했더라면 우리가 이 지경까지 되었겠어? 네가 날 이렇게 만든 거야! 네가 먼저 배신했잖아!”남설아는 가만히 서서 그의 처절한 몰골을 똑바로 바라봤다. 얼음처럼 차갑고 단단한 눈빛이었다.한때 자신이 사랑했던 남자가 바로 이런 사람이었다니,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눈썹조차 꿈쩍하지 않았다.그 차분함이 오히려 배서준을 더욱 자극했다.“대답해! 입이 없어?”그가 성큼 두 발짝 다가왔다.“네가 이겼다고 생각해? 웃기지 마! 내가 무너지면 너도 같이 끝장이야. 우리는 같이 끝장이라고!”그때, 이어폰에서 강연찬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지금이다! 제압해!”검은 양복 차림의 경호원들이 좌우에서 동시에 움직였다. 순식간에 공기가 얼
배서준은 입술을 몇 번 달싹였다.반박하고 싶고 욕을 퍼붓고 싶었지만, 서유라를 노려볼 뿐 단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한때 그녀가 빠져들었던 그 눈에는 이제 폭력과 비참함만이 남아 있었다.그의 침묵은 가장 확실한 대답이었다.서유라의 웃는 얼굴이 서서히 굳었고 안색이 잿빛으로 변해버렸다.그녀는 고개를 숙여 아직도 피가 스며 나오는 손등의 상처를 바라보았다.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발끝에서부터 차가운 기운이 치밀어 올라 온몸을 덮쳤다.“그랬구나... 내가 이렇게 우스웠구나.” 그녀는 중얼거렸다.“네 눈엔 나라는 존재가 그저 변변찮은 도구였을 뿐이지?”그는 끝내 입에 발린 거짓말조차 하지 않았다.도시 외곽의 별장 안, 창문마다 커튼이 단단히 닫혀 있었고 실내에는 눅눅한 곰팡내와 함께 진한 담배 연기가 가득했다.배서준은 암호화된 전화를 들고 윤화진과 통화 중이었다. 그는 해외 계좌에 있는 돈을 모두 빼 오라고 지시하고 있었다.“서준아, 엄마가 못나서 미안해...”전화기 너머 윤화진의 목소리는 떨렸고 절망에 찬 울음이 섞여 있었다.“끝났어, 다 끝났어! 그 계좌들 전부 동결됐대! 알아봤더니... 남설아야! 그리고 강씨 가문! 우리를 함정에 몰아넣으려고 진작부터 준비한 거였어! 서준아, 우린 이제 어떡해...”배서준은 수화기를 움켜쥔 손등에 핏줄이 불거졌다.“동결됐다고요? 말도 안 돼요. 그 계좌들은 아무도 몰라요. 남설아, 그 여자가 어떻게...”그는 악에 받친 목소리로 말했다.“그 여자가 감히!”“진짜야, 서준아! 뉴스에도 나왔어! 배건 그룹... 끝장이래...”윤화진의 흐느낌은 끊이지 않았다.“우린... 그 사람들을 이길 수 없어. 도저히 이길 수가 없어...”“쾅!”배서준은 거칠게 핸드폰을 던져버리고는 떨리는 손으로 벽에 걸린 낡은 TV를 켰다.재무 뉴스 채널에서는 여자 앵커가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뉴스를 보도하고 있었다.“배건 그룹은 막대한 부채와 다수의 불법 운영 사실로 인해 오늘 법원에 파산보호를 공식 신청했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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