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이 끝나고 연정훈은 안시연을 안고 내일 출장 계획을 설명했다.안시연은 그의 품에 기대어서 얌전히 대답했다.안시연은 둘이 어떤 사이인지 몰랐기에 당연히 그의 일에 간섭할 생각이 없었다.“내가 집에 없어서 심심하면 나가서 쇼핑이라도 해. 침대맡 서랍에 카드 있으니까 그거 써. 내일 외할머니 보러 갈 때는 운전기사에게 데려다 달라고 하고.”연정훈의 말에 안시연은 마음이 복잡했고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그의 태도를 본다면 안시연을 책임질 생각인 듯했다.그러나 안시연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교수님.”안시연은 허리를 폈고 연정훈은 그녀를 놓아주며 “응”이라고 대답했다.“카드 줄 필요 없어요. 곧 일자리를 찾을 거니까요. 며칠만 지나면 돌아...”“일자리는 내가 돌아와서 찾아. 내가 찾아줄게.”연정훈이 말했다.그의 태도는 강압적이지 않았고 말할 때 목소리도 부드럽고 다정했다. 그러나 안시연은 그에게서 거부하지 말라는 강경한 느낌을 받았다.연정훈은 조용해졌다.안시연도 조용해졌다.그녀의 언짢음을 눈치챈 연정훈은 화가 나지 않았다.고양이를 기른다면 고양이에게 할퀼 것을 감안해야 했다.게다가 그는 참을성도 좋았다.연정훈은 안시연을 잡아당기며 설명했다.“사건을 해결하자마자 일자리를 찾는 건 너한테 불리해.”안시연은 시선을 내리뜨리고 조용히 있었다.“외할머니 건강도 안 좋으신데 지금 일자리까지 찾으면 외할머니를 잘 보살필 수 있겠어?”연정훈이 일침을 놓았다.안시연은 조금 기운이 빠졌지만 몸도 편안해져서 아까처럼 거부감이 크지는 않은 듯했다.“그러면 시간이 좀 지나서 외할머니 좋아지시면 그때 알아서 찾을게요.”안시연이 말했다.연정훈은 가타부타하지 않았다.방 안이 조용해지자 분위기가 이상해졌다.안시연은 잠깐 괴로워하다가 결국에는 먼저 연정훈의 목에 팔을 둘렀다.연정훈은 그녀의 등에 손을 올리면서 그녀를 받아주었다.그날 밤 연정훈은 안시연에게 손을 대지 않았다.안시연은 그의 침대에 누운 채로 오랫동안 잠들지
“사모님, 대표님 출장 가셔서 지금 집에 안 계세요.”도우미 아주머니가 정중하게 말했다.“금방 떠났죠? 식탁 위에 놓인 차가 아직 따뜻하네요.”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안시연은 냉장고 앞에 서서 바짝 긴장했다.아주머니가 황급히 말했다.“제가 마신 겁니다.”김세연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여기서 아주 편한가 봐요.”아주머니는 비위를 맞추려는 듯 웃으며 말했다.“사모님, 임유정 씨, 앉으세요. 제가 차를 내오겠습니다.”안시연은 그 말을 들었고 곧이어 아주머니가 주방으로 들어가는 걸 보았다.안시연이 입술을 달싹이는데 아주머니가 그녀에게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하면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절대 나가시면 안 돼요. 임유정 씨는 사모님께서 몹시 마음에 들어 하는 분이라 아마도 안시연 씨를 상대하려고 온 걸 거예요.”안시연의 표정이 굳었다.아주머니의 말을 들어보니 그녀가 임자 있는 남자를 빼앗은 나쁜 여자인 듯했다.비록 이곳에서 잔 것은 겨우 이틀밖에 되지 않았지만 누군가 찾아오면 마치 쥐새끼처럼 주방에만 숨어있어야 했다.아주머니는 그녀의 난감해하는 기색을 알아채고 한숨을 쉰 뒤 간식과 차를 준비하러 갔다.밖에서 김세연과 임유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여길 보니까 혼자 사는 것 같지는 않네요. 다른 사람도 있는 것 같아요.”임유정이 말했다.“정훈이 걔가 또 즐길 건 잘 즐기는 편이라서 집안이 그렇게 썰렁하지는 않아.”김세연은 덤덤히 대꾸한 뒤 곧바로 화제를 바꿨다.“그런데 걔가 워낙 바빠서 집안일에는 크게 신경을 못 써. 규칙이라고는 전혀 없어. 집안에 둔 도우미 아주머니도 그래. 감히 주인집 컵을 쓰고 주인이 식사하는 식탁에서 밥을 먹잖아. 참나, 어이가 없어.”임유정은 웃었다.“남자니까 집안일 같은 거 못하는 것도 당연하죠.”“집안일 못하는 건 그렇다 쳐. 그래도 혹시 집에 도둑이라도 들면 어쩐다니? 오늘은 그냥 컵이었겠지만 다음에는 서재에 들어갈 수도 있고, 더 심하면 안방 물건도 사라질 수 있는데 말이야.”주
안시연은 오늘 아침 연정훈이 골라준 샴페인 색의 나시 치마를 입어서 우아했다.그러나 김세연의 앞에 섰을 때 그녀는 수치심을 느꼈다.김세연은 마치 물건의 값을 가늠하는 듯한 시선으로 그녀를 훑어보았는데 마치 벌거벗겨진 채 공개 처형당하는 기분이었다.“이름이 뭐니?”김세연이 물었다.안시연은 목이 타는 기분을 참으면서 작게 대답했다.“안시연이라고 합니다.”“몇 살?”“스물넷입니다.”김세연은 싱긋 웃더니 평온하게 말했다.“꽤 어리네.”그러고는 안시연을 힐끗 보고 말했다.“고개 들어봐.”안시연은 주먹을 꽉 쥔 채 고개를 살짝 들었다.김세연은 그녀의 얼굴을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꽤 예쁘네. 정훈이랑은 어떻게 안 거니?”안시연이 입을 달싹이며 말했다.“제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교수님께서…”“교수님?”김세연의 눈살이 찌푸려지자 안시연은 말문이 턱 막혔다.역시나 김세연이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너 성진대 다녀?”“…네.”“정훈이가 널 가르쳤었고?”안시연은 잠깐 침묵했다. 사생 관계라는 걸 밝히자 김세연은 무척 화가 난 듯 보였다.“너희 성진대 여대생들은 하나같이 영리하구나. 언제 너희 성진대 교장을 만나면 한마디 해야겠어.”안시연은 당황스러워 고개를 완전히 들어 올렸다.김세연은 그제야 그녀의 얼굴을 똑똑히 보았다.여리고 청초하며 눈동자도 맑은 것이 보기 드문 미녀였고 그 여자보다 더 아름다웠다.김세연의 안색이 더욱 어두워졌다.그녀는 연정훈이 여자를 여럿 만나고 다니는 것에 간섭하지 않았다. 하지만 저번에 그 학생은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게다가 안시연도 똑같은 요물이었다.김세연이 단호히 말했다.“넌 여기서 지낼 수 없다.”안시연은 이미 예상한 일이라 반박하지 않았다.“정훈이가 너에게 카드를 줬지?”김세연은 갑자기 강경한 태도로 명령을 내렸다.“지금 당장 여기서 떠나. 호텔도 괜찮고 월세방도 괜찮으니 네가 살 곳은 네가 알아서 찾아. 이 집은 정훈이가 성인이 됐을 때 걔 할아버지가 선물로 준 거야. 이 집에
안시연은 부랴부랴 떠난 뒤 길가에서 택시를 잡았다.마음이 복잡한 탓에 가는 길에 누군가 계속 사진을 찍었다는 걸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길가 구석 자리에서 남자가 카메라를 꺼내며 빠르게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임유정 씨, 사진 찍었습니다. 보내드렸어요.”“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계속 지켜보고 있겠습니다.”택시를 탄 안시연은 창밖의 경치를 바라보면서 저도 모르게 안도했다.김세연의 말에 난처함을 느낀 건 사실이지만 그 호화로운 집에서 나오는 것엔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그녀는 어젯밤 연정훈과 앞으로 어떤 사이로 지내야 할지 고민하느라 잘 자지 못했다. 연정훈은 안시연에게 있어 럭셔리 브랜드 매장에서 가장 비싼 보석처럼 절대 다가갈 수 없는 존재였다.그의 곁에 남는다면 안시연은 뭘 하든 항상 촉박하게 해야 했고 말 한마디 하는 것조차 머리를 몇 번이나 굴려야 할 정도였다.연정훈에게 고맙고 또 그를 좋아하는 것도 맞지만 동시에 그가 두려웠다.그런 생각을 하던 안시연은 결국 연정훈에게 똑똑히 의사를 전달하려고 마음먹었다.택시는 아파트에 도착했고 안시연은 돈을 지불한 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위층으로 올라갔다.엘리베이터가 열리자마자 안시연은 문 앞에 서 있는 집주인을 마주쳤다.“성하 언니, 여긴 어쩐 일이세요?”김성하는 안시연을 보자 연신 눈을 흘겼다.“무슨 일이냐고요? 어쩜 이렇게 뻔뻔하게 나한테 그걸 묻는 건지.”안시연은 의아했다.김성하는 몸이 뚱뚱한 편이지만 목소리가 얇았다. 그녀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방언을 구사하며 소리를 빽 질렀다.“안시연 씨, 전에 나한테 회계라고 하지 않았어요? 설마 날 속인 건 아니죠? 어젯밤에 글쎄 어떤 남자가 시연 씨 집 문 앞에서 소리 지르고 난리도 아니었어요. 시연 씨를 꼭 만나겠다고. 그래서 이웃집에서 신고했다니까요.”남자라는 말에 안시연은 곧바로 주지혁을 떠올렸다.그녀는 자신 때문이라고 생각해 해명하려 했는데 문득 어떤 생각이 들어 물었다.“성하 언니, 왜 저한테 연락하지 않으셨어요?”김성하는
집주인은 안시연의 상황을 꿰고 있었다. 부모도 없고 그녀의 편을 들어줄 사람도 없으니 만만했을 것이다.“계약금은 반 돌려줄게요. 그리고 이 집에 있는 가구 여기 두고 가면 200만 원 더 얹어줄게요. 어떻게 할래요?”김성하는 안시연에게서 돈을 떼어먹을 생각이 분명했지만 안시연은 그녀와 맞서 싸울 힘이 없었다.게다가 가장 중요한 건 계약금 액수가 꽤 크다는 점이다. 지금 안시연은 급히 돈이 필요했고 돈을 조금이라도 얻을 수 있다면 그래도 마음 편히 일자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게다가 집주인의 말 중에 맞는 말도 있었다. 얼마 전 사건 때문에 이웃들이 그녀에게 불만을 품었었고 어제 주지혁이 찾아와서 난동까지 부렸으니 정말로 고소까지 가게 된다면 꼭 승소할 거라고 장담할 수 없었다.게다가 재판이라는 건 많은 시간이 드는 일이었다.“가구는 두고 갈게요. 대신 400만 원 주세요. 현금으로요.”김성하가 눈을 부라렸다.“안...”안시연이 말했다.“싫으면 신고하시든가요.”김성하는 말문이 막혔다.안시연의 강경한 태도에 결국 김성하는 마지못해 대답했다.“그래요, 400만 원 줄 테니까 오늘 당장 짐 빼요!”안시연은 이를 악물고 고개를 끄덕였다.떠나는 것도 좋았다. 그녀와 주지혁이 함께 살았던 흔적이 있는 곳에서 철저히 벗어나는 셈이니 말이다.가구를 남겼다 보니 옷과 생필품 같은 것들만 챙기면 돼서 짐이 그리 많지는 않았다.집을 찾는 것이야말로 가장 어려운 일이었다. 지금 안시연이 원하는 건 단 한 가지, 가격이 싼 것뿐이었다.중개인은 안시연이 원하는 가격을 듣더니 그녀에게 대꾸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결국 중개인은 마지못해 그녀를 데리고 한 낡은 아파트로 향했다.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고 지하 차고를 개조한 곳인데 1년에 240만 원이었다.안시연은 가격을 조금 더 낮추고 싶었으나 집주인이 단호히 말했다.“싫으면 말고요. 여기는 경인이에요. 그쪽이 살던 시골이 아니라고요.”안시연은 그 말에 얼굴이 벌게졌다.그녀 역시 경인 사람이었으나
협소한 공간 속에서 안시연이 냉정한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했다.“난 누군가를 넘본 적 없어.”주지혁이 계속 압박하지 않았더라면 그녀도 이렇게 피곤하게 살지는 않았을 것이다.주지혁은 무척 후회했다. 안시연을 지나치게 압박한 탓에 남 좋은 일만 했으니 말이다.“다른 일 없으면 이만 끊을게.”안시연이 말했다.“시연 씨!”주지혁은 그녀를 부르더니 한결 누그러진 말투로 말했다.“저번에는 내가 심했어. 내가 사과할게.”안시연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다.주지혁은 계속해 말했다.“내 사과를 받아주지 않아도 괜찮아. 하지만 그래도 3년간 만난 정이 있잖아. 난 예전부터 시연 씨를 내 아내로 생각했었어. 난 정말로 시연 씨가 너무 힘들게 사는 걸 원하지 않아.”“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아이 안 가져도 괜찮아. 나도 더는 부담 주지 않을게. 그리고 외할머니를 데리고 경인을 떠나도 돼. 다른 도시, 다른 나라에 가고 싶다고 해도 좋아. 내가 준비해 줄게.”그러니까 말하자면 그녀를 보내버리고 싶다는 뜻이었다.안시연은 숨을 내쉬며 약간 누그러진 태도로 말했다.“유럽은?”“당연히 되지!”주지혁이 기쁜 목소리로 단숨에 승낙했다.안시연은 눈을 감은 뒤 코웃음치면서 일침을 가했다.“주지혁 씨, 쓸데없이 힘 빼지 마. 내가 모를 줄 알고? 날 해외로 보내면서 아무런 요구도 하지 않을 거라니, 내가 그걸 믿을 거 같아?”경인을 떠난다면 주지혁은 모든 걸 자기 마음대로 하려 할 것이다.“시연 씨, 그...”“자꾸 시연 씨라고 부르지 마. 지혁 씨는 괜찮을지 몰라도 난 역겨워서 토 나올 정도니까.”안시연은 원래도 화가 잔뜩 나 있는 상태였는데 최근 들어 겪었던 일들을 생각해 보니 더욱더 원통해서 말투가 사나워졌다.“앞으로 나한테 연락하지 마. 그렇지 않으면 우리 통화 녹음본 조이현 씨한테 보낼 거니까. 조이현 씨 임신했다면서? 재벌 집 딸이랑 결혼해서 부귀영화를 누리려는 지혁 씨 꿈이 부서질까 봐 두렵지 않아?”주지혁은 순간 놀라서 말문이 막
안시연은 이틀 동안 편히 지냈다. 연정훈을 마주할 필요도 없고 잡힐 걱정을 할 필요도 없었으니 말이다.물론 이런 편안한 생활은 오히려 그녀를 불안하게 했다.연정훈은 그녀를 위해 문제를 해결해 줬는데 자신은 멋대로 서로가 정해놓은 관계를 벗어났으니 단물만 쏙 빼 먹고 버리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시연아?”외할머니의 부름에 안시연은 고개를 들어 잘라놓은 사과를 그녀에게 건넸다.최미란은 사과를 포크로 찔러서 시연에게 먹였다.“많이 먹어. 요즘 살이 빠진 것 같아.”“아닌데요? 저 살쪘어요.”안시연은 그렇게 말하면서 일부러 애교스럽게 볼살을 꼬집으며 말했다.최미란은 웃었다.옆 병상에 있는 아주머니가 말했다.“어르신, 정말 복이 많으시네요. 이렇게 효도하는 손녀가 있으니 말이에요.”최미란은 그 말을 듣자 활짝 웃었고 그 바람에 얼굴의 주름이 더욱 깊어졌다. 그녀도 자기 손녀를 칭찬했다.그 아주머니는 안시연을 보고 말했다.“정말 얼굴도 예쁘고 복도 많네요. 재벌 집 딸처럼 보여요.”그녀는 잠깐 고민하다가 손뼉을 치면서 말했다.“그... 양지원 씨 같아요!”양지원은 이 나라 최고의 갑부였다.보통 사람이었다면 이런 칭찬을 듣고 기뻐했을 것이다.그러나 안시연은 충격이라도 받은 듯한 최미란의 눈빛을 보았다.그녀는 다른 생각은 하지 않고 그저 외할머니가 몸이 안 좋아서 그러는 건 줄로 알고 서둘러 물었다.“외할머니, 왜 그러세요?”옆 병상의 아주머니는 최미란이 또 발작한 줄로 알고 호출 벨을 눌러 간호사를 부를 생각이었다.“괜찮아, 괜찮아.”최미란은 정신을 차린 뒤 억지로 입꼬리를 당기며 안시연의 손을 잡았다.“어디 아프세요?”안시연이 긴장한 표정으로 말했다.최미란은 고개를 저었다.“어젯밤에 잘 못 자서 피곤해서 그런가 봐.”안시연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옆 병상의 아주머니는 상황을 보더니 말을 아꼈다.안시연은 일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서류를 넣어도 면접 보러 오라고 하는 데가 없었다.그녀는 대부분 시간을
집 안에는 앉을만한 의자조차 없었다. 연정훈에게 안으로 들어오라고 했지만 그마저도 그를 모욕하는 일처럼 느껴졌다.그러나 연정훈은 안으로 들어왔고, 안시연은 잠깐이지만 문을 닫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였다.연정훈이 고개를 돌려 자신을 바라보자 안시연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문을 닫았다.문을 닫는 순간 실내가 어두컴컴해졌다.안시연은 빠르게 침대맡의 조명을 켰다. 차고 안의 조명이 망가졌는데 미처 새 걸로 바꾸질 못했다.키가 큰 연정훈이 협소한 방 안에 서 있어서 그런지 집이 더 좁아 보였다.주위를 둘러본 그는 안시연의 침대 위에 앉지 않고 말했다.“옷 입고 나랑 같이 돌아가.”안시연은 주먹을 쥐고 한참 뒤에야 말했다.“교수님, 저 안 돌아갈래요.”연정훈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비싼 렌즈 뒤로 평온한 눈빛이 보였다.“무슨 일이 있었는지 나도 알고 있어. 이번에는 뜻밖이었어. 앞으로는 그런 일 없을 거야.”“그런 뜻 아니에요.”안시연은 고개를 저었다.연정훈은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그녀가 말을 이어가길 기다렸다.안시연은 몸을 돌려 자신의 컵에 물을 따랐다.“물 마시세요.”연정훈은 컵을 건네받았다.“오늘 너무 늦었는데요. 이제 막 비행기에서 내려서 오신 거예요?”안시연의 말에 연정훈은 화를 내지 않고 물을 마신 뒤 덤덤히 “응”이라고 대답했다.“그러면 먼저 돌아가서 쉬세요.”안시연이 말했다.“너랑 같이 돌아갈 거야.”안시연은 침묵했다.연정훈은 한숨을 쉬더니 컵을 내려놓고 그녀의 침대 위에 앉았다.그는 안경을 벗어 침대 위에 내려놓은 뒤 손을 들어 관자놀이를 살살 주물렀다.“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거야?”안시연은 멀지 않은 곳에 서서 두 손을 몸 앞에 놓았다. 마치 선생님과 면담하는 학생 같았다.안시연이 말했다.“그곳은 저랑 어울리지 않아요.”연정훈은 시선을 들면서 눈을 가늘게 떴다. 어두운 조명 속에서 그는 그녀의 미세한 감정 변화를 포착했다.“뭐가 어울리지 않는데?”“교수님 어머님 말씀이 맞아요. 그곳은 교
양석진은 아무 내색하지 않고 양지원을 이끌어 조용한 곳으로 이동했다.“누가 너 괴롭혔어?”“아니요!”배는 자꾸 쿡쿡 쑤셔오고 멀리서 진병수가 모르는 여자를 껴안고 있는 걸 보면 양석진도 본인이 없는 곳에 저렇게 행동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더 배가 아팠다.엄마가 돌아가신 뒤로 아빠도 늘 여자들을 만나고 다녔다.양지원은 저런 행동에 큰 반감을 느꼈고 양석진도 같은 부류라고 생각하면 화가 났다.그런 생각을 하는데 양석진이 옆으로 다가와 낮은 소리로 물었다.“혹시 생리 시작한 거야?”“...”양지원이 아무 대답이 없자 양석진은 바로 눈치를 챘다.“여기 가만히 앉아 있어.”그리고 룸을 나선 양석진은 따뜻한 꿀물을 한 잔 가지고 돌아왔다.마침 두 사람을 지나치던 진병수는 꿀물과 화가 잔뜩 난 ‘공주님’을 번갈아 보며 혀를 쯧쯧 찼다.‘이게 동생이야? 딸이야?’따뜻한 꿀물을 마시자 몸이 녹아내렸고 양지원은 소파에 푹 기대앉았다.그리고 양석진의 시선이 느껴지자 입을 삐죽거리며 물었다.“아까 그 여자 누구예요?”양석진은 멈칫하다가 바로 상황 파악을 마쳤다.“연예인인데 골치 아픈 일이 생겼다고 하더라고. 사정이 딱해 보여서 병수더러 도와주라고 했었어.”양지원은 바로 시선을 흘렸다.“오빠는 다른 사람한테도 다 이렇게 친절해요?”“그 사람 연예인이 된 이유가 어머니 치료비를 벌기 위해서였어. 그런데 어머니를 결국 지키지 못했다고 하더라고.”양지원은 침묵했다.‘사정이 딱하긴 하네.’“그래도 오빠는 조심해야 해요. 아빠가 오빠를 정치인으로 키우려고 하는데 병수 오빠처럼 헤프게 행동하면 안 돼요.”양석진은 자신에게 훈수를 드는 양지원을 보며 며칠 전 양지원이 벌인 일을 떠올렸고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알겠어.”구석 자리에서 양석진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으니 양지원은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 그래서 양석진에게 청아에 대한 얘기를 더 들려달라고 했다.고개를 돌리니 어느새 양창수가 옆자리에 와 있었다.양지원은 양창수의 어깨를 툭 건드리며
손명우는 안경을 고쳐 쓰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날 그냥 보러 온 건 아니고, 드레스샵 깨부순 것 때문이지?”양지원은 조금 계면쩍은 기분이 들어 목을 가다듬었다.진병수는 장난기가 많았고 술잔을 들고 옆으로 앉으며 계속 질문을 던졌다.“뭐야? 우리 지원이가 언제부터 드레스에 관심을 가졌지? 혹시 연애라도 하는 거야?”소파에 앉아 있던 양석진은 제게 걸어오려는 여자를 눈빛으로 제압해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게 했다.양지원은 그걸 발견하고 득의양양해서 턱을 치켜들었다.‘역시 우리 오빠가 제일 멋있어.’“내가 왜 연애해요?”양지원은 다시 양석진의 옆자리로 앉으며 말을 이었다.“드레스 입는 사람은 꼭 연애하고 결혼할 사람이어야 하는 거예요? 드레스가 예쁘면 그냥 입을 수도 있는 거죠.”“그래도 굳이 창을 깨부술 필요는 없잖아.”진병수는 손명우를 가리키며 말했다.“명우한테 말만 하면 드레스는 얼마든지 입을 수 있어.”손명우는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가게에 새로 턱시도 모델 많이 들어왔는데 관심 있으면 같이 사진도 찍어줄 수 있어.”양지원은 크게 관심이 생긴 건 아니었으나 손명우를 거절하기 애매했다.그때, 양석진이 디저트를 양지원의 앞으로 당겨주며 말했다.“아직 나이도 어린 게 무슨 웨딩드레스 사진을 찍는다고.”“오빠, 방금 너무 촌스러운 거 알아요?”양지원은 한숨을 푹 내쉬며 옆 사람들한테 말했다.“내 나이가 어려요? 진씨 고모는 내 나이 때 벌써 결혼 1주년이었어요.”“그건 예전 얘기고.”한강시 쪽은 말이 달랐지만 화서시는 한 10년 전만 해도 다들 결혼을 아주 어린 나이에 했었다.“그냥 모델이랑 같이 사진 찍어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잖아.”진병수의 말에 양지원은 양석진의 표정을 살폈고 고민하다가 손을 저었다.“어휴, 내가 무슨 모델이랑 사진을 찍어요. 됐어요.”그렇게 사진 촬영은 일단락이 되었다.양지원이 들어온 뒤로 룸 안의 사람들은 행동을 조심하기 시작했다.양석진은 동생 양지원을 끔찍하게 챙겼고 진병수와 손명우는 크게
오토바이를 타고, 쓰레기통 따위로 창을 깨부수는 건 가히 그해의 유행이라 할 수 있었다.양지원은 그런 반항적인 일에 큰 관심이 없었지만 엄마가 돌아가신 뒤로 기분이 저기압이라 분출한 곳이 필요했다.양석진이 옆에 있었다면 얼리고 달랬을 테지만 양창수는 오히려 불난 집에 부채질했을 것이다.양홍두가 자리를 비우자 두 사람은 입에 모터가 달렸다.“형, 걱정할 필요 없어요. 어차피 드레스샵은 손명우네 가게니 아무 문제 없어요.”양지원은 팔짱을 척 끼고 양석진의 앞으로 걸어갔다.“그냥 드레스뿐인데 아빠가 괜히 오바하시는 거예요. 내가 전에 그 불여우한테 전화했다고 지금 아니꼽게 보시는 거라고요.”양석진이 고개를 돌려 양지원을 향해 말했다.“말 가려서 해.”양지원은 여전히 불만이라는 듯 입을 삐죽였다.‘계속하면 내가 손해니까 참아야지 뭐.’그리고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온 오빠한테 굳이 이런 일로 마음 쓰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양지원은 어린 시절처럼 양석진에게 딱 붙어 말했다.“참, 내 친구가 오빠한테 편지도 쓰고 선물도 챙겨줬어요.”양석진은 익숙하다는 듯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난 그런 쪽으로 관심 없으니까 친구한테 다시 그런 걸 보내지 말라고 해. 난 공부에만 집중하고 싶으니까.”평소의 양지원은 양석진이 공부에만 매달리는 것에 불만이 가득했지만 지금은 아주 흡족한 대답이었다.‘그래, 이게 맞아. 감히 누가 우리 오빠 옆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이겠어?’‘꿈 깨라고!’양지원은 기분이 퍽 좋아졌고 제 친구들한테 전화를 돌려 오빠의 말을 전했다.다른 사람은 그냥 알겠다고 넘어갔지만 친구 길예은은 꼬치꼬치 캐묻기 시작했다.“너희 오빠 정말 아무한테도 관심이 없다고? 네가 애초에 편지를 건네지 않은 건 아니고?”“야, 길예은, 너 무슨 말을 그렇게 해?”“저번에 너한테 석진 오빠 선물 부탁했더니 그대로 다시 돌려줬잖아. 너희 오빠는 무슨 눈이 그렇게 높아? 정말 우리 중에서 한 명도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다는 거야?”길예은이 씩씩거리며 말했다.
작가의 말:아래 내용은 네 시기로 나뉘어 진행됩니다.소년 — 짝사랑이라는 이름의 시작.청년 — 서른 번째 생일, 그리고 아련한 재회.중년 — 오랜 시간 끝에 처음으로 엮인 둘의 이야기.결혼 후 — 이제는 함께 걷는 달콤한 나날들.각 시기를 함께하며, 두 사람의 감정이 어떻게 깊어지는지 지켜봐 주세요.--------[소년기]양석진과 양지원이 혼인 신고서를 제출한 당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리고 사무실부터 관저까지 하루 종일 끊이지 않는 축복을 받았다.양석진에게 결혼 축하 인사를 건넨 첫 번째 사람이 드물게 보인다는 양석진의 미소를 목격했다는 소문이 전해진 뒤로, 다들 기회를 찾아 양석진에게 축하 인사를 건네고 그 미소를 직접 확인하려 했다.어느새 저녁 시간이 되고, 나이가 지긋한 기사가 관저로 바라대 주다가 낮에 들었던 소문을 듣고 농담 섞인 말투로 말했다.“의원님, 결혼 축하합니다. 내일에도 같은 시간으로 마중 오면 될까요?”양석진은 꽉 채운 셔츠 단추를 두어 개 풀며 미소를 지은 채 차에서 내렸다.“내일은 휴가입니다.”홀로 차에 남겨진 기사도 어느새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예쁜 노을 아래, 양석진이 정원 안으로 걸어가다가 원피스를 입은 양지원이 얇은 외투 하나 걸치고 무언가 휘젓고 있는 게 보였다.그러자 아침에 일어났을 때 마른기침을 몇 번 했다고 양지원이 배즙을 만들어주겠다고 했던 것이 떠올랐다.‘그런데 뭘 또 정원에서, 그것도 이렇게 큰 가마에 만들고 있는 거야?’양석진이 양지원을 부르려는 찰나, 우지끈하고 무언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양지원이 너무 힘을 주어 젓다가 나무 주걱이 부러지고 만 것이었다.양석진은 재빨리 나무 뒤로 몸을 숨기고 양지원이 이어서 어떤 행동을 보일지 지켜봤다.양지원은 외투를 다시 고쳐 입으며 주변을 살폈고 아무도 발견하지 못한 걸 확인하고는 위층을 향해 외쳤다.“창수 씨! 왜 부러진 나무 주걱을 주신 거예요!”“...”이어 2층 창문이 열리고 양창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양지원의
양혁수는 변여름을 품에 안은 채로 서재 창가에서 예쁜 노을과 노을이 비친 잔잔한 호숫가를 바라봤다.“시연 언니 컨디션은 괜찮아요?”변여름의 질문에 양혁수가 대답했다.“좋아 보이던데. 컨디션도 그렇고 기분이 아주 좋아 보였어.”변여름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또 양혁수를 쳐다봤고 양혁수가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왜 쳐다봐?”“오빠, 행복해요?”양혁수는 최근 몇 달 동안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낸 걸 떠올리며 품 안의 변여름을 꼭 껴안았다.“행복하지.”“정말요? 왜요?”“왜긴...”두 눈을 감고 잠시 뜸을 들인 양혁수가 대답했다.“아침에 누가 나한테 해물 제철 탕을 해준다고 했거든.”“...”변여름은 손을 뻗어 익숙하게 양혁수의 두 볼을 잡아당겼다.양혁수는 변여름이 뭘 하든 가만히 받아줬고 또 변여름의 이마에 짧게 키스했다.양혁수의 눈동자에는 오직 변여름만 담겼고 변여름을 향한 사랑이 말하지 않아도 느껴졌다.변여름은 입꼬리를 올린 채로 양혁수의 목에 팔을 걸었고 또 빠르게 떨어지며 말했다.“그러고 보니 오빠, 아직도 나한테 좋아한다는 말도 안 했잖아요.”양혁수는 아주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좋아해.”그리고 고민하다가 말을 고쳤다.“내가 널 좋아해.”변여름은 금세 헤벌쭉해졌고, 첫사랑이고 뭐고 잊어버린 채로 양혁수의 두 볼에 번갈아 뽀뽀했다. 그리고 양혁수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인 듯 품에 안고 떨어지지 않았다.“오빠.”양혁수는 고개를 살짝 숙여 이어질 변여름의 말을 기다렸다.“난 오빠가 너무너무 너무 좋아요.”양혁수는 이런 변여름의 머리를 쓰다듬었고 나란히 소파에 기대앉았다.‘아, 삶이 이렇게 행복할 수도 있구나.’‘너무 행복해.’한강시에서의 삶은 점점 더 흥미진진해졌다. 몇 년 전만 해도 양혁수는 사람을 자주 만나지 않았지만 변여름과 함께한 뒤로 변백호네 가족이 시도 때도 없이 집을 들락거렸다.변여름은 한강시 연구실에서 고작 6개월의 시간을 보냈지만 벌써 성공적으로 데이터를 확보했다.그래서 남은 6
변여름은 2층 베란다에서 뛰쳐나오며 양혁수와 양지원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마침, 요즘 한가한데 여름이 데리고 경인시로 놀러 갈게요. 시연이도 볼 겸.”‘한가하긴! 고양이 배변도 아직 치우지 않았는데!’고개를 돌린 양혁수는 변여름이 입을 삐죽이고 있는 게 보였다.그래서 핸드폰을 잠시 귀에서 떼고 변여름을 향해 걸어오며 말했다.“서재 다 치워뒀으니 거기에서 논문 보면 돼.”“네.”변여름은 무표정으로 고개를 휙 돌렸고 쿵쿵거리며 서재로 들어갔다.양혁수는 피식 웃었고 통화를 종료한 양지원은 다시 영상 통화를 걸어왔다. 화면에는 양지원뿐만 아니라 양시연도 함께였다.막 아이를 낳았지만 양시연은 컨디션이 꽤 좋아 보였고 죽을 먹는 중이었다.양지원이 핸드폰을 넘기자 양시연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지금 퇴근하는 거야?”“막 집에 도착했어.”핸드폰 너머로 아이들이 재잘대는 소리가 들려왔고 양승윤과 다른 아이들도 함께 있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양혁수가 잠시 숨을 고르다가 말했다.“축하해. 잘생긴 아들에, 귀여운 딸까지 생긴걸.”과거에는 도저히 입 밖으로 내뱉기 힘들었지만 정작 하고 보니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양시연은 양혁수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너도 축하해.”“엄마한테서 전해 들었어. 너랑 여름이 말이야.”양혁수는 창밖의 핑크빛 노을을 보며 가슴이 쿵쿵 뛰는 걸 느꼈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서재로 발걸음을 옮겼다.“우리 공주님 보여줄까?”“좋아.”화면을 돌리자 침대 끝에 앉은 연정훈이 아이를 안고 있었다. 주변에는 양승윤을 제외하고 꼬마가 둘이나 더 있었다.“아빠, 나도 안아보고 싶어요!”“삼촌! 예지도 안아볼래요!”‘참 시끌벅적하네.’양시연이 연정훈을 낮게 부르자 연정훈이 딸을 품에 안고 걸어왔다.그리고 화면을 통해 양혁수는 연정훈과 시선이 마주쳤고 두 사람은 무언의 시그널을 주고받았는지 또 표정을 찡그렸다.연정훈은 예전처럼 차가웠지만 제 딸을 볼 때에는 입꼬리가 내려올 줄을 몰랐다.“시간 되면 경인시로 놀러와. 시
“그 사람도 별반 다를 게 없어요. 낳아준 어머니는 뒤로 하고 장모님한테 왔잖아요.”양혁수가 투덜거리며 말했다.양시연을 향한 감정이 남아있지 않더라도 양혁수는 늘 연정훈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변여름은 조용히 그 옆에서 눈치를 살폈다.그러다가 며칠 전 변여름과 진지하게 나눴던 첫사랑 얘기가 떠오른 양혁수는 오늘 이 기회를 빌려 변여름에게 장난을 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변여름은 크게 화도 내지 못하고 입만 삐죽일 것이다.저녁 시간이 다 되어가고 연정훈이 전화를 걸어 거의 집에 다 와간다고 알렸다.변여름은 양혁수의 손을 잡고 뒤뜰에서 잡초를 손질하는 양석진의 옆으로 다가갔고 갑자기 이렇게 말했다.“오빠, 우리 산책하러 가요.”양혁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지금?”“네!”“곧 다 모일 텐데 밥 먹고 산책하러 가자.”그러자 변여름이 고개를 푹 숙이더니 눈앞에 보이는 잡초를 마구잡이로 휙 잡아 뽑았다.양혁수는 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웃음을 꾹 참았다.그때 누군가 양혁수를 불렀고 두 사람은 다시 거실로 돌아가야 했는데 변여름이 갑자기 양혁수를 벽으로 툭 밀쳤다.그러자 양혁수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벽에 기댄 채로 변여름의 턱을 잡고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첫사랑을 잊는 방법은 첫사랑을 다시 만나는 거라며? 현실보다 상상 속 첫사랑이 더 완벽하고 이쁠 테니까.”“...”‘짜증 나.’양혁수가 변여름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며 말했다.“이건 네가 말했던 거잖아.”“...”“그런데 지금 표정이 왜 그렇지? 설마 한번 뱉은 말을 다시 주워 담고 싶은 거야?”변여름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말했다.“세상에 영원한 정답은 없는 거니까요.”“그래도 어쩔 수 없잖아. 계속 피해 다니며 만나지 않을 수도 없고.”“나 질투 난다는 말이에요.”“내가 평생 시연이 좋아한다고 해도 괜찮다고 했던 사람이 누구더라?”“그건 예전이잖아요!”“그럼 지금은?”‘지금은...’변여름은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발뒤꿈치를 살짝 들어 양혁수의
새벽 다섯 시가 다 되어서야 양혁수는 변여름을 껴안고 잠이 들었다.아침이 되어도 아무도 두 사람을 깨우지 않았고 실컷 자고 일어나니 어느새 아침 열 시가 넘어가고 있었다.두 사람은 잠에서 깬 뒤에도 한참 침대에서 뭉그적거렸고 양혁수가 먼저 몸을 일으켜 아래층으로 내려가 간단하게 먹을 음식을 준비했다.양혁수가 음식을 챙겨 돌아왔을 때, 변여름은 세수하고 다시 침대에 누워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양혁수가 침대 끝자락에 앉으며 변여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뭐라도 좀 먹고 다시 자.”변여름은 지금 자신의 옷차림이 어떤지 전혀 상관하지 않고 바로 이불에서 빠져나와 양혁수의 품에 안겼다.양혁수는 서둘러 변여름의 옷매무시를 정리해 주고 눈을 감고 있는 변여름에게 한 입씩 떠먹여 줬다.변여름은 몇 입 먹더니 금방 싫증을 느꼈고 양혁수는 변여름이 남긴 걸 입에 넣었다.그런데 양혁수가 아침을 먹는 사이 변여름이 품에서 잠이 들어버렸다.‘그렇게 졸린가?’양혁수는 변여름을 다시 이불 안에 넣어주고 옷을 갈아입은 뒤 헬스장을 다녀왔다.돌아와서 샤워를 마쳤을 때도 변여름은 아직 깨어나지 않았다.양혁수는 침대 앞으로 다가가 곤히 잠든 변여름을 바라봤고 젖은 머릿결이 마를 때까지도 시선을 떼지 못했다.그러다가 본능을 못 이긴 양혁수는 수건을 내려두고 침대 옆자리로 올라갔다.변여름은 금세 이상한 점을 눈치챘고 귓가에 들려오는 양혁수의 뜨거운 숨소리에 몸을 돌려 품에 안기며 말했다.“오빠...”양혁수는 숨을 고르다가 변여름에게 속삭였다.“어디 불편한 곳은 없어?”“없어요...”변여름은 온몸에 열기가 돌았고 저도 모르게 양혁수의 어깨를 깨물었다. 양혁수가 작게 신음 소리를 뱉자 변여름도 점점 이성을 잃게 되었고 눈가가 빨개진 채로 물었다.“우리 새해 인사드리러 가야 하지 않아요?”“필요 없어. 친척들도, 친구들도 많지 않아서 상관없어.”변여름은 마지막 남은 이성으로 말했다.“우리 세운시로 가야 하잖아요.”양혁수는 새해 인사 따위는 이제 안중에 없었다.
침대 시트를 교체하지 않아 방안에는 아직도 그 향이 가시지 않았다. 양혁수는 단팥죽이 끓는 동안 서둘러 시트를 교체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단팥죽의 단 향이 코를 자극했다.양혁수는 한 그릇 따라 변여름에게 건넸고 변여름은 소파에 나른하게 누워 양혁수가 한입씩 떠먹여 주는 걸 삼켰다.그렇게 천천히 기운을 되찾은 변여름은 또다시 장난기가 발동했다.양혁수의 품에 안겨 양혁수의 핸드폰을 뒤적이던 변여름이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마주했다.양혁수는 변여름의 두 볼을 쭉 잡아당기며 이 순간의 행복을 즐겼다.그런데 변여름이 꽤 진지한 얼굴로 이런 질문을 하는 게 아니겠는가?“오빠, 정말 무슨 약이라도 먹은 거 아니에요?”양혁수는 인상을 팍 찌푸리다가 시간을 확인하고는 바로 무슨 의미인지 알아차렸다.싸늘해진 양혁수의 시선에 변여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약을 따로 챙겨 먹지 않은 거면 너무 오랫동안 금욕해서 그런 거 아니에요?”“...”양혁수는 변여름이 이어서 어떤 질문을 할지 눈에 뻔했고 미리 준비해 둔 떡을 집어 냉큼 변여름의 입에 넣었다.변여름은 입안 가득 우물거렸고 반쯤 남긴 떡은 양혁수가 처리했다.“계속 까불면 너 이거 다 먹일 거야.”변여름이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이 떡 전부요?”“...”역시 못 말리는 변여름이라 생각하며 양혁수는 입안 가득 떡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입술 도장을 꾹 찍었다.어느새 해가 뜰 시간이 되었지만 두 사람은 하나도 졸리지 않았다.한참 꼭 붙어 있다 보니 또 어느새 애매모호한 분위기가 흘러나왔다.양혁수는 변여름을 위해서라도 관심사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변여름이 핸드폰을 뒤적이며 말했다.“시연 언니가 아직 새해 인사를 보내지 않았네요?”질투하는 듯한 변여름의 말투가 오늘따라 더 귀엽게 느껴졌다.하지만 지금 말을 잘못하면 변여름이 삐질 게 뻔했으니 양혁수는 말을 가려서 하기로 했다. 그래서 한참 말을 골라 입을 열었다.“시연이는 새해 당일에 인사를 보내는 편이야. 우리 가족들도 대부분 그렇게 하거든. 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