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이를 모르는 그가 내 상사라니!

내 아이를 모르는 그가 내 상사라니!

By:  빛나냥Updated just now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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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하고 몇 년 뒤, 회사 회의실에서 자신의 아이 아빠인 전 남친 권지헌을 다시 마주치게 된 허설아. 허설아는 그저 도망치고 싶은 마음뿐이다. 아이를 빼앗길까 두렵고 모든 걸 잃게 될까 두렵다. 허설아는 애초에 두 사람은 그냥 장난이었다는 권지헌의 말을 떠올리며 직장 내 상하급 관계를 유지하려 애쓴다. 하지만 권지헌은 주변을 맴도는 여자들이 단 한 명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 처음 허설아를 다시 본 순간, 권지헌은 허설아가 자신을 버리고 바로 결혼해 아이까지 낳은 거라 생각한다. 그래서 허설아가 아파하길, 후회하기를 바라며 복수를 다짐한다. 하지만 허설아가 벼랑 끝에 선 순간 겉에 다가간 권지헌은 허설아가 앞으로 아이와 함께 자기 곁에 머물러 주기를 바란다. 진실을 알게 된 그 순간, 권지헌은 줄곧 복수하고 있던 상대가 자기 자신이었다는 걸 깨닫는다. "네가 나한테 거리를 두라고 했잖아." "거리는." 권지헌이 허설아의 턱을 들어 올리며 말한다. "마이너스일 수도 있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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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제1화

허설아는 회사에 낙하산으로 온 상사가 자기 딸의 친아빠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여기서 권지헌을 마주칠 줄 알았으면 무슨 일이 있어도 이 회사에 입사하지 않았을 것이다.

며칠 전부터 부서는 젊고 능력 있는 상사가 임명된다며 시끌시끌했었다.

태어날 때부터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권율 그룹 총수 집안 도련님이라고 했다.

인생 이력 하나하나 일반 직장인들은 감히 따라갈 수도, 비교할 수도 없는 존재였다.

한 손을 주머니에 찔러넣은 채 회의실에 서 있는 남자의 맞춤 정장은 원래도 늘씬한 남자를 더 우아하고 기품있어 보이게 했다.

예전의 풋풋함은 이미 날 선 카리스마로 다듬어져 있고 어린 나이답지 않게 위압감이 넘쳤다.

남자는 뼈마디가 선명한 손으로 리모컨을 쥐고 PPT 내용을 보며 여유롭게 설명했다.

저음의 매력적인 목소리가 회의실 안에 울렸다.

사람들 모두 상사에게 겁에 질린 첫인상을 보일까 봐 숨도 크게 쉬지 못했다.

허설아는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빛이 나게 닦인 회의실 바닥은 숨을 곳은 커녕 난처해서 어쩔 줄 몰라하는 허설아의 얼굴만 더 선명하게 비췄다.

권씨 집안의 그룹일 줄을 알았지만 그게 권지헌의 권 일 줄은 몰랐다.

허설아는 민망함에 몸 둘 바를 몰랐고 등줄기에서는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숨이 턱 막혀왔다.

3년이었다.

3년 전에 헤어지고 3년 만에 처음 만나는 것이었다.

"이 프로젝트 담당자 누구예요?"

단상 위에서 무심한 듯한 저음의 목소리가 들렸다.

권지헌의 시선이 앉아 있는 모든 직원을 훑었지만 순간 얼어붙은 것처럼 아무도 답이 없었다.

권지헌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목소리 톤을 높였다.

"본인이 맡은 프로젝트도 잊은 겁니까?"

허설아 옆에 있던 동료가 잔뜩 긴장한 채 덜덜 떨며 일어섰다.

"대표님, 제 담당입니다."

착각일지는 몰라도 허설아는 고개를 든 순간 왠지 권지헌과 눈이 마주친 것 같았다.

공기마저 얼어붙는 듯한 기분에 허설아는 숨이 턱 멎는 듯했다.

권지헌은 빠르게 시선을 돌리고 차갑게 말했다.

"내용 보완이 필요해요. 어떻게 이렇게 작성한 걸 보고할 생각을 했어요?"

허설아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아마 허설아를 못 본 듯했다.

지금의 허설아는 3년 전과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허설아는 고개를 최대한 낮추어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으려 했다.

시선을 바닥에 고정하고 있던 허설아의 눈앞에 갑자기 빛이 나게 닦인 고급 구두가 우뚝 멈춰 섰다.

마치 깊은 바다에 빠진 것처럼 짜디짠 바닷물이 허설아의 숨결을 삼켜버린 듯했고 팔다리가 순간 굳어버렸다.

권지헌이 허설아 옆에 멈춰 섰다.

동료가 옆에서 변명했다.

"대표님, 이미 고객 피드백은 통과한 상황이어서……"

들고 있던 리모컨을 책상 위로 툭 던진 권지헌이 고개를 들었다.

권지헌은 날 선 시선으로 허설아 옆에 있는 동료를 빤히 쳐다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미숙한 기획안은 결국 미숙한 거예요. 고객을 핑계로 대충 넘어가는 게 기준이에요? 아니면 회사 일이 장난 같아요?"

고고하게 우위에 서서 평가를 내리는 듯한 시선은 허설아 옆에서 보고하는 동료가 아니라…… 허설아를 향해 있었다.

사람들 모두 권지헌의 불똥이 자신들한테 튈까 봐 발등만 쳐다보았다.

허설아는 숨을 깊게 들이쉬며 마음을 진정시키려 했다.

권지헌이 다시 이어 말했다.

"보완해서 다시 보고해요."

"네, 대표님."

모두가 안도의 숨을 내쉬고 있던 그때, 권지헌의 시선이 허설아에게 꽂혔다.

얼굴은 여전히 예뻤지만 예전보다 훨씬 말라 있었다.

지금은 깔끔한 오피스룩에 머리카락까지 귀 뒤로 단정하게 넘겼지만 여전히 빛이 날 정도 하얀 피부에 턱밑까지 내려온 다크서클과 피곤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시선은 단 한 번도 권지헌에게 향한 적 없었다.

권지헌이 입꼬리를 끌어올리고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앞으로 다시 이런 기획안 보고하면 알아서 책임져요."

늘씬한 손가락이 허설아의 책상 위를 불규칙하게 톡톡 두드렸다.

이건 권지헌이 지금 기분이 좋지 않다는 신호라는 걸 허설아는 알고 있었다.

감정을 읽을 수 없는 칠흑같이 검은 눈동자를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허설아는 손바닥에 땀이 맺혔다.

다행히 권지헌은 더 이상 묻지 않고 다른 프로젝트 진행 상황을 체크했다.

허설아는 종아리가 미세하게 떨리는 것 같았다.

회의가 끝난 뒤.

동료들과 자리로 돌아온 허설아는 자리에 앉아 물을 반 컵 벌컥벌컥 비우고 나서야 숨을 고를 수 있었다.

권지헌이 지적한 기획안 중에는 허설아 팀이 맡은 프로젝트도 있었다.

거의 부서 전체가 야근 예약이었다.

옆에 있던 동료가 절규하듯 말했다.

"부임 초반엔 원래 세게 잡는다더니 우리 완전 제대로 걸렸어. 설아 씨, 대표님이 왜 계속 우리 옆에만 서 있었는지 알아? 진짜 놀라 죽을 뻔했어!"

허설아는 잠시 멈칫했다.

권지헌이 옆에 서 있었던 건 아마 동료의 답변을 더 잘 듣기 위해서인 줄 알았다.

하지만 다른 팀 프로젝트를 체크할 때도 자리를 옮기지 않았다.

계속 허설아 옆에만 서 있었다.

허설아는 고개도 들지 못하고 회의가 끝나자마자 눈이라도 마주칠 세라 도망쳤다.

하지만 권지헌은 이미 두 사람의 황당하고 짧았던 만남을 이미 다 잊은 듯했다.

아니면 왜 계속 허설아 옆에 서 있었을까.

신경을 쓰지 않아야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행동할 수 있을 것이다.

예전의 권지헌은 건영대 경제학부에서 4년 내내 캠퍼스 킹 자리를 지킨 레전드 존재였다.

허씨 집안 큰딸인 허설아와의 열애는 당시 캠퍼스를 뒤흔들었다.

그때 사람들은 하나같이 허설아가 권지헌에게 돈을 퍼부어서 몸을 바치게 한 거라고 수군거렸다.

허설아조차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때만 해도 권지헌은 형편이 어려운 대학생 같았다.

하지만 권지헌은 허설아가 주는 돈을 받은 적 없었다.

그러다 권지헌 생일이 다가오던 어느 날, 허설아는 권지헌의 쇼핑 앱 계정에 접속하여 비싸서 장바구니에만 담아놓고 사지 못한 물건이 있으면 선물로 사주려 했다.

그런데 쇼핑 앱에서 권지헌이 다른 사람과 나눈 개인 메시지를 보게 되었다.

상대는 권지헌을 다정하게 지헌 오빠라고 불렀다.

심지어 권지헌이 허설아를 좋아할 사람 같지 않다고 했다.

순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얼음물을 뒤집어쓴 것 같았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권지헌이 답하지 않았으니까.

선물도 예정대로 샀다.

생일 파티에서 선물을 받은 권지헌은 놀라지도 기뻐하지도 않고 그저 덤덤하게 고맙다는 말만 했다.

잠깐 화장실 다녀오는 사이에 미리 결제하러 갔던 허설아가 룸으로 돌아오는데 안에서 비웃음 가득한 말들이 들려왔다.

"허설아가 뻔뻔하게 지헌 오빠한테 들러붙지 않았으면 오빠가 저렇게 속물 같은 여자를 만날 리 없지."

"맞아, 돈 좀 있다고 유난이야."

그때, 권지헌의 말이 허설아의 귓가에 때려 박혔다.

"나도 사실 허설아 별로 신경 쓰지 않아."

주변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권지헌의 말끝을 흐려버렸다.

"지헌 오빠가 저런 졸부를 좋아할 리가 없다고 했잖아!"

허설아는 그때의 기분을 절대 잊을 수 없었다. 숨도 쉬기 힘들 만큼 가슴이 아프고 손발이 찌릿찌릿 저렸다.

그러다 마침 집안에 일이 생기면서 허설아의 아버지가 허설아를 해외로 보냈다.

그렇게 3년이 지났다.

3년 뒤에 돌아왔더니 낙하산으로 부임한 상사가 권지헌일 줄이야?

전엔 밥도 아르바이트나 장학금으로 겨우 사 먹던 권지헌이 권율 그룹의 외동아들일 줄은 허설아는 꿈에도 몰랐다.

하지만 조금 전 반응을 보아하니 아마 모르는 척하기로 마음먹은 듯했다.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대표 사무실 안.

권지헌은 부드러운 가죽 소파에 앉아 가늘고 긴 손가락으로 마우스를 움직여 전체 직원 정보를 확인했다.

당연히 허설아도 있었다.

1년 전에 입사한 허설아는 화려한 이력과 뛰어난 능력 덕분에 입사 1년 만에 정규직 전환뿐 아니라 프로젝트 팀장까지 맡게 되었다.

권지헌은 굳은 표정으로 책상 위를 두드렸다.

옆에 서 있던 비서 조민규가 권지헌의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

"대표님, 분부하실 게 있으신가요?"

권지헌은 옆에 놓인 커피잔을 들어 우아하게 한 모금 마시고 차분하게 말했다.

"새로 부임해서 프로젝트들이 아직 익숙하지 않네요. 팀장들 소개 좀 부탁할게요."

조민규는 바로 알아듣고 하나하나 소개하기 시작했다.

마지막에야 허설아 이름이 나왔다.

"허설아 씨는 나이가 어리고 본사에서 근무한 지는 1년밖에 안 됩니다. 원래는 해외사업부에 있었는데 실적이 아주 뛰어났습니다."

'실적이 뛰어나?'

권지헌은 입꼬리를 씩 끌어올렸다.

권지헌 기억 속 허씨 집안 큰따님이 체면을 굽히고 입사했다니?

실적이라는 게 허씨 집안 돈으로 산 건 아닌지도 몰랐다.

어차피 돈으로 모욕감을 주는 걸 즐기는 사람이니까.

또한 감정이 깊어질 때쯤 아무 말도 없이 사라지는 여자였다.

권지헌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조민규가 눈치를 살피며 이어 말했다.

"이 프로젝트는 허설아 씨가 거의 다 도맡았는데 이사회에서도 기대가 큽니다."

조민규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허설아는 인턴 시절부터 조민규가 직접 챙기며 키운 편이었다.

조민규는 허설아처럼 말수가 적고 튀려고 하지 않고 일을 깔끔하게 하는 능력 있는 젊은 사람들을 높이 샀다.

조민규가 잠시 주저하다 몇 마디 거들었다.

"혹시라도 부족한 부분이 있으면 마음껏 혼내시고 기회만 한 번 더 주시면 됩니다."

권지헌이 싸늘하게 고개를 들고 눈을 치켜올렸다. 싸늘한 시선이 느껴졌다.

입사한 지 1년 만에 벌써 누군가 편을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

사람 마음을 휘어잡는 건 여전한 듯했다.

조민규는 권지헌의 표정을 눈치채지 못하고 한숨을 쉬며 이어 말했다.

"허설아 씨는 집안 사정이 좋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도 병이 많이 위중하십니다. 어린 딸도 하나 있는데 아이도 몸이 좋지 않아요. 그런데 하필이면 남편은 또……"

권지헌이 싸늘한 시선을 보내며 차갑게 말을 끊었다.

"조민규 씨, 사생활이나 캐고 다니라고 월급 주는 줄 알아요?"

조민규는 화들짝 놀라서 거듭 사과하고 권지헌이 일부러 난처하게 하려는 뜻이 아닌 걸 알고는 허리 숙여 인사하며 사무실을 나섰다.

'아직은 대표님 기분을 가늠하기 어려우니 조심히 행동해야겠어.'

사무실이 다시 조용해졌다.

권지헌은 조금 전 흘렸던 커피를 닦고 마우스 스크롤을 내려 허설아의 직원 정보를 클릭했다.

증명사진은 대학 시절, 허설아가 같이 가자고 졸랐던 그날 찍었던 사진이었다.

스크롤을 더 내려 혼인 상황란에 멈췄다.

기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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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허설아는 회사에 낙하산으로 온 상사가 자기 딸의 친아빠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여기서 권지헌을 마주칠 줄 알았으면 무슨 일이 있어도 이 회사에 입사하지 않았을 것이다. 며칠 전부터 부서는 젊고 능력 있는 상사가 임명된다며 시끌시끌했었다. 태어날 때부터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권율 그룹 총수 집안 도련님이라고 했다. 인생 이력 하나하나 일반 직장인들은 감히 따라갈 수도, 비교할 수도 없는 존재였다. 한 손을 주머니에 찔러넣은 채 회의실에 서 있는 남자의 맞춤 정장은 원래도 늘씬한 남자를 더 우아하고 기품있어 보이게 했다. 예전의 풋풋함은 이미 날 선 카리스마로 다듬어져 있고 어린 나이답지 않게 위압감이 넘쳤다. 남자는 뼈마디가 선명한 손으로 리모컨을 쥐고 PPT 내용을 보며 여유롭게 설명했다. 저음의 매력적인 목소리가 회의실 안에 울렸다. 사람들 모두 상사에게 겁에 질린 첫인상을 보일까 봐 숨도 크게 쉬지 못했다. 허설아는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빛이 나게 닦인 회의실 바닥은 숨을 곳은 커녕 난처해서 어쩔 줄 몰라하는 허설아의 얼굴만 더 선명하게 비췄다. 권씨 집안의 그룹일 줄을 알았지만 그게 권지헌의 권 일 줄은 몰랐다. 허설아는 민망함에 몸 둘 바를 몰랐고 등줄기에서는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숨이 턱 막혀왔다. 3년이었다. 3년 전에 헤어지고 3년 만에 처음 만나는 것이었다. "이 프로젝트 담당자 누구예요?" 단상 위에서 무심한 듯한 저음의 목소리가 들렸다. 권지헌의 시선이 앉아 있는 모든 직원을 훑었지만 순간 얼어붙은 것처럼 아무도 답이 없었다. 권지헌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목소리 톤을 높였다. "본인이 맡은 프로젝트도 잊은 겁니까?" 허설아 옆에 있던 동료가 잔뜩 긴장한 채 덜덜 떨며 일어섰다. "대표님, 제 담당입니다." 착각일지는 몰라도 허설아는 고개를 든 순간 왠지 권지헌과 눈이 마주친 것 같았다. 공기마저 얼어붙는 듯한 기분에 허설아는 숨이 턱 멎는 듯했다. 권지헌은 빠르게 시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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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부서 전체가 새로 부임한 상사의 압박에 야근을 택했고 밤 9시가 되어서야 겨우 업무를 끝낼 수 있었다. 특히 권지헌이 지목까지 한 몇 명의 팀장들은 풀이 죽은 얼굴로 모니터만 뚫어져라 쳐다볼 뿐 퇴근은 입 밖에 꺼내지도 못했다. 허설아의 휴대폰이 울렸다. 딸 연희가 언제 돌아오는지 묻는 전화였다. 허설아가 목소리를 낮추어 답했다. "연희야, 할머니랑 같이 먼저 자. 엄마 좀 늦게 들어가." 연희가 앳된 목소리로 말했다. "알았어. 엄마 너무 힘들게 일하지 마. 연희랑 할머니 밥 조금만 먹을게." 허설아는 코끝이 찡해졌다. 곧 울 것 같은 느낌에 허설아는 급히 전화를 끊었다. 하지만 마음이 쉽게 진정되지 않았고 머릿속엔 계속 연희의 앳된 목소리가 맴돌았다. 허설아는 엄마 성을 따랐고 허설아의 아빠는 연 씨였다. 아빠인 연동근이 돌아간 뒤 연동근을 그리워하던 허설아와 허민정은 연희에게 아빠의 성을 따르게 했다. 사실 연희가 권지헌의 딸이라는 건 아무도 몰랐다. 권지헌 본인조차 이 세상에 그의 핏줄인 딸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올해 두 살인 연희는 면역 계통의 문제가 있어 어릴 때부터 자주 아팠다. 의사는 타고난 귀한 몸이라며 많은 돈을 들여 건강을 유지해야 하는 체질이라 했다. 연희를 데리고 한의원에서 치료를 받는데 매달 약값만 수백만 원이 들었다. 하지만 딸이 건강할 수만 있다면 얼마가 들어도 아깝지 않았다. 허씨 가문이 파산한 뒤, 허설아는 전에 갖고 있던 가방, 주얼리, 차와 집까지 팔아서야 겨우 일부 채무를 갚을 수 있었다. 지금은 허민정과 연희까지 약을 먹어야 했고 가족 모두가 허설아 한 사람의 수입에 의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권지헌을 본 순간 놀라서 도망가고 싶고 다리가 주체할 수 없이 떨렸지만 절대 일자리를 잃을 수 없었다. 허설아는 돈이 필요했다. 옆자리 동료가 연희 전화를 받던 허설아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설아 씨 어려 보이는데 딸이 벌써 그렇게 큰 줄 몰랐어. 아이 아빠는?" 주변 사람들 모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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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간 허설아는 조용히 씻고 작은 방으로 가서 허민정과 깊이 잠들어 있는 연희를 확인했다. 허민정이 얼굴을 찡그린 채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왜 이렇게 늦게 돌아왔어? 배고프지? 내가 라면 끊여줄게." 허설아는 바로 일어나려는 허민정을 눌러 앉혔다. "밥 먹었어요. 더 자요." 허민정은 그제야 다시 잠자리에 들었다. 일하는 허설아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허민정은 평소에 연희를 데리고 다른 방에서 잠을 잤다. 허씨 가문이 파산한 뒤, 허설아는 허민정과 연희를 데리고 회사와 꽤 멀리 떨어진 곳에 오래되고 작은 집을 하나 세 맡아 지내고 있었다. 허설아는 주방에 가서 컵라면에 물을 붓고 불도 켜지 않은 채 휴대폰 메시지를 보고 있었다. 회사 게시판에는 온통 권지헌 얘기뿐이었다. 허설아의 휴대폰도 이미 권지헌으로 도배되어 있었다. 낙하산으로 부임한 상사가 잘생기기까지 했다며 게시판에는 동료들이 찍은 권지헌의 사진으로 가득했다. 밝혀진 과거 자료들은 번지르르한 것이었다. 허설아의 눈길을 사로잡은 문장이 있었다. 대학 시절엔 스스로 학비를 벌어가며 공부했고 졸업 후에는 집안의 어떠한 지원도 없이 신성 금융을 창업해 아시아 최연소 부호 명단에 이름을 올리며 권율 그룹에서 유일하게 공개한 후계자가 되었다……스스로 학비를 벌어가며 공부했다? 몇 년 동안 허설아는 권지헌이 가난한 남자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권지헌에게 돈을 쓸 때도 자존심을 상하게 하거나 예민하게 생각할까 봐 조심스러웠다. 그런데 결국 다 도련님의 장난에 불과했던 거였다. 허설아는 권지헌이 전에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나도 사실 허설아 별로 신경 쓰지 않아." 틀린 말은 아니었다. 전에도 두 사람은 다른 세상 사람이었다. 기품 넘치고 우아한 권지헌은 성적도 우수해서 전국 최고 점수로 건영대에 입학해서 건영대 명문학과에 진학했다. 제멋대로에 세속적인 허설아는 공부에도 관심이 없어서 건영대가 모집 정원을 늘린 덕분에 점수 커트라인이 제일 낮은 예술대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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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허설아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지금 권지헌의 얼굴이 얼마나 일그러져 있는지 알 리 없었다. 그저 뚫어지게 쳐다보는 권지헌의 시선에 온몸이 굳는 듯했고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만 싶었다. 허설아는 말을 마치기 무섭게 탕비실을 빠져나왔다.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한 허설아의 뒷모습을 보던 권지헌이 커피잔을 꽉 움켜쥐었다.허설아는 원래 아이스 아메리카노 같은 건 쓰다고 마시지 않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무렇지 않게 마시고 있었다. 실핏줄이 가득한 눈으로 점점 사라지는 허설아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권지헌은 심호흡으로 감정을 추슬렀다. 그리고 짧게 욕설을 내뱉었다. 사무실로 돌아온 권지헌은 휴대폰을 꺼내 강시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헌아, 무슨 일이야?" "허설아, 누구랑 결혼했어?" 전화기 너머 강시우는 권지헌의 의도를 전혀 알 수 없는 물음에 얌전히 답할 수밖에 없었다. "나도 몰라. 외국에서 혼인신고 했대…… 임신한 걸 알고 그냥 결혼했다던데 나도 설아 남편 본 적 없어." "언제쯤 일이야?" 강시우는 잠시 우물쭈물 망설이다가 가까스로 답했다. "그, 그게 너랑 헤어진 뒤에 설아가 남편이랑 같이 해외에 갔다고 들었어……" 강시우도 더는 감히 말하지 못했다. 권지헌과 헤어지자마자 초고속 결혼과 임신이라니. 아무리 권지헌이 허설아를 좋아하지 않았어도 다른 남자와 바람을 피웠을 수 있다는 건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다. 강시우가 무언가 더 말하려는데 권지헌이 먼저 전화를 끊었다. 전화가 끊긴 신호음에 강시우는 도리어 안도의 숨을 쉬었다. 권지헌이 계속 캐물으면 어떻게 답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한참 고민하던 강시우는 결국 허설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지헌이가 네 남편 얘기 물어봤어." 바로 허설아의 답장이 도착했다. "안타깝게도 우리 남편은 게이가 아닐 거야." 강시우는 말문이 막혔다. '그게 포인트가 아니잖아?'두 사람이 어쩌다 또 만났는지 묻고 싶었지만 잠시 고민하던 강시우는 진흙탕에 발을 들이지 않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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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대학 시절, 강지연은 권지헌을 보러 건영대에 자주 들락날락했다. 매번 갈 때마다 오빠인 강시우를 만나러 왔다는 핑계를 대곤 했다. 그때 권지헌 곁에 늘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는 여자를 종종 보곤 했다. 키가 크고 몸매도 좋고 화려한 옷차림에 한낮의 태양처럼 찬란하고 눈부신 여자는 누가 봐도 귀하게 자란 티가 났다. 강지연은 강시우를 통해 그 여자가 바로 권지헌 여자친구이자 미대생인 허설아라는 걸 알게 되었다. 차갑고 고고하고 기품 넘치는 권지헌이 보기만 해도 속물 같고 제멋대로인 재벌 집 딸과 사귈 줄은 아무도 몰랐다. 강시우는 권지헌이 가난하긴 하지만 허설아가 돈을 펑펑 쓰면서 만나는 거라 했고 강지연은 그 말을 믿었다. 그러다 언젠가 협력하면서 권지헌이 사실은 권씨 가문 장손이고 미래 권율 가문의 후계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강지연은 권지헌과 허설아가 잠깐 즐기는 사이일 뿐이라고 확신했다. 나중에 권지헌에게서 그런 얘기도 들었지만 웬일인지 강지연은 전혀 기쁘지 않았다. 권지헌이 고개를 들고 싸늘하게 쳐다보았다. 강지연은 몸서리를 쳤다. 권지헌이 젓가락을 탁 내려놓고 일어나며 말했다. "올라갈게요. 앞으로 꽃 선물할 거면 내 핑계 대지 마요." 박희수는 언짢은 기색으로 소리쳤다. "그게 무슨 말이야? 내가 지연이에게 꽃 좀 선물한 게 뭐가 그렇게 못마땅해?"권지헌은 이미 위층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는 강지연의 눈에는 미련이 가득했다. 박희수가 강지연의 손을 잡고 위로했다. "지연아, 방금 네가 말한 허설아라는 사람 누구야?" 박희수는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었다. 강지연은 방금 말실수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모처럼 권지헌을 만났는데 화나게 한 것이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오래전 동창이에요. 어머님, 방금 지헌 오빠에게 권율 그룹에서 인턴으로 일하고 싶다는 말 못 했는데 혹시 반대하는 건 아니겠죠?" "그게 뭐 어렵다고 그래. 이따가 내가 말해줄게." "고마워요, 이모." -위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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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권지헌은 서랍을 열고 알레르기 약 포장지를 뜯어 약을 한 알 삼켰다. "알레르기예요."박희수는 권지헌 목에 난 자국을 보고 드디어 권지헌에게 여자 친구가 생겼는데 집에 데려오기 불편한 거라 잠시 기대했다. 그런데 알레르기일 줄이야. ……박희수는 약간 실망한 듯했다. "지헌아, 지연이가 회사에서 인턴으로 일하고 싶대. 네가 자리 마련해줘." "정식 입사 절차 밟으라고 해요. 면접만 통과하면 돼요." 박희수는 언짢아하며 불만을 토로했다. "지연이도 명문대 출신인데 인턴으로 입사하는데도 절차 밟아야 해? 지헌아, 좀 그냥 봐주면 안 돼?" 권지헌은 눈꼬리를 살짝 치켜올렸다. "안 돼요." 강지연은 외모도 예쁘고 집안도 수준이 나름 맞는 편이고 무엇보다 몇 년째 권지헌을 좋아했다. 도대체 뭐가 싫다는 걸까? 권지헌을 쳐다보던 박희수는 보면 볼수록 왠지 불안해져서 목소리 톤을 높이며 물었다. "지헌아, 너 혹시…… 남자 좋아하는 거 아니지?" 권지헌은 피곤한 듯 말없이 미간을 꾹꾹 누르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저 여자 친구 있었어요." 박희수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더 이어 묻기도 전에 권지헌이 한 마디 덧붙였다. "동성애 경향은 대체로 유전이에요. 제가 의심되면 아빠한테 가서 물어보세요." 박희수는 말문이 턱 막혔다. 도대체 무슨 소리하는 거야! 박희수는 화를 낼 수도 안 낼 수도 없이 허탈해졌다. 그냥 권지헌이 다 먹은 접시를 챙겨 밖으로 나갔다. 계속 방에 있으면 권지헌 때문에 속 터져 죽을 것 같았다. -다음날. 사촌누나 부탁으로 조카 데리러 온 권지헌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주변 시선을 한눈에 받았다. 조각 같은 얼굴에 늘씬한 다리로 럭셔리카에 기대선 모습은 한없이 우아하고 분위기가 넘쳐 어딜 가든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누군가는 연예인이 촬영하는 게 아닌지 묻기도 했다. 조카보다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어린이집 선생님이 먼저 달려왔다. "혹시 서준이 보호자님 되시나요? 유치원 다른 어린이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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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전서준이 연희를 놀린 건 연희가 예뻐서였다. "네가 나 용서해주면 앞으로 어린이집에서 내가 너 지켜줄게. 절대 아무도 너 건드리지 못할 거야." 전서준은 이번 일 때문에 연희 엄마가 연희를 전학 보낼까 봐 두려웠다. 사실 허설아도 잠깐 그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다른 어린이집에 가도 똑같은 일을 겪지 않을 거라는 보장은 없었다. 허설아는 다정하게 연희의 의견을 물었다. "연희야, 전학 가고 싶어? 아니면 계속 여기 있을래?" 잠시 생각하던 연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님이랑 다른 친구들은 다 좋아요." 허설아도 약간의 사심이 있었다. 이번 일을 겪고 난 뒤, 권지헌이 미안한 마음에 어떻게든 단속할 테니 연희도 어린이집에서 전서준 같은 말썽꾸러기를 다시는 만날 일 없었다. 전서준도 사과할 줄 아는 걸 보면 답이 없는 아이는 아니었다. 집 근처 골목에 도착하자 허설아는 권지헌에게 차를 세워달라고 했다. 허설아는 별다른 말 없이 연희를 데리고 떠났다.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권지헌은 뒷모습만 봐도 허설아가 지금 화났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몇 년 전과 많이 달라진 허설아는 마치 단단한 갑옷으로 자신을 감싸고 있는 듯했지만 성격과 사소한 버릇들은 여전히 예전 그대로였다. 화가 나면 늘 이렇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예전의 허설아는 권지헌에게 화내기 미안해서 항상 화를 억누르고 스스로 삭인 뒤 다시 권지헌을 찾아가곤 했다. 권지헌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허름하고 오래된 재개발 지역의 낡은 아파트로 월세는 싸지만 회사까지 통근 시간이 적어도 한 시간이 걸렸다. 허설아가 지금 여기서 산다고? 남편이 정말 무능력한 모양이다. 권지헌은 속에서 미묘하게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고 핸들을 틀며 전서준에게 물었다. "너 연희 자주 괴롭혔어?" 전서준은 입만 삐죽거리다 몇 번이나 물어서야 겨우 답했다. "아빠가 없다고, 아빠가 버린 아이라고 했어요. 진짜예요, 삼촌. 나 연희 아빠 한 번도 본 적 없어요." "그리고 평소에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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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허설아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커튼을 확 젖혔다. 싸늘한 얼굴로 여전히 씩씩거리며 막말을 퍼붓던 김현숙을 바라보았다. "함부로 뱉은 말 자식들한테 독이 되어 돌아올 수도 있어요." 마스크를 쓰고 있어 작은 얼굴이 반 넘게 가려졌고 분노가 일렁거리는데도 예쁘게 빛나는 두 눈만 보였다. 김현숙이 언성을 확 높였다. "너랑 무슨 상관이야?" 옆에 있던 의사가 약을 들고 들어왔다. "뭐 하는 겁니까? 진료 안 보실 거면 나가세요. 여기는 병원이지 시장통이 아니에요.”불면 날아갈세라 귀하게 키운 손자가 아픈 걸 전부 연희 모녀에게 화살을 돌리던 김현숙은 낯선 여자의 참견에 더욱 분노가 치밀었다. 김현숙이 손을 들어 허설아의 뺨을 때리려 했다. 행동이 어찌나 빠른지 연희까지 안고 있던 허설아는 눈을 꼭 감은 채 고개를 옆으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미간을 살짝 찌푸린 권지헌이 김현숙의 손목을 꽉 잡아 거칠게 옆으로 내쳤다. 눈을 뜬 허설아는 잠시 멈칫했다. '권지헌이 왜 여기 온 거야?' '방금 통화에서 아내와 아이가 있다는 소리에 부랴부랴 달려온 걸까?'권지헌의 등장에 김현숙은 기세등등하던 모습이 온데간데없이 입을 꾹 닫은 채 옆에 서 있었다. 권지헌은 김현숙을 힐끗 쳐다보더니 바로 시선을 돌렸다. "서준인 어때?" 숨이 가쁜 걸 뛰어온 게 분명했다. 권지헌이 전서준을 많이 걱정하고 있다는 걸 보아낼 수 있었다. 허설아는 그 틈을 타 연희를 안고 수액 맞으러 자리를 떴다. 유혜원이 설명했다. "밤에 많이 먹고 체해서 열이 좀 나는 거야. 큰 문제는 아니야." 유혜원이 전서준을 혼내려 할 때마다 김현숙이 튀어나와 막아선 탓에 전서준은 그저 소스라치게 소리만 질러댔을 뿐이었다. "지헌이 너는 여기 웬일이야?" "알레르기 약 받으러." 운전 중에 뒷좌석에 있는 연희 외투를 발견한 권지헌은 허설아와 통화를 하다가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란스러운 소리에 바로 응급실로 뛰어온 것이었다. 조금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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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능력 있으면 직접 대표님한테 얘기해서 부서 바꿔 달라고 해요. 그게 아니면 비서팀에 들어온 이상 비서팀 규칙을 지켜요." 강지연이 밖에 나가서 실수라도 하면 다 비서팀 망신이었다. 권지헌은 비서가 일곱, 여덟 명은 되었기에 모든 비서가 다 만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강지연 같은 인턴 사무실은 권지헌과 같은 층도 아니었다. 난데없는 호통에 화가 치민 강지연은 연장까지 한 네일로 키보드를 두드리는 게 답답했는지 아예 옆으로 확 밀쳐 두었다. 그리고 휴대폰을 꺼내 방금 있었던 일을 강시우에게 곧이곧대로 얘기했다. 강시우도 정신없이 바빠서 강지연을 달래줄 여유가 없었다. "네가 좋아하는 일식집 배달시켰어. 동료들 것도 시켰으니까 같이 먹어. 예의 잘 지키고 지헌이 너무 난처하게 하지 마." 강지연은 너무 어려서 아직 사회생활을 너무 몰랐다. 허설아는 시간 맞춰 엘리베이터를 타고 주차장으로 가서 권지헌 차를 찾았다. "대표님, 도착했습니다." "2분." 잠시 뒤, 권지헌이 전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와서 손에 든 차 키로 문을 열었다. 허설아는 허리를 숙여 차에서 연희의 외투를 꺼냈다. "감사합니다, 대표님. 폐 끼쳤습니다." 권지헌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퇴근하고 시간 있어요?" "네?" "따님 옷 좀 같이 사러 갈까 해서요. 어제 일에 대한 보상으로." 어제 전서준이 연희의 옷을 찢어버렸기 때문이다. 허설아는 연희의 옷을 안고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괜찮습니다. 영수증 보내드릴게요." 새로 살 것까진 없었다. 연희의 옷들이 비싼 건 아니지만 옷이 적진 않았다. 어차피 아이들은 빨리 자라서 자주 새 옷을 사야 했다. 무엇보다 허설아는 더 이상 권지헌과 엮이고 싶지 않았다. 뒷좌석에 놓여있었던 탓에 외투에서 권지헌 차 안 향수 냄새가 물들어 있었다. 고급스러우면서 과하지 않고 또 차가워 보이는 우디한 향이었다. 권지헌의 이미지와 똑같았다. 허설아는 입술을 깨물고 속으로 수십 번은 되뇌었다. '권지헌은 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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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강시우는 배달을 아주 넉넉하게 주문했다. 강지연이 비서팀 직원들에게 다 돌렸지만 누구 하나 받지 않았다. 직원들 눈에는 일밖에 없었다. 그리고 권율 그룹이 주는 높은 연봉만으로 충분히 고급 요리를 사 먹을 수 있었다. 오전 내내 겨우 보고서를 하나 처리한 강지연은 그것마저 실수투성이었다. 꾹 참고 한참을 가르치던 조민규는 강지연의 시선이 줄곧 임원 전용 엘리베이터를 향해 있는 걸 발견했다. 화가 치민 조민규가 일그러진 얼굴로 말했다. "난 구내식당 갈 거니까 필요 없어요." 사람들이 받지 않는데도 강지연은 전혀 이상한 낌새를 느끼지 못하고 되레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지헌…… 대표님은 점심 식사했나요? 제가 좀 가져다줄게요." 단칼에 거절하려던 조민규는 순간 다른 생각이 들었다. '말끝마다 대표님을 오빠라고 부르는데 혹시 정말 특별한 사이인 걸까?'조민규도 굳이 말리지 않고 강지연이 일식 요리를 들고 위층 대표 사무실로 가도록 내버려두었다. 강지연이 신나서 올라가자 조민규 맞은편에 있던 비서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방금 서류 가져다드리러 갔는데 대표님 기분이 안 좋아 보였어요. 강지연 씨 저렇게 막무가내로 올라가면……" 조민규는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출근해서 기분 좋은 사람이 있겠어? 어차피 우리도 대표님 성격을 모르는데 누가 대신 떠보는 것도 나쁘진 않지." 옆에 있던 비서가 숨을 들이켜며 물었다. "혹시 대표님이 화내시면 어떡해요?" 조민규는 양손을 벌리고 어깨를 으쓱하며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인턴은 원래 당돌한 법이지." 직원들은 그제야 알겠다는 표정이었다. 역시 리더는 생각이 남다른 법이었다. 조민규가 비서팀 리더가 될 수 있었던 건 다 이유가 있었다. 강지연은 노크하고 안으로 들어가서 일식 요리를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지헌 오빠, 내가 점심 주문했어." 고개를 들자 미간을 찌푸린 권지헌 얼굴에 언짢은 기색이 역력했다. "누가 들어오라고 했어?" "점심 가져다주러 온 거야……” "나가.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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