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거 엄청 맛있어요. 다음에도 또 해주세요.”“그리고 이건 별로예요. 블랙 리스트.”반우희는 한입씩 맛보며 평가했다.부승원은 전날 밤 반우희가 ‘뭐든지 해주겠다는 말’과, ‘세상에서 제일 좋아한다’ 말했었던 건 모두 거짓임을 알아차렸다.잠자리가 끝나고 나니 반우희는 또다시 머리 위로 기어오르려 했다.이젠 머리 위에서 밥까지 먹고 덩실덩실 춤도 췄다.“어어, 입 더 크게 벌려요.”반우희는 계란을 흰자만 먹었고 노른자는 바로 부승원의 입에 넣었다. 부승원은 하다 하다 잔반 처리까지 맡고 있었다.‘다음엔 절대 넘어가지 않을 거야.’“자 이것도 먹어요.”‘뭔데?’‘아. 시금치.’“안 먹을 거야...”그러나 반우희는 냅다 입안으로 욱여넣었고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음식 낭비하면 벌받아요.”“...”부승원은 굳은 얼굴로 말없이 입안의 음식을 삼켰다.고개를 숙이자 계획에 성공해 웃고 있는 반우희가 보였고 부승원은 티슈를 한 장 뽑아 반우희의 입가를 닦았다. 그리고 여전히 반우희의 등받이 신세를 자처하고 있었다.반우희는 아침을 든든히 챙겨 먹었고 부승원은 더 이상 잔소리하기도 지쳐 스스로 반우희가 먹은 아침상을 치웠다.부승원이 방을 나서자 반우희는 몰래 화장실로 향했다.그리고 한참 뒤 부승원이 돌아오자 맨발로 뛰쳐나와 등 뒤로 부승원을 꼭 껴안았다.부승원은 그 자리에 멈춰 섰다.“더 안 자도 돼?”반우희는 얼굴을 등에 비비며 말했다.“혼자 자는 건 싫어요.”부승원은 무의식적으로 반우희의 손을 잡았고 잠시 고민하다가 반우희를 자신의 앞으로 끌어당겼다.반우희는 거의 습관적으로 부승원의 목에 팔을 걸었고 또 품을 파고들었다.말랑해진 분위기에 차갑던 부승원도 녹아내려 갔다.그래서 반우희의 허리에 손을 올리고 낮은 소리로 말했다.“침대 위로 누워. 난 그 옆에서 서류 볼게.”“일하지 마요.”반우희는 애교 섞인 목소리로 졸랐고 빠르게 턱에 뽀뽀했다.“그냥 나만 보고 있으면 안 돼요? 다른 건 하지 말고요.”하룻밤이 지나고 부
소원대로 침대로 향하자 반우희는 아주 만족스러운 얼굴을 했다.‘그럼 그렇지. 내가 누군데? 고작 부승원 정도는 아주 쉽다고!’‘흥.’반우희는 입이 귀에 걸렸으나 가식적으로 창밖을 가리키며 말했다.“지금 대낮부터...”“...”부승원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반우희의 턱을 움켜쥐었다.“대낮인 걸 알고는 있어?”그러자 반우희는 가볍게 다리를 굴렀다.‘그럼, 뭐?’부승원은 얼굴만 봐도 반우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었고 혼내고 싶다가도 얼굴만 보면 마음이 약해졌다.그렇게 대치 상태에 놓이고 반우희는 또 장난하려 했다.그러자 부승원은 바로 반우희의 입에 키스하고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이에 반우희는 작게 신음을 흘렸고 목에 팔을 건 채로 호흡에 맞췄다.움직임은 점점 커지고 뭐든지 빠르게 배우는 부승원은 하룻밤 사이에 반우희의 스탯을 모두 학습해 바로 반우희를 자극했다. 반우희는 몰래 숨을 몰아쉬다가 또 부승원에게 잡혀 키스를 이어갔다.반우희는 자신의 꾀에 넘어간 격이 되었고 부승원의 가슴팍을 밀어내며 말했다.“그만해요. 난 조금 쉬어야겠어요.”부승원은 반우희의 손목을 잡고 얼굴 옆으로 내려두었다.‘거절.’반우희는 너무 힘들어 겨우 버티다가 기회를 보아 도망가려 했다.그러나 키스는 끝나지 않고 부승원의 손아귀 아래에서 도망갈 구멍은 보이지 않았다.부승원은 반우희를 지그시 쳐다보다가 턱 끝을 지그시 잡은 채로 숨을 돌릴 시간을 주었다.반우희는 침을 넘기는 부승원을 보며 온몸의 힘이 스르르 풀렸다.그리고 슬쩍 내빼려는데 부승원이 더 가까이 다가와 손목에 키스했다.반우희는 눈만 깜빡거렸고 온몸에 전기가 통한 것처럼 찌르르해졌다.갑자기 다정해진 부승원은 정말 마다할 수가 없었다.그래서 반우희는 입술을 꾹 깨문 채로 가슴팍을 밀어내며 말했다.“밥 금방 먹어서 그렇게 누르면 불편해요.”부승원은 심호흡을 하더니 의미심장하게 반우희를 바라봤다.그리고 순식간에 휙 몸을 돌리더니 서로의 위치를 바꿨고 반우희는 부승원의 몸 위로 올라탄
늦은 오후, 양시연이 전화를 걸어오자 부승원은 드디어 정신을 차리고 정인 그룹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반우희는 코알라처럼 매달려 저녁을 차려달라고 졸랐다.“돌아와서 해줄 게. 지금은 일단 회사로 가봐야 할 것 같아.”“그럼, 나랑 같이 가요.”“더 안 쉬어도 괜찮겠어?”반우희는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오후 내내 쉴 만큼 쉬었는걸요.”부승원은 반우희를 실컷 괴롭히고 나니 이젠 반우희가 하자는 대로 모두 따라줬다. 그래서 반우희가 천천히 옷을 갈아입는 걸 기다렸다가 나란히 아래층으로 향했다.신선한 공기를 마시고 나니 반우희는 기분이 퍽 좋아져 회사로 가는 내내 조잘조잘 떠들었다.회사 아래에 도착하고 보니 직원이 적지 않게 모여 있었다.부승원은 차량을 깊숙한 곳에 주차하고 차에서 내리기 전 반우희에게 골프용 모자를 씌웠다.반우희는 그 뒤를 졸졸 따르며 푸념했다.“이 모자는 너무 크잖아요!”부승원은 손을 잡다가 어깨를 감싸며 모자를 다시 꾹꾹 눌러줬다.“그리고 마스크도 너무 불편하고 답답해요.”반우희의 말에 부승원이 답했다.“다음엔 좋은 거로 챙겨줄 테니까 오늘만 봐줘.”반우희는 몰래 입꼬리를 올렸다.“배고파요...”“올라가면 먹고 싶은 거 시켜줄게. 미리 먹고 싶은 거 생각해 둬.”반우희는 바로 신이 났다.맛있는 음식을 먹을 생각에 신이 난 게 아닌, 부승원이 자기 말대로 고분고분 따라주는 것에 신이 났다.엘리베이터에 오른 뒤 반우희는 몰래 부승원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일찍 꼬실 걸 그랬어요.”부승원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몇 번 잤다고 이렇게 다정해지다니. 적응이 안 되는걸요?”“변호사님은 의외로 마음이 약한 사람인가 봐요?”“그런데 처음 그때에는 왜 모른 척했지?”반우희가 어느새 진지하게 고민에 빠지자 부승원은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대표 전용 엘리베이터라 다른 사람은 없었지만 반우희가 아무렇지 않게 이런 말을 하는 건 용납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계속 말을 이어 하려는 반우희의
“양 대표님, 저도 개인 시간이 필요하고 휴가도 필요한 사람이에요.”양시연은 연정훈에게 전화를 걸어 입을 삐죽거리며 방금 부승원이 했던 말을 따라 했다.연정훈은 소파에 앉아 그 말을 들으며 입꼬리를 올렸다.“짧은 통화였는데 그사이에 우희 씨를 몇 번이나 훔쳐봤는지 알아요? 무슨 어린아이 돌보는 것처럼 한시도 가만히 두지를 못하더라고요.”연정훈은 웃음이 터졌다.“넌 그렇게 먼 곳에서도 다른 사람 연애사에 왜 이렇게 관심이 많아?”양시연은 핸드폰을 높게 들고 연정훈을 향해 웃어 보였다.“내가 언제요? 그냥 해본 말이에요.”그리고 주머니에서 꾸깃꾸깃 못생긴 양모 펠트 열쇠고리를 꺼내 연정훈 앞으로 흔들었다.“이렇게 못생긴 인형 선물 받고 웃느라 다른 사람한테 관심을 돌릴 여유도 없는걸요.”연정훈의 입꼬리가 점점 굳어졌다.“벌써 받았어?”“네. 창수 삼촌이 직접 받았는데 무슨 귀중한 선물인 줄 알다가 안의 내용물 확인하고 휙 버릴 뻔했대요.”양시연은 그 말을 하면서 인형을 다시 눈앞으로 흔들었다.“이 인형 누구예요?”“시연이 너잖아.”“말이 되는 소리를 해요!”양시연은 벌떡 앉으며 손을 휘휘 저었다.“이 인형 눈 좀 봐요. 눈 크기도 다른데 난 이렇게 생기지 않았어요.”“일부러 그렇게 디자인한 거야. 짝짝이 눈이 얼마나 귀여운데.”양시연은 어이가 없었다.그러나 막무가내인 연정훈의 말에도 양시연은 웃음이 새어 나왔고 못생긴 인형이 꽤 마음에 들기도 했다.벌써 몇 시간 동안 손에 꼭 쥐고 있었더니 인형에 온도가 느껴졌다.연정훈도 이런 양시연을 알고 있었기에 미소를 지은 채로 말했다.“돌아오면 더 예쁘게 만들어줄게.”“연 대표님이 얼마나 바쁘신 몸인데 매일 집에서 양모 펠트나 만들고 있으면 다른 사람이 웃어요.”“내가 내 아내를 위해 만들어 준다는데 누가 웃어? 난 상관없어.”양시연은 기분이 퍽 좋아졌다.그래서 배를 어루만지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점점 태동이 선명하게 느껴져요. 집에 돌아가면 만지게 해줄 게요.”핸드폰
‘만났는데 다른 사람인 줄 알았다고?’연정훈은 갈피를 잡지 못했으나 점점 서운함에 입을 삐죽이는 양시연을 보며 농담이 아님을 알아차렸다.막 신혼이고 양시연이 아이도 가졌으니 연정훈의 삼십 인생에서 지금이 가장 애틋하고 사랑이 넘치는 시기였다. 양모 펠트 인형을 만들다가 손가락에 구멍이 나도 상관이 없었고 양시연이 조금이라도 서운해하는 걸 용납할 수가 없었다.보아하니 양시연은 정말 섭섭한 게 있었고 솔직하게 말하기엔 부끄러워하는 것 같았다.연정훈은 머리를 빠르게 굴리다가 ‘다른 사람’이라는 키워드에 누군가가 떠올랐다.‘설마... 소현주?’“우리가 처음 만난 장소라면 아마도 강의실이겠지?”연정훈이 떠보듯 물어보자 양시연이 눈을 흘겼다.“글쎄요. 나도 기억이 잘 안 나서.”연정훈이 질문을 이어갔다.“넌 그때 주지혁 만나지 않았어?”“자꾸 쓸데없는 얘기로 대화 돌리지 마요.”양시연이 정확하게 아픈 곳을 찌르자 연정훈은 물을 한 모금 들이켜며 시선을 피했다.“내가 언제 대화를 돌렸다고 그래? 이미 지난 일에 질투도 하면 안 돼?”양시연은 쯧 하고 혀를 찼다.그리고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대며 우울한 얼굴로 배를 쓰다듬었다.‘이게 다 무슨 일이래.’도둑 맞힌 물건을 몰래 가져왔는데 지금 와서 본인이 원래 주인이라 당당하게 말하기도 난감해졌다.그때 연정훈이 또 떠보듯 물었다.“내가 멍청하다고 한 건 요즘 내가 어떤 잘못을 저질러서 그런 거야? 아니면 과거에 내가 저지른 일을 가리키는 거야?”양시연은 대답이 없었고 연정훈을 바라보는 대신 양모 펠트 인형을 꾹꾹 눌렀다.그러자 연정훈은 바로 눈치를 챘다.“과거구나.”양시연이 입꼬리를 올렸다.“과거에 있은 일 때문에 나온 말이긴 해도 요즘 정훈 씨가 잘했다고 할 수 있어요?”양시연은 못생긴 인형을 가리키며 말했다.“이것 좀 봐요. 정말 못생겨서.”“못생긴 건 그렇다 해도 내 성의를 봐서 받아줘. 우리 양 대표님이 부디 선심을 베풀어 나를 용서해 주길 바라.”“무슨 선심.”양시연이
“당신이 나를 좋아하는 이유는 정말 하찮은 것 같아요.”양시연이 투덜댔다.“그냥 내가 예쁘니까 좋아하는 거잖아요.”“그러면 네가 못생겼다고 해서 좋아한다고 말할 수는 없잖아?”“내면을 좋아한다고 해야죠.”“너는 순수하고 착한 사람이고 마음속엔 온통 나만 있는데 이게 내면을 좋아하는 게 아니야?”양시연이 반문했다.“그러면 소현주 씨는요? 처음에 소현주 씨를 좋아했던 이유가 뭐였어요?”연정훈은 갑자기 머리가 어지러워지며 진지한 표정으로 종이와 펜을 꺼냈다.“뭐 하는 거예요?”양시연이 의아한 표정으로 묻자 연정훈이 답했다.“프로젝트에 큰 문제가 생기면 몇 가지 방안을 세워서 최적의 선택을 투입하지.”양시연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터뜨렸다.‘이 교활한 인간 말로만 날 달래려는 거잖아.’양시연은 일부러 표정을 가다듬고 단호하게 말했다.“소현주 씨의 첫인상을 한 마디로 묘사해 보세요.”연정훈은 미간을 찌푸린 채 다시 물을 마셨고 심지어 연달아 몇 모금씩 꿀꺽꿀꺽 삼켰다.양시연이 재촉했다.“처음 소현주 씨와 편지를 주고받았을 때의 느낌을 말해보세요.”연정훈은 찻잔을 내려놓고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지금 내 아픈 곳을 찌르는 거잖아.”양시연은 긴장하며 물었다.“왜요?”“소현주와 편지 주고받을 때 내가 눈이 멀어서 소현주가 순수하고 영감을 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지. 그런데 결국...”연정훈은 냉소적인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그건 정말 큰 웃음거리였어.”‘순수...’이번엔 양시연이 물을 마시고 입술을 꽉 깨물며 일부러 말했다.“소현주 씨는 순수하고 나는 단순해서 당신이 나를 좋아하는 이유는 소현주 씨와 비슷하다고 느껴서였나요?” ‘뭐라는 거야.’연정훈은 과거의 일을 단번에 떨쳐내며 반박했다.“내가 그렇게 말한 적 없어. 말뜻을 바꾸지 마.”양시연은 눈을 굴리며 일부러 화난 척하며 코웃음 쳤다.“아니에요? 그러면 왜 그렇게 긴장해요?”“너 때문에 긴장하는 거지.”“...”“너 지금 배도 많이 커졌는데 내 곁에
“제가 예전에 배운 보잘것없는 천문 지식으로 연 대표님께 지혜롭다고 칭찬받을 만한 자격이 있나요?”양시연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상대적으로는 그렇지.”연정훈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천문학 전공은 아니지만 네가 그런 지식을 알고 있어서 꽤 놀랐어.”양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겠죠. 원래는 그냥 단순한 교류라고 생각했는데 정훈 씨가 저랑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눌 수 있어서 순간 레벨이 올라간 것 같죠.”“...”양시연은 연정훈을 힐끔 쳐다보며 미소인지 아닌지 모를 모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그러면 정훈 씨와 소현주 씨는 진짜 화면 너머로 순수하게 온라인 연애를 한 거네요.”연정훈은 질투를 느끼며 잠시 멈칫한 뒤 말했다.“왜 자꾸 말끝마다 소현주를 언급하는 거야?”“정훈 씨의 옛일을 들춰내고 있잖아요.”“그렇다고 계속 소현주랑 나를 비교하지는 마.”“나는...”“나는 네가 항상 소현주랑 비교하는 게 싫어.”양시연은 잠시 놀랐고 연정훈은 진지한 표정으로 솔직하게 말했다.“넌 내 아내고 내가 마음속에 가장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야. 자꾸 너 자신을 한심한 사람과 비교하는 게 난 싫어.”양시연은 그가 소현주에 대해 이야기할 때마다 소현주에 대한 감정이 혐오에 가까운 것을 느꼈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그 감정을 마주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연정훈이 내려간 입꼬리를 바라보며 양시연은 이번에야말로 연정훈이 소현주를 얼마나 혐오하는지 알았고 심지어 소현주의 그림자조차 양시연에게 닿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진심으로 깨달았다.양시연은 한때 그렇게 깊었던 사랑이 어떻게 이 지경까지 오게 되었는지에 대해 깊은 생각에 잠겼다.연정훈은 다시 말을 이었다.“만약 내가 항상 자신을 주지혁 씨와 비교한다면 넌 분명 내가 이상하다고 생각할 거야.”양시연은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맞네.’주지혁도 한때 양시연과 함께 결혼을 꿈꾸던 사람이었지만 결국 그녀에게는 그저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 만약 연정훈이 계속해서 주지혁을 언급했다면 양
‘소현주가 죽었다고?’갑작스러운 소식에 양시연은 순간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닐까 싶었고 연정훈도 잠시 멍하니 있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어떻게 죽었는데?”“자살입니다.”임성원이 차분히 답했다.“소현주 씨를 24시간 감시하도록 사람을 붙여뒀습니다. 그런데 잠깐 식사를 하러 간 사이에 소현주 씨가 플라스틱 숟가락을 부러뜨려 날카로운 끝으로 자신의 경동맥을 찔렀습니다.”양시연은 무심코 그 장면을 떠올렸다가 저도 모르게 구역질이 나왔다.연정훈은 양시연을 한 번 바라보더니 스피커폰을 끊고 임성원에게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자고 한 뒤 그녀의 상태를 살폈다.양시연은 황급히 휴지로 입을 막으며 화면 쪽으로 괜찮다는 손짓을 보냈지만 속에서 올라오는 메스꺼움은 점점 더 심해졌다. “우웩.”참으려 했지만 속이 뒤틀리는 것을 이기지 못한 양시연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달려갔다.콸콸 쏟아지는 물소리 사이로 그녀는 고개를 숙여 입을 헹궜지만 머릿속에 떠오르는 붉은 핏물의 이미지에 속이 더 울렁거렸다.“시연, 괜찮아?”연정훈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고 양시연은 머릿속에 떠오르는 끔찍한 상상을 억누르려 애쓰며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양시연이 화장실을 나가기도 전에 침실 문이 열리며 양지원이 급히 들어왔다.“시연아?”양시연이 문 쪽을 바라보자 양지원은 양시연의 얼굴이 물에 젖어 흥건하고 창백한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무슨 일이야?”“괜찮아요. 그냥 입덧이 좀 심해서...”양지원은 양시연을 부축하며 물었다.“연정훈이 갑자기 전화해서 네가 아프다며 당장 와 보라고 하길래 왔는데 왜 이렇게 심하게 토한 거야?”양시연은 연정훈이 영상통화를 끊었는지 모르겠지만 후속 이야기가 궁금해 빨리 알아야 했기에 입꼬리를 올리며 양지원을 안심시켰다.양지원은 미간을 찌푸렸다.“싸운 거야? 연정훈이 너 화나게 했어?”“아니에요.”양시연의 얼굴에 약간의 혈색이 돌아왔다.“그냥 대화하다가...상상력이 너무 지나쳐서 갑자기 속이 울렁거렸어요."양지원은 믿지
양혁수는 변여름을 품에 안은 채로 서재 창가에서 예쁜 노을과 노을이 비친 잔잔한 호숫가를 바라봤다.“시연 언니 컨디션은 괜찮아요?”변여름의 질문에 양혁수가 대답했다.“좋아 보이던데. 컨디션도 그렇고 기분이 아주 좋아 보였어.”변여름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또 양혁수를 쳐다봤고 양혁수가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왜 쳐다봐?”“오빠, 행복해요?”양혁수는 최근 몇 달 동안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낸 걸 떠올리며 품 안의 변여름을 꼭 껴안았다.“행복하지.”“정말요? 왜요?”“왜긴...”두 눈을 감고 잠시 뜸을 들인 양혁수가 대답했다.“아침에 누가 나한테 해물 제철 탕을 해준다고 했거든.”“...”변여름은 손을 뻗어 익숙하게 양혁수의 두 볼을 잡아당겼다.양혁수는 변여름이 뭘 하든 가만히 받아줬고 또 변여름의 이마에 짧게 키스했다.양혁수의 눈동자에는 오직 변여름만 담겼고 변여름을 향한 사랑이 말하지 않아도 느껴졌다.변여름은 입꼬리를 올린 채로 양혁수의 목에 팔을 걸었고 또 빠르게 떨어지며 말했다.“그러고 보니 오빠, 아직도 나한테 좋아한다는 말도 안 했잖아요.”양혁수는 아주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좋아해.”그리고 고민하다가 말을 고쳤다.“내가 널 좋아해.”변여름은 금세 헤벌쭉해졌고, 첫사랑이고 뭐고 잊어버린 채로 양혁수의 두 볼에 번갈아 뽀뽀했다. 그리고 양혁수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인 듯 품에 안고 떨어지지 않았다.“오빠.”양혁수는 고개를 살짝 숙여 이어질 변여름의 말을 기다렸다.“난 오빠가 너무너무 너무 좋아요.”양혁수는 이런 변여름의 머리를 쓰다듬었고 나란히 소파에 기대앉았다.‘아, 삶이 이렇게 행복할 수도 있구나.’‘너무 행복해.’한강시에서의 삶은 점점 더 흥미진진해졌다. 몇 년 전만 해도 양혁수는 사람을 자주 만나지 않았지만 변여름과 함께한 뒤로 변백호네 가족이 시도 때도 없이 집을 들락거렸다.변여름은 한강시 연구실에서 고작 6개월의 시간을 보냈지만 벌써 성공적으로 데이터를 확보했다.그래서 남은 6
변여름은 2층 베란다에서 뛰쳐나오며 양혁수와 양지원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마침, 요즘 한가한데 여름이 데리고 경인시로 놀러 갈게요. 시연이도 볼 겸.”‘한가하긴! 고양이 배변도 아직 치우지 않았는데!’고개를 돌린 양혁수는 변여름이 입을 삐죽이고 있는 게 보였다.그래서 핸드폰을 잠시 귀에서 떼고 변여름을 향해 걸어오며 말했다.“서재 다 치워뒀으니 거기에서 논문 보면 돼.”“네.”변여름은 무표정으로 고개를 휙 돌렸고 쿵쿵거리며 서재로 들어갔다.양혁수는 피식 웃었고 통화를 종료한 양지원은 다시 영상 통화를 걸어왔다. 화면에는 양지원뿐만 아니라 양시연도 함께였다.막 아이를 낳았지만 양시연은 컨디션이 꽤 좋아 보였고 죽을 먹는 중이었다.양지원이 핸드폰을 넘기자 양시연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지금 퇴근하는 거야?”“막 집에 도착했어.”핸드폰 너머로 아이들이 재잘대는 소리가 들려왔고 양승윤과 다른 아이들도 함께 있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양혁수가 잠시 숨을 고르다가 말했다.“축하해. 잘생긴 아들에, 귀여운 딸까지 생긴걸.”과거에는 도저히 입 밖으로 내뱉기 힘들었지만 정작 하고 보니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양시연은 양혁수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너도 축하해.”“엄마한테서 전해 들었어. 너랑 여름이 말이야.”양혁수는 창밖의 핑크빛 노을을 보며 가슴이 쿵쿵 뛰는 걸 느꼈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서재로 발걸음을 옮겼다.“우리 공주님 보여줄까?”“좋아.”화면을 돌리자 침대 끝에 앉은 연정훈이 아이를 안고 있었다. 주변에는 양승윤을 제외하고 꼬마가 둘이나 더 있었다.“아빠, 나도 안아보고 싶어요!”“삼촌! 예지도 안아볼래요!”‘참 시끌벅적하네.’양시연이 연정훈을 낮게 부르자 연정훈이 딸을 품에 안고 걸어왔다.그리고 화면을 통해 양혁수는 연정훈과 시선이 마주쳤고 두 사람은 무언의 시그널을 주고받았는지 또 표정을 찡그렸다.연정훈은 예전처럼 차가웠지만 제 딸을 볼 때에는 입꼬리가 내려올 줄을 몰랐다.“시간 되면 경인시로 놀러와. 시
“그 사람도 별반 다를 게 없어요. 낳아준 어머니는 뒤로 하고 장모님한테 왔잖아요.”양혁수가 투덜거리며 말했다.양시연을 향한 감정이 남아있지 않더라도 양혁수는 늘 연정훈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변여름은 조용히 그 옆에서 눈치를 살폈다.그러다가 며칠 전 변여름과 진지하게 나눴던 첫사랑 얘기가 떠오른 양혁수는 오늘 이 기회를 빌려 변여름에게 장난을 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변여름은 크게 화도 내지 못하고 입만 삐죽일 것이다.저녁 시간이 다 되어가고 연정훈이 전화를 걸어 거의 집에 다 와간다고 알렸다.변여름은 양혁수의 손을 잡고 뒤뜰에서 잡초를 손질하는 양석진의 옆으로 다가갔고 갑자기 이렇게 말했다.“오빠, 우리 산책하러 가요.”양혁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지금?”“네!”“곧 다 모일 텐데 밥 먹고 산책하러 가자.”그러자 변여름이 고개를 푹 숙이더니 눈앞에 보이는 잡초를 마구잡이로 휙 잡아 뽑았다.양혁수는 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웃음을 꾹 참았다.그때 누군가 양혁수를 불렀고 두 사람은 다시 거실로 돌아가야 했는데 변여름이 갑자기 양혁수를 벽으로 툭 밀쳤다.그러자 양혁수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벽에 기댄 채로 변여름의 턱을 잡고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첫사랑을 잊는 방법은 첫사랑을 다시 만나는 거라며? 현실보다 상상 속 첫사랑이 더 완벽하고 이쁠 테니까.”“...”‘짜증 나.’양혁수가 변여름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며 말했다.“이건 네가 말했던 거잖아.”“...”“그런데 지금 표정이 왜 그렇지? 설마 한번 뱉은 말을 다시 주워 담고 싶은 거야?”변여름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말했다.“세상에 영원한 정답은 없는 거니까요.”“그래도 어쩔 수 없잖아. 계속 피해 다니며 만나지 않을 수도 없고.”“나 질투 난다는 말이에요.”“내가 평생 시연이 좋아한다고 해도 괜찮다고 했던 사람이 누구더라?”“그건 예전이잖아요!”“그럼 지금은?”‘지금은...’변여름은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발뒤꿈치를 살짝 들어 양혁수의
새벽 다섯 시가 다 되어서야 양혁수는 변여름을 껴안고 잠이 들었다.아침이 되어도 아무도 두 사람을 깨우지 않았고 실컷 자고 일어나니 어느새 아침 열 시가 넘어가고 있었다.두 사람은 잠에서 깬 뒤에도 한참 침대에서 뭉그적거렸고 양혁수가 먼저 몸을 일으켜 아래층으로 내려가 간단하게 먹을 음식을 준비했다.양혁수가 음식을 챙겨 돌아왔을 때, 변여름은 세수하고 다시 침대에 누워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양혁수가 침대 끝자락에 앉으며 변여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뭐라도 좀 먹고 다시 자.”변여름은 지금 자신의 옷차림이 어떤지 전혀 상관하지 않고 바로 이불에서 빠져나와 양혁수의 품에 안겼다.양혁수는 서둘러 변여름의 옷매무시를 정리해 주고 눈을 감고 있는 변여름에게 한 입씩 떠먹여 줬다.변여름은 몇 입 먹더니 금방 싫증을 느꼈고 양혁수는 변여름이 남긴 걸 입에 넣었다.그런데 양혁수가 아침을 먹는 사이 변여름이 품에서 잠이 들어버렸다.‘그렇게 졸린가?’양혁수는 변여름을 다시 이불 안에 넣어주고 옷을 갈아입은 뒤 헬스장을 다녀왔다.돌아와서 샤워를 마쳤을 때도 변여름은 아직 깨어나지 않았다.양혁수는 침대 앞으로 다가가 곤히 잠든 변여름을 바라봤고 젖은 머릿결이 마를 때까지도 시선을 떼지 못했다.그러다가 본능을 못 이긴 양혁수는 수건을 내려두고 침대 옆자리로 올라갔다.변여름은 금세 이상한 점을 눈치챘고 귓가에 들려오는 양혁수의 뜨거운 숨소리에 몸을 돌려 품에 안기며 말했다.“오빠...”양혁수는 숨을 고르다가 변여름에게 속삭였다.“어디 불편한 곳은 없어?”“없어요...”변여름은 온몸에 열기가 돌았고 저도 모르게 양혁수의 어깨를 깨물었다. 양혁수가 작게 신음 소리를 뱉자 변여름도 점점 이성을 잃게 되었고 눈가가 빨개진 채로 물었다.“우리 새해 인사드리러 가야 하지 않아요?”“필요 없어. 친척들도, 친구들도 많지 않아서 상관없어.”변여름은 마지막 남은 이성으로 말했다.“우리 세운시로 가야 하잖아요.”양혁수는 새해 인사 따위는 이제 안중에 없었다.
침대 시트를 교체하지 않아 방안에는 아직도 그 향이 가시지 않았다. 양혁수는 단팥죽이 끓는 동안 서둘러 시트를 교체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단팥죽의 단 향이 코를 자극했다.양혁수는 한 그릇 따라 변여름에게 건넸고 변여름은 소파에 나른하게 누워 양혁수가 한입씩 떠먹여 주는 걸 삼켰다.그렇게 천천히 기운을 되찾은 변여름은 또다시 장난기가 발동했다.양혁수의 품에 안겨 양혁수의 핸드폰을 뒤적이던 변여름이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마주했다.양혁수는 변여름의 두 볼을 쭉 잡아당기며 이 순간의 행복을 즐겼다.그런데 변여름이 꽤 진지한 얼굴로 이런 질문을 하는 게 아니겠는가?“오빠, 정말 무슨 약이라도 먹은 거 아니에요?”양혁수는 인상을 팍 찌푸리다가 시간을 확인하고는 바로 무슨 의미인지 알아차렸다.싸늘해진 양혁수의 시선에 변여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약을 따로 챙겨 먹지 않은 거면 너무 오랫동안 금욕해서 그런 거 아니에요?”“...”양혁수는 변여름이 이어서 어떤 질문을 할지 눈에 뻔했고 미리 준비해 둔 떡을 집어 냉큼 변여름의 입에 넣었다.변여름은 입안 가득 우물거렸고 반쯤 남긴 떡은 양혁수가 처리했다.“계속 까불면 너 이거 다 먹일 거야.”변여름이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이 떡 전부요?”“...”역시 못 말리는 변여름이라 생각하며 양혁수는 입안 가득 떡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입술 도장을 꾹 찍었다.어느새 해가 뜰 시간이 되었지만 두 사람은 하나도 졸리지 않았다.한참 꼭 붙어 있다 보니 또 어느새 애매모호한 분위기가 흘러나왔다.양혁수는 변여름을 위해서라도 관심사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변여름이 핸드폰을 뒤적이며 말했다.“시연 언니가 아직 새해 인사를 보내지 않았네요?”질투하는 듯한 변여름의 말투가 오늘따라 더 귀엽게 느껴졌다.하지만 지금 말을 잘못하면 변여름이 삐질 게 뻔했으니 양혁수는 말을 가려서 하기로 했다. 그래서 한참 말을 골라 입을 열었다.“시연이는 새해 당일에 인사를 보내는 편이야. 우리 가족들도 대부분 그렇게 하거든. 너
거사를 치르기 전에 변여름도 나름 많은 조사를 걸쳐 충분히 준비를 마쳤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직접 겪어보니 실전과 이론은 큰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된다.변여름은 자신이 주동권을 잡으려 노력했지만 모두 가볍게 양혁수에게 들통이 나 물거품이 되었다.양혁수는 변여름의 두 손을 잡아 머리 위로 고정시켰고 변여름이 점차 반항할 생각도 하지 못할 때까지 꼭 붙잡아줬다.변여름의 머릿속에는 양혁수가 거친 숨을 내쉬며 귓가에 뱉은 말뿐이었다.“긴장하지 말고 힘 풀어.”긴장을 풀자 바로 쾌감이 이어졌다.처음 사과를 베어 문 에덴에 이런 기분이었을까, 변여름은 눈앞이 흐릿해지고 이 세상과는 단절된 쾌감만 느껴졌다.변여름은 나른하게 침대에 누웠고 잠시 의식을 되찾고 양혁수와 시선을 마주했다.양혁수는 변여름 이마의 땀을 닦아주고 또 달래듯 입술에 키스했다.금방 지나갈 소나기같았지만 또 벼락이 치고 폭우가 쏟아졌다.양혁수도 쾌감에 절여 절로 미소가 나갔지만 자꾸 변여름을 놀렸다.그러자 변여름이 바로 양혁수의 입술을 깨물었다.양혁수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두 사람의 자세를 바꿔 또 새로운 쾌감을 찾았다.변여름은 촉촉해진 눈가로 양혁수를 바라봤고 마치 처음 치즈를 선물 받은 고양이가 어디서부터 손을 대면 좋을지 몰라 망설이는 것 같았다.“네가 자세 바꾸고 싶다며?”양혁수는 손을 뻗어 변여름의 머리를 쓸어내리며 나른한 시선으로 유혹했다.“자, 네가 원하는 대로 해봐.”변여름은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아까도 변여름에게 기회를 줄 것처럼 굴다가 또 선수를 빼앗아 본인이 흐름을 주도했었다. 그렇게 반복되는 농락에 변여름은 이제 그럴 마음도 사라졌다.하지만 양혁수가 얌전히 누워주니 변여름은 또 덮칠 마음이 스멀스멀 생겼다.‘내가 잡아먹어야지!’서로를 탐닉하고 뜨거운 숨을 몰아 내쉬기를 반복했고 어느샌가 이불도 바닥 위로 떨어져 있었다.변여름은 저도 모르게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고 입술을 막아도 걷잡을 수 없었다.결국 변여름은 이불에 얼굴을 묻어버렸고 지금 본인
변여름은 낮에 물건을 뒤적이다가 양혁수가 서랍에 새로 준비해 둔 걸 발견했었다.양혁수가 참 보수적이라 생각했지만 변여름은 그런 점도 귀엽게 느껴져 눈치껏 본인이 준비한 물건은 서랍에 넣어두지 않았다. 뭐든지 차근차근 순서를 밟는 게 좋을 것 같았다.그러나 갑자기 자신을 안아 들고 위층으로 향하는 양혁수를 보며 변여름은 의아해졌다.‘오늘 밤엔 순정남이 아닌 건가? 아, 벌써 기대돼.’그러나 위층으로 올라가서 키스도 한참 했지만 시작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변여름이 양혁수의 품 안에서 기어 나오며 말했다.“오빠, 먼저 샤워나 할래요?”“...”‘이 흐름이 아닌데.’양혁수는 쯧 하고 혀를 차다가 변여름을 잡고 다시 아래에 깔았다.또 쉴 틈 없는 키스가 이어지고 변여름은 온몸이 나른해졌으며 입가가 얼얼해질 무렵, 양혁수가 마지막으로 입가에 뽀뽀하고 욕실로 향했다.변여름은 몰래 한숨을 푹 내쉬었다.‘그래. 내가 기다리지 뭐.’얌전히 침대에 누운 변여름은 다리를 달달 떨며 시간을 보냈다.그때, 양혁수가 준비해 둔 옷으로 갈아입고 걸어왔다.바로 변여름에게 다가간 양혁수는 순식간에 변여름을 이불 안에서 꺼내 안아 들었다.‘뭐야 샤워하러 간 거 아니었어? 또 준비한 게 있나 보네?’의아해하는 변여름의 생각을 읽고 양혁수는 입술에 도장을 꾹 찍고 욕실로 향했다.“같이 씻자.”변여름은 깜짝 놀라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욕실 안에는 뜨거운 김이 가득해 시야가 흐릿했다.양혁수는 어제 무슨 이유인지 안방에 새로 가구를 배송받았었다. 목재로 된 흔들의자였는데 하나는 안방에 두었고 특수 코팅을 거친 의자는 욕실에 두었다. 변여름은 안방에 둔 흔들의자에 누워 햇살을 느껴봤는데 그 기분이 아주 좋았다. 그러나 욕실에 둔 의자에 누우면 마치 발가벗겨진 생쥐 꼴이 되는 기분이 들었다.변여름은 욕실로 향하는 내내 별 별 난 생각이 다 들었지만 양혁수를 상대로 그런 음흉한 상상을 하면 안 된다고 자신을 채찍질했다.그러나, 변여름은 곧 자신의 상상이 틀리지 않았
누가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고양이 하나 때문에 그렇게 혼을 내던 오빠 친구가 오늘엔 제 옆에 앉아 평범한 여느 연인들처럼 자신을 잘 부탁한다고 인사하는 것을.변여름은 다른 사람에겐 흥미를 잃었고 오직 양혁수만 눈에 보였다. 그리고 너무 기분이 좋은 나머지 술이 술술 넘어갔다.회식을 끝내고 근처를 걸으니 거리에서 새해 느낌이 물씬 났다. 변여름은 양혁수의 손을 잡고 길을 걸으며 노래를 흥얼거렸다.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침대에 털썩 누워서도 양혁수의 이름을 불러댔다.“양혁수... 혁수 오빠...”대체 뭘 어떻게 더 해야 이렇게 커진 제 마음을 다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른다. 변여름은 정말 하늘만큼, 땅만큼 양혁수가 좋았다.올해는 양혁수가 근 10년 동안 가장 기대되는 새해라고 할 수 있다.새해에 맞춰 양홍두도 세운시로 향해 양지원과 함께 새해를 보내기로 했다.그리고 양혁수는 양지원에게 곧 변여름과 함께 세운시를 찾아 정식으로 인사를 드리겠다고 말했다.새해 전날, 집사는 양혁수의 기분이 퍽 좋은 걸 발견하고 다 같이 만두도 빚고 송편도 빚을 것을 제안했다.변여름도 아침 일찍 양씨 가문을 찾아 일을 거들었다.양혁수는 집 안팎을 돌아다니며 새해 분위기가 물씬 나는 조명이나 인테리어를 세팅했다.“조명을 켜기엔 아직 일러요. 조명은 오후부터 켜야 한다고 했어요.”변여름은 어디에서 들은 정보를 한 손에 만두를 쥔 채로 양혁수에게 말했다.양혁수는 사다리 위에 서서 말했다.“누가 그래? 우린 우리만의 법을 따르는 거야.”양혁수는 변여름을 달래듯 말했다.“꼬맹이는 얼른 가서 만두 빚고 있어. 예쁘게 빚으면 내가 새해 용돈도 챙겨줄게.”집사는 괜히 큰소리하는 양혁수를 보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양씨 가문 남자들, 누구 하나 큰소리할 수 있는 사람이 없을 텐데.’그러나 변여름은 고개를 끄덕였고 또 양혁수를 향해 손을 휘휘 저었다.사다리 아래까지 내려온 양혁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왜?”변여름은 바로 이때다 싶어 양혁수의 두 볼에
양지원은 바로 세운시로 돌아갔다.양씨 가문에는 오직 변여름과 양혁수만 남겨졌고 그날 밤부터 변여름은 아주 자연스레 양혁수의 방을 드나들었다.며칠 뒤면 새해인지라 연구실도 곧 휴가가 시작될 것이다. 변여름은 하루 시간을 내어 선물을 들고 연구실을 찾았다.선배들은 변여름이 영영 돌아오지 않을 줄만 알았는데 돌아온 변여름을 보며 아주 기뻐했고 선물을 받으며 어디에 다녀왔는지, 무엇을 했는지 물었다.“연애하고 왔어요.”솔직한 변여름의 대답에 사람들은 조금 당황했고 과거에 변여름에게 고백했었던 선배는 마음이 부서졌다.교수님은 변여름의 교제 상대가 누구인지 궁금해했다.“저희 오빠 친구예요.”‘그래. 오래 붙어있을수록 정분이 나는 법이지.’사람들은 변여름의 옆자리를 차지한 그 상대가 궁금했고 교수님도 한번 만나보고 싶다고 말했다.변여름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고 점심시간이 되자 도시락을 들고 양혁수를 찾아갔다.“회식?”양혁수는 변여름이 연구실 사람들한테 인기가 많은 게 의외라는 생각을 했다.하지만 좀 더 생각을 해보니 고작 며칠 사이에 얼굴도 보지 못한 제 비서와 사이좋게 지내는 걸 보며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변여름이 말했다.“남자 친구 생겼다고 말했거든요.”그러자 양혁수는 변여름이 자랑하고 싶어 하는 걸 바로 눈치챘다.그리고 불현듯 과거에 변여름이 연구실 선배한테 고백을 받았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변여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한두 사람이 아니었는걸요.”어깨를 으쓱거리는 변여름을 보며 양혁수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한두 사람이 아니었다?”“네!”“어떤 사람이었는데? 다들 똑똑할 거고, 뭐 잘생겼어?”“똑똑하기도 하고 잘생기기도 했죠.”옆에서 문서를 정리하던 비서가 그 말을 듣고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대표님, 예쁘고 요리도 잘하시는 여름 씨가 얼마나 인기가 많겠어요. 대표님이 조심하셔야겠네요.”변여름이 양혁수를 힐끔 훔쳐보자 양혁수가 바로 연기를 이어갔다.“그러게. 갑자기 짜증이 나서 입맛이 하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