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홍두가 딸을 받아들이는 문제를 제기했지만 양지원은 인정 여부와 상관없이 반우희를 친딸처럼 대할 생각이었다. 그는 차라리 현실적인 도움을 주는 것이 낫다고 판단해 거액을 선물했다.조용히 지켜보던 표세연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지만 뜻밖에도 그녀는 반우희를 양녀로 삼겠다고 선언했다.“어떤 방식으로 양녀로 받아들이실 건가요?”“길일을 정해 정식으로 연회를 열 생각이야.”연정훈이 말했다.‘그렇다면 꽤 정식적인 절차로 진행되겠군.’양시연은 의미심장한 눈빛을 띠며 말했다.“당신 어머니께서는 연회를 여는 게 진짜 목적이 아닐 수도 있지 않나요?”연정훈은 양시연을 한 번 쳐다보더니 말했다.“반우희 씨가 아직 승낙도 안 했는데 어머니는 벌써 부승원의 부모님을 초대할 준비를 하고 계셔.”‘푸.’양시연은 바로 눈치를 챘다.얼마 전 부승원의 어머니가 반우희를 만나러 갔을 때 첫인상은 나쁘지 않았지만 이후로 연락이 뜸했다. 그녀의 태도로 보아 반우희의 배경이 부족하다고 여기고 있는 듯했다.연씨 가문에는 딸이 없었고 표세연 역시 특별히 아끼는 후배가 많지 않았다. 만약 반우희가 그녀의 양녀가 된다면 신분이 단숨에 상승할 것이고 이 변화에 주목하는 이들도 많아질 터였다.“당신 어머니랑 부승원 씨 어머님이 사이가 안 좋으신 건가요?”“그래도 꽤 가까운 친구 사이야.”양시연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그러면 왜 이렇게 대놓고 상대를 난처하게 만들죠?”연정훈은 정곡을 찔렀다.“자신이 비를 맞아봤으니 다른 사람도 같은 비를 맞아야 공평하다고 생각하는 거지.예전에 자신이 무시했던 며느리가 하루아침에 신분 상승하는 걸 경험했으니 이제는 그 일에서 자신만 벗어날 수 없다는 심정이었다.‘친구란 함께 비를 맞으며 나아가는 거지.’양시연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이것도 나쁘지만은 않네요. 보니까 부승원 씨는 반우희 씨에게 진심이던데 당신 어머니 덕분에 둘의 관계가 더 순탄해질 수도 있겠어요. 게다가 앞으로 우리와의 인연도 더 단단해질 테고요.”감정적으로 보면 양
“반우희 씨가 바로 그 자리에서 부승원이 자기 남자 친구라고 선언했어.”연정훈이 말했다.“그 말을 듣는 순간 양쪽 어머님들의 표정이 확 바뀌더라.”양시연은 아들을 품에 안은 채 흥미롭게 이야기를 들었다.“당신 어머니가 애초에 속셈이 있었으니까 이렇게 된 거죠. 이제는 계획대로 되지도 않고 어정쩡한 상황이 돼버렸네요.”연정훈은 그녀 옆에 앉으며 고개를 저었다.“속셈이 있는 게 아니라 엄마는 진심으로 반우희 씨를 딸로 맞이하고 싶었던 거야.”양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잘된 일이네요. 나는 원래 반우희 씨가 좋았어요. 그런데 아버님께서 아기 이름 정하셨다고 하지 않았어요?”그것은 그들 가족에게 있어 중요한 일이었고 연정훈은 외투 주머니에서 작은 행운 부적을 꺼내 보였다.“이건 어머님께서 직접 구해오신 건가요?”연정훈은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어느 신령사분이 만든 건지 한번 맞혀봐.”양시연은 그를 째려보며 피식 웃었다.“이제 그분을 신령사라고 부르네요? 전에는 당신 어머님이 당신이 그 사람을 점쟁이라고 불렀다고 엄청 뭐라 하시던데요.”그 사람은 바로 예전에 연정훈에게 반지를 주며 인연을 맺어줄 거라고 했던 점쟁이였다.연정훈은 전혀 개의치 않는 표정으로 말했다.“모르는 게 죄는 아니지. 그 반지가 그렇게 효과가 있을 줄은 내가 어떻게 알았겠어? 반지를 낀 그날 바로 아내가 생길 줄이야.”양시연은 피식 웃으며 연정훈의 팔짱을 끼고 어깨에 기대며 그가 행운 부적을 천천히 펼칠 때까지 조용히 기다렸다.부적에는 아이의 생년월일이 적혀 있었고 작은 쪽지에는 ‘양승윤’이라는 이름이 쓰여 있었다.이름에는 ‘영광을 계승하고 희망을 이어가라’라는 깊은 뜻이 담겨 있었다.그 이름은 의미가 깊어서 연재혁이 큰손자를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 알 수 있었고 여러 날을 고민한 끝에 정해졌다.“어떻게 생각해? 마음에 안 들면 바꿀 수 있어.”연정훈이 말했다.양시연은 그 이름이 마음에 들어 보였고 행운 부적을 건네받아 아기 침대에 있는 태양을 바라보았
반우희는 표세연에게 붙잡혀 결국 다른 사람들과 동행하지 못했다.채정애는 부승원을 몇 번이고 노려보았지만 부승원은 아들로서 그녀의 체면을 세워주기로 하고 조용히 집까지 바래다주었다.가는 길에 채애정은 오랜 친구에 대한 불만을 쏟아내며 살짝 억울해했다.“표세연이 예전에 엉망으로 행동한 걸 왜 나까지 끌어들이는 거야? 난 너희 아버지를 그냥 속으로만 못마땅해했지 겉으로 내색한 적은 없어. 반우희 씨를 보러 갔을 때도 충분히 예의를 갖췄다고. 사람은 행동으로 판단해야지 속마음까지 들여다보는 게 아니잖아?”부승원이 말했다.“행동으로 판단했죠. 그래서 반우희를 외국 유학 보내려 한 거였어요?”채애정은 아무 말 없이 입을 다물었다.“...”‘짜증 나서 미칠 것 같아. 괜히 아들을 낳았나 싶다.'“어쨌든 결국 안 보냈잖아?”“그건 내가 잘한 거죠. 당신들이랑 무슨 상관이에요?”채애정은 속으로 혀를 찼다.반우희가 사람들 앞에서 그냥‘남자친구’라고 한마디 한 걸 두고 뭐가 그리 자랑스럽다고 친엄마 앞에서까지 우쭐대는지 알 수 없다.채정애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됐어. 나랑 네 아버지는 이제 상관 안 할 테니까 네가 알아서 해. 결혼할 거면 결혼하고 연애할 거면 연애하고.”‘어차피 네가 우리 말을 들을 리도 없잖아.’부승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반우희와의 미래에 대해서는 이미 계획이 있었다.채정애를 집에 데려다준 후 그는 원래 반우희를 다시 데리러 가려고 했지만 반우희는 세 명과 함께 연씨 가에서 놀다 갈 거라며 오늘 밤에는 안 간다고 했다.전화가 뚝 끊기고 나서 그는 한동안 침묵에 빠졌고 집으로 돌아와 침울한 얼굴로 샤워하러 들어갔다.교통사고 이후 반우희는 아직 회사로 복귀하지 않았다. 몸은 이미 회복되었고 복귀하기로 했던 것도 사실이었지만 양지원에게 거액을 받은 후로는 복귀 얘기를 단 한 번도 꺼내지 않았다.부승원은 원래도 바빠서 함께 출퇴근할 때조차 마주치는 시간이 적었는데 이제는 아예 얼굴을 보기조차 힘들어졌다. 그제야 겨우 그녀를
식탁 앞에서 반우희는 은은한 분위기의 조명을 켰다.부승원은 앞에 놓인 케이크의 표면이 고르지 않다는 것을 보고 사 온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묻기도 전에 반우희는 먼저 말했다.“이건 제가 직접 만든 거예요.”부승원은 케이크 위에 둥글고 통통한 복숭아 모양을 보고 마음에 들었다. 오늘 하루 종일 많은 사람에게 시달려 있었던 그가 이 케이크를 언제 만들었을지 궁금했다.부승원이 말했다.“내 생일은 이미 며칠 지나서 굳이 이렇게 축하해 줄 필요 없어.”“그럴 순 없죠.”반우희는 턱을 괴며 작은 꽃처럼 환하게 웃었다.“당신은 내 남자친구잖아요. 매년 당신 생일마다 축하해 줄 거예요. 그날 사고가 없었으면 그날 바로 축하해 줬을 텐데.”“그날도 케이크 만들었어?”“네. 그날은 이거보다 더 잘 만들었어요.”부승원은 케이크를 한 번 쳐다보며 말했다.“이것도 마음에 들어.”반우희는 기뻐하며 부승원의 옆으로 살짝 다가갔고 그녀는 늘 그에게 가까이 있는 게 좋았다.부승원은 자연스럽게 그녀를 안았고 그녀가 예전처럼 자신에게 집착하는 모습을 보고는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반우희가 조용히 물었다.“오늘 엄마가 짓궂은 농담 많이 했는데 기분 나쁘지 않았어?”부승원은 숟가락을 들어 케이크 한 숟가락을 먹었다.“아니.”반우희는 크게 안도의 한숨을 쉬고 힘껏 그의 얼굴에 입을 맞췄고 몸을 일으켜 하나씩 음식을 소개했다.부승원은 배가 그리 고프지 않았지만 반우희가 직접 만든 것이라 예의상 하나하나 먹어 주었다. 맛은 특별하지 않았고 재료는 지나치게 화려했으며 금박의 양이 너무 많았다.마지막까지 다 먹고 난 후 부승원은 입을 닦으려던 종이에 금빛 가루가 묻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반우희는 승주의 일 처리가 지나치다며 불평했지만 정작 그녀도 다를 바 없었다.그녀는 부승원에게 음식을 먹여 주는 틈틈이 앞으로의 계획을 전했다.“집사 할아버지께서 나한테 수업 하나 신청해 줬어요. 성산시에 가서 한 달 정도 있어야 해요.”부승원은 잠시 멈췄다.“뭐 배
부승원이 가볍게 힘을 주자 반우희는 그의 품으로 부드럽게 끌려갔다.쾅!부승원은 그녀의 등을 옷장 문에 가볍게 밀착시켰고 은은한 조명이 퍼지는 공간 속에서 그는 절제된 시선으로 장난기 어린 그녀의 얼굴을 감쌌다.반우희는 천천히 입술을 적시며 두 손을 등 뒤로 모았다. 옷장 문에 기대선 채 전혀 당황한 기색 없이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서로의 시선이 얽혔다. 부승원의 뜨거운 숨결이 가까이 느껴졌고 가벼운 듯한 눈길에도 반우희의 얼굴 코끝 입술이 고스란히 그의 시선에 스쳤다.“부승원 씨...”‘또 시작이네.’부승원의 신경이 팽팽히 곤두섰다. 목젖이 가볍게 움직였고 깊고 어두운 눈동자로 그녀를 응시했다.“돈이 생기니까 이런 걸 사는 거야?”반우희는 눈동자를 살짝 굴리며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었다.“돈이 생겼으니까 내 남자 친구한테 더 잘해주고 싶잖아요.”반우희는 그를 올려다보며 몸을 가깝게 붙였다. 그녀는 부승원의 얼굴을 천천히 훑던 눈길이 입술에 멈추자 조용히 속삭였다.“당연하지 않나요?”부승원은 아무 말도 없이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반우희는 천천히 그의 가슴 위에 손을 올렸다. 따뜻한 온기가 손바닥으로 스며들었고 그녀의 입가에 장난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심장이 좀 빠르게 뛰네요?”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부승원의 강한 팔이 반우희의 허리를 움켜쥐었다. 그대로 옷장 문 쪽으로 밀어 올리듯 그녀를 밀착시켰다.부승원은 천천히 고개를 숙였고 그의 입술은 반우희의 입술을 스치듯 지나갔다.반우희는 순간 전신을 타고 흐르는 짜릿한 전율에 숨을 멈췄다. 손끝까지 저릿한 감각이 퍼졌고 본능적으로 부승원의 가슴 앞자락을 꼭 움켜쥐었다. 그녀의 촉촉한 눈망울이 떨리는 시선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부승원의 입술이 닿을 듯 말 듯 가까이 다가왔다가 멈췄다. 그 순간 그는 그녀 옆쪽의 옷장 문을 열었다.반우희는 시선을 돌리지 않았지만 들려오는 작은 방울 소리에 그가 뭔가를 꺼냈음을 직감했다.그녀는 장난기 어린 미소를 띠고 몸을 살짝 흔들었다. 그
반우희는 그 말을 듣자 작은 손으로 그의 머리카락을 헤집으며 대담하게 말했다.“한 벌씩 다 입어볼게요.”“좋아.”‘이건 너가 말한 거야.’부승원은 그녀의 입술을 따라 다시 입을 맞추며 그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는 소리가 들렸다.반우희는 잘 보이지 않았고 부승원은 그녀의 귀에 대고 말했다.“토끼?”‘이걸 말하는 거구나. 히히 나도 좋아.’반우희는 침을 삼키며 그를 꼭 끌어안았다.“이건 꼬리가 달려 있어서 정말 귀여워요.”부승원은 침묵했다.“...”‘누가 너한테 이렇게 홍보하라고 했어?’부승원은 재빨리 옷걸이를 던지고 옷을 챙겨 그녀의 다리 뒤로 팔을 감아 단번에 그녀를 안고 욕실로 향했다.반우희는 가벼운 비명을 지르며 그의 머리를 끌어안았고 부승원의 깊은 눈을 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드르륵 소리와 함께 욕실 문이 닫혔다....부승원은 이런 남녀 관계에서 자제력이 부족한 이유가 반우희가 그를 조금씩 길들였기 때문이었다.그녀는 겁을 내지 않는 것은 물론 중요한 순간이 오면 도망가지도 피하지도 않으며 정말 다루기 쉬웠다.부승원이 강하게 밀어붙여도 반우희는 화내지 않았고 고개를 젖히며 마치 영혼이 사라진 듯했지만 그녀의 눈에는 그의 모습만 가득했다.이럴 때마다 부승원은 자제력을 시험받는 느낌을 받았고 내면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격렬한 감정을 제어하기 어려웠다. 본능적으로는 더 강하게 괴롭히고 싶었지만 동시에 그녀를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았고 오히려 더 소중히 여기고 싶은 마음이 컸다.냉탕과 온탕을 오가며 그는 정말로 반우희의 손에 죽을 것만 같았다.끝난 후 부승원은 침대에 기대어 반우희를 자신의 허리 쪽에 앉히고 그녀가 그의 품에 기대도록 했다. 그런 다음 고개를 숙여 물을 먹여주었다.그저 물 두 모금이었지만 반우희는 금세 기운을 차리며 눈을 거의 뜨지 않은 채로 몸을 이리저리 움직였다.몇 분 후 컨디션이 돌아온 반우희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고 부끄러움도 없이 입을 열어 그에게 서비스 후기에 대해 물었다.부승원은 태양혈이
부승원은 잠시 생각을 정리한 후 말했다.“집이 아무리 커도 결국 지루해질 때가 있어. 계속 집에만 있으면 심심하지 않아?”“전혀요.”반우희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저는 꽃과 식물을 가꾸고 있어요. 시간이 나면 친구들도 집에 초대해서 놀아요.”부승원은 잠시 침묵했다.“...”부승원은 잠깐 생각을 정리한 뒤 말을 꺼내기도 전에 반우희가 다시 입을 열었다.“부승원 씨랑 너무 먼 것이 단점이에요. 자주 볼 수 없으니까 당신이 보고 싶을 것 같아요.”부승원은 그 말을 듣고 기분이 좋아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그럼 앞으로 수업은 선생님을 정인 정원으로 초대해. 내가 사람 보내서 빈 회의실 하나 마련해줄게. 수업 끝나면 내 사무실로 와.”반우희는 그 말을 듣고 눈이 반짝였다.“그게 가능해요?”“가능해.”“그럼 이거 권력 남용 아니에요?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할까요?”“나를 신고라도 하겠어?”반우희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당신을 신고라도 하면 그러면 어떻게 할 거예요?”“내가 직접 그 신고증을 돌려보낼 거야.”반우희는 웃으며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고 그의 품에 안겼다.“좋아요. 그럼 정인에서 수업 들을게요.”“수업 끝나면 아무 데나 돌아다니지 마.”“만약 당신이 바쁘면 그냥 편하게 돌아다닐 거예요.”“내 휴게실에 가 있어도 돼.”반우희는 말했다.“그건 안 되죠. 매번 부승원 씨를 찾아갈 수는 없어요. 사람들이 보면 좋지 않아요. 어떤 대표가 일하는 곳에 장식품처럼 누군가를 데리고 다녀요?”“사무실에서 나를 기다리는 게 지루해서 그러는 거야?”반우희는 잠시 생각한 후 말했다.“조금 지루하긴 해요...”부승원은 반우희의 머리카락을 감으며 생각을 이끌어갔다.“그럼 수업 끝나고 사무실에서 잠시 쉬고 있어. 내가 시간이 나면 너랑 실전 연습을 해줄게. 시간이 안 되면 비서에게 부탁해서 실전 연습을 할 수 있게 할 거야. 만약 더 지루하면 사무실에 운동 공간과 영화룸도 마련해줄 수 있어. 그리고 퇴근할 때는 같이 나가자.”
양씨 가문은 갑자기 떠들썩해졌고 양지원은 양혁수가 좀 더 일찍 오지 않은 것에 대해 투덜거렸다. 한편 노지혜와 변여름은 작은 태양 곁에 다가앉았다.“정말 귀여워요. 양시연 언니를 꼭 닮았어요.”변여름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노지혜는 그 시선을 느끼고는 슬쩍 손을 거두며 억울한 듯 미소를 지었다.변여름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양혁수를 바라보며 물었다.“혁수 오빠, 태양이를 안아보지 않을 거예요?”그제야 양혁수는 태양을 향해 시선을 돌렸고 이를 본 양지원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어서 안아봐. 조카는 삼촌을 닮는다던데 태양이도 너처럼 잘생겼어.”양혁수는 피식 웃었다.그와 양시연의 관계에서 ‘조카’라는 표현이 어색할 수도 있었지만 그래도 태양은 양시연의 아이였기에 그는 조용히 다가가 태양을 내려다보았다.태양은 작은 손을 뻗어 그의 손가락을 잡으려 했고 옹알거리며 반응했다.뜻밖의 감동이 밀려온 양혁수는 손을 내밀어 태양이 그의 손가락을 꼭 잡도록 했다.그 모습을 보던 양시연이 장난스럽게 말했다.“설마 삼촌이 빈손으로 조카를 보러 온 건 아니겠지?”양혁수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능청스럽게 답했다.“난 큰 선물을 준비했는데 연정훈 씨가 너무 깐깐해서 내가 준 걸 땅에 묻어버릴까 봐 걱정돼.”“삼촌이 준 건데 정훈 씨가 그런 짓을 하겠어?”양시연은 태양을 품에 안고 그의 작은 손을 흔들며 웃었다.“자 어서 삼촌께 감사 인사하고 선물 달라고 해볼까?”양혁수는 한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익숙한 듯 자유롭게 앉았다. 다만 예전보다 방탕한 기운은 사라지고 그의 눈빛에는 한층 부드러워진 분위기가 감돌았다. 조명의 따스한 빛 아래 행복한 여인을 바라보던 그는 시선을 돌려 변여름의 머리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여름아, 가서 내가 준비한 선물 좀 가져와.”“네. 알겠어요.”변여름은 발걸음을 재촉해 여러 개의 상자를 안고 돌아왔다. 그중에는 변씨 가문에서 정성스럽게 준비한 것도 섞여 있었다.양혁수가 건넨 선물을 보고 양시연은 웃음을
양혁수는 변여름을 품에 안은 채로 서재 창가에서 예쁜 노을과 노을이 비친 잔잔한 호숫가를 바라봤다.“시연 언니 컨디션은 괜찮아요?”변여름의 질문에 양혁수가 대답했다.“좋아 보이던데. 컨디션도 그렇고 기분이 아주 좋아 보였어.”변여름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또 양혁수를 쳐다봤고 양혁수가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왜 쳐다봐?”“오빠, 행복해요?”양혁수는 최근 몇 달 동안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낸 걸 떠올리며 품 안의 변여름을 꼭 껴안았다.“행복하지.”“정말요? 왜요?”“왜긴...”두 눈을 감고 잠시 뜸을 들인 양혁수가 대답했다.“아침에 누가 나한테 해물 제철 탕을 해준다고 했거든.”“...”변여름은 손을 뻗어 익숙하게 양혁수의 두 볼을 잡아당겼다.양혁수는 변여름이 뭘 하든 가만히 받아줬고 또 변여름의 이마에 짧게 키스했다.양혁수의 눈동자에는 오직 변여름만 담겼고 변여름을 향한 사랑이 말하지 않아도 느껴졌다.변여름은 입꼬리를 올린 채로 양혁수의 목에 팔을 걸었고 또 빠르게 떨어지며 말했다.“그러고 보니 오빠, 아직도 나한테 좋아한다는 말도 안 했잖아요.”양혁수는 아주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좋아해.”그리고 고민하다가 말을 고쳤다.“내가 널 좋아해.”변여름은 금세 헤벌쭉해졌고, 첫사랑이고 뭐고 잊어버린 채로 양혁수의 두 볼에 번갈아 뽀뽀했다. 그리고 양혁수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인 듯 품에 안고 떨어지지 않았다.“오빠.”양혁수는 고개를 살짝 숙여 이어질 변여름의 말을 기다렸다.“난 오빠가 너무너무 너무 좋아요.”양혁수는 이런 변여름의 머리를 쓰다듬었고 나란히 소파에 기대앉았다.‘아, 삶이 이렇게 행복할 수도 있구나.’‘너무 행복해.’한강시에서의 삶은 점점 더 흥미진진해졌다. 몇 년 전만 해도 양혁수는 사람을 자주 만나지 않았지만 변여름과 함께한 뒤로 변백호네 가족이 시도 때도 없이 집을 들락거렸다.변여름은 한강시 연구실에서 고작 6개월의 시간을 보냈지만 벌써 성공적으로 데이터를 확보했다.그래서 남은 6
변여름은 2층 베란다에서 뛰쳐나오며 양혁수와 양지원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마침, 요즘 한가한데 여름이 데리고 경인시로 놀러 갈게요. 시연이도 볼 겸.”‘한가하긴! 고양이 배변도 아직 치우지 않았는데!’고개를 돌린 양혁수는 변여름이 입을 삐죽이고 있는 게 보였다.그래서 핸드폰을 잠시 귀에서 떼고 변여름을 향해 걸어오며 말했다.“서재 다 치워뒀으니 거기에서 논문 보면 돼.”“네.”변여름은 무표정으로 고개를 휙 돌렸고 쿵쿵거리며 서재로 들어갔다.양혁수는 피식 웃었고 통화를 종료한 양지원은 다시 영상 통화를 걸어왔다. 화면에는 양지원뿐만 아니라 양시연도 함께였다.막 아이를 낳았지만 양시연은 컨디션이 꽤 좋아 보였고 죽을 먹는 중이었다.양지원이 핸드폰을 넘기자 양시연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지금 퇴근하는 거야?”“막 집에 도착했어.”핸드폰 너머로 아이들이 재잘대는 소리가 들려왔고 양승윤과 다른 아이들도 함께 있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양혁수가 잠시 숨을 고르다가 말했다.“축하해. 잘생긴 아들에, 귀여운 딸까지 생긴걸.”과거에는 도저히 입 밖으로 내뱉기 힘들었지만 정작 하고 보니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양시연은 양혁수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너도 축하해.”“엄마한테서 전해 들었어. 너랑 여름이 말이야.”양혁수는 창밖의 핑크빛 노을을 보며 가슴이 쿵쿵 뛰는 걸 느꼈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서재로 발걸음을 옮겼다.“우리 공주님 보여줄까?”“좋아.”화면을 돌리자 침대 끝에 앉은 연정훈이 아이를 안고 있었다. 주변에는 양승윤을 제외하고 꼬마가 둘이나 더 있었다.“아빠, 나도 안아보고 싶어요!”“삼촌! 예지도 안아볼래요!”‘참 시끌벅적하네.’양시연이 연정훈을 낮게 부르자 연정훈이 딸을 품에 안고 걸어왔다.그리고 화면을 통해 양혁수는 연정훈과 시선이 마주쳤고 두 사람은 무언의 시그널을 주고받았는지 또 표정을 찡그렸다.연정훈은 예전처럼 차가웠지만 제 딸을 볼 때에는 입꼬리가 내려올 줄을 몰랐다.“시간 되면 경인시로 놀러와. 시
“그 사람도 별반 다를 게 없어요. 낳아준 어머니는 뒤로 하고 장모님한테 왔잖아요.”양혁수가 투덜거리며 말했다.양시연을 향한 감정이 남아있지 않더라도 양혁수는 늘 연정훈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변여름은 조용히 그 옆에서 눈치를 살폈다.그러다가 며칠 전 변여름과 진지하게 나눴던 첫사랑 얘기가 떠오른 양혁수는 오늘 이 기회를 빌려 변여름에게 장난을 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변여름은 크게 화도 내지 못하고 입만 삐죽일 것이다.저녁 시간이 다 되어가고 연정훈이 전화를 걸어 거의 집에 다 와간다고 알렸다.변여름은 양혁수의 손을 잡고 뒤뜰에서 잡초를 손질하는 양석진의 옆으로 다가갔고 갑자기 이렇게 말했다.“오빠, 우리 산책하러 가요.”양혁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지금?”“네!”“곧 다 모일 텐데 밥 먹고 산책하러 가자.”그러자 변여름이 고개를 푹 숙이더니 눈앞에 보이는 잡초를 마구잡이로 휙 잡아 뽑았다.양혁수는 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웃음을 꾹 참았다.그때 누군가 양혁수를 불렀고 두 사람은 다시 거실로 돌아가야 했는데 변여름이 갑자기 양혁수를 벽으로 툭 밀쳤다.그러자 양혁수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벽에 기댄 채로 변여름의 턱을 잡고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첫사랑을 잊는 방법은 첫사랑을 다시 만나는 거라며? 현실보다 상상 속 첫사랑이 더 완벽하고 이쁠 테니까.”“...”‘짜증 나.’양혁수가 변여름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며 말했다.“이건 네가 말했던 거잖아.”“...”“그런데 지금 표정이 왜 그렇지? 설마 한번 뱉은 말을 다시 주워 담고 싶은 거야?”변여름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말했다.“세상에 영원한 정답은 없는 거니까요.”“그래도 어쩔 수 없잖아. 계속 피해 다니며 만나지 않을 수도 없고.”“나 질투 난다는 말이에요.”“내가 평생 시연이 좋아한다고 해도 괜찮다고 했던 사람이 누구더라?”“그건 예전이잖아요!”“그럼 지금은?”‘지금은...’변여름은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발뒤꿈치를 살짝 들어 양혁수의
새벽 다섯 시가 다 되어서야 양혁수는 변여름을 껴안고 잠이 들었다.아침이 되어도 아무도 두 사람을 깨우지 않았고 실컷 자고 일어나니 어느새 아침 열 시가 넘어가고 있었다.두 사람은 잠에서 깬 뒤에도 한참 침대에서 뭉그적거렸고 양혁수가 먼저 몸을 일으켜 아래층으로 내려가 간단하게 먹을 음식을 준비했다.양혁수가 음식을 챙겨 돌아왔을 때, 변여름은 세수하고 다시 침대에 누워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양혁수가 침대 끝자락에 앉으며 변여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뭐라도 좀 먹고 다시 자.”변여름은 지금 자신의 옷차림이 어떤지 전혀 상관하지 않고 바로 이불에서 빠져나와 양혁수의 품에 안겼다.양혁수는 서둘러 변여름의 옷매무시를 정리해 주고 눈을 감고 있는 변여름에게 한 입씩 떠먹여 줬다.변여름은 몇 입 먹더니 금방 싫증을 느꼈고 양혁수는 변여름이 남긴 걸 입에 넣었다.그런데 양혁수가 아침을 먹는 사이 변여름이 품에서 잠이 들어버렸다.‘그렇게 졸린가?’양혁수는 변여름을 다시 이불 안에 넣어주고 옷을 갈아입은 뒤 헬스장을 다녀왔다.돌아와서 샤워를 마쳤을 때도 변여름은 아직 깨어나지 않았다.양혁수는 침대 앞으로 다가가 곤히 잠든 변여름을 바라봤고 젖은 머릿결이 마를 때까지도 시선을 떼지 못했다.그러다가 본능을 못 이긴 양혁수는 수건을 내려두고 침대 옆자리로 올라갔다.변여름은 금세 이상한 점을 눈치챘고 귓가에 들려오는 양혁수의 뜨거운 숨소리에 몸을 돌려 품에 안기며 말했다.“오빠...”양혁수는 숨을 고르다가 변여름에게 속삭였다.“어디 불편한 곳은 없어?”“없어요...”변여름은 온몸에 열기가 돌았고 저도 모르게 양혁수의 어깨를 깨물었다. 양혁수가 작게 신음 소리를 뱉자 변여름도 점점 이성을 잃게 되었고 눈가가 빨개진 채로 물었다.“우리 새해 인사드리러 가야 하지 않아요?”“필요 없어. 친척들도, 친구들도 많지 않아서 상관없어.”변여름은 마지막 남은 이성으로 말했다.“우리 세운시로 가야 하잖아요.”양혁수는 새해 인사 따위는 이제 안중에 없었다.
침대 시트를 교체하지 않아 방안에는 아직도 그 향이 가시지 않았다. 양혁수는 단팥죽이 끓는 동안 서둘러 시트를 교체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단팥죽의 단 향이 코를 자극했다.양혁수는 한 그릇 따라 변여름에게 건넸고 변여름은 소파에 나른하게 누워 양혁수가 한입씩 떠먹여 주는 걸 삼켰다.그렇게 천천히 기운을 되찾은 변여름은 또다시 장난기가 발동했다.양혁수의 품에 안겨 양혁수의 핸드폰을 뒤적이던 변여름이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마주했다.양혁수는 변여름의 두 볼을 쭉 잡아당기며 이 순간의 행복을 즐겼다.그런데 변여름이 꽤 진지한 얼굴로 이런 질문을 하는 게 아니겠는가?“오빠, 정말 무슨 약이라도 먹은 거 아니에요?”양혁수는 인상을 팍 찌푸리다가 시간을 확인하고는 바로 무슨 의미인지 알아차렸다.싸늘해진 양혁수의 시선에 변여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약을 따로 챙겨 먹지 않은 거면 너무 오랫동안 금욕해서 그런 거 아니에요?”“...”양혁수는 변여름이 이어서 어떤 질문을 할지 눈에 뻔했고 미리 준비해 둔 떡을 집어 냉큼 변여름의 입에 넣었다.변여름은 입안 가득 우물거렸고 반쯤 남긴 떡은 양혁수가 처리했다.“계속 까불면 너 이거 다 먹일 거야.”변여름이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이 떡 전부요?”“...”역시 못 말리는 변여름이라 생각하며 양혁수는 입안 가득 떡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입술 도장을 꾹 찍었다.어느새 해가 뜰 시간이 되었지만 두 사람은 하나도 졸리지 않았다.한참 꼭 붙어 있다 보니 또 어느새 애매모호한 분위기가 흘러나왔다.양혁수는 변여름을 위해서라도 관심사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변여름이 핸드폰을 뒤적이며 말했다.“시연 언니가 아직 새해 인사를 보내지 않았네요?”질투하는 듯한 변여름의 말투가 오늘따라 더 귀엽게 느껴졌다.하지만 지금 말을 잘못하면 변여름이 삐질 게 뻔했으니 양혁수는 말을 가려서 하기로 했다. 그래서 한참 말을 골라 입을 열었다.“시연이는 새해 당일에 인사를 보내는 편이야. 우리 가족들도 대부분 그렇게 하거든. 너
거사를 치르기 전에 변여름도 나름 많은 조사를 걸쳐 충분히 준비를 마쳤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직접 겪어보니 실전과 이론은 큰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된다.변여름은 자신이 주동권을 잡으려 노력했지만 모두 가볍게 양혁수에게 들통이 나 물거품이 되었다.양혁수는 변여름의 두 손을 잡아 머리 위로 고정시켰고 변여름이 점차 반항할 생각도 하지 못할 때까지 꼭 붙잡아줬다.변여름의 머릿속에는 양혁수가 거친 숨을 내쉬며 귓가에 뱉은 말뿐이었다.“긴장하지 말고 힘 풀어.”긴장을 풀자 바로 쾌감이 이어졌다.처음 사과를 베어 문 에덴에 이런 기분이었을까, 변여름은 눈앞이 흐릿해지고 이 세상과는 단절된 쾌감만 느껴졌다.변여름은 나른하게 침대에 누웠고 잠시 의식을 되찾고 양혁수와 시선을 마주했다.양혁수는 변여름 이마의 땀을 닦아주고 또 달래듯 입술에 키스했다.금방 지나갈 소나기같았지만 또 벼락이 치고 폭우가 쏟아졌다.양혁수도 쾌감에 절여 절로 미소가 나갔지만 자꾸 변여름을 놀렸다.그러자 변여름이 바로 양혁수의 입술을 깨물었다.양혁수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두 사람의 자세를 바꿔 또 새로운 쾌감을 찾았다.변여름은 촉촉해진 눈가로 양혁수를 바라봤고 마치 처음 치즈를 선물 받은 고양이가 어디서부터 손을 대면 좋을지 몰라 망설이는 것 같았다.“네가 자세 바꾸고 싶다며?”양혁수는 손을 뻗어 변여름의 머리를 쓸어내리며 나른한 시선으로 유혹했다.“자, 네가 원하는 대로 해봐.”변여름은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아까도 변여름에게 기회를 줄 것처럼 굴다가 또 선수를 빼앗아 본인이 흐름을 주도했었다. 그렇게 반복되는 농락에 변여름은 이제 그럴 마음도 사라졌다.하지만 양혁수가 얌전히 누워주니 변여름은 또 덮칠 마음이 스멀스멀 생겼다.‘내가 잡아먹어야지!’서로를 탐닉하고 뜨거운 숨을 몰아 내쉬기를 반복했고 어느샌가 이불도 바닥 위로 떨어져 있었다.변여름은 저도 모르게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고 입술을 막아도 걷잡을 수 없었다.결국 변여름은 이불에 얼굴을 묻어버렸고 지금 본인
변여름은 낮에 물건을 뒤적이다가 양혁수가 서랍에 새로 준비해 둔 걸 발견했었다.양혁수가 참 보수적이라 생각했지만 변여름은 그런 점도 귀엽게 느껴져 눈치껏 본인이 준비한 물건은 서랍에 넣어두지 않았다. 뭐든지 차근차근 순서를 밟는 게 좋을 것 같았다.그러나 갑자기 자신을 안아 들고 위층으로 향하는 양혁수를 보며 변여름은 의아해졌다.‘오늘 밤엔 순정남이 아닌 건가? 아, 벌써 기대돼.’그러나 위층으로 올라가서 키스도 한참 했지만 시작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변여름이 양혁수의 품 안에서 기어 나오며 말했다.“오빠, 먼저 샤워나 할래요?”“...”‘이 흐름이 아닌데.’양혁수는 쯧 하고 혀를 차다가 변여름을 잡고 다시 아래에 깔았다.또 쉴 틈 없는 키스가 이어지고 변여름은 온몸이 나른해졌으며 입가가 얼얼해질 무렵, 양혁수가 마지막으로 입가에 뽀뽀하고 욕실로 향했다.변여름은 몰래 한숨을 푹 내쉬었다.‘그래. 내가 기다리지 뭐.’얌전히 침대에 누운 변여름은 다리를 달달 떨며 시간을 보냈다.그때, 양혁수가 준비해 둔 옷으로 갈아입고 걸어왔다.바로 변여름에게 다가간 양혁수는 순식간에 변여름을 이불 안에서 꺼내 안아 들었다.‘뭐야 샤워하러 간 거 아니었어? 또 준비한 게 있나 보네?’의아해하는 변여름의 생각을 읽고 양혁수는 입술에 도장을 꾹 찍고 욕실로 향했다.“같이 씻자.”변여름은 깜짝 놀라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욕실 안에는 뜨거운 김이 가득해 시야가 흐릿했다.양혁수는 어제 무슨 이유인지 안방에 새로 가구를 배송받았었다. 목재로 된 흔들의자였는데 하나는 안방에 두었고 특수 코팅을 거친 의자는 욕실에 두었다. 변여름은 안방에 둔 흔들의자에 누워 햇살을 느껴봤는데 그 기분이 아주 좋았다. 그러나 욕실에 둔 의자에 누우면 마치 발가벗겨진 생쥐 꼴이 되는 기분이 들었다.변여름은 욕실로 향하는 내내 별 별 난 생각이 다 들었지만 양혁수를 상대로 그런 음흉한 상상을 하면 안 된다고 자신을 채찍질했다.그러나, 변여름은 곧 자신의 상상이 틀리지 않았
누가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고양이 하나 때문에 그렇게 혼을 내던 오빠 친구가 오늘엔 제 옆에 앉아 평범한 여느 연인들처럼 자신을 잘 부탁한다고 인사하는 것을.변여름은 다른 사람에겐 흥미를 잃었고 오직 양혁수만 눈에 보였다. 그리고 너무 기분이 좋은 나머지 술이 술술 넘어갔다.회식을 끝내고 근처를 걸으니 거리에서 새해 느낌이 물씬 났다. 변여름은 양혁수의 손을 잡고 길을 걸으며 노래를 흥얼거렸다.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침대에 털썩 누워서도 양혁수의 이름을 불러댔다.“양혁수... 혁수 오빠...”대체 뭘 어떻게 더 해야 이렇게 커진 제 마음을 다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른다. 변여름은 정말 하늘만큼, 땅만큼 양혁수가 좋았다.올해는 양혁수가 근 10년 동안 가장 기대되는 새해라고 할 수 있다.새해에 맞춰 양홍두도 세운시로 향해 양지원과 함께 새해를 보내기로 했다.그리고 양혁수는 양지원에게 곧 변여름과 함께 세운시를 찾아 정식으로 인사를 드리겠다고 말했다.새해 전날, 집사는 양혁수의 기분이 퍽 좋은 걸 발견하고 다 같이 만두도 빚고 송편도 빚을 것을 제안했다.변여름도 아침 일찍 양씨 가문을 찾아 일을 거들었다.양혁수는 집 안팎을 돌아다니며 새해 분위기가 물씬 나는 조명이나 인테리어를 세팅했다.“조명을 켜기엔 아직 일러요. 조명은 오후부터 켜야 한다고 했어요.”변여름은 어디에서 들은 정보를 한 손에 만두를 쥔 채로 양혁수에게 말했다.양혁수는 사다리 위에 서서 말했다.“누가 그래? 우린 우리만의 법을 따르는 거야.”양혁수는 변여름을 달래듯 말했다.“꼬맹이는 얼른 가서 만두 빚고 있어. 예쁘게 빚으면 내가 새해 용돈도 챙겨줄게.”집사는 괜히 큰소리하는 양혁수를 보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양씨 가문 남자들, 누구 하나 큰소리할 수 있는 사람이 없을 텐데.’그러나 변여름은 고개를 끄덕였고 또 양혁수를 향해 손을 휘휘 저었다.사다리 아래까지 내려온 양혁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왜?”변여름은 바로 이때다 싶어 양혁수의 두 볼에
양지원은 바로 세운시로 돌아갔다.양씨 가문에는 오직 변여름과 양혁수만 남겨졌고 그날 밤부터 변여름은 아주 자연스레 양혁수의 방을 드나들었다.며칠 뒤면 새해인지라 연구실도 곧 휴가가 시작될 것이다. 변여름은 하루 시간을 내어 선물을 들고 연구실을 찾았다.선배들은 변여름이 영영 돌아오지 않을 줄만 알았는데 돌아온 변여름을 보며 아주 기뻐했고 선물을 받으며 어디에 다녀왔는지, 무엇을 했는지 물었다.“연애하고 왔어요.”솔직한 변여름의 대답에 사람들은 조금 당황했고 과거에 변여름에게 고백했었던 선배는 마음이 부서졌다.교수님은 변여름의 교제 상대가 누구인지 궁금해했다.“저희 오빠 친구예요.”‘그래. 오래 붙어있을수록 정분이 나는 법이지.’사람들은 변여름의 옆자리를 차지한 그 상대가 궁금했고 교수님도 한번 만나보고 싶다고 말했다.변여름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고 점심시간이 되자 도시락을 들고 양혁수를 찾아갔다.“회식?”양혁수는 변여름이 연구실 사람들한테 인기가 많은 게 의외라는 생각을 했다.하지만 좀 더 생각을 해보니 고작 며칠 사이에 얼굴도 보지 못한 제 비서와 사이좋게 지내는 걸 보며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변여름이 말했다.“남자 친구 생겼다고 말했거든요.”그러자 양혁수는 변여름이 자랑하고 싶어 하는 걸 바로 눈치챘다.그리고 불현듯 과거에 변여름이 연구실 선배한테 고백을 받았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변여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한두 사람이 아니었는걸요.”어깨를 으쓱거리는 변여름을 보며 양혁수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한두 사람이 아니었다?”“네!”“어떤 사람이었는데? 다들 똑똑할 거고, 뭐 잘생겼어?”“똑똑하기도 하고 잘생기기도 했죠.”옆에서 문서를 정리하던 비서가 그 말을 듣고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대표님, 예쁘고 요리도 잘하시는 여름 씨가 얼마나 인기가 많겠어요. 대표님이 조심하셔야겠네요.”변여름이 양혁수를 힐끔 훔쳐보자 양혁수가 바로 연기를 이어갔다.“그러게. 갑자기 짜증이 나서 입맛이 하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