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고결하고 기품 있는 성품에 훈장을 수여한 명망 높은 가문 출신의 수재인 지강산은 모두가 우러러보는 눈부신 존재였다. 4년의 열애 기간 동안 허서령이 그의 일생일대의 유일한 사랑임을 모두가 의심치 않았다. 그러다가 ‘양다리’ 사건이 터지면서 두 사람은 결국 이별했다. 5년 만에 다시 마주한 날, 지강산이 허서령을 벽으로 거칠게 밀어붙였다. 두 눈에 원한이 들끓었다. “내 세상에서 사라졌으면 영원히 사라졌어야지.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마.” 돌아온 건 그녀의 단호하고 깔끔한 대답이었다. “알았어요.” 지강산은 허서령을 뼛속까지 증오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그녀에게 미쳐 있었고 그녀 앞에만 서면 속절없이 자제력을 잃고 무너져 내렸다. 시간이 흘러 마침내 모든 진실이 드러났다. 지강산이 붉게 충혈된 눈으로 허서령을 쳐다보면서 문으로 몰아붙였다. “평생 속죄하면서 살게. 너의 그 지독한 빚들 이제부턴 내가 다 감당할 테니까 나랑 결혼해.”
View More하루 세 끼를 먹으며 두 사람은 평범하고 조용한 일상을 보냈다.겉보기에는 평화로웠지만 정윤슬의 마음 한편에는 늘 불안이 남아 있었다.할아버지는 수술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의사는 오 년 이상 생존할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정윤슬도 한시름 놓았다.할아버지는 퇴원 후 요양원으로 옮겨졌다.서령 언니도 퇴원했다. 우울증은 나았지만 정윤슬을 잊어버렸다.지태일은 직장일 뿐 아니라 허서령의 아버지 사건을 뒤집을 증거까지 찾아다니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퇴근 시간은 갈수록 늦어졌고, 며칠씩 얼굴을 못 보고 메신저로만 연락할 때도 있었다.[오늘 바빠. 못 들어가.][임무 나감.][늦게 들어가.]메시지는 늘 짧고 간결했다. 말수를 아끼는 그답게 군더더기가 없었다.정윤슬도 차츰 익숙해졌다.결혼하고 처음 몇 달 동안 지태일은 가족 결제 한도를 열어 줬지만 정윤슬은 매달 40만 원도 채 쓰지 않았다.그러자 나중에는 결제 한도를 없애고 계좌로 직접 돈을 보내 주기 시작했다. 어떤 달에는 400만 원, 또 어떤 달에는 600만 원이었다.집에 없어도 돈만큼은 빠짐없이 보내 주는 남편, 이런 결혼을 바라는 여자가 얼마나 많을까?시댁 식구들과 갈등할 일도 없고 키울 아이도 없으며 남편 뒷바라지할 필요도 없다. 매달 수백만 원이 꼬박꼬박 들어왔다.나중에 서령 언니가 정윤슬과 지은영을 찾아와 강산 오빠에게 로맨틱하게 청혼할 계획을 의논했다. 정윤슬은 지은영과 이틀 동안 준비했다.허서령의 청혼 파티에서 사랑하는 두 사람이 드디어 맺어지는 모습을 보며 정윤슬도 몰래 눈물을 훔쳤다.반년 뒤, 허서령은 귀여운 딸을 낳았다. 이름은 예안이였다. 온 가족이 기쁨에 휩싸였다.정윤슬도 서령 언니와 강산 오빠의 행복이 기뻤다.하지만 기쁜 시간은 오래가지 못했다.석박사 통합과정 진학을 준비하던 어느 날, 할아버지가 다시 입원했다.반년 동안 나은 듯했던 병이 재발했고 암세포가 전이된 것이다.할아버지는 고령이라 치료를 견디지 못했고 두 달도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장
정윤슬은 오랫동안 얌전히 기다렸다.아침부터 정오까지 앉아 있다 엉덩이가 아프면 일어나 걷고, 배가 고프면 물을 두 잔 마시며 버텼다.지태일이 나온 시간은 오후 한 시였다.정윤슬을 보는 순간 그는 집에 먼저 보내야 한다는 걸 깜빡한 사실을 깨달았다. 경찰서에서 몇 시간이나 무작정 기다리게 한 것이다.죄책감이 밀려오는 걸 느끼며 지태일은 성큼 다가갔다.“윤슬아.”“태일 오빠.”정윤슬이 반갑게 웃었다. 드디어 집에 갈 수 있다는 생각에 기뻤다.“미안해. 이렇게 오래 기다리게 했네.”정윤슬은 맑은 눈으로 태연하게 웃었다.“괜찮아요. 어차피 바쁜 일도 없었어요.”“내가 데려다줄게.”“일은 다 끝나셨어요?”“응, 끝났어.”“네.”정윤슬은 그를 따라 경찰서를 나섰다.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정윤슬이 궁금해 물었다.“태일 오빠, 그 두 사람은 누구예요?”“한 명은 마약 판매책, 다른 한 명은 투약자야. 지하 주차장에서 몰래 거래하고 있었어. 그 판매책은 내가 오랫동안 찾던 놈이거든.”“그랬군요.”지태일은 앞만 보고 운전하며 진지하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다음부터 그러지 마. 위험한 일이 생기면 숨거나 도망쳐. 스스로 지킬 능력이 있어도 일부러 위험 속으로 뛰어들지는 않았으면 좋겠어.”정윤슬은 목소리에 불쾌감이 섞여 있다는 걸 느꼈다.칭찬해 줄 줄 알았는데 도리어 혼이 났다.“네.”정윤슬은 몰래 한숨을 쉬고 차창 밖을 바라봤다. 마음이 무거웠다.집에 돌아와서 지태일은 장을 본 식자재를 냉장고에 넣었고, 정윤슬은 생필품을 방으로 가져갔다.봉투 안에 지태일의 속옷과 양말까지 들어 있다는 걸 깜빡했다.그때 지태일이 방문을 두드렸다.“들어오세요.”정윤슬은 치약과 휴지를 정리하고 욕실에서 나오던 참이었다.지태일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내 속옷도 그 봉투에 있어.”그는 침대 옆에 놓인 봉투를 가리켰다.정윤슬은 그제야 생각났다.“이따 제가 세탁기에 넣고 빨아 드릴게요.”“그래.”지태일은 다가오다가 멈췄다. 굳이 가져가
정윤슬은 얼른 차에 타서 문을 잠그고 유리창 너머로 그를 바라봤다.지태일이 향하는 곳에서는 남자 한 명이 주차장 구석 기둥에 기대 다른 남자와 수상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지태일이 가까워지자 남자는 그를 알아본 듯 손에 든 물건을 내던지고 황급히 달아났다.지태일은 날렵하게 달려가 발길질 한 번으로 남자를 쓰러뜨렸다.다른 남자도 놀라서 반대쪽으로 달아났다. 정윤슬이 있는 출구 쪽이었다.지태일은 휴대폰을 꺼내 있는 힘껏 던졌다. 휴대폰이 다른 남자의 뒤통수를 정확히 가격했다. 남자는 비틀거리며 머리를 감쌌다.지태일은 빠르게 쫓아가 몇 번 발로 차고 쇠 주먹 같은 주먹으로 배를 쳐 무릎을 꿇렸다.그사이 처음 쓰러졌던 남자가 일어나 도망치려 했다.서로 반대쪽으로 도망치는 범인 두 명을 혼자 잡기는 어려웠다.바로 그때 정윤슬이 차에서 내려 달려왔다.눈앞을 스쳐 가는 정윤슬의 모습에 지태일은 깜짝 놀라며, 붙잡은 범인을 바닥에 눌러 제압한 채 황급히 외쳤다.“윤슬아, 돌아가!”말이 끝나기도 전에 정윤슬이 달아나는 남자 뒤에서 뛰어올라 날아 차기를 했다. 남자는 그대로 엎어졌다.정윤슬은 달려가 남자의 손목을 비틀어 등 뒤로 제압하고 무릎으로 등을 눌렀다.“아악!”남자가 고통에 비명을 질렀다.정윤슬은 움직임이 날쌨다. 힘이 세 보이지는 않아도 탄탄한 기술이 있었다.지태일은 넋이 나갔다.정윤슬이 어려서부터 할아버지에게 무술을 배우고 태권도도 몇 년 했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있었다.하지만 작고 여린 모습만 봤기에 실제로 이렇게 잘 싸울 줄은 몰랐다.지태일은 범인을 붙잡고 일어나 멀쩡한 휴대폰을 주워 동료들에게 지원을 요청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지원 인력이 도착했다.그들은 범인 두 명을 데리고 경찰서로 돌아갔다.지태일은 바빠서 자취를 감췄다. 정윤슬이 긴 의자에 앉아 있자 여경 한 명이 따뜻한 물 한 잔을 건네며 상냥하게 웃었다.“물 드세요.”“감사합니다.”정윤슬은 따뜻한 물컵을 받았다.물을 마시며 둘러보니 경찰서 안의 여러
할아버지 댁에서 돌아온 뒤 정윤슬은 지태일과의 사이에 설명하기 어려운 어색함이 생겼다고 느꼈다.지태일은 전보다 더 말이 없어졌다.그는 일하느라 몹시 바빴다.정윤슬은 집에서 공부하고 집안일을 하며, 틈이 나면 꽃을 키우거나 드라마와 숏폼을 봤다. 제법 알차게 하루하루를 보냈다.지태일은 가끔 일찍 퇴근해 정윤슬과 저녁을 먹었다.정윤슬이 책을 읽든 휴대폰을 보든 지태일은 늘 거실에 함께 앉아 있다가 정윤슬이 방으로 들어갈 때까지 곁을 지켰다.그래도 두 사람은 대화를 거의 나누지 않았다.때로는 듬직한 오빠 같고 때로는 세심하게 챙기는 아버지 같았다. 정윤슬은 그와 있으면 마음이 놓였다.어느 날, 지태일은 강령원에서 배 한 상자와 배즙을 가져왔다.“서령이가 너 먹으라고 보냈어.”정윤슬은 그 배를 한참 동안 먹었다.배를 깎을 때 지태일이 집에 있으면 정윤슬은 꼭 반으로 나눠 줬다.지태일은 반쪽으로 잘린 배를 잠시 바라보다 말했다.“난 안 먹어. 너 먹어.”정윤슬은 지태일도 배를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그런데 왜인지 정윤슬이 깎아 주는 배는 매번 마다했다.주말 아침, 지태일은 일찍 일어나 정윤슬과 아침을 먹었다. 식사 후에도 출근하지 않았다.정윤슬이 가방을 메고 차 키를 들고 거실을 지나는데 지태일이 소파에서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태일 오빠, 오늘 출근 안 하세요?”지태일은 휴대폰을 내려놓고 올려다봤다.“오늘 쉬어. 어디 가?”‘쉰다고?’결혼한 뒤로 지태일이 쉬는 건 처음 봤다. 정말 드문 일이었다.“마트 가서 생필품이랑 먹을 것 좀 사려고요.”“같이 가자.”지태일은 일어나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정윤슬이 의아하게 물었다.“오빠도 살 게 있으세요?”“응.”지태일이 고개를 끄덕였다.정윤슬은 더 묻지 않고 그와 함께 차를 타고 마트로 갔다.대형마트에 들어서자 지태일은 카트를 밀며 정윤슬의 뒤를 따랐다.정윤슬이 오른쪽으로 가면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가면 왼쪽으로 따라왔다.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다.그는 진열대를 먼
허서령은 진심으로 겁이 났다.지난번 사람들이 북적이는 호텔에서도 허서령에게 키스를 퍼부었던 지강산이었다.지금은 새벽 두 시가 넘은 시간인 데다가 아파트 복도에 인적도 끊겼다. 지강산이 또 무슨 짓을 할지 장담할 수 없었다.“강산 씨도 여기에 올 줄은 몰랐어요.”허서령이 떨리는 목소리로 현관문에 몸을 바짝 붙였다. 당장이라도 문을 두드리며 살려달라고 소리칠 기세였다.“강산 씨 눈앞에 일부러 나타난 게 아니에요.”지강산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말없이 구석에 있는 쓰레기통으로 걸어가더니 피우던 담배를 비벼 꺼서 던져 넣었
병원 안.허서령이 수납을 마치고 영수증을 챙겨 병원을 나섰다. 그때 진성호가 뒤쫓아와 허서령의 팔을 거칠게 붙잡았다.“지난번에 내가 얘기했던 거 생각해 봤어?”허서령이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않고 진성호의 손을 뿌리치며 째려봤다.“미친놈.”진성호의 얼굴이 순식간에 험악하게 일그러지더니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그러고는 두 손을 허리에 얹고 오만한 태도를 취했다.“허서령, 나한테 시집오면 배상금 1억 6천만 원을 주지 않아도 돼. 우리 아버지 병원비도 낼 필요 없고. 게다가 너의 엄마가 원하는 대로 은행에서 1억 원 대출받아
지강산이 몸부림치는 허서령의 손목을 잡고 머리 위 벽에 고정시킨 뒤 이성을 잃은 맹수처럼 키스를 퍼부었다.참아왔던 눈물이 허서령의 감긴 눈꺼풀 사이로 속절없이 흘러내렸다. 하지만 지강산은 멈출 기색이 전혀 없었다.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허서령이 그의 아랫입술을 있는 힘껏 깨물었다.“윽.”날카로운 통증에 지강산이 입술을 뗐다.허서령이 기억하는 지강산은 언제나 한없이 다정한 사람이었다.그런 그가 이토록 사납게 구는 건 분명 그녀를 뼛속 깊이 증오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 생각에 허서령은 심장이 바늘에 찔린 것처럼 아팠다.지강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지강산이 앞에 놓인 술잔을 들더니 단숨에 비워냈다.뽑은 벌칙 대신 술을 택했다. 그 누구와도 키스하지 않겠다는 무언의 선언이었다.주변에서 킥킥거리는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소유하가 티슈를 던지면서 씩씩거렸다.“재미없어, 정말. 뭐가 부끄럽다고 그래?”지강산이 한숨을 무겁게 내뱉으며 술기운을 눌러 내렸다.게임이 계속되었다. 술병이 여러 번 돌고 돌아 마침내 허서령의 차례가 왔다. 그녀는 벌칙이 지나칠까 봐 두렵기도 했고 술을 이길 자신도 없었다.“진실을 말하는 걸 선택할게요.”그러자 소유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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