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고결하고 기품 있는 성품에 훈장을 수여한 명망 높은 가문 출신의 수재인 지강산은 모두가 우러러보는 눈부신 존재였다. 4년의 열애 기간 동안 허서령이 그의 일생일대의 유일한 사랑임을 모두가 의심치 않았다. 그러다가 ‘양다리’ 사건이 터지면서 두 사람은 결국 이별했다. 5년 만에 다시 마주한 날, 지강산이 허서령을 벽으로 거칠게 밀어붙였다. 두 눈에 원한이 들끓었다. “내 세상에서 사라졌으면 영원히 사라졌어야지.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마.” 돌아온 건 그녀의 단호하고 깔끔한 대답이었다. “알았어요.” 지강산은 허서령을 뼛속까지 증오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그녀에게 미쳐 있었고 그녀 앞에만 서면 속절없이 자제력을 잃고 무너져 내렸다. 시간이 흘러 마침내 모든 진실이 드러났다. 지강산이 붉게 충혈된 눈으로 허서령을 쳐다보면서 문으로 몰아붙였다. “평생 속죄하면서 살게. 너의 그 지독한 빚들 이제부턴 내가 다 감당할 테니까 나랑 결혼해.”
View More지씨 가문 저택은 정원 저택이었다. 웅장하지만 절제되어 있었고, 몹시 기품 있었다. 밤빛이 내려앉자 긴 회랑에는 따뜻한 노란 조명이 켜져 있어 분위기가 그윽했다.지은영은 허서령을 끌고 안으로 걸어갔다.허서령은 걸으면서도 고집스럽게 말했다.“은영아, 나 오늘은 그냥 돈 돌려주러 온 거야. 선물도 안 가져왔는데, 어르신들 뵙는 건 예의가 아니야.”“선물 안 가져와도 돼요.”지은영은 그녀의 팔을 꼭 끌어안은 채 놓지 않았다.“게다가 우리 부모님은 외출하셨어요. 젊은 사람들끼리 노는 거예요.”“무슨 젊은 사람들?”허서령은 마음이 조금 불안해졌다. 그녀의 기억 속에서 지강산과 그의 큰형은 부모님과 함께 살지 않았다.‘설마 지강산도 마침 여기 있는 건 아니겠지?’기품 있는 고풍 회랑을 지나, 넓고 여유로운 오락실 안으로 들어섰다.지강산의 뒷모습을 본 순간, 허서령은 온몸이 굳어 버렸다.“내 친구, 허서령이야.”지은영은 당당하게 소개했다.방 안에서 지강산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일제히 허서령을 바라보았다.소준혁은 허서령을 응시하다가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에는 좋은 패 한 장을 쥐고 있었고, 입가에는 환한 미소가 번졌다.“서령아, 오랜만이야.”허서령은 목소리가 난 쪽을 바라보았다. 6년 만에 보는 소준혁을 보고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 인사했다.“오랜만이에요.”그때 지태일이 장기판을 내려놓고 허서령 앞으로 걸어와 미소로 맞이했다.“서령?”허서령은 그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태일 오빠, 안녕하세요.”“들어와서 앉아.”지태일은 정중하게 손을 뻗어 그녀의 어깨 곁에 얹고 안쪽으로 데려갔다.그는 허서령을 찻상 쪽 휴식 공간으로 데려왔다.소준혁은 그 모습을 보자마자 곧장 옆으로 자리를 옮겨 가운데 자리를 비웠다.“서령아, 여기 앉아.”사람이 너무 많았고 모두 오래전부터 알던 사람들이라, 허서령은 이 순간 몹시 어색하고 불편했다.그녀가 자리에 앉은 뒤, 늘 그녀를 여동생처럼 아껴 주던 지태일은 차분하고 엄숙한
‘정말 속 터져 죽겠네. 역시 서령 언니가 오빠를 잘 알고 있어. 둘째 오빠는 사랑에 눈이 멀어도 단단히 멀었군. 일에 대한 욕심은 조금도 없는 건가?’지강산은 바닥에 내던져진 카드를 보며 눈썹을 치켜들고 가볍게 웃었다.“허! 우리 공주님, 나더러 와서 고스톱 치자고 한 것도 너고, 네 마음에 안 드는 말 했다고 화내는 것도 너야. 대체 어쩌라는 거야?”지은영은 미간을 찌푸린 채 그를 노려보았다.“만약 그 사람이 평범한 공무원이 아니라면? 우주 추진 엔지니어라면? 어릴 때부터 꿈이 행성을 탐사하고 우주를 정복하는 거였다면? 그래도 직장을 바꿔야 해?”지강산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지더니 목소리도 몇도 차갑게 내려앉았다.“무슨 뜻이야?”지은영은 허리를 곧게 펴고 진지하게 말했다.“먼저 이 질문에 대답해.”이승제와 소준혁은 멍해졌다. 두 사람은 긴장한 얼굴로 이 남매를 바라보았다.‘분위기가 조금 이상해. 어쩌다 갑자기 이렇게 날이 선 거지?’지강산의 눈빛은 깊고 어두웠다.바로 그때, 지은영의 휴대폰이 울렸다.그녀는 휴대폰을 꺼내 발신자를 확인하더니 곧장 받아 귀에 가져가며 목소리가 한결 부드러워졌다.“서령 언니, 무슨 일이에요?”지강산은 테이블 옆에 놓인 술잔을 들어 단숨에 비우고,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하늘은 이미 어두워졌고, 뜰 밖에는 따뜻한 노란 조명이 켜져 있었다.“나 집에 있어.”지은영은 놀란 듯 물었다.“우리 집 문 앞이라고요? 알았어요... 지금 나갈게요.”지은영은 전화를 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소준혁도 따라 일어났다.“허서령이야?”“오빠가 그걸 어떻게 알아?”지은영은 경계하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소준혁도 예전에 허서령을 좋아했었다. 하지만 허서령은 지강산을 선택했었다.“내 동생이 말해 줬어. 허서령이 어머니 모시고 제산시에 병 보러 왔다고.”소준혁은 휴대폰을 집어 들며 꽤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오랫동안 못 봤잖아. 나도 같이 나갈게.”“안 돼.”지은영은 매섭게 거절하고, 못난 둘째
지은영은 고개를 돌려 그를 힐끗 보았다. 소유하의 큰오빠, 소준혁은 막 가업을 이어받은 터라 책임이 막중했다.“주말엔 제대로 쉬어야지. 이렇게 모이기 힘든데 일은 그만해.”이승제가 말했다.소준혁은 휴대폰을 내려놓고 자리를 옮겨 앉았다.“그래, 주말엔 제대로 놀아야지. 강산아, 와서 카드 치자.”지강산은 술잔을 들고 몸을 비스듬히 창가에 기댄 채 창밖으로 점점 사라지는 저녁 빛을 바라보며 담담히 대답했다.“큰형 불러서 해.”구석에서는 지태일이 바른 자세로 앉아, 뜻이 맞는 또 다른 친구와 바둑을 두고 있었다. 강직하고 차가운 얼굴은 생각에 잠겨 한층 깊어 보였고, 미간에는 주름이 잡혀 있었다.“바둑 두고 있어.”지은영은 자리에서 일어나 지강산 곁으로 가더니 그의 팔을 붙잡고 큰 찻상 옆으로 끌고 가 눌러 앉히며 말했다.“둘째 오빠, 우리랑 좀 놀아 줘.”지강산은 술잔을 내려놓고 몸을 앞으로 숙여 패를 집었다. 그러고는 자연스럽게 패를 섞으며 말했다.“그래, 너랑 놀아 줄게.”저쪽에서는 강직하기로 소문난 나이 많은 두 형이 바둑을 두고 있었고, 이쪽에서는 지강산, 지은영, 소준혁, 이승제가 고스톱을 치고 있었다.그 자리의 유일한 여자였던 지은영은 유난히 사랑을 받았다. 모두가 그녀에게 맞춰 주었고, 지강산 역시 당연히 그녀 뜻을 따라 주었다.소유하는 원래 소준혁을 따라오려 했지만, 지강산이 한마디 했다.“걔가 오면 난 안 갈 거야.”그래서 소유하는 데려오지 않았다.지강산과 지태일은 평소 명원에 살지 않았다. 가끔 집에 와 부모님을 뵙고 친구들과 모일 뿐이었다.사람들은 패를 주고 받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며칠 동안 고민하던 일을 지은영은 결국 참지 못하고 떠보듯 천천히 입을 열었다.“오빠들, 내 친구 하나가 정말 골치 아픈 일을 겪었는데, 의견 좀 물어보고 싶어.”소준혁이 바닥에 나온 초피 한 장을 집어 자신의 패와 맞추며 말했다.“말해 봐. 무슨 일인데.”지은영은 자신의 패에서 비 피 한 장을 내려놓으며, 몰래
허서령은 눈물을 머금고 웃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지은영은 그녀의 슬픈 미소를 바라보다가 밖으로 나가지 않고 다시 돌아와 허서령을 끌어안았다.갑작스러운 포옹에 허서령의 힘없이 무너져 있던 몸에도 조금의 온기와 힘이 스며들었다. 그녀는 잠시 멈칫하더니, 결국 참지 못하고 얼굴을 지은영의 어깨에 묻은 채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지은영은 그녀를 끌어안고 두 손으로 등을 가볍게 쓸어 주며, 마음 아픈 목소리로 낮게 중얼거렸다.“뭐든 혼자서 다 짊어지려고 하지 말아요. 제가 본 건 언니가 우리 둘째 오빠를 사랑하지 않는 모습이 아니에요. 너무 사랑해서, 오빠의 앞날을 망치고 싶지 않았고, 오빠가 법을 어기게 만들고 싶지 않았고, 선택 때문에 고통에 빠지게 하는 것도 차마 못 해서 죄책감까지 떠안고 헤어진 거예요.”지은영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나쁜 사람 역할은 다 언니가 하고, 좋은 평판은 우리 둘째 오빠한테 남겨 준 거네요.”허서령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녀는 몸을 가늘게 떨며 흐느끼다가, 지은영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목이 멘 목소리로 낮게 말했다.“은영아, 도은정도 꽤 좋은 사람이야. 두 사람은 행복할 거야.”“도은정은 행복하겠지만, 우리 둘째 오빠가 행복할지는 모르죠.”지은영은 천천히 그녀를 밀어냈다.“서령 언니, 전 우리 둘째 오빠가 네 번째 방법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 더 믿고 싶어요.”말을 마친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허서령은 지은영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마음도 함께 깊이 가라앉았다.‘뒤집을 수 없는 사건에, 무슨 네 번째 방법이 있을까...’허서령은 힘없이 계단에 주저앉았다. 두 팔을 무릎 위에 올리고 얼굴을 팔 사이에 묻은 채 아주 오랫동안 마음을 가라앉혔다.병실로 돌아오자 오정화가 물었다.“네 친구는?”“돌아갔어요.”허서령은 병상 옆으로 가 앉았다.“엄마, 은영이한테 제가 아픈 거 말했어요?”“안 했어.”오정화는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네가 이런 병에 걸린 걸 알면 우울하고 부정적
공기가 얼어붙은 것처럼 정적이 내려앉았다. 주변의 소음이 잦아들고 세상의 색채가 빛을 잃어가는 가운데 오직 지강산만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연한 블루 반팔 셔츠에 블랙 바지 차림의 지강산이 청량하면서도 멋진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평범한 출근룩이었음에도 조각 같은 이목구비, 탄탄한 몸매와 훤칠한 키 덕분에 우아하고 기품이 흘러넘쳤다.그가 깊고 어두운 눈으로 빤히 쳐다보자 허서령은 저도 모르게 긴장감에 휩싸였다.소유하가 슬리퍼를 가져와 지강산의 앞에 놓으며 살갑게 굴었다.“오빠, 신발 갈아 신어.”하지만 지강산은 아무 반응
다음 날.업무를 마친 허서령이 휴대폰을 들어 심인혜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인혜야, 깼어?][어, 깼어.][시욱 씨랑은 어떻게 됐어?][얘기 잘 끝냈어. 시욱 씨가 양보하기로 해서 결혼식은 예정대로 진행해.][미안해서 어떡하지? 지금 손에 엄청 중요한 사건이 하나 있거든. 다음 달에 출장 가야 할 것 같아. 들러리 못 서줄 것 같은데... 이번 한 번만 봐주면 안 될까?][양쪽의 비주얼 담당 두 사람이 다 못 온다고? 둘이 짰어?][그게 무슨 소리야?][지강산 씨도 일이 생겨서 못 온대.]지강산 역시 허서령을 만나고
허서령은 진심으로 겁이 났다.지난번 사람들이 북적이는 호텔에서도 허서령에게 키스를 퍼부었던 지강산이었다.지금은 새벽 두 시가 넘은 시간인 데다가 아파트 복도에 인적도 끊겼다. 지강산이 또 무슨 짓을 할지 장담할 수 없었다.“강산 씨도 여기에 올 줄은 몰랐어요.”허서령이 떨리는 목소리로 현관문에 몸을 바짝 붙였다. 당장이라도 문을 두드리며 살려달라고 소리칠 기세였다.“강산 씨 눈앞에 일부러 나타난 게 아니에요.”지강산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말없이 구석에 있는 쓰레기통으로 걸어가더니 피우던 담배를 비벼 꺼서 던져 넣었
병원 안.허서령이 수납을 마치고 영수증을 챙겨 병원을 나섰다. 그때 진성호가 뒤쫓아와 허서령의 팔을 거칠게 붙잡았다.“지난번에 내가 얘기했던 거 생각해 봤어?”허서령이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않고 진성호의 손을 뿌리치며 째려봤다.“미친놈.”진성호의 얼굴이 순식간에 험악하게 일그러지더니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그러고는 두 손을 허리에 얹고 오만한 태도를 취했다.“허서령, 나한테 시집오면 배상금 1억 6천만 원을 주지 않아도 돼. 우리 아버지 병원비도 낼 필요 없고. 게다가 너의 엄마가 원하는 대로 은행에서 1억 원 대출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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