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주님이 상관하지 않는다면 나 윤구주가 관리해야지!”패기 넘치는 목소리가 윤구주의 입에서 흘러나왔다.“육도진 우상, 나 대신 국주님께 말을 전해줘. 문벌, 세가, 종문이 감히 우리 화진의 질서를 어지럽힌다면 내가 전부 처단할 거라고 해. 사람이 몇 명이든, 배후에 얼마나 대단한 세력이 있든 상관없어. 난 한 말은 꼭 지켜.”우레와도 같은 목소리가 육도진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그는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저하의 말씀은 꼭 그대로 전하겠습니다!”“하지만 저하... 이런 말씀을 드려도 되는지 모르겠지만.”육도진은 잠깐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말해.”윤구주가 말했다.“문벌, 세가, 종문, 3대 서열 말입니다. 현재 형세를 보면 오직 문벌만이 대부분 문씨 일가 편에 섰습니다. 제가 보기엔 꼭 필요하지 않다면 당분간 세가, 종문과는 척을 지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2대 서열이 흔들린다면 우리 화진의 평화가 깨질 테니 말입니다.”한 나라의 우상인 육도진은 당연히 화지의 안위를 걱정해야 했다.그의 말대로 천하 무도는 3대 서열 문벌, 세가, 종문으로 나뉘었다.현재 상황을 보면 윤구주가 상대한 문벌은 스스로 죽음을 자초한 문벌들뿐이었다. 세가와 종문 쪽은 문벌과는 급이 달랐다.수천 년의 역사를 가진 화진에서 세가는 어떤 존재인가?세가는 가장 일찍 출현한 제자백가, 공맹이 선대였다.제자백가는 거의 2천 년 가까이 유구하게 전승되었다. 그러니 세가의 저력이 얼마나 방대할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세가를 제외하고 천하 무학의 절정인 종문도 있었다.예를 들면 서요산, 소림 등 천 년 가까이 종적을 감춘 고대 대형 종문이 그에 속했다.만약 서요산과 소림 모두 출동한다면 화진은 아마도 큰 혼란에 빠졌다.그래서 육도진은 두려웠다.“육도진 우상, 걱정하지 말아. 나 윤구주는 아무나 죽이는 사람이 아니야. 그러니까 세가, 종문에서 죽음을 자초하지 않는 이상 난 그들을 건드리지 않을 거야. 그리고 내 마음은 변하지 않아. 그들이 죽음을
윤구주는 고개를 돌려 육도진의 두 눈을 바라보면서 천천히 말했다.“내가 알기론 16년 전 육도진 우상은 윤씨 일가와 아주 가까운 사이였지. 그리고 그때 윤씨 일가는 화진의 최고 문벌이었어. 심지어 국주님마저도 직접 윤씨 일가를 위해 천하제일이라는 글을 써줬지.”윤구주의 시선을 마주하게 된 육도진은 저도 모르게 마음 한구석이 찔렸다.그는 서둘러 시선을 피하면서 헛기침을 했다.“저하... 16년 전, 저는 윤씨 일가와 사이가 꽤 좋았습니다. 당시 윤씨 일가는 우리 서울의 제일가는 가문이었기 때문이죠. 심지어 4대 고대 무술 세가 모두 윤씨 일가에게 예의를 차려야 했어요.”“윤씨 일가를 그렇게 잘 안다면 윤신우가 죽어 마땅한지 아닌지 얘기해줄 수 있나?”그 말에 육도진은 두 다리에 힘이 풀렸다.‘뭐?’그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앞에 있는 윤구주를 바라보았다.“저하, 그건 뭐 때문입니까...?”윤구주는 육도진을 바라보지 않고 몰아치는 비바람을 바라보면서 천천히 말했다.“윤신우가 죽어 마땅한지 아닌지를 물었어.”“그... 그... 제가 어떻게 그 질문에 대답하겠습니까? 윤신우 씨는 아주 훌륭한 분입니다. 30년 전 이미 서울 최강이라고 불렸었죠. 게다가 그동안 그는 나쁜 짓을 한 적도 없습니다...”육도진은 잠깐 고민하다가 말했다.“그래? 하지만 나한테는 나쁜 짓을 한 적이 있어.”윤구주는 말머리를 돌렸다. 그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차가워졌다.“내 기억이 맞다면 육도진 우상은 나와 윤신우의 관계를 알겠지?”윤구주가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한 나라의 우상인 육도진은 난감해졌다.그는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모른 척해야 했다.16년 전 그 사건에 대해서 감히 언급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그런데 윤구주가 물으니 어떻게 해야 할까?”“육도진 우상, 난처해하지 않아도 돼. 난 오늘 이미 많은 사람들을 죽였으니까 편하게 말해도 돼.”윤구주의 말뜻은 명확했다. 오늘 육도진이 무슨 얘기를 하든 절대 그에게 손을 대지 않겠다는 뜻이었다.하지
16년 전 그날 밤, 윤구주의 말대로 육도진은 흑기 금위군을 이끌고 윤씨 일가를 찾아갔었다.그리고 그날 이후로 윤신우는 윤구주 모자를 윤씨 일가에서 쫓아냈다.오늘 윤구주는 제대로 알아볼 생각이었다.16년 전 일에 대해 질문하자 육도진은 몸서리를 쳤다. 그는 두려웠고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를 몰랐다.“육도진 우상, 얘기해 봐.”윤구주는 고개를 돌려 육도진을 바라보았다.그는 비록 평온한 어조로 말했지만 육도진은 보이지 않는 살기가 자신을 감싸는 걸 느꼈다.“저하!”육도진은 윤구주의 앞에서 털썩 무릎을 꿇었다.“육도진 우상, 이게 무슨 뜻이지?”한 나라의 우상인 육도진이 갑자기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자 윤구주는 입을 열었다.“용서해 주십시오, 저하! 16년 전 일에 대해서는 묻지 말아 주십시오. 꼭 진실을 알아야겠다면 차라리 절 죽여주십시오!”육도진은 퍽 소리 나게 바닥에 머리를 조아렸다.진짜로 죽여달라는 듯이 말이다.육도진이 무릎을 꿇자 윤구주는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죽음도 두렵지 않은 거야? 그 진실을 지키기 위해서라면?”육도진은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얘기할 수 없었다.절대 할 수 없었다.죽음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이 일이 알려진다면 화진 전체에 어떤 재앙이 일어날지 아무도 예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그래서 얘기할 수 없었다.“저하! 16년 전 일은 저하와 저하의 어머님께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제가 저하의 아버님인 윤신우 씨께 저하와 저하의 어머니를 서울에서 내쫓으라고 했습니다! 제가 멍청했습니다! 죽어야 마땅한 사람은 접니다! 저를 죽여주십시오!”육도진은 다시 한번 죽여달라면서 윤구주를 향해 머리를 조아렸다.그러나 윤구주는 손을 쓰지 않았다.그는 그저 싸늘한 눈빛으로 빗속에서 무릎을 꿇은 육도진을 바라볼 뿐이었다.“그 말은 16년 전 윤신우 씨가 핍박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우리 모자를 쫓아냈다는 거야?”“네, 제가 강요했습니다. 이 일은 그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습니다.”육도진이 말했다.“하하
억센 빗줄기 속에서 한 나라의 우상인 육도진은 무릎을 꿇은 채 오랫동안 일어나지 못했다.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타다닥.한 사람이 육도진의 앞에 나타났다.“휴, 우리 아들이 결국엔 눈치를 챘군...”그의 입속에서 음성이 흘러나왔다.빗속에서 어느샌가 윤신우가 육도진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바닥에 무릎 꿇고 있던 육도진은 그 말을 듣고 묵묵히 일어났다.그는 얼굴의 빗물을 닦으면서 고개를 들어 윤신우를 바라보았다.“가주님, 두 분께 죄송합니다...”육도진은 그렇게 말하면서 눈시울을 붉혔다.윤신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육도진의 어깨를 토닥였다.“당시 육도진 씨는 최선을 다했어요. 우리 아들과 아내가 살아서 윤씨 일가를 떠날 수 있었던 건 육도진 씨 덕분이었어요.”윤신우는 나직하게 말했다.사실 16년 전 윤구주는 죽을 운명이었다.하지만 육도진이 마지막에 윤구주와 윤구주 어머니의 목숨을 살려줬다.윤구주는 아직 그 사실을 몰랐다.“휴, 16년이나 흘러서 다시는 그 일이 언급되지 않을 줄 알았는데... 정말 생각지도 못했네요...”육도진은 말하면서 한숨을 쉬었다.“육도진 우상,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않아도 돼요. 그 은혜를 전 평생 기억할 겁니다. 하지만 문씨 일가가 공공연히 제 아들을 해치려 하고 화진의 문벌 또한 소란을 일으키니 저로서는 가만히 있을 수 없어요.”육도진이 말했다.“가주님 뜻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알고 있다면 오늘 우상에게 한 가지 질문하고 싶네요.”윤신우는 고개를 돌려 진지한 눈빛으로 눈앞의 육도진을 바라보았다.“말씀하십시오, 가주님!”육도진이 말했다.“문씨 일가가 공공연히 우리 아들을 해치려고 하는 게 설마 또 황성의 그분이 내린 명령입니까?”윤신우는 평온하게 물었다.그러나 별거 아닌 것 같은 말 한마디에 육도진 우상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가주님... 아니, 아닙니다!”육도진은 당황한 듯 서둘러 해명했다.“확실합니까?”윤신우는 음산한 눈빛으로 육도진을 죽어라 노려보았다.“제 목숨을
그래서 윤구주의 형제들은 그가 걱정됐다.민규현은 윤구주의 방을 바라보다가 한참 뒤에 대답했다.“아마도 가족을 만나신 것 같아.”‘뭐라고? 가족?’사람들은 어리둥절해졌다.“맞아. 저번에 정양문에 갔을 때 난 먼 곳에서 아주 강한 절정 강자의 기운을 감지했어. 그 기운은 우리 저하의 기운과 아주 비슷했어. 아마도 저하 가족의 기운이 아닐까 싶어!”민규현은 이유를 얘기했다.“형님 말을 들어보니 갑자기 떠오르네요. 저하는 십여 분 전에 잠깐 자리를 비우셨어요... 하지만 아무도 저하가 어디로 갔는지 몰라요.”정태웅은 갑자기 떠올라서 말했다.“맞아요. 도련님은 확실히 당시 십여 분 정도 자리를 비웠어요. 그리고 돌아온 뒤에 기운이 완전히 달라졌죠.”몸매가 좋고 아름다운 재이가 말했다.“상황을 보아하니 저하께서 주인님을 만나신 것 같네요.”용민이 갑자기 한숨을 쉬며 말했다.윤신우가 직접 키운 사사로서 재이, 용민, 철영은 두 부자 사이에 아주 두꺼운 벽이 존재한다는 걸 알았다.그러나 하인으로서 뭔가 물을 수 없었다.“저하의 집안일이라면 우리는 걱정할 필요가 없겠군.”민규현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물러났다.민규현은 윤구주의 방을 힐끗 본 뒤 결국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조용한 방 안.윤구주는 책상다리를 하고 있었다.오늘 그는 공씨, 제씨, 옥씨, 신씨 4대 고대 문벌을 멸문했고 육도진을 만났다.윤구주는 16년 전 일을 줄곧 마음에 두고 있었기에 오늘 육도진에게 질문했다.그리고 육도진에게서 알아낸 사실은 윤신우도 그때 강요당했을지도 모른다는 점이었다.진짜 범인은 대체 누구일까?윤구주는 비록 대충 짐작이 가지만 아직은 단정 지을 수 없었다.그가 생각해 둔 사람은 지위가 너무 높았다.다들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그런 지위였다.고개를 든 윤구주의 그윽한 눈빛에 천천히 어둠이 드리워졌다. 아무도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랐다....“할아버지, 공씨, 제씨, 옥씨, 신씨 4대 문벌 모두 정양문에서 윤구주에게
문아름의 걱정 가득한 표정을 본 문창정은 기괴하게 웃었다.“괜찮다. 그게 내가 예상한 결과니까 말이야.”‘응?’“할아버지, 그 말씀은 윤구주를 말리지 않겠다는 뜻인가요?”문아름은 조금 궁금해졌다.“걱정하지 마. 지금 문벌 사람들이 도륙당했으니 분명 누군가 나설 거야. 잊지 마. 화진의 무도 중 6할은 문벌 출신이니까. 게다가 세가, 종문도 아직 나서지 않았어. 그게 뭘 의미하겠어?”문아름은 고개를 저었다.“다들 기다리고 있다는 뜻이야.”문창정은 그렇게 말한 뒤 시선을 들어 어둠을 바라보았다.“6년 전, 윤구주는 곤륜에서 왕이 되었을 때 무력으로 그들을 제압했어. 사실 다들 알고 있는 거야. 당시의 세가, 종문은 곤륜의 체면 때문에 일부러 참은 거란 걸 말이야. 그런데 윤구주는 이번에 공공연히 우리 3대 서열에 도전장을 내밀었어. 세가와 종문의 늙은 괴물들이 과연 그걸 참을 수 있을까?”문아름은 그 말을 듣고 눈을 반짝였다.화진의 무도는 문벌, 세가, 종문 3대 서열로 이루어졌다.그런데 윤구주는 문벌 사람들을 도륙했고 심지어 그들 가문의 절정 강자들까지 전부 죽였다.세가와 종문이 과연 가만히 있을까?“역시 할아버지께서는 생각이 깊으시네요! 덕분에 가르침을 얻었습니다!”문아름이 말했다.가부좌를 틀고 있던 문창정은 사악하게 웃으며 말했다.“두고 봐. 서울은 곧 변할 테니까. 게다가 16년 전 그 사건도 이젠 밝혀져야 할 때가 왔어.”“16년 전이요?”문아름은 살짝 놀랐다.“맞아. 당시 윤씨 일가의 위엄은 우리 4대 고대 가문과 비슷한 수준이었어. 게다가 당시 국주님께서 직접 천하제일이라는 글을 써서 윤씨 일가에 하사해 주셨었지. 그런데 당시 천하제일 윤씨 일가가 무엇 때문에 그동안 정치에 참여하지 않고 세상사에 무관심했는지 아니?”문아름은 고개를 저었다.“바로 윤구주 때문이야! 당시 윤구주를 죽이라고 한 사람이 바로 국주님이었기 때문이지. 하하하하!”문창정은 크게 웃었다.“뭐라고요? 국주님이라고요?”그 말에 문아름의 아름
윤창현의 말대로 윤씨 일가만으로도 문벌의 폭동을 막기에는 충분했다.하지만 윤신우가 걱정하는 건 다른 것이었다.“창현아, 넌 틀렸어. 처음부터 내가 걱정한 건 문벌이 아니야. 내가 걱정한 건 세가와 종문의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진짜 강자들이야!”윤신우는 천천히 말했다.화진의 3대 서열 중 종문이 첫 번째고 그다음이 세가, 그리고 마지막이 문벌이었다.윤신우는 처음부터 문벌이 안중에도 없었다. 그가 진짜 신경 쓰는 건 종문과 세가였다.특히 종문 말이다.종문은 아주 비밀스럽다. 종문에는 진정한 절정 강자가 있을 뿐만 아니라 절정보다 더욱 강한 수행자가 있었다.전설 속 오래된 인물들도 오랫동안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그들이 이번에 모습을 드러낼지는 알 수 없었다.“형님 말이 맞아요. 일개 문벌은 우리 윤씨 일가에 아무런 위협도 안 되죠. 하지만 세가와 종문은 달라요. 그들이 모습을 드러낸다면 우리는 언제든 싸울 준비가 돼 있어야 해요.”셋째 윤정석이 입을 열었다.“흥! 난 상관없어! 누구든지 우리 조카를 해치려고 한다면 나 윤창현이 그놈을 죽여버릴 거니까!”난폭한 성정의 윤창현이 입을 열었다.그는 세가든 종문이든 상관없었다.그가 신경 쓰는 건 윤씨 일가와 윤구주뿐이었다.윤창현의 말을 들은 윤정석은 쓴웃음을 지었다.“창현아, 정석아. 너희는 구주 일로 지난 16년간 날 미워했지?”윤신우는 갑자기 고개를 들어 윤창현과 윤정석을 바라보았다.윤신우가 갑자기 16년 전 일을 언급하자 윤창현과 윤정석은 흠칫했다.두 사람은 믿기 어렵다는 표정으로 서로 시선을 주고받았다.“형님, 오늘 왜 갑자기 16년 전 일을 언급하시는 거예요?”윤정석은 궁금해했다.그동안 윤구주 모자를 쫓아낸 일은 윤씨 일가에서 금기시되었다.아무도 그 얘기를 꺼낼 수 없었다.특히 윤신우 앞에서 말이다.그런데 오늘은 윤신우가 직접 그 일을 언급했다.윤신우는 아주 평온한 얼굴로 밖을 바라보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이제 너희들에게 진실을 알려줄 때가 된 것
“형님 말씀은 구주와 형수님을 내쫓았던 이유가 두 사람을 지키기 위해서였다는 뜻인가요?”윤정석은 눈이 휘둥그레져서 윤신우에게 물었다.윤신우는 대답하지 않았다.그러나 그의 눈빛에서 괴로운 기색이 보였다. 그는 밖을 바라보았다.“그러지 않았더라면 구주와 우리 아내는 죽었을 거야.”그 말에 윤창현과 윤정석은 경악했다.그동안 두 사람은 줄곧 그 일로 윤신우에게 불만을 품었다.그들은 윤신우가 너무 매정하다고 생각했었다.그런데 그에게 이런 고충이 있을 줄은 몰랐다.“대체 어떤 빌어먹을 놈이 감히 우리 형수님과 구주를 해치려고 한 거죠? 도대체 무엇 때문이죠?”윤창현은 주먹을 꽉 쥐면서 화를 내며 살기를 내뿜었다.윤정석 또한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윤신우를 바라보았다.“그게 누군지는 알 필요 없어. 너희가 알아야 하는 건 이 오래된 일을 다시는 언급하면 안 된다는 것뿐이야. 이걸 언급하는 건 우리 윤씨 일가에 도움은커녕 해가 될 뿐이야. 심지어 우리에게 멸문지화를 가져다줄 수도 있어.”‘뭐라고? 멸문지화?’“형님, 우리 윤씨 일가는 수백 년의 역사가 있어요. 우리가 언제 누군가를 두려워한 적이 있나요?”윤창현은 불평했다.셋째 윤정석은 똑똑했다.그는 윤신우의 말을 듣고 이상함을 눈치챘다.그는 잠깐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둘째 형님, 큰형님 말대로 합시다. 큰형님이 조사하지 말라고 하면 조사하지 않는 게 맞아요.”“하지만 그냥 이렇게 넘어가고 말 거야? 젠장. 믿을 수 없어. 이 세상에 감히 우리 윤씨 일가를 괴롭히는 놈이 있다고?”윤창현은 여전히 내키지 않아 했다.“형님!”윤정석은 윤창현의 옷깃을 힘껏 잡아당기면서 그에게 조용히 하라는 듯이 손짓을 했다.윤정석이 더는 묻지 말라고 손짓하자 윤창현은 그제야 코웃음을 치면서 조용히 했다.“구주와 아내가 떠난 뒤 난 그들을 감히 만날 수가 없었어. 다가갈 수도 없었고. 그저 두 사람이 온갖 고초를 겪는 걸 지켜봐야만 했었지. 그리고 결국... 우리 아내는 병으로 세상을 떴어.”마
하지만 한 계단씩 갈수록 더욱 어려워지는 난관들도 이 평범한 사람에게는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다.만약 윤구주와 맞서야 하는 적의 입장이었다면 지금 이렇게 차분히 계단을 오르는 윤구주는 마치 깊은 심연 그 자체였을 것이다.그의 강력함은 도무지 가늠할 수 없었고 오히려 그가 올라올수록 위에 있는 사람들은 엄청난 압박감에 휩싸였다.검종의 검객들이 잠시 정신을 놓은 사이 윤구주는 이미 사백 계단까지 올라와 있었다.하지만 사백 계단쯤으로는 아무도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화진의 또 다른 황자 구주왕의 후계자였으니까.윤구주가 오백 계단을 밟는 순간 모든 이들은 숨을 죽이고 그를 응시했다.눈길을 떼지 못한 채 그의 오름을 지켜보았다.오백일…… 오백이십! 오백오십! 오백구십구!“마침내 구구관에 도달했다.”“칠구는 수겁이요 구구는 극히 넘기기 어려운데.”진정한 고수들은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과연 윤구주가 이 한 걸음을 쉽게 넘을 수 있을지 모두가 궁금해했다.윤구주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산 아래를 바라보았다.그가 본 것은 단순한 산이 아니라 마치 화진의 온 세상 같았다.한눈에 화진의 대지와 산천이 모두 담겼다.눈앞에 펼쳐진 화진의 아름다운 대지는 숨 막히는 광경이었다.하지만 동시에 이 끝없는 강산 곳곳에 묻혀 있는 수많은 해골도 함께 보였고 그의 마음은 순식간에 비장함과 슬픔으로 가득 찼다.윤구주의 내면을 감지한 서요산 검종 종주의 법신이 곧바로 그의 곁에 나타났다.“구주야 화진의 산천을 잘 살펴봐! 천하의 용맥은 모두 화진에서 비롯되었고 이 한 획 한 획은 백성의 척추와 같다! 눈에 비치는 물의 맑고 흐림은 중요하지 않아. 지나치게 눈 부신 빛은 우리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고 너무 어두운 밤은 희망을 앗아가기 마련이지. 하지만 어떤 변화가 있더라도 화진의 이 산천은 영원히 굳건히 서 있을 거야. 왜냐하면 푸른 산마다 묻혀 있는 충신의 뼈와 넋들이 이 나라를 지켜주고 있으니까.”서요산 검종 종주는 윤구주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그 온
진인들은 말했다. 임정설이 만약 집념을 내려놓는다면 육백 계단까지도 오를 수 있을 거라고.장인 대진인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하지만 그가 진정으로 집념을 놓는다면 더 이상 화진의 국주가 아니지. 바로 이런 끈질긴 의지가 있기에 그분이 화진 백성을 다스릴 수 있는 것이다.”다른 진인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운명이란 그런 법이다. 아마도 집념을 놓았다면 임정설은 오백 계단조차 오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이때 임정설은 아직 남아 있는 절반의 계단을 바라보며 씁쓸히 미소 지었다. “어쩌면 여기서 멈춰야겠구나.”임정설은 다시 뒤를 돌아 윤구주를 바라보았다. 그가 자기 자식이자 동료처럼 여기는 윤구주가 과연 몇 계단을 오를지 궁금했다.깊은 생각에 잠긴 임정설이 곧바로 말을 꺼냈다.“구주야 이제 네가 올라서 봐! 화진의 구주왕다운 실력을 보여줘! 적어도 나보다는 못하면 안 되지 않겠냐?”아래에 서 있던 윤구주는 고개를 살짝 저었다. 원래 그는 별 관심이 없었지만 국주의 바람이라면 흔쾌히 도전할 마음이었다.“명 받들겠습니다!” 윤구주는 말을 마치자마자 곧바로 계단을 밟아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가기 시작했다.구주왕이 등천로에 도전했다는 소식에 서요산 검종 전체가 술렁였다.검객은 물론이고 잡일을 돕는 제자들까지 모두 금정에 모여들어 그의 모습을 보고자 했다.심지어 하늘 위 어둑한 구름 사이에서도 한 쌍의 법안이 열렸다. 바로 서요산 검종 종주의 법신 환영이었다.임정설이 먼저 정상에 올랐고 장인 대진인을 포함한 일곱 진인과 서요산의 모든 제자들은 화진의 황자를 향해 몸을 숙여 예를 갖추었다.“모두 일어나시오. 그대들이 없었다면 화진은 이미 혼란 속에 빠졌을 것이오. 진정 국가와 화진을 위해 헌신한 것은 바로 그대들입니다.” 임정설은 화진의 모든 백성을 대표할 순 없지만 왕실을 대표하여 임 씨 일족의 지도자로서 서요산 검종의 노고에 진심으로 감사의 뜻을 표했다.“국주께서 과찬입니다. 우리는 그저 각자의 방식대로 묵묵히 힘썼을 뿐입니다. 화진의 백
일곱 진인들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그들은 국주가 이미 등황의 경지에 이르렀으니 사백 계단은 쉽게 오를 것으로 예상했다. 과연 그들의 예상대로 임정설은 멈추지 않고 계속 오르며 오백 계단을 가볍게 밟아 올랐다. “오백 계단을 밟으면 등황의 경지에 오를 수 있습니다. 우리 일곱 진인 중에서도 오직 장인 대진인께서만 과거에 오백 계단에 오르셨고, 현재 서요산에 살아계신 유일한 오백 계단 수련자이십니다. ” 한 진인이 감탄하며 말했다.이 말을 듣자 옆에 있던 백호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선임 도사님 그러면 그 도사님도 황자란 말씀입니까? ”“하하! 우리 서요산에서는 외부의 그런 칭호를 쓰지 않아요. 우리 사이에서는 그를 반신이라고 부릅니다.” 진인들이 웃으며 말했다.청해가 옆에서 덧붙였다. “서요산 검종에서 말하는 반선이 황자를 뜻하는 거야. 근데 그 서요산 반선 진짜 어마어마하게 강한 인물이거든. 예전에 곤륜 구역에서 귀한 영약 찾으러 들어왔다가 우리 빙신전 전주랑 빙황 두 명이 같이 상대했는데도 둘 다 거의 죽을 뻔했어. 결국 아사 신전한테까지 도움 요청해서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지.”“뭐라고?”백호는 놀라서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진짜 그렇게 강한지 의문이 들었다.일곱 진인 중 가장 나이 많은 그 진인은 백호의 단순한 반응에 웃음을 터트렸다. 사실 그가 바로 그 반선이었다. 다만 백호가 워낙 세상 물정에 둔감하여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저 놀라기만 하고 있었다.그사이 임정설은 이미 오백오십 계단까지 올라갔다. 하지만 이 단계에 이르자 임정설도 거의 극한에 도달했다.“역시 직접 올라와 봐야 이 압력을 제대로 실감하는구나! 오백사십 계단까진 무리 없었는데 오백오십 계단에서 도저히 버틸 수가 없구나.”지금 임정설을 압박하는 것은 단순한 술도의 압력만이 아니었다.과거의 온갖 기억들이 마장이 되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일곱 진인은 모두 임정설의 기운이 혼란스러워진 것을 느꼈다.“장인 사형, 국주님께서 심마에 걸리셨군
청해의 눈길이 자주색 도포를 입은 진인에게로 향했다.서요산검종에서 종주를 제외한 나머지 일곱 명의 진인이 가장 높은 수련을 가지고 있으며 평소 종문 내의 모든 일은 이들 일곱 명이 책임지고 있다.기세는 마치 대강의 파도가 넘실대듯 깊고 끝이 보이지 않는 산과 숲처럼 무한히 이어져 있었다. 그의 수련은 깊이가 가늠할 수 없을 정도였다.“서요산 7대 진인의 수련이 극 신급 절정이라고 들었는데 지금 보니 그 말이 너무 가볍게 들리네요. 귀하의 수련은 적어도 극 신급 절정 후반에 다다랐군요.”청해는 세 명의 진인에게 경의를 표하며 몸을 굽혔다.“서요산의 전통은 천 년을 자랑하며 그 깊이는 변함없이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반면 곤륜 구역은 스스로 신을 자처한 이후로 계속해서 내분을 일으켰습니다. 수련을 통해 세상을 떠난 후 도를 깨닫는다는 말처럼 곤륜 구역은 천하의 영기와 천물을 흡수했지만 제 생각에는 도를 얻지 못한 곳입니다. 지금 당신이 화진에게 올바른 수를 두는 것은 맞습니다. 앞으로 열심히 노력하면 극 신급 절정 후반도 절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한 진인이 답례하며 말했다.그때 몇몇 사람들은 서요산 검객들의 함성에 이끌려 사방을 살폈다. 백호가 사백 계단을 올라갔다는 소식이었다.“대단한데요. 서요산이 전성기였을 때도 사백 계단을 오른 이는 드물었어요. 우리 몇몇 진인들도 입문 시에 사백 계단을 넘은 적은 없었죠.”몇몇 진인들이 칭찬했다.이는 백호가 미래에 매우 큰 가능성을 지녔음을 의미했고 적어도 극 진경 후반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극 진경 후반은 곤륜 구역에서 신전의 전주가 될 수 있는 실력이다.지금 사백 계단에 오른 백호는 거의 한계에 다다랐다. 완전히 의지로 버티며 강력한 정신력으로 계속해서 오르고 있었다.그러나 아무리 강한 운명을 지녔다 해도 천지의 이치를 막을 수는 없다.사백오십 계단에 도달했을 때 백호는 결국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의식을 잃은 것은 시험이 끝났다는 신호였고 백호는 곧 깨어났다.“겨우 사백오십 계단이라니
서요산 검객들이 모두 그 무인의 정체를 궁금해하자 진인도 더 이상 뜸 들이지 않고 말했다.“저분은 구주왕 휘하의 화진 군신이자 국방부 대장 백호 장군이시다.”검객들은 모두 입이 벌어진 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군신의 명성은 당연히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보호하는 영웅이었으니까.“정말 구주왕 휘하의 군신이라니!”“역시 저런 굳센 의지가 그냥 나온 게 아니었어! 수많은 전장을 누빈 명장다운 모습이다!” 서요산 검객들은 백호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현재 백호는 이미 삼백이십 계단을 돌파한 상태였다. 백호가 혼자 주목을 독차지하는 걸 본 청해도 더 이상 가만히 있지 않고 계단에 발을 내디뎠다.처음 백 계단은 청해도 육신의 힘으로 버텼다. 하지만 백 계단을 넘자 육체만으로는 견디기 어려워졌다. 그는 술법으로 대응하려 했지만 평소 쓰던 빙신전의 신술이 계단 위 술법에는 통하지 않았다.“역시 화진의 서요산 검종은 보통이 아니구나. 이 등천로에선 일반 술법이 먹히지 않으니 천지 영기에 대한 깨달음으로 맞설 수밖에 없겠어.” 청해는 몸을 감싸고 있던 현빙을 거두고 오로지 자신의 속성 영기로만 버티며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막상 올라 보니 이 등천로가 얼마나 어려운지 제대로 실감했다. 이백 계단쯤 오르자 벌써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계단마다 한계를 시험하는 느낌이었다. 올려다보니 백호는 여전히 계단 위로 나아가고 있었다. 청해도 질 수 없다는 마음으로 이를 악물고 버텼다.서요산 검객들도 청해의 수준을 알아보고 속삭였다. “저 이역인은 정말 대단한 내력의 소유자다! 기운이 이미 진인 급에 가까워! 극 신급 절정의 수련자임이 분명해!”이에 대해 진인은 신비롭게 꾸미지 않고 솔직히 말했다. “저자는 곤륜 구역 빙신전의 부 전주 청해다. 경지가 매우 높지. 지금 빙신전은 우리 화진에 귀속되었고 청해 역시 구주왕 휘하의 부하가 되었다. 얼마 전 서울 방어전에서 청현과 목숨까지 걸고 사투를 벌인 끝에 죽을 고비를 넘겼으
백호는 아직도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어느덧 이백오십 계단까지 올라왔다. 이 단계부터는 실체화된 술법이 몸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계단 하나를 오를 때마다 바람, 불 번개와 같은 속성의 영기가 점점 강해졌다. 여기서부터는 육신 횡련의 수련자는 강력한 체질로 버티고 술도 재능이 뛰어난 수련자는 천지 영기를 다루는 능력으로 버텨야 했다. 한마디로 각자의 능력에 따라 갈리는 구간이었다. 어느 한 분야라도 특출나지 않으면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백호는 술도에는 재능이 없었기 때문에 오로지 강인한 육체 하나로 견디고 있었다.웅!성수의 피가 진동하며 백호의 몸을 지탱했다. 각종 속성의 영기가 몰아쳤지만 백호는 성수혈의 힘을 빌려 억지로 앞으로 나아갔다.수련자에게 있어서 성수의 혈맥이나 법보 등은 모두 신체 외적인 재능으로 간주하지만 그렇다고 이것들이 꼼수나 편법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천 가지 변화와 만 가지 신통력이 있어도 결국 만법은 한 가지로 귀결된다. 법기든 혈맥이든 이를 감당하는 것은 결국 본인의 몫이다. 천지 영기를 이용한 술법도 결국은 그 힘을 감당할 수 있어야 사용할 수 있는 것이며 감당하지 못하면 반드시 반작용을 맞게 된다. 따라서 수련의 길에는 애초에 편법이란 존재하지 않았다.성수 혈맥 같은 천지의 보물은 보통 사람이 함부로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윤구주의 도움을 받았다 하더라도 결국 이를 감당하는 건 백호 자신이었다. 성수 혈맥의 힘을 온전히 감당하며 백호는 결국 삼백 계단까지 올라섰다.계단의 꼭대기 근처에는 이미 서요산 검종의 검객들이 여럿 서 있었다. 서요산 검종은 근대에 들어 삼백 계단을 넘는 인재가 드물었다. 최근 백 년 동안 삼백 계단을 넘은 사람이 고작 열 명 남짓이었고 그중 대부분이 삼백여 계단에서 멈췄다. 그런데 지금 백호는 삼백이십 계단까지 올라선 것이다. 이 정도면 서요산 검종 전체가 떠들썩해질 만한 성과였다.이런 제자가 나타난다면 종문 전체가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래서 서요산의 진인들까
“한 사람의 품성을 제대로 살피지도 않고 마구잡이로 그렇게 많은 수련자를 키워낸다면 결국 천하의 마인을 직접 만들어 내는 꼴이 아니겠어?”청현이 바로 그 실패한 예다. 서요산 검종 종주가 청현의 천재성을 아까워한 나머지 그의 인성을 무시하고 양성한 끝에 결국 역도를 만들어 낸 것이다.“그럼 저하 서요산에 입문한 무술 무인들은 평균적으로 몇 계단까지 오르는지 아십니까?” 백호가 호기심에 물었다. 윤구주는 잠시 생각한 뒤 입을 열었다.“무술 무인의 정확한 데이터는 모르지만 검종 종주와 잡담할 때 들어보니 검종 제자들의 수준이 갈수록 떨어져서 천 년 전만 해도 평균 삼백 계단 정도였는데 요즘엔 백 계단도 못 오른다고 하더구나. 가끔 삼백 계단을 오르는 자라도 나오면 검종 전체가 몇 년은 떠들썩할 정도라고 했어.”“구백구십구 계단까지 있는 시험인데 천 년 전 전성기에도 겨우 삼백 계단이요?” 백호는 입술을 삐죽이며 서요산 검종의 수준이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때 한 번 도전해 볼 생각이야?” 윤구주는 흥미롭게 백호를 바라보았다. 백호는 당장이라도 도전하고 싶은 마음에 윤구주의 허락을 구한 뒤 바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한 계단 두 계단... 오십 계단까지는 아무 어려움도 없었다. 백호는 오십 계단에 서서 사람들을 향해 서요산 검종이 별것 아니라며 놀려댔다. 하지만 육십 계단쯤 올랐을 때 처음으로 압력을 느꼈다. 마치 몸 위에 작은 차 한 대가 올라탄 듯한 느낌이었다. 물론 백호에게는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 수준이었다. 그는 계속해서 발걸음을 옮겼다. 백 계단에 도달하자 압력이 갑자기 커졌다. 등에 작은 승용차 대신 소형 트럭이 올라탄 듯한 느낌이었지만 아직 백호의 한계에도 가지 못했다.“근래 사람들의 평균이 백 계단도 못 넘는 이유가 이제야 이해가 되네요. 예전의 무인 횡련은 황제도 오를 수 있었지만 요즘 무인 횡련은 죽어라 노력해도 소형 트럭 하나 못 버티는 수준이니 말입니다.”백호는 농담을 던지며 계속해서 계단을 올라
전에 임정설은 구오 지존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지만 나라를 위해 힘쓰며 수모를 견뎌내고 살아남으려 했다.하지만 이제 황제가 된 그는 죽음을 생각하게 되었다.그 탓에 이번 관문 앞에서 그는 망설였다.살아 있는 자만이 통과할 수 있는 관문이었다.죽음을 마음에 품은 자는 절대로 넘어설 수 없는 관문이었다.그 자리에 있던 사람 중 청해만이 그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생각했다.‘황제가 되면 곤륜 구역에서 최고 경지에 도달하는 건데. 기뻐해도 모자랄 판에 왜 죽음을 택하려는 거지?’“저하, 국주는 아직도 풀리지 않은 듯합니다. 저하도 사랑하던 이에게 배신당했어도 결국 극복해 나갔잖습니까.”백호도 이해하지 못했다.그는 여전히 국주보다는 왕이 더 낫다고 여겼다.“네가 뭘 안다고 그런 말을 함부로 내뱉느냐.” 윤구주가 단호하게 말했다.백호는 머리를 긁적이며 답했다. 그는 어리숙하고 말솜씨도 없기에 생각나는 대로 말했을 뿐이다.“내가 문아름에게 배신당한 건 억울한 일이지만 나는 그녀에게 잘못한 게 없다. 오히려 그녀가 날 배신한 거다. 하지만 국주는 그 반대였지. 그가 그녀를 저버린 거야. 정이 깊으면 오래가지 못하고 지혜가 지나치면 오히려 상처를 입는다. 이 세상에서 가장 쓰라린 후회는 가진 뒤 잃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과 생사를 달리하게 되는 것이다.” 윤구주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만약 소채은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자신도 제정신이 아닐 거라고 느꼈다.“그럼 복수하면 되지 않나요?” 백호가 어리둥절하게 물었다.이때 청해가 눈치를 채고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상대가 너무 강해서 못 이기는 거지. 황제에 오르기 전까진 제대로 맞붙을 힘도 안 돼. 오르고 나서도 이길 수 있을지 장담 못 하고.”윤구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딱 그 말이 맞았다.“그럼 우리가 국주님 대신 복수해 드리면 되잖아요? 국주님은 제 왕이기도 하지만 제 윗사람이기도 하잖아요.”백호가 고개를 갸웃했다.“하하! 만약 세상 사람들이 다 너처럼 솔직하다면 이런
인간이 나쁜 짓을 거듭해 양심을 잃으면 부끄러움도 사라진다. 예전 같으면 아무렇지 않았을 테지만, 지금은 윤구주를 따라 명예심이 생기면서 죄책감도 느끼게 된 청해에게 이 원한의 전법은 고통스럽기만 했다. 물론 곤륜역 한 신전의 부전주로서 정신이 붕괴할 정도는 아니었다.네 사람은 이 원한의 전법도 가볍게 넘어섰다.이때 전법에 관심을 가졌던 임정설이 무언가를 눈치챘다.“구주야, 서요산의 전법은 우연히 들어온 자를 쫓아내는 동시에 수련자의 의지를 시험하는 것이었어. 서요산은 의지력이 확고한 자들만 끌어들인다는 것을 미리 들어 알고 있다. 이게 바로 서요산이 제자를 선발하는 방식인가 보구나.”“그렇습니다. 매년 화진 무도계 사람들이 서요산에 찾아오지만 성공한 자는 극히 드뭅니다. 실패자들 중 십중팔구는 산기슭에서 죽음을 맞이하죠. 어떤 문턱은 넘지 않는 것이 복이 될 때가 있습니다. 모르는 것이 약이죠. 현실을 알고도 바꾸지 못하는 것이 가장 괴로운 법이니까요. 이 관문을 넘는다고 해도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면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죽음뿐입니다.”윤구주의 말이 끝나자 세 번째 전법이 나타났다.첫 번째와 두 번째 전법은 이곳에 들어온 이들을 돌려보내려고 만든 것이지만 세 번째 전법은 달랐다. 이 전법은 살기로 가득 찬 죽음의 전법이었다.평범한 사람들은 여기까지 도달하지 못한다. 이곳까지 온 자들도 앞길의 위험을 보고 함부로 들어가려 하지 않을 것이다. 눈 앞에 펼쳐진 죽음의 길을 보고도 들어가는 자는 스스로 죽음을 원하는 자라서 그런 자들에게 죽음을 내리는 것은 오히려 덕을 쌓는 일이었다.하지만 무도로 도를 깨우치려는 수련자라면 이 관문을 넘기 위해 반드시 목숨을 걸어야 한다. 버텨내야만 수도의 길에 들 수 있고 실패하면 그 후과를 받아들여야 한다.전법 안은 살기로 가득했다. 생기와 영기가 세상을 이롭게 하지 못할지라도 살기와 죽음의 기운은 목숨을 앗아갈 것이 분명했다.진법 내부에는 수많은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무도계에 이름을 날렸던 강자들의 유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