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구주는 고개를 돌려 육도진의 두 눈을 바라보면서 천천히 말했다.“내가 알기론 16년 전 육도진 우상은 윤씨 일가와 아주 가까운 사이였지. 그리고 그때 윤씨 일가는 화진의 최고 문벌이었어. 심지어 국주님마저도 직접 윤씨 일가를 위해 천하제일이라는 글을 써줬지.”윤구주의 시선을 마주하게 된 육도진은 저도 모르게 마음 한구석이 찔렸다.그는 서둘러 시선을 피하면서 헛기침을 했다.“저하... 16년 전, 저는 윤씨 일가와 사이가 꽤 좋았습니다. 당시 윤씨 일가는 우리 서울의 제일가는 가문이었기 때문이죠. 심지어 4대 고대 무술 세가 모두 윤씨 일가에게 예의를 차려야 했어요.”“윤씨 일가를 그렇게 잘 안다면 윤신우가 죽어 마땅한지 아닌지 얘기해줄 수 있나?”그 말에 육도진은 두 다리에 힘이 풀렸다.‘뭐?’그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앞에 있는 윤구주를 바라보았다.“저하, 그건 뭐 때문입니까...?”윤구주는 육도진을 바라보지 않고 몰아치는 비바람을 바라보면서 천천히 말했다.“윤신우가 죽어 마땅한지 아닌지를 물었어.”“그... 그... 제가 어떻게 그 질문에 대답하겠습니까? 윤신우 씨는 아주 훌륭한 분입니다. 30년 전 이미 서울 최강이라고 불렸었죠. 게다가 그동안 그는 나쁜 짓을 한 적도 없습니다...”육도진은 잠깐 고민하다가 말했다.“그래? 하지만 나한테는 나쁜 짓을 한 적이 있어.”윤구주는 말머리를 돌렸다. 그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차가워졌다.“내 기억이 맞다면 육도진 우상은 나와 윤신우의 관계를 알겠지?”윤구주가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한 나라의 우상인 육도진은 난감해졌다.그는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모른 척해야 했다.16년 전 그 사건에 대해서 감히 언급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그런데 윤구주가 물으니 어떻게 해야 할까?”“육도진 우상, 난처해하지 않아도 돼. 난 오늘 이미 많은 사람들을 죽였으니까 편하게 말해도 돼.”윤구주의 말뜻은 명확했다. 오늘 육도진이 무슨 얘기를 하든 절대 그에게 손을 대지 않겠다는 뜻이었다.하지
16년 전 그날 밤, 윤구주의 말대로 육도진은 흑기 금위군을 이끌고 윤씨 일가를 찾아갔었다.그리고 그날 이후로 윤신우는 윤구주 모자를 윤씨 일가에서 쫓아냈다.오늘 윤구주는 제대로 알아볼 생각이었다.16년 전 일에 대해 질문하자 육도진은 몸서리를 쳤다. 그는 두려웠고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를 몰랐다.“육도진 우상, 얘기해 봐.”윤구주는 고개를 돌려 육도진을 바라보았다.그는 비록 평온한 어조로 말했지만 육도진은 보이지 않는 살기가 자신을 감싸는 걸 느꼈다.“저하!”육도진은 윤구주의 앞에서 털썩 무릎을 꿇었다.“육도진 우상, 이게 무슨 뜻이지?”한 나라의 우상인 육도진이 갑자기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자 윤구주는 입을 열었다.“용서해 주십시오, 저하! 16년 전 일에 대해서는 묻지 말아 주십시오. 꼭 진실을 알아야겠다면 차라리 절 죽여주십시오!”육도진은 퍽 소리 나게 바닥에 머리를 조아렸다.진짜로 죽여달라는 듯이 말이다.육도진이 무릎을 꿇자 윤구주는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죽음도 두렵지 않은 거야? 그 진실을 지키기 위해서라면?”육도진은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얘기할 수 없었다.절대 할 수 없었다.죽음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이 일이 알려진다면 화진 전체에 어떤 재앙이 일어날지 아무도 예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그래서 얘기할 수 없었다.“저하! 16년 전 일은 저하와 저하의 어머님께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제가 저하의 아버님인 윤신우 씨께 저하와 저하의 어머니를 서울에서 내쫓으라고 했습니다! 제가 멍청했습니다! 죽어야 마땅한 사람은 접니다! 저를 죽여주십시오!”육도진은 다시 한번 죽여달라면서 윤구주를 향해 머리를 조아렸다.그러나 윤구주는 손을 쓰지 않았다.그는 그저 싸늘한 눈빛으로 빗속에서 무릎을 꿇은 육도진을 바라볼 뿐이었다.“그 말은 16년 전 윤신우 씨가 핍박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우리 모자를 쫓아냈다는 거야?”“네, 제가 강요했습니다. 이 일은 그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습니다.”육도진이 말했다.“하하
억센 빗줄기 속에서 한 나라의 우상인 육도진은 무릎을 꿇은 채 오랫동안 일어나지 못했다.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타다닥.한 사람이 육도진의 앞에 나타났다.“휴, 우리 아들이 결국엔 눈치를 챘군...”그의 입속에서 음성이 흘러나왔다.빗속에서 어느샌가 윤신우가 육도진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바닥에 무릎 꿇고 있던 육도진은 그 말을 듣고 묵묵히 일어났다.그는 얼굴의 빗물을 닦으면서 고개를 들어 윤신우를 바라보았다.“가주님, 두 분께 죄송합니다...”육도진은 그렇게 말하면서 눈시울을 붉혔다.윤신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육도진의 어깨를 토닥였다.“당시 육도진 씨는 최선을 다했어요. 우리 아들과 아내가 살아서 윤씨 일가를 떠날 수 있었던 건 육도진 씨 덕분이었어요.”윤신우는 나직하게 말했다.사실 16년 전 윤구주는 죽을 운명이었다.하지만 육도진이 마지막에 윤구주와 윤구주 어머니의 목숨을 살려줬다.윤구주는 아직 그 사실을 몰랐다.“휴, 16년이나 흘러서 다시는 그 일이 언급되지 않을 줄 알았는데... 정말 생각지도 못했네요...”육도진은 말하면서 한숨을 쉬었다.“육도진 우상,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않아도 돼요. 그 은혜를 전 평생 기억할 겁니다. 하지만 문씨 일가가 공공연히 제 아들을 해치려 하고 화진의 문벌 또한 소란을 일으키니 저로서는 가만히 있을 수 없어요.”육도진이 말했다.“가주님 뜻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알고 있다면 오늘 우상에게 한 가지 질문하고 싶네요.”윤신우는 고개를 돌려 진지한 눈빛으로 눈앞의 육도진을 바라보았다.“말씀하십시오, 가주님!”육도진이 말했다.“문씨 일가가 공공연히 우리 아들을 해치려고 하는 게 설마 또 황성의 그분이 내린 명령입니까?”윤신우는 평온하게 물었다.그러나 별거 아닌 것 같은 말 한마디에 육도진 우상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가주님... 아니, 아닙니다!”육도진은 당황한 듯 서둘러 해명했다.“확실합니까?”윤신우는 음산한 눈빛으로 육도진을 죽어라 노려보았다.“제 목숨을
그래서 윤구주의 형제들은 그가 걱정됐다.민규현은 윤구주의 방을 바라보다가 한참 뒤에 대답했다.“아마도 가족을 만나신 것 같아.”‘뭐라고? 가족?’사람들은 어리둥절해졌다.“맞아. 저번에 정양문에 갔을 때 난 먼 곳에서 아주 강한 절정 강자의 기운을 감지했어. 그 기운은 우리 저하의 기운과 아주 비슷했어. 아마도 저하 가족의 기운이 아닐까 싶어!”민규현은 이유를 얘기했다.“형님 말을 들어보니 갑자기 떠오르네요. 저하는 십여 분 전에 잠깐 자리를 비우셨어요... 하지만 아무도 저하가 어디로 갔는지 몰라요.”정태웅은 갑자기 떠올라서 말했다.“맞아요. 도련님은 확실히 당시 십여 분 정도 자리를 비웠어요. 그리고 돌아온 뒤에 기운이 완전히 달라졌죠.”몸매가 좋고 아름다운 재이가 말했다.“상황을 보아하니 저하께서 주인님을 만나신 것 같네요.”용민이 갑자기 한숨을 쉬며 말했다.윤신우가 직접 키운 사사로서 재이, 용민, 철영은 두 부자 사이에 아주 두꺼운 벽이 존재한다는 걸 알았다.그러나 하인으로서 뭔가 물을 수 없었다.“저하의 집안일이라면 우리는 걱정할 필요가 없겠군.”민규현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물러났다.민규현은 윤구주의 방을 힐끗 본 뒤 결국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조용한 방 안.윤구주는 책상다리를 하고 있었다.오늘 그는 공씨, 제씨, 옥씨, 신씨 4대 고대 문벌을 멸문했고 육도진을 만났다.윤구주는 16년 전 일을 줄곧 마음에 두고 있었기에 오늘 육도진에게 질문했다.그리고 육도진에게서 알아낸 사실은 윤신우도 그때 강요당했을지도 모른다는 점이었다.진짜 범인은 대체 누구일까?윤구주는 비록 대충 짐작이 가지만 아직은 단정 지을 수 없었다.그가 생각해 둔 사람은 지위가 너무 높았다.다들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그런 지위였다.고개를 든 윤구주의 그윽한 눈빛에 천천히 어둠이 드리워졌다. 아무도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랐다....“할아버지, 공씨, 제씨, 옥씨, 신씨 4대 문벌 모두 정양문에서 윤구주에게
문아름의 걱정 가득한 표정을 본 문창정은 기괴하게 웃었다.“괜찮다. 그게 내가 예상한 결과니까 말이야.”‘응?’“할아버지, 그 말씀은 윤구주를 말리지 않겠다는 뜻인가요?”문아름은 조금 궁금해졌다.“걱정하지 마. 지금 문벌 사람들이 도륙당했으니 분명 누군가 나설 거야. 잊지 마. 화진의 무도 중 6할은 문벌 출신이니까. 게다가 세가, 종문도 아직 나서지 않았어. 그게 뭘 의미하겠어?”문아름은 고개를 저었다.“다들 기다리고 있다는 뜻이야.”문창정은 그렇게 말한 뒤 시선을 들어 어둠을 바라보았다.“6년 전, 윤구주는 곤륜에서 왕이 되었을 때 무력으로 그들을 제압했어. 사실 다들 알고 있는 거야. 당시의 세가, 종문은 곤륜의 체면 때문에 일부러 참은 거란 걸 말이야. 그런데 윤구주는 이번에 공공연히 우리 3대 서열에 도전장을 내밀었어. 세가와 종문의 늙은 괴물들이 과연 그걸 참을 수 있을까?”문아름은 그 말을 듣고 눈을 반짝였다.화진의 무도는 문벌, 세가, 종문 3대 서열로 이루어졌다.그런데 윤구주는 문벌 사람들을 도륙했고 심지어 그들 가문의 절정 강자들까지 전부 죽였다.세가와 종문이 과연 가만히 있을까?“역시 할아버지께서는 생각이 깊으시네요! 덕분에 가르침을 얻었습니다!”문아름이 말했다.가부좌를 틀고 있던 문창정은 사악하게 웃으며 말했다.“두고 봐. 서울은 곧 변할 테니까. 게다가 16년 전 그 사건도 이젠 밝혀져야 할 때가 왔어.”“16년 전이요?”문아름은 살짝 놀랐다.“맞아. 당시 윤씨 일가의 위엄은 우리 4대 고대 가문과 비슷한 수준이었어. 게다가 당시 국주님께서 직접 천하제일이라는 글을 써서 윤씨 일가에 하사해 주셨었지. 그런데 당시 천하제일 윤씨 일가가 무엇 때문에 그동안 정치에 참여하지 않고 세상사에 무관심했는지 아니?”문아름은 고개를 저었다.“바로 윤구주 때문이야! 당시 윤구주를 죽이라고 한 사람이 바로 국주님이었기 때문이지. 하하하하!”문창정은 크게 웃었다.“뭐라고요? 국주님이라고요?”그 말에 문아름의 아름
윤창현의 말대로 윤씨 일가만으로도 문벌의 폭동을 막기에는 충분했다.하지만 윤신우가 걱정하는 건 다른 것이었다.“창현아, 넌 틀렸어. 처음부터 내가 걱정한 건 문벌이 아니야. 내가 걱정한 건 세가와 종문의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진짜 강자들이야!”윤신우는 천천히 말했다.화진의 3대 서열 중 종문이 첫 번째고 그다음이 세가, 그리고 마지막이 문벌이었다.윤신우는 처음부터 문벌이 안중에도 없었다. 그가 진짜 신경 쓰는 건 종문과 세가였다.특히 종문 말이다.종문은 아주 비밀스럽다. 종문에는 진정한 절정 강자가 있을 뿐만 아니라 절정보다 더욱 강한 수행자가 있었다.전설 속 오래된 인물들도 오랫동안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그들이 이번에 모습을 드러낼지는 알 수 없었다.“형님 말이 맞아요. 일개 문벌은 우리 윤씨 일가에 아무런 위협도 안 되죠. 하지만 세가와 종문은 달라요. 그들이 모습을 드러낸다면 우리는 언제든 싸울 준비가 돼 있어야 해요.”셋째 윤정석이 입을 열었다.“흥! 난 상관없어! 누구든지 우리 조카를 해치려고 한다면 나 윤창현이 그놈을 죽여버릴 거니까!”난폭한 성정의 윤창현이 입을 열었다.그는 세가든 종문이든 상관없었다.그가 신경 쓰는 건 윤씨 일가와 윤구주뿐이었다.윤창현의 말을 들은 윤정석은 쓴웃음을 지었다.“창현아, 정석아. 너희는 구주 일로 지난 16년간 날 미워했지?”윤신우는 갑자기 고개를 들어 윤창현과 윤정석을 바라보았다.윤신우가 갑자기 16년 전 일을 언급하자 윤창현과 윤정석은 흠칫했다.두 사람은 믿기 어렵다는 표정으로 서로 시선을 주고받았다.“형님, 오늘 왜 갑자기 16년 전 일을 언급하시는 거예요?”윤정석은 궁금해했다.그동안 윤구주 모자를 쫓아낸 일은 윤씨 일가에서 금기시되었다.아무도 그 얘기를 꺼낼 수 없었다.특히 윤신우 앞에서 말이다.그런데 오늘은 윤신우가 직접 그 일을 언급했다.윤신우는 아주 평온한 얼굴로 밖을 바라보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이제 너희들에게 진실을 알려줄 때가 된 것
“형님 말씀은 구주와 형수님을 내쫓았던 이유가 두 사람을 지키기 위해서였다는 뜻인가요?”윤정석은 눈이 휘둥그레져서 윤신우에게 물었다.윤신우는 대답하지 않았다.그러나 그의 눈빛에서 괴로운 기색이 보였다. 그는 밖을 바라보았다.“그러지 않았더라면 구주와 우리 아내는 죽었을 거야.”그 말에 윤창현과 윤정석은 경악했다.그동안 두 사람은 줄곧 그 일로 윤신우에게 불만을 품었다.그들은 윤신우가 너무 매정하다고 생각했었다.그런데 그에게 이런 고충이 있을 줄은 몰랐다.“대체 어떤 빌어먹을 놈이 감히 우리 형수님과 구주를 해치려고 한 거죠? 도대체 무엇 때문이죠?”윤창현은 주먹을 꽉 쥐면서 화를 내며 살기를 내뿜었다.윤정석 또한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윤신우를 바라보았다.“그게 누군지는 알 필요 없어. 너희가 알아야 하는 건 이 오래된 일을 다시는 언급하면 안 된다는 것뿐이야. 이걸 언급하는 건 우리 윤씨 일가에 도움은커녕 해가 될 뿐이야. 심지어 우리에게 멸문지화를 가져다줄 수도 있어.”‘뭐라고? 멸문지화?’“형님, 우리 윤씨 일가는 수백 년의 역사가 있어요. 우리가 언제 누군가를 두려워한 적이 있나요?”윤창현은 불평했다.셋째 윤정석은 똑똑했다.그는 윤신우의 말을 듣고 이상함을 눈치챘다.그는 잠깐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둘째 형님, 큰형님 말대로 합시다. 큰형님이 조사하지 말라고 하면 조사하지 않는 게 맞아요.”“하지만 그냥 이렇게 넘어가고 말 거야? 젠장. 믿을 수 없어. 이 세상에 감히 우리 윤씨 일가를 괴롭히는 놈이 있다고?”윤창현은 여전히 내키지 않아 했다.“형님!”윤정석은 윤창현의 옷깃을 힘껏 잡아당기면서 그에게 조용히 하라는 듯이 손짓을 했다.윤정석이 더는 묻지 말라고 손짓하자 윤창현은 그제야 코웃음을 치면서 조용히 했다.“구주와 아내가 떠난 뒤 난 그들을 감히 만날 수가 없었어. 다가갈 수도 없었고. 그저 두 사람이 온갖 고초를 겪는 걸 지켜봐야만 했었지. 그리고 결국... 우리 아내는 병으로 세상을 떴어.”마
진실을 모두 얘기하게 되었다.이 순간, 윤창현과 윤정석은 그제야 윤신우의 고충을 알게 되었다.그리고 지난 16년간 윤신우가 감당했어야 할 괴로움과 고통도 알게 되었다.“형님, 그 모든 게 구주를 지키기 위해서였다면 왜 구주에게 사실을 알려주지 않는 겁니까? 구주는 여전히 형님을 오해하고 있는데요.”윤창현은 참지 못하고 말했다.윤신우는 고개를 저었다.“아니, 구주에게는 알려줄 수 없어. 구주가 우리 윤씨 일가의 진용이라는 게 알려진다면 구주는 더욱 위험해질 거야. 그러니까 우리 셋을 제외하고 다른 사람들은 알아서는 안 돼! 구주가 평생 날 미워한다고 해도 괜찮아!”윤신우의 말을 들은 윤창현과 윤정석은 침묵했다.아버지란 무엇인가?모든 걸 포기하면서도 자기 아이를 보호하는 게 아버지다.윤신우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형님, 그래도 묻고 싶습니다. 대체 어떤 빌어먹을 놈이 우리 구주와 형수님을 해치려고 한 겁니까?”윤창현은 분노를 억누르지 못하고 눈이 벌게서 물었다.그는 정말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30년 전 서울의 최강이라고 불렸던 윤신우를 두려움에 떨게 만드는 사람이라니.“형님, 짐작 가는 사람이 없으십니까? 이 세상에서 한 나라의 우상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고, 황성의 3대 금위군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황성의 용상 위에 앉아 있는 그분을 제외하고 누가 있겠습니까?”윤정석은 결국 참지 못하고 말했다.그 말을 들은 윤창현은 경악했다.황성?용상?‘설마...’윤창현은 저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다.놀라움 때문인지 아니면 분노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고?”윤창현은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혼잣말을 했다.“과거 황성에는 검은 옷을 입은 승려가 구주가 태어난 그해 우리 윤씨 일가에 찾아와서 이런 말을 남긴 적이 있어. 윤씨 일가의 진용이 천하를 다스릴 거라고. 그 검은 옷을 입은 승려는 그 말만을 남긴 채 떠났어. 그동안 난 줄곧 그를 찾았는데 결국 찾지 못했어.”윤창현은 다른 진실을
“저하,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그를 죽여야 합니까? 저자의 기운이 이토록 흉악한데 성수의 혈기로 진압할 순 없습니까?” 백호는 이미 싸우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안 된다. 너희 네 명이 함께라면 잠시나마 억누를 수는 있겠지만, 너희는 그저 성수의 정혈을 가졌을 뿐이니 마인을 완전히 없애려면 성수가 직접 나타나야 한다. 지금 이 세상에 성수가 존재하는지조차 의문스럽다.”윤구주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말을 마친 윤구주는 곧장 진요탑 쪽으로 향했다.백호와 임정설, 청해가 함께 가서 돕고자 했으나 장인 대진인이 그들을 가로막았다.“이 마인은 오직 구주만이 상대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중요한 임무가 있습니다. 국주님, 곧 전투가 시작될 터인데 서요산의 진법을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이 호법의 중임을 몇 분께 맡기겠습니다.”장인 대진인이 임정설에게 경건하게 예를 갖추며 말했다.“좋다. 오늘 이 자리에서 목숨을 바친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저 마인을 죽이고야 말겠다.” 임정설은 단호한 표정을 지으며 황자의 위엄을 한껏 드높였다.화진의 존망이 걸린 일이라면 임정설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하지만 마기가 몰려와 서요산 전체를 뒤덮고 세상이 오직 흑백 두 가지 색깔만으로 변해버리며 그 끔찍한 살기가 강림했을 때 임정설마저 온몸에 소름이 돋으며 떨렸다.“이 마인의 기운이 이렇게까지 무서울 줄이야.” 임정설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은 마기로 가득 찼고 윤구주마저 그 기세에 눌리고 있었다.진요탑에서 흘러나온 마기는 실체가 되어 넘쳐흘렀다. 마기가 나타나자 서요산을 지키는 모든 검종 제자의 얼굴이 어두워졌고 어떤 제자는 순간적으로 십여 년을 늙어버렸다.수련이 부족하면 수명으로라도 채워야 하는 참혹한 상황이었다.웅웅.하늘에는 먹구름이 밀집했고 그 안에서 요괴의 번개가 끊임없이 터졌다.“이젠 영기조차 요기로 변하고 있다. 풍수 비술로 보건대 머지않아 이곳에서 요마가 출현하겠구나.” 임정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서요산 외부에서 짙은 요기
도가는 인연이라는 두 글자를 대단히 중히 여긴다.그의 한 번의 인연, 한 번의 생각은 곧 만백성의 생사를 좌우할 만큼 중요하다.윤구주가 정상에 오르자 앞서 온 다른 이들과는 달리 서요산 검종의 모든 이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여 깊은 존경을 표했다. 그들이 경배한 대상은 단순한 한 인간이 아니라 구주의 저하, 화진의 인황, 오방 천지의 주재자였다.“모두 일어나십시오. 제가 오늘 서요산에 온 이유는 오직 진요탑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입니다. 진요탑 안의 마인을 제거하지 않는 한 문 씨 세가의 역심은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오직 마인을 죽여야만 문 씨 세가의 야심도 함께 근절할 수 있습니다.”윤구주는 서요산 검종의 모든 제자를 향해 엄숙하게 말했다.이번 서요산 행차의 목적은 바로 문 씨 세가의 역심을 뿌리째 뽑는 것이었다.검종 제자들이 앞장서 일행을 이끌었고 모두가 금정을 지나 뒷산으로 향했다.뒷산에 막 들어서자마자 음산한 기운이 얼굴을 스쳤다.후산 중앙에는 높이 오백 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산이 서 있었는데 그 산은 무려 구백구십구 개의 쇠사슬로 단단히 봉인되어 있었다.이 쇠사슬은 그저 평범한 사슬이 아니었다. 절반은 땅속의 지맥과 연결되어 있었고 나머지 절반은 하늘 높이 떠올라 천지의 영기를 끌어모으고 있었다.이런 수준의 봉인이라면 설령 윤구주 자신이 여기에 갇혀 있다고 해도 빠져나가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이처럼 견고한 고진마저 지금은 마인의 사기로 조금씩 부식되어 가고 있었다. 본래는 영기가 흘러넘치는 명산이었으나 지금은 온 서요산이 마인의 기운에 물들어 음침하고 괴이한 분위기를 자아냈다.이 강렬한 악기운을 바라보며 서요산 검종의 제자들은 모두 얼굴을 찌푸렸다.솟구치는 사기를 바라보며 서요산 검종의 검객들은 하나같이 얼굴을 찌푸렸다.최근 몇 대에 걸쳐 입종한 서요산의 제자들은 이런 마인의 사기와 요마의 위협 속에서 수련해야 했다.천지의 영기조차 마인의 기운에 오염되어 수련에 큰 지장을 주었지만 그럼에도 끝까지 남은 현
이 말을 듣자 모든 이들은 천 년 전 마지막으로 나타난 그 성인이 바로 서요산 검종에서 나왔음을 깨달았다.“짐은 서요산 검종의 선대 종주께서 우화등선하셨다고만 들었는데 그저 떠도는 신화 속 이야기인 줄로만 알았더니 은 성인의 경지에 이르신 것이었군.” 임정설이 깊은 감탄과 함께 말했다.구백 계단 윤구주는 이미 전설을 써 내려가고 있었다.하지만 그 전설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구백삼십 계단 사십 계단을 오르면서 윤구주의 발걸음은 오히려 더욱 가벼워졌고 그가 세우는 기록은 사람들의 상식을 계속해서 뒤흔들었다.구백팔십 계단을 지나 정상까지 겨우 십여 계단만 남은 그 순간 윤구주의 발걸음이 점점 느려지기 시작했다.구백구십구 계단에 이르러 결국 완전히 멈추었다.드디어 한계에 도달한 것인가?모두가 숨을 죽이고 윤구주를 지켜봤다. 이 마지막 한 걸음은 분명 지금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힘든 시험일 터였다.윤구주는 미간을 찌푸린 채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십여 분을 견뎌냈다. 사람들은 그가 언제 다시 계단을 오를지 초조하게 기다렸다.마침내 윤구주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됐습니다. 이 마지막 한 걸음은 넘지 않겠습니다. 여기서 시험을 포기하지요.”말을 마치고 계단에서 내려서는 순간 청석 계단 아래에서 강력한 영기가 하늘을 찌를 듯 솟구쳤고 곧바로 서요산을 감싸던 어둠의 기운을 깨끗이 몰아냈다.오랫동안 음울했던 서요산 상공은 순식간에 환해졌고 수백 킬로미터에 걸쳐 맑은 하늘이 펼쳐졌다.서요산의 모든 이들은 충격에 빠져 넋을 잃었다.그제야 그들은 윤구주가 왜 그토록 여유롭게 올라올 수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그는 처음부터 서요산의 청석 계단이 가진 진법의 힘을 계속해서 억누르고 있었다.“참으로 대단하신 신위군요! 우리 서요산의 청석 진법마저 제압하셨다니! 마지막 한 걸음을 분명 넘으실 수 있었을 텐데 혹시 강제로 넘었다가 진법이 견디지 못해 영기가 새 나가고 진법이 무너져 진요탑까지 영향을 미칠지 걱정하신 건 아닌가요?” 장인 대진인이
도법의 깊이는 워낙 심오해서 임정설조차 제대로 가늠할 수 없었다.“쉽게 말씀드리자면 구주는 천지의 운기를 완전히 장악한 데다가 하늘이 직접 영광을 내리신 거죠.” 장인 대진인이 말했다.임정설은 이 말을 듣고 비로소 이해한 듯 말했다.“대진인의 말은 윤구주가 바로 하늘이 점지한 사람이라는 뜻인가?”“맞습니다. 우리 화진 사람들은 운명의 갈림길에 서면 본심에 따라 도법을 선택하고 나머지는 하늘에 맡깁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사는 다하고 하늘의 뜻을 따르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윤구주는 분명 큰 복을 타고났지만 그 엄청난 복을 감당할 힘도 필요합니다.”대진인이 설명했다.말이 끝날 무렵 윤구주는 이미 육백삼십 계단을 거뜬히 올라와 있었다.한 걸음도 멈추지 않고 더욱 확고한 걸음으로 계속 전진했다.그의 발걸음마다 천지의 기운이 응축되었다.어느 순간 서요산의 계단조차 윤구주의 기세를 가두지 못했다. 그는 마치 천지를 밟으며 오르는 듯했다.곧이어 그는 칠백 계단마저 돌파했다.칠백 계단이란 천 년 전 서요산의 전성기에도 극소수만이 도달할 수 있었던 경지였다. 지금 만약 윤구주가 구주왕이 아니라 일반 수련자였다면 이 기록만으로 서요산 전체가 들썩였을 것이다. 만일 윤구주가 서요산에 입문을 원했다면 서요산은 모든 자원을 쏟아부어 그를 키웠을 것이며 서요산 검종의 다음 종주 자리는 당연히 그에게 돌아갔을 것이다.그러나 이미 칠백 계단에 이르렀음에도 윤구주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칠백오십 계단 팔백 계단 팔백오십 계단!그는 끊임없이 정상의 기록을 깨며 전설을 써 내려갔다.서요산 검종의 제자들은 윤구주 앞에 당장이라도 무릎을 꿇을 것 같았다. 이쯤 되자 장인 대진인조차 감히 그를 함부로 평가할 수 없었다.왜냐하면 자신도 과거에 겨우 칠백 계단에 그쳤으니 팔백 계단을 오른 사람을 감히 평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윤구주는 멈추지 않고 계속 올라갔다. 마치 천지를 흔들어 이 강산을 뒤엎어버리겠다는 기세였다.그리고 마침내 구백 계단에 이르렀다.“구백
하지만 한 계단씩 갈수록 더욱 어려워지는 난관들도 이 평범한 사람에게는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다.만약 윤구주와 맞서야 하는 적의 입장이었다면 지금 이렇게 차분히 계단을 오르는 윤구주는 마치 깊은 심연 그 자체였을 것이다.그의 강력함은 도무지 가늠할 수 없었고 오히려 그가 올라올수록 위에 있는 사람들은 엄청난 압박감에 휩싸였다.검종의 검객들이 잠시 정신을 놓은 사이 윤구주는 이미 사백 계단까지 올라와 있었다.하지만 사백 계단쯤으로는 아무도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화진의 또 다른 황자 구주왕의 후계자였으니까.윤구주가 오백 계단을 밟는 순간 모든 이들은 숨을 죽이고 그를 응시했다.눈길을 떼지 못한 채 그의 오름을 지켜보았다.오백일…… 오백이십! 오백오십! 오백구십구!“마침내 구구관에 도달했다.”“칠구는 수겁이요 구구는 극히 넘기기 어려운데.”진정한 고수들은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과연 윤구주가 이 한 걸음을 쉽게 넘을 수 있을지 모두가 궁금해했다.윤구주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산 아래를 바라보았다.그가 본 것은 단순한 산이 아니라 마치 화진의 온 세상 같았다.한눈에 화진의 대지와 산천이 모두 담겼다.눈앞에 펼쳐진 화진의 아름다운 대지는 숨 막히는 광경이었다.하지만 동시에 이 끝없는 강산 곳곳에 묻혀 있는 수많은 해골도 함께 보였고 그의 마음은 순식간에 비장함과 슬픔으로 가득 찼다.윤구주의 내면을 감지한 서요산 검종 종주의 법신이 곧바로 그의 곁에 나타났다.“구주야 화진의 산천을 잘 살펴봐! 천하의 용맥은 모두 화진에서 비롯되었고 이 한 획 한 획은 백성의 척추와 같다! 눈에 비치는 물의 맑고 흐림은 중요하지 않아. 지나치게 눈 부신 빛은 우리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고 너무 어두운 밤은 희망을 앗아가기 마련이지. 하지만 어떤 변화가 있더라도 화진의 이 산천은 영원히 굳건히 서 있을 거야. 왜냐하면 푸른 산마다 묻혀 있는 충신의 뼈와 넋들이 이 나라를 지켜주고 있으니까.”서요산 검종 종주는 윤구주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그 온
진인들은 말했다. 임정설이 만약 집념을 내려놓는다면 육백 계단까지도 오를 수 있을 거라고.장인 대진인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하지만 그가 진정으로 집념을 놓는다면 더 이상 화진의 국주가 아니지. 바로 이런 끈질긴 의지가 있기에 그분이 화진 백성을 다스릴 수 있는 것이다.”다른 진인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운명이란 그런 법이다. 아마도 집념을 놓았다면 임정설은 오백 계단조차 오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이때 임정설은 아직 남아 있는 절반의 계단을 바라보며 씁쓸히 미소 지었다. “어쩌면 여기서 멈춰야겠구나.”임정설은 다시 뒤를 돌아 윤구주를 바라보았다. 그가 자기 자식이자 동료처럼 여기는 윤구주가 과연 몇 계단을 오를지 궁금했다.깊은 생각에 잠긴 임정설이 곧바로 말을 꺼냈다.“구주야 이제 네가 올라서 봐! 화진의 구주왕다운 실력을 보여줘! 적어도 나보다는 못하면 안 되지 않겠냐?”아래에 서 있던 윤구주는 고개를 살짝 저었다. 원래 그는 별 관심이 없었지만 국주의 바람이라면 흔쾌히 도전할 마음이었다.“명 받들겠습니다!” 윤구주는 말을 마치자마자 곧바로 계단을 밟아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가기 시작했다.구주왕이 등천로에 도전했다는 소식에 서요산 검종 전체가 술렁였다.검객은 물론이고 잡일을 돕는 제자들까지 모두 금정에 모여들어 그의 모습을 보고자 했다.심지어 하늘 위 어둑한 구름 사이에서도 한 쌍의 법안이 열렸다. 바로 서요산 검종 종주의 법신 환영이었다.임정설이 먼저 정상에 올랐고 장인 대진인을 포함한 일곱 진인과 서요산의 모든 제자들은 화진의 황자를 향해 몸을 숙여 예를 갖추었다.“모두 일어나시오. 그대들이 없었다면 화진은 이미 혼란 속에 빠졌을 것이오. 진정 국가와 화진을 위해 헌신한 것은 바로 그대들입니다.” 임정설은 화진의 모든 백성을 대표할 순 없지만 왕실을 대표하여 임 씨 일족의 지도자로서 서요산 검종의 노고에 진심으로 감사의 뜻을 표했다.“국주께서 과찬입니다. 우리는 그저 각자의 방식대로 묵묵히 힘썼을 뿐입니다. 화진의 백
일곱 진인들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그들은 국주가 이미 등황의 경지에 이르렀으니 사백 계단은 쉽게 오를 것으로 예상했다. 과연 그들의 예상대로 임정설은 멈추지 않고 계속 오르며 오백 계단을 가볍게 밟아 올랐다. “오백 계단을 밟으면 등황의 경지에 오를 수 있습니다. 우리 일곱 진인 중에서도 오직 장인 대진인께서만 과거에 오백 계단에 오르셨고, 현재 서요산에 살아계신 유일한 오백 계단 수련자이십니다. ” 한 진인이 감탄하며 말했다.이 말을 듣자 옆에 있던 백호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선임 도사님 그러면 그 도사님도 황자란 말씀입니까? ”“하하! 우리 서요산에서는 외부의 그런 칭호를 쓰지 않아요. 우리 사이에서는 그를 반신이라고 부릅니다.” 진인들이 웃으며 말했다.청해가 옆에서 덧붙였다. “서요산 검종에서 말하는 반선이 황자를 뜻하는 거야. 근데 그 서요산 반선 진짜 어마어마하게 강한 인물이거든. 예전에 곤륜 구역에서 귀한 영약 찾으러 들어왔다가 우리 빙신전 전주랑 빙황 두 명이 같이 상대했는데도 둘 다 거의 죽을 뻔했어. 결국 아사 신전한테까지 도움 요청해서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지.”“뭐라고?”백호는 놀라서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진짜 그렇게 강한지 의문이 들었다.일곱 진인 중 가장 나이 많은 그 진인은 백호의 단순한 반응에 웃음을 터트렸다. 사실 그가 바로 그 반선이었다. 다만 백호가 워낙 세상 물정에 둔감하여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저 놀라기만 하고 있었다.그사이 임정설은 이미 오백오십 계단까지 올라갔다. 하지만 이 단계에 이르자 임정설도 거의 극한에 도달했다.“역시 직접 올라와 봐야 이 압력을 제대로 실감하는구나! 오백사십 계단까진 무리 없었는데 오백오십 계단에서 도저히 버틸 수가 없구나.”지금 임정설을 압박하는 것은 단순한 술도의 압력만이 아니었다.과거의 온갖 기억들이 마장이 되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일곱 진인은 모두 임정설의 기운이 혼란스러워진 것을 느꼈다.“장인 사형, 국주님께서 심마에 걸리셨군
청해의 눈길이 자주색 도포를 입은 진인에게로 향했다.서요산검종에서 종주를 제외한 나머지 일곱 명의 진인이 가장 높은 수련을 가지고 있으며 평소 종문 내의 모든 일은 이들 일곱 명이 책임지고 있다.기세는 마치 대강의 파도가 넘실대듯 깊고 끝이 보이지 않는 산과 숲처럼 무한히 이어져 있었다. 그의 수련은 깊이가 가늠할 수 없을 정도였다.“서요산 7대 진인의 수련이 극 신급 절정이라고 들었는데 지금 보니 그 말이 너무 가볍게 들리네요. 귀하의 수련은 적어도 극 신급 절정 후반에 다다랐군요.”청해는 세 명의 진인에게 경의를 표하며 몸을 굽혔다.“서요산의 전통은 천 년을 자랑하며 그 깊이는 변함없이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반면 곤륜 구역은 스스로 신을 자처한 이후로 계속해서 내분을 일으켰습니다. 수련을 통해 세상을 떠난 후 도를 깨닫는다는 말처럼 곤륜 구역은 천하의 영기와 천물을 흡수했지만 제 생각에는 도를 얻지 못한 곳입니다. 지금 당신이 화진에게 올바른 수를 두는 것은 맞습니다. 앞으로 열심히 노력하면 극 신급 절정 후반도 절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한 진인이 답례하며 말했다.그때 몇몇 사람들은 서요산 검객들의 함성에 이끌려 사방을 살폈다. 백호가 사백 계단을 올라갔다는 소식이었다.“대단한데요. 서요산이 전성기였을 때도 사백 계단을 오른 이는 드물었어요. 우리 몇몇 진인들도 입문 시에 사백 계단을 넘은 적은 없었죠.”몇몇 진인들이 칭찬했다.이는 백호가 미래에 매우 큰 가능성을 지녔음을 의미했고 적어도 극 진경 후반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극 진경 후반은 곤륜 구역에서 신전의 전주가 될 수 있는 실력이다.지금 사백 계단에 오른 백호는 거의 한계에 다다랐다. 완전히 의지로 버티며 강력한 정신력으로 계속해서 오르고 있었다.그러나 아무리 강한 운명을 지녔다 해도 천지의 이치를 막을 수는 없다.사백오십 계단에 도달했을 때 백호는 결국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의식을 잃은 것은 시험이 끝났다는 신호였고 백호는 곧 깨어났다.“겨우 사백오십 계단이라니
서요산 검객들이 모두 그 무인의 정체를 궁금해하자 진인도 더 이상 뜸 들이지 않고 말했다.“저분은 구주왕 휘하의 화진 군신이자 국방부 대장 백호 장군이시다.”검객들은 모두 입이 벌어진 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군신의 명성은 당연히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보호하는 영웅이었으니까.“정말 구주왕 휘하의 군신이라니!”“역시 저런 굳센 의지가 그냥 나온 게 아니었어! 수많은 전장을 누빈 명장다운 모습이다!” 서요산 검객들은 백호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현재 백호는 이미 삼백이십 계단을 돌파한 상태였다. 백호가 혼자 주목을 독차지하는 걸 본 청해도 더 이상 가만히 있지 않고 계단에 발을 내디뎠다.처음 백 계단은 청해도 육신의 힘으로 버텼다. 하지만 백 계단을 넘자 육체만으로는 견디기 어려워졌다. 그는 술법으로 대응하려 했지만 평소 쓰던 빙신전의 신술이 계단 위 술법에는 통하지 않았다.“역시 화진의 서요산 검종은 보통이 아니구나. 이 등천로에선 일반 술법이 먹히지 않으니 천지 영기에 대한 깨달음으로 맞설 수밖에 없겠어.” 청해는 몸을 감싸고 있던 현빙을 거두고 오로지 자신의 속성 영기로만 버티며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막상 올라 보니 이 등천로가 얼마나 어려운지 제대로 실감했다. 이백 계단쯤 오르자 벌써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계단마다 한계를 시험하는 느낌이었다. 올려다보니 백호는 여전히 계단 위로 나아가고 있었다. 청해도 질 수 없다는 마음으로 이를 악물고 버텼다.서요산 검객들도 청해의 수준을 알아보고 속삭였다. “저 이역인은 정말 대단한 내력의 소유자다! 기운이 이미 진인 급에 가까워! 극 신급 절정의 수련자임이 분명해!”이에 대해 진인은 신비롭게 꾸미지 않고 솔직히 말했다. “저자는 곤륜 구역 빙신전의 부 전주 청해다. 경지가 매우 높지. 지금 빙신전은 우리 화진에 귀속되었고 청해 역시 구주왕 휘하의 부하가 되었다. 얼마 전 서울 방어전에서 청현과 목숨까지 걸고 사투를 벌인 끝에 죽을 고비를 넘겼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