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구주는 윤씨 일가를 떠난 뒤 바로 거처로 돌아가지 않았다.그는 사람들이 오가는 거리에 서서 싸늘한 눈빛을 했다. 큰 고민이 있는 얼굴이었다.그의 옆을 따르던 재이는 하인이라서 찍소리하지 못했다.한참 뒤 윤구주가 갑자기 말했다.“재이야, 넌 먼저 돌아가.”“네? 도련님은 돌아가시지 않을 건가요?”재이는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들어 눈앞의 윤구주를 바라보았다.“나는 따로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말이야.”말을 마친 뒤 윤구주는 사람들이 오가는 거리로 걸음을 옮겼다.재이는 멀어지는 윤구주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눈을 깜빡이다가 자리를 떴다.할머니와의 대화를 통해 윤구주는 대충 답을 짐작할 수 있었다.16년 전 그 사건에 대한 답을 말이다.그리고 그와 그의 어머니가 무엇 때문에 집안에서 쫓겨났었는지도 대충 짐작이 갔다.이 모든 일의 진짜 이유는 화진의 가장 장엄한 곳, 서울 황성 때문이었다.날은 점점 어두워졌다.황성은 서울의 중심에 세워졌다.커다란 황성 안은 웅장하고 넓어서 끝이 보이지 않았다.금빛 찬란한 누각과 웅장한 대전, 그곳은 화진에서 가장 중요한 곳이자 지난 천 년간 화진 권력의 중심이 있던 곳이었다.밤하늘 아래 황성의 외곽은 10미터 정도 되는 높고 붉은 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그 외에도 황성 입구에는 8개의 거대한 기둥이 우뚝 솟아 있었다.8개의 거대한 기둥을 지키는 사람은 없었지만 감히 그곳에 가까이 다가가는 행인은 없었다.황성에 얼마나 많은 절세 강자가 숨어 있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밤이 되자 한 남자가 황성에 모습을 드러냈다.그는 윤구주였다.그가 왔다.6년 전 곤륜에서 왕이 됐을 때, 윤구주는 직접 이 황성으로 와서 국주를 뵌 적이 있었다.이번이 두 번째였다.그러나 이번에는 국주를 만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마음속의 답을 위해서였다.고개를 들어 싸늘하게 밤하늘 아래 황성을 바라본 윤구주의 눈동자에 서늘한 한기가 감돌았다. 그는 걸음을 옮겨 황성 정중앙으로 향했다.황성 입구에 가까워지자 쿵 소리와
특히 중간의 붉은색 옷을 입은 내시는 실력을 예측할 수가 없었다.그에게서는 아무런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는데 그의 곁에 있는 열 명의 절정 강자들보다 훨씬 더 강한 듯했다.“구주왕을 뵙습니다! 오랜만에 뵙는데도 저하께서는 여전히 젊고 위풍당당하시군요!”날카롭고 거슬리는 목소리가 붉은 옷을 입은 내시의 입에서 흘러나왔다.“능글맞은 여우 같은 당신이 날 알 줄은 몰랐는데.”윤구주는 뒷짐을 진 채로 자신만만하게 황성 벽 위에 서 있는 붉은 옷을 입은 늙은 내시를 바라보며 말했다.뜻밖에도 그들은 서로 아는 사이였다.“저하, 무슨 그런 농담을 하십니까? 저하는 저희 화진의 군신인데 제가 아무리 눈이 좋지 않아도 어찌 감히 저하를 알아보지 못하겠습니까? 다만 저하께서 이 늦은 시간에 갑자기 황성을 찾은 이유가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내시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국주를 만나야겠다.”윤구주는 직접적이고 간단하게 말했다.“그렇군요! 하지만 저하, 최근 국주님께서는 건강이 좋지 않으십니다. 오늘 만나기는 어려우실 것 같습니다.”내시가 또 말했다.“한진모, 날 막으려는 것이냐?”화진 황성 제일의 내시 총관 한진모는 이미 삼대 국주를 보좌했으며 그의 실제 나이는 아무도 몰랐다.유일하게 알려진 것은 백 년 전 화진에 폭동이 일었고 다른 나라의 육중천 절정 실력의 초강자 여러 명이 황성에 침입하려고 했는데 다음 날 타국 강자 6명의 머리가 성벽에 걸렸다는 사실이다.그동안 사람들은 황성에 한진모가 있다는 것만 알았지, 그가 얼마나 강한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그가 손을 쓰는 모습을 본 사람 중 다음 날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그 인물이 바로 현재 황성 성벽 위에 한진모였다.윤구주의 말에 붉은 옷을 입은 한진모는 서둘러 말했다.“그럴 리가요. 제가 어찌 감히 저하를 막겠습니까? 저하는 저희 화진의 군신이고, 항상 백성을 염두에 두시는 왕이신데 제가 아무리 간이 커도 저하를 감히 막을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국주님께서 편찮으시다는
윤구주는 황성 아래서 마치 부처처럼 서 있었다.그는 살기 어린 시선으로 황성을 차갑게 노려보았다.“나 윤구주는 평생을 종횡무진하며 나라를 위해 10국을 정복하고 평정했어. 오늘 난 답을 얻어야겠어. 바로 16년 전 우리 윤씨 일가에 관한 사건의 답 말이야! 한진모, 경고하는데 감히 내 앞을 가로막는다면 당신부터 죽여주겠어!”무시무시한 말과 함께 윤구주의 머리 위에서 금빛 용 9마리가 포효했다.마치 윤구주가 말 한마디만 하면 금빛 용 9마리가 당장 내시 총관인 한진모를 집어삼킬 듯했다.윤구주의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에 황성 제일이라고 불리는 한진모는 참지 못하고 탄식했다.“저하, 왜 굳이 그러시는 겁니까... 화진 사람들은 저하가 나라와 백성을 위해 헌신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처럼 이렇게 강제로 황성에 침입하려 한다면...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옳지 않습니다! 게다가 이렇게 하시면 앞으로 국주님과 백성들이 저하를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저하, 제 말을 들어주십시오. 16년 전 윤씨 일가에 있었던 일에 관해 저하께서 명확한 답변을 바란다고 제가 국주님께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오늘은 일단 돌아가 주십시오... 그렇게 해주시겠습니까?”한진모는 윤구주를 달래기 시작했다.그는 윤구주가 정말로 손을 쓸까 봐 진심으로 두려웠다.이곳은 화진의 가장 중요한 권력 중심지 황성이었다.한 나라의 군신이 이곳을 공격하고 그 일이 알려진다면 어떤 사태가 벌어질까?“저하, 돌아가 주십시오!”옆에 있던 절정 강자 10명 또한 윤구주의 앞에 무릎을 꿇으면서 그를 설득했다.9마리의 금빛 용이 흰옷을 입은 윤구주의 몸을 휘감고 있었다.윤구주는 당당히 황성 앞에 서서 불타오르는 눈빛으로 황성을 죽어라 노려보았다.물러날 것인가?물러나지 않을 것인가?윤구주는 화진의 훌륭한 군신이었다.만약 오늘 정말로 이곳에서 손을 쓴다면 화진의 국위에 영향이 갈 수도 있었다.하지만 손을 쓰지 않는다면 16년 전 그 사건의 진실이 대체 무엇인지 어떻게 알아낼 것인가
“네!”...우상 저택.화진의 우상 육도진이 가장 좋아하는 것은 저녁에 정자에 앉아서 차를 즐기는 것이었다.그동안 그는 줄곧 그 습관을 유지했다.오늘 밤도 육도진은그곳에서 판인국에서 선물로 가져온 상급 차를 마시고 있을 때 갑자기 검은 옷을 입은 부하가 육도진의 앞에 왔다.“어르신, 황성 쪽에 움직임을 보였습니다.”‘뭐라고?’황성이라는 말에 찻잔을 들고 있던 육도진은 하마터면 찻잔을 바닥에 떨어뜨릴 뻔했다.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눈을 커다랗게 뜨고 말했다.“황성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조금 전 저는 황성 쪽에서 엄청난 살기를 느꼈습니다. 그리고 용의 울음소리도 끊임없이 들려왔습니다...”‘뭐라고?’육도진은 그 말을 듣자 표정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살기? 어떤 놈이 감히 황성 앞에서 살기를 드러냈다는 거냐?”육도진은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모르겠습니다. 황성 내각 어르신들 8명 모두 소집되었고 3대 금위군도 전부 황성에 집합했습니다.”검은 옷을 입은 부하가 말했다.그 말에 육도진은 안색이 달라졌다.황성 내각 8명의 구성원은 비록 직위상으로는 우상만큼 중요치 않았지만 그들은 화진의 군사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다.“어서, 어서 황성으로 가봐야겠어!”육도진은 그렇게 말하더니 곧바로 황성으로 향했다.이때 황성에서는 갑옷을 입은 금위군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그 수가 엄청 많았다.그중에는 흑기 금위군, 황기 금위군, 홍기 금위군도 있었다.3대 금위군은 병사 30만 명을 통솔하며 황성의 보안을 담당했다.3대 금위군을 제외하고 가장 앞에는 8명의 표정이 좋지 않은 노인이 있었다. 그들 모두 황성 앞에 서 있었다.그 8명은 바로 황성 내각 여덟 장로였다.내각 여덟 장로와 함께 서 있는 사람은 황성의 내시 총관 한진모였다.“한진모 씨, 말해보세요.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어떤 간덩이가 부은 놈이 감히 황성 앞에서 난동을 부린단 말입니까?”한 내각 장로가 분노에 차서 고함을 질렀다.그의 이름은 지안수, 내각의 여
황성 내각의 여덟 장로는 당연히 윤구주를 알았다.윤구주가 황성에 침입하려 했고 성벽에 이렇게 심한 검흔을 남겼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한 내각 장로가 사납게 말했다.“설마 정말 소문대로 구주왕이 살아있었던 겁니까?”“살아 있었다고 해도 우리 화진 황성에 멋대로 침입해서는 안 되죠. 게다가 이렇게 공공연히 검흔을 남기다뇨! 설마 반역이라도 할 셈이랍니까?”“그가 감히 그럴 수 있겠습니까?”“비록 그는 10국과 싸우며 화진을 보호하고 엄청난 공로를 세우긴 했지만 황성을 침입하려 했다는 건 아주 극악무도한 죄입니다!”“장문언 장로, 옳은 말이에요. 윤구주가 아무리 대단한 공을 세웠다 할지라도 황성에 침입하려고 한 이상 죽을죄를 지은 거예요!”내각 장로 여럿이 그렇게 얘기하고 있을 때 한 내각 장로가 입을 열었다.“여러분, 일단 진정하세요. 우리 화진의 호국 군신이 무엇 때문에 오늘 밤 황성에 침입하려고 했는지는 고려하지 않으시는 겁니까?”“반석희 장로, 윤구주가 억울한 일이라도 당했단 말씀입니까?”한 내각 장로가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남색 장포를 반석희 장로가 입은 입을 열었다.“억울한 일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우리가 제일 잘 알지 않습니까? 당시 구주왕께서 돌아가신 지 얼마 되지 않아 여러분들은 새로운 왕을 세우려고 안달 났었죠. 그리고 문씨 일가의 문아름을 왕으로 세우겠다고 했죠. 우리 화진이 지금처럼 번창하고 평화로울 수 있는 것이 누구 덕분인지 다들 잊으신 겁니까?”그 말에 조금 전까지 소란스럽게 굴던 장로들은 전부 침묵했다.“흥! 우리 화진엔 왕이 하루라도 없으면 안 됩니다! 당시 새로운 왕을 세운 건 민심에 따른 일이었고 대세에 따른 일이었습니다. 반석희 장로, 이제 와서 윤구주를 옹호할 생각인 듯한데 설마 지금의 이황왕이 왕의 자리에 앉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 겁니까?”문부상서 지안수가 화가 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하하, 제가 어찌 감히 옹호하겠습니까? 전 그저 사실만을 얘기한 것뿐입니다.”“반석희 씨, 시치미 뗄 생
“네?”육도진이 이만 가보라고 하자 내각의 여덟 장로는 내켜 하지 않았다.“어르신, 황성이 파괴되었고 국위가 무너졌습니다. 제대로 조사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지안수가 사나운 목소리로 말했다.“조사하든 말든 그게 당신이랑 무슨 상관이죠? 전 화진의 우상이고 서울의 내무를 책임졌습니다. 그런데 문부상서인 당신이 지금 절 가르치려는 겁니까?”육도진의 말에 문부상서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육도진은 화진의 우상으로 서울의 내무와 황성의 안위는 그가 책임졌다.문부상서인 지안수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어르신, 공공연히 윤구주의 편을 들겠다는 뜻입니까? 그렇다고 한다면 저희 내각의 여덟 장로가 연합하여 국주님께 상소를 올려 국주님께서 결정하게 할 겁니다!”다른 내각 장로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국주님께 상소를 올리겠다고요? 절 위협하시는 겁니까? 그러면 그렇게 하세요. 상소를 올리지 않는다면 절 할아버지라고 부르도록 하세요!”육도진은 내각의 여덟 장로가 버릇없이 구는 걸 참아줄 생각이 없었다.처음부터 윤구주가 죽고 온 백성이 애도할 때부터 그들은 새로운 왕을 세울 준비를 하면서 문아름을 새로운 왕으로 추앙했다.육도진은 그때 이미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그리고 그때 그는 윤구주가 살아있다는 걸 미처 몰랐다.그러나 이제 나라와 백성을 위해 일하는 구주왕이 살아있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 내각의 여덟 장로가 이곳에서 소란을 일으키는 걸 더는 용납할 수 없었다.“너무 하시는군요!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한 나라의 우상이 어떻게 평범한 백성들처럼 욕을 지껄인단 말입니까?”욕을 먹은 내각 장로는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육도진은 차갑게 웃었다.“제가 욕을 했는데 불만이라도 있으십니까? 그러면 국주님을 찾아가서 상소를 올리시든가 하세요.”내각의 여덟 장로는 화가 나서 죽을 것 같았다.그런데 바로 이때 갑자기 황성 내부에서 굉음이 들려왔다.“국주령이 도착했습니다!”그 말과 함께 비단 장포를 입은 노인 한 명이 국주령을 들고 황성에서 한 걸음
육도진이 국주령을 받자 비단 장포를 입은 노인은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이제 국주령을 전달했으니 이만 다들 돌아가세요.”그렇게 말하자 내각 여덟 장로 중 한 명인 문부상서가 내키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안형준 총관님, 국주님께서는 윤구주를 엄벌할 생각이 없으신 겁니까?”안형준이라고 불린 황궁 총관은 냉담한 목소리로 말했다.“문부상서께서는 국주님의 결정에 의문을 품으시는 겁니까?”“아니, 아닙니다. 제가 어찌 감히 그러겠습니까?”지안수는 몸을 흠칫 떨더니 서둘러 무릎을 꿇었다.“흥! 그래야 할 겁니다.”비단옷을 입은 노인은 곧바로 황성으로 돌아갔다.한진모와 다른 열 명의 황성의 절정 강자들은 육도진을 향해 예를 갖춘 뒤 빠르게 황성으로 돌아갔다.다들 떠난 뒤 육도진은 그제야 내각의 여덟 장로를 쓱 둘러보았다.“다들 뭘 넋 놓고 계시는 겁니까? 국주령을 듣지 못한 겁니까? 귀가 먹기라도 했습니까?”육도진의 모욕에 내각의 여덟 장로는 분통을 터뜨리면서 떠났다.그들은 비록 윤구주를 엄하게 처벌하고 싶었으나 국주가 책임을 묻지 말라고 명령까지 내렸으니 어쩔 수가 없었다.그렇게 그들은 모두 철수했다.3대 금위군도 마찬가지였다.다들 떠난 뒤 육도진은 그제야 눈을 가늘게 뜨고 윤구주가 황성 성벽에 남긴 검흔을 바라보면서 코를 훌쩍였다.“정말로 아버지보다도 더 강해졌구나. 휴, 그래도 다행이야. 국주님께서 추궁하지 말라고 하셨으니 말이야. 그렇지 않았으면...”육도진은 말을 잇지 못했다.그는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은 뒤 황성을 떠났다....윤씨 일가.윤구주가 오늘 밤 황성에서 소동을 일으킨 것과 황성 성벽에 검흔을 남긴 것을 윤씨 일가의 윤신우는 몰랐다.한참 뒤 갑자기 윤창현과 윤정석이 부랴부랴 대청으로 달려 들어왔다.“형님, 큰일입니다!”두 형제는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소리쳤다.정중앙에 앉아 있던 윤신우는 두 형제의 말을 듣고 서둘러 물었다.“무슨 일이야?”“조카가...”윤창현은 어떻게 말을 이어가야 할지 몰랐다.“
“한진모?”그 이름을 듣게 되자 윤신우는 순간 온몸에서 홍수와도 같은 엄청난 살기를 내뿜었다.“그 늙은 여우가 감히 우리 아들을 건드린다면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 창현아, 지금 당장 우리 윤씨 일가 사람들을 전부 소집해. 바로 황성으로 가야겠다!”윤신우는 화가 난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윤창현은 명령을 내릴 준비를 했다. 그는 윤씨 일가 고수들을 전부 소집할 생각이었다. 그러다 갑자기 부하 한 명이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가주님, 육도진 우상이 만남을 찾아오셨습니다!”육도진 우상?육도진이 갑자기 찾아왔다는 소식에 윤씨 일가 형제의 안색이 확 달라졌다.“육도진 우상이 왜 갑자기 우리 윤씨 일가를 찾은 거죠? 황성으로 간 거 아니었나요?”둘째 윤창현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뭔가 일이 생긴 걸지도 몰라요.”셋째 윤정석이 말했다.오직 윤신우만이 싸늘한 눈빛으로 밖을 바라보며 잠깐 뜸을 들이다가 부하에게 말했다.“우상이 왔다고 했으니 일단 들어오라고 해.”“네!”잠시 뒤, 육도진 우상이 윤씨 일가 저택 안으로 들어왔다.윤씨 일가의 세 형제는 육도진 우상을 보았다. 윤창현은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마치 언제든 육도진을 공격하려는 듯 말이다.반대로 육도진은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그는 안으로 들어간 뒤 미소 띤 얼굴로 웃었다.“가주님, 무턱대고 찾아와서 실례가 됐을까 걱정되는군요.”“육도진 우상, 이 늦은 시간에 갑자기 찾아오다니 무슨 일이시죠?”윤신우는 곧바로 물었다.“콜록콜록, 가주님도 황성 쪽 일을 전해 들으셨겠죠?”육도진이 어떤 사람인가? 그는 윤신우의 살기 가득한 목소리를 듣자마자 짐작이 갔다.“조금 전해 들었습니다. 하지만 구체적인 상황은 육도진 우상께서 얘기해주셨으면 합니다.”윤신우는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솔직히 얘기하겠습니다. 한 시간 전, 윤구주 씨께서 황성 성벽에 검흔을 남기셨습니다. 황성에 한진모와 열 명의 절정 강자들이 말리지 않았더라면... 오늘 밤 엄청난 일이 벌어졌을 겁니다.”육도진
하지만 한 계단씩 갈수록 더욱 어려워지는 난관들도 이 평범한 사람에게는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다.만약 윤구주와 맞서야 하는 적의 입장이었다면 지금 이렇게 차분히 계단을 오르는 윤구주는 마치 깊은 심연 그 자체였을 것이다.그의 강력함은 도무지 가늠할 수 없었고 오히려 그가 올라올수록 위에 있는 사람들은 엄청난 압박감에 휩싸였다.검종의 검객들이 잠시 정신을 놓은 사이 윤구주는 이미 사백 계단까지 올라와 있었다.하지만 사백 계단쯤으로는 아무도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화진의 또 다른 황자 구주왕의 후계자였으니까.윤구주가 오백 계단을 밟는 순간 모든 이들은 숨을 죽이고 그를 응시했다.눈길을 떼지 못한 채 그의 오름을 지켜보았다.오백일…… 오백이십! 오백오십! 오백구십구!“마침내 구구관에 도달했다.”“칠구는 수겁이요 구구는 극히 넘기기 어려운데.”진정한 고수들은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과연 윤구주가 이 한 걸음을 쉽게 넘을 수 있을지 모두가 궁금해했다.윤구주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산 아래를 바라보았다.그가 본 것은 단순한 산이 아니라 마치 화진의 온 세상 같았다.한눈에 화진의 대지와 산천이 모두 담겼다.눈앞에 펼쳐진 화진의 아름다운 대지는 숨 막히는 광경이었다.하지만 동시에 이 끝없는 강산 곳곳에 묻혀 있는 수많은 해골도 함께 보였고 그의 마음은 순식간에 비장함과 슬픔으로 가득 찼다.윤구주의 내면을 감지한 서요산 검종 종주의 법신이 곧바로 그의 곁에 나타났다.“구주야 화진의 산천을 잘 살펴봐! 천하의 용맥은 모두 화진에서 비롯되었고 이 한 획 한 획은 백성의 척추와 같다! 눈에 비치는 물의 맑고 흐림은 중요하지 않아. 지나치게 눈 부신 빛은 우리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고 너무 어두운 밤은 희망을 앗아가기 마련이지. 하지만 어떤 변화가 있더라도 화진의 이 산천은 영원히 굳건히 서 있을 거야. 왜냐하면 푸른 산마다 묻혀 있는 충신의 뼈와 넋들이 이 나라를 지켜주고 있으니까.”서요산 검종 종주는 윤구주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그 온
진인들은 말했다. 임정설이 만약 집념을 내려놓는다면 육백 계단까지도 오를 수 있을 거라고.장인 대진인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하지만 그가 진정으로 집념을 놓는다면 더 이상 화진의 국주가 아니지. 바로 이런 끈질긴 의지가 있기에 그분이 화진 백성을 다스릴 수 있는 것이다.”다른 진인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운명이란 그런 법이다. 아마도 집념을 놓았다면 임정설은 오백 계단조차 오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이때 임정설은 아직 남아 있는 절반의 계단을 바라보며 씁쓸히 미소 지었다. “어쩌면 여기서 멈춰야겠구나.”임정설은 다시 뒤를 돌아 윤구주를 바라보았다. 그가 자기 자식이자 동료처럼 여기는 윤구주가 과연 몇 계단을 오를지 궁금했다.깊은 생각에 잠긴 임정설이 곧바로 말을 꺼냈다.“구주야 이제 네가 올라서 봐! 화진의 구주왕다운 실력을 보여줘! 적어도 나보다는 못하면 안 되지 않겠냐?”아래에 서 있던 윤구주는 고개를 살짝 저었다. 원래 그는 별 관심이 없었지만 국주의 바람이라면 흔쾌히 도전할 마음이었다.“명 받들겠습니다!” 윤구주는 말을 마치자마자 곧바로 계단을 밟아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가기 시작했다.구주왕이 등천로에 도전했다는 소식에 서요산 검종 전체가 술렁였다.검객은 물론이고 잡일을 돕는 제자들까지 모두 금정에 모여들어 그의 모습을 보고자 했다.심지어 하늘 위 어둑한 구름 사이에서도 한 쌍의 법안이 열렸다. 바로 서요산 검종 종주의 법신 환영이었다.임정설이 먼저 정상에 올랐고 장인 대진인을 포함한 일곱 진인과 서요산의 모든 제자들은 화진의 황자를 향해 몸을 숙여 예를 갖추었다.“모두 일어나시오. 그대들이 없었다면 화진은 이미 혼란 속에 빠졌을 것이오. 진정 국가와 화진을 위해 헌신한 것은 바로 그대들입니다.” 임정설은 화진의 모든 백성을 대표할 순 없지만 왕실을 대표하여 임 씨 일족의 지도자로서 서요산 검종의 노고에 진심으로 감사의 뜻을 표했다.“국주께서 과찬입니다. 우리는 그저 각자의 방식대로 묵묵히 힘썼을 뿐입니다. 화진의 백
일곱 진인들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그들은 국주가 이미 등황의 경지에 이르렀으니 사백 계단은 쉽게 오를 것으로 예상했다. 과연 그들의 예상대로 임정설은 멈추지 않고 계속 오르며 오백 계단을 가볍게 밟아 올랐다. “오백 계단을 밟으면 등황의 경지에 오를 수 있습니다. 우리 일곱 진인 중에서도 오직 장인 대진인께서만 과거에 오백 계단에 오르셨고, 현재 서요산에 살아계신 유일한 오백 계단 수련자이십니다. ” 한 진인이 감탄하며 말했다.이 말을 듣자 옆에 있던 백호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선임 도사님 그러면 그 도사님도 황자란 말씀입니까? ”“하하! 우리 서요산에서는 외부의 그런 칭호를 쓰지 않아요. 우리 사이에서는 그를 반신이라고 부릅니다.” 진인들이 웃으며 말했다.청해가 옆에서 덧붙였다. “서요산 검종에서 말하는 반선이 황자를 뜻하는 거야. 근데 그 서요산 반선 진짜 어마어마하게 강한 인물이거든. 예전에 곤륜 구역에서 귀한 영약 찾으러 들어왔다가 우리 빙신전 전주랑 빙황 두 명이 같이 상대했는데도 둘 다 거의 죽을 뻔했어. 결국 아사 신전한테까지 도움 요청해서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지.”“뭐라고?”백호는 놀라서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진짜 그렇게 강한지 의문이 들었다.일곱 진인 중 가장 나이 많은 그 진인은 백호의 단순한 반응에 웃음을 터트렸다. 사실 그가 바로 그 반선이었다. 다만 백호가 워낙 세상 물정에 둔감하여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저 놀라기만 하고 있었다.그사이 임정설은 이미 오백오십 계단까지 올라갔다. 하지만 이 단계에 이르자 임정설도 거의 극한에 도달했다.“역시 직접 올라와 봐야 이 압력을 제대로 실감하는구나! 오백사십 계단까진 무리 없었는데 오백오십 계단에서 도저히 버틸 수가 없구나.”지금 임정설을 압박하는 것은 단순한 술도의 압력만이 아니었다.과거의 온갖 기억들이 마장이 되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일곱 진인은 모두 임정설의 기운이 혼란스러워진 것을 느꼈다.“장인 사형, 국주님께서 심마에 걸리셨군
청해의 눈길이 자주색 도포를 입은 진인에게로 향했다.서요산검종에서 종주를 제외한 나머지 일곱 명의 진인이 가장 높은 수련을 가지고 있으며 평소 종문 내의 모든 일은 이들 일곱 명이 책임지고 있다.기세는 마치 대강의 파도가 넘실대듯 깊고 끝이 보이지 않는 산과 숲처럼 무한히 이어져 있었다. 그의 수련은 깊이가 가늠할 수 없을 정도였다.“서요산 7대 진인의 수련이 극 신급 절정이라고 들었는데 지금 보니 그 말이 너무 가볍게 들리네요. 귀하의 수련은 적어도 극 신급 절정 후반에 다다랐군요.”청해는 세 명의 진인에게 경의를 표하며 몸을 굽혔다.“서요산의 전통은 천 년을 자랑하며 그 깊이는 변함없이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반면 곤륜 구역은 스스로 신을 자처한 이후로 계속해서 내분을 일으켰습니다. 수련을 통해 세상을 떠난 후 도를 깨닫는다는 말처럼 곤륜 구역은 천하의 영기와 천물을 흡수했지만 제 생각에는 도를 얻지 못한 곳입니다. 지금 당신이 화진에게 올바른 수를 두는 것은 맞습니다. 앞으로 열심히 노력하면 극 신급 절정 후반도 절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한 진인이 답례하며 말했다.그때 몇몇 사람들은 서요산 검객들의 함성에 이끌려 사방을 살폈다. 백호가 사백 계단을 올라갔다는 소식이었다.“대단한데요. 서요산이 전성기였을 때도 사백 계단을 오른 이는 드물었어요. 우리 몇몇 진인들도 입문 시에 사백 계단을 넘은 적은 없었죠.”몇몇 진인들이 칭찬했다.이는 백호가 미래에 매우 큰 가능성을 지녔음을 의미했고 적어도 극 진경 후반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극 진경 후반은 곤륜 구역에서 신전의 전주가 될 수 있는 실력이다.지금 사백 계단에 오른 백호는 거의 한계에 다다랐다. 완전히 의지로 버티며 강력한 정신력으로 계속해서 오르고 있었다.그러나 아무리 강한 운명을 지녔다 해도 천지의 이치를 막을 수는 없다.사백오십 계단에 도달했을 때 백호는 결국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의식을 잃은 것은 시험이 끝났다는 신호였고 백호는 곧 깨어났다.“겨우 사백오십 계단이라니
서요산 검객들이 모두 그 무인의 정체를 궁금해하자 진인도 더 이상 뜸 들이지 않고 말했다.“저분은 구주왕 휘하의 화진 군신이자 국방부 대장 백호 장군이시다.”검객들은 모두 입이 벌어진 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군신의 명성은 당연히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보호하는 영웅이었으니까.“정말 구주왕 휘하의 군신이라니!”“역시 저런 굳센 의지가 그냥 나온 게 아니었어! 수많은 전장을 누빈 명장다운 모습이다!” 서요산 검객들은 백호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현재 백호는 이미 삼백이십 계단을 돌파한 상태였다. 백호가 혼자 주목을 독차지하는 걸 본 청해도 더 이상 가만히 있지 않고 계단에 발을 내디뎠다.처음 백 계단은 청해도 육신의 힘으로 버텼다. 하지만 백 계단을 넘자 육체만으로는 견디기 어려워졌다. 그는 술법으로 대응하려 했지만 평소 쓰던 빙신전의 신술이 계단 위 술법에는 통하지 않았다.“역시 화진의 서요산 검종은 보통이 아니구나. 이 등천로에선 일반 술법이 먹히지 않으니 천지 영기에 대한 깨달음으로 맞설 수밖에 없겠어.” 청해는 몸을 감싸고 있던 현빙을 거두고 오로지 자신의 속성 영기로만 버티며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막상 올라 보니 이 등천로가 얼마나 어려운지 제대로 실감했다. 이백 계단쯤 오르자 벌써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계단마다 한계를 시험하는 느낌이었다. 올려다보니 백호는 여전히 계단 위로 나아가고 있었다. 청해도 질 수 없다는 마음으로 이를 악물고 버텼다.서요산 검객들도 청해의 수준을 알아보고 속삭였다. “저 이역인은 정말 대단한 내력의 소유자다! 기운이 이미 진인 급에 가까워! 극 신급 절정의 수련자임이 분명해!”이에 대해 진인은 신비롭게 꾸미지 않고 솔직히 말했다. “저자는 곤륜 구역 빙신전의 부 전주 청해다. 경지가 매우 높지. 지금 빙신전은 우리 화진에 귀속되었고 청해 역시 구주왕 휘하의 부하가 되었다. 얼마 전 서울 방어전에서 청현과 목숨까지 걸고 사투를 벌인 끝에 죽을 고비를 넘겼으
백호는 아직도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어느덧 이백오십 계단까지 올라왔다. 이 단계부터는 실체화된 술법이 몸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계단 하나를 오를 때마다 바람, 불 번개와 같은 속성의 영기가 점점 강해졌다. 여기서부터는 육신 횡련의 수련자는 강력한 체질로 버티고 술도 재능이 뛰어난 수련자는 천지 영기를 다루는 능력으로 버텨야 했다. 한마디로 각자의 능력에 따라 갈리는 구간이었다. 어느 한 분야라도 특출나지 않으면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백호는 술도에는 재능이 없었기 때문에 오로지 강인한 육체 하나로 견디고 있었다.웅!성수의 피가 진동하며 백호의 몸을 지탱했다. 각종 속성의 영기가 몰아쳤지만 백호는 성수혈의 힘을 빌려 억지로 앞으로 나아갔다.수련자에게 있어서 성수의 혈맥이나 법보 등은 모두 신체 외적인 재능으로 간주하지만 그렇다고 이것들이 꼼수나 편법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천 가지 변화와 만 가지 신통력이 있어도 결국 만법은 한 가지로 귀결된다. 법기든 혈맥이든 이를 감당하는 것은 결국 본인의 몫이다. 천지 영기를 이용한 술법도 결국은 그 힘을 감당할 수 있어야 사용할 수 있는 것이며 감당하지 못하면 반드시 반작용을 맞게 된다. 따라서 수련의 길에는 애초에 편법이란 존재하지 않았다.성수 혈맥 같은 천지의 보물은 보통 사람이 함부로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윤구주의 도움을 받았다 하더라도 결국 이를 감당하는 건 백호 자신이었다. 성수 혈맥의 힘을 온전히 감당하며 백호는 결국 삼백 계단까지 올라섰다.계단의 꼭대기 근처에는 이미 서요산 검종의 검객들이 여럿 서 있었다. 서요산 검종은 근대에 들어 삼백 계단을 넘는 인재가 드물었다. 최근 백 년 동안 삼백 계단을 넘은 사람이 고작 열 명 남짓이었고 그중 대부분이 삼백여 계단에서 멈췄다. 그런데 지금 백호는 삼백이십 계단까지 올라선 것이다. 이 정도면 서요산 검종 전체가 떠들썩해질 만한 성과였다.이런 제자가 나타난다면 종문 전체가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래서 서요산의 진인들까
“한 사람의 품성을 제대로 살피지도 않고 마구잡이로 그렇게 많은 수련자를 키워낸다면 결국 천하의 마인을 직접 만들어 내는 꼴이 아니겠어?”청현이 바로 그 실패한 예다. 서요산 검종 종주가 청현의 천재성을 아까워한 나머지 그의 인성을 무시하고 양성한 끝에 결국 역도를 만들어 낸 것이다.“그럼 저하 서요산에 입문한 무술 무인들은 평균적으로 몇 계단까지 오르는지 아십니까?” 백호가 호기심에 물었다. 윤구주는 잠시 생각한 뒤 입을 열었다.“무술 무인의 정확한 데이터는 모르지만 검종 종주와 잡담할 때 들어보니 검종 제자들의 수준이 갈수록 떨어져서 천 년 전만 해도 평균 삼백 계단 정도였는데 요즘엔 백 계단도 못 오른다고 하더구나. 가끔 삼백 계단을 오르는 자라도 나오면 검종 전체가 몇 년은 떠들썩할 정도라고 했어.”“구백구십구 계단까지 있는 시험인데 천 년 전 전성기에도 겨우 삼백 계단이요?” 백호는 입술을 삐죽이며 서요산 검종의 수준이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때 한 번 도전해 볼 생각이야?” 윤구주는 흥미롭게 백호를 바라보았다. 백호는 당장이라도 도전하고 싶은 마음에 윤구주의 허락을 구한 뒤 바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한 계단 두 계단... 오십 계단까지는 아무 어려움도 없었다. 백호는 오십 계단에 서서 사람들을 향해 서요산 검종이 별것 아니라며 놀려댔다. 하지만 육십 계단쯤 올랐을 때 처음으로 압력을 느꼈다. 마치 몸 위에 작은 차 한 대가 올라탄 듯한 느낌이었다. 물론 백호에게는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 수준이었다. 그는 계속해서 발걸음을 옮겼다. 백 계단에 도달하자 압력이 갑자기 커졌다. 등에 작은 승용차 대신 소형 트럭이 올라탄 듯한 느낌이었지만 아직 백호의 한계에도 가지 못했다.“근래 사람들의 평균이 백 계단도 못 넘는 이유가 이제야 이해가 되네요. 예전의 무인 횡련은 황제도 오를 수 있었지만 요즘 무인 횡련은 죽어라 노력해도 소형 트럭 하나 못 버티는 수준이니 말입니다.”백호는 농담을 던지며 계속해서 계단을 올라
전에 임정설은 구오 지존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지만 나라를 위해 힘쓰며 수모를 견뎌내고 살아남으려 했다.하지만 이제 황제가 된 그는 죽음을 생각하게 되었다.그 탓에 이번 관문 앞에서 그는 망설였다.살아 있는 자만이 통과할 수 있는 관문이었다.죽음을 마음에 품은 자는 절대로 넘어설 수 없는 관문이었다.그 자리에 있던 사람 중 청해만이 그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생각했다.‘황제가 되면 곤륜 구역에서 최고 경지에 도달하는 건데. 기뻐해도 모자랄 판에 왜 죽음을 택하려는 거지?’“저하, 국주는 아직도 풀리지 않은 듯합니다. 저하도 사랑하던 이에게 배신당했어도 결국 극복해 나갔잖습니까.”백호도 이해하지 못했다.그는 여전히 국주보다는 왕이 더 낫다고 여겼다.“네가 뭘 안다고 그런 말을 함부로 내뱉느냐.” 윤구주가 단호하게 말했다.백호는 머리를 긁적이며 답했다. 그는 어리숙하고 말솜씨도 없기에 생각나는 대로 말했을 뿐이다.“내가 문아름에게 배신당한 건 억울한 일이지만 나는 그녀에게 잘못한 게 없다. 오히려 그녀가 날 배신한 거다. 하지만 국주는 그 반대였지. 그가 그녀를 저버린 거야. 정이 깊으면 오래가지 못하고 지혜가 지나치면 오히려 상처를 입는다. 이 세상에서 가장 쓰라린 후회는 가진 뒤 잃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과 생사를 달리하게 되는 것이다.” 윤구주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만약 소채은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자신도 제정신이 아닐 거라고 느꼈다.“그럼 복수하면 되지 않나요?” 백호가 어리둥절하게 물었다.이때 청해가 눈치를 채고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상대가 너무 강해서 못 이기는 거지. 황제에 오르기 전까진 제대로 맞붙을 힘도 안 돼. 오르고 나서도 이길 수 있을지 장담 못 하고.”윤구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딱 그 말이 맞았다.“그럼 우리가 국주님 대신 복수해 드리면 되잖아요? 국주님은 제 왕이기도 하지만 제 윗사람이기도 하잖아요.”백호가 고개를 갸웃했다.“하하! 만약 세상 사람들이 다 너처럼 솔직하다면 이런
인간이 나쁜 짓을 거듭해 양심을 잃으면 부끄러움도 사라진다. 예전 같으면 아무렇지 않았을 테지만, 지금은 윤구주를 따라 명예심이 생기면서 죄책감도 느끼게 된 청해에게 이 원한의 전법은 고통스럽기만 했다. 물론 곤륜역 한 신전의 부전주로서 정신이 붕괴할 정도는 아니었다.네 사람은 이 원한의 전법도 가볍게 넘어섰다.이때 전법에 관심을 가졌던 임정설이 무언가를 눈치챘다.“구주야, 서요산의 전법은 우연히 들어온 자를 쫓아내는 동시에 수련자의 의지를 시험하는 것이었어. 서요산은 의지력이 확고한 자들만 끌어들인다는 것을 미리 들어 알고 있다. 이게 바로 서요산이 제자를 선발하는 방식인가 보구나.”“그렇습니다. 매년 화진 무도계 사람들이 서요산에 찾아오지만 성공한 자는 극히 드뭅니다. 실패자들 중 십중팔구는 산기슭에서 죽음을 맞이하죠. 어떤 문턱은 넘지 않는 것이 복이 될 때가 있습니다. 모르는 것이 약이죠. 현실을 알고도 바꾸지 못하는 것이 가장 괴로운 법이니까요. 이 관문을 넘는다고 해도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면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죽음뿐입니다.”윤구주의 말이 끝나자 세 번째 전법이 나타났다.첫 번째와 두 번째 전법은 이곳에 들어온 이들을 돌려보내려고 만든 것이지만 세 번째 전법은 달랐다. 이 전법은 살기로 가득 찬 죽음의 전법이었다.평범한 사람들은 여기까지 도달하지 못한다. 이곳까지 온 자들도 앞길의 위험을 보고 함부로 들어가려 하지 않을 것이다. 눈 앞에 펼쳐진 죽음의 길을 보고도 들어가는 자는 스스로 죽음을 원하는 자라서 그런 자들에게 죽음을 내리는 것은 오히려 덕을 쌓는 일이었다.하지만 무도로 도를 깨우치려는 수련자라면 이 관문을 넘기 위해 반드시 목숨을 걸어야 한다. 버텨내야만 수도의 길에 들 수 있고 실패하면 그 후과를 받아들여야 한다.전법 안은 살기로 가득했다. 생기와 영기가 세상을 이롭게 하지 못할지라도 살기와 죽음의 기운은 목숨을 앗아갈 것이 분명했다.진법 내부에는 수많은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무도계에 이름을 날렸던 강자들의 유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