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나스는 그 말을 듣고 세나미에게 말했다.“딸아, 무서워하지 마. 아버지가 있으니 아무도 널 다치게 하지 못해. 넌 지금 편히 쉴 수 있는 곳을 찾아서 쉬어. 아버지가 그 빌어먹을 화진인을 잡아서 처단할게.”다들 자신의 말을 믿지 않자 세나미는 초조해했다.“아버지! 왜 제 말을 믿지 않는 거예요? 길든 할아버지 아시죠? 길든 할아버지는 그 악마의 손에 단숨에 죽었어요. 다들 이곳에서 죽길 바라는 거예요?”세나미가 초조한 목소리로 울먹거리자 세나스는 미간을 구겼다.그가 아는 세나미는 줄곧 용감하고 지혜로우며 침착한 사람이었다.그런데 오늘은 왜 이러는 걸까? 왜 이렇게 두려워하는 걸까?세나스는 잠깐 고민하다가 말했다.“말해 봐. 널 납치한 화진인이 정말로 그렇게 강한 거야?”“맞아요. 그는...”세나미는 조금 엄두가 나지 않는 표정이었다.“그가 누군데?”세나스는 딸을 바라보았다.세나미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갑자기 고개를 들어 말했다.“아버지의 숙적이에요. 유일하게 아버지를 이긴 적이 있는 사람이기도 하죠.”‘뭐라고?’자신을 이긴 적이 있다는 말에 세나스는 당황했다.세나스는 살면서 수많은 전투를 했었다.그러나 그를 이긴 적 있는 사람은 오직 윤구주뿐이었다.세나미의 말을 들은 세나스는 안색이 어두워졌다.“설마 그 화진인이 구주왕이란 말이야?”“맞아요. 바로 그예요.”“그가 우리 설국에 왔어요. 지금은 저 앞에 있는 온천에 있어요.”세나미는 드디어 윤구주의 일을 얘기했다.‘뭐?’화진의 구주왕이 낙일성에 왔다는 말에 세나스는 당황했다.“그럴 리가... 그는 이미 죽음의 바다에서 죽었어. 그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야. 그가 살아있을 리가 없잖아?”세나스가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저도 그렇게 생각했었어요... 그런데 죽지 않았더라고요! 화진은 우리 10국을... 세상을 모두 속인 거예요. 구주왕이 살아있을 줄은 아무도 예상치 못한 일이에요!”세나미는 윤구주가 살아있다는 소식을 얘기했다.이때 세나스는 깜짝 놀라 넋이 나갔고 그
그 말에 세나스는 멍해졌다.세나미의 말대로 윤구주는 홀로 설국의 병사 수천 명을 죽였고 흑여산맥에 있는 설국의 진영 십여 개를 없앴다.게다가 설국의 노련한 절정 강자 길든마저 단숨에 죽어서 성벽에 걸렸다.구주왕을 제외하면 누가 과연 이런 짓을 벌일 수 있을까?그런 생각이 들자 세나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그러니까 아버지, 지금 당장 이곳을 떠나요. 지금 떠나지 않으면 늦을지도 몰라요.”세나미는 계속해 설득했다.세나스가 말했다.“하지만 우리가 떠나면 넌 어떡하니?”“저요...?”세나미는 쓴웃음을 지었다.윤구주의 생사인에 당했으니 세나미에게는 도망칠 기회가 전혀 없었다.그녀가 세상 끝까지 도망친다고 해도 윤구주는 생각 한번 하는 것으로 그녀의 목숨을 빼앗을 수 있었다.그녀로서는 도망칠 구석이 없었다.그러나 그녀는 아버지가 걱정하지 않게끔 말했다.“전 신경 안 쓰셔도 돼요. 제가 알아서 그 악마의 손아귀에서 벗어날게요. 아버지는 그냥 제 말대로 빨리 이곳을 떠나시면 돼요.”세나미가 그렇게 얘기할 때 갑자기 우레와도 같은 목소리가 그녀의 뒤에 있는 거리에서 들려왔다.“도망치려고? 그럴 수 있겠어?”그 말이 들림과 동시에 폭풍이 멈춘 것만 같았다.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설국 병사들의 귓가를 파고들었고, 설국 병사들은 그 순간 피가 들끓는 기분을 느꼈다.세나스 또한 마찬가지였다.그와 뒤에 있는 병사들은 눈이 휘둥그레진 채 먼 거리를 바라보았다.눈보라 속에서 흰옷을 입은 남자가 서서히 걸어왔다.그는 신 같기도, 악마 같기도 했다.그는 아주 천천히 걷는 것 같았지만 눈 깜짝할 사이에 모든 이들의 앞에 도착했다.윤구주가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윤구주를 본 순간, 가장 먼저 깜짝 놀라서 소리 지른 사람은 세나미였다.“큰일이야. 저 악마가 나타나다니!”세나스 역시 윤구주의 익숙한 모습을 본 순간 건장한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윤구주에게 찔려서 실명한 오른쪽 눈을 바늘로 콕콕 쑤시는 것처럼 아팠다.6년, 무려 6년이었다.세나스의 가
세나미는 윤구주를 설국으로 데려온 것이 후회됐다.그리고 그녀의 아버지가 올 때까지 낙일성에 남아 있은 것이 후회됐다.만약 윤구주가 정말로 사람들을 다 죽일 생각이라면 그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당신은 계속 날 이용했던 거였어...”세나미는 덜덜 떨면서 윤구주를 바라보았다.윤구주는 차갑게 피식 웃었다.“노예 따위 이용하는 게 뭐가 어때서?”윤구주의 말을 들은 세나미는 눈시울이 붉어졌다.“악마! 이 악마 같은 자식! 죽여버리겠어!”결국 참지 못한 세나미는 갑자기 미치기라도 한 건지 윤구주를 향해 달려들었다.그러나 안타깝게도 윤구주가 손을 한 번 휘두르자 무시무시한 기운이 그녀를 날려 보냈고 그녀는 먼 곳까지 날아가서 눈밭에 쓰러졌다.“딸!”딸이 윤구주로 인해 다치자 세나스는 소리를 지르며 그녀를 부축하러 가려고 했다. 그런데 윤구주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세나스, 우리 사이의 원한은 오늘부로 다 해결하자고.”윤구주의 말을 들은 순간 애꾸눈인 세나스는 분노에 차서 고함을 질렀다.“대, 대체 뭘 어쩌고 싶은 거야?”“뭘 어쩌고 싶냐고?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사람이 그걸 모른단 말이야?”윤구주의 말을 들은 순간 세나스는 몸을 흠칫 떨었다.“난 네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어!”“모르겠다면 내가 알려주도록 하지. 6년 전 난 그렇게 말했어. 설국에서 또 한 번 우리 화진의 영토를 넘본다면 설국 서울까지 쳐들어가서 모든 이들이 대가를 치르게 할 거라고. 그런데 어떤 일이 벌어졌지? 설국 병사들은 공공연히 우리 땅을 침범했을 뿐만 아니라 우리 화진인들의 물자를 강탈했어. 더욱 괘씸한 건 설국이 감히 우리 화진의 세가와 결탁해서 우리 화진의 무학 정수를 몰래 훔쳐 배우며 설국의 병력을 강화했다는 거야. 이 두 죄 중 하나만 저질렀어도 난 설국을 처단했을 거야. 그런데 설국은 이 두 죄 다 저질렀지. 그러니 나도 당연히 당신을 죽여야 하지 않겠어?”윤구주가 한 말은 마치 신의 말처럼 들렸다.오늘 일은 전부 설국이 자초한 일이었
윤구주는 대체 뭘 하려는 걸까?세나스는 정말로 두려웠다.“국제중재기구? 좋아. 그들이 날 찾아올 때까지 기다려주겠어.”말을 마친 뒤 윤구주는 살기를 서슴없이 드러냈다.앞서 말했듯이 그가 설국에 온 이유는 옳고 그름을 따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설국인들을 죽이기 위해서였다.그래서 윤구주는 그렇게 말한 뒤 곧바로 오른손으로 수인을 맺었다.그는 곧장 팔기지 중의 제5기 천주금술을 사용하였다.검결이 나타나자마자 어둑어둑하던 상공이 갑자기 보라색으로 변했다. 윤구주가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보라색 회오리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하며 곧바로 검들이 하나둘 그의 주변에 나타났다.검은 총 999자루였다.“하!”윤구주가 소리를 지르자 999자루의 검들이 허공에 떠 있다가 순식간에 거대한 천주검 한 자루로 변했다.천주검이 나타나자 날이 어두워졌다.“베어라!”윤구주가 오른손을 움직이자 거대한 천주검이 하늘에서 내려왔다.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공격에 설국 병사들은 겁을 먹고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설국 장수들도 마찬가지였다.“이것은 구주왕의 팔기지야... 다들 물러나!”세나스는 윤구주가 천주금술을 시전하자 기겁하면서 소리를 빽 질렀다.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미 늦었다.윤구주의 검이 내려오자 비명이 끊임없이 터져 나왔다.눈앞의 설국 병사들 수백 명이 윤구주의 공격에 목숨을 잃었다. 그뿐만 아니라 낙일성 뒤쪽의 거대한 성벽 또한 그 공격에 무너져 내릴 뻔했다.눈앞의 설국 병사들의 찢긴 시체들을 본 세나스는 눈이 벌게졌다.“구주왕, 적당히 해. 선 넘지 마!”윤구주는 웃었다.“왜? 그러면 안 될 이유라도 있어?”검이 또 한 번 내려왔다.무시무시한 천주검은 마치 세상을 파멸로 이끌 검과 같았다.검이 한 번 휘둘러질 때마다 수백 명의 설국 병사들이 피바다 위로 쓰러졌다.윤구주의 살육이 시작된 걸 본 세나스 곁의 신급 장수 6명은 분노에 차서 말했다.“화진인! 오늘 우리 설국 장수들은 목숨을 걸고서라도 널 죽일 거다!”6명의 신급 장수는 일제히 윤구
처참한 비명과 애원하는 소리가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6명의 신급 장수 모두 맥 한 번 추리지 못하고 윤구주의 손에 죽어버리자 세나스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남은 설국 병사들은 모두 간담이 서늘했다.이걸 과연 전투라고 부를 수 있을까?이건 전투가 아닌 살육이었다.윤구주는 홀로 군대 하나를 없앴다.윤구주가 팔기지 술현지를 시전하자 그의 온몸에 흰빛으로 둘리며 마치 신처럼 보였다.그가 지난 곳마다 시체가 즐비했다.눈앞의 이 군대는 세나스가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는 군대였다.그리고 조금 전의 신급 강자 6명은 세나스가 가장 아끼고 믿는 설국의 인재들이었다.그러나 그런 존재들이 윤구주에게 전부 살해당했다.이 순간, 설국의 에이스라고 불리던 부대가 흔들리기 시작했다.어쩔 수 없었다.다들 죽는 게 두려웠으니 말이다.이때 갑자기 어둡던 하늘 위로 거대한 그림자가 나타나서 윤구주를 가렸다.“화진인! 참 건방지구나! 우리 설국에 정말로 아무도 없는 줄 안 것이냐?”섬뜩한 목소리가 들려옴과 동시에 허공에 갑자기 검은색 우산이 하나 나타났다.그 우산은 아주 거대했고 겉면에는 보라색 문자가 적혀 있었다.문자가 반짝거리면서 무시무시한 힘을 싣고 윤구주를 덮쳐들었다.그 우산은 법기였다.검은 우산이 허공에서 내려오자 윤구주는 차갑게 코웃음 쳤다.“별 쓰레기 같은 게 날 상대하려고 하네. 당장 튀어나와!”윤구주는 갑자기 발을 힘껏 굴렀다.“뇌왕인!”쩌적.어둑어둑하던 하늘이 마치 무언가에 찢긴 것처럼 엄청난 소용돌이가 나타났다.소용돌이가 나타나자 무시무시한 뇌전들이 소용돌이 속에서 얼핏 보였다.윤구주는 뇌왕인을 시전한 뒤 곧바로 손을 들어 수많은 뇌전들이 검은색 거대한 우산을 공격하게 했다. 펑펑 소리와 함께 검은 우산은 뇌전의 공격 때문에 그 자리에서 펑 소리를 내며 폭발했다.검은 우산이 폭발한 뒤 검은색 장포에 모자를 쓴 설국 제사장 세 명이 하늘에서 내려왔다.세 사람은 엄청난 술법 파동을 내뿜고 있었다.그중 중간에 있는 백발의 노
적야라고 불린 백발의 노인은 세나스를 향해 허리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전 대신관의 명령을 받고 군신 각하를 도와드리러 온 겁니다.”“정, 정말 잘됐어요! 적야 대제사장님의 도움이 있다면 우리 설국은 무사할 거예요.”대신관의 수제자인 세나미는 빠르게 다가가서 적야 대제사장을 향해 깊이 허리를 숙였다.적야가 말했다.“나미 아가씨, 예의 차리지 않으셔도 됩니다. 대신관님께서 하루빨리 신전으로 돌아오라고 하셨습니다.”“하지만...”세나미는 말을 끝마치지 못하고 윤구주를 바라보았다.윤구주의 생사인이 자신을 통제한다는 걸 안 뒤로 세나미는 이미 절망에 빠졌다.윤구주가 그녀를 죽일 생각이라면 그녀를 죽이겠다는 생각만 한번 하면 되었다.그래서 세나미는 두려웠다.백발이 성성한 적야 대제사장은 세나미가 두려워하는 것 같자 뭔가를 깨달았다.그는 고개를 들며 세나미를 위로했다.“걱정하지 마십시오. 오늘 상대가 누가 됐든 우리 설국의 영토를 침범한 자는 모두 죽을 테니 말입니다.”그는 죽을 거라는 말을 강조해서 말했다.그러고 나서 천천히 시선을 들어 윤구주를 바라보았다.“아주 건방진 분이군요. 감히 홀로 설국 영토를 침범하고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다니, 벌을 받을까 두렵지 않으십니까?”“하하하하!”그 말을 들은 윤구주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당신 같은 인간이 무슨 자격으로 내 앞에서 신에 대해 논하는 거지?”윤구주는 우뚝 서서 엄청난 기운을 내뿜으며 말했다.“전 설국 광명 신전의 대제사장입니다. 오늘 전 대신관님의 명령을 받고 당신을 설득하러 왔습니다. 만약 지금 살육을 멈추고 저와 함께 광명 신전으로 돌아가서 3년간 벌을 받는다면 목숨만은 살려줄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신의 벌을 받게 될 겁니다. 그러면 당신은 육신이 죽고 영혼도 지옥으로 떨어질 겁니다.”적야 대제사장의 말을 들은 윤구주는 갑자기 차갑게 웃었다.“광명 신전이라고 했나? 오늘 난 당신들의 신을 죽이고 광명 신전의 신화를 없앨 거야!”윤구주는 그렇게 말한 뒤 손으로
구주왕이라는 세 글자가 적야 대제사장의 귀를 파고들었고 순간 적야는 안색이 달라졌다. 그의 뒤에 있던 다른 두 명의 대제사장도 마찬가지였다.“화진의 구주 군신 말인가요? 6년 전 홀로 우리 설국 수도까지 쳐들어와서 설국인들을 죽였던 그 사람이요?”적야는 깜짝 놀랐다.“네, 바로 그예요.”세나스가 말했다.“그럴 리가... 구주왕은 죽음의 바다에서 숨을 거뒀다고 하지 않았나요? 어떻게 살아있는 거죠?”적야가 다시금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아뇨, 그는 죽지 않았어요. 살아있었어요. 화진이 우리를, 전 세계를 속인 거예요!”적야는 당연히 세나스의 말을 믿었다.과거 세나스의 눈 한쪽을 빼앗은 당사자가 바로 윤구주였기 때문이다.다시금 흰 옷을 입은 윤구주를 바라본 순간, 적야는 몸을 흠칫 떨었다.“화진의 군신이었다니. 그래서 제 진마탑을 쉽게 막을 수 있었던 거군요!”적야는 중얼거리며 말하더니 고개를 돌려 윤구주를 바라보았다.“구주왕, 오랜만이군요. 구주왕은 화진의 최고 군신이며 최강자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오늘 보니 역시 명불허전이네요.”세 번 연달아 그들을 공격한 윤구주는 우뚝 서서 엄청난 기운을 내뿜었다.“아부 떨 필요는 없어. 오늘 당신들 모두 죽을 테니 말이야.”매정한 말이 윤구주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적야는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구주왕께서는 오늘 저희 설국을 적으로 돌리려고 마음먹으셨나 보네요.”“일개 설국 따위는 당연히 벌을 받아야지.”윤구주는 패기 넘치게 말했다.적야는 한숨을 쉬었다.“결심하신 모양이니 오늘 구주왕 홀로 저희 설국을 없앨 수 있을지 한 번 지켜보겠습니다. 자, 여러분, 이곳에 진법을 만듭시다!”적야가 명령을 내리자 옆에 있던 두 명의 대제사장이 빠르게 움직여 삼각형 모양으로 윤구주를 둘러쌌다.세 명의 설국 대제사장은 모두 절정 강자였다.특히 적야는 사상 절정이었다.세 사람은 윤구주를 둘러쌌고 적야가 우선 수인을 맺었다. 그러자 곧바로 원형의 빛무리가 윤구주의 머리 위에 나타났다.그 빛무리
그 순간 번장대진 안에서 갑자기 검은 그림자들이 나타났다. 그림자들은 비록 흐릿했지만 모두 절정 수준의 살기를 띠고 있었다.그 그림자들은 윤구주를 공격하기 시작했다.윤구주는 그 순간 몸에 힘을 주며 엄청난 기세를 내뿜었다. 그가 손을 쓱 휘두르자 무시무시한 기운에 그림자들이 충격을 받고 멀어졌다.그러나 그림자들은 형태를 띠지 않고 있으므로 충격을 받고 멀어진 뒤에도 곧바로 다시 뭉쳐서 윤구주를 공격했다.“구주왕, 당신은 비록 실력이 대단하지만 우리 신전의 번장대진을 파괴하는 건 쉽지 않을 겁니다. 우리 광명 신전의 영살옥은 벌을 주려는 신의 뜻으로 뭉쳐진 것이라 형태가 없습니다. 당신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이 번장대진에서는 결국 힘이 빠져서 죽게 되죠.”적야는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수많은 그림자들에 둘러싼 윤구주를 바라보았다.그의 말대로 번장대진 안의 그림자들은 모두 허상이고 형체가 없었다.윤구주가 그림자들을 없애버리려고 할 때마다 그림자들은 다시 뭉쳤다.게다가 그림자들은 모두 절정의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이렇게 연달아 공격당한다면 정말로 적야의 말처럼 아무리 강한 실력자라도 결국엔 힘이 빠져서 죽을지도 몰랐다.“이런 보잘것없는 진법으로 날 죽이려고?”번장대진 속의 윤구주가 갑자기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거만하군요! 당신이 과연 죽지 않을까요? 영살옥, 백영교살!”적야가 다시 한번 수인을 맺었다. 그러자 번장대진 안의 그림자들이 점점 많아지기 시작하면서 거의 백여 개 정도 되었다.더욱 무시무시한 것은 그것들 모두 절정 수준이라는 점이었다.그렇게 많은 그림자들이 미친 듯이 윤구주를 죽이려고 달려들었다. 이 순간 번장대진은 전장이 되어버렸다.“하하! 신전의 번장대진이 있다면 구주왕도 죽을 수밖에 없어!”세나스는 흥분해서 말했다.설국의 군신인 세나스는 광명 신전 번장대진의 위력을 알고 있었다.윤구주가 번장대진 안에 갇힌 모습을 보자 그의 눈동자가 광기로 번들거렸다.“아버지! 저 악마의 실력을 얕보면 안 돼요!”세나미가 귀띔했다
하지만 한 계단씩 갈수록 더욱 어려워지는 난관들도 이 평범한 사람에게는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다.만약 윤구주와 맞서야 하는 적의 입장이었다면 지금 이렇게 차분히 계단을 오르는 윤구주는 마치 깊은 심연 그 자체였을 것이다.그의 강력함은 도무지 가늠할 수 없었고 오히려 그가 올라올수록 위에 있는 사람들은 엄청난 압박감에 휩싸였다.검종의 검객들이 잠시 정신을 놓은 사이 윤구주는 이미 사백 계단까지 올라와 있었다.하지만 사백 계단쯤으로는 아무도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화진의 또 다른 황자 구주왕의 후계자였으니까.윤구주가 오백 계단을 밟는 순간 모든 이들은 숨을 죽이고 그를 응시했다.눈길을 떼지 못한 채 그의 오름을 지켜보았다.오백일…… 오백이십! 오백오십! 오백구십구!“마침내 구구관에 도달했다.”“칠구는 수겁이요 구구는 극히 넘기기 어려운데.”진정한 고수들은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과연 윤구주가 이 한 걸음을 쉽게 넘을 수 있을지 모두가 궁금해했다.윤구주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산 아래를 바라보았다.그가 본 것은 단순한 산이 아니라 마치 화진의 온 세상 같았다.한눈에 화진의 대지와 산천이 모두 담겼다.눈앞에 펼쳐진 화진의 아름다운 대지는 숨 막히는 광경이었다.하지만 동시에 이 끝없는 강산 곳곳에 묻혀 있는 수많은 해골도 함께 보였고 그의 마음은 순식간에 비장함과 슬픔으로 가득 찼다.윤구주의 내면을 감지한 서요산 검종 종주의 법신이 곧바로 그의 곁에 나타났다.“구주야 화진의 산천을 잘 살펴봐! 천하의 용맥은 모두 화진에서 비롯되었고 이 한 획 한 획은 백성의 척추와 같다! 눈에 비치는 물의 맑고 흐림은 중요하지 않아. 지나치게 눈 부신 빛은 우리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고 너무 어두운 밤은 희망을 앗아가기 마련이지. 하지만 어떤 변화가 있더라도 화진의 이 산천은 영원히 굳건히 서 있을 거야. 왜냐하면 푸른 산마다 묻혀 있는 충신의 뼈와 넋들이 이 나라를 지켜주고 있으니까.”서요산 검종 종주는 윤구주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그 온
진인들은 말했다. 임정설이 만약 집념을 내려놓는다면 육백 계단까지도 오를 수 있을 거라고.장인 대진인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하지만 그가 진정으로 집념을 놓는다면 더 이상 화진의 국주가 아니지. 바로 이런 끈질긴 의지가 있기에 그분이 화진 백성을 다스릴 수 있는 것이다.”다른 진인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운명이란 그런 법이다. 아마도 집념을 놓았다면 임정설은 오백 계단조차 오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이때 임정설은 아직 남아 있는 절반의 계단을 바라보며 씁쓸히 미소 지었다. “어쩌면 여기서 멈춰야겠구나.”임정설은 다시 뒤를 돌아 윤구주를 바라보았다. 그가 자기 자식이자 동료처럼 여기는 윤구주가 과연 몇 계단을 오를지 궁금했다.깊은 생각에 잠긴 임정설이 곧바로 말을 꺼냈다.“구주야 이제 네가 올라서 봐! 화진의 구주왕다운 실력을 보여줘! 적어도 나보다는 못하면 안 되지 않겠냐?”아래에 서 있던 윤구주는 고개를 살짝 저었다. 원래 그는 별 관심이 없었지만 국주의 바람이라면 흔쾌히 도전할 마음이었다.“명 받들겠습니다!” 윤구주는 말을 마치자마자 곧바로 계단을 밟아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가기 시작했다.구주왕이 등천로에 도전했다는 소식에 서요산 검종 전체가 술렁였다.검객은 물론이고 잡일을 돕는 제자들까지 모두 금정에 모여들어 그의 모습을 보고자 했다.심지어 하늘 위 어둑한 구름 사이에서도 한 쌍의 법안이 열렸다. 바로 서요산 검종 종주의 법신 환영이었다.임정설이 먼저 정상에 올랐고 장인 대진인을 포함한 일곱 진인과 서요산의 모든 제자들은 화진의 황자를 향해 몸을 숙여 예를 갖추었다.“모두 일어나시오. 그대들이 없었다면 화진은 이미 혼란 속에 빠졌을 것이오. 진정 국가와 화진을 위해 헌신한 것은 바로 그대들입니다.” 임정설은 화진의 모든 백성을 대표할 순 없지만 왕실을 대표하여 임 씨 일족의 지도자로서 서요산 검종의 노고에 진심으로 감사의 뜻을 표했다.“국주께서 과찬입니다. 우리는 그저 각자의 방식대로 묵묵히 힘썼을 뿐입니다. 화진의 백
일곱 진인들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그들은 국주가 이미 등황의 경지에 이르렀으니 사백 계단은 쉽게 오를 것으로 예상했다. 과연 그들의 예상대로 임정설은 멈추지 않고 계속 오르며 오백 계단을 가볍게 밟아 올랐다. “오백 계단을 밟으면 등황의 경지에 오를 수 있습니다. 우리 일곱 진인 중에서도 오직 장인 대진인께서만 과거에 오백 계단에 오르셨고, 현재 서요산에 살아계신 유일한 오백 계단 수련자이십니다. ” 한 진인이 감탄하며 말했다.이 말을 듣자 옆에 있던 백호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선임 도사님 그러면 그 도사님도 황자란 말씀입니까? ”“하하! 우리 서요산에서는 외부의 그런 칭호를 쓰지 않아요. 우리 사이에서는 그를 반신이라고 부릅니다.” 진인들이 웃으며 말했다.청해가 옆에서 덧붙였다. “서요산 검종에서 말하는 반선이 황자를 뜻하는 거야. 근데 그 서요산 반선 진짜 어마어마하게 강한 인물이거든. 예전에 곤륜 구역에서 귀한 영약 찾으러 들어왔다가 우리 빙신전 전주랑 빙황 두 명이 같이 상대했는데도 둘 다 거의 죽을 뻔했어. 결국 아사 신전한테까지 도움 요청해서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지.”“뭐라고?”백호는 놀라서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진짜 그렇게 강한지 의문이 들었다.일곱 진인 중 가장 나이 많은 그 진인은 백호의 단순한 반응에 웃음을 터트렸다. 사실 그가 바로 그 반선이었다. 다만 백호가 워낙 세상 물정에 둔감하여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저 놀라기만 하고 있었다.그사이 임정설은 이미 오백오십 계단까지 올라갔다. 하지만 이 단계에 이르자 임정설도 거의 극한에 도달했다.“역시 직접 올라와 봐야 이 압력을 제대로 실감하는구나! 오백사십 계단까진 무리 없었는데 오백오십 계단에서 도저히 버틸 수가 없구나.”지금 임정설을 압박하는 것은 단순한 술도의 압력만이 아니었다.과거의 온갖 기억들이 마장이 되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일곱 진인은 모두 임정설의 기운이 혼란스러워진 것을 느꼈다.“장인 사형, 국주님께서 심마에 걸리셨군
청해의 눈길이 자주색 도포를 입은 진인에게로 향했다.서요산검종에서 종주를 제외한 나머지 일곱 명의 진인이 가장 높은 수련을 가지고 있으며 평소 종문 내의 모든 일은 이들 일곱 명이 책임지고 있다.기세는 마치 대강의 파도가 넘실대듯 깊고 끝이 보이지 않는 산과 숲처럼 무한히 이어져 있었다. 그의 수련은 깊이가 가늠할 수 없을 정도였다.“서요산 7대 진인의 수련이 극 신급 절정이라고 들었는데 지금 보니 그 말이 너무 가볍게 들리네요. 귀하의 수련은 적어도 극 신급 절정 후반에 다다랐군요.”청해는 세 명의 진인에게 경의를 표하며 몸을 굽혔다.“서요산의 전통은 천 년을 자랑하며 그 깊이는 변함없이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반면 곤륜 구역은 스스로 신을 자처한 이후로 계속해서 내분을 일으켰습니다. 수련을 통해 세상을 떠난 후 도를 깨닫는다는 말처럼 곤륜 구역은 천하의 영기와 천물을 흡수했지만 제 생각에는 도를 얻지 못한 곳입니다. 지금 당신이 화진에게 올바른 수를 두는 것은 맞습니다. 앞으로 열심히 노력하면 극 신급 절정 후반도 절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한 진인이 답례하며 말했다.그때 몇몇 사람들은 서요산 검객들의 함성에 이끌려 사방을 살폈다. 백호가 사백 계단을 올라갔다는 소식이었다.“대단한데요. 서요산이 전성기였을 때도 사백 계단을 오른 이는 드물었어요. 우리 몇몇 진인들도 입문 시에 사백 계단을 넘은 적은 없었죠.”몇몇 진인들이 칭찬했다.이는 백호가 미래에 매우 큰 가능성을 지녔음을 의미했고 적어도 극 진경 후반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극 진경 후반은 곤륜 구역에서 신전의 전주가 될 수 있는 실력이다.지금 사백 계단에 오른 백호는 거의 한계에 다다랐다. 완전히 의지로 버티며 강력한 정신력으로 계속해서 오르고 있었다.그러나 아무리 강한 운명을 지녔다 해도 천지의 이치를 막을 수는 없다.사백오십 계단에 도달했을 때 백호는 결국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의식을 잃은 것은 시험이 끝났다는 신호였고 백호는 곧 깨어났다.“겨우 사백오십 계단이라니
서요산 검객들이 모두 그 무인의 정체를 궁금해하자 진인도 더 이상 뜸 들이지 않고 말했다.“저분은 구주왕 휘하의 화진 군신이자 국방부 대장 백호 장군이시다.”검객들은 모두 입이 벌어진 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군신의 명성은 당연히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보호하는 영웅이었으니까.“정말 구주왕 휘하의 군신이라니!”“역시 저런 굳센 의지가 그냥 나온 게 아니었어! 수많은 전장을 누빈 명장다운 모습이다!” 서요산 검객들은 백호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현재 백호는 이미 삼백이십 계단을 돌파한 상태였다. 백호가 혼자 주목을 독차지하는 걸 본 청해도 더 이상 가만히 있지 않고 계단에 발을 내디뎠다.처음 백 계단은 청해도 육신의 힘으로 버텼다. 하지만 백 계단을 넘자 육체만으로는 견디기 어려워졌다. 그는 술법으로 대응하려 했지만 평소 쓰던 빙신전의 신술이 계단 위 술법에는 통하지 않았다.“역시 화진의 서요산 검종은 보통이 아니구나. 이 등천로에선 일반 술법이 먹히지 않으니 천지 영기에 대한 깨달음으로 맞설 수밖에 없겠어.” 청해는 몸을 감싸고 있던 현빙을 거두고 오로지 자신의 속성 영기로만 버티며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막상 올라 보니 이 등천로가 얼마나 어려운지 제대로 실감했다. 이백 계단쯤 오르자 벌써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계단마다 한계를 시험하는 느낌이었다. 올려다보니 백호는 여전히 계단 위로 나아가고 있었다. 청해도 질 수 없다는 마음으로 이를 악물고 버텼다.서요산 검객들도 청해의 수준을 알아보고 속삭였다. “저 이역인은 정말 대단한 내력의 소유자다! 기운이 이미 진인 급에 가까워! 극 신급 절정의 수련자임이 분명해!”이에 대해 진인은 신비롭게 꾸미지 않고 솔직히 말했다. “저자는 곤륜 구역 빙신전의 부 전주 청해다. 경지가 매우 높지. 지금 빙신전은 우리 화진에 귀속되었고 청해 역시 구주왕 휘하의 부하가 되었다. 얼마 전 서울 방어전에서 청현과 목숨까지 걸고 사투를 벌인 끝에 죽을 고비를 넘겼으
백호는 아직도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어느덧 이백오십 계단까지 올라왔다. 이 단계부터는 실체화된 술법이 몸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계단 하나를 오를 때마다 바람, 불 번개와 같은 속성의 영기가 점점 강해졌다. 여기서부터는 육신 횡련의 수련자는 강력한 체질로 버티고 술도 재능이 뛰어난 수련자는 천지 영기를 다루는 능력으로 버텨야 했다. 한마디로 각자의 능력에 따라 갈리는 구간이었다. 어느 한 분야라도 특출나지 않으면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백호는 술도에는 재능이 없었기 때문에 오로지 강인한 육체 하나로 견디고 있었다.웅!성수의 피가 진동하며 백호의 몸을 지탱했다. 각종 속성의 영기가 몰아쳤지만 백호는 성수혈의 힘을 빌려 억지로 앞으로 나아갔다.수련자에게 있어서 성수의 혈맥이나 법보 등은 모두 신체 외적인 재능으로 간주하지만 그렇다고 이것들이 꼼수나 편법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천 가지 변화와 만 가지 신통력이 있어도 결국 만법은 한 가지로 귀결된다. 법기든 혈맥이든 이를 감당하는 것은 결국 본인의 몫이다. 천지 영기를 이용한 술법도 결국은 그 힘을 감당할 수 있어야 사용할 수 있는 것이며 감당하지 못하면 반드시 반작용을 맞게 된다. 따라서 수련의 길에는 애초에 편법이란 존재하지 않았다.성수 혈맥 같은 천지의 보물은 보통 사람이 함부로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윤구주의 도움을 받았다 하더라도 결국 이를 감당하는 건 백호 자신이었다. 성수 혈맥의 힘을 온전히 감당하며 백호는 결국 삼백 계단까지 올라섰다.계단의 꼭대기 근처에는 이미 서요산 검종의 검객들이 여럿 서 있었다. 서요산 검종은 근대에 들어 삼백 계단을 넘는 인재가 드물었다. 최근 백 년 동안 삼백 계단을 넘은 사람이 고작 열 명 남짓이었고 그중 대부분이 삼백여 계단에서 멈췄다. 그런데 지금 백호는 삼백이십 계단까지 올라선 것이다. 이 정도면 서요산 검종 전체가 떠들썩해질 만한 성과였다.이런 제자가 나타난다면 종문 전체가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래서 서요산의 진인들까
“한 사람의 품성을 제대로 살피지도 않고 마구잡이로 그렇게 많은 수련자를 키워낸다면 결국 천하의 마인을 직접 만들어 내는 꼴이 아니겠어?”청현이 바로 그 실패한 예다. 서요산 검종 종주가 청현의 천재성을 아까워한 나머지 그의 인성을 무시하고 양성한 끝에 결국 역도를 만들어 낸 것이다.“그럼 저하 서요산에 입문한 무술 무인들은 평균적으로 몇 계단까지 오르는지 아십니까?” 백호가 호기심에 물었다. 윤구주는 잠시 생각한 뒤 입을 열었다.“무술 무인의 정확한 데이터는 모르지만 검종 종주와 잡담할 때 들어보니 검종 제자들의 수준이 갈수록 떨어져서 천 년 전만 해도 평균 삼백 계단 정도였는데 요즘엔 백 계단도 못 오른다고 하더구나. 가끔 삼백 계단을 오르는 자라도 나오면 검종 전체가 몇 년은 떠들썩할 정도라고 했어.”“구백구십구 계단까지 있는 시험인데 천 년 전 전성기에도 겨우 삼백 계단이요?” 백호는 입술을 삐죽이며 서요산 검종의 수준이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때 한 번 도전해 볼 생각이야?” 윤구주는 흥미롭게 백호를 바라보았다. 백호는 당장이라도 도전하고 싶은 마음에 윤구주의 허락을 구한 뒤 바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한 계단 두 계단... 오십 계단까지는 아무 어려움도 없었다. 백호는 오십 계단에 서서 사람들을 향해 서요산 검종이 별것 아니라며 놀려댔다. 하지만 육십 계단쯤 올랐을 때 처음으로 압력을 느꼈다. 마치 몸 위에 작은 차 한 대가 올라탄 듯한 느낌이었다. 물론 백호에게는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 수준이었다. 그는 계속해서 발걸음을 옮겼다. 백 계단에 도달하자 압력이 갑자기 커졌다. 등에 작은 승용차 대신 소형 트럭이 올라탄 듯한 느낌이었지만 아직 백호의 한계에도 가지 못했다.“근래 사람들의 평균이 백 계단도 못 넘는 이유가 이제야 이해가 되네요. 예전의 무인 횡련은 황제도 오를 수 있었지만 요즘 무인 횡련은 죽어라 노력해도 소형 트럭 하나 못 버티는 수준이니 말입니다.”백호는 농담을 던지며 계속해서 계단을 올라
전에 임정설은 구오 지존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지만 나라를 위해 힘쓰며 수모를 견뎌내고 살아남으려 했다.하지만 이제 황제가 된 그는 죽음을 생각하게 되었다.그 탓에 이번 관문 앞에서 그는 망설였다.살아 있는 자만이 통과할 수 있는 관문이었다.죽음을 마음에 품은 자는 절대로 넘어설 수 없는 관문이었다.그 자리에 있던 사람 중 청해만이 그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생각했다.‘황제가 되면 곤륜 구역에서 최고 경지에 도달하는 건데. 기뻐해도 모자랄 판에 왜 죽음을 택하려는 거지?’“저하, 국주는 아직도 풀리지 않은 듯합니다. 저하도 사랑하던 이에게 배신당했어도 결국 극복해 나갔잖습니까.”백호도 이해하지 못했다.그는 여전히 국주보다는 왕이 더 낫다고 여겼다.“네가 뭘 안다고 그런 말을 함부로 내뱉느냐.” 윤구주가 단호하게 말했다.백호는 머리를 긁적이며 답했다. 그는 어리숙하고 말솜씨도 없기에 생각나는 대로 말했을 뿐이다.“내가 문아름에게 배신당한 건 억울한 일이지만 나는 그녀에게 잘못한 게 없다. 오히려 그녀가 날 배신한 거다. 하지만 국주는 그 반대였지. 그가 그녀를 저버린 거야. 정이 깊으면 오래가지 못하고 지혜가 지나치면 오히려 상처를 입는다. 이 세상에서 가장 쓰라린 후회는 가진 뒤 잃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과 생사를 달리하게 되는 것이다.” 윤구주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만약 소채은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자신도 제정신이 아닐 거라고 느꼈다.“그럼 복수하면 되지 않나요?” 백호가 어리둥절하게 물었다.이때 청해가 눈치를 채고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상대가 너무 강해서 못 이기는 거지. 황제에 오르기 전까진 제대로 맞붙을 힘도 안 돼. 오르고 나서도 이길 수 있을지 장담 못 하고.”윤구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딱 그 말이 맞았다.“그럼 우리가 국주님 대신 복수해 드리면 되잖아요? 국주님은 제 왕이기도 하지만 제 윗사람이기도 하잖아요.”백호가 고개를 갸웃했다.“하하! 만약 세상 사람들이 다 너처럼 솔직하다면 이런
인간이 나쁜 짓을 거듭해 양심을 잃으면 부끄러움도 사라진다. 예전 같으면 아무렇지 않았을 테지만, 지금은 윤구주를 따라 명예심이 생기면서 죄책감도 느끼게 된 청해에게 이 원한의 전법은 고통스럽기만 했다. 물론 곤륜역 한 신전의 부전주로서 정신이 붕괴할 정도는 아니었다.네 사람은 이 원한의 전법도 가볍게 넘어섰다.이때 전법에 관심을 가졌던 임정설이 무언가를 눈치챘다.“구주야, 서요산의 전법은 우연히 들어온 자를 쫓아내는 동시에 수련자의 의지를 시험하는 것이었어. 서요산은 의지력이 확고한 자들만 끌어들인다는 것을 미리 들어 알고 있다. 이게 바로 서요산이 제자를 선발하는 방식인가 보구나.”“그렇습니다. 매년 화진 무도계 사람들이 서요산에 찾아오지만 성공한 자는 극히 드뭅니다. 실패자들 중 십중팔구는 산기슭에서 죽음을 맞이하죠. 어떤 문턱은 넘지 않는 것이 복이 될 때가 있습니다. 모르는 것이 약이죠. 현실을 알고도 바꾸지 못하는 것이 가장 괴로운 법이니까요. 이 관문을 넘는다고 해도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면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죽음뿐입니다.”윤구주의 말이 끝나자 세 번째 전법이 나타났다.첫 번째와 두 번째 전법은 이곳에 들어온 이들을 돌려보내려고 만든 것이지만 세 번째 전법은 달랐다. 이 전법은 살기로 가득 찬 죽음의 전법이었다.평범한 사람들은 여기까지 도달하지 못한다. 이곳까지 온 자들도 앞길의 위험을 보고 함부로 들어가려 하지 않을 것이다. 눈 앞에 펼쳐진 죽음의 길을 보고도 들어가는 자는 스스로 죽음을 원하는 자라서 그런 자들에게 죽음을 내리는 것은 오히려 덕을 쌓는 일이었다.하지만 무도로 도를 깨우치려는 수련자라면 이 관문을 넘기 위해 반드시 목숨을 걸어야 한다. 버텨내야만 수도의 길에 들 수 있고 실패하면 그 후과를 받아들여야 한다.전법 안은 살기로 가득했다. 생기와 영기가 세상을 이롭게 하지 못할지라도 살기와 죽음의 기운은 목숨을 앗아갈 것이 분명했다.진법 내부에는 수많은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무도계에 이름을 날렸던 강자들의 유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