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의 로비에는 훨씬 더 냉엄한 기운을 내뿜는 존재들이 서 있었다.그들의 갑옷은 외부 경비병들보다 더 화려했다. 갑옷에는 기괴하게 뒤틀린 문양이 빼곡히 그려져 있었고 열댓 개가 넘는 고대의 장신구들이 달려 있었다.설윤은 수련자들의 경지를 구분하는 방법 같은 건 전혀 알지 못했고 이런 초자연적인 존재들을 직접 마주한 것도 처음이었다. 그저 이들은 신전의 간부들이며, 갑옷 위 장신구는 서양의 훈장 같은 것이라 짐작했을 뿐이었다.넓은 로비 안에 수많은 사람 중에 설윤이 아는 얼굴은 단 하나도 없었다. 다만 구석에서 차를 끓이고 있던 회색 로브를 입은 노인이 어딘가 낯익게 느껴졌다.“구주왕께서 도착하셨다!”현모의 우렁찬 외침이 울려 퍼지자, 서 있던 신령들이 동시에 몸을 떨었다. 대부분 이상한 표정을 지으며 어떤 이는 아예 현모를 향해 대놓고 눈을 흘겼다.그 모습을 본 윤구주는 비꼬듯 말했다.“현모, 저들이 눈이 먼 것도 아닌데 말이야. 내가 온 거야 당연히 알고 있었겠지. 이렇게 오래 기다리게 했으니 슬슬 짜증이 날 만 하겠네.”꿀꺽.모든 신령이 침을 삼켰다.마치 누군가를 당장이라도 죽일 듯한 말이었다.그들이 현무에게는 불만을 드러내고 대거리할 수 있었던 것도 최소한 싸움 한판쯤은 가능하다는 전제가 있었기 때문이다.하지만 윤구주는 달랐다. 그의 앞에서 감히 무례를 범하는 것은 곧 스스로 무덤을 파는 셈이었다.모두가 일제히 무릎을 꿇고 예를 표했다. 바깥의 경비병들과는 달리 이들은 단정한 단일 무릎 꿇기 자세를 취했다. 이것은 그들이 경비병들보다는 지위가 높다는 것을 나타냈다.이는 신령들의 체면을 어느 정도 보장하기 위해서 그들이 화진 대표와 협의하여 결정한 예식이었다.윤구주는 아무 말 없이 설윤을 이끌고 정좌에 앉았다.그는 온몸을 가죽 소파에 널브러뜨리듯 기댄 채 편하게 앉았다. 설윤은 한 귀퉁이에 조심스레 걸터앉았다.“설윤, 오늘의 주인공은 당신이에요. 저 사람들 눈치 볼 필요 없어요.”“앞으로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공주님을 위해
설윤의 반응은 윤구주 예상대로였다. 이것이 바로 그녀가 오는 길 동안 긴장했던 이유였다. “무릎 꿇고 있는 자들은 일어나거라. 아무 자리에나 앉아서 우리 화진의 최고급 차나 마시도록 해. 너는 설윤 공주가 일어나라고 하지 않았으니 계속 무릎 꿇고 있어.” 윤구주의 말이 떨어지자 홀에 있던 모든 신명이 일제히 일어났다. 그들은 자리를 잡고 앉은 뒤 하나같이 비웃는 눈빛으로 그 노인을 쳐다보았다. 타인의 불행을 구경하는 것은 너무 재미있었다. 노인은 공포에 질려 바닥에 머리를 조아렸다. 몇 번 조아리자 이마에 상처가 났고 바닥에는 온통 피였다. “윤구주 씨, 이 사람은...” “알고 있어요. 케일 공작이죠. 헨드리 왕실의 적수로 헨드리 제국 안에 자신의 왕국을 세우려 했으며 헨드리 제국에서는 지금 당신의 삼촌 디크스와 같은 악당이고요.” 윤구주가 설명했다. 설윤은 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케일 공작은 헨드리의 배신자였다. 그는 공개적으로 헨드리 제국 안에 자신의 영지를 만들고 케일 상단으로 제국의 상업을 독점했다. 심지어 그 영지 안에 군대까지 세웠다. 특히 몇 년 전, 케일 공작은 왕실 후계자인 설윤을 암살하려는 계획까지 세웠다. 다행히 왕실 정보부가 미리 알아채어 계획을 저지할 수 있었다. “당신 말이 맞아요. 하지만 왜 이 자가 헨드리 제국에서 그렇게 악행을 저지르면서도 처벌받지 않았는지 알아요?” 윤구주는 웃으며 물었다. “왕실의 뒤에 더 큰 세력이 있다고 했어요. 이제야 알겠어요. 그 뒤에도 신명이 있었네요.” 설윤은 침착하게 대답했다. “맞아요. 그 뒤에는 확실히 신명이 있어요. 좋게 말하면 헨드리에서의 빙신전 이익 대변인이고 나쁘게 말하면 빙신전의 하수인이죠. 헨드리 제국이 어쩔 수 없었던 건 당연해요.” 윤구주가 말했다. 케일 공작은 더욱 공포에 떨었다. 그는 자신의 주인이 이미 구주왕에게 항복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간단히 말해 윤구주는 그의 목숨줄을 쥐고 있었다. 그를 죽이는 건 개미 죽이듯이 쉬운 일이었다. “
“설윤 공주, 당신도 알다시피 대국 간의 전쟁에서는 영원한 친구도, 영원한 적도 없어요. 오직 이익만 있을 뿐이에요. 곤륜 구역과 우리 화진은 적대한 지 천 년이 넘었어요. 하지만 지금의 저도 빙신전과 협력하고 있지 않나요?” 설윤이 마음의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주저하자 윤구주가 말을 건넸다. 이 말을 들은 케일 공작은 즉시 모든 재산, 군대, 영지를 설윤에게 바치겠다고 선언했다. 목숨만은 살려주고 공을 세워 죄를 갚게 해 달라고 빌었다. 설윤은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케일은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충실한 노예로 변신했다. 그는 서둘러 설윤을 상석에 모셔다 앉혔다. “구주왕, 영원한 친구는 없다는 그 말에 또 다른 의미가 있군요.” 바로 그때, 옆방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소리를 들은 빙신전의 신명들은 일제히 일어나 옆방을 향해 무릎을 꿇었다. 사람은 아직 나오지도 않았는데 신명들이 이렇게 복종하는 모습을 보니 설윤도 이 사람이 얼마나 대단한 인물인지 알 수 있었다. 윤구주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고 덤덤하게 차를 마셨다. 현모는 검을 뽑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모든 사람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너무나도 아름다운 한 남자가 화려한 옷을 입고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의 걸음걸이는 마치 천지를 짓밟을 듯했고 차가운 눈빛은 모두를 내려다보며 경멸했다. 그가 서 있는 곳에서부터 끝없는 위압감이 느껴졌다. 왕관을 쓴 그의 위엄 있는 자세와 강렬한 기운은 왕실 출신인 설윤도 깊은 열등감을 느끼게 했다. 윤구주가 없었다면 그녀도 무릎을 꿇었을 것이다. 그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홀을 둘러보았다. 무시무시한 압박감이 모든 사람을 짓눌렀다. 마치 무릎을 꿇지 않으면 신의 위엄을 모독하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윤구주의 휘하 군신인 현모조차 숨이 막힐 정도로 압박을 느꼈다. 불쾌했지만 이 자가 정말 강력하다는 건 인정해야 했다. 그가 천상의 신군처럼 모든 이를 내려다보며 압박감을 주던 그때, 윤구주가 짜증 난 듯 말했다. “적당히 해
“설윤 공주, 이 7일 동안 제가 한 일이 많아요. 케일 영지 내의 아사 신족을 소탕한 건 부수적인 거고 중요한 건 빙신전을 설득했다는 거예요. 이제 그들은 기꺼이 제 밑에서 일할 거예요. 다만 공을 세워 죄를 갚은 뒤 목숨만은 살려달라고 빌더군요.” 윤구주가 설윤에게 말했다. 설윤은 어리둥절했다. 빙신전이 뭔지도 모르는 상태라 그의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뒤에 있던 현모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왕, 정말 말재주가 좋으시네요. 사실은 왕이 곤륜 구역까지 쳐들어가 숨어 있던 빙신전 전주를 잡아서 피떡으로 만들고 항복하는 모습을 비디오로 찍어 부하들에게 보여줬잖아요. 그제야 그들이 현실을 깨닫고 항복한 거라고요!” 현모는 깔깔 웃으며 말했다. 아까는 현모가 참지 못했는데 이제는 빙신전 사람들이 참지 못했다. 이미 충분히 치욕적인데 현모가 또다시 그 치욕을 들춰냈다. “그만! 난 살신 윤구주에게 항복한 거야. 너희들이 무슨 상관이지? 당시 윤구주도 인정했던 일이야!” 그 남자는 분노와 굴욕에 차 말했다.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윤구주도 동의한 사실이다. 빙신전은 오직 윤구주에게만 항복하겠다고 했다. 차라리 그의 개가 되더라도 화진에 항복하지 않겠다고 했다. 화진에 항복하면 적어도 체면은 유지할 수 있지만 그들은 오직 윤구주에게만 굴복하길 원했다. 윤구주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기꺼이 받아들였다. 어찌 됐든 윤구주에게는 별 차이가 없었다. 아무튼 아까 허세를 부리던 자가 바로 빙신전의 전주였다. 경지는 극 신급 절정 후기로 황자에 거의 근접한 수준이었다. 그리고 윤구주에게 항복하는 게 굴욕이라고만 볼 수도 없었다. 사실 빙신전의 최강자는 빙황이었다. 갑자기 등장한 빙황은 빙신전을 거의 장악한 상태였고 빙신전 전주는 원래 빙황을 피해 숨어 있었다. 그런데 강력한 빙황이 윤구주에게 살해당했고 곤륜 구역의 다른 신전들은 기회를 틈타 빙황의 세력을 전멸시켰다. 빙신전까지 밀어붙이려는 순간, 윤구주가 곤륜 구역에 쳐들어와 숨어 있던
가톨릭을 언급하자 설윤은 눈이 번쩍 뜨였다. 설윤이 무슨 질문을 하려는지 알아챈 현모가 미리 답했다. “당신들이 믿는 가톨릭은 몇백 년 전에 이미 다른 신전 세력에게 멸망했습니다. 아직 일부 신들이 남아 있지만 이미 삼류 수준으로 전락했죠.” 설윤의 신앙이 무너졌다. 교회의 교리와는 완전히 반대되는 이야기였다. ‘신도 죽을 수 있다고?’ “현재 곤륜 구역의 주요 세력은 삼도, 육전, 십이각입니다. 삼도는 고신도, 무도, 검도입니다. 육전은 수신전, 빙신전, 희랍 신전, 아사 신전, 화신전, 그리고 극락 신전입니다. 십이각은 자주 바뀌니 설명을 생략하겠습니다. 이것이 신계의 세력 구분입니다. 간단히 말해 그들은 천지의 기운을 흡수하는 수련자들일 뿐 그렇게 신비로운 존재도 아니고 신화적인 색채는 그저 세상을 속이기 위한 장치일 뿐이죠.” 현모가 설명했다. 설윤의 세계관이 무너졌다. 정보가 너무 많아서 당장 소화진기 어려웠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바로 정신이 나갔을 것이다. 설윤도 한참 후에야 겨우 평정심을 되찾았다. “그럼 지금 우리 헨드리를 침략하려는 건 아사 신전이군요!” 설윤은 침착하게 말했다. “네,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현모가 고개를 끄덕였다. 또한 현모는 설윤에게 헨드리에 자리 잡은 신전이 아사 신전만이 아니라 빙신전도 있다고 알려주었다. 다만 지금은 윤구주에게 항복한 상태였다. 설윤은 헨드리의 배후 세력이 이렇게 복잡할 줄 몰랐다. 그래서 제국 안에 이렇게 많은 신교 신앙이 존재했던 거였다. “설윤 공주, 공주님 혼자서는 힘이 부족해요. 헨드리 왕실도 거의 남아 있는 게 없고 의회와 각급 장교들도 대부분 잠식당한 상태예요. 그래서 빙신전의 힘을 빌려야만 반격할 수 있어요.” 윤구주가 말했다. 윤구주가 빙신전 전주를 바라보자 윤구주의 뜻을 알아차린 그는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300석의 의회 의원 중 빙신전이 50석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약 2개 여단이 빙신전의 지휘를 받고 있고 케일 휘하의 병력을 합치면 총 5개
빙신전의 수련자들은 의아해했다. ‘이렇게 간단하다고? 아사 신전과 헨드리에 주둔한 다른 신전들을 상대하라고 할 줄 알았는데.’ 설윤을 보호하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 “왜? 임무가 쉽다고 생각해? 인간 공주의 신분을 과소평가하지 마. 설윤 공주는 왕실의 정통성을 상징해. 왕실이 일찍이 설윤 공주를 후계자로 선전했기 때문에 그 신분은 이미 사람들 마음속에 깊이 박혀 있어. 게다가 아사 신전은 헨드리를 통제하려는 거지 헨드리를 전쟁의 불길 속으로 밀어 넣으려는 게 아냐. 그들은 헨드리의 재정 대권을 장악하려는 거야. 국왕의 자리는 오직 설윤이나 디크스만이 차지할 수 있어. 다른 사람이나 다른 왕실, 심지어 국체를 바꾸는 건 헨드리를 혼란에 빠뜨릴 거야. 그래서 아사 신족은 이번에 직접 나서 설윤을 제거하려 할 거야.” 윤구주가 핵심을 명확하게 말하자 빙신전의 신들도 깨달았다. “살신 전하, 안심하세요! 제가 직접 헨드리의 공주를 보호하겠습니다. 아사 신전의 신왕 오딘이 직접 온다 해도 제가 그와 싸워 결판을 내보겠습니다!” 빙신전 전주가 나서며 말했다. ‘전하'라는 호칭에 윤구주와 설윤 모두 당황했다. 설윤은 신계의 세력들은 잘 모르지만 화진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이전에 화진 국주가 조서를 내려 군사와 정치의 모든 권한을 윤구주에게 넘겼다. 얼마 전 화진에서는 새로운 공고를 내렸는데 구주왕이 새로운 화진의 인황이 된다는 내용이었다. 의심의 여지 없이 윤구주는 화진의 차기 국주가 될 것이며 심지어 황제로 등극할 가능성도 있었다. 윤구주는 이에 대해 별다른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인정하지도, 부정하지도 않았다. 화진의 백 년 부흥 대계가 중대한 국면에 접어든 지금, 인황이 등장해 민심을 모아 국운을 끌어 올려야만 화진을 부흥시킬 수 있었다. “그럼 이렇게 하는 걸로. 의회는 3일 후에 열리니까 3일간 휴식해. 우리의 목표는 헨드리 왕도다!” 모든 인원이 준비하러 떠났다. 설윤은 떨리는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3일 후면 결전
설윤은 자신의 출생을 떠올리며 슬픔에 잠겼다. ‘어울리지 않아...’ 왠지 모르게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정말 마음이 아팠다. 순간 정신을 차려보니 그 슬픔에 잠긴 사람은 사실 윤구주였다. 그의 감정에 자신이 휩쓸린 것이었다. “구주왕, 화진의 인황이자 수호신인 이런 신화 같은 인물도 평범한 사람처럼 풀리지 않는 고민이 있을까?” 설윤은 윤구주가 사해 사건에서 자신을 배신한 애인 때문에 목숨을 잃을 뻔한 일을 떠올렸다. “그 여자의 이름은 문아름이었지. 화진에서 아름은 절세미인을 뜻하는 말이야. 윌리엄이 전에 이야기한 적 있어. 그 여자는 화진의 전설적인 인물로 스스로를 여자 제갈이라 칭했지만 윌리엄은 독한 수단을 쓰는 독사 같은 여자라고 했어...” 갑자기 한 차례 차가운 기운이 밀려오며 살벌한 함성이 들려왔다. 설윤은 깜짝 놀라 넘어졌다. 윤구주는 명상 중에 설윤의 중얼거림을 듣고 특히 ‘문아름'이라는 이름에 마음이 흔들려 살기를 발산한 것이었다. 넘어진 설윤은 두려움에 떨었다. 지금의 윤구주는 너무 무서웠다. 역시 곤륜 구역이 붙인 ‘살신'이라는 별명에 걸맞았다. 이건 어떤 방법으로도 가라앉힐 수 없는 증오의 기운이었다. 세상을 불태워도 그의 분노를 잠재우기 어려울 것 같았다. “흠, 한밤중에 여기서 왜 제 수련하는 모습을 훔쳐보는 거죠? 수행 중인 수련자에게 방해는 금물이에요.” 윤구주는 고개를 저었다. 조금 전만 해도 천지를 불태울 듯한 살기였는데 이제는 완전히 감춰져 고요하기 그지없었다. 그래도 여전히 무서웠다. “휴, 됐어요. 제가 마음이 흔들린 탓이죠. 애초에 지금 이 시간에 수련하는 게 아니었어요.” 윤구주는 직접 설윤을 일으켜 정원의 의자에 앉혔다. 그리고 옆자리에 마주 앉아 차를 끓이기 시작했다. 설윤은 계속 윤구주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냉철한 남자가 정말로 깊은 사랑에 빠질 수 있었다니.’ “구주왕, 우리 동서양의 사고방식은 달라요. 서양인은 간단해요. 사랑하거나 증오하거나. 하지만 당신은 그 여자
“대협이요?” 윤구주는 웃었다. 그렇게 불린 건 처음이었다. “대협은 별로예요. 화진에서 대협은 대부분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던데요. 차라리 곤륜 구역이 지어준 ‘살신'이라는 별명이 더 마음에 들어요.” 윤구주는 농담처럼 말했다. “아, 방금 기사 얘기했죠?” 윤구주는 갑자기 화제를 돌리며 성 밖을 바라보았다. 설윤은 무슨 뜻인지 몰랐지만 윤구주가 장난을 걸자 그녀도 장난스럽게 말했다. “진짜 제가 꿈꾸던 기사가 저를 구하러 올까요?” 설윤의 말이 끝나자마자 먼 곳에서 우렁찬 나팔 소리가 들려왔다. 헨드리 고전풍의 가야금 소리가 흘렀고 수많은 말발굽 소리가 가까워졌다. 완벽하게 무장한 기사들이 성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들은 헨드리의 오래된 군기를 들고 있었다. 설윤은 그 깃발을 알아보았다. “성전 기사단의 깃발이에요! 몰타 기사단과 튜튼 기사단도 있어요!” 이들은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세 기사단이었다. 설윤은 그 외에도 산티아고 기사단 같은 덜 유명한 기사단도 보았다. 기사들은 갑옷을 입고 기사단별로 정연한 대열을 이루어 성안으로 들어왔다. 성안에만 천 명 가까운 기사가 들어왔다. 밖에는 더 많은 기사와 종자들이 모여 있었다. 설윤은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온 건지 알 수 없었다. 맨 앞의 열세 명의 기사가 말에서 내려 윤구주 앞에 무릎을 꿇었다. 성 안팎의 기사들도 모두 말에서 내려 경의를 표했다. 금색 갑옷을 입은 기사는 어눌한 화진어로 윤구주에게 인사를 했다. 그는 윤구주를 ‘존경하는 화진의 왕’이라 부르며 ‘전하’라는 호칭을 썼다. 서양에서 군주는 ‘전하'로 불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윤구주의 ‘구주왕'은 단순한 군주가 아니라 화진의 왕 중에서도 최고의 지위였다. 물론 윤구주는 이런 세세한 것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윤구주에게 인사한 후, 열세 명의 기사는 설윤 앞으로 다가갔다. 신들의 위압감을 이미 경험해 본 설윤은 이 기사들에게서도 동등한 강도의 기세를 느꼈다. 다만 분위기가 달
단 한 걸음,그 한 걸음만 넘기면, 그는 곧 성급 바로 직전 경지에 이른다.그리고 그 마지막 문턱을 박살내는 순간 반쯤 성인이 된 경지, 반성급이다!지금 이 자리, 그 반성급 경지에 선 자는 바로 인마라고 불리는 무명이었다.“과연... 화진의 인황, 구주왕이라 불릴 자격은 있군. 하지만 너도 알겠지. 지금 네 수준으론 몸을 직접 이 판에 던지지 않는 이상 나랑 맞붙을 자격조차 없어. 네가 그 잘난 원신출체를 어떻게 하겠다는지 구경이나 해보자고. ”무명이 입꼬리를 비틀며 코웃음쳤다.팔기귀일에 도달한 윤구주의 전투력은 이미 황의 지경을 뛰어넘었다.하지만 무명과의 경지 차이는 여전히 너무 컸다.실력은 분명 엄청났지만 격이 다르였다.지금 상태로도 보통의 황자의 경지까지 초월한 상태지만 무명을 상대하긴 아직 한참 부족했다.심지어 무명이랑 싸울 실력은커녕 참마검조차 손에 제대로 못 잡는 게 현실이었다.“팔기로 부족하다면... 제구기는 어때? 구기:적선!”부우우우웅!윤구주의 온몸을 하얀 선기가 감싸는 순간 방금 전까지만 해도 비웃고 있던 무명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뭐라고? 이건 네 따위가 쓸 수 있는 기술이 아니잖아! ”그 순간, 무명조차 숨을 삼켰다.이건 상식의 틀을 깨부수는 광경이었다.근대에 들어서면서 도에 대한 수련는 사실상 약해졌다.그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세상에 흐르는 천지영기가 급격히 줄어들었기 때문이다.봉신전쟁 당시, 상상을 초월하는 영기가 소모됐고 그 전쟁이 끝난 후 곤륜구역은 세상의 영기 90%를 신계에 봉인해버렸다.거기서 마음껏 영기를 탕진한 것도 모자라 바깥의 산수들까지 무분별하게 빨아들인 탓에세상의 영기는 걷잡을 수 없이 줄어들고 말았다.결국 세상은 고위 수련자가 태어나기 어려운 구조가 되었다.그래서 화진에선 500년에 한 번 황자가 나올까 말까 할 정도이고 황자의 경지에 도달하는 건 지독하게 어려운 일이었다.임정설이 황자가 될 수 있었던 것도 처음부터 그가 강해서가 아니라 윤구주를 돕기 위해 왕
마기가 검종 제자들의 혼백에 침투하자 그 순간 제자들의 몸에서 시커먼 마기가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이를 목격한 장인 대진인은 망설임 없이 즉시 결단을 내렸다. 오염된 제자들을 그 자리에서 곧바로 정화해 버린 것이다.“모든 제자들아, 입문 첫날 내가 분명히 말했을 것이다. 서요산은 찬란한 성지 화진 정통의 계승지다. 정은 사악함을 절대 용납하지 않는다."”정은 사악함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말은 바로 서요산 제자들이 평생 가슴에 새기며 살아가는 도의였다.입문과 동시에 깨달음을 얻은 그들은 언젠가 반드시 도의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바칠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저 화진 정통의 수호자가 되기 위해서였다.그 순간 진요탑 외곽에서는 7대 진인을 중심으로 전 종문 제자들이 목숨을 걸고 진요탑을 사수하고 있었다.하늘을 뒤덮을 듯한 마기의 기세는 점점 거세져 어느새 검종의 경내 전역을 삼켜버렸다.검종 제자들은 마기를 막아내면서도 동시에 진요탑의 결계를 유지해야 하는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정도를 지키는 일은 그만큼 고통스럽고 힘든 투쟁이었다.산 아래 상황도 마찬가지로 치열했다.온갖 요괴와 귀신들이 들이닥치는 가운데 임정설은 황운을 등에 업고 이씨 가문의 국운을 모두 모아 홀로 수백만 마기를 막아서고 있었다.백호는 마인으로 완전히 변신해 광란의 충격 속으로 몸을 던졌고, 스스로 마를 품은 채 적진을 난도질했다.청해는 천뢰신술을 펼쳐 수만 개의 천뢰를 무기로 변환시켜 온갖 사도와 악귀를 쓸어내기 시작했다.그 무렵 진요탑 내부에서 풍무극의 기세는 이미 한계에 도달해 있었다.“구주야, 내 한계에 도달했다. 이제 내 500년 수련의 혼을 너에게 바치겠다."”풍무극의 준비는 이미 완료되었다.그는 미리 준비해 둔 제천 법기를 꺼냈고 전법이 발동되는 순간 그의 육신은 산산조각 부서졌다.그의 정기와 천지 정기를 모두 품은 찬란한 진신 영혼은 한 자루의 참마검으로 변해 윤구주 앞에 떠올랐다.“풍 종주...” 윤구주는 입술을 깨물었다.슬프고 아쉬
윤구주가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새로운 국운의 기운이 그의 발밑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그가 진요탑의 문에 도달했을 무렵 모든 국운이 윤구주에게 집중되었다.윤구주의 주변으로는 천인신광이 펼쳐져 있었다.이 순간만큼은 그가 천지의 주재자 화진의 영겁을 관통한 유일한 존재였다.윤구주는 홀로 진요탑 안으로 들어섰다.겉보기에 거대한 산 같았던 진요탑의 내부는 참혹한 말세의 풍경이었다. 땅은 끝없이 펼쳐진 용암으로 뒤덮여 있었고 하늘에서는 강줄기가 거꾸로 흘러내리고 있었다.불과 물이 충돌할 때마다 하늘과 땅을 뒤흔드는 격렬한 폭발이 일어났다. 그리고 거꾸로 흐르는 강물 위에 한 노인이 앉아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백발이 성성한 그 인물은 다름 아닌 서요산 검종의 종주였다.밖에서 보이던 강건한 중년의 모습은 단지 화신에 불과했으며, 본체는 수백 년 전부터 이 진요탑에서 마인을 봉인해 왔다.서요산 검종 종주는 극도로 지쳐 있었고 이제는 마지막 호흡으로 버티고 있었다.“드디어 왔구나.” 서요산 검종 종주는 허약한 전음으로 말을 건넸다.“오백 년 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종주님.” 윤구주는 고개를 숙였다.풍무극은 현 서요산의 종주이자 당대 최고의 영웅, 화진 제일 검으로 불리던 남자였다.원래는 풍속을 다루는 수련자로 젊은 시절엔 검 하나로 화진을 호령한 사내로 알려졌다.그의 검은 아무도 궤적을 볼 수 없었다는 전설이 있을 정도였다.하지만 500년 전 마인이 봉인되고 서요산의 조사가 승천한 후, 풍무극은 서요산의 거자로서 종주의 자리를 이어받았다.그날 이후 진요탑에 몸을 묻고 마인과의 싸움을 500년간 지속해 왔다.풍을 다루던 그였지만 지속적인 봉인을 위해 익숙하지 않은 수속까지 수련하며 지금까지 버텨왔다.그가 마도에 빠지지 않은 것만으로도 이미 기적이었다.“그래도 괜찮다. 다행히 이 시대에 또다시 인황이 나왔으니. 화진은 연달아 두 명의 인황을 배출했다. 임정설이 인황에 등극한 지금 쇠락하던 이씨 가문의 국운이 다시 살아났다. 그가 천지의
마인이 출현하면 곤륜 구역조차 큰 혼란에 빠질 것이다.서요산 검종의 진요탑은 이미 오백 년 동안 그 자리를 굳건히 지켜왔다.이는 곧 그 마인이 오백 년 동안 진요탑 안에 봉인되어 있었음을 의미했다.“우리가 가진 유일한 이점은 저 마인이 지난 오백 년간 수련하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그 오백 년 동안 분명 무언가를 '깨달았을' 가능성도 있겠지요. 정도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사도가 존재하는 법입니다. 만약 그가 이곳을 벗어나 다시 한번 돌파에 성공하여 진정한 성인의 경지에 오른다면… 그 누구도 그를 막을 수 없을 것입니다. 예전 우리 종문의 선대 종주께서 이 마인을 직접 봉인하셨습니다. 하지만 선대 종주께서는 진요탑만으로는 그를 완전히 봉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일찍이 아셨지요. 그래서 마침내 구천으로 비상하셔서 바깥 세계에 존재한다는 신기를 찾기 위해 떠나신 것입니다.”장인 대진인이 비밀을 털어놓자 임정설은 왜 그 옛날 서요산 검종을 창립한 선조가 갑자기 사라졌는지 이해했다.“구천을 비상했다고? 전설 속 그 이야기 설마 전부 사실이었단 말인가? 이 세상 위에 더 위대한 세계가 있다는 건가?” 임정설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말을 이었다.“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들은 바로는 성인이란 육지에서 신선이 된 자를 이르는 말이고 준성은 그보다 한 단계 아래 반쯤 신선이 된 존재라 하더군요. 우리보다 더 풍부한 영기의 세계가 과연 존재하는지는 이 몸 역시 감히 짐작할 수 없습니다.” 장인 대진인은 고개를 저었다.그때였다.진요탑이 거칠게 흔들렸고 모든 호법 제자의 얼굴이 딱딱해졌다.수련이 부족한 제자 몇몇은 그 자리에서 마기의 침식으로 피를 토했다.“모든 제자에게 고한다. 나와 함께 현문을 수호하라.” 장인 대진인이 친히 자리에 앉아 온 종문의 기운을 모아 마인을 억제하기 시작했다.마인은 일시적으로 제압되었지만 산 밖의 요괴들과 악귀들은 마기의 부름을 받아 사방팔방에서 서요산으로 몰려들고 있었다.임정설은 이제 자신이 이곳에 온 진짜 이
“저하,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그를 죽여야 합니까? 저자의 기운이 이토록 흉악한데 성수의 혈기로 진압할 순 없습니까?” 백호는 이미 싸우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안 된다. 너희 네 명이 함께라면 잠시나마 억누를 수는 있겠지만, 너희는 그저 성수의 정혈을 가졌을 뿐이니 마인을 완전히 없애려면 성수가 직접 나타나야 한다. 지금 이 세상에 성수가 존재하는지조차 의문스럽다.”윤구주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말을 마친 윤구주는 곧장 진요탑 쪽으로 향했다.백호와 임정설, 청해가 함께 가서 돕고자 했으나 장인 대진인이 그들을 가로막았다.“이 마인은 오직 구주만이 상대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중요한 임무가 있습니다. 국주님, 곧 전투가 시작될 터인데 서요산의 진법을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이 호법의 중임을 몇 분께 맡기겠습니다.”장인 대진인이 임정설에게 경건하게 예를 갖추며 말했다.“좋다. 오늘 이 자리에서 목숨을 바친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저 마인을 죽이고야 말겠다.” 임정설은 단호한 표정을 지으며 황자의 위엄을 한껏 드높였다.화진의 존망이 걸린 일이라면 임정설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하지만 마기가 몰려와 서요산 전체를 뒤덮고 세상이 오직 흑백 두 가지 색깔만으로 변해버리며 그 끔찍한 살기가 강림했을 때 임정설마저 온몸에 소름이 돋으며 떨렸다.“이 마인의 기운이 이렇게까지 무서울 줄이야.” 임정설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은 마기로 가득 찼고 윤구주마저 그 기세에 눌리고 있었다.진요탑에서 흘러나온 마기는 실체가 되어 넘쳐흘렀다. 마기가 나타나자 서요산을 지키는 모든 검종 제자의 얼굴이 어두워졌고 어떤 제자는 순간적으로 십여 년을 늙어버렸다.수련이 부족하면 수명으로라도 채워야 하는 참혹한 상황이었다.웅웅.하늘에는 먹구름이 밀집했고 그 안에서 요괴의 번개가 끊임없이 터졌다.“이젠 영기조차 요기로 변하고 있다. 풍수 비술로 보건대 머지않아 이곳에서 요마가 출현하겠구나.” 임정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서요산 외부에서 짙은 요기
도가는 인연이라는 두 글자를 대단히 중히 여긴다.그의 한 번의 인연, 한 번의 생각은 곧 만백성의 생사를 좌우할 만큼 중요하다.윤구주가 정상에 오르자 앞서 온 다른 이들과는 달리 서요산 검종의 모든 이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여 깊은 존경을 표했다. 그들이 경배한 대상은 단순한 한 인간이 아니라 구주의 저하, 화진의 인황, 오방 천지의 주재자였다.“모두 일어나십시오. 제가 오늘 서요산에 온 이유는 오직 진요탑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입니다. 진요탑 안의 마인을 제거하지 않는 한 문 씨 세가의 역심은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오직 마인을 죽여야만 문 씨 세가의 야심도 함께 근절할 수 있습니다.”윤구주는 서요산 검종의 모든 제자를 향해 엄숙하게 말했다.이번 서요산 행차의 목적은 바로 문 씨 세가의 역심을 뿌리째 뽑는 것이었다.검종 제자들이 앞장서 일행을 이끌었고 모두가 금정을 지나 뒷산으로 향했다.뒷산에 막 들어서자마자 음산한 기운이 얼굴을 스쳤다.후산 중앙에는 높이 오백 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산이 서 있었는데 그 산은 무려 구백구십구 개의 쇠사슬로 단단히 봉인되어 있었다.이 쇠사슬은 그저 평범한 사슬이 아니었다. 절반은 땅속의 지맥과 연결되어 있었고 나머지 절반은 하늘 높이 떠올라 천지의 영기를 끌어모으고 있었다.이런 수준의 봉인이라면 설령 윤구주 자신이 여기에 갇혀 있다고 해도 빠져나가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이처럼 견고한 고진마저 지금은 마인의 사기로 조금씩 부식되어 가고 있었다. 본래는 영기가 흘러넘치는 명산이었으나 지금은 온 서요산이 마인의 기운에 물들어 음침하고 괴이한 분위기를 자아냈다.이 강렬한 악기운을 바라보며 서요산 검종의 제자들은 모두 얼굴을 찌푸렸다.솟구치는 사기를 바라보며 서요산 검종의 검객들은 하나같이 얼굴을 찌푸렸다.최근 몇 대에 걸쳐 입종한 서요산의 제자들은 이런 마인의 사기와 요마의 위협 속에서 수련해야 했다.천지의 영기조차 마인의 기운에 오염되어 수련에 큰 지장을 주었지만 그럼에도 끝까지 남은 현
이 말을 듣자 모든 이들은 천 년 전 마지막으로 나타난 그 성인이 바로 서요산 검종에서 나왔음을 깨달았다.“짐은 서요산 검종의 선대 종주께서 우화등선하셨다고만 들었는데 그저 떠도는 신화 속 이야기인 줄로만 알았더니 은 성인의 경지에 이르신 것이었군.” 임정설이 깊은 감탄과 함께 말했다.구백 계단 윤구주는 이미 전설을 써 내려가고 있었다.하지만 그 전설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구백삼십 계단 사십 계단을 오르면서 윤구주의 발걸음은 오히려 더욱 가벼워졌고 그가 세우는 기록은 사람들의 상식을 계속해서 뒤흔들었다.구백팔십 계단을 지나 정상까지 겨우 십여 계단만 남은 그 순간 윤구주의 발걸음이 점점 느려지기 시작했다.구백구십구 계단에 이르러 결국 완전히 멈추었다.드디어 한계에 도달한 것인가?모두가 숨을 죽이고 윤구주를 지켜봤다. 이 마지막 한 걸음은 분명 지금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힘든 시험일 터였다.윤구주는 미간을 찌푸린 채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십여 분을 견뎌냈다. 사람들은 그가 언제 다시 계단을 오를지 초조하게 기다렸다.마침내 윤구주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됐습니다. 이 마지막 한 걸음은 넘지 않겠습니다. 여기서 시험을 포기하지요.”말을 마치고 계단에서 내려서는 순간 청석 계단 아래에서 강력한 영기가 하늘을 찌를 듯 솟구쳤고 곧바로 서요산을 감싸던 어둠의 기운을 깨끗이 몰아냈다.오랫동안 음울했던 서요산 상공은 순식간에 환해졌고 수백 킬로미터에 걸쳐 맑은 하늘이 펼쳐졌다.서요산의 모든 이들은 충격에 빠져 넋을 잃었다.그제야 그들은 윤구주가 왜 그토록 여유롭게 올라올 수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그는 처음부터 서요산의 청석 계단이 가진 진법의 힘을 계속해서 억누르고 있었다.“참으로 대단하신 신위군요! 우리 서요산의 청석 진법마저 제압하셨다니! 마지막 한 걸음을 분명 넘으실 수 있었을 텐데 혹시 강제로 넘었다가 진법이 견디지 못해 영기가 새 나가고 진법이 무너져 진요탑까지 영향을 미칠지 걱정하신 건 아닌가요?” 장인 대진인이
도법의 깊이는 워낙 심오해서 임정설조차 제대로 가늠할 수 없었다.“쉽게 말씀드리자면 구주는 천지의 운기를 완전히 장악한 데다가 하늘이 직접 영광을 내리신 거죠.” 장인 대진인이 말했다.임정설은 이 말을 듣고 비로소 이해한 듯 말했다.“대진인의 말은 윤구주가 바로 하늘이 점지한 사람이라는 뜻인가?”“맞습니다. 우리 화진 사람들은 운명의 갈림길에 서면 본심에 따라 도법을 선택하고 나머지는 하늘에 맡깁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사는 다하고 하늘의 뜻을 따르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윤구주는 분명 큰 복을 타고났지만 그 엄청난 복을 감당할 힘도 필요합니다.”대진인이 설명했다.말이 끝날 무렵 윤구주는 이미 육백삼십 계단을 거뜬히 올라와 있었다.한 걸음도 멈추지 않고 더욱 확고한 걸음으로 계속 전진했다.그의 발걸음마다 천지의 기운이 응축되었다.어느 순간 서요산의 계단조차 윤구주의 기세를 가두지 못했다. 그는 마치 천지를 밟으며 오르는 듯했다.곧이어 그는 칠백 계단마저 돌파했다.칠백 계단이란 천 년 전 서요산의 전성기에도 극소수만이 도달할 수 있었던 경지였다. 지금 만약 윤구주가 구주왕이 아니라 일반 수련자였다면 이 기록만으로 서요산 전체가 들썩였을 것이다. 만일 윤구주가 서요산에 입문을 원했다면 서요산은 모든 자원을 쏟아부어 그를 키웠을 것이며 서요산 검종의 다음 종주 자리는 당연히 그에게 돌아갔을 것이다.그러나 이미 칠백 계단에 이르렀음에도 윤구주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칠백오십 계단 팔백 계단 팔백오십 계단!그는 끊임없이 정상의 기록을 깨며 전설을 써 내려갔다.서요산 검종의 제자들은 윤구주 앞에 당장이라도 무릎을 꿇을 것 같았다. 이쯤 되자 장인 대진인조차 감히 그를 함부로 평가할 수 없었다.왜냐하면 자신도 과거에 겨우 칠백 계단에 그쳤으니 팔백 계단을 오른 사람을 감히 평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윤구주는 멈추지 않고 계속 올라갔다. 마치 천지를 흔들어 이 강산을 뒤엎어버리겠다는 기세였다.그리고 마침내 구백 계단에 이르렀다.“구백
하지만 한 계단씩 갈수록 더욱 어려워지는 난관들도 이 평범한 사람에게는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다.만약 윤구주와 맞서야 하는 적의 입장이었다면 지금 이렇게 차분히 계단을 오르는 윤구주는 마치 깊은 심연 그 자체였을 것이다.그의 강력함은 도무지 가늠할 수 없었고 오히려 그가 올라올수록 위에 있는 사람들은 엄청난 압박감에 휩싸였다.검종의 검객들이 잠시 정신을 놓은 사이 윤구주는 이미 사백 계단까지 올라와 있었다.하지만 사백 계단쯤으로는 아무도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화진의 또 다른 황자 구주왕의 후계자였으니까.윤구주가 오백 계단을 밟는 순간 모든 이들은 숨을 죽이고 그를 응시했다.눈길을 떼지 못한 채 그의 오름을 지켜보았다.오백일…… 오백이십! 오백오십! 오백구십구!“마침내 구구관에 도달했다.”“칠구는 수겁이요 구구는 극히 넘기기 어려운데.”진정한 고수들은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과연 윤구주가 이 한 걸음을 쉽게 넘을 수 있을지 모두가 궁금해했다.윤구주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산 아래를 바라보았다.그가 본 것은 단순한 산이 아니라 마치 화진의 온 세상 같았다.한눈에 화진의 대지와 산천이 모두 담겼다.눈앞에 펼쳐진 화진의 아름다운 대지는 숨 막히는 광경이었다.하지만 동시에 이 끝없는 강산 곳곳에 묻혀 있는 수많은 해골도 함께 보였고 그의 마음은 순식간에 비장함과 슬픔으로 가득 찼다.윤구주의 내면을 감지한 서요산 검종 종주의 법신이 곧바로 그의 곁에 나타났다.“구주야 화진의 산천을 잘 살펴봐! 천하의 용맥은 모두 화진에서 비롯되었고 이 한 획 한 획은 백성의 척추와 같다! 눈에 비치는 물의 맑고 흐림은 중요하지 않아. 지나치게 눈 부신 빛은 우리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고 너무 어두운 밤은 희망을 앗아가기 마련이지. 하지만 어떤 변화가 있더라도 화진의 이 산천은 영원히 굳건히 서 있을 거야. 왜냐하면 푸른 산마다 묻혀 있는 충신의 뼈와 넋들이 이 나라를 지켜주고 있으니까.”서요산 검종 종주는 윤구주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그 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