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에서 지켜보던 김도현은 어이없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참나, 이 노인네는 목숨을 구해줬더니, 고맙단 말 한 마디 없이 잔소리만 늘어놓고 있네.”“흥, 이제 와서 손자 교육은 잘도 하시네. 손자가 예전에 곤륜역에서 치이고 짓밟힐 때는 어디서 뭐 하고 계셨지?”김도현이 입꼬리를 비틀며 비꼬듯 말했지만 윤상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나라나 가문, 그 모든 걸 떠나 그는 할아버지로서 손자에게 제대로 해준 게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구주야, 나 때문에 고생 많았다. 다 할아버지 잘못이다. 아까 그 말도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윤상현은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다. 어떤 할아버지가 자기 손자가 이렇게까지 다친 걸 보고 마음 아프지 않겠는가.윤구주는 코끝이 찡해졌지만 일부러 웃으며 넘겼다.“할아버지, 무슨 말씀이세요. 그때 서울에서, 제 목숨은 할아버지랑 노조님이 함께 살려주신 거잖아요. 화진 국주님도, 윤씨 가문의 수많은 분들도 그리고 아름이도요.”문아름.그 이름을 꺼내자 윤구주는 잠시 멈칫했고 윤상현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눈빛으로 물었다.윤상현 역시 그 뜻을 바로 알아챘다.“나라 입장에서 보자면 문아름은 화진을 위해 많은 일을 했지. 혼란 속에서도 통합을 유지했으니 그 공을 무시할 순 없을 거다.”“그리고 사사로운 입장에서 보더라도 그토록 널 잘 아는 여자를 정말 죽게 내버려둘 수 있겠냐?”“연인이 아니더라도 친구잖니. 살면서 그런 사람 하나 만나기도 어려운 거란다.”“네, 알아요.”윤구주는 잠시 고개를 끄덕이고 결의에 찬 눈으로 말을 이었다.“할아버지, 자세한 얘긴 이따 다시 드릴게요. 지금은 먼저 사람부터 구해야 하니까요.”할아버지를 구하고 나니 이제 남은 건 기린수와 문아름 둘뿐이었다.기린수 쪽은 상황이 나쁘지 않았다. 삼안 여황제의 진법에 휘말리긴 했지만 무엇보다 그는 기린수였다.윤구주가 손만 좀 보태주면 금세 살아날 수 있었는데 기린수의 타고난 명운은 그만큼 질겼다.윤구주는 구주정의 힘을 발동해 천상 구역과 기
임홍연은 윤구주의 재촉에 마지못해 내려왔다. 얼마나 그를 깨물고 있었는지 입 주변은 번들번들했다.염황과 삼안 여황제는 제거됐지만 아직 구하지 못한 이들이 있었다.“다시 한 번 구주정을 써서 천상 구역으로 돌아가야겠어.”윤구주는 다시 구주정의 힘을 끌어냈고 금빛 불꽃이 환영진을 산산이 부쉈다.요괴산과 천상 구역의 연결 구조를 파악한 그는 곧바로 요괴산의 전송진을 작동시켰고 눈 깜짝할 사이에 셋은 다시 천상 구역으로 전송되었다.그 순간, 천상 구역의 기린수는 이미 한계에 다다른 상태였다. 윤구주가 몇 초만 더 늦었더라면 수많은 원혼과 창귀에게 삼켜졌을 것이다.윤구주가 도착하자마자 기린수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엉엉 울기 시작했다.“고생 많았다. 이번엔 네 공이 커.”윤구주는 다정하게 등을 두드려줬다.“공은 무슨, 나는 그냥 왕이 무사하기만 바랐어. 왕이 무사하면 내가 죽는 건 아무래도 좋아... 흐윽...”기린수는 훌쩍이며 울먹였다.“그래? 그럼 소원대로 해줄까? 너 하나 살리는 게 너무 힘들어서 말이지.”윤구주는 장난스레 입을 쩝쩝 다셨다.“어?”“야! 구주왕! 그건 그냥 한 말이지, 진짜 그럴 줄은 몰랐잖아! 살려줘, 빨리 나 좀 살려줘!”말과 마음이 다른 기린수에 윤구주는 웃음을 터뜨렸다.“입만 살았지.”윤구주는 구주정으로 원혼들을 눌러 제압하고 무너져가던 천상 구역을 억지로 지탱했다.“천통법안, 열어라!”그는 성술의 눈을 펼쳐 이화금안으로 천상 구역 전역을 훑었다. 이젠 이 땅 위의 그 어떤 미세한 기운도 그의 눈을 피해갈 수 없었다.그리고 마침내 윤구주는 어둠 속에 봉인된 공간 하나를 발견했다. 그 안에 갇혀 있던 이는 바로 윤상현이었다.“할아버지!”윤구주의 목소리가 그 공간 안으로 전달됐다.“응? 구주야? 안 돼! 오지 마라, 이건 함정이다!”윤상현은 다급히 외쳤다.“할아버진 이미 삼안 여황제의 술수에 걸렸다! 녀석의 목적은 너다! 빨리 이곳을 벗어나!”그러나 윤구주는 말을 듣지 않았다. 그는 손을 들어
검이 포효하며 성검의 검혼이 삼안 여황제의 혼체를 단숨에 꿰뚫었다. 그리고 곧이어 김도현의 원신이 그녀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너... 너 지금 뭐 하는 거야?”“윤구주는 날 살려뒀어!”삼안 여황제는 눈을 부릅뜨며 믿기지 않는다는 듯 소리쳤다.“흥! 그건 손을 더럽히기 싫었기 때문이지.”“그렇다면 내가 죽여주지!”김도현은 껄껄 웃으며 검을 다시 치켜들었다.그는 윤구주의 속내를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윤구주는 이 여자를 그냥 두지 않을 것이다. 손에 피 묻히기 싫은 거라면 그가 대신 하면 그만이다. 어차피 한 방이면 끝나는 일이라 힘들 것도 없었다.삼안 여황제는 여전히 믿지 못하겠다는 듯 부르르 떨었다.‘검도 도주’가 이토록 비열하게 행동하다니!“죽어라!”김도현의 검이 그녀의 혼을 산산이 부숴버렸고 삼안 여황제는 곧 사망했다. 이로써 천상 구역을 어지럽혔던 두 악재가 모두 제거됐다.그 시각 윤구주는 이미 소채은 곁에 도착해 있었다.어화에 몸이 타들어가는 고통 속에서도 소채은은 이를 악물고 억지 미소를 지었다.“미니 구주, 난 너라면 꼭 이길 거라고 믿었어.”윤구주는 말없이 신념을 뻗어 그녀의 몸속에서 타오르는 어화를 살폈다. 그리고 이내 얼굴에 그늘이 졌다.소채은은 더 버티기 어려웠다.지금은 말세의 시대였다. 세상에 영기가 부족해 그녀가 이 어화를 이겨낼 수 있을지조차 장담할 수 없었다.그런 그의 마음을 알아챘는지 소채은은 담담히 웃으며 말했다.“너만 무사하면 돼. 우리 나라만 잘 지켜줘. 그렇다면 나는 죽어도 후회 없어.”“닥쳐. 그런 말 두 번 다시 입에 올리지 마.”“도력을 쌓는 데는 시기가 모두 맞아야 해. 지금은 아니야. 억지로 넘기다간 되레 탈이 나.”윤구주는 짧은 고민 끝에 소채은의 도화를 뒤로 미루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봉황의 도화를 미루는 일은 그 혼자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그가 죽도록 힘을 쏟는다 한들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구주정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었다.그의 의지가 미치자마자 윤
왕관을 쓰고자 한다면 그 무게를 견뎌야 한다. 염황은 덕이 부족하니 천벌을 피하지 못한다.“네놈이 날 심판할 자격은 없어!”“윤구주, 죽어라!”그 순간, 염황은 이미 사람이 아니었다. 분노와 악념으로 뒤덮인 망령, 그야말로 한 마리 복수귀였다.“너의 죄는 오직 죽음으로만 씻을 수 있다.”“염황, 죽어야 할 자는 바로 너다!”쾅!윤구주의 한 손이 떨어지는 순간, 염황의 마지막 남은 의지마저 부서졌다. 혼도, 몸도, 뜻도 모두가 산산조각났다.고화진의 옛 인황이자 염황인 그가 마침내 몰락했다.그 순간 삼안 여황제의 눈빛에서도 생기가 사라졌다.윤구주는 단순히 강한 게 아니라 그의 손엔 전설 속의 ‘구주정’이 있었다.“그걸 가질 수만 있다면 나도 살 수 있어!”삼안 여황제는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번개처럼 날아들어 윤구주 앞에 선 그녀는 악귀 같은 형상을 벗고 다시 절세미녀의 얼굴로 돌아왔는데 그 눈빛에는 온갖 유혹이 서려 있었다.“윤구주, 내가 널 화진 최강의 인황으로 인정할게. 내가 너의 가장 충직한 노비가 되어줄게. 네가 날 어떻게 다뤄도 난 원망하지 않겠어. 그러니 날 받아줘.”그녀는 무릎을 꿇었는데 그 아름다운 얼굴 아래 탐욕이 꿈틀거리고 있었다.그녀는 알고 있었다. 윤구주의 힘을 등에 업기만 한다면 쉽게 대성경에 오를 수 있다는 걸.무자비하고 독선적인 염황보다는 윤구주 같은 정의롭고 단순한 사내가 훨씬 다루기 쉬울 터였다.하지만 윤구주의 눈빛은 그녀의 모든 기대를 무너뜨렸다. 차갑고 냉정한 시선엔 그 어떤 연민도 없었다.‘말도 안 돼... 이럴 수가.’그녀는 믿을 수 없었다. 그토록 매혹적인 자신을 어찌 이토록 담담하게 뿌리칠 수 있다는 말인가?그녀는 미모와 지혜, 수련까지 겸비한 완전체였고 그 어떤 연인보다 뛰어난 여황제 아닌가! 세상 어떤 사내가 이런 기회를 거부하겠는가?“윤구주, 넌 대체 뭘 바라는 거지? 인간은 이익을 위해서 살지. 설마 넌 진심으로 나라를 위해 산다는 말이냐?”윤구주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 눈빛
이 말인즉 염황의 기운이 산산이 흩어졌다는 뜻이었다. 수련자에게 있어 곧 수명의 끝을 의미한다!염황은 망연자실했다.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한 채, 평생 갈고닦은 수련이 한순간에 무너져내렸다.“십 수만 년을 쌓아올린 도력이 겨우 금정 하나에 무너지다니.”“저 물건, 도대체 무엇이냐?”염황은 넋이 나간 듯 중얼거렸다.윤구주는 허공에서 세 걸음 앞으로 다가섰고 그 머리 위엔 여전히 금정의 불꽃과 신기가 감돌고 있었다.“화진국의 국보, 들어본 적 있나?”염황의 눈이 번쩍 커졌다. 무언가 떠오른 듯했지만 쉽사리 믿기지 않았다.‘설마 저자가 그 전설 속의 물건을 손에 넣었단 말인가?’“그럴 리 없다! 그건 어디까지나 전설일 뿐, 지금껏 누구도 실물을 본 적이 없었다!”“설사 그것이 존재한다 한들 그건 인간 세상에 속한 물건이 아니야! 윤구주, 네놈 지금 나를 속이려는 것이냐?”염황은 눈을 부릅뜨며 윤구주를 노려보았다. 당장이라도 그를 갈가리 찢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흥, 네 눈에 보이지 않았을 뿐이지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야.”“의심할 필요 없다. 이것이 바로 전설 속 구주정이야.”윤구주의 말이 끝나자 염황은 미칠 듯한 분노로 고개를 흔들었다.현실을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것이 구주정일 리 없었다. 아니, 그래서는 안 됐다!“현실을 받아들여라.”“아까 네 입으로 한 말 아니던가? 죽기 직전까지도 현실을 부정해야겠나?”“널 죽이는 자가 누구인지, 너와 나 사이의 격차가 얼마나 큰지 이제는 인정할 때도 됐어.”윤구주의 차가운 웃음은 운명의 냉혹함을 대변하는 듯했다.운명을 감당하지 못하면 그 대가는 반드시 찾아오는 법이다. 그것도 이토록 빠르게.염황의 눈엔 끝내 분노와 원한이 가득했다. 그는 차라리 죽음을 택할지언정, 이 결과를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윤구주! 왜 하필 너냐! 하늘이시여! 어찌 이리도 불공하단 말입니까!”“구주정 같은 물건이 네놈의 손에 들어가다니. 하늘이시여! 정녕 눈이 멀었단 말입니까!”염황은 날뛰듯 포
염황은 윤구주에게 더는 기회를 주지 않았다.그에게 지금 바로 윤구주를 잡아 신나게 짓밟는 게 가장 급한 일이었다.마기가 세차게 밀려오며 온 세계가 윤구주를 짓누르는 듯했다.염황은 거대한 마신으로 변신해 끝없는 광풍을 일으켰다. 온 요괴산이 미친 듯이 흔들렸다. 멀리 떨어져 있던 김도현 일행조차 이 망망한 마기에 눌려 숨이 턱턱 막혔다.염황의 소름돋는 마영이 김도현 일행의 뇌리에 비쳤다. 그의 무시무시한 위압에 세 사람은 꼼짝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얼어붙었다.저항은커녕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구주, 반드시 저놈을 죽여야 해. 저놈이 나오면 화진에 큰 재앙이 닥칠 거야.” 김도현이 목이 터지라 외쳤다. 한마디만 웨쳤는데도 온몸의 힘이 다 빠져 기절하기 직전이었다.소채은은 여전히 윤구주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는 젖먹던 힘까지 짜내서 어화의 침입을 막고 있었다.만에 하나 윤구주가 염황을 이기지 못하거나 그의 손에 목숨을 잃는다면 그녀도 혼자 살아있지는 않을 것이다. 무슨 짓을 하더라도 염황과 함께 지옥으로 갈 것이다.“윤구주, 그만 항복하지?”마음이 진동하며 마기가 수직으로 내리꽂혔다. 산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며 대지에 커다란 틈이 생겨났다.지금의 염황은 삼안 여황제까지 절망하게 할 정도로 강했다.극치에 다다른 힘은 절망을 불러왔다. 마치 세상의 종말처럼 희망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쿠우웅!마기가 윤구주에게 집중되었다.거대한 염황과 비교하면 새로운 인황인 윤구주는 개미만 해 보였다.승부는 이미 결정된 것 같았다.이 순간, 하늘에 모인 화진 국운이 우렁찬 굉음을 냈다. 국운 속 수많은 화진 선배님들의 염력이 윤구주를 걱정하고 있었다.염황을 막지 못하면 화진은 정말 끝장이다.우웅!그 순간 금화성기가 실체화되었다. 수많은 고대 부문이 질서 정연하게 배열되어 금빛 구정 하나를 형성했다.이 금빛 구정이 완성되는 순간 막강한 힘이 사방팔방으로 퍼져나갔다.순식간에 무궁무진했던 마기가 모두 정화되었고 요괴산의 요기도 눈 깜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