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이렇게 많은 함선을 여기에 정박시켜 놓은 거지? 조금 전까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나타나다니.”“이런 빌어먹을! 이 해역에 들어온 이후로 레이더가 아예 작동을 하지 않는단 말이야.”함장이 욕설을 내뱉었다.그들은 이곳에 이렇게 많은 함선이 정박해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상대는 이미 그들을 발견한 지 오래됐고 십여 척의 전함들은 그들을 향해 포화를 조준해놓은 상태였다.곧 무선 통신기 안에서 상대 함대 함장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즉시 항복하라. 그렇지 않으면 공격할 것이다.”항복하라고?화진 남해 함선에 항복이란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이때 윤구주가 입을 열었다.“상대의 수는 우리보다 훨씬 많아. 함선의 크기와 수량도 우리보다 훨씬 많다. 어떻게 할 작정이냐? 정말 항복할 건가?”이 말을 들은 화진 함장은 바로 화를 냈다.“저하,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 화진에는 전사한 병사는 있어도 항복한 병사는 없습니다. 전 화진에 먹칠하는 짓을 할수 없습니다.”“네가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신경 쓰지 마. 이제부터는 내가 처리하겠네.”윤구주가 웃으며 대답했다. 그는 일부러 그런 말로 장난을 쳤다.상대 함대의 수가 엄청나게 많다 해도 윤구주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였다. 윤구주가 공격하려 할 때 구축함 함장이 직접 갑판으로 뛰쳐나왔다.“저하, 지금이 무슨 시대인데 수량과 크기를 비교합니까? 지금은 과학기술의 시대입니다. 저놈들은 수가 많고 전함도 몇 척 있지만 그건 모두 낡아빠진 고물들입니다.”함장이 윤구주에게 설명했다.“오? 반격할 작정이냐? 정말 이길 자신 있나?”윤구주가 팔짱을 끼고 물었다.설령 옛날의 낡은 함대라 해도 엄청난 규모로 그들을 압박한다면 그들에게 승산이 별로 없어 보였다.“오빠, 함장님이 허세 부리는 게 아니야.”이때 문아름이 걸어오더니 그들이 탄 구축함을 가리키며 말했다.“지금 우리가 타고 있는 이 구축함은 우리 화진 해군이 최근 취역시킨 최신형 구축함이야. 전 세계적으로도
구축함이 항로를 바꾸는 순간 서해 검성이 그 변화를 눈치챘다.“오? 항로를 바꿨군!”“이 영감이 눈치가 빠르구만. 전에 우리가 삼안 잔당이 근처에 숨어 있을까 봐 걱정하고 있을 때 영감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었지. 처음부터 윤구주가 영감을 찾아올 거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랬구만.”사자황은 그제야 깨달았다.“그야 당연하지. 나는 윤구주가 반드시 나를 찾아올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어. 내가 윤구주를 도와주게 설득하는 건 가능하지만 날 그 사람의 부하로 만들기는 그리 쉽지 않을 거야.”서해 검성이 차가운 목소리로 오만하게 말했다.검성의 위엄이 남아있는 한 제아무리 구주왕이라 해도 검성을 부하로 둘 자격이 없었다. 단 윤구주가 마음에 들어서 검성이 스스로 그의 부하가 되려 한다면 예외라 볼 수 있었다.“하지만 영감은 이걸로 뭘 시험해 보겠다는 거지? 그들이 삼안의 잔당이 아니라 해도 윤구주는 그곳으로 갈 텐데.”사자황은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흥, 그쪽이 뭘 안다고? 그냥 조용히 지켜보기나 하지.”서문무해가 입술을 삐죽거리며 말했다.한편, 구축함은 목표를 향해 계속 항해하여 얼마 되지 않아 윤구주가 알려준 위치에 도착했다.하지만 그곳에 도착했을 때, 파도 없이 잔잔한 해면 위에는 이상한 점이 없었다.“저하, 초랑도는 여기서 한참 떨어져 있습니다. 도대체 뭘 기다리는 겁니까?”함장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서두르지 마. 내 명령을 따라 계속 항해해.”윤구주가 명령했다.구축함이 다시 항해하던 중 갑자기 무언가에 부딪혔지만 정확히 무언가에 부딪혔는지는 누구도 알아볼 수 없었다. 구축함은 마치 투명한 벽에 부딪힌 것 같았고 부딪힌 부분이 움푹 들어갈 정도였다.“저하, 이상합니다. 뭔가 수상해요. 저번 천상 구역에 갇혔을 때와 같은 느낌이 드는데요?”기린수가 눈가를 찡그리며 말했다.설마 삼안 여황제가 아직 살아있는 건가?“준비해둬. 이건 환각의 전법이야.”윤구주는 말을 마치자마자 금안을 사용했고 동력으로 그 투명한 벽을 부
기린수는 말은 알아들었지만 여전히 불만 가득한 얼굴이었다.“그런 복잡한 건 생각하지 마. 넌 본래부터 그들과 결이 달라. 너처럼 기세로 밀어붙이는 스타일은 옛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긴 어렵지.”윤구주가 담담히 말했다.이번 행차의 목적은 바로 서해 검성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함이었다.지금은 화진이 부흥의 갈림길에 선 중대한 시기였고 그 모든 걸 혼자 감당할 순 없었다.할아버지가 말했듯, 부흥을 이루려면 함께할 수 있는 모든 세력을 하나로 묶어야 했다.화진 내부에서라면 김도현보다도 서해 검성의 명망이 훨씬 높았다.게다가 김도현은 본래 곤륜 영역 출신이라 화진 내에서는 종종 곱지 않은 시선을 받곤 했다.반면 서해 검성은 그런 복잡한 배경이 전혀 없었다. 만약 그를 손에 넣을 수 있다면 적어도 화진의 무도 세계는 하나로 묶어낼 수 있을 것이다.그 힘은 고스란히 윤구주 자신에게 귀속될 테니 말이다.구축함은 목적지를 향해 나아갔고 윤구주의 지시에 따라 해적들이 점거하고 있는 초랑도는 슬쩍 피해 지나갔다.그는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서해 검성을 어떻게 설득하지.’그러나 그 순간, 멀리서 갑작스럽게 엄청난 살기가 터져 나왔고 윤구주의 표정이 확 굳어졌다.윤상현과 기린수도 그 살기에 동시에 몸을 떨었다.“뭐야 이건! 살기 엄청난데? 대체 어디서 나타난 놈이야? 방금까진 기척조차 없었잖아?”기린수가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기척이 없었던 건 당연하지. 저건 고수 중의 고수야. 숨기를 위한 보물이나 진법을 쓴 게 틀림없어. 이 바다에 이런 괴물이 숨어 있을 줄이야...”윤상현은 낯빛을 굳힌 채 말했다.“할아버지, 수련을 하는 이가 모두 선하지는 않죠. 세상이란 본래 선과 악이 뒤엉켜 있으니 기운만으론 판단 못합니다. 하지만 전 그런 거 안 믿어요. 선은 선이고 악은 악입니다. 제 직감이 말해요. 저 자, 분명히 악인입니다.”윤구주의 눈빛엔 이미 살기가 서려 있었다.“그래,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내가 잠시 그쪽으로 숨어 가보마.”일행은 먼
“이봐, 윤구주가 몇 번이나 신념을 보내왔잖아. 뭔가 상의할 일이 있는 것 같은데, 왜 갑자기 모른 척이야?”사자황이 의아해하며 물었다.그제야 내공으로 상처를 다스리던 서문무해가 입을 열었다.“그 자식이 먼저 찾아온다는 건 분명 꿍꿍이가 있을 거야. 날 부하로 끌어들이려는 속셈이 분명해.”“응?”사자황은 잠시 멍해졌지만 말뜻은 금세 알아들었다. 다만 여전히 납득은 가지 않았다.“그렇게 말하면 곤란하지. ‘끌어들인다’보단 ‘모신다’가 맞겠지. 그리고 너도 엄연한 화진 사람이잖아. 나라를 위해 힘을 보태는 건 당연한 일 아니냐?”“흥, 넌 몰라. 난 권력 싸움 같은 건 딱 질색이야. 그래서 고향을 떠나 떠돌아다닌 거고, 이번에 그 애 따라가면 결국 또 그런 일에 휘말리게 될 게 뻔하잖아.”서문무해는 담담하게 말했다.“명예나 권력엔 관심 없어. 나는 그런 거 안 해.”사자황은 그제야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속이 뻔히 보여. 억지로 끌려가는 척해도 결국은 화진이 걱정돼서 돌아가고 싶은 거잖아. 겉으로는 고고한 척해도 속으론 마음 다 줬으면서.”사자황이 면박을 줘도 서문무해는 전혀 화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천천히 말을 이었다.“화진을 바로 세우고 싶은 마음은 항상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일은 단지 무공만 강하다고 되는 게 아니야. 게다가 내 실력으로는 세상을 뒤집기엔 턱없이 부족하고.”“예전에 임씨 왕조 쪽에서도 나를 찾아온 적은 있었어. 하지만 그쪽은 운이 너무 약해. 후손들 역시 그릇이 안 됐고. 반면 윤씨 가문은 내가 계속 지켜봐 왔지.”“천 년 넘도록 화진을 지켜왔고 수많은 위기와 희생을 겪었어. 몇 번이나 멸문 직전까지 갔었고. 그 천 년 동안 윤씨 가문이 흘린 피와 땀이 쌓이고 쌓여 마침내 윤구주라는 인물이 태어난 거다.”“그 아이는 그릇이 달라. 왕의 기운, 제왕의 기세가 몸에 깃들어 있어. 이미 인황이라는 지위까지 올랐고 인황이란 곧 세상의 기운을 품는 존재지. 그 아이가 지금 그 길을 걷고 있는 거야.”사자황은 듣다보니 머
그 말을 들은 윤구주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소채은의 생각은 단순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간단치 않았다.머리를 느긋하게 빗고 있던 문아름이 툭 던지듯 말했다.“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에요. 초랑도는 공해에 있고 이놈들은 무역선 같은 걸 노리는 게 아니라 선원을 납치해서 몸값을 요구하죠. 국가 해군하고는 정면으로 맞서려 들지 않아요.”“그럼 더더욱 없애야 하는 거 아니에요?”소채은은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누가 나서서 그걸 없애겠어요? 그 지역은 지리적 여건이 독특해서 해적이 사라져도 곧 또 생겨요 지금 있는 해적들도 멸망한 해군 세력이 변질돼서 생긴 거고요. 그 이전에도 또 다른 해적이 섬을 차지하고 있었어요.”“불씨를 다 꺼도 바람만 불면 또 살아나는 게 해적이에요. 이걸 근본적으로 없애려면 섬 자체를 뿌리째 없애야 해요. 근데 이 해적들이 1년에 갈취하는 돈이 무역 전체 규모에 비하면 정말 쥐꼬리예요. 반면에 그 해적을 없애는 데 드는 비용은 그 몇 배를 훌쩍 넘어요.”“결국은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정의로운 일을 하려는 나라가 얼마나 되겠어요. 옳은 일이라고 해도 다수가 손해를 본다면 결국 아무도 나서지 않는 거예요.”“마치 한 사람을 살리겠다고 백 명을 희생시켜야 한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냥 포기해요. 근데 우리 화진은 그게 안 돼요. 그런 바보짓을 하는 나라거든요.”“산중 화재 속에 단 한 사람이 갇혔을지라도 화진은 여전히 구조대를 보냈어요. 백 명도 안 되는 시골 땅에 화진은 꼭 도로를 깔아주고 하루에 버스 한 대라도 다니게 했죠.”“화진은 그렇게 누구 하나라도 소외되지 않게 하려는 나라예요. 문제는 이게 다른 이들의 이익과 충돌한다는 거예요. 예를 들면 명문가나 귀족들 말이에요. 그래서 윤구주가 목숨 걸고 그들을 없애려는 거예요.”“언젠가는 또 생기겠지만 지금 윤구주는 그걸 감당할 수 있는 힘도, 각오도 있어요. 잔인하단 욕을 먹어도, 차가운 인간이라 손가락질받아도, 화진 부흥을 막는 자라면 누구
무도와 고신도, 이 둘이야말로 화진의 진짜 적이었다.화진 내부의 온갖 개인적 원한과 다툼도 결국 이 두 세력의 농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렇게 모두가 가볍게 대화를 나누며 만찬은 자연스레 마무리되었다.남해 함대는 여전히 순찰 임무를 이어가야 했기에 윤구주 일행은 근처의 한 섬에서 군용기를 타고 서울로 복귀할 예정이었다.남해 함대 주력함 갑판.“자, 이제 여기서 작별이군. 세상에 영원한 연회는 없는 법이지. 난 이만 검도로 돌아가야겠어.”김도현은 사람들에게 가볍게 인사했다.“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걱정 말고. 한 가지 미리 말해두지. 검도의 균형을 위해 무도와 일시적으로 손을 잡을 수도 있어. 마음의 준비는 해두는 게 좋을 거야.”윤구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알고 있어. 몸은 적진에 있어도 마음은 늘 화진 쪽에 있잖아.”“허허, 잘 알고 있군. 그리고 한 가지 더, 검도야 자생력도 있고 나도 당분간 문제 없지만 네 스승의 화신전은 상황이 좋지 않아. 요즘 곤륜 지역에선 화신전이 표적이 되고 있거든. 너희가 섬멸한 신전 잔당들이 분풀이하듯 화신전에 화풀이를 할 가능성이 커.”“지금은 버틸 수 있겠지만 네가 우선 해야 할 일은 화진 내부의 정리를 끝내는 거다. 알겠지?”“그래.”윤구주는 고개를 깊이 숙이며 다짐하듯 답했다. 이미 그의 머릿속에는 복귀 후 처리할 일들에 대한 구상이 시작되고 있었다.“그럼, 다들 강호에서 다시 만나기를.”김도현은 작별을 고하곤, 자신의 원신을 육체로 돌려보냈다. 곧바로 공간 전송으로 검도로 귀환한 것이다.그 모습을 본 기린수는 눈을 굴리며 말했다.“참나, 저 영감탱이 정말 겁 많긴 해. 그냥 날아서 곤륜으로 돌아갈 수도 있잖아. 굳이 정원을 다 써가며 전송을 하다니.”물론 덕분에 바로 복귀하긴 했지만 그만큼 회복엔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당분간 김도현은 조용히 칩거에 들어갈 것이고 검도는 그의 빈자리를 감당해야 했다.“야, 멍청한 소리 작작 해라.”윤구주가 퉁명스럽게 말했다.“중간에 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