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규비가 윤구주를 끌어안고 울먹이면서 물었다.윤구주는 그녀를 살짝 안고 말했다.“난 계속 살아있었어. 세상 사람들은 내가 죽었다고 생각했겠지만 말이야.”“왜? 넌 죽지 않았는데 왜 화진 사람들은 다 네가 죽었다고 한 거야? 게다가 다들 네가 10개국 간의 전쟁 중에 죽었다고 했어.”연규비는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들며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물었다.“이 일은 내가 다음에 얘기해줄게. 어쨌든 지금 나는 살아서 네 앞에 서 있어.”윤구주는 미소 지었다.연규비는 아직도 믿기 어려웠다.그녀는 떨리는 손을 들어 윤구주의 잘생긴 얼굴을 만졌다.그녀는 눈앞의 윤구주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보고 싶었다.윤구주의 얼굴에서 열기가 느껴지고, 또 그의 잘생긴 얼굴을 보고 나니 그제야 이 모든 것이 꿈이 아니라 진짜라는 걸 확신했다.“궁주님... 잘생긴 오빠... 설마 두 분 아는 사이세요?”이때 옆에서 넋을 놓고 있던 인해민이 갑자기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내 평생 가장 사랑하던 사람이었어. 그런데 아는 사람이냐고 묻는 거야?”연규비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뭐라고?’그 말에 인해민은 굳어버렸다.“됐어. 넌 일단 나가 봐. 난 구주와 할 얘기가 많아.”연규비가 인해민에게 말했다.인해민은 눈이 휘둥그레진 채로 윤구주를 바라보다가 멍한 얼굴로 말했다.“네.”그리고 밖으로 나갔다.인해민은 밖으로 나간 뒤에도 몸이 굳은 상태였다.그녀는 큰 충격을 받고 지금까지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방 안.연규비는 윤구주와 만난 뒤 무척 기뻤다.그녀는 윤구주 덕분에 지금 이 자리에 설 수 있었고, 평생 윤구주만 사랑했다.세상 사람들이 그녀를 마녀라고 욕해도, 윤구주의 불륜녀라고 욕해도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그녀가 신경 쓰는 건 윤구주 한 명뿐이었다.그래서 윤구주가 죽었다는 소식이 화진 곳곳에 퍼졌을 때야 그녀는 마음을 접고 폐관을 마음먹었다.그런데 지금 눈앞에 그녀가 가장 사랑하던 남자가 서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구주야... 이거 꿈 아니지? 정
“문아름이 왜 널 해친 거야? 어떻게 감히?”연규비는 큰 충격을 받았다.윤구주는 10개국 간의 전쟁에서 있었던 일을 간단히 얘기해줬다.문아름이 전쟁 전에 윤구주에게 기린화독을 썼다는 걸 얘기하자 연규비는 멍해졌다.“그 망할 여자... 어떻게 그렇게 지독할 수 있어? 감히 구주 너에게 독을 쓰다니. 그 여자는 네 약혼녀였잖아...”연규비는 믿기 어려웠다.윤구주가 말했다.“나도 지금까지 이해가 안 가. 하지만 언젠가는 전부 알게 되겠지.”“빌어먹을 문아름! 빌어먹을 문씨 일가! 그 사람들이 널 해치려 했다니!”연규비는 주체할 수 없이 화가 났다.“규비야, 그 일은 일단 그만 얘기하자. 난 언제가 그들에게 복수해서 그들이 대가를 치르게 할 거야. 일단은 내가 살아있다는 소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마.”윤구주가 말했다.“응, 알겠어. 그런데 네 예전의 부하들은? 네 병력은?”연규비가 물었다.“내가 가장 믿는 몇몇 형제들을 제외하고는 다들 내가 살아있다는 걸 아직 몰라.”윤구주가 덤덤히 말했다.“그렇구나! 그래서 지금까지 아무도 네가 살아있다는 걸 내게 알린 사람이 없었던 거였어.”연규비는 말한 뒤 눈물을 글썽이면서 윤구주의 위패를 바라봤다.윤구주는 웃었다.그는 연규비가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그는 연규비를 그저 여동생으로 여길 뿐이었다.“참, 그런데 이번에는 어쩐 일로 갑자기 서남에 온 거야?”연규비가 궁금한 듯 물었다.윤구주가 대답했다.“죽여야 할 사람들이 있거든.”“죽여야 할 사람들?”연규비는 흠칫했다.“맞아.”거기까지 말한 뒤 윤구주는 온몸에서 차가운 살기를 내뿜었다.“넌 그동안 계속 서남에 있었잖아. 군형 삼마에 대해 들어봤겠지?”윤구주가 말했다.“당연하지! 사람 죽일 때 눈 한번 깜빡이지 않는 놈들이야.”연규비가 말했다.“그래. 내가 이번에 서남에 온 건 그 세 자식을 죽이기 위해서야. 그리고 군형 5대 가족도 죽일 거야.”윤구주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하하!”윤구주는 웃었다....윤구주와 연규비가 회포를 풀고 있을 때 잔혹한 나찰 인해민을 제외하고 아무도 그 사실을 몰랐다.입구에는 여자들이 한군데 몰려서 윤구주가 나오기만을 목 빠지게 기다렸다.어쩔 수가 없었다.윤구주가 아주 잘생겨서 다들 그와 아는 사이가 되고 싶었다.이때 쓸쓸해 보이는 여자가 안에서 천천히 걸어 나왔다.그녀는 마치 혼이 나간 사람처럼 멍한 눈빛으로 비틀대며 걷고 있었다.“어머!”“해민 언니 나왔어!”입구에 있던 여자들은 인해민이 나오는 걸 보자 그녀에게 달려갔다.오늘 밤 아주 기뻤던 인해민은 지금 얼떨떨한 상태였다.특히 머릿속이 복잡했다.“세상에, 대체 무슨 상황이야? 그 오빠가 우리 궁주님이랑 아는 사이라고? 게다가 우리 궁주님과 서로 끌어안고 있었어.”조금 전 장면을 떠올린 인해민은 아직도 어안이 벙벙했다.“설마 둘이 연인일까? 그럴 리가 없는데! 궁주님이 사랑하는 사람은 화진의 왕 구주왕이잖아. 게다가 사랑하는 구주왕을 기리기 위해 궁주님은 반년간 폐관했는데 말이야! 그런데 왜 그 오빠를 보자마자 마치 연인을 본 사람처럼 구는 거지?”인해민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이상함을 느꼈다.이때 충격적인 생각이 들었다.“설마... 설마... 그 잘생긴 오빠가 궁주님이 사랑하는 과거 화진의 왕 구주왕인 건가?”쿵!그 생각에 인해민은 벼락을 맞은 듯 얼어붙었다.동시에 그녀는 홍할매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윤씨 성을 가진 남자에게 빠지면 평생 헤어 나오지 못한다는 말 말이다.성이 같았다.조금 전 인해민은 방 안에서 연규비가 그를 윤구주라고 부르는 걸 똑똑히 들었다.“세상에, 이제 알겠어! 그 오빠가 바로 화진의 왕 구주왕이었던 거야!”그제야 인해민은 모든 걸 깨달았다.인해민이 여전히 충격에 빠져 있을 때 밖에 있던 여자들이 재잘대면서 그녀에게 달려왔다.“해민 언니, 왜 혼자 나왔어요? 그 잘생긴 오빠는요? 왜 같이 나오지 않은 거예요?”여자들은 곧바로 그녀에게 물었다.“헤헤, 축하해요, 언니! 잘
“다들 입 닥쳐! 앞으로 그 잘생긴 오빠 얘기를 꺼낸다면, 그리고 그 오빠가 내 옷을 찢은 일을 입 밖으로 꺼낸다면 절대 가만 안 둘 줄 알아!”인해민이 노기등등하게 말했다. 화가 난 호랑이 같았다.주위에 있던 여자들은 인해민이 갑자기 버럭 화를 내자 찍소리도 하지 못했다.그들은 마음속으로 생각했다.‘해민 언니 왜 저래? 예전에 그 오빠에게 장난칠 때는 아주 즐거워했잖아? 그런데 왜 갑자기 저렇게 사람이 달라졌대?’인해민은 단단히 윽박지른 뒤 몸을 돌렸다.자신이 좋아하는 잘생긴 오빠가 궁주님이 가장 사랑하는 남자라는 생각이 들자 그녀는 벽에 머리를 박고 죽고 싶었다.너무 수치스러웠다....내전 안쪽.윤구주와 연규비는 오랜만에 회포를 풀고 있었다.연규비에게 있어 오늘은 가장 즐거운 날이었다.그녀는 윤구주가 살아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그녀는 아름다운 눈으로 윤구주를 바라보았다. 마치 아무리 봐도 부족한 것처럼 그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규비야, 그런데 왜 베일을 쓰고 있는 거야?”윤구주가 갑자기 그녀의 검은 베일을 바라보며 물었다.“오빠가 죽은 뒤에 다른 남자에게는 내 얼굴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거든! 하지만 이젠 오빠가 살아있으니 더는 베일을 쓰지 않아도 되겠어!”연규비는 그렇게 말하면서 손을 뻗어 검은 베일을 벗었다.옥처럼 희고 깨끗한 피부, 희고 가지런한 치아, 단정한 눈썹과 아름다운 눈, 절세 미녀였다.그녀는 아주 고급스럽게 아름다웠다.소채은과 문아름과 전혀 다른 종류의 아름다움이었다.그녀는 마치 지상으로 내려온 여신 같았다.그녀의 얼굴을 본 윤구주는 고개를 살짝 돌렸다. 더 봐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연규비는 윤구주의 마음을 알고 있었고, 그가 줄곧 자신을 친동생처럼, 가족처럼 여긴다는 걸 알았다.그런 생각이 들자 잠깐 씁쓸한 기분이 들었지만 그녀는 이내 마음을 내려놓았다.“오빠, 오빠가 떠난 뒤에 난 서남으로 와서 백화궁을 창립했어. 이제 우리 백화궁은 화진의 신 4대 문파가 되었고 심
“퉤퉤퉤! 뭔 헛소리를 하는 거야?”“그 멋진 오빠가 아무리 잘생겼어도 우리 궁주님이 어떤 분이신데 그 오빠한테 한눈에 반하겠어? 우리 궁주님은 사랑하는 사람도 있으시다고!”“그렇긴 하지.”미녀들이 의논하고 있을 때 여신 같은 여자가 안에서 걸어 나왔다.그녀는 연규비였다.연규비가 나오자 대전 안의 여자들은 깜짝 놀라더니 서둘러 무릎을 꿇었다.“궁주님을 뵙습니다!”연규비는 손을 저으며 말했다.“다들 일어나도록 해요.”“감사합니다, 궁주님!”자리에서 일어난 여자들은 연규비와 그녀의 곁에 서 있는 윤구주를 보았다.두 사람이 나란히 나오자 백화궁의 여자들은 전부 의아했다.다들 왜 잘생긴 윤구주가 궁주와 함께 나오는 건지 궁금했다.그들이 의아해하고 있을 때 연규비가 입을 열었다.“오늘 여러분께 백화궁의 귀한 손님을 소개해 줄 거예요. 바로 구... 윤구주씨입니다!”연규비는 구주왕이라고 하고 싶었지만 윤구주의 당부를 떠올리고는 서둘러 말을 바꿨다.“윤구주 씨요?”대전 안의 200명쯤 되는 사람들은 그 말을 듣고 윤구주에게로 시선을 돌렸다.“맞아요.”“지금부터 윤구주 씨는 우리 백화궁의 가장 존귀하고, 영예로운 손님이에요! 그러니 다들 최선을 다해 윤구주 씨의 요구를 들어주도록 해요. 윤구주 씨의 말을 거역한다면 궁법에 따라 벌을 줄 거예요.”연규비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대전 안의 여자들은 순간 심장이 철렁했다.그들은 아름다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윤구주를 바라보았다.다들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세상에, 궁주님이 외부인에게 이렇게 잘해준다고? 말도 안 돼!’“다들 이해했나요?”연규비의 목소리가 다시 한번 들려왔다.여자들은 서둘러 대답했다.“알겠습니다!”“알겠으면 다들 이만 물러나요.”연규비가 명령을 내리자 여자들은 하나둘 대전을 빠져나갔다.그들은 떠나기 전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윤구주와 궁주를 보았다. 다들 하나같이 놀란 얼굴이었다.“저하!”여자들이 전부 나가자 백경재가 갑자기 옆에서 달려왔다.그는 윤구주를 저
모두 떠나고 나니 대전에는 윤구주와 연규비 두 사람만 남았다.“규비야, 군형 5대 가족의 본거지가 어디 있는지 알아?”윤구주가 갑자기 물었다.“군형 5대 가족은 줄곧 베일에 감춰져 있었지만 그들의 본거지가 어디 있는지는 알아!”연규비가 대답했다.“어디 있는데?”“서남에서 가장 유명한 음산 산맥에 있어!”음산 산맥이라는 말에 윤구주의 눈동자에서 살기가 번뜩였다.윤구주의 살기를 느낀 연규비가 물었다.“구주야, 대체 그들과 어떤 원한이 있길래 군형 5대 가족을 몰살시키려는 거야?”윤구주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한참 뒤에야 입을 열었다.“나랑 어디 좀 가자. 거기 가면 알게 될 거야.”연규비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게 윤구주는 연규비를 데리고 자신이 묵고 있는 호텔로 향했다.호텔에 도착한 뒤 연규비는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말했다.“구주야, 왜 날 데리고 호텔로 온 거야?”윤구주가 말했다.“곧 알게 될 거야.”연규비는 궁금증을 안고 윤구주와 함께 호텔로 들어갔다.25층.윤구주는 그곳에 도착해 자신이 묵고 있는 스위트룸 문을 열었다.연규비는 무척이나 궁금했지만 묵묵히 윤구주를 따라 들어갔다.커다란 스위트룸 안.윤구주는 연규비를 데리고 안쪽으로 들어갔다.“규비야, 나한테 왜 5대 가족과 군형 삼마를 죽이려는 건지 물었지? 지금 알려줄게. 이게 바로 그 이유야!”윤구주는 그렇게 말하면서 가장 안쪽 침대를 가리켰다.고개를 든 연규비는 안색이 순식간에 달라졌다.침대 위에는 혼수상태인 여자가 누워있었다.여자는 안색이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고 입술은 건조해서 갈라져 있었다.비록 얼굴은 아주 아름다웠지만 오랫동안 혼수상태였던 탓에 생기가 전혀 없어 보였다.“이 사람은 누구야...?”병상 위 소채은을 본 연규비는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내 약혼녀야. 내가 가장 사랑하는 여자야.”윤구주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침대 위 소채은을 바라보며 말했다.‘뭐라고?’“약혼녀?”그 세 글자에 연규비는 당황했다.그녀는 다시금 소채은을
예를 들면 지금의 소채은은 시독 때문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하지만 다행히도 윤구주의 구양진용기가 독소를 억누르고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소채은의 몸은 체내에서부터 천천히 썩어들어갔을 것이다.생각해 보라.미인이 몸 안쪽에서부터 밖으로 썩는다면 그건 그녀를 죽이는 것보다 천 배, 만 배는 더욱 잔인했다.“이 짐승만도 못한 놈들!”혼수상태인 소채은을 본 연규비는 무척 분노했다.“구주야, 그 세 자식은 왜 네 약혼녀에게 이런 지독한 짓을 한 거야? 내가 알기로 그들은 최근 2년간 줄곧 서울에만 있었는걸.”연규비가 의아한 듯 물었다.윤구주는 오랫동안 침묵하다가 천천히 차가운 얼굴을 들었다.“그 세 자식이 왜 채은이를 해쳤는지는 아직 모르겠어. 하지만 짐작하건대 아마도 그 지독한 여자랑 상관이 있을 거야.”연규비는 심장이 철렁했다.“혹시 문아름 말이야?”“맞아! 이 세상에 군형 삼마를 움직일 수 있고 나와 원한이 있는 사람은 문아름 걔밖에 없어. 다른 사람은 전혀 떠오르지 않아.”윤구주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그 말에 연규비가 갑자기 말했다.“그러고 보니 갑자기 그 일이 생각나네. 군형 5대 가족은 지난 2년간 국방부와 비밀리에 접촉했었어. 그리고 다른 사람 얘기를 들어 보니 그들이 4대 가문과 암암리에 어떤 연관이 있는 것 같았어. 이런 점들을 종합해 보면 그 악랄한 여자가 한 짓이 맞는 것 같아!”윤구주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눈빛이 점점 더 차가워졌다.“제기랄, 문아름이 그렇게 지독할 줄은 몰랐어. 네 왕위를 빼앗았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네 약혼녀에게도 이런 짓을 하다니 말이야.”연규비가 화를 내며 외쳤다.“걱정하지 마. 이 원수는 반드시 갚을 거니까! 하지만 지금은 일단 군형 5대 가족부터 무너뜨릴 거야.”윤구주가 차가운 눈빛으로 말했다.“그래. 삼형 군마는 군형 5대 가족 중에서 지위가 아주 높고 그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어. 그러니까 그 세 자식을 찾아가려면 일단 5대 가족을 찾아야 해. 구주야
연규비는 고개를 들어 병상 위 소채은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다소 복잡했다.그녀는 한참 뒤에야 물었다.“구주야, 이 사람 이름이 뭐야?”윤구주는 잠깐 고민한 뒤 대답했다.“소채은.”“예쁜 이름이네.”연규비는 말을 마친 뒤 다시 말했다.“왠지 모르게 소채은 씨가 부러워지네...”윤구주는 당연히 연규비의 말뜻을 알고 있었다.그는 침묵했다.“됐어. 난 이만 가볼게. 백화궁 일을 다 처리하고 나면 너랑 같이 서남 음산으로 가서 군형 5대 가족을 찾을게.”그렇게 한마디 남긴 뒤 연규비는 떠났다....백화궁.윤구주와 연규비가 떠난 뒤 여자들은 조잘대면서 의논하기 시작했다.윤구주가 대체 누군지 아무도 몰랐다.그리고 항상 차갑던 궁주가 왜 갑자기 낯선 남자에게 그렇게 잘해주는지도 몰랐다.오직 한 사람만이 묵묵히 백화궁 돌계단 위에 앉아서 침묵을 고수했다.그녀가 바로 잔혹한 나찰 인해민이었다.그녀는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이 궁주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점이 난처했다.인해민이 홀로 백화궁 입구의 돌계단에 앉아서 답답해하고 있을 때, 여자 몇 명이 그녀에게로 달려왔다.“해민 언니, 언니 왜 그래요? 왜 갑자기 근심 가득한 얼굴이에요?”인해민과 사이가 좋은 여자 한 명이 물었다.“휴, 아무것도 아니야. 난 그냥... 그냥 답답해서 그래.”윤구주를 떠올린 인해민은 어이가 없었다.인해민의 말을 들은 여자는 더 캐묻지 않고 잠깐 뜸을 들였다가 말했다.“해민 언니, 언니가 데려온 그 멋진 오빠 대체 뭐 하는 분이에요? 언니는 모르겠지만 궁주님께서 30분 전쯤에 우리에게 백화궁 사람들은 전부 그 멋진 오빠의 명령에 따라야 한다고 했어요. 그것도 절대적으로 순종하라고 했어요. 명령에 따르지 않는다면 궁법에 따라 벌을 준다고 했어요.”여자가 말했다.인해민은 쓴웃음을 지었다.“궁주님께서 그러는 건 맞아.”“왜요? 그 멋진 오빠 대체 누구예요? 뭐가 그렇게 대단한 거예요?”여자는 이해할 수 없었다.인해민이 말했다.“그의 정체는 모르
하지만 한 계단씩 갈수록 더욱 어려워지는 난관들도 이 평범한 사람에게는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다.만약 윤구주와 맞서야 하는 적의 입장이었다면 지금 이렇게 차분히 계단을 오르는 윤구주는 마치 깊은 심연 그 자체였을 것이다.그의 강력함은 도무지 가늠할 수 없었고 오히려 그가 올라올수록 위에 있는 사람들은 엄청난 압박감에 휩싸였다.검종의 검객들이 잠시 정신을 놓은 사이 윤구주는 이미 사백 계단까지 올라와 있었다.하지만 사백 계단쯤으로는 아무도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화진의 또 다른 황자 구주왕의 후계자였으니까.윤구주가 오백 계단을 밟는 순간 모든 이들은 숨을 죽이고 그를 응시했다.눈길을 떼지 못한 채 그의 오름을 지켜보았다.오백일…… 오백이십! 오백오십! 오백구십구!“마침내 구구관에 도달했다.”“칠구는 수겁이요 구구는 극히 넘기기 어려운데.”진정한 고수들은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과연 윤구주가 이 한 걸음을 쉽게 넘을 수 있을지 모두가 궁금해했다.윤구주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산 아래를 바라보았다.그가 본 것은 단순한 산이 아니라 마치 화진의 온 세상 같았다.한눈에 화진의 대지와 산천이 모두 담겼다.눈앞에 펼쳐진 화진의 아름다운 대지는 숨 막히는 광경이었다.하지만 동시에 이 끝없는 강산 곳곳에 묻혀 있는 수많은 해골도 함께 보였고 그의 마음은 순식간에 비장함과 슬픔으로 가득 찼다.윤구주의 내면을 감지한 서요산 검종 종주의 법신이 곧바로 그의 곁에 나타났다.“구주야 화진의 산천을 잘 살펴봐! 천하의 용맥은 모두 화진에서 비롯되었고 이 한 획 한 획은 백성의 척추와 같다! 눈에 비치는 물의 맑고 흐림은 중요하지 않아. 지나치게 눈 부신 빛은 우리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고 너무 어두운 밤은 희망을 앗아가기 마련이지. 하지만 어떤 변화가 있더라도 화진의 이 산천은 영원히 굳건히 서 있을 거야. 왜냐하면 푸른 산마다 묻혀 있는 충신의 뼈와 넋들이 이 나라를 지켜주고 있으니까.”서요산 검종 종주는 윤구주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그 온
진인들은 말했다. 임정설이 만약 집념을 내려놓는다면 육백 계단까지도 오를 수 있을 거라고.장인 대진인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하지만 그가 진정으로 집념을 놓는다면 더 이상 화진의 국주가 아니지. 바로 이런 끈질긴 의지가 있기에 그분이 화진 백성을 다스릴 수 있는 것이다.”다른 진인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운명이란 그런 법이다. 아마도 집념을 놓았다면 임정설은 오백 계단조차 오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이때 임정설은 아직 남아 있는 절반의 계단을 바라보며 씁쓸히 미소 지었다. “어쩌면 여기서 멈춰야겠구나.”임정설은 다시 뒤를 돌아 윤구주를 바라보았다. 그가 자기 자식이자 동료처럼 여기는 윤구주가 과연 몇 계단을 오를지 궁금했다.깊은 생각에 잠긴 임정설이 곧바로 말을 꺼냈다.“구주야 이제 네가 올라서 봐! 화진의 구주왕다운 실력을 보여줘! 적어도 나보다는 못하면 안 되지 않겠냐?”아래에 서 있던 윤구주는 고개를 살짝 저었다. 원래 그는 별 관심이 없었지만 국주의 바람이라면 흔쾌히 도전할 마음이었다.“명 받들겠습니다!” 윤구주는 말을 마치자마자 곧바로 계단을 밟아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가기 시작했다.구주왕이 등천로에 도전했다는 소식에 서요산 검종 전체가 술렁였다.검객은 물론이고 잡일을 돕는 제자들까지 모두 금정에 모여들어 그의 모습을 보고자 했다.심지어 하늘 위 어둑한 구름 사이에서도 한 쌍의 법안이 열렸다. 바로 서요산 검종 종주의 법신 환영이었다.임정설이 먼저 정상에 올랐고 장인 대진인을 포함한 일곱 진인과 서요산의 모든 제자들은 화진의 황자를 향해 몸을 숙여 예를 갖추었다.“모두 일어나시오. 그대들이 없었다면 화진은 이미 혼란 속에 빠졌을 것이오. 진정 국가와 화진을 위해 헌신한 것은 바로 그대들입니다.” 임정설은 화진의 모든 백성을 대표할 순 없지만 왕실을 대표하여 임 씨 일족의 지도자로서 서요산 검종의 노고에 진심으로 감사의 뜻을 표했다.“국주께서 과찬입니다. 우리는 그저 각자의 방식대로 묵묵히 힘썼을 뿐입니다. 화진의 백
일곱 진인들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그들은 국주가 이미 등황의 경지에 이르렀으니 사백 계단은 쉽게 오를 것으로 예상했다. 과연 그들의 예상대로 임정설은 멈추지 않고 계속 오르며 오백 계단을 가볍게 밟아 올랐다. “오백 계단을 밟으면 등황의 경지에 오를 수 있습니다. 우리 일곱 진인 중에서도 오직 장인 대진인께서만 과거에 오백 계단에 오르셨고, 현재 서요산에 살아계신 유일한 오백 계단 수련자이십니다. ” 한 진인이 감탄하며 말했다.이 말을 듣자 옆에 있던 백호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선임 도사님 그러면 그 도사님도 황자란 말씀입니까? ”“하하! 우리 서요산에서는 외부의 그런 칭호를 쓰지 않아요. 우리 사이에서는 그를 반신이라고 부릅니다.” 진인들이 웃으며 말했다.청해가 옆에서 덧붙였다. “서요산 검종에서 말하는 반선이 황자를 뜻하는 거야. 근데 그 서요산 반선 진짜 어마어마하게 강한 인물이거든. 예전에 곤륜 구역에서 귀한 영약 찾으러 들어왔다가 우리 빙신전 전주랑 빙황 두 명이 같이 상대했는데도 둘 다 거의 죽을 뻔했어. 결국 아사 신전한테까지 도움 요청해서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지.”“뭐라고?”백호는 놀라서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진짜 그렇게 강한지 의문이 들었다.일곱 진인 중 가장 나이 많은 그 진인은 백호의 단순한 반응에 웃음을 터트렸다. 사실 그가 바로 그 반선이었다. 다만 백호가 워낙 세상 물정에 둔감하여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저 놀라기만 하고 있었다.그사이 임정설은 이미 오백오십 계단까지 올라갔다. 하지만 이 단계에 이르자 임정설도 거의 극한에 도달했다.“역시 직접 올라와 봐야 이 압력을 제대로 실감하는구나! 오백사십 계단까진 무리 없었는데 오백오십 계단에서 도저히 버틸 수가 없구나.”지금 임정설을 압박하는 것은 단순한 술도의 압력만이 아니었다.과거의 온갖 기억들이 마장이 되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일곱 진인은 모두 임정설의 기운이 혼란스러워진 것을 느꼈다.“장인 사형, 국주님께서 심마에 걸리셨군
청해의 눈길이 자주색 도포를 입은 진인에게로 향했다.서요산검종에서 종주를 제외한 나머지 일곱 명의 진인이 가장 높은 수련을 가지고 있으며 평소 종문 내의 모든 일은 이들 일곱 명이 책임지고 있다.기세는 마치 대강의 파도가 넘실대듯 깊고 끝이 보이지 않는 산과 숲처럼 무한히 이어져 있었다. 그의 수련은 깊이가 가늠할 수 없을 정도였다.“서요산 7대 진인의 수련이 극 신급 절정이라고 들었는데 지금 보니 그 말이 너무 가볍게 들리네요. 귀하의 수련은 적어도 극 신급 절정 후반에 다다랐군요.”청해는 세 명의 진인에게 경의를 표하며 몸을 굽혔다.“서요산의 전통은 천 년을 자랑하며 그 깊이는 변함없이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반면 곤륜 구역은 스스로 신을 자처한 이후로 계속해서 내분을 일으켰습니다. 수련을 통해 세상을 떠난 후 도를 깨닫는다는 말처럼 곤륜 구역은 천하의 영기와 천물을 흡수했지만 제 생각에는 도를 얻지 못한 곳입니다. 지금 당신이 화진에게 올바른 수를 두는 것은 맞습니다. 앞으로 열심히 노력하면 극 신급 절정 후반도 절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한 진인이 답례하며 말했다.그때 몇몇 사람들은 서요산 검객들의 함성에 이끌려 사방을 살폈다. 백호가 사백 계단을 올라갔다는 소식이었다.“대단한데요. 서요산이 전성기였을 때도 사백 계단을 오른 이는 드물었어요. 우리 몇몇 진인들도 입문 시에 사백 계단을 넘은 적은 없었죠.”몇몇 진인들이 칭찬했다.이는 백호가 미래에 매우 큰 가능성을 지녔음을 의미했고 적어도 극 진경 후반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극 진경 후반은 곤륜 구역에서 신전의 전주가 될 수 있는 실력이다.지금 사백 계단에 오른 백호는 거의 한계에 다다랐다. 완전히 의지로 버티며 강력한 정신력으로 계속해서 오르고 있었다.그러나 아무리 강한 운명을 지녔다 해도 천지의 이치를 막을 수는 없다.사백오십 계단에 도달했을 때 백호는 결국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의식을 잃은 것은 시험이 끝났다는 신호였고 백호는 곧 깨어났다.“겨우 사백오십 계단이라니
서요산 검객들이 모두 그 무인의 정체를 궁금해하자 진인도 더 이상 뜸 들이지 않고 말했다.“저분은 구주왕 휘하의 화진 군신이자 국방부 대장 백호 장군이시다.”검객들은 모두 입이 벌어진 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군신의 명성은 당연히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보호하는 영웅이었으니까.“정말 구주왕 휘하의 군신이라니!”“역시 저런 굳센 의지가 그냥 나온 게 아니었어! 수많은 전장을 누빈 명장다운 모습이다!” 서요산 검객들은 백호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현재 백호는 이미 삼백이십 계단을 돌파한 상태였다. 백호가 혼자 주목을 독차지하는 걸 본 청해도 더 이상 가만히 있지 않고 계단에 발을 내디뎠다.처음 백 계단은 청해도 육신의 힘으로 버텼다. 하지만 백 계단을 넘자 육체만으로는 견디기 어려워졌다. 그는 술법으로 대응하려 했지만 평소 쓰던 빙신전의 신술이 계단 위 술법에는 통하지 않았다.“역시 화진의 서요산 검종은 보통이 아니구나. 이 등천로에선 일반 술법이 먹히지 않으니 천지 영기에 대한 깨달음으로 맞설 수밖에 없겠어.” 청해는 몸을 감싸고 있던 현빙을 거두고 오로지 자신의 속성 영기로만 버티며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막상 올라 보니 이 등천로가 얼마나 어려운지 제대로 실감했다. 이백 계단쯤 오르자 벌써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계단마다 한계를 시험하는 느낌이었다. 올려다보니 백호는 여전히 계단 위로 나아가고 있었다. 청해도 질 수 없다는 마음으로 이를 악물고 버텼다.서요산 검객들도 청해의 수준을 알아보고 속삭였다. “저 이역인은 정말 대단한 내력의 소유자다! 기운이 이미 진인 급에 가까워! 극 신급 절정의 수련자임이 분명해!”이에 대해 진인은 신비롭게 꾸미지 않고 솔직히 말했다. “저자는 곤륜 구역 빙신전의 부 전주 청해다. 경지가 매우 높지. 지금 빙신전은 우리 화진에 귀속되었고 청해 역시 구주왕 휘하의 부하가 되었다. 얼마 전 서울 방어전에서 청현과 목숨까지 걸고 사투를 벌인 끝에 죽을 고비를 넘겼으
백호는 아직도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어느덧 이백오십 계단까지 올라왔다. 이 단계부터는 실체화된 술법이 몸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계단 하나를 오를 때마다 바람, 불 번개와 같은 속성의 영기가 점점 강해졌다. 여기서부터는 육신 횡련의 수련자는 강력한 체질로 버티고 술도 재능이 뛰어난 수련자는 천지 영기를 다루는 능력으로 버텨야 했다. 한마디로 각자의 능력에 따라 갈리는 구간이었다. 어느 한 분야라도 특출나지 않으면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백호는 술도에는 재능이 없었기 때문에 오로지 강인한 육체 하나로 견디고 있었다.웅!성수의 피가 진동하며 백호의 몸을 지탱했다. 각종 속성의 영기가 몰아쳤지만 백호는 성수혈의 힘을 빌려 억지로 앞으로 나아갔다.수련자에게 있어서 성수의 혈맥이나 법보 등은 모두 신체 외적인 재능으로 간주하지만 그렇다고 이것들이 꼼수나 편법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천 가지 변화와 만 가지 신통력이 있어도 결국 만법은 한 가지로 귀결된다. 법기든 혈맥이든 이를 감당하는 것은 결국 본인의 몫이다. 천지 영기를 이용한 술법도 결국은 그 힘을 감당할 수 있어야 사용할 수 있는 것이며 감당하지 못하면 반드시 반작용을 맞게 된다. 따라서 수련의 길에는 애초에 편법이란 존재하지 않았다.성수 혈맥 같은 천지의 보물은 보통 사람이 함부로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윤구주의 도움을 받았다 하더라도 결국 이를 감당하는 건 백호 자신이었다. 성수 혈맥의 힘을 온전히 감당하며 백호는 결국 삼백 계단까지 올라섰다.계단의 꼭대기 근처에는 이미 서요산 검종의 검객들이 여럿 서 있었다. 서요산 검종은 근대에 들어 삼백 계단을 넘는 인재가 드물었다. 최근 백 년 동안 삼백 계단을 넘은 사람이 고작 열 명 남짓이었고 그중 대부분이 삼백여 계단에서 멈췄다. 그런데 지금 백호는 삼백이십 계단까지 올라선 것이다. 이 정도면 서요산 검종 전체가 떠들썩해질 만한 성과였다.이런 제자가 나타난다면 종문 전체가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래서 서요산의 진인들까
“한 사람의 품성을 제대로 살피지도 않고 마구잡이로 그렇게 많은 수련자를 키워낸다면 결국 천하의 마인을 직접 만들어 내는 꼴이 아니겠어?”청현이 바로 그 실패한 예다. 서요산 검종 종주가 청현의 천재성을 아까워한 나머지 그의 인성을 무시하고 양성한 끝에 결국 역도를 만들어 낸 것이다.“그럼 저하 서요산에 입문한 무술 무인들은 평균적으로 몇 계단까지 오르는지 아십니까?” 백호가 호기심에 물었다. 윤구주는 잠시 생각한 뒤 입을 열었다.“무술 무인의 정확한 데이터는 모르지만 검종 종주와 잡담할 때 들어보니 검종 제자들의 수준이 갈수록 떨어져서 천 년 전만 해도 평균 삼백 계단 정도였는데 요즘엔 백 계단도 못 오른다고 하더구나. 가끔 삼백 계단을 오르는 자라도 나오면 검종 전체가 몇 년은 떠들썩할 정도라고 했어.”“구백구십구 계단까지 있는 시험인데 천 년 전 전성기에도 겨우 삼백 계단이요?” 백호는 입술을 삐죽이며 서요산 검종의 수준이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때 한 번 도전해 볼 생각이야?” 윤구주는 흥미롭게 백호를 바라보았다. 백호는 당장이라도 도전하고 싶은 마음에 윤구주의 허락을 구한 뒤 바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한 계단 두 계단... 오십 계단까지는 아무 어려움도 없었다. 백호는 오십 계단에 서서 사람들을 향해 서요산 검종이 별것 아니라며 놀려댔다. 하지만 육십 계단쯤 올랐을 때 처음으로 압력을 느꼈다. 마치 몸 위에 작은 차 한 대가 올라탄 듯한 느낌이었다. 물론 백호에게는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 수준이었다. 그는 계속해서 발걸음을 옮겼다. 백 계단에 도달하자 압력이 갑자기 커졌다. 등에 작은 승용차 대신 소형 트럭이 올라탄 듯한 느낌이었지만 아직 백호의 한계에도 가지 못했다.“근래 사람들의 평균이 백 계단도 못 넘는 이유가 이제야 이해가 되네요. 예전의 무인 횡련은 황제도 오를 수 있었지만 요즘 무인 횡련은 죽어라 노력해도 소형 트럭 하나 못 버티는 수준이니 말입니다.”백호는 농담을 던지며 계속해서 계단을 올라
전에 임정설은 구오 지존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지만 나라를 위해 힘쓰며 수모를 견뎌내고 살아남으려 했다.하지만 이제 황제가 된 그는 죽음을 생각하게 되었다.그 탓에 이번 관문 앞에서 그는 망설였다.살아 있는 자만이 통과할 수 있는 관문이었다.죽음을 마음에 품은 자는 절대로 넘어설 수 없는 관문이었다.그 자리에 있던 사람 중 청해만이 그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생각했다.‘황제가 되면 곤륜 구역에서 최고 경지에 도달하는 건데. 기뻐해도 모자랄 판에 왜 죽음을 택하려는 거지?’“저하, 국주는 아직도 풀리지 않은 듯합니다. 저하도 사랑하던 이에게 배신당했어도 결국 극복해 나갔잖습니까.”백호도 이해하지 못했다.그는 여전히 국주보다는 왕이 더 낫다고 여겼다.“네가 뭘 안다고 그런 말을 함부로 내뱉느냐.” 윤구주가 단호하게 말했다.백호는 머리를 긁적이며 답했다. 그는 어리숙하고 말솜씨도 없기에 생각나는 대로 말했을 뿐이다.“내가 문아름에게 배신당한 건 억울한 일이지만 나는 그녀에게 잘못한 게 없다. 오히려 그녀가 날 배신한 거다. 하지만 국주는 그 반대였지. 그가 그녀를 저버린 거야. 정이 깊으면 오래가지 못하고 지혜가 지나치면 오히려 상처를 입는다. 이 세상에서 가장 쓰라린 후회는 가진 뒤 잃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과 생사를 달리하게 되는 것이다.” 윤구주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만약 소채은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자신도 제정신이 아닐 거라고 느꼈다.“그럼 복수하면 되지 않나요?” 백호가 어리둥절하게 물었다.이때 청해가 눈치를 채고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상대가 너무 강해서 못 이기는 거지. 황제에 오르기 전까진 제대로 맞붙을 힘도 안 돼. 오르고 나서도 이길 수 있을지 장담 못 하고.”윤구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딱 그 말이 맞았다.“그럼 우리가 국주님 대신 복수해 드리면 되잖아요? 국주님은 제 왕이기도 하지만 제 윗사람이기도 하잖아요.”백호가 고개를 갸웃했다.“하하! 만약 세상 사람들이 다 너처럼 솔직하다면 이런
인간이 나쁜 짓을 거듭해 양심을 잃으면 부끄러움도 사라진다. 예전 같으면 아무렇지 않았을 테지만, 지금은 윤구주를 따라 명예심이 생기면서 죄책감도 느끼게 된 청해에게 이 원한의 전법은 고통스럽기만 했다. 물론 곤륜역 한 신전의 부전주로서 정신이 붕괴할 정도는 아니었다.네 사람은 이 원한의 전법도 가볍게 넘어섰다.이때 전법에 관심을 가졌던 임정설이 무언가를 눈치챘다.“구주야, 서요산의 전법은 우연히 들어온 자를 쫓아내는 동시에 수련자의 의지를 시험하는 것이었어. 서요산은 의지력이 확고한 자들만 끌어들인다는 것을 미리 들어 알고 있다. 이게 바로 서요산이 제자를 선발하는 방식인가 보구나.”“그렇습니다. 매년 화진 무도계 사람들이 서요산에 찾아오지만 성공한 자는 극히 드뭅니다. 실패자들 중 십중팔구는 산기슭에서 죽음을 맞이하죠. 어떤 문턱은 넘지 않는 것이 복이 될 때가 있습니다. 모르는 것이 약이죠. 현실을 알고도 바꾸지 못하는 것이 가장 괴로운 법이니까요. 이 관문을 넘는다고 해도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면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죽음뿐입니다.”윤구주의 말이 끝나자 세 번째 전법이 나타났다.첫 번째와 두 번째 전법은 이곳에 들어온 이들을 돌려보내려고 만든 것이지만 세 번째 전법은 달랐다. 이 전법은 살기로 가득 찬 죽음의 전법이었다.평범한 사람들은 여기까지 도달하지 못한다. 이곳까지 온 자들도 앞길의 위험을 보고 함부로 들어가려 하지 않을 것이다. 눈 앞에 펼쳐진 죽음의 길을 보고도 들어가는 자는 스스로 죽음을 원하는 자라서 그런 자들에게 죽음을 내리는 것은 오히려 덕을 쌓는 일이었다.하지만 무도로 도를 깨우치려는 수련자라면 이 관문을 넘기 위해 반드시 목숨을 걸어야 한다. 버텨내야만 수도의 길에 들 수 있고 실패하면 그 후과를 받아들여야 한다.전법 안은 살기로 가득했다. 생기와 영기가 세상을 이롭게 하지 못할지라도 살기와 죽음의 기운은 목숨을 앗아갈 것이 분명했다.진법 내부에는 수많은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무도계에 이름을 날렸던 강자들의 유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