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어르신께 은혜를 입은 몸입니다. 이제 이 세상 분이 아니라고 해도 저는 기꺼이 그분의 충견으로 남을 겁니다.”김재호가 단호하게 말했다.“그럼 질문을 바꾸지. 대체 5년 전에 무슨 일이 있었길래 유진이가 사라진 뒤에 네가 아이를 데려온 거지? 너는 우리 둘 사이에서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네가 움직인 건 전부 다 노인네 지시인 건가?”강지혁이 손에 힘을 가하며 그를 압박했다.김재호는 목이 서서히 졸려오는데도 여전히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었다. 그저 시선을 고정한 채 강지혁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강지혁이 지금 이런 질문을 한다는 건 당시 최면으로 봉인됐던 기억이 아직 완전히 돌아온 건 아니라는 소리나 마찬가지다.기억이 모두 회복됐으면 애초에 이런 질문은 하지도 않을 테니까.임유진 역시 다시 강지혁 곁으로 돌아온 걸 보면 어느 정도 기억을 회복한 것으로 보인다. 전부 다 회복한 건 아닐 테지만 아마 사라진 그 날의 기억은 고이준을 통해 어느 정도 알게 됐을 수 있다.하지만 그럼에도 강지혁은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걸 보면 그 사실을 강지혁에게는 얘기해주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유는 강지혁의 멘탈이 완전히 부서질까 봐.김재호는 강지혁의 말로 아주 많은 것을 파악했다.그는 강지혁의 최면에 직접 개입한 사람이기에 강제로 기억을 자극하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절벽에서의 일을 강지혁 스스로가 기억해낸 게 아니면 얘기조차 꺼내지 말라고 고이준에게 신신당부했던 것도 다 이유 때문이다.‘당부한 대로 그간 아주 잘 지키고 있었나 보네.’“제가 무엇을 했는지 정말 알고 싶으세요?”김재호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위로 올라갔다.임유진은 그 말에 뭔가 떠오른 듯 다급하게 외쳤다.“안 돼!”그녀의 외침에 강지혁과 김재호의 고개가 그녀 쪽으로 돌아갔다.강지혁은 의혹 가득한 눈빛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고 김재호는 예상했다는 듯한 태연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널 속이기 위해 거짓말을 할 수도 있어.”“제가
김재호의 말대로 강지혁은 지금 두려워하고 있다.물론 아이도 너무 중요하지만 임유진이 아이보다 몇 배는 더 중요했으니까.만약 임유진이 또다시 사라져버린다면 그때는 정말 삶의 이유를 완전히 잃어버릴지도 모른다.강지혁은 힘겹게 고개를 돌리고는 세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그녀를 바라보았다.임유진의 얼굴도 강지혁 못지않게 하얗게 질려있었고 두 눈은 지진이라도 난 듯이 흔들리고 있었다.“유진아, 안 돼... 내가, 내가 어떻게 해서든지 찾아낼게. 그러니까... 그러니까 김재호가 아닌 날 믿어줘. 제발... 부탁이야...”초조함으로 덜덜 떨리고 있는 입술과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얼굴, 임유진은 마치 심장을 누군가가 난도질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다시는 강지혁이 이런 표정을 짓게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또다시 그를 불안하게 하고야 말았다.임유진은 숨을 한번 깊게 들이켜고는 강지혁을 향해 말했다.“응, 널 믿을게.”그녀의 말이 떨어진 순간 강지혁의 두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나왔다.김재호는 임유진의 말에 빈정거리며 웃었다.“역시 임유진 씨도 이기적인 사람이었네요. 아이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다 할 것처럼 굴더니 지금의 생활을 포기하지 못하겠나 보죠?”임유진은 앞으로 걸어가 강지혁의 얼굴을 손으로 감쌌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그의 눈물을 닦아주었다.“혁아, 울지 마. 나는 네가 울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그녀는 강지혁의 예쁜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 한 방울 떨어질 때마다 심장이 찌릿하고 아파 났다.그래서 한시라도 빨리 이 눈물을 멈추게 하고 강지혁이 더 이상 불안해하고 무서워하지 않게 해주고 싶었다.강지혁은 김재호의 멱살을 스르르 놓고는 임유진의 손을 잡았다.“내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약속해...”“약속할게. 난 네 곁을 떠나지 않아.”임유진이 단호하게 대답했다.김재호는 그 말에 코웃음을 치며 또다시 비아냥거렸다.“아이의 생사는 전혀 중요하지 않나 보네요. 엄마가 돼서.”임유진은 강지혁의 눈물을 어느 정도 닦아준 후
김재호는 스스로조차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 마구 솟구치는 것이 느껴졌다.애초에 임유진을 제거하려고 한 건 강씨 가문을 책임질 강지혁에게 약점이 생겨버리면 모든 것이 무너진다고 했던 강문철의 유언 때문이었다.하지만 임유진은 강문철이 내린 시험에 망설임 없이 목숨을 내던짐으로써 강지혁도 구하고 스스로의 목숨도 구했다.그리고 5년이 지난 지금, 그녀는 여전히 똑같은 태도를 보이고 있다.한편 임유진의 말을 들은 강지혁은 순간 심장을 누군가가 강하게 틀어쥐는 것처럼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그는 임유진의 손을 덥석 잡으며 다급해 보이는 말투로 얘기했다.“설령 그런 날이 온다고 해도 내가 해결해! 나는 내가 알아서 지킬 테니까 너는 나를 위해 아무것도 하지 마. 알았어?!”임유진은 시선을 옮겨 강지혁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저 바라만 볼 뿐 아무런 대꾸도 해주지 않았다.“임유진!”강지혁의 목소리가 커졌다. 어떻게 해서든지 그녀에게서 원하는 답변을 듣고야 말겠다는 얼굴이었다.“그럼 영원히 그런 날이 오지 않게 하자. 그러면 마지막 순간에 나 스스로를 포기하지 않겠다고 약속할게.”임유진의 말에 강지혁은 순간 머리가 찌릿하는 느낌과 함께 익숙하지만 낯선 무언가가 스쳐 가는 듯한 느낌이 들이 들었다.그때 가만히 두 사람을 지켜보던 김재호가 입을 열었다.“제 조건에 응하지는 않았지만 아이의 행방에 관해 얘기는 해드리죠. 나머지 한 아이는 태어나는 순간 숨이 멎었습니다.”“거짓말!”임유진이 반박했다.“사실입니다. 애초에 살아있었다면 두 분 중 한 분한테 보냈거나 제가 데리고 있었겠죠. 하지만 그 어디에도 아이는 없잖습니까.”김재호가 퉁명스러운 얼굴로 답했다.임유진은 그의 말에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확실히 김재호 곁에 아이가 있다는 보고는 받지 못했다. 또한 방 내부를 이곳저곳 둘러봐도 아이의 것이라고 생각되는 물품 같은 것은 없다.그러면 나머지 아이는 정말 5년 전에 살아남지 못한 건가? 정말 태어나자마자 숨이 멎어버린 건가?아이가 없을지도
임유진이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병원이었다.임유진은 눈을 두어 번 깜빡이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바로 옆에 있는 강지혁을 바라보았다.“내가 왜 여기 있어?”“기억 안 나? 너 아까 거기서 기절했었어. 혹시 몰라 병원으로 왔는데 다행히 큰 문제는 없대”강지혁은 말을 하며 그녀의 손을 꽉 잡아주었다.임유진은 그 말에 잠시 멍하니 있다가 갑자기 눈물을 뚝뚝 흘리며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혁아, 어떡해... 흑... 우리 아이가... 아이가... 흑...”아이를 향한 미안한 감정이 북받쳐 오른 것인지 그녀는 말조차 제대로 잇지 못했다. 그저 숨을 헐떡이며 목 놓아 울기만 할 뿐이었다.강지혁은 그런 그녀를 와락 끌어안으며 다정한 목소리로 달랬다.“김재호가 한 말이 진실이라는 보장은 그 어디에도 없어. 만약 그 아이가 정말 태어나자마자 숨을 거뒀다면 우리한테 애가 묻힌 곳이라도 얘기해줬을 거야. 절대 경찰에게 끌려가면서까지 입을 닫고 있지는 않았을 거야.”강지혁은 나머지 한 아이가 살아있을 거라고 확신하고 있다. 하지만 김재호가 그 사실을 숨기려고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까지는 아직 감을 잡지 못하고 있다.“살아있다고...?”임유진은 그제야 눈물을 그치고 다시 고개를 들었다.“응, 분명히 살아있을 거야. 아이의 행방은 내가 무슨 수를 써서든 꼭 찾아낼게.”강지혁은 손을 들어 임유진의 눈물을 부드럽게 닦아주었다.“나더러 울지 말라더니 이제는 네가 우네.”임유진은 감정이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처럼 바닥으로 떨어졌다 다시 위로 올라갔다를 반복했다. 그래서일까, 이제는 강지혁의 팔을 꽉 잡을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우리 아이, 정말 살아있어...?”“응.”“정말...?”“응, 정말.”임유진은 강지혁의 품에 기댄 채 계속해서 질문했고 강지혁은 그 질문에 짜증 한번 내지 않고 다정하게 대답해주었다.그러기를 몇 번, 임유진은 그제야 안심이 되는지 고개를 푹 숙인 채 강지혁을 다시 한번 끌어안았다.“혁아, 우리 아이 꼭 찾아줘...”5년이나
현이와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그 아이는 사랑만 받아도 모자랄 나이에 아이를 골칫덩어리로 생각하는 새엄마와 아이에게 관심조차 없는 아빠의 보호 아래 있다. 말이 보호지 실상은 아마 ‘한 지붕 아래 같이 사는 전처의 애’ 정도로밖에 생각하지 않을 게 분명했다.‘그러고 보니 그 뒤로 어떻게 됐을까? 많이 혼났을까? 맞은 애들은 많이 다쳤나?’“무슨 생각해?”강지혁의 목소리가 바로 뒤에서 울려 퍼졌다.“아... 별건 아니고 오늘 놀이공원에서 봤던 그 어린 남자애가 갑자기 생각나서. 그 왜 애들 노는 곳에서 자기보다 덩치도 큰 애들을 때려눕힌 애 있잖아. 아마 그 일로 엄청 혼났을 거야.”“그 아이가 걱정돼?”강지혁은 말을 하며 임유진의 옆자리에 앉았다.“응. 걱정되고 신경 쓰여. 나 사실 아까 그 애 얼굴을 봤을 때 너랑 처음 만났을 때가 생각났어. 그 애가 너랑 닮아서 이렇게도 신경이 쓰이나 봐.”“나와 닮았다고?”강지혁은 그 말에 눈썹을 꿈틀했다.“얼굴이 닮았다기보다는 눈빛이랑 표정이 그때의 너랑 많이 닮았어. 도무지 아이의 얼굴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얼굴이었어. 그런데 분명히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을 것 같은 얼굴이었는데 자기 누나는 끔찍이 여기더라고. 아마 키 큰 남자애들이 그 여자애를 건드리지 않았으면 그 남자애도 손을 대지 않았을 거야.”“그래?”강지혁은 그 말에 임유진 쪽으로 몸을 가까이 기울였다.“확실히 신경 쓰이고 지켜주고 싶은 누나가 있는 점에서는 나랑 비슷하다고 생각할 수 있겠네.”그 역시 임유진을 마치 자기 목숨처럼 생각하고 있으니까.만약 그날 임유진과 만나지 못했더라면 강지혁은 아마 전과 다를 것 없이 쭉 재미없고 지루한 일상을 반복하며 살아가고 있었을 것이다.그리고 사랑이라는 게,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게 이렇게도 삶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일인지도 영원히 모르고 살았을 것이다.“그렇게 신경이 쓰이면 그 남자애 가족을 찾아내 그 일로 그 애가 벌을 받는다거나 하지 않도록 조치할게.”“정말?”“응. 그러니까 이제 걱
“일전에 의뢰한 임유진 씨의 지난 5년간의 모든 걸 전부 다 알아냈습니다. 분명히 소민아 씨의 마음에 쏙 드는 자료들일 겁니다. 다만 돈을 더 주셔야겠어요.”전화기 너머의 남성이 소민아에게 말했다.“돈을 더 달라니 그게 무슨 소리지?”소민아는 난데없는 돈 얘기에 바로 얼굴을 찌푸렸다.“제가 조사한 사람이 강씨 가문의 안주인이더라고요? 강지혁 회장의 아내에 관한 자료인데 당연히 돈을 더 받아야 하지 않겠어요? 위험수당은 챙겨주셔야죠.”‘6천만 원이나 줬는데 뭘 더 달라는 거야?!’소민아는 이를 꽉 깨문채 최대한 차분한 말투로 물었다.“얼마를 원하는데?”“10억.”소민아는 상대방의 말에 바로 발끈했다.“나한테 넘겨줄 내용이 10억이라는 가치를 하기는 해?!”아무리 조사에 리스크가 있었다고 한들 10억은 너무한 액수였다.“제가 아까도 말했잖아요. 분명히 마음에 쏙 드는 자료일 거라고.”남자는 피식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소민아 씨가 원하는 게 뭔지 제가 맞춰볼까요? 지금의 안주인인 임유진이라는 여자를 내쫓고 자기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싶은 거잖아요. 제가 수집한 자료라면 그 목적을 충분히 이룰 수 있을 겁니다. 일이 잘 풀리면 바로 강씨 가문의 안주인 자리에 앉을 수 있을 텐데 10억 정도면 싸게 가져가는 거 아닌가요?”소민아는 그 말에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사실 10억 정도면 충분히 지불할 수 있는 금액이다. 딸인 소안나가 강씨 가문의 양녀로 들어간 근 2년간 그녀도 자연스럽게 매우 좋은 대우를 누릴 수 있었으니까.일단 매달 정기적으로 받게 되는 용돈만 해도 4천만 원 정도였고 강씨 가문이라는 든든한 뒷배를 이용해 부잣집 자제들을 라이브에 초대해 번 돈만 해도 어마어마했으니까.소민아가 이런 식으로 돈을 번 것에 대해 강지혁은 다 알면서도 여태 모른 척 내버려 두었다. 어쩌면 크게 관심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에게는 푼돈이었으니까.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강지혁이 공개석상에서 임유진의 지위를 확실히 하는 순간부터 소민아의
일단 김재호를 묶어두는 것에는 성공했지만 임유진은 알고 있다. 절벽에서의 일을 아직 얘기할 수 없는 지금은 아무런 증거도 없기에 아이의 일로 아무리 압박해도 김재호가 입을 꾹 닫은 채로 있는 한 그를 유죄로 만들 수는 없다는 것을.물론 그에게 다른 죄목이 있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강문철의 곁을 오랜 기간 지켰던 그이기에 분명히 걸릴 만한 것이 하나쯤은 있을 것이다.임유진은 오늘도 역시 김재호를 만나러 구치소로 향했다. 다만 오늘은 강지혁과 함께가 아닌 혼자였다.김재호는 자리에 앉은 후 그녀가 뭐라고 얘기를 꺼내기도 전에 먼저 입을 열었다.“무엇을 물어보든 제가 해드릴 수 있는 얘기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니 시간 낭비하지 마시고 이만 돌아가세요.”“오늘 김재호 씨를 찾아온 건 고맙다는 인사를 하기 위해서예요.”임유진의 뜬금없는 말에 김재호가 멈칫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고맙다고요?”“네. 절벽에서 떨어진 뒤에 아무리 운이 좋게 숨이 붙어 있었다고 해도 누군가의 도움이 없이는 살아남기 힘들었을 거예요. 나랑 아이들을 구해준 거 김재호 씨 맞죠? 물론 당신이 원망스럽고 밉기도 해요. 당신만 아니었으면 혁이와 5년이나 떨어져 있지도 않았을 거고 기억도 잃지 않았을 것이며 율이와 떨어져 있지도 않았겠죠. 하지만 뭐가 됐든 결과적으로 나와 아이들은 당신 덕분에 목숨을 구했어요.”임유진은 김재호에게 상당히 복잡한 감정을 품고 있었다.“김재호 씨의 최종적인 목적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지만 5년 전에 현이를 혁이 곁이 아닌 내 곁에 둔 것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겠죠. 그리고 그 이유는 분명히 강씨 가문을 위해서일 거고요. 어르신이 생전에 제일 중요하게 여겼던 것이 바로 강씨 가문이니 당신도 강씨 가문을 위해 움직였을 거라고 생각해요.”임유진은 말을 하며 김재호의 표정과 반응을 살폈다.김재호는 가만히 듣고 있다가 입꼬리를 씩 말아 올리며 물었다.“하고 싶은 말이 뭐죠?”임유진은 그를 빤히 바라보며 대답을 해주는 것이 아닌 자기 할 말을 계속했다.
구치소에 나온 후 임유진은 하원 시간까지 아직 2시간이나 남은 것을 확인하고 탁유미의 분식집으로 향했다.분식집 근처에 다다랐을 때 임유진은 또 한 번 지난번에 봤던 검은 승용차를 발견할 수 있었다.해당 차량은 오늘도 탁유미의 분식집이 정확히 보이는 그늘 밑에 주차되어 있었다.임유진은 차량 주인이 이경빈이라는 걸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이경빈은 탁유미와의 모든 오해를 푼 후 그 뒤로 어떤 여자와도 스캔들이 나지 않았고 몇 년 전에는 아예 이강 그룹을 S 시로 거의 옮기다시피까지 했다.그 모든 것이 다 탁유미 때문이라는 걸 임유진은 알고 있다.다만 이경빈이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어떤 일은 이미 엎질러진 물처럼 두 번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다.만약 그때 탁유미를 절벽 끝까지 몰아세우지만 않았어도 이경빈은 어쩌면 지금쯤 탁유미와 잘 지냈을 수 있었을 것이다.임유진은 한숨을 한번 내쉰 후 분식집 안으로 들어갔다.한가한 시간대라 그런지 손님은 한 명도 없었고 탁유미는 의자에 앉은 채 고무줄 팔찌를 만들고 있었다.고무줄 팔찌라면 임유진도 어릴 적 만든 적이 있다.“언니, 팔찌는 왜 만들어요?”임유진이 물었다.“어릴 때 생각나죠? 우리 때나 유행하는 건 줄 알았는데 요즘 애들도 이런 걸 좋아한다더라고요. 그래서 애들 밥 먹으러 올 때 혹시라도 팔 수 있을까 해서 만들고 있어요.”탁유미가 웃으며 임유진에게 의자를 내밀었다.“그런데 여기까지는 웬일이에요?”“지나가던 차에 들렸어요.”임유진은 잠깐 머뭇거리다 조심스럽게 말을 내뱉었다.“아까 여기로 들어오기 전에 이경빈 씨 차량이 세워져 있는 것을 봤어요. 요즘도 계속 찾아와요?”“그래요? 몰랐네요.”탁유미의 얼굴은 담담하기 그지없었다. 꼭 이경빈에 관해서는 아주 조금의 감정도 없는 듯한 그런 느낌이었다.“역시... 아직 이경빈 씨를 용서하지 못하고 있는 거죠? 언니, 그럼 혹시 누굴 만나고 싶다는 생각은 해본 적 없어요? 아직 젊은데 평생 이렇게 혼자일 수는 없잖아요.”임유진의
“응, 말해.”강지혁은 손에 든 서류 자료를 탁자 위에 내려놓으며 임유진과 눈을 맞췄다.“그... 김승수 말이야. 전에 나랑 스승님이 짜고 치고 자기를 감옥살이시켰다고 주장하던 그 사람. 오늘 전화를 한 통 받았는데 김승수가 그 일로 나랑 스승님을 고소했더라고. 사건은 이미 검찰로 송치된 상태야. 아마 조만간 검찰 측에서는 그때 사건이랑 스승님 관련해서 나한테 조사받으러 오라고 연락이 오게 될 거야. 근데... 조사가 시작되면 기자들이 냄새를 맡을 거고 그러면 높은 확률로 헛소문이 돌게 돼. 어쩌면 그 영향으로 GH 그룹에 영향이 갈 수도...”“내가 오해라도 할까 봐?”강지혁이 임유진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물었다.“네가 권건우 변호사를 단지 스승으로서 좋아하고 또 존경하고 있다는 거 알아. 오해 안 해. 라온시에 있을 때 너한테 많은 도움이 되어주신 분이잖아. 회사 걱정은 하지 마. 고작 언론에 흔들릴 정도로 나약한 회사가 아니니까.”강지혁의 말에 임유진은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자신의 일로 강지혁에게 피해가 가는 건 정말 너무 싫었으니까. 또한 그가 뭘 오해하는 것도 싫었고 말이다.“네 곁에는 항상 내가 있어. 그러니까 힘들면 언제든지 나한테 기대.”임유진은 마음 한편이 따뜻해지는 것이 느껴졌다.“그리고...”임유진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다시금 입을 열었다.“화분 떨어질 때 나 구해줬던 사람, 소민준이야.”아마 강지혁이라면 진작 운전기사나 경호원을 통해 보고를 받았을 테지만 임유진은 자기 입으로 이 말을 해주고 싶었다.강지혁이 행여 이상한 생각을 할까 봐.임유진은 강지혁이 의심이 많고 다른 사람보다 많이 예민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최대한 사소한 것도 놓치지 않고 그를 안심시키려고 하고 있다.“알아.”강지혁은 탁자 위에 내려놓은 서류 자료를 다시 집어 임유진에게 건넸다.“볼래? 소민준에 관한 자료야. 꽤 힘들게 살아온 것 같더라고.”임유진은 그 말에 별다른 고민 없이 바로 자료를 건네받았다.자료 안에는 소민준의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역시 부끄러워 임유진은 얼른 다른 핑계를 댔다.“밥, 밥마저 먹어야지. 너 아직 다 안 먹었잖아.”“알았어.”강지혁은 그 말에 그제야 손을 풀어주며 다시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손은 계속 아팠어?”“전이랑 같지 뭐. 날씨가 추워지면 통증이 좀 느껴져.”“소영훈 선생한테 다시 찾아가서 봐달라고 할까?”강지혁의 입에서 소영훈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임유진은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소 선생님을... 기억해?”강지혁은 그 말에 잠깐 멈칫하더니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응, 며칠 전에 과거 기억이 조금 돌아왔어.”“기억이 났어?”임유진이 흥분한 얼굴로 물었다.“많이는 아니고 아주 조금만.”흥분한 임유진과 달리 강지혁은 꽤 담담한 얼굴이었다.“내가 기억을 다 회복했으면 좋겠어?”“그야 당연히...”임유진은 말을 하다 말고 갑자기 멈칫했다.강지혁이 예전 기억을 되찾는 게 과연 좋은 건가?만약 그녀가 절벽에서 떨어졌던 일까지 모두 떠올리게 되면, 강문철이 그의 등에 칼을 꽂았다는 걸 알게 되면 강지혁은 어떻게 되는 거지?혹 정신 상태가 불안해지는 건 아닐까?임유진은 이와 같은 생각에 말하는 것을 주저하며 입술을 깨물었다.그러자 강지혁이 그녀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응?”“혁아, 나는 네가 행복하기만 하면 돼. 기억 같은 건 전혀 중요하지 않아.”임유진은 그 언젠가 강지혁이 모든 기억을 되찾은 그 날, 강문철 때문에 평생 속에 남을 응어리는 만들지는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그들이 이렇게 된 건 모두 강문철 때문이니까.만약 5년 전 그날 강문철이 그 모든 걸 계획하지 않았으면 강지혁과 그녀는 그 오랜 시간 동안 서로를 잃지도 않았을 것이고 행방불명된 나머지 한 아이를 지금껏 찾지 못하지도 않았을 것이다.임유진은 아이 생각에 갑자기 마음이 가라앉으며 우울해졌다.“나 지금 행복해.”강지혁이 말했다.“너는 어떤데? 너는 내 곁을 떠났을 때의 기억을 되찾고 싶어?”“글쎄. 솔직히 말하면 기억을 되찾는
강지혁은 수저를 들고 그녀가 해준 음식을 하나둘 입에 넣었다.분명히 흔히 볼 수 있는 가정 요리고 손에 들고 있는 것도 포크나 나이프가 아닌 그저 숟가락과 젓가락일 뿐인데 상대가 강지혁이라 그런지 꼭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에서 식사하고 있는 것 같았다.임유진은 원래 강지혁이 밥을 다 먹은 뒤에 오늘 있었던 일을 얘기하려고 했다. 하지만 강지혁이 밥을 먹으며 먼저 선수를 쳐버렸다.“오늘 하마터면 떨어지는 화분에 다칠 뻔했다는 얘기 들었어. 무사해서 다행이야. 내일부터는 경호원을 두 명 더 붙여줄게.”임유진은 그 말에 눈을 두어 번 깜빡이며 어리둥절해 하다 이내 남편이 강지혁이라는 것을 깨닫고 납득했다는 표정을 지었다.아마 일이 터지고 5분도 안 돼 바로 강지혁에게 보고가 들어갔을 테니까.“응, 알겠어.”임유진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누가 화분을 떨어트린 건지 알아봐 달라고 했어. 아직 따로 연락이 오지는 않았지만.”“청소부가 한 짓이야.”“청소부?”임유진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벌써 조사를 마쳤어?”“당연한 거 아니야? 네 일인데.”만약 임유진의 몸에 생채기라도 났으면 강지혁은 아마 이성을 잃고 건물 전체를 폭파하고 관계자들까지 다 처리해버렸을 것이다.강지혁은 갑자기 젓가락을 내려놓더니 임유진의 양손을 덥석 잡았다.그녀의 손가락은 여전히 삐뚤빼뚤했다.임유진의 손을 이렇게 만든 사람은 진세령이고 소민준은 당시 진세령의 곁에서 가만히 구경만 했다.강지혁은 임유진의 손을 매만지다 문득 1시간 전에 봤던 청소부의 피범벅이 된 두 손을 떠올렸다.그는 다른 사람의 손은 피가 나든 잔인하게 잘리든 아주 조금의 연민도 들지 않았다. 하지만 임유진의 손은 볼 때마다 가슴이 아프고 또 울컥했다.“왜? 왜 그렇게 봐?”임유진은 강지혁이 손가락을 뚫어지게 보는 게 불편한지 손을 뒤로 빼며 거두어들이려고 했다.그녀 역시 다를 것 없는 여자라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자신의 좋은 것만 보여주고 싶었다.“내 손 안 예뻐... 보지 마.”임유진의 손
“그래...”강지혁이 낮게 읊조렸다.“그래야 할 거야.”고이준은 저도 모르게 소민준이 매우 가엽게 느껴졌다. 만약 임유진이 정말 소민준을 동정하면 그때는 지금 하고 있는 택배 기사 일도 못 하게 될지도 모르니까.“고 비서, 누가 저 여자한테 돈을 쥐여주고 유진이를 해할 계획을 세운 건지 알아내.”강지혁이 차가운 목소리로 지시했다.“네, 회장님.”고이준이 얼른 답했다.“그리고 S 시에서 제일 실력 좋은 변호사를 고용해서 유진이와 권건우 변호사 고소 건에 붙여. 김승수한테 지시를 내리는 다른 누군가가 있는 건 아닌지도 한번 알아보고.”고이준에게 김승수의 뒷조사를 맡긴 건 이유가 있었다.임유진이 강지혁의 와이프고 현 강씨 가문의 유일한 안주인인 걸 알고도 고소를 한 건 누가 봐도 이상했으니까. 상식적인 인간이라면 강씨 가문을 상대로 덤빌 리가 없다.게다가 김승수가 억울하다는 당시의 사건을 강지혁도 한번 훑어봤지만 임유진의 말대로 증거가 확실했고 결과 역시 납득 가능한 결과였다.즉 그렇다는 건 김승수에게 다른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또 혹은 김승수를 뒤에서 조종하고 있는 누군가에게 다른 목적이 있을 수도 있고 말이다.하지만 이유가 뭐가 됐든 임유진을 건드린 이상 강지혁이 손을 놓고 있을 리가 없다. 그에게는 임유진이 목숨줄과도 같은 존재니까.“네, 알겠습니다.”임유진이 강지혁에게 있어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고이준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다만 요즘 따라 부쩍 이상한 위화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임유진을 대하는 강지혁의 태도가 꼭 기억을 잃기 전의 강지혁 같았기 때문이다. 꼭 기억을 다 되찾은 것처럼 말이다.강씨 저택.강지혁은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가 마침 임유진과 두 아이들이 거실에서 동요에 맞춰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현이는 흥분한 건지 얼굴이 빨개진 채로 깔깔거리며 춤을 추고 있었고 무뚝뚝하던 율이도 볼을 살짝 붉히며 어색하게 몸을 좌우로 흔들고 있었다.몸만 보면 썩 내키지 않아 하는 것 같지만 미소를 띠고
강지혁은 여자를 무섭게 노려보더니 이내 곁에 있는 경호원에게 지시를 내렸다.“두 번 다시 손에 뭘 들 수 없게 만들어놓고 경찰에 넘겨.”“네, 알겠습니다.”청소부는 그들의 대화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버렸다.‘지, 지금 내 손을 부러트리려는 건가?’그녀는 이런 무서운 인간을 만날 줄 알았으면 차라리 경찰에게 잡히는 것이 더 나았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안 그럴게요! 제가... 제가 알아서 경찰서로 가서 자수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제발...!”하지만 간절한 그녀의 부탁에도 강지혁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더 얼굴이 차가워지기만 할 뿐이었다.사실 청소부는 양손만 부러지는 것에 감사해야 한다. 만약 그녀가 던진 화분으로 임유진이 큰 상처를 입었으면 그때는 양손은 물론이고 몸 전체가 너덜너덜해진 채 죽으니만 못한 삶은 살았을 테니까.“으아아악!!”그녀의 절규와 함께 강지혁은 유유히 현장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고이준도 곧바로 그의 뒤를 따라나섰다.바로 앞에 세워진 차량에 올라탄 후 고이준은 곧바로 강지혁에게 자료 하나를 건넸다.“소민준 씨의 지난 5년간 행적입니다. 몇 년 전부터 배달 기사 일을 하는 것으로 확인이 됐고 오늘은 우연히 건물 앞을 지나가다 사모님을 구한 것으로 보입니다. 사모님께서는 감사의 뜻으로 소민준 씨를 병원에 보냈고 손목 골절로 인한 치료 비용을 전액 다 부담해주셨습니다.”강지혁은 어둡게 가라앉은 얼굴로 수중의 자료를 훑어보았다. 차 안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얼음장 같았다.“참 기막힌 우연이야. 안 그래?”그때 줄곧 입을 다물고 있던 강지혁의 입에서 뜬금없는 한마디가 흘러나왔다.“네... 네.”고이준은 식은땀을 흘리며 룸미러로 강지혁의 눈치를 봤다. ‘혹시 소민준이 사모님을 구해준 것에 질투라도 하는 건가...?’“CCTV는?”“네, 여기 있습니다.”고이준은 얼른 휴대폰을 꺼내 경호원이 보내준 CCTV 영상의 일부를 틀어 강지혁에게 건넸다.영상 속 소민준은 화분이 떨어짐과 동시에
경비원은 그 말에 시선을 내려 바닥에 떨어진 산산조각이 난 화분을 보고는 그제야 얼른 손을 놓아주었다.임유진은 경호원에게 소민준의 손목을 봐달라고 했고 경호원은 알겠다며 그의 손목을 자세히 살폈다.“사모님, 아무래도 골절인 것 같습니다.”“그럼 지금 당장 병원으로 데려가 치료를 받게 하세요.”“네, 알겠습니다.”그때 휴대폰이 울렸고 임유진은 경호원에게 가보라는 손짓을 한 후 이내 전화를 받았다.무슨 얘기를 들은 건지 그녀는 전화를 받은 지 얼마 안 돼 곧바로 심각한 얼굴을 했다.“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통화를 마친 후 임유진은 건물이 아닌 법원으로 향했다.잠시 후, 임유진이 법원에서 나왔을 때 마침 소민준을 병원으로 데려간 경호원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검사를 받아본 결과 다행히 심각한 상처는 아니고 한 달 정도면 완전히 회복될 거라는 내용이었다.“알겠어요. 치료비는 다 제가 책임진다고 하고 혹시 다른 무언가의 보상을 원하면 저한테 따로 연락 주세요.”“네, 사모님.”임유진은 전화를 끊은 후 휴대폰을 집어넣는 것이 아닌 권건우에게 전화를 걸었다.“스승님, 죄송해요. 아무래도 당분간은 좀 시끄러워질 것 같아요.”“들었다. 김승수가 우리 둘을 고소했다지? 걱정할 것 없어. 우리는 그 사건에 한 점 부끄럼 없이 임했으니까. 그보다 요즘 인터넷에 떠드는 루머 말인데 나야 다 늙어서 그런 건 전혀 신경이 안 쓰인다고 하지만 너는 남편과 재회한 지도 얼마 안 됐는데...”“걱정하지 마세요. 혁이는 스승님과 제 사이 오해 안 해요.”임유진의 말에 권건우는 안심한 듯 미소를 지었다.“그럼 다행이고.”그날 저녁, 임유진이 집에 돌아오자마자 집사가 다가와 말했다.“회장님은 오늘 일 때문에 조금 늦으신다고 먼저 아이들과 식사를 하시라고 하셨습니다.”“네, 알겠어요.”임유진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들과 밥 먹을 준비를 했다. 일 때문에 늦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그 시각, 강지혁은 냉기를 풍기며 차가운 시선으로 눈앞
“위험해!”등 뒤로 누군가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임유진은 미처 상황을 파악하지도 못한 채 누군가의 품에 안겨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녀를 구해준 누군가는 쓰러지는 그 순간에도 양손으로 그녀를 지켜주고 있었다.“사모님!”“사모님!”다급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경호원과 기사들이 큰소리로 외치며 다가왔다.임유진은 그들의 소리에 그제야 정신을 차렸고 경호원의 부축으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난 괜찮아요.”그녀는 말을 마치고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고개를 숙인 채 자리에서 일어나며 몸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내는 남자를 바라보았다.“괜찮으세요?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임유진은 말을 하다가 남자가 고개를 드는 것을 보고 저도 모르게 흠칫하며 말을 멈추고 말았다.그녀를 구해준 건 다름 아닌 소민준이었다.소씨 가문의 장남이자 한때는 그녀의 남자친구였으며 진세령의 약혼자이기도 했던 그 소민준 말이다.하지만 지금의 그는 5년 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색이 다 바랜 낡아빠진 옷에 더러운 운동화, 세월을 정통으로 맞은 것 같은 얼굴에 새치 가득한 머리까지, 지금의 그는 도무지 30대 중반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그래도 한때는 상류층에 있었던 사람인데 지금은 일반 시민도 아닌 제일 아래 계층에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고개를 든 소민준은 눈앞에 있는 사람이 임유진이라는 것을 보고는 마찬가지로 조금 놀란 듯 움찔했다. 그러고는 곧바로 쓴웃음을 지었다.“너였구나.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다는 기사를 봤어.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너...”임유진은 뭐라 말을 하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소민준은 당시 그녀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줬고 그녀가 절망의 끝에 자살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궁지까지 몰아붙였으며 두 번 다시 사랑 같은 건 하고 싶지 않게끔 만들어놓기도 했다.아마 강지혁이 아니었다면 임유진은 지금도 여전히 과거의 상처에 매달려 스스로를 고립시키며 살았을 것이다.하지만...하지만
직장 동료들은 한지영에게 위로를 건네며 은근히 그녀에게 잘 보이려는 듯한 말투로 얘기했다.심지어 어떤 사람은 아예 대놓고 그녀에게 백연신과의 사이를 묻기도 했다.“그럼 지영 씨는 백연신 씨랑 다시 만나는 거예요?”“그날 기자들 무리에서 지영 씨 손을 덥석 잡고 차로 끌고 가는데 내가 다 설렜지 뭐예요? 완전 현실판 왕자님 아니에요?”“그럼 앞으로 지영 씨를 뭐라 불러야 하나?”“백연신 씨가 회장님이니 당연히 회장 사모님 아니겠어요?”한지영은 직원들의 태도가 바뀐 게 전부 백연신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다. 이런 상황을 처음 겪는 것도 아니었으니까.“아니요. 백연신 씨와는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그러니까 괜한 추측은 하지 말아주세요. 그리고 저, 사귀는 사람 따로 있어요.”한지영은 차가운 목소리로 대꾸했고 이에 사람들은 어색하게 웃으며 서로 눈빛을 주고받더니 금방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옆에서 떠드는 사람들이 없으니 이제야 살 것 같았다.어제 집으로 돌아갔을 때 백연신은 끝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그저 경호원을 통해 그녀에게 전언만 남겼다.“회장님께서 더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앞으로도 쭉 전과 같이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하셨습니다.”전과 같다는 건 백연신 역시 더는 그녀 앞에 나타나지 않을 거라는 건가?한지영은 그 생각에 갑자기 울컥하며 눈물이 차오르려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는 곧바로 다시 마음을 다잡으며 스스로에게 되뇌었다.이건 자신이 바란 거라고, 그러니 아무것도 슬퍼할 것 없다고 말이다.‘그래, 잘 된 거야. 이게 제일 좋은 결말이야. 증오도 없고 더 이상의 미움도 없는... 그냥 좋은 추억만 간직한 지금이 제일 좋은 끝이야.’다시 그와 연인이 되었다가 또다시 고난에 부딪혀 헤어지게 되면 그때는 완전히 원수지간이 될지도 모르니 차라리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는 게 백배는 더 나았다.한지영은 더 이상 백연신과 함께 할 용기가 없었다. 아무리 그가 사랑을 외쳐도 아무리 줄곧 그녀만 사랑해왔다고 해도 이제는 그 마음을
연우진은 그 어느 날 자신이 백연신의 질투 대상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지영 씨한테 마음이 남은 거라면 내가 아닌 지영 씨와 얘기를 하세요.”연우진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그리고 내가 지영 씨와 만나고 싶다고 해도 지영 씨가 받아주지 않으면 함께 하지 못해요. 이건 백연신 씨도 마찬가지고요. 백연신 씨가 여전히 지영 씨를 좋아한다고 해도 지영 씨가 받아주지 않으면 두 사람 역시 함께 못해요. 선택권은 지영 씨한테 있으니까.”백연신은 주먹을 말아쥐며 다시 물었다.“지영이와 만날 건지에 대한 대답만 해.”연우진은 한숨을 한번 내쉬었다. 아무래도 대답을 해주지 않으면 순순히 보내주지 않을 듯하다.“지영 씨는 좋은 사람입니다. 이대로 감정이 싹트면 나로서는 당연히 지영 씨와 함께하고 싶겠죠.”“한지영의 곁에 있을 수 있는 남자는 모든 걸 다 내어줄 수 있을 정도로 한지영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면 안 돼.”백연신이 경고하듯 낮게 읊조렸다.“어째 내가 모든 걸 다 내어줄 정도로 한지영 씨를 사랑하지 않으면 우리 둘이 함께하는 걸 방해하겠다는 얘기로 들립니다만?”연우진의 질문에 백연신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냉랭하고 차가운 눈빛을 보면 그 대답이 뭔지 알 수 있을 것도 같았다.“백연신 씨는 지영 씨를 위해 모든 걸 다 내어줄 수 있습니까? 그 정도로 사랑한다면 여기서 나한테 이러지 말고 다시 한번 지영 씨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을 해보는 게 어떨까요?”백연신은 그의 말이 끝난 순간 갑자기 손을 뻗어 연우진의 멱살을 잡았다. 그러고는 이대로 갈기갈기 찢어버릴 듯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너는 아무것도 몰라. 나라고...”하지만 그는 말을 다 잇지 못했다. 또한 멱살을 잡았던 손도 힘없이 풀었다.질투와 분노로 가득했던 눈동자가 한순간에 어둠에 잠겨버린 듯 시들어졌다.“한지영한테 잘해. 만약 지영이한테 상처를 주면 그때는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다는 게 뭔지 똑똑히 알려주지. 내 말 허투루 듣지 마.”말을 마친 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