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작부, 품하헌(品荷轩).초약란은 책상에 앉아 정성을 다해 서예 필사 연습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엔 하녀 둘이 수틀을 든 채 한참 자수에 매진 중이었다. "아가씨, 다섯째 아가씨께서 오셨습니다!"문 밖에 있던 하녀가 다급히 알렸다.그러자 초약란은 서둘러 붓을 내려놓고, 옆에 놓인 수틀을 들며 의자에 앉았다. 마치 자신도 지금까지 자수를 놓고 있는 듯이 위장한 것이다. "어머, 어쩐 일이야? 어서 와서 앉아."초약란이 피곤한 듯 눈을 비비며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초희옥은 그 모습을 힐끔 쳐다보고는 속으로 조소를 날렸다. 공기중에 은은히 베어 있는 먹냄새를 느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듯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둘째 언니, 요즘 제 자수까지 놓느라 고생이 많아요. 그런데 어쩌죠... 또 부탁할 일이 생겼는데. 제가 요즘 이래저래 챙길게 많아가지고 은자가 바닥났네요. 그래서... 좀 빌려주실 수 있죠?""...어?"그 말에 초약란은 순간 당황한 얼굴이 되었다. 그 자존심 높은 초약란이 자신한테 은자를 빌리러 오는 날이 올 거라곤 전혀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다. "그게... 나도 가진 게 별로 없어. 그런데 무슨 일로 은자가 필요한데?"초약란이 친철함이 담긴 목소리로 물었다."많이 필요한 게 아니라면, 내가 아는 전당을 소개해줄 게. 거기서 바꿔보는 건 어떠니?"하지만 초희옥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녀는 한껏 억울하고 슬픈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요즘 옥 팔찌 하나 사려면 스무 냥을 줘야 하더라고요. 언니, 제가 그동안 언니한테 준 옥팔찌만 해도 열개는 넘지 않아요? 그것도 그냥 달라는 것도 아니고, 좀 빌려달라는데...."그 말에 초약란의 얼굴이 민망함에 빨갛게 달아올랐다. 지금 손목에 차고 있는 옥 팔찌조차 초희옥이 준 것이기 때문이다."그럼, 그럼. 네가 나한테 해준 게 얼마인데, 이 정도도 못해줄까? 내가 비록 한 달에 예은(例银)으로 다섯 냥 밖에 못 받긴 하지만, 20냥 정도라면 모아둔 것
진현은 산과 물이 가까운 경치 좋은 도시지만, 동시에 성경과 가깝기도 해서 늘 활기차고 번화했다.육희지는 서쪽 끝 한 어귀에 넓고 한적한 집 한 채를 빌렸다. 이미 가구와 집기들이 모두 갖추어진 곳이었기에 연세에 50냥을 쓰고도 10관이 남았다. 사실 혼자였다면 초가집 하나면 충분했을 것이다. 하지만 초혁도 함께 살 집인데, 이 정도는 돼야 한다고 판단해 결정한 장소였다. 초희옥은 넓은 안채과 별당, 그리고 정원 가득 자란 대나무들을 보며 마음이 놓였다. '그래 이 정도는 돼야, 두 사람에게 어울리지.'이번만큼은 반드시 초혁과 육희지가 넉넉한 삶을 살게 해주리라 그녀는 다짐했다. "육 오라버니, 저 잠깐 나갔다가 올 일이 있어서 혁이 좀 부탁드릴게요. 혹시 누가 물으면 그냥 시내 구경 갔다고 둘러대 주시고요."하녀들이 분주히 집안 곳곳을 채워 넣고 정리하는 모습을 보며 초희옥이 말했다. 곧바로 알아들은 육희지는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초혁의 옆을 지켰다. 그렇게 초희옥은 석무 한 명만 데리고 조용히 자리를 빠져나왔다.얼마 지났을까, 그녀의 눈에 익숙한 길이 나왔다. 남쪽 큰길 어귀 골목으로 들어서는 길이었다. 그 골목 안으로 들어가보니 간판에 전(钱)자가 붙은 큰 저택이 나왔다. "전씨 집안 팔자도 참... 어쩌다가 조상이 쌓은 복은 다 날리고, 저런 자식이 남았을까...""그래 말이야, 학문으로 명성이 자자했던 집이 어쩌다가 저런 도박꾼이 나왔는지..."이때, 남자 몇명이 혀를 차며 도자기, 옥석 등 값비싼 물건들을 저택에서 들고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곧이어 초희옥도 저택 문 앞에 도착했다. 그러자 눈 밑에 시커먼 그림자가 드리운 한 청년이 비틀거리며 나왔다."뭐, 물건이라도 사러 오셨어?"그는 진현에서 소문난 망나니, 도박에 미쳐 아버지가 돌아신 뒤 하루가 멀다고 집안 재산을 팔아 치웠다.환생하지 않았더라면 초희옥은 몇년 뒤에 되서야 이 집에서 헐값으로 나온 고서들을 뒤지게 되었을 것이다. 물론 그것 마저도 거의 곰팡이가 쓸
그 말에 망나니 공자는 의아했지만, 큰 망설임없이 수락했다."좋아요. 이 이정도쯤이야..."그도 그럴 것이 볼품없는 진흙 도자기 인형 따위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흥정은 끝났고, 그는 고서 몇개에 진흙 인형 하나 얹혀 주는 것으로 스무 관이나 번 것을 기뻐했다.초희옥은 스무 관의 가치와 같은 은자 20개를 망나니에게 건넸다. 그런 다음, 고서들을 곱게 감싸 석무에게 넘기고 자신은 마당 구석에 놓여 있는 도자기 인형을 가지러 가던 찰나였다.그런데 이때, 좀 전까진 비어 있던 마당에 한 인물이 들어섰다. 그리고는 바닥에 놓여 있던 도자기 인형을 들어올리며 무심히 말했다. "이건 얼마입니까?"그는 인형의 무게가 조금 이상하다는 것을 발견했다.그 목소리를 들은 초희옥은 단번에 그를 알아보았다.아름다운 구름 무늬가 새겨져 있는 넓은 소매의 장삼(长衫), 허리엔 운(云)자가 새겨져 있는 고급 백옥, 정갈한 이목구비에 서늘하게 느껴질 정도로 하얀 피부... 마치 높은 봉우리에 핀 꽃처럼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를 가진 소유자, 운진(云榛)이었다.게다가 그는 조황서원의 최연소 학사(学士)이자, 천하 제일 거문고 명인, 불음관(拂音馆) 관주, 대성 최고의 인기남, 수많은 여식들의 꿈속 연인... 셀 수 없는 수식어가 붙어 있는 인물이었으며, 신황과 영왕 모두가 탐내는 중립에 있는 강북 사대 세가의 수장 운씨 가문의 소가주이기도 했다. 하지만 가장 그를 유명하게 만든 건, 한 번 본 사람은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는 치명적인 매력에 있었다. 그래서 항상 어디 갈 때면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몰래 다니곤 했었다. "공자님, 역시 안목이 대단하시네요! 이 인형, 저희 집 가보입니다. 명인이 고급 진흙으로 직접 구워 낸 거예요."새로운 손님이 나타나자 망나니 공자는 아주 기다렸다는 듯이 침을 튀기며 밑밥을 깔기 시작했다. "원래 팔 생각이 없었는데, 공자님께서 원하신다면... 어쩔 수 없죠. 대신, 가격은 잘 쳐주셔야 합니
초희옥은 진흙 도자기 인형을 품에 안은 채, 만족스러운 얼굴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이때, 또 누군가가 그녀를 불러 세웠다. 좀 전에 운진 옆에 있던, 연한 송화빛 자수가 새겨진 도포를 걸친 청년이었다. 그 또한 운진에 비할 바는 못 됐지만, 꽤 호감이 가는 준수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소저, 잠시만요!"초희옥은 그가 좀 전까지 운진과 함께 있던 청년이라는 것을 떠올리고, 경계 어린 표정으로 걸음을 멈췄다."무슨 일이죠?""아, 오해 마세요. 운진 형님께서 오늘 아가씨의 식견에 감탄하셔서, 혹시... 어디 가문에서 오신 건지 여쭤봐도 될까요?"청년은 이 말과 함께 정중히 자신의 신분도 밝혔다."저는 강북의 장회(姜淮)라고 합니다. 녹명서원에서 학문을 배우고 있고요. 그러니 안심하셔도 됩니다."강북의 사대세가 중 하나인 장씨, 거기다 운진과 가까운 사이라면 만만한 신분이 아닌 것 같았다.하지만 초희옥은 단호히 말을 잘랐다."겨우 한번 본 인연인데, 굳이 제 신분까지 밝힐 이유는 없는 것 같네요."단호한 거절에 장회는 순간 멍해졌다.운진의 이름이 통하지 않는 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볼 게요.""잠시만요! 이 초대장... 혹시 관심이 있으면, 꼭 좀 들려주세요."장회가 다급히 초대장을 내밀며 말했다.거기에 적혀 있는 불음관, 초희의 눈빛이 잠시 빛났다.그녀는 어떤 인물들이 이곳에 참석했던지 떠올렸다. 이것은 기회였다. 초희옥은 조심스레 초대장을 받아들인 뒤,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고맙습니다."그리고는 석무와 함께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운진 형님, 제가 방금 저 소저한테 가문을 물었더니, 아는 체도 안 하더라고요. 분명 형님이 누군지는 아는 눈치던데, 아무렇지 않아 하다니... 정말 특이한 것 같아요."하지만 운진은 별 반응 없이 조용히 청화자기를 감상할 뿐이었다. 그저 보물 하나를 먼저 알아본 이에게 건넨 초대장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의 다른 뜻은 없었다."다음 감정회 때, 만약 저 소
말발굽 소리가 또각또각 울려 퍼졌다.한 대의 마차가 선천산의 험한 산길을 돌고 돌며 힘겹게 나아가고 있었다.초희옥은 창밖으로 쏜살같이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그런 그녀의 눈가에 불안한 기색이 스쳤다.연화 원년, 섭정왕이 진현을 순행하던 도중, 함께 데려간 호랑이 대귤이가 선천산에서 사냥꾼 두 명을 물어 죽인 일이 있었다.수백 명의 마을 사람들이 연명으로 탄원서를 올려 그 악독한 호랑이를 죽여 달라 청했고, 그 탄원은 결국 경성까지 올라갔다.하지만 섭정왕은 끝까지 그 호랑이를 감쌌다.맹수에게 사람을 죽이게 했다며 그의 악명은 세상에 널리 퍼지게 되었고, 그 사건은 그가 저질렀다 전해지는 수많은 악행 중에서도 가장 굵은 붓으로 그려진 치욕으로 남았다.“매부리절벽 거의 다 왔어?” 초희옥이 채근하듯 물었다.석호가 말채찍을 휘두르며 앞쪽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소저, 안심하십시오. 저기 산 절벽이 매부리처럼 휘어 있지 않습니까? 저 곳이 틀림없습니다.”매부리절벽.전설처럼 전해지는, 사냥꾼 두 명이 죽었다는 그곳.당시 그 사건은 온갖 소문이 떠돌며 진실이 무엇인지 알 수 없을 정도였고, 초희옥 역시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알지 못했다.하지만 단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었다.‘대귤이는 결코 함부로 사람을 해칠 그런 짐승이 아니야. 이 일에는 분명 수상한 구석이 있어!’“어? 소저, 저 앞에 누가 있습니다! 호랑이도 있는 것 같고… 대, 대귤이입니다!”석호가 숨을 들이쉬며 외쳤다.초희옥은 재빨리 외쳤다.“어서 달려가라!”…“도끼랑 장뇌초가 역시 효과가 있긴 있구먼. 봐, 정신이 몽롱해졌잖아…”왜소한 체격의 소년이 직접 만든 활을 들어 대귤이를 향해 조준했다.“오늘 이 악독한 호랑이를 죽여서 백성의 해악을 없애자! 그 간신이 이장님 다리까지 분질렀으니, 우린 그놈의 호랑이를 죽여 복수하는 거야!”피부가 검게 그을린 또 다른 소년이 도끼를 들고 호랑이의 목덜미를 향해 내리치려 했다.언제나 위풍당당하고 예민하던 대귤
이렇게나 못돼 먹을 수가…처음부터 노리고 있던 게 분명하다. 완전히 작정하고 덮어씌운 것이다.전생의 소문엔 대귤이가 상처를 입었다는 말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사람들은 모두 사나운 호랑이가 사람을 물어 죽였다고만 여겼고, 그건 맹수의 본성이라고 생각했다.실상은 사람이 호랑이를 죽이려다 도리어 물려 죽은 것뿐인데 말이다.‘죽어도 싸지!’‘왜 대귤이가 그놈들 목숨값을 대신해야 하는데?’"아무 아재, 때려버려!"초희옥은 주먹을 꽉 쥐며 이를 악물었고, 얼굴은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예!"석무는 단 한 마디도 덧붙이지 않고 그대로 두 사람을 거칠게 내리쳤다.…"우우——"대귤이는 낮게 신음을 내뱉더니, 눈빛이 점점 맑아졌다.초희옥을 바라보며, 마치 그녀를 알아본 듯한 눈빛으로 억울한 아이처럼 커다란 머리를 그녀의 뺨에 슬쩍 부비더니, 다시 두 사냥꾼을 향해 으르렁거렸다."대귤아, 저들이 널 건드리긴 했지만… 그래도 사람을 물어 죽이면 안 돼. 네 주인에게 큰 화가 돼."초희옥은 손을 뻗어 대귤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달랬다.물론 대귤이가 알아들을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다.하지만 적어도 두 놈이 맞고 있는 건 대귤이에게도 보일 테니까, 분명 알아볼 것이었다.이젠 물지는 않겠지…"죽일 테면 죽여봐라! 퉤! 간신이랑 한패인 년이, 별수 있나?""그래, 독한 년! 죽을 각오쯤 했어! 찡그리는 순간부터 사내도 아닌 거지!"두 소년의 뼈는 단단했다. 맞아가면서도 욕설은 멈추지 않았다.초희옥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닿았다.간신? 그 말은 아마 섭정왕을 가리킨 것일 것이다.보아하니 그들도 대귤이가 섭정왕부의 호랑이라는 것도 알고 있는 모양이다.단지 호랑이 가죽이 탐나서 사냥한 게 아니었다."대귤이는 너희를 해치지 않았다. 먼저 칼을 든 건 너희야. 그러니 내가 지금 대귤이를 대신해 너희를 때리는 건 당연한 일이지. 감히 사내대장부를 운운하지 마라. 죽고 싶으면 그냥 절벽에서 뛰어내려. 이 손으로 너희를 죽이는 건… 내 손 더럽히는 짓일
“현령이 한 사람당 한 마지기밖에 안 준다고 했다고? 그건 분명 섭정왕이 꿀꺽한 거야!”화살이 발끈하며 외쳤다.초희옥의 눈빛이 살짝 어두워졌다.그렇다.전생에 그 마을 사람 백여 명이 연명으로 상소를 올렸다.이는 섭정왕이 백성들의 이주 보상용 토지를 빼돌렸다고 고발한 것이고, 두 의로운 청년이 이에 분개해 반발하니 그 대가로 그가 호랑이를 풀어 물어 죽였다는 소문이 돌았다.하지만 나중에 그 일은 진현의 현령과 호부 주사가 짜고 벌인 일이었다는 진상이 밝혀졌다. 윗사람을 속이고 아랫사람을 누르며 몰래 착복한 것이었다.그러나 아무 소용 없었다.지금은 당쟁이 격렬했고, 섭정왕과 호부 주사는 모두 신황제파였다.사람들은 입을 모아 섭정왕이 졸을 버려 장수를 보존했다고 말했다.이 누명은 끝내 섭정왕에게 씌워진 채로 남았다.“너희는 섭정왕을 오해하고 있는 듯 하다.”“너야 당연히 두둔하겠지! 같은 패거리잖아!” 화살이 쏘아붙였다.초희옥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그게 바로 첫 번째 오해야. 나는 권력도 배경도 없는 그저 평범한 규수일 뿐이지. 그런 내가 어떻게 섭정왕과 같은 당파가 되겠니?”“둘째, 고작 현령 따위가 무슨 자격으로 섭정왕의 뒷배가 되겠어?”“셋째, 그 사람은 돈이 많아. 게다가 돈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걸 즐기는 사람이지. 돈으로 해결될 일은 일로도 취급하지 않아. 물론, 그가 부정부패를 저지르지 않는다고 장담하진 못해. 하지만 고작 이주 보상용 밭 몇 마지기? 음…”“너희는 그 왕야를 너무 가난하게 본 거다. 그는 백성 밥그릇에 든 찬밥 한 숟가락이나 탐낼 사람이 아니야. 그는 고기만 먹지.”선천산이야말로 그가 노리는 고기였다.두 사람은 초희옥의 말에 얼떨떨해져 멍하니 있었다. 전부 다 이해하지는 못한 듯 했다.하지만 어쩐지 그녀의 말이 제법 그럴듯하게 들렸다.“내가 이렇게 길게 말한 이유는 너희가 섭정왕을 직접 마주하게 됐을 때, 진실을 말하길 바라기 때문이다. 그래야 진짜로 마을 사람들을 도울 수 있어. 이런 식으로
너무 궁지에 몰아넣지만 않았어도, 그 녀석이 사람을 물어 죽이는 일 따위는 없었을 것이다.전생에 그 녀석이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는지 모른다…그래도 이번엔 가벼운 상처로 끝나서 정말 다행이다.석호는 멍한 얼굴이었다.‘소저는 이름도 남기지 않았고, 그 두 사냥꾼 역시 소저의 얼굴을 본 적이 없는데, 섭정왕이 어떻게 그게 소저라는 걸 알 수 있을 거라는 말인가?’…초희옥이 떠난 뒤, 대귤이는 두 사냥꾼을 향해 한 번 으르렁거리더니 산림 속으로 몸을 숨겨 자신의 주인을 찾아 나섰다.그 시각, 섭정왕은 진현 최대의 주점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진현 현령은 그의 곁에서 아부에 바빠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이번 선천산 징발 건은 호부 주사 호대귀가 주관하고, 도찰원 도어사 범렴이 보좌한 사안이었다.비록 명의상은 섭정왕의 건이었지만, 그가 진현에 친히 모습을 드러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현령 역시 설마 자신이 직접 그 얼굴을 뵙게 될 줄은 몰랐다.소문에 따르면 섭정왕은 재물을 탐하고, 색을 밝힌다고 했다.그래서 잠시 뒤 갓 기년을 넘긴 자신의 딸을 불러 섭정왕을 모시게 할 생각이었다.만약 섭정왕의 눈에 들어 첩실로라도 들여진다면, 그야말로 벼락 출세 아니겠는가!“어흥!”낮게 깔린 한 차례 포효와 함께, 화려한 무늬의 거대한 호랑이 한 마리가 번개처럼 튀어나오자, 진현 현령은 비명을 지르며 철푸덕 주저앉더니 온몸을 부르르 떨며 바닥을 굴러 도망치듯 뒷걸음질쳤다.세상에!섭정왕이 저 흉물을 정말 데려온 거란 말인가!“밖에 놀러 나간다더니, 이렇게 금방 돌아왔냐?”무표정하던 군야신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그는 대귤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 순간, 그의 눈빛이 어두워졌다.희미하게 풍겨오는 피냄새와 약초 냄새.대귤이의 앞다리에 비단 손수건이 감겨진 것을 보았다.“왕야, 보주가 다쳤습니다!”소청풍의 얼굴빛이 순식간에 굳어졌다.왕야의 보물 같은 존재에게 누가 감히 손을 댄단 말인가?“의관을 불러서 상처를 확인하라
“소공야, 저희 왕야께서는 지금 차를 음미 중이시니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은월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무천보는 은월을 보자마자 괜히 기분이 상했다.자신이 데려온 여인도 기예공이긴 했지만, 은월만큼 이름난 인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괜히 불쾌했다.같은 한량이건만, 군야신은 일찍부터 명성이 높았고 풍류 방면에서도 자타공인 실력자였다!열일곱에 이미 경성 제일의 한량이라는 칭호를 얻었으니, 무천보는 이를 질투해 죽을 지경이었다.그 후로도 수년간 먹고 마시고 유흥에 매달렸건만, 여전히 군야신을 뛰어넘지 못했다.그래서 그를 보면 꼭 시비를 걸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다행인지 불행인지, 무씨 집안의 권세 덕분에 아직까지 군야신에게 다리를 꺾이지 않은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차는 무슨 차야! 빨리 내가 가져온 명필이나 봐라! 이 소공야 작품이 일등이 아닐 수가 없다!”무천보가 기세등등하게 외쳤다.군야신은 그의 성격을 잘 알기에 가볍게 넘기지 않으면 일이 커질 걸 알고 있었다. 그는 자기 뜻대로 안 되면 집 지붕이라도 들썩이게 만들 놈이었다.군야신의 시선이 무천보가 가져온 명필 위에 멈췄고, 가볍게 한 장을 넘겨보았다.그 명필은 서성 왕희지의 가서였다.이는 진품 서예 중에서도 세상에 남아 있는 것이 드물기에 귀하게 여겨지는 작품이다.듣자 하니 무 노공는 젊은 시절 우연한 인연으로 이 한 점을 손에 넣었고, 곧장 보물함에 넣어 가보처럼 간직했다고 한다.글씨며 인장까지 흠잡을 데가 없었다.하지만...군야신은 그중 한 글자를 보고 눈빛이 번뜩였다.마치 무언가가 떠오른 듯했다.바로 그때, 그가 들고 있던 찻잔이 갑자기 쨍 하고 터졌다. 깨진 잔 조각과 뜨거운 차가 고스란히 명필 위로 쏟아졌다.…초희옥은 하나하나 진열된 보물들을 살펴보다가 물었다.“무 소공야가 왕희지의 진본을 들고 왔다고 들었는데, 왜 안 보이죠?”장회는 즉시 대답했다.“아씨, 소식이 참 빠르시네요. 지금 그 명필은 각 방마다 돌며 감정 중입니다. 곧 이곳에도
‘이번에는 무씨 집안이 다시는 섭정왕부를 포위하게 두지 않겠어!’...불음관 2층, 가장 크고 화려한 누각 안.군야신은 눈처럼 하얀 담비 가죽이 깔린 나전으로 장식된 단단한 나무 침상에 기대 앉아 있었다. 그의 잘생긴 얼굴은 마치 신이 정성 들여 조각한 듯 냉철하고 아름다웠다.그 앞엔 줄무늬가 선명한 호랑이 한 마리가 느긋하게 졸고 있었다.그러다 어느 순간, 코끝을 꿈틀이며 킁킁 냄새를 맡더니 벌떡 몸을 일으켜 군야신 앞으로 머리를 들이밀고, 문밖을 연신 향해 고개를 들썩였다.밖에 나가고 싶다는 뜻이었다.“가거라.”군야신은 호랑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사람을 보내 몰래 따라붙게 하라. 또 주방 가서 음식을 훔쳐 먹으면 돈을 제대로 치르라고 해라.”“예.”시위가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대귤이가 쏜살같이 나가자, 누각 안에는 차를 끓이던 은월만이 남아 있었다. 그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이번 조황대선에서 왕야께서 몸소 주관을 맡으신다 하여, 밖에서는 왕야께서 미색에 눈이 멀어 여인 하나를 어찌하려는 거란 말이 돌고 있습니다.”“그들은 모르겠지. 이번 대선이 어떤 의의를 지니는지. 이번이 바로 새 황제가 즉위한 뒤 처음으로 치러지는 조황대선이다. 그간 황정은 줄곧 태후가 틀어쥐고 있었고, 고위직에 있는 여관들은 중립이거나 태후 쪽 인물들뿐이니, 새로운 인물이 들어오지 않는 한 판도는 절대 바뀌지 않겠지.”“하지만 이 무리의 규수들이 서원을 졸업하려면 아직도 일년은 더 남았는데, 왕야께서 이렇게 미리 대비하시고 지금부터 수를 놓기 시작하신 것을 보니… 은월은 감탄할 따름입니다.”군야신은 말없이 찻잔을 들었다. 타인의 시선 따윈 개의치 않았다.과거, 그는 성경 제일의 망나니로 이름 높았다.누구도 그가 뭘 이룰 수 있을 거라 기대하지 않았다.섭정왕 자리를 얻은 것조차 황후가 된 여동생 덕분이라 믿었을 뿐.하지만 바로 그가 선황을 치밀하게 계산하고 흔들어, 영왕 대신 지금의 황제가 황좌에 앉게 되었다는 사실을 그 누구도 몰랐다.
그때 마침 지나가던 한 여인이 이 말을 듣고는 걸음을 멈췄다. 그녀는 초희옥을 비스듬히 쏘아보며 냉소적으로 말했다.“가소롭기도 하지. 네가 뭐 황실 공주라도 되기라도 해? 운진이 초대장을 줬다고? 네깟 게 감히?”그 여인은 겨우 열넷이나 열다섯쯤 되어 보였고, 금빛 긴 치마를 입었으며 얼굴은 눈에 띄게 고왔다. 머리 위에는 화려한 비녀와 장신구가 반짝이며 넘실거렸다.눈빛부터 몸짓까지 오만함이 뚝뚝 묻어나는 모습이었다.“태안공주전하를 뵙습니다!”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일제히 고개를 숙이며 공손히 인사했다.이 소녀가 바로 태안공주 무용현이다.태후의 적녀이자 영왕의 친아우.또한 지금 황제의 이복 여동생.그리고...무천보의 약혼녀였다.무천보는 그녀를 보자 즉시 얼굴이 굳었다. 그녀를 보는 순간 머리가 지끈거렸고, 흥미 따위 접고 곧장 돌아서서 자리를 피했다.초희옥은 비록 전생에서 태안공주를 직접 마주한 적은 없지만, 그녀에 대한 소문은 수없이 들은 바 있었다.그녀의 혼사는 선황이 생전에 영왕이 무씨 집안을 끌어들이기 위해 정해둔 약속이었다.하지만 무천보는 매일같이 주색에 빠져 살고, 무용현은 한결같이 운진을 연모했다.그들은 서로를 보는 것조차 불쾌해하며 혼인을 질질 끌다, 결국 억지로 혼인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무천보는 병에 걸려 죽고 말았다.세간에 떠도는 말로는 공주 전하께서 운진과 함께하기 위해 지아비를 독살했다는 소문도 있었다.그때 무용현이 싸늘한 목소리로 내뱉었다.“너 누구냐! 당장 면사 벗어라! 어느 집 요망한 계집이 이토록 뻔뻔하게 운진을 사칭하느냐, 내가 직접 확인해보겠다!”이때, 장회가 부리나케 달려와 중재에 나섰다.“공주 전하! 이곳에 어찌… 운진께서 직접 차를 우리고 계십니다. 지금 가시면 막 우린 한 잔을 드실 수 있을 겁니다.”무용현은 초희옥을 손가락질하며 외쳤다.“이 계집년이 운진에게 초대장을 받았다며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당장 붙잡아라!”장회는 얼굴에 식은땀을 흘리며 기침을 한 번 하더니 말을 얼버무
정자와 누각이 정원을 따라 줄지어 있고, 꽃을 마주하며 물을 비추는 자리마다 고풍스러운 운치가 깃들어 있었다.마치 산속의 맑은 샘물처럼, 속세와는 다른 고즈넉함이 느껴졌다.하지만 동가 일대는 땅 한 평이 금 한 냥이라 할 만큼 땅값이 하늘을 찌르는 곳이었다.겉보기엔 담백하고 소박한 이 불음관도, 실은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거액이 들여진 호화 찻집이었다.그 시각, 불음관 입구에는 이미 온갖 권귀 세가의 마차들로 가득 차 있었다.각기 다른 집안의 성씨들이 화려하게 적힌 패가 마차마다 높이 걸려 있었다. 초희옥은 눈썰미 좋게도 그중 가장 화려한 마차를 단번에 알아봤다. 그 마차에는 금빛으로 번쩍이는 글자 하나가 걸려있었다.군.섭정왕이 정말로 나타난 것이다.그가 아니었다면, 초희옥은 애초에 이런 권세가들이 모여 심심풀이로 부와 체면을 과시하는 자리에 올 생각도 없었을 것이다.그녀는 말없이 초대장 한 장을 내밀었다.입구에 서 있던 시녀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걸어서 오다니? 이 아가씨는 도대체…’‘초대장이 가짜는 아닐까?’의심의 눈초리가 번졌다.예전에도 작은 가문 출신의 규수들이 권귀가에 엮이려 무리하게 감보회에 숨어드는 일이 종종 있었다.어느 귀한 분의 눈에 들기만 하면 단번에 신분이 뛰어오르리라 기대하며 몰래 들어오는 것이다.지난번에도 한 명이 그렇게 들키고 쫓겨났다. “실례지만 어느 댁 규수신지요?”수석 시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초희옥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말했다.“감보회는 초대장으로 입장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언제부터 출신까지 심문하게 됐죠?”시녀는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그러나 여전히 초대장을 뒤집었다가 폈다가 하며 한참을 살폈다. 쉽게 들여보낼 용기가 나지 않았다.어쩔 수 없이 안으로 사람을 보내 알릴 수밖에 없었다.그때, 뒤에서 성가신 목소리가 들려왔다.“어이, 거기 앞에. 비켜! 길을 막고 있잖아!”진한 솔잎빛에 복숭아꽃 문양이 수놓인 촉주 비단 예복을 입은 남자가 화려한
초희옥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조 부인이 언니를 좋은 데 시집보내고 싶지 않은 건 분명하지만, 할머니는 달라. 할머니가 그 혼처를 허락한 건 그 남자가 형부 주사이기 때문이야. 할머니에게는 그 사람의 나이도 생김새도 인품도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그 집안이 앞으로 초씨 집안과 혼맥으로 엮인다는 것이지.”초희옥이 훨훨 날아오르면 초 노부인은 반드시 끌어내릴 것이었다.하지만 초약섬은 다르다. 그녀는 초 노부인의 친손녀였다.쓸모가 커질수록 초 노부인은 쉽게 그녀를 내치지 못할 것이다.초희옥은 초약섬을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했다.“언니에게 더 나은 혼처도 가능하다는 걸 할머니가 알게 되면, 결코 언니를 그렇게 쉽게 내버리진 않을 거야.”“내가 이미 할머니께 말씀드렸어. 초씨 집안 규수들 전부 나와 함께 조황대선에 응시하기로 말이야. 언니가 시집을 가지 않을 수 있는 기회는 지금이 유일해.”초약섬은 그 말을 듣고 한참을 멍하니 서 있다가, 갑자기 눈물을 뚝뚝 흘리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다섯째야… 너가 아니었으면, 나 정말… 정말 이렇게 죽는 줄만 알았어… 네가 날 살렸어!”초희옥은 재빨리 그녀를 붙잡아 일으켰다. 그런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살짝 떠올랐다.“붙는다면 그건 언니의 실력이야. 나는 그저 언니가 걸을 수 있는 길을 하나 보여줬을 뿐이야. 그 길을 걸어갈 수 있을지는 전적으로 언니한테 달린 거고.”초약섬은 고개를 떨구고 이를 악물었다.“이제야 깨달았어. 내가 아무리 물러서고 참고 지내도 조 부인에게는 끝이 없다는 걸... 그렇다면 차라리 이 한 몸 부딪혀볼래. 어차피 이 열다섯 해 동안 난 단 하루도 평온하게 살아본 적이 없으니까.”그녀는 굳게 주먹을 쥐고, 초희옥을 향해 다시 한 번 깊이 허리 숙여 말했다.“다섯째야, 이 은혜 평생 잊지 않을게!”초희옥은 그녀를 잡아끌며 말한다.“같이 점심이나 먹자. 하늘이 무너져도 밥은 먹고 생각해야지. 크고 어려운 일일수록 배부터 든든히 채우고, 한 걸음씩 천천히 가는 거야.”
하지만…이것만으로도 이미 경성 전체에 얼굴을 못 들 일이 아닌가?초희옥의 명예는 더럽혀질 대로 더럽혀지고, 오히려 초씨 집안은 너그러이 품은 집안이라는 명성을 얻게 된다.전생의 초희옥이었다면 이런 덫에 걸려도 오히려 조모가 자신을 위해 준 자비라 여겼겠지.같은 목적을 달성하면서도, 초 노부인의 수단은 초약봉 따위와는 비교가 안 된다. 무려 열여덟 골목은 앞서 있었다.노련함이란, 역시 세월이 쌓여야 나오는 법인가 보다.초약봉은 그 속내를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여전히 불만 가득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할머니 말씀이 옳습니다. 그런 건 그냥 말장난일 뿐이지요. 하지만 제가 시험을 보겠다고 말을 해 놓았으니, 저는 응시할 것입니다. 다만… 두 언니랑 같이 시험을 본다고요…”초희옥은 살짝 망설이는 듯하더니, 무언가 좋은 꾀라도 떠오른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그럼 초연아도 시험 봐야죠! 아, 맞다. 셋째 언니도요! 우리 초씨 집안 규수들은 전부 응시 해야죠?”초약봉은 눈을 홱 굴리며 비꼬듯 말했다.“너 지금 우리 셋이 같이 시험 보면 너만 떨어져서 망신당할까 봐 그런 거지? 그래서 사람들 끌어모아서 같이 치게 만들면, 나중에 떨어져도 혼자만 욕먹는 게 아니라서 덜 창피하겠다는 그런 생각이지?” “봉아, 함부로 입 놀리지 마라!”조 부인이 황급히 그녀를 말렸다.초 노부인은 여전히 상냥하게 웃으며 말했다.“괜찮다, 괜찮아. 예전에도 네가 글 배우겠다 하여 내가 규학을 세운 것 아니더냐. 그 아이들도 다 너를 따라 함께 공부한 셈이지. 이번엔 대선도 같이 보는 거다. 좋아, 아주 좋아.”그녀에게는 초희옥이 떨어지는 것, 그 하나면 충분했다.다른 애들이야 숫자나 채우는 것이고, 시험에 통과하든 말든 중요치 않았다.강간범으로 몰린 오라비에, 민적에 바보 소리까지 듣는 규수. 이 두 낙인이 함께 찍힌다면 초희옥의 인생은 그 순간으로 완전히 끝장날 터였다. 초 노부인은 속으로 중얼거렸다.‘이렇게만 흘러가준다면… 더할 나위 없겠군.’자안당을 나선 초
초 노부인은 집안 사정을 훤히 꿰고 있는 인물이었다. 조황대선 시험을 두고 내기까지 벌어졌다는 소식은, 첫 수업이 끝나기도 전에 이미 그녀 귀에 들어갔다.수업이 끝나자마자, 그녀는 사람을 보내 초희옥과 초약봉을 자신에게 오라고 부르게 했다.전갈을 전하러 온 유모는 한쪽에 있던 초약섬을 힐끔 보고는 조심스럽게 말을 보탰다.“셋째 소저, 초노부인께서 주신 상이 이미 아가씨의 뜰에 도착해 있습니다. 나중에 잊지 말고 인사 드리십시오.”“무슨 상이요?”초희옥이 흥미롭다는 듯 물었다.초 노부인은 평소에 초약섬을 곱게 보지 않았다.“조 부인께서 셋째 소저를 위해 좋은 혼처를 하나 알아오셨답니다. 노부인께서도 오늘 아침에 승낙하셨고요. 벌써 혼수도 다 준비됐어요. 새해가 지나면 바로 출가하게 될 거예요.”혼처? 출가?초약섬의 얼굴이 눈처럼 하얗게 질렸다.바로 그때, 조씨의 유모가 와서 좋은 소식을 전하겠다며 그녀를 불렀다.초약섬은 혼이 빠진 사람처럼 그녀의 뒤를 따라 조용히 사라졌다.초희옥은 그녀의 처연한 뒷모습을 바라보며 서서히 눈빛을 가라앉혔다.조씨는 초 노부인의 총애를 등에 업고, 평소 초씨 집안의 셋째 도련님 자식들을 천대했다. 특히 정실부인의 소생인 초약섬을 자주 괴롭혔다.그런 이가 데려온 혼처가, 과연 좋을 리가 있을까?‘아, 맞다...’초희옥은 문득 전생의 기억이 떠올랐다. 초약섬은 오품 형부 주사에게 시집을 갔다. 그 주사는 재혼이었다.또한 그 주사의 나이는 초약섬의 할아버지뻘이었다.당시 어르신이 세상을 떠나지 않았다면, 그 ‘사위’보다 오히려 더 젊었을 것이다.혼인한 지 채 2년도 안 되어 그 노인은 갑작스럽게 죽었다. 그 뒤, 두 아들이 유산을 두고 서로를 탓하고 헐뜯으며 다투었다.그중 한 명은 계모와 부적절한 사이였다고 누명을 씌우기까지 했다.명확한 증거는 없었지만 소문은 삽시간에 번졌고, 온 경성이 들끓었다.세 사람이 말하면 호랑이도 만들어진다 했던가.모든 손가락이 그녀를 향해 날아들었다. 결국 초약섬은 그 모
“훌륭하구나, 훌륭해. 넷째 아가씨는 박학다식하니 이번 조황대선에서도 반드시 좋은 성과를 거두겠구나.”노부자는 황급히 칭찬을 늘어놓으며 슬쩍 초희옥 쪽으로 곁눈질을 보내고는 혐오 어린 눈빛으로 중얼거렸다.“어느 누구와 같지 않으니 다행이지. 쯧쯧…”예전 같았으면 초희옥은 부끄러움에 고개도 못 들었을 것이다.하지만 지금의 초희옥은 오히려 고개를 끄덕이며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초연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부자님 말씀 맞아. 어느 누구라는 게 누구겠어? 너는 균전령 내용도 못 외우고 있잖아. 조황대선 같은 데는 끼지도 마. 어차피 떨어질 텐데.”초연아는 창피하고 분해서 얼굴을 감싸며 울음을 터뜨렸다.초약봉은 초희옥이 뿌듯해하는 얼굴을 보며 코웃음을 쳤다.“다섯째야, 너는 균전령을 어떻게 읽는지도 모르면서 감히 여섯째를 흉보냐? 마치 네가 시험에 붙을 것처럼 말하는구나. 네가 조황대선 나간다 한들, 거기서도 그냥 숫자나 채우겠지!”초희옥은 그 말에 마치 급소를 찔린 듯, 탁자를 쾅 내리치며 소리쳤다.“뭐라고? 숫자 채우는 건 네 쪽이거든!”“하하하, 내가 숫자 채우러 간다고? 웃기시네!”초약봉은 비웃으며 코웃음을 쳤고, 눈동자를 스윽 굴리더니 말을 이었다.“그럼 이렇게 하지. 우리 둘 다 같이 시험 보자. 떨어지는 사람이 성문 앞에 나가서 ‘나는 머저리다!’ 라고 세 번 외치는 거야. 어때? 감당이 되겠어? 누가 숫자를 채우는 건지 두고 보자고.”됐다!이 말만 기다리고 있었지.초약봉은 정말이지 도와주기를 좋아하는 착한 사람이다.“한 집안의 자매끼리 왜 이렇게 싸우니? 그럴 필요 없잖아.”초약란은 눈빛을 번뜩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겉으로는 착한 사람인 척하며 가식적으로 중재에 나섰다.“넷째야, 넌 다섯째가 너만 못하다는 거 알잖니. 배운 거 많다고 그걸 내세워서 다섯째를 괴롭히면 안 되지.”초약란이 그럴싸하게 타일렀다.“나도 이런 머저리랑 일일이 따지고 싶진 않아요. 지가 괜히 시비 걸었을
초씨 집안의 규학은 뒷뜰의 푸르게 자란 대나무 숲 한가운데 자리한 작은 정원에 위치해 있었다. 그 이름은 문진당이라고 불렸다.이때는 아침 수업이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다. 초희옥이 느릿느릿 걸음을 옮기며 교실에 들어서자, 순식간에 주변의 시선이 집중되었다.학당 안에는 열댓 명쯤 되는 열네 다섯 살 무렵의 규수들이 앉아 있었다.직계 자매들 뿐 아니라, 본가의 먼 친척들까지 보내 공부를 시키고 있었다.초희옥은 자리를 대강 둘러보다가 초약섬 옆자리에 빈자리가 있는 걸 보고 조용히 앉았다.“셋째 언니, 병은 좀 나았어요?” 초희옥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초약섬은 깜짝 놀란 듯 고개를 끄덕이며 속삭였다.“응. 보내준 인삼 고마워.”주변에서는 벌써 수군대고 있었다.“수업을 빠진지 반 년은 넘었잖아? 갑자기 왜 나왔대…”“오라버니 사건이 연기돼서 여기저기 쫓아다닐 일 없으니까 수업 들으러 온 거라던데…”“흥, 그건 뻔한 핑계지! 조정 형사 건인데, 쟤가 뭘 어떻게 관여한단 거야?”강단 위에 있던 노부자가 책상을 툭 치며 소리쳤다.“조용!”그는 학식 깊고 이름 높은 유학자였고, 초씨 집안에서 직접 모셔온 인물이었다.초씨 집안 주모와 조씨가 몰래 은전을 많이 쥐어준 탓에, 그는 초약란과 초약봉에게는 유난히 열심히 가르쳤다.다른 규수들에게는......그저 적당히 가르쳤다.몇 마디라도 알아듣는다면, 그건 그들의 실력이었다.그리고 초희옥에 대해서는......어디선가 암묵적 지시를 받았는지, 딱히 가르칠 필요 없다는 듯 대충 가르쳤다.명문가의 속사정을 잘 아는 그는 자신의 지위를 믿고 초희옥을 억누르고 조롱하는 걸 즐기고 있었다.그녀가 몇 달간 수업에 나타나지 않아 속이 후련했는데, 오늘 다시 나타나자마자 눈엣가시처럼 느껴진 것이다.그는 때를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우리가 방금 이야기한 사건은 요즘 시끄럽게 회자되는 선천산 사건이다. 이 사건은 대성국 법전 중 한 조항과 관련이 깊지. 대성율은 조황대선 문과 필수 과목이다. 올해는 시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