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비녀 아래, 칼을 숨기고

꽃비녀 아래, 칼을 숨기고

By:  비담Updated just now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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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울한 누명으로 그녀의 가족은 파국을 맞이했다. 하지만 죽음의 문턱에서 다시 눈을 떠보니 10년 전 과거, 운명을 거슬러야 한다! 그런데 어쩌다가 섭정왕에게 찍혀 팔자에도 없던 왕비의 자리에 오르게 생겼다. 초희옥(楚曦玉): "다들 저보고 냉혹하고 인정머리 없는 성경(盛京) 최고의 요물이라 손가락질하는데… 도대체 제 어디가 마음에 드신 겁니까?" 섭정왕(摄政王): "다들 내가 조정을 어지럽히고 온갖 악행을 저지른 성경 제일의 간신이라 하지. 그러니 더더욱 우리는 하늘이 맺어준 천생연분 아니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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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제1화

연화(延和) 11년, 폭설이 내리는 한겨울이었다.

새롭게 충용후(忠勇侯)의 작위에 오른 기념으로 성대한 연회가 열렸다. 모두가 기뻐하며 떠들썩하게 주인공에게 축하 인사를 건넸다.

그러나 한편, 성경(盛京) 외곽.

외딴 무덤 앞에는 아주 다른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 무리 속에 흰옷 차림의 여인이 무자비하게 구타당하고 있었다. 먼지가 피어오르고, 사방으로 피가 튀었다. 여인은 극심한 고통에 몸부림쳤다.

그리고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초약란(楚若兰)이 입가에 냉소를 머금은 채 지켜보고 있었다.

“초희옥(楚曦玉), 네까짓 게 뭐라고 감히 황제 폐하 앞을 가로막으려 들어? 정말 뻔뻔하기도 하지. 10년 전 그 사건이 있고도 감히 얼굴을 들고 다닐 생각을 해? 나였다면 진작에 창피해서 죽어버렸을 거다!”

초희옥은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되었지만, 초약란의 비아냥에 반응하지 않았다. 그저 분노와 슬픔이 가득한 눈빛으로 쓸쓸히 세워져 있는 묘비를 바라볼 뿐이었다.

10년 전, 억울한 누명을 쓰고 목숨을 잃은 오라비의 묘비였다.

당시 초희옥은 오라비를 구하려 최선을 다했지만, 결국 함정에 빠져 고귀한 신분에서 하루아침에 방탕한 여자로 몰려 가문에서 쫓겨났다.

하지만 그녀는 버텼다. 억울하게 죽은 오라비를 위해, 아직 남은 남동생을 지키기 위해 버티고 또 버텼다.

그렇게 10년이 지났다. 수많은 어려움을 이겨내고 그녀는 마침내 진실을 알아냈다. 이제 오라비의 억울함도 풀릴 것이라 확신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헛된 꿈이라는 것을 깨닫기까진 오래 걸리지 않았다.

권력 있는 자들 앞에서 진실은 무참히 짓밟혔다. 세상은 결코 공정하지 않다는 사실을 초희옥은 다시 한 번 실감했다.

관아에서는 그녀의 소장을 접수조차 해주지 않았다.

어렵게 얻은 기회였기에, 그녀는 포기할 수 없었다. 그래서 황제가 행차하는 행사를 노려 직접 억울함을 호소하려 했다. 하지만 가장 신뢰하던 하녀에게 배신당하고 말았다.

초약란이 비웃음 맺힌 얼굴로 천천히 그녀를 향해 다가왔다.

“전에는 괜한 말이 나올까 봐 널 살려뒀지만, 이젠 아버지까지 작위를 받은 마당에 널 살려둘 필요 없지. 잘 가, 초희옥.”

그렇게 초희옥은 마지막을 맞이했다.

아니, 맞이했다고 생각했다….

———

연화 원년, 서리가 내린 가을.

성경, 충용후 저택 작은 정원에서 하녀의 목소리가 작게 울려 퍼졌다.

“아가씨, 이제 날이 다 저물었어요. 어서 일어나요.”

익숙한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를 때렸다.

“큰공자님께서 내일 처형당하게 생겼는데, 뭐라도 하셔야죠! 아가씨마저 가만히 계시면 큰공자님 정말 죽습니다!”

초희옥의 눈꺼풀이 서서히 열리며 몽롱했던 정신도 점점 또렷해졌다.

그리고 들어온 익숙한 그림자, 그녀의 눈빛이 순식간에 차갑게 굳었다.

춘도(春桃),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라왔고 집에서 쫓겨날 때조차 곁을 지켜줬던 하녀였다. 그래서 더 각별했고 친자매처럼 여겼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후작부(侯爵府)의 사람들이 쳐들어왔던 밤에 산산조각 났다.

춘도는 처음부터 그녀의 편이 아닌, 초노부인이 심어놓은 첩자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가문에서 내쫓은 후에도 초노부인은 안심하지 못하고 그녀를 감시하기 위해 춘도를 계속 곁에 두었던 것이다.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이 배신자의 얼굴을 보게 되다니. 초희옥은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게다가 춘도는 이상할 정도로 젊어 보였다.

그러다 문득 초희옥은 조금 전에 춘도가 그녀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오라버니가… 내일 처형당한다고? 오라버니가 아직 살아있어?’

당황한 초희옥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곳은 분명 과거 그녀가 머물고 있던 후작부의 정원이었다.

그러다 문득 자신의 모습도 눈에 들어왔다. 밤새 책을 베껴 쓰거나 생계 때문에 바느질하느라 부르튼 손과 침침해진 눈이 아니었다.

그녀는 비틀거리며 침상에서 내려와 거울 앞으로 재빨리 다가갔다.

거울 속에 비친 소녀의 눈은 그 어느 때보다 생기로 반짝이고 있었다.

낯설고도 익숙한, 이건 14살 그녀의 모습이었다.

‘난 분명 죽었어, 그런데 갑자기 10년 전이라니! 하늘이 날 가엾게 여겨 기회를 준 걸까? 진짜로 오라버니가 살아 계신다고? 그렇다면… 모든 것을 되돌릴 수 있을지도 몰라!’

모든 비극을 되돌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 뜨거운 눈물이 북받쳐 올랐다.

그녀의 어머니는 막내 남동생을 출산하다 난산으로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그녀에겐 아버지가 있었다.

아버지 초치원(楚致远)은 북방을 지키는 장군이었다. 그러나 4살이 되던 해 그 또한 나라를 위해 싸우다 전장에서 전사했다. 당시 폐하께서 그 공을 기려 그녀의 아버지를 충용후로 추봉했다.

그렇게 초희옥 세 남매는 부모님을 모두 잃고 셋만이 세상에 남겨졌다. 셋 중 맏이인 그녀의 오라비 초연(楚衍)조차 그땐 겨우 열 살이었다.

조정의 법에 따라 고아가 된 세 남매는 아버지의 고향인 성경으로 돌려보내졌다.

그리고 여기서 초희옥의 할아버지를 빼놓을 수 없다.

초희옥의 할아버지는 원래 가난한 선비였다. 그러나 과거에 급제하여 장원(状元)이 되었고, 승상(丞相)의 서녀(庶女)와 혼인하며 성경에 정착했다.

그녀의 아버지 초치원은 바로 이 둘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할아버지는 신분 상승을 위해 더 높은 지위에 있는 집안과 혼인을 맺길 원했다. 그러기 위해 본처의 지위를 첩으로 강등시키고자 했다.

이에 초희옥의 친할머니는 아들의 적자(嫡子) 신분을 지키기 위해 초씨 가문 사당 앞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러다 보니 초 노부인은 의붓아들인 초치원을 눈엣가시로 여길 수밖에 없었다.

결국 어린 초치원은 집을 떠나 군대로 들어갔고 북쪽 국경을 지키는 장군이 되었다.

그리고 수십년 동안 피비린내 나는 생활 속에서 혼자 열심히 살면서 결혼도하고 낳았다. 그렇게 평생 죽을 때까지 본가로 돌아가지 않았다. 당연히 추후 자기 자식들이 다시 초씨 집안과 엮일 거라 생각지 못했고, 자신의 사정을 알려주지 않았다.

그리고 초희옥이 초씨 집안으로 들어온 것은 겨우 4살, 초씨 집안은 체면을 위해 그녀의 친할머니는 병으로 세상을 뜬 것이라 알렸다.

초희옥은 과거를 회상할 때마다 이 부분을 가장 후회했다. 만약 이 사정을 미리 알았더라면 모든 것이 달라졌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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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연화(延和) 11년, 폭설이 내리는 한겨울이었다.새롭게 충용후(忠勇侯)의 작위에 오른 기념으로 성대한 연회가 열렸다. 모두가 기뻐하며 떠들썩하게 주인공에게 축하 인사를 건넸다.그러나 한편, 성경(盛京) 외곽.외딴 무덤 앞에는 아주 다른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 무리 속에 흰옷 차림의 여인이 무자비하게 구타당하고 있었다. 먼지가 피어오르고, 사방으로 피가 튀었다. 여인은 극심한 고통에 몸부림쳤다.그리고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초약란(楚若兰)이 입가에 냉소를 머금은 채 지켜보고 있었다.“초희옥(楚曦玉), 네까짓 게 뭐라고 감히 황제 폐하 앞을 가로막으려 들어? 정말 뻔뻔하기도 하지. 10년 전 그 사건이 있고도 감히 얼굴을 들고 다닐 생각을 해? 나였다면 진작에 창피해서 죽어버렸을 거다!”초희옥은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되었지만, 초약란의 비아냥에 반응하지 않았다. 그저 분노와 슬픔이 가득한 눈빛으로 쓸쓸히 세워져 있는 묘비를 바라볼 뿐이었다.10년 전, 억울한 누명을 쓰고 목숨을 잃은 오라비의 묘비였다.당시 초희옥은 오라비를 구하려 최선을 다했지만, 결국 함정에 빠져 고귀한 신분에서 하루아침에 방탕한 여자로 몰려 가문에서 쫓겨났다.하지만 그녀는 버텼다. 억울하게 죽은 오라비를 위해, 아직 남은 남동생을 지키기 위해 버티고 또 버텼다.그렇게 10년이 지났다. 수많은 어려움을 이겨내고 그녀는 마침내 진실을 알아냈다. 이제 오라비의 억울함도 풀릴 것이라 확신했다.하지만 이 모든 것이 헛된 꿈이라는 것을 깨닫기까진 오래 걸리지 않았다.권력 있는 자들 앞에서 진실은 무참히 짓밟혔다. 세상은 결코 공정하지 않다는 사실을 초희옥은 다시 한 번 실감했다.관아에서는 그녀의 소장을 접수조차 해주지 않았다.어렵게 얻은 기회였기에, 그녀는 포기할 수 없었다. 그래서 황제가 행차하는 행사를 노려 직접 억울함을 호소하려 했다. 하지만 가장 신뢰하던 하녀에게 배신당하고 말았다.초약란이 비웃음 맺힌 얼굴로 천천히 그녀를 향해 다가왔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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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초치원이 가문을 떠나 북방으로 간 뒤, 그 누구도 그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모두가 그 어린 나이에 전장에 뛰어들었으니 막연히 죽었으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그가 전장에서 얼마나 큰 공을 세웠는지 몰랐다.그러던 중, 조정에서 그의 공로를 인정해 공을 치하하고자 했다. 그제야 초씨 가문 사람들은 앞다투어 자신들이 그의 가족이라며 나섰다.초씨 가문은 조정의 은혜를 받아 벼슬을 얻게 되었다. 이들은 초희옥의 할아버지 주도 아래에 선황(先帝)이 하사한 충용후 저택으로 옮기게 되었다.그러나 초 노부인은 만족을 몰랐다. 초치원 덕에 이토록 많은 부와 명예를 얻었음에도 그녀에겐 더 큰 욕망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후작 작위였다.법에 따르면 작위는 당사자가 사망했을 시, 아들에게 물려진다. 하지만 아들이 없는 경우도 있으니, 그럴 땐 형제에게 계승되는 원칙이 있었다.즉, 초희옥의 오라비와 남동생만 없어진다면 합법적으로 그녀의 삼촌이자 초 노부인의 아들이 작위를 계승할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초 노부인은 이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손을 쓰기엔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멀쩡하던 가문의 후계자가 갑자기 죽는다면 조정에서도 조사가 나올 게 뻔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황제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 질 수도 있었다.모두의 의심을 피해, 자연스레 아들이 작위를 물려받게 하기 위한 초 노부인의 노력이 시작되었다.그녀는 철저히 겉으론 자애로운 할머니의 행세를 하며 초희옥 남매를 아끼는 척 행세를 했지만, 뒤로는 이들을 몰락시킬 준비를 했다.가장 먼저 노린 것은 남매 중 막내였다. 막내가 승마를 배우려 할 때, 사람을 붙여 공포스러운 상황을 조정한 것이 시작이었다. 막내는 그 사건 뒤로 심하게 말을 더듬는 버릇이 생기게 되었고 후계자 자격도 잃었다.다음으로는 장남 초연의 차례였다. 그에겐 터무니없는 누명을 씌워 처형당하게 만들었다.그리고 마지막으로 초희옥, 그녀는 처음 초씨 가문에 왔을 때부터 초노부인의 손에 길러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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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날이 어두워지면서 후작부의 경비도 삼엄해지기 시작했다. 평소였다면 초희옥은 당연히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번만큼은 초약란이 고마웠다.그녀가 초희옥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일부러 상황을 꾸미지 않았더라면,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테니까 말이다.초희옥은 후문에 준비된 마차를 타고 순조롭게 풍월방에 도착했다.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사람이 나타나 그녀를 탈의실로 안내했다.역시나 기녀의 옷은 평범한 가문의 여식이 입기엔 너무나도 화려했다. 춘도는 아주 기다렸다는 듯이 온갖 장식품과 화장품으로 그녀를 덕지덕지 꾸며주었다.“아가씨,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제가 나가서 섭정왕이 어디에 머물고 있는지 알아올게요.”춘도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을 건네며 홀로 방을 나섰다. 치장까지 마친 마당에 초희옥이 이곳을 빠져나갈 수 없으리라 판단했기 때문이다.이제는 다음 단계, 옆방에서 술 마시며 대기하고 있을 세 남자를 이 방으로 이끌어오는 것만 남았다. 그렇게 약속대로 남자들이 소란을 피우면 사람들의 시선이 모일 것이고, 자연스레 초희옥을 알아보는 사람도 생길 것이다. 성경이 아무리 넓어도 이런 추문만큼 빨리 퍼지는 것은 없었다. 그러면 자연스레 가문은 그녀를 쫓아낼 명분이 생긴다.그리고 이것은 전생 실제로 일어난 일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소란속에서도 섭정왕은 코빼기도 얼굴을 비추지 않았었다.춘도가 떠나간 뒤, 초희옥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 문을 열었다. 이곳은 2층, 당연히 뛰어내리면 크게 다칠 것이다. 하지만 다행이게도 화려하게 설계된 풍월방의 구조상 층층마다 날렵하게 뻗은 처마가 있었다.초희옥은 창문 밖으로 몸을 넘긴 다음 조심스레 처마 위를 밟았다. 그녀는 까치발을 든 채, 신중하지만 최대한 신속하게 섭정왕이 머물고 있을 것이라 추정되는 가장 화려한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머뭇거리다가 춘도가 돌아오기라도 한다면,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된다.다행히 방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하지만 생각과 실전은 다른 법, 초희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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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섭정왕 군야신이 비난받는 이유는 무수히 많지만, 그중 하나 절대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호랑이 산책이었다.그러니 당연히 그가 거리에 나타나면 사람들은 혼비백산 피하기에 급급했다.그런데 최근, 잠시 섭정왕이 강북을 다녀오느라 자리를 비웠더니 자신의 호랑이가 아픈 것 같다는 얘기가 들려오지 않겠는가?다급해진 그는 호랑이를 위해 궁의 어의까지 데려왔지만, 호랑이의 상태는 전혀 호전되지 않았다.호랑이는 점점 먹는 것도 줄이고 말라갔다.결국 섭정왕은 황실 이름을 빌려 전국 곳곳에 호랑이를 고쳐줄 명의를 찾는다는 벽보까지 붙였다.한낱 애완 동물 한 마리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보기엔 너무 소란스러웠다. 백성들은 그의 기행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으며, 안 그래도 그를 탐탁지 않게 여기던 관료들에게도 탄핵해해야 할 이유 하나가 더 추가됐다.하지만 초희옥만큼은 그의 행동을 비난하지 않았다.그녀의 아버지 또한 살아생전 가족처럼 아끼던 한혈마가 있었다. 만약 그 한혈마가 아팠다면 그녀의 아버지 또한 비슷한 일을 했을 거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섭정왕에겐 이 호랑이가 그런 존재였을 것이다.그리고 이건 기회였다. 역시나 섭정왕은 무시하지 못했다.“흠?”그가 눈빛으로 초희옥을 끌고 가려던 부하들에게 내버려 두라는 의사를 보냈다. 그런 다음, 초희옥을 내려다보며 물었다.“뭐 의원이라도 돼?”초희옥은 고개를 저었다.“소녀는 의술을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전에 아버지께서 한혈마를 키우셨는데, 비슷한 증상을 보였던 것이 떠올랐습니다.”물론 이건 사실이 아니다. 그저 말의 신뢰성을 높이기 위해 그녀가 만들어낸 구실이었다.전생, 섭정왕이 그의 호랑이를 치료하기 전에 전국을 뒤지고 다니다가 보름 만에 스스로 해결책을 찾았다는 얘기는 유명했다.하지만 섭정왕이 찾아낸 처방으로 섭정왕과 거래하는 것, 양심은 살짝 찔렸다. 그러나 오라버니의 목숨이 걸린 이상, 그녀는 기꺼이 뻔뻔해질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 빚은 앞으로 갚아 나가면 된다.“그래, 어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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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초희옥은 식은땀이 나는 것을 느꼈다. 자신이 이곳에 있는 것이 사람들에게 알려지기라도 한다면, 전생과 같은 상황이 벌어질 게 뻔했다. 그 상황만큼은 반드시 피해야 했다. 그녀는 표정을 굳힌 채 섭정왕을 바라보며 진진한 목소리로 말했다.“왕야의 호랑이가 앓고 있는 병에 대해서는 이미 들어 알고 있지만, 정확한 진단을 위해선 제가 직접 가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시간이 지체되면 좋을 것이 없으니 지금 바로 가는 것이 어떻겠습니까?”섭정왕의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초롱초롱한 눈빛, 순진무구한 표정, 마치 밖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 따위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하지만 섭정왕의 도움 없이 그녀가 이곳을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여우 같이 교활한 소녀다.섭정왕은 천천히 손에 끼고 있던 옥 반지를 빙글빙글 돌리며 느긋하니 말했다.“왕부로 돌아가자.”그러자 옆에 있던 은월이 눈치 빠르게 앞으로 나서며 밖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외쳤다. “여긴 왕야께서 계신 곳인데, 누가 또 있을 수 있단 말이냐? 무례하게 굴지 말고 썩 물러가라!”그러자 문 밖에 있던 사람들이 겁먹은 듯 아무 말 못하고 후다닥 자리를 떠났다. 섭정왕부는 성경 통틀어 가장 화려하고 웅장한 저택이었다. 초희옥은 더 꼼꼼히 면사로 얼굴을 가린 다음 은월과 함께 섭정왕 따라 왕부로 향했다. 사람들은 그런 그녀를 그저 섭정왕의 총애를 입은 기녀라고 생각하고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호랑이는 왕부 동북쪽 정원에 살고 있었다. 인공으로 만들어진 산과 연못, 탁 트인 시야에 대나무 숲까지, 초희옥이 머물고 있는 후부의 정원이 초라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정원과 가까워지자 몇몇 하인들이 입구를 지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마찬가지로 그들 또한 섭정왕의 등장에 황급히 맞이하러 앞으로 나섰다. 그 중 한 하인이 섭정왕에게 고개를 깊이 숙이며 용서를 구했다.“송구합니다, 왕야. 오늘도 보주님께서 식욕이 없으신지 한끼 밖에 못 드셨습니다…”군야신은 그런 하인들을 나무라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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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물론 그녀가 이렇게 행동할 수 있는 데는 계기가 더 있었다. 불량배 사건 이후 초희옥은 몇 번 더 호랑이와 마주치는 일이 있었다. 그리고 관찰 결과 이 대귤이가 오직 죄 짓는 자들만 골라 물어뜯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물론 이것이 섭정왕의 명령아래 일어난 일이라는 것까진 알진 못했다. 어느 순간 호랑이는 그녀에게 마냥 고맙고 반가운 존재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전생, 그녀는 종종 그런 마음을 전하기 위해 대귤이가 지나갈만한 자리에 고기를 준비해두곤 했지만, 똑똑했던 호랑이는 절대로 낯선 이의 음식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런데 환생을 했더니, 이 대귤이를 보는 것뿐만 아니라 이렇게 끌어안을 기회가 생겼다. 그녀는 이 상황이 너무나 기꺼웠다. ‘항상 고마웠어, 대귤이.’“대귤이, 너 정말 부드럽고 귀엽구나?”초희옥은 눈가를 활짝 접으며 호랑이의 머리를 계속해서 쓰다듬었다. 예상치 못한 반응이긴 했지만, 호랑이 또한 이런 그녀를 기꺼이 받아들이며 자신을 볼을 마구마구 그녀의 볼에 비볐다. 요즘 항상 무기력해 보였던 호랑이가 오랜만에 보이는 긍정적인 모습이었다. 어린 소녀와 커다란 호랑이가 서로 반기며 서로 껴안고 있는 광경이라니, 섭정왕은 이 놀라운 광경에 할말을 잃었다. ‘어느 집 여식이지? 성경에 이런 특이한 존재가 있었단 말인가? 본인이 만지고 있는 것이 그 악명높은 호랑이라는 것을 자각하고 있긴 한가?’“이제 직접 보기까지 했으니, 제대로 진찰할 수 있겠지?”섭정왕이 가까스로 이성을 되찾곤 말을 꺼냈다. 초희옥은 그제야 자신이 이곳에 온 목적을 떠올린 듯 섭정왕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아, 맞다. 사실 아주 간단합니다. 이 아이와 함께 자주 산책 나가 주시면 됩니다.”“뭐라고요? 산책?”은월이 황당하다는 듯 물었다.“지금 농담하는 겁니까?”하지만 초희옥은 절대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이 아이는 분명 영물이긴 하죠. 하지만 아무리 영물이라도 자신의 본능을 모두 억누를 수는 없는 법입니다. 최근 왕야께서 강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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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늦가을 밤, 차가운 바람이 스쳐 지나갔지만, 초희옥은 마음이 산뜻하기만 했다. 드디어 다시 오라비를 볼 수 있게 되었는데, 당연했다.‘정말 다행이야!’어머니는 일찍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전장에 치여 늘 바빠 자리에 없었다. 그런 부모를 대신해 어릴 적부터 그녀를 달래주고 걸음마부터 말까지 모두 오라비의 몫이었다. 심지어 남자아이 주제에 유모에게 배워 그녀의 머리를 땋아 주기까지 했으니, 대단한 정성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버지마저 돌아가셨다.그녀는 북쪽 변경을 떠나 성경으로 오늘 길 내내 슬픔으로 울다가 자고, 울다가 자고를 반복했다. 그런 그녀의 옆을 늘 오라비가 지켜주었다. 그것이 어린 나이에 부모를 여의고도 버틸 수 있는 이유였다. 초희옥이 공부를 게을리하며 장난치고 다닐 때문 초연만이 그녀를 꾸짖었다. 요즘 세상에 충용후부 여식이나 돼서 공부도 안 하고, 여학(女学)은 어떻게 들어가겠느냐고, 나중에 혼사 치를 때 상대가 싫어할 거라고 말이다.하지만 이냐 그녀가 눈물을 글썽여 보이면 또 마음이 약해져 결국 한숨만 쉬며 달래 주었다. ‘데려갈 사람이 없으면, 오라버니가 날 데리고 살겠다고까지 했었지?’정말 좋은 오라비였다. 그런데 그녀는 아무것도 갚지 못하고, 오히려 남에게 이용당해 그를 죽게 만들었다. 그 사건의 시발점은 그녀였다. 어느 날 초 노부인이 그녀에게 천청관(天清观)에 가서 직접 평안부(平安符)를 받아와 달라고 부탁했다. 부적이 효과를 보려면, 자신과 가까운 사람이 가야 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하지만 그때 그녀는 찬바람을 맞은 탓에 감기 걸린 상태였고 침상에서 벗어날 수초자 없었다. 당연히 함정이었다. 하지만 미움 받기 싫었던 그녀는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오라비에게 대신 가달라고 부탁했다. 초연은 기꺼이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겠다며 천청관으로 떠났다.그리고 모든 것을 바꿔 놓은 그 사건이 발생했다. 누군가의 음모로 그는 약에 취해버렸고,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모든 것이 끝난 상황이었다. 그의 옆엔 순결을 잃은 듯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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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관이 자신의 편이라는 것을 깨닫자, 유등비는 바로 태세를 바꿨다. 그는 초희옥을 그저 오라비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해 미쳐버린 여자로 몰고 모든 자백을 뒤집었다. 그렇게 관에서조차 미치광이 취급을 받게 되자, 그 누구도 그녀의 말을 믿어주지 않았다. 막다른 골목에 몰린 초희옥은 결국 마지막 수단으로 황제에게 억울함을 호소하려 했지만, 초씨 가문에서 이 소식을 듣고 가로막았다. 10년이라는 세월, 진실은 알게 되었으나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다. 물증도, 목격자도… 그 무엇도 그녀의 편이 되어주지 않았다. 게다가 유등비가 위협당해 강제로 자백했다는 소문까지, 이제 와서 남은 공모자들이 죄를 인정한다고 해도 또 뒤집힐 게 뻔했다. 그러니 이번만큼은 직접 나서는 일이 없어야 한다. 그녀는 결코 같은 실수를 반복할 생각이 없었다. 진범들을 수사하고 심문하는 것은 반드시 관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래야 강제 수사였다는 등, 말도 안 되는 거짓말로 죄를 회피하는 일 따위 발생하지 않을 테니까.반년만 기다리면 유등비가 추란에게 했듯이, 동생의 순결을 더럽히게 될 것이다. 이번엔 반드시 그 추악한 현장을 잡아 추씨 가문의 여식도 구하고 오라비의 누명도 벗길 것이다.물론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범인들을 잡는다고 해도 실제로 모든 것을 꾸민 진짜 배후, 초씨 가문의 죄까지 무는 건 어려울 터였다. 이들이 잡혔다는 얘기가 들어가는 순간, 초 노부인은 꼬리 자르기를 하며 빠져나가려 들 테니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상관없었다. 피로 얼룩진 십년의 원한, 그녀는 두고두고 천천히 음미하며 되갚아 줄 생각이었다. 현재 시각 삼경(三更), 성경 남쪽 거리에 있는 야시장 외엔 모두 어둠에 휩싸여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아무도 없는 것은 아니었다. 듬성듬성 치안을 책임지는 병사들이 등불을 든 채 순찰을 돌고 있었고, 여인이라도 발견될 경우 심문을 피할 수 없을 터였다. 하지만 그녀는 평범한 여인이 아닌, 기녀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누구와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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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초희옥은 면사를 다시 고쳐 쓴 다음, 그를 따라 조용히 안채로 들어섰다. “오라버니를 구하려고 좀 전에 풍월방에서 섭정왕을 만나고 왔어요.”“뭐라고?”육희지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거기가 어디라고… 어쩌자고 그랬어! 이 녀석이 겁도 없이… 정말 큰일 날 뻔했잖아!”초희옥는 보기 드물게 허둥지둥 어쩔 바 몰라 하는 모습에 자기도 모르게 풋하고 웃음이 터져나왔다. “걱정마세요, 오라버니. 충분히 조심했어요. 면사도 단단히 쓰고 있었고, 아무도 제 얼굴을 알아보지 못했어요.”“그래도 너무 위험한 행동이었어. 만에 하나 무슨 일이라도 생겼다면…”“맞아요. 위험한 일었죠. 하지만 초연 오라버니를 구하는 일이에요. 필요하다면 목숨도 걸 각오가 되어 있어요.”결연한 그녀의 말에 육희지는 잠시 한말을 잃었다. 하지만 튀어나오는 한숨까진 참지 못했다.초연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걸 각오가 되어 있다니, 그도 모르는 심정이 아니었다. 초연은 그가 친형제처럼 아끼는 친우였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구할 수 있다면 구하고 싶었다. 오죽했으면 오래 전 의절했던 국공부(国公府)를 찾아갔을까? 그는 아버지에게 무릎까지 꿇으며 도와달라고 빌었지만, 그의 아버지는 이 일에 개입하길 딱 잡아 거절했다. 그때 느꼈던 아득한 기분은 아직도 생생했다. 초희옥은 생각에 잠긴 듯 가만히 있는 육희지를 조용히 바라보다가 나지막이 충격적인 소식을 전해주었다. “오라버니, 섭정왕이… 재 조사를 허락했어요.”“뭐? 그게 정말이야!”육희지의 얼굴이 놀라움과 기쁨에 물들었다.“연이가… 연이가 드디어 살길이 생겼구나!”하지만 곧 상황이 그리 낙관적이지만은 않다는 것을 깨닫곤 걱정스러운 표정이 되었다.“섭정왕이 그리 쉽게 설득될 분이 아닌데… 설마 너한테 무슨 짓 한 거 아니지? 어디 다친데 없어?”초희옥은 침착하게 모든 과정을 그에게 털어놓았다. “이 늦은 시각에 집에 돌아가면 분명 의심할 거예요. 풍월방에서 정체를 드러낸 적은 없지만, 춘도가 입을 열면 전 위험해질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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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같은 날, 충용후부 안채, 자안당(慈安堂).초희옥의 할아버지는 이미 몇 해 전에 세상을 떠났다. 그러자 자연스레 초 노부인이 집안의 가장 연장자 자리에 올랐다. 묘시(卯时), 안채는 어느덧 아녀자들로 북적거렸다. 모두 가문의 어르신인 초 노부인에게 문안 인사를 드리기 위해 모인 것이다. 초씨 가문엔 총 네 가구가 있었다. 장남의 초치원 부부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서출인 넷째는 아직 미혼이라 내당에 올 여인이 없었다. 그러므로 자연스레 안채는 둘째와 셋째 집안의 아녀자들로 채워졌다. 방 안, 좌측 상석에는 둘째의 부인 진패분(陈佩芬)가 앉았 있었다. 그녀는 현재 초씨 가문의 주모(主母)이자, 동창백(东昌伯)의 적녀로 꽤 높은 가문 출신이었다.그녀는 연이어 자식을 보았지만, 모두 여아로 슬하에 아들이 아직 없었다. 그래서 유달리 질투심이 많았고, 덩달아 밑에 첩들도 아이를 보지 못했다. 게다가 그녀에겐 친정의 후광 외에도 믿을 구석이 있었다. 그녀가 낳은 첫째 딸이 군왕(郡王)의 측비로 들어간 상황이었다. 그 위세가 얼마나 대단한지, 초 노부인조차 그녀에게 분노할 일이 있어도 참아야 할 정도였다. 이에 교훈을 얻은 초 노부인은 다음 며느리부터는 높은 혼처를 고르지 않고 낮은 집안에서 들이고자 했다. 하지만 혼처가 정해지기도 전에 셋째가 가문의 하녀를 건드려 회임시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노부인은 손주를 원했다. 그러나 둘째를 압박할 수는 없는 상황, 비록 천한 신분이긴 하나 하녀가 손주를 낳길 기대해 보았다. 그런데 정말로 아들이 나왔다. 서자까지 존재하는 마당에 어느 고위 가문의 적녀가 시집오려 하겠는가? 결국 셋째는 하위 가문 여식 중 한 명과 혼인해 정실 부인으로 앉혔다. 하지만 얼마 가지 못해 그녀는 난산으로 세상을 떠났고 하녀 출신인 조씨가 안방을 장악했다. 조씨는 평소 색상이 많이 들어간 옷차림을 선호했으며, 항상 우측 상석에 공손한 미소를 지으며 노부인을 맞이했다.방엔 이 두 사람 외에도 이제 갓 성년을 넘긴 세 여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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