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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9 화

“방금 뭐라고 그러셨어요? 할머니가 저를 문주 씨 옆에 붙여둔 거라고요?”

“당연하지. 아니면 육 대표님이 정말 백마 탄 왕자처럼 쨔잔하고 나타나서 널 구해준 줄 알았어? 생각해 봐. 육 대표님 같은 다망하신 분이 어떻게 난데없이 그렇게 구석진 곳에 갔겠어. 나랑 네 오빠가 미리 함정을 파서 육 대표님을 그곳으로 이끌지 않았다면 네가 3년이나 풍족한 생활을 할 수 있었을 것 같아? 그런 것도 모르고 괜히 육 대표님한테 시집가고 싶어서 욕심을 부리는 게 네 주제에 가당키나 해? 너처럼 낯 부끄러운 줄 모르는 엄마를 둔 사람을 B시에 있는 모든 재벌가문한테 물어봐. 누가 널 데려가겠다는 가문이 있는지. 너 당장 육 대표님한테 사과하고 다시 돌아가. 안 그러면 네 엄마가 저지른 그 동네 챙피한 짓들을 다 까발릴 줄 알아.”

씩씩거리며 따발총 쏘듯 장현숙이 쉬지 않고 조수아를 몰아붙였다. 마치 자신과 아무런 혈연관계가 없는 사람을 대하는 듯 매정한 태도였다.

이마를 타고 내려온 피가 입가에 흘러들어왔다. 비릿한 피비린내가 입안 전체에 퍼졌다. 문득 구역질이 치밀었다. 조수아는 이런 가족을 뒀음에 역겨움이 밀려왔다.

장현숙의 말에서 조수아는 예전에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바로 장현숙이 자신의 큰 아버지의 아들인 사촌오빠와 함께 그녀를 상품처럼 육문주의 곁으로 보내버렸단 것이다.

그것도 모르고 조수아는 자신이 드디어 짝사랑한 사람과 이어졌다는 생각에 그 후로 3년 동안이나 몸과 마음 바쳐 육문주를 사랑했다.

육문주를 위해 자신이 좋아하는 변호사 직업도 포기하고, 혼인에 대한 갈망도 포기하고, 아무런 원망도 없이 숨겨진 애인 노릇을 했던 게 남들 눈에는 몸으로 바꾼 거래로 보여졌다는 게 너무나도 충격이었다. 그것도 그녀의 제일 친한 존재였어야 할 가족들의 손에 의해 말이다.

조수아는 결연한 표정으로 피를 닦으며 고집스레 말했다.

“이제부터 저 다시는 누구한테도 지배당하지 않을 것이고 문주 씨 곁에도 안 돌아갈 거예요. 앞으로 조 씨 가문의 흥망은 저랑은 상관없는 일니까 저한테 연락하지 마세요.”

할 말을 마치고 돌아서서 걸음을 옮기는데 몇 발자국도 안 돼 조수아는 문가에 서있던 아버지와 마주치게 됐다.

그녀의 아버지 조병윤이 눈가에 눈물을 매단 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넋을 놓고 있었다. 가슴에 한쪽 손을 얹은 채 그는 자신의 어머니를 쳐다봤다.

“어머니, 제가 효심이 부족했나요, 아니면 우리 가문을 위해 들인 노력이 부족했나요? 어떻게 제 딸한테 그렇게 대하실 수 있으세요?”

자신의 딸이 친할머니의 꾀에 넘어가 힘든 삶을 살았다는 생각에 조병윤은 가슴이 쿡쿡 쑤셔나며 이마에 식은땀이 배어났다.

조수아는 비틀거리기 시작하는 아버지를 보며 무언가 잘못됐다는 생각에 얼른 달려가 그를 부축했다.

“아빠, 나 괜찮아. 화내지 마. 아빠 얼마 전에 방금 심장수술 했어서 흥분하면 안 돼.”

조병윤은 안타까운 시선으로 딸을 바라보며 손을 뻗어 딸의 이마에 난 상처를 조심스레 훑었다.

“미안하다. 아빠가 널 제대로 보호하지 못했구나.”

“아빠, 그만 얘기하고 나가자. 내가 병원에 데려다줄게.”

조수아는 아버지를 부축한 채 저택을 나와 그를 차에 태웠다. 그리고 빠르게 시동을 걸어 병원으로 달렸다.

병원에 도착해 의사에게 병을 보이자, 의사가 환자분께서 수술 후 충분한 휴식을 취하지 못하고, 또 심적으로 너무 큰 자극을 받아서 수술 후 회복에 차질이 생긴 것 같다는 소식을 알려왔다.

그러면서 하는 얘기가 병원에 입원해서 며칠 두고 병세를 관찰하는 게 좋겠다는 제안도 했다.

조수아는 병실을 예약하고 아버지를 잘 안치한 뒤 혼자 복도로 나와 아버지 비서한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아버지의 비서한테서 회사의 자세한 내막을 알게 되었다.

알고 보니 최근에 조한 그룹에서 육엔 그룹이랑 크게 협업 프로젝트를 하나 추진하는 게 있었는데, 그 프로젝트를 좋게 본 조병윤이 회사의 대부분 자금을 그 프로젝트에 투자를 했단다.

그런데 어제 육엔 그룹에서 갑자기 계약해지를 요구해 오면서 하는 말이, 조병윤이 동종 업계의 다른 기업들한테 이번 프로젝트에 관한 기밀사항을 누설했다는 것이다.

만약 정말로 육엔 그룹의 주장대로라면 조한 그룹은 투자금을 하나도 회수하지 못할 뿐더러 조병윤은 검찰의 조사를 받고 자칫 감옥에 들어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휴대폰을 그러쥔 조수아의 손에 힘이 잔뜩 실렸다.

두 그룹이 새로 추진하고 있다던 프로젝트에 대해 조수아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 프로젝트는 육엔 그룹에서 새로 손을 대고 있는 영역으로 이번에 총력을 다해 개발하고 있다고 들었다.

이번 프로젝트의 전망은 아주 가관이었는데, 만약 프로젝트가 성공하게 된다면 투자금의 몇 배는 식은죽 먹기로 회수할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예측이었다.

조수아는 자신의 아버지처럼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이 이런 일을 했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분명 누군가가 뒤에서 일부러 손을 쓴 게 틀림없었다.

싸늘하게 식은 얼굴의 조수아가 이번에는 육문주의 번호를 눌러서 연결했다.

연달아 몇 번을 걸었는데도 상대방은 모두 무정하게 전화를 끊어버렸다. 다섯 번째로 통화음이 들려오고 나서야 육문주의 차가운 음성이 들려왔다.

“이제 후회되는 거야?”

조수아는 입술을 깨물며 냉정함을 유지하려 애썼다. 그녀의 음성이 피로감으로 인해 낮게 깔렸다.

“문주 씨, 우리 아빠 약속을 어기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복수하고 싶으면 나한테 해. 우리 아빠가 한평생 바쳐서 쌓은 명예를 망가뜨리지 말고. 우리 아빠는 신용을 목숨보다도 더 중요시하는 사람이야. 이제 수술 받은지 얼마 안 된 사람한테 그런 죄를 뒤집어 씌우면 우리 아빠 못 버텨.”

육문주의 몸이 흠칫 멈췄다가 곧바로 느릿하게 말했다.

“네 아빠 살리고 싶어?”

가볍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당장 병원 주차장으로 내려와서 나를 찾아와.”

육문주가 이번 일을 벌였을 거라고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직접 그의 입에서 인정하는 말을 듣는다는 것은 별개의 일이었다.

조수아는 그가 정말로 3년이라는 세월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이런 짓을 했음에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무릇 한 번이라도, 아니 한순간이라도 육문주가 자신한테 마음이 움직였던 적이 있었더라면 그가 이런 짓을 벌이진 못했을 것이다.

조수아는 고개를 쳐든 채 울먹이려는 목소리를 감췄다. 그리고 복도의 조명을 뚫어져라 노려보며 젖어들기 시작하는 눈가를 말렸다.

“두고 봐, 문주 씨. 나 꼭 우리 아빠의 결백을 증명할 테니까. 무고한 사람을 모함하는 걸 절대 용납 못해.”

“좋아. 네가 무슨 수로 결백을 증명할 건지 두고 볼게.”

5분 후, 조수아는 지하주차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육문주의 차를 찾아 다가가자 진영택이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조 비서님, 대표님께서 차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진영택은 그녀를 위해 차 문을 열어준 뒤, 조수아가 올라탄 후에 다시 문을 닫고 알아서 먼 곳으로 잠시 자리를 피했다.

육문주는 차에 올라탄 조수아를 쳐다봤다가 그녀의 이마에 난 상처로 단번에 시선을 옮겼다. 칠흑같은 눈동자에 순식간에 핏발이 섰다.

“누가 그랬어?”

턱을 꽉 붙잡아 오면서 엄격한 말투로 묻는 말에 조수아는 고개를 비틀며 쏘아붙였다.

“당신이 알 바 아냐.”

“이게 바로 네가 말한 날 떠나서 잘 살 수 있다는 거야? 고작 이따위로 지낼 거면서 그런 말을 한 거냐고!”

수납칸에서 연고를 꺼내든 육문주는 연고를 짜서 손끝에 덜은 뒤 그녀의 이마에 난 상처에 치덕치덕 발랐다.

그러고는 지난번 자신이 술을 너무 마셔서 넘어지는 바람에 얼굴이 다쳤을때, 조수아가 벌이라면서 사왔던 못생긴 데일밴드를 찾아내 그녀의 이마에 붙이려 했다.

조수아는 몸을 뒤로 물리며 기를 쓰고 거부했다.

“싫어. 안 붙일 거야.”

육문주는 어림도 없다는 듯 그녀를 홱 당긴 채 억지로 데일밴드를 이마에 붙였다. 그러고는 보복이라도 하듯 조수아의 입술을 훔쳤다가 뗐다.

“진짜 못생겼네.”

조수아는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해졌다. 누구 때문에 지금 우리 가문이 이렇게 됐는데, 눈치도 없이 장난을 치는 육문주가 조수아는 그저 밉기만 했다.

“어떻게 하면 우리 아빠를 놓아줄 거야?”

육문주의 깊은 눈동자가 흔들림없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간단해. 얌전히 다시 내 곁으로 돌아와. 그러면 네 아빠도 무사하고, 조한 그룹도 다시 원래대로 돌려놓겠다고 약속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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