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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20화

Author: 십일
“잠깐만요.”

이미숙이 소진헌의 손을 붙잡으며 제지했다.

“당장 전화하지 말고, 조금만 생각해 봐요.”

“왜? 지금 이 밤중에 정은이 집에서 다른 사람이랑 같이 있다는 게 말이 돼? 그게 누군지도 모르는데... 혹시 이상한 사람이면 어쩌려고!”

소진헌은 잔뜩 흥분한 채 벌떡 일어나려 했다.

“여보, 침착해요. 방금 통화할 때 정은이가 이상한 말투를 쓰거나, 도움 요청하려는 눈빛 같은 거... 있었어요?”

소진헌은 잠시 멈칫했다.

“그런 건 없었던 것 같긴 해.”

“봐요. 정은이 얼마나 똑똑한 아인데, 진짜 위험한 상황이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우리한테 신호 보냈을 거예요.”

‘하긴... 정은이라면 그랬겠지.’

소진헌은 조금 진정됐지만, 여전히 얼굴에 걱정이 가득했다.

“근데, 이 밤중에 집에 누가 있을 수 있냐고... 그것도 저렇게... 가까이... 거의 겹쳐 서 있을 정도로.”

“남자...?”

그 가능성에 도달한 순간, 소진헌의 눈이 확 커졌다.

“헉... 설마... 남자?!”

말이 끝나자마자 다시 전화를 걸려던 찰나, 이미숙이 다시 남편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잠깐만요!”

“그렇게 급하게 전화해서, 정은이한테 뭐라고 할 건데요? ‘집에 남자 있냐’고 물어볼 거예요?”

“그, 그게...”

소진헌은 말문이 턱 막혔다.

‘그래, 뭐라고 말하지...?’

이미숙은 조용히 생각을 정리하다가 말했다.

“지금 이 시간까지 정은이 집에 있을 정도면, 적어도 사이가 가까운 사람이겠죠. 정은이는 J시에 아는 사람도 많지 않아요. 있다고 해도 실험실 친구들 몇 명 정도잖아요. 그중에...”

소진헌이 갑자기 무릎을 ‘탁’ 쳤다.

“수민이! 맞다, 수민이를 깜빡했네!”

“맞아요, 우선 수민이를 슬쩍 떠보는 거 어때요? 정은이 집에 있는지, 같이 있는 건지...”

소진헌은 감탄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우리 마누라! 정공법 말고 우회 전술이라니, 완전 전략가네.”

그러고는 당장 핸드폰을 집어 들었지만, 당황한 소진헌이 머리를 긁적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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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1030화

    정은이 잔을 들고 거실로 돌아왔을 때, 이미 소진헌은 재석에게 술을 따라주며 한참 좋은 분위기를 즐기고 있었다. 밥상 분위기는 예상보다 훨씬 ‘훈훈’했는데, 적어도 소진헌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느낄 터였다.술이 석 잔, 네 잔 오가자 소진헌의 말투도 점점 느긋해지고, 분위기엔 살짝 취기가 돌기 시작했다. “조 교수, 내가 좀 속내를 잘 안 드러내는 편인데 말이지.” 소진헌이 잔을 들며 진지하게 운을 뗐다. “사람이 좋아 보여도, 진짜 마음 열고 지내는 친구는 몇 안 돼.” “근데 이상하게 조 교수는... 처음 봤을 때부터 좀 다르더라고. 말로 설명은 안 되는데, 그냥... 뭔가 통하는 느낌? 이게 뭐랄까, 인연이지 인연.” “그게 말이야... 그냥 딱 느낌 오더라고. 나이 차이는 좀 있어도, 말도 잘 통하고 마음도 맞고! 그냥... 오래된 친구 같아. 우리, 진짜 그런 사이 되는 거지?”재석은 애써 웃음을 지었다.‘아, 저는 그렇게까지 마음이 통한다고 생각 안 했는데요.’‘이거... 분위기 어떻게 빠져나가지?’이미숙은 잔을 탁 내려놓으며 투덜거렸다.“여보, 또 시작이에요? 술만 마시면 꼭 말이 많아진다니까요. 이번엔 또 뭔데요? 의형제라도 맺자는 거예요?”소진헌은 곧장 손을 번쩍 들었다. “나야 좋지! 언제든 가능!” 재석은 더욱더 불안했다.‘이거 술자리지, 무협 소설 실사판 아니죠...?’ 이미숙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조 교수, 신경 쓰지 마. 저 사람, 술만 마시면 저래. 평소엔 멀쩡한 사람인데...” ...식사가 끝나고, 정은이 일어나 식탁을 정리하려 하자 재석도 자연스럽게 일어나 소매를 걷었다. 마치 수백 번 함께 해본 듯 척척 맞는 타이밍과 손놀림. ‘이 집 풍경이 왜 이렇게 익숙하지?’ 정은은 웃음이 나올 뻔했지만 꾹 참았다. “조 교수, 앉아계셔. 손님이신데 내가 치울게.” 소진헌이 나섰다. “정은아, 그만하고 조 교수랑 거실 가서 텔레비전이나 봐. 이건 아빠가 할게.”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1029화

    ‘어...?’ 재석은 문을 닫고 슬리퍼로 갈아 신은 뒤,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식탁 앞에 앉아 젓가락을 들고 있던 두 사람. 소진헌과 이미숙. 둘의 시선이 정확히 재석에게 꽂혀 있었다. ‘지금... 뭐야?’ 재석의 머릿속에서 ‘윙’ 하는 소리와 함께 모든 사고가 멈췄다. ‘어떻게 된 거지...? 이 집에... 왜 정은이 부모님이...?’‘아니... 그럼 아까 내가 문 열고 했던 말은...?’ ‘‘정은아... 나 왔어’라니... 죽여줘...’ 이 어색한 기류를 깨준 건... 다행히도 정은이었다. “아, 교수님 오셨어요? 엇... 이 꽃은...?” 정은은 당황한 기색을 숨기며, 재석이 안고 있던 보라색 튤립 꽃다발을 힐끗 바라봤다. 재석은 반사적으로 꽃을 내밀었고, 정은은 급히 미소를 띠며 받았다. ‘이걸로 위기 탈출...은 무슨.’ 그 순간, 소진헌과 이미숙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쪽으로 성큼 다가왔다. “조 교수님! 퇴근하셨어요?” 소진헌이 반가움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그리고 바로 정은을 향해 한마디. “얘 봐라. 내가 오늘 서프라이즈 하려고 했더니, 이 녀석이 오히려 날 놀라게 하네? 밥까지 다 해놓고, 거기다 조 교수까지 초대해? 완전 뒤통수 맞은 느낌이야, 하하하!” 이 말에 정은은 좀 당황스러웠다.‘아, 아빠... 아니, 그건 아니야...’ 재석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이게 무슨 상황이지...? 나 초대받은 거였어? 지금?’‘그럼 왜 아무도 나한테 말 안 했...’ “자자, 조 교수, 여기 빨리 앉아! 우리 이제 막 먹으려던 참이었어. 정은이가 미리 말만 했어도 상 차리는 거 좀 도와줬을 텐데...” 소진헌은 반쯤 강제로 재석을 식탁 쪽으로 끌고 갔고, 그 등엔 어느새 가벼운 ‘찐한 환대’의 손이 얹혔다. “그리고 이 꽃! 아이고, 정은이 엄마가 보라색을 진짜 좋아하거든. 그 얘기 들었나 봐? 이렇게 예쁜 꽃까지... 괜히 돈 썼네.” 재석은 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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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102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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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1024화

    “으으...” 정은이 식탁에 기대며 흐느적거렸다. “이러다 나, 게으르고 식탐 많은 애로 길러지겠어요.” 재석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응, 걱정하지 마. 충분히 키울 능력 있어.” ‘진짜, 이런 대사는 어디서 배우는 거야...’ 정은은 괜히 머리를 긁적였다. 둘은 그렇게 밤 10시 가까이 함께 시간을 보냈고, 재석은 마지막으로 흑설탕 생강차까지 끓여서 정은에게 건넨 후 집으로 돌아갔다. ...월요일 아침. 하늘은 불붙은 듯 붉게 물들었고, 새하얀 구름조차 태양 빛에 홍조를 띠었다. 날씨는 하루가 다르게 뜨거워지고,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되고 있었다. 정은은 아침 일찍 외출 준비를 마치고, 현관에서 장바구니 세 개를 재석에게 건넸다. “낚싯대는 전 교수님 거, 스카프는 미진 언니, 이어폰은 손 교수님 드리는 거예요... 재석 씨, 잘 기억했죠? 헷갈리면 안 돼요.” 이 물건들은 주말에 둘이 함께 쇼핑하러 갔을 때 산 선물들이었다. 재석은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 “이걸... 왜 줘?” 정은은 고개를 갸웃했다. “설마, 지금까지 실험실 사람들한테 선물 한 번도 안 줘본 거예요?” “월급도 주고, 연말엔 보너스도 주는데, 선물까지 줘야 해?” 두 사람은 계단을 내려가며 대화를 이어갔다. 정은이 설명했다.“월급이랑 보너스는 열심히 일한 수고비예요. 근데 리더나 상사 입장에서는, 가끔 사소한 선물 하나 챙겨주면 사람들이 훨씬 더 기뻐해요.” 재석은 절대 이해할 수 없었다.“보너스보다 더 기뻐한다고?” 정은이 확실히 대답해 줬다.“그럼요! 안 믿기죠? 해 봐요.” 재석은 반신반의하면서 실험실로 향했고, 손에는 여전히 그 선물 가방들이 들려 있었다. ...“진욱아, 이거.” “응? 이게 뭐야?” 전진욱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종이백을 받아서 들었다. 그리고 안을 열어보자 몹시 놀랐다.“헐, 잠깐만... 이거...” Carpenter 사의 SuperCatfish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102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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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1022화

    “찰기 있는 단호박죽이랑 생선 만두야.” 아침을 먹고, 정은은 외출 준비를 마쳤다. 오늘은 재석이 실험실에 가지 않는 날이라 집에 남기로 했다. “정은아.” “네?” 이미 계단까지 내려가던 정은은 재석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재석은 다가와 고개를 살짝 숙이고, 정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집에 일찍 들어와.” ‘이 사람이 방금, 집에 일찍 오라고 했어.’ 순간, ‘집’이라는 단어가 갑자기 현실감 있게 다가왔다. 문 하나, 그리고 그 문 뒤에는 자신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 “네.” 정은은 돌아서려던 재석의 목덜미를 한 손으로 살짝 감싸 안고, 웃으며 입을 맞췄다. 그러고는 한마디 툭 던졌다. “주는 걸 받기만 하면 예의가 아니죠.” 그렇게 말하고, 경쾌하게 돌아서 계단을 내려갔다. 재석은 그 자리에 그대로 멈춰 서서, 멀어져가는 정은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다가, 입꼬리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정은 언니, 안녕하세요!” “응, 안녕.” 정은은 무심히 인사를 건넸다가, 걸음을 멈췄다. 뭔가 뒤늦게 깨달은 듯 민지를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민지야, 요즘 너 되게 일찍 오네?” “어, 어? 그래요?” “응, 확실히.” 민지는 정은보다 더 일찍 와 있었다. “아무래도 여름이라 그런가 봐요? 겨울처럼 침대에 붙어있고 싶지는 않달까...” 민지가 바로 설명했다. “그럴 수도 있지. 근데 서준이는?” 정은은 실험실 안을 둘러봤지만 임서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서준이는 자기 파트 일 다 끝내서 오늘은 안 온대요.” “어머, 너 혼자 두고? 보기 드문 일이네.” 예전 같으면 서준은 자기 일이 끝나도 꼭 따라 나와 민지랑 같이 야근하곤 했었다. “그게...” 민지의 볼이 서서히 붉어졌다. “집에서 밥 해 준다고... 점심시간에 가져다준대요.” ‘서준이... 은근 디테일하네.’ 정은은 마음속으로 엄지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그때, 남진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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