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하, 오늘은 어떤 맛을 원하시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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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하, 오늘은 어떤 맛을 원하시옵니까?” 궁궐의 깊은 밤, 은쟁반 위에 올린 것은 단지 죽 한 그릇이 아니었다. 그녀의 손끝은 향을 다루고, 혀를 깨우며, 심장을 움직였다. 수라간의 말단 궁녀, 정채향. 사흘째 수라를 거부하던 왕세자의 입맛을 되살린 순간, 그녀의 인생도 돌이킬 수 없게 바뀌었다. 그러나 그의 곁에 다가가는 대가로 그녀가 받은 것은 “세자의 수라에 독을 넣으시오. 성공하면 세자빈 자리를 주겠다.” 라는 유혹과, “거절하면 너와 네 가문은 사라진다.” 는 위협이었다. 살기 위해 다가간 자리에서, 사랑을 알아버렸다. 그리고 이제, 그녀는 거꾸로 그들의 입에 독을 먹일 것이다. 감각과 정치, 미각과 사랑이 뒤섞인 궁중 이중첩자의 은밀하고도 치명적인 로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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الفصل الأول

1. 너라는 맛, 그 하나면 족하오

밤이 고요했다. 궁의 담장 위로 가늘게 흘러내리는 달빛이 기와 끝을 타고 스며들고,

조심스레 걸음을 옮기는  발끝마다 서늘한 기운이 잦아들었다.

희디흰 소복 차림의 여인이 은쟁반을 받쳐 들고 내전으로 향하고 있었다.

겹겹이 갖추지 않은 속옷 같은 차림은 단정하면서도 정갈했다. 

얇은 속적삼 너머로 드러나는 어깨선과 허리의 곡선은 의도치 않은 아름다움이었다.

그 여인의 이름은 정채향, 수라간의 막내 찬모였다.

이 날 밤, 그녀는 음식을 들고 세자궁 안으로 향하고 있었다.

은쟁반 위에는 소리 없이 김이 오르는 사골죽 한 그릇이 놓여 있었다.

정성스레 고아낸 뽀얀 국물 위로 얇게 저민 표고버섯과 전복이 빛을 머금었고, 

미나리와 마늘쫑이 고요한 초록을 얹고 있었다.

기름기 하나 없는 국물, 자극 없는 간.

지친 속을 어루만지기 위한, 말 그대로의 ‘위로’였다.

채향은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걸음으로 조용히 세자궁 휘장 앞에 섰다.

단 한 번, 짧게 숨을 들이켰고 곧장 발끝을 안으로 들였다.

문은 소리 없이 열렸다.

내전은 어둠 속에 잠겨 있었고, 불은 켜지지 않았다.

대신 창호 너머로 스며든 달빛이 조용히 방안을 쓰다듬고 있었다.

방 안에는 이현, 조선의 왕세자가 홀로 앉아 있었다.

그는 아직 잠들지 않은 얼굴이었다.

조복의 겉옷은 걸친 채 풀어졌고, 어깨엔 피곤한 고독이 매달려 있었다.

“저하… 속을 달래시라 하시어, 죽을 올려드리옵니다.”

채향의 목소리는 나직하고 조심스러웠다.

마치 그 말조차 국물의 온도를 깰까 두려운 듯, 숨처럼 흘렀다.

이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은쟁반 가까이로 다가왔다.

그의 손끝이 조심스럽게 뚜껑을 젖히자, 김이 피어올랐다.

그는 깊은 숨을 들이켰다.

들숨은 길고 조용했으며, 이어지는 미세한 찡그림과 함께  고개를 아주 천천히 저었다.

채향은 그 반응에 눈동자를 내렸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하께서 원하시는 맛이 아니옵니까?”

그 순간, 이현은 손을 들어 그녀의 턱 아래를 살며시 받쳤다.

채향의 고개가 조심스레 들려 올랐고, 두 사람의 눈빛이  처음으로 정면으로 마주쳤다.

이현의 눈동자는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가까운 거리, 흐트러진 머리카락 너머로 드러난 얼굴, 숨을 삼키는 목선 채향은 도망치지 않았다.

그저 조금 놀란 듯한 숨결을 품은 채, 조용히 시선을 견뎠다.

한참의 침묵이 흐른 뒤,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저하… 오늘은 어떤 맛을 원하시옵니까?”

그 물음에는 부드럽고 단단한 결심이 스며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차린 것이 단지 음식이 아님을 알고 있었고, 

이 밤이 단지 수라의 밤이 아님도 알고 있었다.

이현은 그 말에 마침내, 조용히 입술을 열었다.

“너라는 맛. 그 하나면 족하오.”

그 말은 칼처럼 날카롭지 않았고, 시처럼 아름답지도 않았다.

하지만 채향의 가슴 어딘가를 뜨겁게 찔러왔다.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고, 입 안 가득 퍼지는 생강 향 같은 아릿한 떨림을 삼켰다.

달빛은 오래 머물렀고, 김은 조용히 가라앉았다. 

그 밤은, 그렇게 깊어졌다.

세 날 전… 궁에서는 요 며칠 사이 왕세자가 또다시  식사를 거부했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수라간은 긴장에 휩싸였고, 상궁들은 책임자를 바꾸는 등 호된 질책을 받았다.

그때, 조용히 솥을 지키고 있던 채향에게 뜻밖의 기회가 내려왔다.

그녀는 말이 없었지만 손끝이 섬세했고, 오래된 장과 묵은 들기름을 다룰 줄 알았으며, 

맛을 보지 않고도 국물의 온도를 짐작할 수 있었다.

이현이 음식을 입에 대지 않은 지 사흘 째 되는 날, 그녀는 조심스럽게 찬기를 준비했다.

연한 사골과 들깨를 함께 우려 담백하게 풀고, 

하루 동안 담가 놓은 미나리와 마늘쫑을 곱게 다듬어 맨 끝에 얹었다.

자극적인 맛은 철저히 배제되었고, 오직 향과 온기만 남았다.

그녀는 국물을 한 숟가락 떠 입에 머금었다.

미지근한 온도가 혀에 스치자, 조용히 눈을 감았다.

“이건... 사람을 위한 맛이 아니옵니다. 저하의 속을 위한 맛이어야 하옵니다.”

그녀는 속삭이듯 중얼였고, 찬그릇 위로 조심스레 뚜껑을 덮었다.

이윽고 그녀는 하얀 옷을 갈아입고, 그 음식 하나를 들고 세자궁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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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너라는 맛, 그 하나면 족하오
밤이 고요했다. 궁의 담장 위로 가늘게 흘러내리는 달빛이 기와 끝을 타고 스며들고, 조심스레 걸음을 옮기는 발끝마다 서늘한 기운이 잦아들었다.희디흰 소복 차림의 여인이 은쟁반을 받쳐 들고 내전으로 향하고 있었다.겹겹이 갖추지 않은 속옷 같은 차림은 단정하면서도 정갈했다. 얇은 속적삼 너머로 드러나는 어깨선과 허리의 곡선은 의도치 않은 아름다움이었다.그 여인의 이름은 정채향, 수라간의 막내 찬모였다.이 날 밤, 그녀는 음식을 들고 세자궁 안으로 향하고 있었다.은쟁반 위에는 소리 없이 김이 오르는 사골죽 한 그릇이 놓여 있었다.정성스레 고아낸 뽀얀 국물 위로 얇게 저민 표고버섯과 전복이 빛을 머금었고, 미나리와 마늘쫑이 고요한 초록을 얹고 있었다.기름기 하나 없는 국물, 자극 없는 간.지친 속을 어루만지기 위한, 말 그대로의 ‘위로’였다.채향은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걸음으로 조용히 세자궁 휘장 앞에 섰다.단 한 번, 짧게 숨을 들이켰고 곧장 발끝을 안으로 들였다.문은 소리 없이 열렸다.내전은 어둠 속에 잠겨 있었고, 불은 켜지지 않았다.대신 창호 너머로 스며든 달빛이 조용히 방안을 쓰다듬고 있었다.방 안에는 이현, 조선의 왕세자가 홀로 앉아 있었다.그는 아직 잠들지 않은 얼굴이었다.조복의 겉옷은 걸친 채 풀어졌고, 어깨엔 피곤한 고독이 매달려 있었다.“저하… 속을 달래시라 하시어, 죽을 올려드리옵니다.”채향의 목소리는 나직하고 조심스러웠다.마치 그 말조차 국물의 온도를 깰까 두려운 듯, 숨처럼 흘렀다.이현은 대답하지 않았다.그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은쟁반 가까이로 다가왔다.그의 손끝이 조심스럽게 뚜껑을 젖히자, 김이 피어올랐다.그는 깊은 숨을 들이켰다.들숨은 길고 조용했으며, 이어지는 미세한 찡그림과 함께 고개를 아주 천천히 저었다.채향은 그 반응에 눈동자를 내렸다.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며 조심스럽게 물었다.“…저하께서 원하시는 맛이 아니옵니까?”그 순간, 이현은 손을 들어 그녀의 턱 아래를 살며시 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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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국물에 묻은 기억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아침이었다.하늘은 투명하게 맑았고, 햇살은 서까래 틈새로 조용히 스며들었다.수라간의 솥뚜껑은 이른 시각부터 덜그럭거렸고, 김은 고요히 피어올랐다.기름 냄새, 장 향, 불에 데운 토기에서 올라오는 구수함.그 모든 것들이 뒤섞여 수라간은 언제나처럼 부지런히 하루를 데우고 있었다.하지만 그 고요한 분주함 속에서도, 오늘은 어딘가 긴장이 감돌고 있었다.채향은 말이 없었다. 그녀는 다른 궁녀들보다 말을 아꼈고, 웃음도 드물었다.그러나 손끝은 정직했고, 항상 조용히, 깨끗하게, 단정하게 움직였다.오늘 아침 그녀의 손은 무나 전복을 씻고 있었고, 손바닥에 떨어진 찬물이 닿을 때마다 그녀는 조용히 눈을 감고 숨을 죽였다.“이리 내보게, 찬모 윤씨가 상궁께 문책을 받았대.”한쪽에서 궁녀들이 웅성였다.“이번엔 곰국에서 비계를 덜 거두었다나 봐. 세자 저하께서 그 자리에서 숟가락을 내려놓으셨대.”“세자 저하의 입이 까다로운 건 익히 아는 일이지. 사흘째, 수라를 전혀 드시지 않는다 하더라.”“듣자 하니, 대비마마께서도 속이 타시다던데…”그 말이 채 끝나기 전, 수라간의 대문이 세차게 열렸다.회색 도포를 걸친 상궁 하나가 안으로 들어섰다. 눈빛은 날카로웠고, 손에 들린 서찰 하나가 긴장된 분위기를 더욱 꾹꾹 눌러앉혔다.“수라간 궁녀 중, 죽을 책임질 자가 누구더냐.”정적 속에서, 채향이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그녀는 대답 대신 고개를 숙였고, 상궁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앞으로 사흘. 네가 세자저하의 수라를 맡거라.”그날 밤, 채향은 혼자 남아 국물을 우렸다.볶지 않은 들깨를 물에 불리고, 사골을 한 번 데쳐낸 후 다시 우렸다.기름은 걷고, 기름은 또 걷었다.그녀는 국물의 색을 보지 않았다. 향을 맡지 않았다.그저 온도를 느꼈고, 귀를 기울였다.‘이 정도 끓음이면, 혀끝에선 거슬리겠지. 조금 더 낮춰야 해.’그녀는 손등에 물을 묻혀 온기를 재며, 무언가에 귀를 대듯, 냄비의 속삭임을 들었다.이현은 그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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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온기라는 낯선 감정
국물은 말갛고 뜨거웠다.숟가락에 담겨 조심스레 입술을 적신 그 한 모금,짧은 숨이 따라 들이켜지고, 아주 오래된 무언가가 천천히 풀리는 듯한 기분.이현은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똑같은 동작을 한 번 더 반복했다.두 번째 숟가락은 첫 번째보다 더 맑게 목을 타고 흘렀고, 목울대 너머로 조용히 뜨거움이 내려갔다.무엇이 달랐을까.그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세 번째 숟가락을 들었다.이후의 동작들은 생각 없이 이루어졌다.마치 손끝이 의식보다 먼저 움직이는 듯, 그는 조용히 그릇을 비워나갔다.죽을 다 비운 뒤, 그는 침묵한 채 그릇을 내려다보았다.깨끗이 비워진 바닥엔 단 하나의 흔적도 남아있지 않았고,그릇 가장자리엔 국물 자국마저 없이 마른 흰 테두리만 남아 있었다.“…조용하군.”그는 혼잣말처럼 중얼였고, 그 말이 어쩐지 입 안에 남은 향보다 더 오래 맴도는 것만 같았다.다음 날 아침, 수라간은 그야말로 술렁이고 있었다.“저하께서… 숟가락을 드셨다고?”“남기지 않으셨다 들었어요. 그것도 세 그릇 중 가장 늦게 올린 죽을!”“그게 누구 솜씨라더냐?”그 궁녀들이 소곤거리는 곁에서, 정채향은 평소와 다름없는 손놀림으로 감자를 깎고 있었다.말없이, 조용히, 고개 숙인 채 무언가를 다듬는 그 모습은 마치 오래된 식물 뿌리를 씻는 농부 같기도 했다.“정궁녀, 상궁님께서 찾으십니다.”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그녀는 칼을 멈추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한 치의 어긋남도 없는 자세로 상궁이 있는 안채에 들어선 그녀는, 눈길을 돌리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너는 네가 어젯밤 무엇을 한 줄 아느냐.”상궁의 목소리는 낮고 가라앉아 있었지만, 그 말에 담긴 울림은 결코 작지 않았다.“세자 저하께서 네가 올린 죽을 다 드셨다. 삼 년째, 그런 일이 없었다.”“송구하옵니다, 상궁마마. 소녀는 그저… 속을 위하는 맛을 올렸을 뿐이옵니다.”“그 속이 단순한 장부의 속이었겠느냐.”상궁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그대의 손끝엔... 무언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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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나를 속이지 않은 맛
“수라를 올린 자를 내전 앞으로 부르라.”그 한 마디는 궁궐 깊은 복도를 타고, 수라간의 안쪽까지 이르렀다.불리는 이름은 단 하나였다.정채향. 그녀는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그러고는, 물을 헹구던 손을 조용히 거두었다.물 위에 떠 있던 미나리 줄기 하나가 흘러나와, 대야의 끝에서 툭~하고 작은 파문을 남겼다.세자의 내전으로 들어서는 길은 짧지도 길지도 않았다.그러나 오늘은, 유독 멀게만 느껴졌다.정갈한 옷차림을 가다듬고, 머리칼을 단정히 빗은 채향은 조용히 발끝을 모았다.곧게 세운 목선과 고개 아래 숨긴 떨림이 겹쳐진 걸음.그녀는 걷고 있었지만, 그 안엔 서 있는 것 같은 고요가 있었다.휘장이 젖히고, 푸른빛이 도는 저고리 자락이 안으로 스며들었다.그 순간, 이현이 책을 덮으며 고개를 들었다.시선이 맞닿았다. 방 안엔 아무런 기척도, 말도 없었지만, 그 짧은 교차에 물결처럼 미세한 파장이 일었다.그녀는 고개를 숙였고, 그는 오래도록 아무 말이 없었다.“이름이 무엇이냐.”이현의 목소리는 담담했고, 부드러웠으며, 그 끝엔 어쩐지 물기가 묻어 있었다.“수라간 찬모, 정채향이라 하옵니다.”채향은 또박또박, 그러나 지나치지 않게 말했다.그의 시선이 그녀의 얼굴에서 손끝으로, 다시 발끝으로 천천히 흘러내렸다.“어디서 배웠느냐. 그 죽. 어느 서책에서 본 맛도, 수라간의 방식도 아니더라.”“배운 적은 없사옵니다.”“다만... 소녀는 국물의 온기를 느껴보려 하였고, 향이 아니라 목의 끝에 남는 부드러움을 따랐사옵니다.”그 말에 이현은 짧은 침묵 끝에 시선을 거두었다.“…네가 만든 그 맛. 그것은 나를 속이지 않았소.”채향은 고개를 들지 않은 채 입술을 다물었다.그 말이 칭찬인지, 경고인지, 그도 그녀도 명확히 알지 못했다.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가, 그녀의 국물에 담긴 무언가를 느꼈다는 사실이었다.그리고 바로 그 다음 날.경복궁의 중전전 앞에 화려한 마차 하나가 멈췄다.윤기 흐르는 가체, 눈부신 비단 치마, 도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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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그대는 모르게, 나는 깊어지고
손끝이 차가웠다.하지만 그 차가움이 어쩐지 익숙했다.채향은 무심한 얼굴로 생강을 썰고 있었다.날이 선 채칼 아래, 얇게 밀려나오는 노란 섬유들이 쌓여 꽃잎처럼 휘날렸다.향은 강했고, 톡 쏘는 냄새가 코끝을 찔렀지만, 그녀는 눈을 깜빡이지 않았다.그녀의 손은 단정했고, 조용했으며, 마치 감정을 씻는 의식처럼 규칙적이었다.그러나 그 규칙 아래, 보이지 않게 감정은 조금씩 요동치고 있었다.“정궁녀, 상궁마마께서 전하십니다. 오늘 수라는 일찍 들이시라 하옵니다.”그 말에 채향은 고개를 끄덕였다.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손을 멈추지 않았다.그 무렵, 소희는 금실 자수가 놓인 비단 위에 반쯤 누운 채 거울을 들여다보고 있었다.눈가에 찍은 연지, 머리칼에 꽂은 봉황비녀, 얇은 입술엔 윤기 나는 홍색이 고루 번져 있었다.“이래서야, 세자 저하께서 눈을 못 드시는 것도 당연하지.”스스로 중얼이며 웃었고, 거울 너머의 자신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그 얼굴은 흠잡을 데 없이 아름다웠고, 그녀는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정채향… 하찮은 궁녀 주제에.”목소리는 낮았지만, 뱉은 말은 날이 서 있었다.그녀는 그 이름이 한 번 언급되었을 뿐인데도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이현이 누군가에게 '관심'이라는 이름의 시선을 준다는 것 자체가, 그녀에겐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이현은 그날따라 책을 펼치지도 못한 채 창가에 앉아 있었다.머릿속이 어지럽진 않았다.다만, 지나간 어떤 장면이 자꾸 머무르며 뒷덜미를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흰 죽을 올린 여인. 고개를 들지 않았던 얼굴.그러나 가만히 떨리던 그 목소리.“저하, 오늘은 어떤 맛을 원하시옵니까…”그 물음이 자꾸만 되새겨졌다.그 안엔 억지스러운 감정도, 지나친 공손도 없었다.그저 진심처럼, 온기처럼 스며드는 물결 하나가 있었다.그는 그날의 향을, 온도를, 죽의 깊이를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채향은 오늘도 국을 끓이고 있었다.그러나 오늘은, 국물 위에 얹을 고명을 오래 망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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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마음을 두드리는 한 그릇
동궁 북측, 수라간과 침방이 이어진 좁은 복도 끝.그 안쪽 깊은 곳에 있는 조용한 방 하나.정갈하게 접힌 이불과 다림질한 두루마기, 벽에 기대어 놓인 나무 국자와 볕에 말린 향신초 꾸러미들.그곳은 수라간 찬모 정채향이 머무는 방이었다.그날도 채향은 말을 아끼고 손을 움직이고 있었다.쌀을 씻은 물이 손등 위로 부드럽게 흘러내렸고, 바닥에 깔린 나무 대야에 작은 물소리가 일었다.그녀는 아무 생각 없이, 그 물소리를 듣고 있었다.마치 국물 끓는 소리처럼, 한결같고 미세하게 흔들리는 그 리듬을.그러던 중 문이 열렸다. 그리고,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정채향이 너냐.”낯선 향수와 비단 소리. 그것은 꽃이 아니라, 칼이었다.문턱 너머에 선 여인은 모든 것을 내려다보는 시선으로 채향을 바라보았다.은장식이 박힌 비단 저고리, 윤이 흐르는 청홍 치마, 그리고 너무도 또렷한 얼굴. 궁 안에서 누가 보아도 알아볼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민소희. 좌의정 민대감의 딸이자, 예비 세자빈으로 내정된 여인.“인사도 없느냐.”소희의 입꼬리가 아주 가볍게 올라갔다.그러나 그것은 미소가 아니라 선언이었다.나는 너보다 위에 있다는 것. 내가 먼저 이 공간을 점령하겠다는 것.채향은 조용히 일어섰다. 그리고 고개를 깊이 숙였다.“수라간 찬모 정채향, 예비 세자빈 마마를 뵈옵니다.”목소리는 낮았고, 단정했고, 감정이 없었다.소희는 그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그녀가 원했던 건 떨림이었고, 당황이었고, 두려움이었다.“들었네. 세자 저하께서 네가 만든 국물을 다 드셨다고.”“송구하옵니다. 그저, 속을 달래는 한 그릇이었을 뿐이옵니다.”“그게 속을 달래는 국물이면, 나는 그 손끝이 마음을 달래는 장단도 갖췄다고 들어야겠군.”말끝엔 은근한 조롱이 배어 있었다.채향은 대답하지 않았다.다만, 아주 짧게 눈길을 들었다.그 눈빛엔 무례에 대한 분노도, 자신을 내세우려는 의지도 없었다.오히려 맑았다. 그것은 소희에게 가장 불쾌한 눈빛이었다.“그대, 이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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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그의 시선이 머무는 곳에, 내가 있었다
수라간 안쪽 작은 부엌. 솥이 올려진 불은 낮고 부드러웠으며, 고요하게 피어오르는 김은 마치 숨결 같았다.정채향은 지금, 된장국을 끓이고 있었다.된장 하나, 들기름 두 방울, 볶아둔 표고버섯 한 줌.작은 국자 하나로 천천히 저어가며, 그녀는 향을 읽고 있었다.오늘의 수라는 특별하지 않았다.그러나 이현의 속이 얼마나 무거운지를 생각하면,화려한 고명보다 이런 구수하고 낯익은 맛이 필요하다고 그녀는 생각했다.“음식은 혀끝에 닿기 전에 마음으로 도달해야 하니까요.”그녀의 머릿속엔 이현의 눈빛이 있었다.그 눈은 늘 조용했고, 온도가 낮았지만,그녀의 수라 앞에서는 언제나 아주 잠깐, 머뭇거렸다.그 망설임은 그녀에게 어떤 허락처럼 느껴졌고,그 순간만큼은, 음식이라는 이유로 단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그래서, 수라간으로 사람을 보냈다고?”민소희는 여느 때처럼 단정하게 차려입은 채머리 위에 장식한 황금 장신구를 바라보며 물었다.“그 아이… 정채향을 한 번 더 보아야겠어.”그녀의 말투는 여유로웠지만, 그 눈빛은 단단히 말려 있었다.“식사 하나로 세자의 눈에 든다? 그 손끝이 아무리 정갈하다 해도, 나의 얼굴만큼은 아니겠지.”하녀는 고개를 숙였고, 소희는 다시 비단 수건으로 손톱을 천천히 닦았다.“마마… 수라간 외에도, 예전 찬성댁 사위 분과 관련된 사람들이 요즘 수라간 근처를 오간다 하옵니다.”“무슨 뜻이지?”“그 궁녀가 혹, 누군가의 부탁을 받고 움직이는 건 아닐지… 소문이 돌고 있사옵니다.”소희는 미간을 찌푸리며 가만히 거울을 내려놓았다.“그래. 그렇다면… 궁녀 하나라 해도, 그냥 두어선 안 되겠지.”이현은 그날, 수라가 도착하기도 전부터 숟가락을 손에 쥐고 있었다.그는 기다리는 사람이었다. 언제부터였는지 모르지만, 이제 그에게 식사란 단지 허기를 채우는 일이 아니었다.수라는 조용히 들어왔다.쟁반 위에는 들깨향 은은한 된장국, 곁들여진 말린 무 조림,마지막으로 얇게 편 생강에 꿀을 바른 후식이 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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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나를 사람답게 만들어주는 음식
세자궁의 창호 밖으로 노을이 흘렀다.붉은 빛은 길게 늘어진 소나무 그림자를 삼키고,기와 지붕 위로 사위는 빛조차 서늘하게 식어가고 있었다.그 시간, 내전 안엔 아직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왕세자 이현은 등받이에 기대 앉은 채, 반쯤 덮인 책장을 바라보며 조용히 숨을 쉬고 있었다.책은 며칠째 같은 장에서 넘어가지 않았고, 그가 머릿속으로 되씹는 건 오직 하나였다.정채향…그녀는 궁녀였다.그의 상에 수라를 올리는 찬모일 뿐이었다.하지만 이상하게도, 그의 머릿속에 남은 건 그녀가 만든 국물의 맛보다도말없이 고개를 들던 그 눈빛, 그리고 떠날 때마다 문 뒤로 가라앉는 소리 없는 걸음이었다.‘사람의 기척이 이렇게 조용할 수 있다니. 그런데 왜, 잊히질 않는 걸까.’그는 생각했다.그 고요가 오히려 더 크게 마음속에 남는다는 것을.그 무렵, 수라간 안. 채향은 오늘도 똑같은 도마 앞에 서 있었다.그러나 손끝의 감각이 어딘가 조금 달랐다.오늘 그녀가 고른 식재는 고사리였다.말린 고사리를 뜨거운 물에 부드럽게 불려,들기름과 마늘, 간장을 고르게 무친 뒤,정성껏 볶아낸 다음 마지막에 깨를 솔솔 뿌렸다.그건 유독 어머니가 자주 해주던 반찬이었다.많은 맛을 넣지 않았지만, 기억은 언제나 거기서 살아났다.그녀는 문득, 세자의 입을 떠올렸다.조용히 숟가락을 들고, 아주 천천히 국물을 넘기던 그 순간.그리고,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들었던 눈빛.오늘은, 그런 이현의 저녁에 조금 더 개인적인 무언가를 넣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수라가 세자궁에 도착했을 땐, 해는 이미 서쪽을 다 삼킨 뒤였다.은쟁반 위, 작은 그릇에는 고사리 나물이 놓여 있었고,그 옆엔 조용히 김이 나는 국과 노르스름한 연근 조림,그리고 마지막엔 후식으로 쑥떡이 하나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그 단출한 상 앞에서, 이현은 처음으로 작게 웃었다.“이 쑥떡… 이런 걸 받기는 처음이군.”그는 손가락으로 떡을 들었다.쫀득한 표면, 안에 숨은 팥소의 단맛, 그리고 쑥 향이 머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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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과거는 말이 없지만, 그림자는 향으로 남는다
그날 아침, 수라간 앞마당엔 유난히 서늘한 기운이 맴돌고 있었다.해는 떠 있었지만 볕은 이르지 않았고,찬장 문짝이 닫히는 소리마저도 평소보다 더 날카롭게 울렸다.채향은 오늘도 언제나처럼 부엌 안에 있었다.그러나 손끝이 조금 느렸다.물을 끓이는 솥의 김은 평소처럼 퍼져오르지만,그 안의 마음만큼은 자꾸만 무거운 그림자를 품고 있었다.지난 밤, 세자의 말이 떠올랐다.“언젠가는, 그대의 이야기를 듣고 싶소.”그 말은 다정했지만, 동시에 무거웠다. 채향은 말할 수 없었다.강화도의 바람을, 무너졌던 가문을,그리고 그날 이후 자신이 사라지듯 들어온 이 궁의 어두운 벽을.그녀는 아직, 세자의 눈동자를 더럽히고 싶지 않았다.“정채향이라는 아이, 강화도에서 살다 궁으로 들어왔다더군요.”소희는 조용히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그 옆엔 의관 복장을 한 남자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그 집안, 예전에 역모에 연루되었다는 소문이 있었습니다. 정확하진 않으나, 종친 쪽에서도 확인에 나섰다고 합니다.”“역모라… 좋지 않군요.”소희는 쓴차를 마시며 입술을 닦았다.하지만 그 눈빛엔 쓴맛 하나 묻어나지 않았다.“이참에 폐하께 말씀을 올려야겠어요. 세자빈 책봉이 미뤄진 지도 오래되었으니 혼례를 서둘러야 궁 안의 풍문도 잦아들겠지요.”“정궁 대비마마께도 조용히 말씀드리면, 움직이실 겁니다.”“좋아요. 이제 그 아이는, 누구의 눈에도 ‘위험한 향’으로 보이도록 만들어야죠.”같은 시각, 세자 이현은 대궐 후원 정자에 앉아 있었다.그 앞엔 누구도 없었고, 서책도 들고 있지 않았다.오직 바람이 불고, 정자 위엔 소리가 없이 햇빛만 들고 있었다.그는 요 며칠 동안, 정채향이라는 이름을 너무 자주 떠올리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그녀의 손, 그녀의 말투, 그녀가 가끔 잠시 멈칫하는 침묵의 순간들까지.‘그 궁녀는 나를 위해 음식을 짓는다.그 말은, 누군가의 마음을 먹는다는 뜻일지도 모르지.’그는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그리고 알 수 없는 허무함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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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감정이 아닌 결심이 된 사람
아침 해가 궁의 처마 위로 고개를 들었다.밤새도록 얼어 있던 나뭇가지 끝이 서서히 녹기 시작했고,수라간 뒷마당에 놓인 물독 위엔 얇은 얼음이 금이 간 채 파르르 떨고 있었다.정채향은 그 물을 떠다 쌀을 씻고 있었다.손끝에 닿는 물기 하나, 쌀알이 부딪히며 나는 작은 마찰음,그 모든 것이 그녀에겐 위안이자 현실이었다.그러나 오늘의 쌀은 이상하게도 잘 씻기지 않았다.두어 번 맑은 물로 헹구었음에도,마음속 어딘가에 떠도는 불청객 같은 기척이 지워지지 않았다.“세자빈 책봉을 다시 논의해야겠습니다.”대비마마의 온화한 목소리가 오늘따라 더욱 무겁게 궁 안에 울려 퍼졌다.“세자 저하께서 혼례를 늦추고 계신 사이, 소문과 말이 더욱 늘었사옵니다.”그 말에 조정 대신들이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이미 민소희의 집안은 그 배경과 외척의 힘으로 인해세자빈의 자리에 가장 유력하게 거론되고 있었고,그 누구도, 그녀 외에 다른 여인의 이름을 내놓을 용기를 갖고 있지 않았다.“세자 저하께 아뢸 일이옵니다.”내관이 조심스럽게 예를 올렸고,이현은 그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단호하게 대답했다.“책봉 논의는 나중으로 미루시오.”그 한마디에 대전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싸늘해졌다.대비는 아무 말 없이 차를 들었고, 소희는 눈길을 내리지 않은 채, 가만히 숟가락을 뒤집었다.“그 여인 때문입니까?”그날 밤, 민소희는 조용히 중궁전을 찾아와 이현 앞에 앉았다.마침내, 그녀가 직접 물었다.“정채향. 그 아이가 저하께 드리는 음식 속엔 무엇이 들었습니까? 그대의 마음까지 데워줄 만큼의…”“그만두시오.”이현은 처음으로 그녀의 말을 끊었다.그 목소리는 높지 않았지만, 부드러움은 없었다.“그 아이는 나의 궁녀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그렇다면, 왜 저를 외면하십니까?”소희는 울지 않았다. 그러나 눈빛은 날카로웠다.그것은 상처라기보단, 자존심의 균열이었다.이현은 아무 말 없이 자리를 떴다.그리고 중궁전을 나서며 스스로에게 되뇌었다.‘그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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