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저하, 오늘은 어떤 맛을 원하시옵니까?” 궁궐의 깊은 밤, 은쟁반 위에 올린 것은 단지 죽 한 그릇이 아니었다. 그녀의 손끝은 향을 다루고, 혀를 깨우며, 심장을 움직였다. 수라간의 말단 궁녀, 정채향. 사흘째 수라를 거부하던 왕세자의 입맛을 되살린 순간, 그녀의 인생도 돌이킬 수 없게 바뀌었다. 그러나 그의 곁에 다가가는 대가로 그녀가 받은 것은 “세자의 수라에 독을 넣으시오. 성공하면 세자빈 자리를 주겠다.” 라는 유혹과, “거절하면 너와 네 가문은 사라진다.” 는 위협이었다. 살기 위해 다가간 자리에서, 사랑을 알아버렸다. 그리고 이제, 그녀는 거꾸로 그들의 입에 독을 먹일 것이다. 감각과 정치, 미각과 사랑이 뒤섞인 궁중 이중첩자의 은밀하고도 치명적인 로맨스.
View More밤이 고요했다. 궁의 담장 위로 가늘게 흘러내리는 달빛이 기와 끝을 타고 스며들고,
조심스레 걸음을 옮기는 발끝마다 서늘한 기운이 잦아들었다.
희디흰 소복 차림의 여인이 은쟁반을 받쳐 들고 내전으로 향하고 있었다.
겹겹이 갖추지 않은 속옷 같은 차림은 단정하면서도 정갈했다.
얇은 속적삼 너머로 드러나는 어깨선과 허리의 곡선은 의도치 않은 아름다움이었다.
그 여인의 이름은 정채향, 수라간의 막내 찬모였다.
이 날 밤, 그녀는 음식을 들고 세자궁 안으로 향하고 있었다.
은쟁반 위에는 소리 없이 김이 오르는 사골죽 한 그릇이 놓여 있었다.
정성스레 고아낸 뽀얀 국물 위로 얇게 저민 표고버섯과 전복이 빛을 머금었고,
미나리와 마늘쫑이 고요한 초록을 얹고 있었다.
기름기 하나 없는 국물, 자극 없는 간.
지친 속을 어루만지기 위한, 말 그대로의 ‘위로’였다.
채향은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걸음으로 조용히 세자궁 휘장 앞에 섰다.
단 한 번, 짧게 숨을 들이켰고 곧장 발끝을 안으로 들였다.
문은 소리 없이 열렸다.
내전은 어둠 속에 잠겨 있었고, 불은 켜지지 않았다.
대신 창호 너머로 스며든 달빛이 조용히 방안을 쓰다듬고 있었다.
방 안에는 이현, 조선의 왕세자가 홀로 앉아 있었다.
그는 아직 잠들지 않은 얼굴이었다.
조복의 겉옷은 걸친 채 풀어졌고, 어깨엔 피곤한 고독이 매달려 있었다.
“저하… 속을 달래시라 하시어, 죽을 올려드리옵니다.”
채향의 목소리는 나직하고 조심스러웠다.
마치 그 말조차 국물의 온도를 깰까 두려운 듯, 숨처럼 흘렀다.
이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은쟁반 가까이로 다가왔다.
그의 손끝이 조심스럽게 뚜껑을 젖히자, 김이 피어올랐다.
그는 깊은 숨을 들이켰다.
들숨은 길고 조용했으며, 이어지는 미세한 찡그림과 함께 고개를 아주 천천히 저었다.
채향은 그 반응에 눈동자를 내렸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하께서 원하시는 맛이 아니옵니까?”
그 순간, 이현은 손을 들어 그녀의 턱 아래를 살며시 받쳤다.
채향의 고개가 조심스레 들려 올랐고, 두 사람의 눈빛이 처음으로 정면으로 마주쳤다.
이현의 눈동자는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가까운 거리, 흐트러진 머리카락 너머로 드러난 얼굴, 숨을 삼키는 목선 채향은 도망치지 않았다.
그저 조금 놀란 듯한 숨결을 품은 채, 조용히 시선을 견뎠다.
한참의 침묵이 흐른 뒤,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저하… 오늘은 어떤 맛을 원하시옵니까?”
그 물음에는 부드럽고 단단한 결심이 스며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차린 것이 단지 음식이 아님을 알고 있었고,
이 밤이 단지 수라의 밤이 아님도 알고 있었다.
이현은 그 말에 마침내, 조용히 입술을 열었다.
“너라는 맛. 그 하나면 족하오.”
그 말은 칼처럼 날카롭지 않았고, 시처럼 아름답지도 않았다.
하지만 채향의 가슴 어딘가를 뜨겁게 찔러왔다.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고, 입 안 가득 퍼지는 생강 향 같은 아릿한 떨림을 삼켰다.
달빛은 오래 머물렀고, 김은 조용히 가라앉았다.
그 밤은, 그렇게 깊어졌다.
세 날 전… 궁에서는 요 며칠 사이 왕세자가 또다시 식사를 거부했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수라간은 긴장에 휩싸였고, 상궁들은 책임자를 바꾸는 등 호된 질책을 받았다.
그때, 조용히 솥을 지키고 있던 채향에게 뜻밖의 기회가 내려왔다.
그녀는 말이 없었지만 손끝이 섬세했고, 오래된 장과 묵은 들기름을 다룰 줄 알았으며,
맛을 보지 않고도 국물의 온도를 짐작할 수 있었다.
이현이 음식을 입에 대지 않은 지 사흘 째 되는 날, 그녀는 조심스럽게 찬기를 준비했다.
연한 사골과 들깨를 함께 우려 담백하게 풀고,
하루 동안 담가 놓은 미나리와 마늘쫑을 곱게 다듬어 맨 끝에 얹었다.
자극적인 맛은 철저히 배제되었고, 오직 향과 온기만 남았다.
그녀는 국물을 한 숟가락 떠 입에 머금었다.
미지근한 온도가 혀에 스치자, 조용히 눈을 감았다.
“이건... 사람을 위한 맛이 아니옵니다. 저하의 속을 위한 맛이어야 하옵니다.”
그녀는 속삭이듯 중얼였고, 찬그릇 위로 조심스레 뚜껑을 덮었다.
이윽고 그녀는 하얀 옷을 갈아입고, 그 음식 하나를 들고 세자궁으로 향했다.
어느 날이었다. 그날은 국이 끓지 않았다.수라간에도 불이 들어오지 않았고, 솥은 조용히 비워져 있었다.그러나 누구도 그걸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왜냐하면, 그날은 정채향이 처음으로 ‘국을 끓이지 않아도 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그녀는 조용히 궁 밖으로 나왔다.머리에 쓴 흰 비단 건은 궁녀의 표식이 아니었고,몸에 두른 저고리와 치마는 수라간의 규범이 아니었다.그녀는 오늘, 사람으로서의 하루를 살기로 했다.그곳은 한강 어귀의 평지였다.봄볕이 내려앉은 들녘,바람에 물결처럼 일렁이는 보리밭 너머로 한 사람의 그림자가 보였다.이현이었다.
봄이 왔다. 아주 조용히, 마치 오래 기다린 손님처럼.새벽 공기엔 이른 쑥 내음이 섞여 있었고,골목의 아이들은 손에 마른 국수발을 쥔 채 뛰어다녔다.궁궐의 수라간에도 봄의 빛이 스며들었다.정채향은 여전히 국을 끓이고 있었지만, 예전처럼 바쁘거나 절박하지 않았다.이젠 그녀 혼자만이 국을 끓이지 않았다.그녀는 이제 ‘가르치는 자’가 되었고,국을 끓이는 법이 아닌, 사람의 마음을 담는 법을 나누는 이가 되었다.열일곱의 젊은 궁녀 하나가 솥 앞에서 서툰 손짓으로 국자를 휘젓다곁눈질로 채향을 바라봤다.“…낭자, 이거 너무 진한 것 같사옵니다.”채향은 다가가 조
그날의 식탁은 정갈했다.금도 은도 없었고, 붉은빛 수라반도 아니었다.오직 나무로 짠 조촐한 상,상 위엔 하얀 사기 사발 두 개,그리고 국 하나가 놓여 있었다.채향과 이현은 그 상 앞에 마주 앉았다.사람은 많지 않았지만 공기는 마치 모두가 지켜보는 듯 조용히 숨을 죽이고 있었다.채향은 먼저 고개를 숙였다.그리고 국자 하나로 국을 퍼 이현의 사발에 담았다.맑고 잔잔한 국물 위로 얇게 저민 유자 껍질이 하나, 천천히 떠올랐다.이현은 말없이 그 사발을 들어 숟가락 하나로 국을 떴다.국물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고, 그 떨림은
수라간은 오랜만에 아침보다 먼저 불이 들어왔다.그 불은 누군가의 지시가 아닌, 누군가의 발걸음으로 인해 지펴진 것이었다.정채향이 돌아왔다.그녀는 익숙한 발걸음으로 솥 앞에 섰고, 과거의 국자와는 다른 새로운 손의 무게로 국을 짓기 시작했다.아무도 말하지 않았지만 수라간의 공기마저 달라져 있었다.화로는 예전보다 낮은 불로 타올랐고,솥은 마치 그 주인을 기억하듯 조용히 숨을 죽이고 끓기 시작했다.그녀가 처음 손에 든 재료는 멥쌀이었다.쌀은 그녀와 함께 여행을 다녀온 것처럼 조용히 불을 받아들였고, 그 위에 채향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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