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억척스럽게 빚을 갚으며 살아가던 생계형 감정사, 서연. 어느 날 생뚱맞게 치료사로 고용되어 50억 전속 계약을 맺는다. 24시간, 1미터. 신의 실수를 뒤집어쓴 깨진 그릇 이단은 서연만이 유일한 구원이란다. “피해 금액은 을이 산정한다? 단 씨, 이런 조항 막 쓰면 사기당해요.” “그대가 원하는 것이라면, 얼마든지.” 멜로 눈빛에 손발은 오그라들어도 계산은 정확하게! 그런데, 힘을 쓸 때마다 생명력이 깎여 나간단다. 살아남으려면 신의 파편을 찾아 정화하고 흡수해야 하는데... 자본주의로 무장한 생계형 감정사 서연의 50억짜리 목숨 건 퇴마 로맨스!
View More프롤로그. 99년의 영광, 1년의 지옥
죄명은 사랑이었다.
하늘의 이치를 관장하던 고귀한 신선.
그가 감히 인간 여인을 연모하여, 정해진 수명을 늘리기 위해 사사로이 신력을 사용한 죄.천계는 그 오만함을 용서하지 않았다.
콰아앙!
하늘이 찢어지는 굉음과 함께 신선은 지상으로 내쳐졌다.
추락하는 순간, 그의 영혼은 수천수만 조각으로 찢겨나갔고 신력의 대부분이 허공으로 흩어졌다.
남은 힘마저 폭주하기 시작했다.
이대로 지상에 떨어진다면 반경 수백 리가 잿더미로 변할 터였다.
‘내 힘을 나눠 담아야 한다.’
신선은 자신의 힘을 받아낼 그릇을 찾아 헤맸다.
그때 그의 눈에 산속의 불빛이 들어왔다.
미친 듯이 타오르는 가마터.
붉다 못해 푸르게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세상 그 어떤 그릇보다 단단하고 완벽한 도자기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고려 초기, 천 년 전의 겨울.
도공 단은 핏발 선 눈으로 가마를 노려보고 있었다.
자신의 모든 예술혼과 생명력을 태워, 신조차 감탄할 완벽한 도자기를 빚어내고 있었다.
세상이 비취색 청자에 열광하던 시대.
그는 홀로 시대를 앞서 순백의 아름다움을 빚어내고 있었다.아름다운 도공의 얼굴에 만족의 미소가 떠오른 순간. 하늘에서 떨어진 빛 덩어리가 가마터를 덮쳤다.
신선은 푸른 불길을 견뎌낸 그릇이라면 자신의 폭주하는 신력도 받아낼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그는 마지막 힘을 끌어모아 도자기 속으로 신력을 밀어 넣었다.
그러나 자신의 역작을 지키려던 도공 단이 그 앞을 가로막았다.
“안 돼!”
파아앗!
비극은 찰나였다.
그릇으로 향하던 거대한 신력이 단의 몸에 닿는 순간, 신선의 힘과 생명력까지 모조리 그의 육체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끄아아아악!”
인간의 몸에 감당할 수 없는 신력이 억지로 깃들었다.
그것은 축복이 아닌 저주였다.
살이 타들어 가고 뼈가 으스러지는 고통 속에서 단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그때 산 아래 마을에서 한 소녀가 달려왔다.
단을 걱정해 매일같이 음식을 챙겨 산을 오르던 아이였다.
오늘도 품에 주먹밥을 안고 가파른 산길을 달려온 소녀의 눈앞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단은 황금빛 불길에 휩싸인 채 비명을 지르고 있었고, 그 곁에는 백발의 아름다운 사내가 쓰러져 있었다.
“단 아저씨!”
소녀는 뜨거운 기운에 차마 단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대신 쓰러진 신선에게 달려갔다.
품에서 물통을 꺼내 마른 입술에 물을 흘려주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아저씨는 누구예요? 우리 단 아저씨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거예요?”
“저자가...... 내 힘을 받아버렸다.”
믿기 힘든 말이었다.
그러나 단의 처절한 비명 앞에서 소녀는 눈물을 쏟으며 애원했다.
“우리 아저씨 좀 살려주세요. 제발요!”
신선은 힘겹게 소녀를 바라보았다.
“아이야...... 내 실수로 저 남자는 멈추지 않는 고통 속에 갇히게 되었다.”
신선의 손끝에서 영롱한 황금빛 피 한 방울이 떠올랐다.
“먼 훗날, 네 핏줄에서 태어난 아이가 이 힘을 각성할 것이다.”
그는 피 한 방울을 소녀에게 내밀었다.
“그 아이가 저 남자의 고통을 잠재워 줄 것이다. 그때까지...... 저자를 외면하지 말아 다오.”
소녀는 고통에 몸부림치는 단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할게요.”
작은 손이 꼭 쥐어졌다.
“제가, 그리고 제 혈육이 단 아저씨를 꼭 구해줄게요.”
황금빛 핏방울이 소녀의 이마 속으로 스며들었다.
신선은 안도하듯 미소 지었다.
‘나의 사랑이 죄를 만들고, 인간의 사랑이 나의 죄를 구원하는구나.’
“은빛 늑대야. 붉은 여우야.”
신선의 부름에 숲의 주인인 두 영물이 신선의 곁으로 다가왔다.
“나의 시간은 끝났다.”
신선은 은빛 늑대를 바라보았다.
“너는 저 소녀의 가문을 지켜라. 언젠가 그 후손이 저 사내를 구원하는 날까지.”
그리고 붉은 여우에게 시선을 돌렸다.
“너는 저 사내를 지켜라. 그가 고통에 미쳐 세상을 어지럽히지 않도록 곁에서 감시하고 보살펴라.”
모든 말을 마친 신선은 빛이 되어 사라졌다.
숲 전체에 은은한 황금빛이 번졌다.
붉은 여우는 단을 노려보았다.
자신의 주인을 소멸시킨 원수.
당장이라도 목을 물어뜯고 싶었지만, 마지막 유언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그날 이후, 단에게는 잔혹한 형벌이 내려졌다.
신의 힘을 온전히 감당하지 못한 인간의 육체는 백 년에 한 번씩 무너졌다.
99년의 영광.
늙지 않는 육체와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재능으로 그는 세상을 발아래 두었다.
왕의 스승이 되기도 했고, 나라를 움직이는 거상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백 년이 채워지는 순간 모든 것이 뒤집혔다.
1년의 지옥.
육체가 무너지고 영혼이 찢기는 붕괴기가 시작되었다.
단은 지난 아홉 번의 붕괴기를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견뎌냈다.
그리고 지금.
가장 두렵고 혹독한 열 번째 붕괴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가 천 년 동안 기다려온 것은 단 하나.
자신의 고통을 끝내줄, 각성한 구원자였다.
1화. 만남
서울 성북동의 아침.
“하아, 하아…… 미치겠네, 진짜. 부자들은 왜 다들 산꼭대기에 사는 거야? 산소 부족으로 먼저 죽겠네. 하긴 저들은 뚜벅이의 고통을 알 리가 없지. 어휴.”
서연은 숨이 턱끝까지 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언덕길을 올라갔다.
서연.
불과 1년 전만 해도 대한민국 학계가 주목하던 최연소 수석 감정평가사였다.
고려청자의 미세한 균열만 보고도 가마터의 위치를 맞히고, 위작을 만든 놈의 족보까지 털어버린다는 신의 눈을 가진 천재.
하지만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지금은 빚더미에 앉은 신용불량자 신세였다.
“허억, 허억. 한 오십억만 내 앞에 뚝 떨어졌으면 좋겠다.”
서연은 주문을 외우듯 중얼거리며 이마의 땀을 닦았다.
오늘 그녀가 만날 의뢰인은 성북동 유령 저택의 주인이었다.
업계에서는 미치광이 수집광이라 불리는 인물.
그의 집에 들어갔던 감정사들은 하나같이 두 번 다시 그 집에 발을 들이지 않았다는 흉흉한 소문까지 돌았다.
하지만 서연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지금 그녀의 뒤에는 저승사자보다 무서운 채권자들이 있었으니까.
“귀신? 웃기지 마. 나한테 제일 무서운 건 은행 독촉 전화야.”
마침내 거대한 대문 앞에 도착한 서연은 망설임 없이 초인종을 눌렀다.
끼이익.
대문이 스스로 열렸다.
‘뭐야? 대답도 없이 그냥 열어주는 거야?’
상쾌한 나무 향이 서연을 맞이했다.
대문 안은 다른 세상이었다.
울창한 대나무 숲과 바닥에 깔린 고급스러운 현무암.
그리고......
‘저거...... 고려 시대 석등 아니야? 저게 왜 마당 장식품으로 굴러다녀? 경매가 최소 5억인데.’
그녀의 시선이 닿는 곳마다 국보급 유물들이 무심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아니, 적재적소에 배치되어 있었다.
하지만 유물을 이토록 일상적으로 다루는 방식은 서연에게 차라리 방치나 다름없어 보였다.
저 석등의 가치를 안다면, 저 청자가 품은 세월의 무게를 안다면 결코 마당 한구석에 물받이 따위로 두지는 못할 텐데.
“우와~ 미쳤네, 진짜. 이 집 주인은 유물을 꿰뚫어 보는 거야, 아니면 아예 눈이 먼 거야?”
서연은 헛웃음을 삼키며 일부러 또각또각 인기척을 내며 안채로 향했다.
똑, 똑.
“안에 누구 계신가요? 오늘 방문하기로 한 감정사 서연입니다.”
대답은 없었다.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선 서연의 걸음이 멈췄다.
넓은 거실 한가운데.
칠흑 같은 어둠 속에 누군가 웅크리고 있었다.
“...... 끄으윽.”
남자는 머리를 감싸 쥔 채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이번 붕괴기는 이전과 달랐다. 더 빨랐고, 더 강력했다.
단의 육체가 안에서부터 산산이 부서지고 있었다.
“저기요. 괜찮으세요? 119 부를까요?”
서연이 휴대폰을 꺼내려던 순간이었다.
휙!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세상이 뒤집혔다.
“악!”
엄청난 악력이 그녀를 낚아채 소파 위로 내동댕이쳤다.
“누구냐?”
남자가 순식간에 그녀의 위를 덮쳤다.
어둠 속에서도 창백한 얼굴은 섬뜩할 만큼 아름다웠다.
그러나 그 눈에는 짙은 살기가 번뜩이고 있었다.
“어떤 놈이 보냈지? 최민준인가?”
“저는 그냥 감정사인데요!”
“시끄러워!”
붕괴가 시작될 때마다 찾아오는 감각 과민증.
지금 단에게는 세상의 모든 소리와 감각이 살을 찢고 뼈를 긁어내는 칼날이었다.
“아니, 사람 말을 좀......!”
서연이 몸을 일으키려 허우적거리던 순간, 손바닥이 남자의 뺨을 스쳤다.
찰싹.
그 순간.
세상이 멎었다.
서연과 단의 눈이 동시에 크게 뜨였다.
서연은 난데없이 남자의 뺨을 때린 꼴이 되어 당황했고, 단은 전혀 다른 이유로 충격에 빠졌다.
머릿속을 울리던 굉음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온몸을 난도질하던 고통마저 멎었다.
서연의 손바닥이 닿은 곳에서부터 따뜻한 무언가가 스며들었다.
뺨을 지나 목으로, 가슴을 지나 온몸으로.
천 년 동안 어긋난 채 덜그럭거리던 뼛조각들이 비로소 제자리를 찾아 맞물리는 듯한 기묘한 감각.
“.......”
단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이럴 리가 없었다.
천 년이었다.
그 어떤 약도, 어떤 의원도, 어떤 신비한 힘도 잠재우지 못했던 고통이었다.
그런데 이 여자가 자신을 만진 것만으로 사라졌다.
단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자신의 뺨에 닿은 서연의 손을 덮어 눌렀다.
놓칠 수 없었다. 이 손이 떨어지는 순간 다시 그 지옥으로 돌아갈 것만 같았다.
“저기요?”
단은 대답하지 않았다.
믿을 수 없다는 듯 서연을 바라보다가 그녀의 손목을 끌어당겨 코끝에 가져갔다.
그리고 깊숙이 숨을 들이마셨다.
“하아.......”
“뭐, 뭐 하는 거예요?”
서연이 기겁하며 손을 빼려 했다.
그러나 단은 오히려 그녀를 더 강하게 끌어당겼다.
손끝이 떨어지자마자 되살아나려던 고통이 다시 희미해졌다.
단의 입에서 안도에 가까운 탄식이 흘러나왔다.
지옥 불 속에서 처음으로 구원을 발견한 사람처럼.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조금 전까지 살기로 번뜩이던 눈이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당신, 정체가 뭐지?”
“네?”
“내게 무슨 짓을 한 거야.”
“아무 짓도 안 했거든요? 이것부터 놓고 말해요! 성희롱으로 고소하기 전에!”
서연이 바락바락 대들었다.
단의 미간이 순간 움찔했다.
시끄러웠다.
분명 시끄러운데...... 아프지 않았다. 오히려 이상할 정도로 편안했다.
단의 입가에 처음으로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시끄러운데.......”
“뭐라고요?”
“거슬리지 않아.”
단이 서연의 손을 제 뺨에 가져다 댔다.
“네 목소리는 안 아파. 심지어 편안해.”
“으악! 이 사람 진짜 미쳤나봐!”
단은 아예 서연의 팔에 얼굴을 비비기 시작했다.
“아악! 사람 살려! 여기 누구 없어요? 도와주세요!”
그제야 거실 밖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주인님! 무슨 일입니까?”
점잖은 차림의 중년 남자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뛰어 들어왔다.
단의 힘이 느슨해진 순간, 서연은 재빨리 몸을 빼내 중년 남자의 뒤로 숨었다.
“저는 오늘 방문하기로 한 감정평가사 서연입니다. 그런데 저 사람이 갑자기 저를 공격했어요!”
중년 남자의 표정이 난처해졌다.
“아...... 저분이 이곳의 주인이십니다.”
“네?”
서연의 얼굴이 굳었다.
“저 미친놈...... 아니, 저분이요?”
조금 전까지의 공포가 아주 조금 가라앉자 그제야 서연의 눈에 남자의 모습이 제대로 들어왔다.
손목에 찬 고가의 시계. 몸에 걸친 옷부터 신발까지 얼핏 보기에도 엄청난 가격의 명품이었다.
무엇보다 훨씬 오래되고 값비싼 무언가가 남자 자체에서 느껴졌다.
서연은 저도 모르게 그를 위아래로 훑었다.
거실까지 들어오며 보았던 수많은 유물들.
왠지 눈앞의 남자는 그 모든 것보다 더 오래되고 고귀한 무언가를 품고 있는 듯했다.
‘살아있는 유물이야, 뭐야?’
그때 단이 나직이 입을 열었다.
“이름.”
“네?”
“네 이름.”
“서, 서연이요.”
단은 그 이름을 기억하듯 천천히 되뇌었다.
“서연.”
그리고 망설임 없이 물었다.
“얼마면 되지?”
“네? 잘...... 못 들었습니다만?”
“너를 사겠다.”
서연의 입이 벌어졌다.
단은 그녀의 표정 따위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는 얼굴로 다시 물었다.
“얼마면 되겠냐고.”
119화. 나한테 왜이러는거야“여우, 내가 또 뭐 잘못했냐?”“네가 잘못한 게 어디 하루 이틀이니?”“아니, 오늘은 좀 더 특별히 까칠한 것 같은데?”“오늘은 특별히 뭘 잘못했나 보지. 그냥 루틴이니까 입 다물어.”루나는 그렇게 대꾸하며 고개를 돌렸다.은랑이 서연을 바라보며 눈을 빛내는 것도, 저렇게 아무렇지 않게 예쁘다는 말을 늘어놓는 것도 전부...... 별것도 아닌데 자꾸 신경이 쓰였다.그저 은랑이 제 마음 하나 모르고 헤실거리는 꼴이 답답해서일 것이다.그때 계단 위에서 발소리가 들렸다.서연이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가 눈을 깜빡였다.단이 내려오고 있었다.짙은 네이비색 슈트에 단정하게 정리한 검은 머리. 며칠 전 얼굴에 흙을 묻힌 채 자신과 대숲을 뛰어다니던 사람과 같은 남자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였다.서연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의 손으로 향했다.소매 아래로 드러난 긴 손가락, 물레 위에서 자신의 손을 감싸던 바로 그 손이었다.‘내가 지금 어디를 보는 거야.’서연은 황급히 시선을 올렸지만, 단과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단 역시 계단 중간에서 잠깐 걸음을 멈춘 채 서연을 보고 있었다.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서연이 괜히 재킷 끝을 만졌다.“왜요? 이상해요?”“아니.”단은 천천히 계단을 내려와 서연 앞에 멈췄다. 얼굴을 한 번 바라보고, 귀에 달린 작은 진주를 보았다가 다시 눈을 맞췄다.“잘 어울리네. 예뻐.”화려한 미사어구가 들어간 말도 아닌 곧게 들어온 한마디에 서연이 고개를 푹숙였다.“……고마워요.”은랑이 그 사이로 얼굴을 들이밀었다.“그렇지? 내가 아까부터 우리 주인님 오늘 진짜 예쁘다고 했거든. 특히 이쪽에서 보면…….”“시끄럽다.”“오늘 다들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단은 대답하지 않았다.대신 서연에게 손을 내밀었다.“가지.”서연은 그 손을 바라보다 자연스럽게 그의 손위로 자신의 손을 올렸다. 치료가 필요한 것도 아니고, 위험한 순간도 아닌데 단은 너무 자연스럽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그
118화. 위장맞은편에서 과자를 먹던 은랑이 무심하게 중얼거렸다.“남의 마음만 잘 알지.”루나가 고개를 돌렸다.“뭐라고?”“아냐. 그냥 너 잘났다고.”“늑대에게 질문한 내가 잘못이지.”루나가 쿠션을 집어 던졌고, 은랑은 웃으며 가볍게 피했다.그렇게 엿새째가 되자 상대가 먼저 이름을 밝혔다.OR프랜차이즈 대표의 아내 최미자.그리고 다음 날, 마침내 초대가 왔다.자신의 집으로 직접 와줄 것, 인원은 3명 이하, 촬영 금지.무엇보다 남편에게는 절대 알리지 말 것.서단이 조건을 읽어 내려가자 은랑이 곧바로 말했다.“나도 갈거야. 저 정도로 상태가 이상한 인간한테 주인님을 보내면서 내가 빠질 수는 없어.”“그 얼굴로 어떻게 들어가려고?”루나가 어이없다는 듯 묻자 은랑이 제 얼굴을 만졌다.“내 얼굴이 왜?”“대한민국에서 그 얼굴을 모르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어. 네가 들어가는 순간 골동품 감정이 아니라 은랑 팬미팅이 되겠지.”“모자 쓰면 되잖아.”“응. 모자 쓴 은랑.”“선글라스도 쓰고.”“응. 모자 쓰고, 선글라스 쓴 수상한 은랑.”“마스크까지.”“응. 은행 털러 온 은랑.”서연이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은랑이 억울한 얼굴로 그녀를 돌아봤다.“주인님까지 웃어?”“미안해요. 그런데 루나 언니 말이 맞아요. 은랑은 너무 눈에 띄어요.”“그럼 주인님을 저 도둑놈하고 둘만 보내라고?”단의 눈썹이 천천히 올라갔다.“둘이 아니라 셋이다. 그리고 안 될 건 뭐지? 내가 연을 잡아먹기라도 하나?”은랑은 딱히 적당한 이유를 찾지 못했지만 그냥 우겼다.“그래. 넌 그냥 믿음이 안 가. 천 년 묵은 도둑놈이니까 더 안 돼.”두 사람 사이의 공기가 슬슬 날카로워지자 루나가 은랑의 뒤통수를 툭 쳤다.“넌 운전기사로 따라가. 모자 푹 눌러쓰고 선글라스 끼고 마스크 하고 차에서 대기해. 무슨 일 생기면 바로 올라오면 되잖아.”“차에서 기다리라고?”“주인님 가까이에 있을 수 있는데 싫어?”은랑의 입이 닫혔다. 잠시 생각하던 그가
117화. 접근“그렇게 의심하고 있어. 그런데 내가 확인할 수 있는 범위에서는 외도 증거가 없어. 오히려 이상한 건 따로 있어.”서단이 다음 사진을 띄웠다.맑은 비취색 옥에 붉은 산호 장식이 박힌 오래된 비녀였다.“결혼 삼십 주년 선물. 남편이 한 달쯤 전에 최민준 갤러리를 통해 구입해서 아내에게 줬어.”회의실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달라졌다.단이 눈을 가늘게 떴다.“이상 행동이 시작된 것도 그 뒤인가?”“거의 일치합니다. 처음에는 남편 휴대전화를 검사하는 정도였는데 점점 심해졌어요. 위치 추적을 하고, 회사 직원들을 뒷조사하고, 남편과 이야기하는 여자마다 불륜 상대라고 의심하기 시작했죠. 결국 집에서 일하던 젊은 여성 직원들을 전부 해고했고, 며칠 전에는 한밤중에 소란 신고까지 들어갔습니다.”서연은 한동안 옥비녀의 사진을 바라봤다.“그럼 저게 맞을 가능성이 높겠네.”“가능성은 높아.”단이 차분하게 말을 받았다.“하지만 직접 보기 전에는 단정하지 마. 최민준이 관련되어 있다고 해서 인간이 저지르는 모든 일이 저주 때문인 것은 아니니까.”“알아요.”서연도 고개를 끄덕였다.사람의 의심과 질투까지 모두 귀신 탓으로 돌릴 수는 없었다. 어쩌면 비녀는 아무 죄가 없고, 이미 무너지고 있던 부부 사이에 우연히 들어온 물건일 수도 있었다.그래서 직접 봐야 했다.문제는 방법이었다.“그런데 저분이 우리한테 예약을 한 건 아니잖아. 어떻게 만나?”“그게 두 번째 문제야.”서단이 다른 자료를 띄웠다.“지금 최미자 여사는 거의 집 밖으로 안 나와. 남편도 못 들어가고 있고, 낯선 사람은 더더욱 안 만나. 그런데 최근 일주일 동안 몇 번이나 집에 들인 사람들이 있어.”“누구?”“무속인들하고 골동품상.”모두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단에게 향하자, 단이 눈썹을 들어 올렸다.“왜 나를 보지?”서연이 웃었다.“우리 전문 분야잖아요.”“무속인? 나는 타인의 운명에는 관심 없다.”“골동품이요. 왜 하필 무속인을 골라요?”단이 잠시 생각하다 고개
116화. 찾아가는 서비스 서연은 대형 모니터 앞에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화면 한가운데 떠 있는 숫자는 며칠째 변함이 없었다.예약 0건.새로고침 버튼을 눌러봤지만 결과는 똑같았다.“이 정도면 뭔가 대책을 세워야 하는 거 아니에요? 예약이 한 건도 없어요. 한 건도. 우리가 하려는 일이 평범한 골동품 감정이 아니라는 건 알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하잖아요.”서연이 억울한 얼굴로 돌아보자 소파에 기대앉아 차를 마시던 단이 무심하게 대답했다.“아무래도 몸을 사리는 거겠지.”“이래서는 너무 수동적이에요.”서연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테이블 끝에서 노트북을 두드리던 서단이 고개를 들었다.“뭐가?”“우리가 하는 방식 말이야. 최민준은 계속 물건을 뿌리고 있는데 우리는 기다리고 있잖아.”“누나. 나 믿지?”“갑자기?”“손님이 안 오면 우리가 찾아가면 되잖아.”서연이 의아한 얼굴로 동생을 바라봤다.“그 많은 사람 중에서 누굴 찾아가?”서단이 그 질문이 나오기를 기다렸다는 듯 씩 웃더니 노트북을 조작했다. “드디어 물어보네.”“……너 뭐 했지?”“뭘 했을까?”“그 얼굴 알아. 어릴 때부터 뭔가 만들어놓고 칭찬받고 싶을 때 꼭 그 표정이었어.”“역시 누나는 못 속인다니까.”서단이 자리에서 일어나 노트북을 대형 모니터에 연결했다. 몇 번 키를 누르자 수십 개의 사진과 이름, 물건의 목록이 복잡한 선으로 연결된 화면이 나타났다.모두 하던일을 멈추고 화면에 집중했다.“지금까지 확보한 최민준 관련 자료입니다. MJ Gallery에서 직접 거래된 물건부터 페이퍼 컴퍼니를 거친 물건, 경매 기록 것까지 싹다 정리했습니다.”서연이 가까이 다가갔다.“그래 그 리스트에 있는 사람들의 연락을 기다리는 거잖아. 연락은 전혀없었고.”“에헤이 누님, 그냥 정리만 했으면 제가 이렇게 자랑스럽게 보여드리겠습니까?”서단이 키를 누르자 화면 한쪽에 여러 단어가 떠올랐다.이상행동, 환청, 환각, 악몽, 골동품, 귀신, 저주.......“최민준과 관련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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