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고려의 천재 도공 단은 신선의 힘이 폭주하는 것을 막으려다 스스로 살아있는 그릇이 되어 천 년의 세월을 늙지도 죽지도 못한 채 견뎌왔다. 가장 참혹한 열번째 붕괴기가 다가온 순간, 그를 고통에서 건져낼 유일한 구원자 서연을 만나지만, 그녀의 정화 능력은 아직 완벽하지 않다. 함께 살아가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오염된 유물 속에 깃든 원혼들을 정화하여 구원의 힘을 완성하는 것!
더 보기[프롤로그 : 99년의 영광, 1년의 지옥]
죄명은 사랑이었다.
하늘의 이치를 관장하던 고귀한 신선. 그가 감히 인간 여인을 연모하여, 정해진 수명을 늘리기 위해 사사로이 신력을 사용한 죄.
천계는 그 오만함을 용서하지 않았다.
콰아앙!
하늘이 찢어지는 굉음과 함께 신선은 지상으로 내쳐졌다. 추락은 혹독했다.
자연을 품은 영롱한 영혼이 수천수만 조각으로 찢겨나갔고, 신력의 대부분이 허공으로 흩어졌다.
남은 힘은 불완전했고, 통제 불능 상태로 폭주하기 시작했다.
이대로 지상에 닿는 순간, 반경 수백 리가 잿더미로 변할 상황이었다.
“나의 힘을 나눠 담아야만 한다.”
그의 힘을 담아낼 무언가를 찾아 헤매던 신선의 눈에, 산속의 불빛이 들어왔다.
미친 듯이 타오르는 가마터. 그곳엔 인간의 불을 넘어선, 붉다 못해 푸르게 타오르는 불길이 춤추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완벽하고 단단한 그릇.
신선의 힘마저 감당해 낼 그릇이 그곳에 있었다.
고려 초기, 천 년 전의 겨울.
도공 단은 핏발 선 눈으로 가마 아궁이를 노려보았다.
자신의 모든 예술혼과 생명력을 땔감처럼 태워, 신조차 감탄할 완벽함에 도달하고자 했다.
"더! 더 뜨겁게."
그의 집념이 빚어낸 백자 가마 안에서 영롱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세상 모두가 비취색 청자의 화려함에 열광할 때, 그는 홀로 시대를 앞서 순백을 빚어내고 있었다.
아무도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아름다운 하양. 그것은 시대를 초월한 명작이었다.
백자의 완벽함을 확신하던 그 순간.
하늘에서 떨어진 빛 덩어리가 가마터로 들이닥쳤다.
신선은 푸른 불을 이겨낸 완벽한 그릇이 폭주하는 자신의 힘을 받아낼 유일한 물건임을 확신했다.
그는 간신히 손을 뻗어 넘쳐흐르는 신력을 도자기 속으로 쏟아부으려 했다.
하지만 자신의 역작을 지키려던 도공 단이 그 빛 사이를 가로막고 섰다.
그것이 무엇인지 그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는 알지 못한 채...
“안 돼!”
파아앗!
비극은 찰나였다. 그릇으로 향하던 거대한 힘이 살아있는 생명에 닿는 순간, 신선의 힘뿐만 아니라 그의 생명력까지 단의 육체 안으로 빨려 들어가 버렸다.
“끄아아아악!”
인간의 육체에 감당할 수 없는 신력이 억지로 구겨 넣어졌다.
그것은 축복이 아닌 저주였다.
살이 타들어 가고 뼈가 으스러지는 고통 속에 단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소녀는 굉음과 비명을 듣고 그렇지 않아도 바삐 움직이던 발을 더 급하게 움직였다.
산 아래에 살고 있는 소녀는, 마을에서 미친 도공이라 손가락질받는 단을 연모하던 아이였다.
식음을 전폐하고 오직 도자기에만 매달리는 단이 걱정되어, 소녀는 매일같이 음식을 준비해 가파른 산길을 올랐다.
오늘도 단에게 줄 주먹밥을 품에 안고 달려온 소녀의 눈앞에 믿기지 않는 광경이 펼쳐졌다.
단은 온몸이 황금빛 불길에 뒤덮인 채 비명을 지르고, 그 곁에는 백발의 아름다운 사내가 쓰러져 신음을 뱉어 내고 있었다.
“아저씨! 단 아저씨 정신 차려요!”
소녀는 단에게 달려가고 싶었으나, 뜨거운 기운에 감히 다가서지 못하고, 그의 곁에서 빛을 잃어가는 사내에게 걸음을 옮겼다.
두려움보다 걱정이 앞선 소녀는 품고 온 물통을 열어 쓰러진 신선의 마른 입술에 먼저 흘려주었다.
"아저씨는 누구예요? 우리 단 아저씨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거예요?"
"저자가 나의 힘을, 신선의 힘을 받아버렸다."
믿기지 않는 말이었으나, 단의 비명에 소녀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눈물 흘리며 온 마음을 다해 애원할 뿐...
"우리 아저씨 좀 살려주세요! 아저씨 죽이지 마세요. 네?"
단의 처절한 비명소리에 소녀가 눈물을 쏟아냈다.
"차라리 제가 대신 죽겠습니다. 제발, 제발 아저씨를 살려주세요!"
대가 없는 순수한 선의, 그리고 도공을 향한 절절한 사랑.
그것은 신선이 천계의 규율을 어기면서까지 사랑했던 인간의 마음 그 자체였다.
신선은 자신의 소멸을 막을 수 없음을 느끼고 안타까운 눈으로 소녀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저지른 비극을 수습할 방법은 이제 이 아이뿐이었다.
'죄 없는 아이에게 가혹한 운명을 지우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가...'
“아저씨 기운을 좀 내봐요. 제가 어찌하면 좋을지 말 좀 해줘요 네? 단 아저씨를 위해서 뭐든 할께요. 제발 제발요...”
소녀의 간절한 눈물에 신선이 결심을 굳혔다.
“아이야... 미안하지만 네게 아주 무겁고 긴 부탁을 해야겠다.”
신선이 떨리는 손끝으로 영롱한 피 한 방울을 허공에 띄웠다.
“나의 실수로 저 남자는 멈추지 않는 고통 속에 갇히게 되었다.
먼 훗날, 네 핏줄에서 태어난 아이가 이 힘을 각성할 때... 저 남자의 고통을 잠재워 줄 것이다.
그때까지 저자를... 외면하지 말아 다오.”
소녀는 눈앞의 신비로운 존재가 사라져가고 있음을, 그리고 단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자신에게 맡겨졌음을 느꼈다.
소녀는 고통에 몸부림치는 단을 한 번 바라본 뒤, 신선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할게요. 제가, 그리고 제 혈육이... 아저씨를 꼭 구해줄게요.”
소녀의 허락이 떨어지자, 황금빛 핏방울이 소녀의 이마 속으로 스며들었다.
"고맙다... 아이야... 고맙다."
'나의 사랑이 죄를 만들고, 인간의 사랑이 나의 죄를 구원하는구나.'
신선은 안도하며, 어둠 속을 향해 나직이 불렀다.
“은빛 늑대야, 붉은 여우야.”
숲의 주인인 두 영물이 울면서 신선의 곁으로 다가왔다.
“나의 시간은 끝났다. 늑대야, 너는 저 소녀의 가문을 지켜라. 언젠가 그 후손이 저 사내를 구원하는 그날까지...”
늑대가 구슬프게 울었다.
“그리고 여우야. 너는 저 사내를 지켜라. 그가 고통에 미쳐서 세상을 어지럽히지 못하도록, 곁에서 감시하고 보살펴라...”
모든 말을 마친 신선은 빛이 되어 사라졌다. 은은한 황금빛이 숲 전체에 퍼져 세상 밖으로 사라졌다.
여우가 날카로운 눈으로 도공을 노려보았다. 자기 주인을 소멸시킨 원수.
당장이라도 목을 물어뜯고 싶었지만, 주인의 마지막 유언이었기에 고개를 숙였다.
남겨진 것은 신의 힘을 삼킨 오만한 인간과 신선의 피를 받고 무거운 과제를 안은 소녀, 그리고 주인을 잃은 슬픈 짐승들뿐이었다.
그날 이후, 단에게는 잔혹한 형벌이 내려졌다.
제어되지 못한 신의 힘은 그에게 99년의 영광과 1년의 지옥을 번갈아 선사했다.
99년 동안 그는 늙지 않는 육체와 비상한 재주로 세상을 발 아래 두었다.
왕의 스승이 되기도 했고, 나라를 움직이는 거상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100년이 채워지는 해가 되면, 대가를 치러야 했다.
육체가 무너져 내리고 영혼이 찢기는 1년의 붕괴기.
그는 지난 9번의 지옥을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견뎌냈다.
그리고 지금. 가장 두렵고 혹독한 열 번째 붕괴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가 기다리는 것은 단 하나. 이 끔찍한 형벌을 멈춰줄, 각성한 구원자뿐이었다.
1화. 만남
2024년, 서울 성북구 성북동. 그로부터 천 년이 흐른 지금.
기다리던 구원자는 백마를 타고 오지 않았다.
대신, 헐떡거리며 가파른 언덕을 기어오르고 있었다.
“하아, 하아... 미치겠네, 진짜. 부자들은 왜 다들 산꼭대기에 사는 거야?
산소 부족으로 먼저 죽겠네. 하긴 지들은 뚜벅이의 고통을 알리가 없지 어휴...”
서연은 숨이 턱끝까지 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언덕길을 올라갔다.
서연. 불과 1년 전만 해도 대한민국 학계가 주목하던 최연소 수석 감정평가사였다.
고려청자의 미세한 균열만 보고도 가마터의 위치를 맞히고, 위작을 만든 놈의 족보까지 털어버린다는 신의 눈을 가진 천재.
하지만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지금은 빚더미에 앉은 신용불량자 신세였다.
“허억, 허억, 한 오십억이 내 앞에 뚝 떨어졌으면 좋겠다...”
연은 주문을 외우듯 중얼거리며 땀을 닦았다.
오늘 그녀가 만날 의뢰인은 성북동 유령 저택의 주인이었다.
업계에서는 그를 미치광이 수집광이라 불렀다.
그의 집에 들어간 감정사들은 하나같이 제정신으로 나오지 못했다는 흉흉한 소문이 있었지만, 연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지금 그녀의 뒤에는 저승사자보다 무서운 채권자들이 있었으니까.
“귀신? 웃기지 마. 나한테 제일 무서운 건 은행의 독촉 전화야.”
마침내 거대한 대문 앞에 선 연은, 망설임 없이 초인종을 눌렀다.
끼이익. 대문이 스스로 열렸다.
'뭐야 대답도 없이 그냥 열어 주는 거야?'
상쾌한 나무향이 연을 맞이했다. 대문 안은 다른 세상이었다.
울창한 대나무 숲과 바닥에 깔린 고급스런 현무암. 그리고...
‘저거... 고려 시대 석등 아니야? 저게 왜 마당 장식품으로 굴러다녀? 경매가 최소 5억인데.’
그녀의 시선이 닿는 곳마다 국보급 유물들이 무심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아니, 적재적소에 배치되어 있었다. 하지만 유물을 이토록 일상적으로 다루는 방식은, 연에게는 차라리 방치나 다름없었다.
저 석등의 가치를 안다면, 저 청자가 가진 세월의 무게를 안다면 결코 저렇게 마당 한구석에 물받이로 두지는 못할 텐데.
“우와! 미쳤네, 진짜. 이 집 주인은 유물을 꿰뚫어 보는 거야, 아니면 아예 눈이 먼 거야?”
연은 헛웃음을 삼키며 또각또각 인기척을 내며 안채로 향했다.
똑,똑
"안에 누구 계신가요? 오늘 방문하기로 한 감정사입니다."
넓은 거실 한가운데, 칠흑 같은 어둠 속에 누군가 웅크리고 있었다.
“...끄으윽.”
남자는 고통스러운 듯 머리를 감싸 쥐고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고통의 기운이 거실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이번의 붕괴기는 과거와는 달리 더욱 빠르고 강력하게 단의 육체를 갉아 먹고 있었다.
“저기요. 괜찮으세요? 119 부를까요?”
연이 휴대폰을 꺼내려던 순간,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세상이 뒤집혔다.
엄청난 악력이 그녀를 낚아채 소파 위로 내동댕이쳤다.
“누구냐?”
남자가 그녀의 위를 덮쳤다. 창백한 얼굴은 아름다웠지만, 살기에 가득 차 있었다.
“어떤 놈이 보냈지? 최민준인가?”
“저는 그냥 감정사인데요!”
“시끄러워.”
감각 과민증. 붕괴가 시작될 때마다 나타나는 전조 증상이었다. 세상의 모든 소리와 감각이 칼날이 되어 그를 찌르고 있었다.
그때, 바로 앉기 위해 허우적대던 연의 손이 남자의 뺨에 닿았다.
턱.
순간, 단의 머릿속을 울리던 세상의 굉음이 거짓말처럼 멎고, 온몸을 난도질 하던 고통이 사라졌다.
그녀의 손바닥이 닿은 곳부터, 따뜻한 물결이 스며드는 기묘한 감각이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천년 동안 덜그럭거리던 뼛조각들이 비로소 제자리를 찾아 매끄럽게 맞물리는 느낌.
단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그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자신의 뺨에 닿은 연의 손을 제 손으로 덮어 눌렀다.
놓치면 다시는 찾지 못할 보석을 찾은 듯.
그것은 천 년 전, 신선이 소녀에게 나누어주었던 속죄의 피가 마침내 주인을 찾아 공명한 것이었다.
남자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깜빡이더니, 연의 손목에 코를 대고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하아....”
단은 흠칫 놀라며 물러서는 연을 더 강하게끌어당겼다.
그의 입에서 안도와 쾌락이 섞인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것은 지옥 불 속에서 구원을 발견한 자의 절박한 신음과 같았다.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이제 그의 눈빛은 살기가 아닌, 집착으로 바뀌어 있었다.
“당신. 정체가 뭐지? 내게 무슨 짓을 한 거야. 흐으음...”
“아무 짓도 안 했거든요? 이거 놓고 말해요! 성희롱으로 고소하기 전에!”
연이 바락바락 대들었지만, 남자는 오히려 기쁨의 미소를 지었다.
“시끄러운데... 거슬리지 않아. 네 목소리는 안 아파 심지어 편안해.”
그는 이제 대놓고 연의 팔을 자신의 뺨에 비비며 황홀경에 빠져 있었다.
연은 공포와 당황에 비명을 질렀다.
"아악! 사람 살려! 여기 누구 없어요? 도와주세요!"
"주인님 무슨 일입니까?"
점잖은 모습의 중년 남자가 걱정을 가득 안은 눈으로 거실로 뛰듯 들어섰다.
남자의 힘이 느슨해진 사이 서연이 몸을 일으켜 거실로 막 들어선 사람의 뒤로 숨었다.
"저는 오늘 방문하기로 한 감정평가사 서연입니다. 저 사람이 저를 공격했어요."
"아... 저분이 이곳의 주인이십니다."
"네? 뭐라구요? 저 미친놈... 아니 저분이요?"
안전을 확인한 서연의 눈이 다시 애절한 눈으로 자신을 보며 고통을 참아내는 남자를 훑었다.
손목에 찬 명품 시계, 명품을 휘감은 몸 그리고 남자 자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무한한 기운.
‘살아있는 유물이야 뭐야?’
그때, 남자가 나직이 물었다.
“이름.”
“서... 서연이요.”
“좋아, 서연. 얼마면 되지?”
“...네?”
“너를 사겠다고 했다. 얼마면 되겠냐고.”
13화. 믿습니다.그모습을 본 단의 눈썹이 꿈틀거렸고, 주변의 공기가 순식간에 영하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식탁 위의 물 잔 속 물이 미세하게 진동하며 파문을 일으켰다."어라?"서연은 눈을 가늘게 뜨고 물 잔을 쳐다봤다. 물이 스스로 떨리고 있었다.단이 식탁 한편에 놓인 소금 통을 향해 손가락을 까딱했다.스르르.이번에는 소금통이 스스로 미끄러지듯 움직여 단의 손안에 안착했다.서연의 눈이 동그래졌다. 하마터면 숟가락을 떨어뜨릴 뻔했다."......방금 뭐예요?"서연의 질문에 단이 태연하게 소금 통을 쥐며 대답했다."뭐가?""소금 통이요! 저거 혼자 움직였잖아요! 뭐예요? 바닥에 바퀴 달렸어요? 아니면 자석? 요즘 스마트 홈은 양념통도 원격 조종 돼요?"단은 잠시 침묵하더니, 논리적인 척 말을 늘어놓았다."마찰 계수를 이용한 거다.""네?""손끝의 스냅으로 테이블보에 미세한 파동을 일으키고, 그 진동을 이용해 물체의 마찰력을 순간적으로 0에 수렴하게 만드는 거지. 고도로 훈련된 장인의 기술이다.""마... 마찰 계수요? 여기서요?""그래. 생활의 달인 안 봤나? 동전 던지기나 카드 날리기 같은 원리다. 나는 천 년... 아니, 수십 년간 도자기를 빚으며 손 감각을 극한으로 단련했으니까."뻔뻔했다. 너무 뻔뻔해서 오히려 그럴싸하게 들렸다. 아니, 그럴싸하지 않았더라도 연은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50억을 건넨 계약주였다. 그 정도 돈을 준 사람이면 마찰 계수 쯤은 믿어 주는 게 예의다.'믿습니다. 믿어야죠. 우리 계약주님 말씀인데.'"와... 신기하네요. 역시 장인은 다르구나. 다른 것도 할 수 있나요?""뭐?""아, 아니... 너무 신기하니까 다른 것도 구경할 수 있을까 해서요."빠직 눈을 부라리던 단이 피식 웃으며 상황을 넘겼다."너 하는 거 봐서 더 보여주도록 하지."옆에서 은랑이 "저 사기꾼... 입만 열면 구라야..."라고 중얼거렸지만, 연은 들리지 않는 척 눈을 반짝였다."그... 우리집은 아니지만..."
12화. 유치한 싸움단은 뻔뻔하게 대꾸하고는, 노릇하게 구워진 고기를 집어 연의 밥그릇 위에 무심하게 툭 얹어주었다.이전에는 단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는, 묘하게 다정한 모습이었다."먹어. 생선 먹지 말고 고기 먹어. ""음... 고마워요."연이 고기를 먹자, 단이 승리감에 도취된 표정을 지었다. 그걸 본 은랑의 눈이 뒤집혔다."와... 진짜 치사하다. 돈 자랑하냐? 나도 돈 있거든? 나도 소고기 사줄 수 있거든?""그럼 사 오든가. 지금 당장.""두고 봐! 내가 소 한 마리를 통째로 잡아 올 테니까! 아니, 목장을 사버릴 거야!"유치하다. 정말 유치해서 눈 뜨고 봐줄 수가 없다. 미남 둘이 연을 두고 싸우는데, 설레기는커녕 애들 싸움에 당황하는 유치원 선생님이 된 기분이었다."근데 은랑 씨... 아니, 은랑 님?""응? 님자는 빼고 그냥 은랑이라고 불러 아니면 오빠?""그건 좀 아닌 것 같습니다. 저... 아까부터 궁금했는데요. 왜 자꾸 저보고 주인님이라고 하세요? 수호신도 그렇고... "연의 질문에 은랑의 눈썹이 아래로 처지며 조금 쓸쓸해 보였다."아주 아주 먼 옛날에, 진짜 끝내주게 멋진 내 주인님이 시킨게 있거든... 어쨌든, 지금은 연이 내 주인님이야."은랑이 옛날이야기를 하듯 나직하게 읊조렸다.연은 꽤나 성실한 은랑이 셰계관 설정을 끝까지 유지하려 애쓰는 중이라고 생각했다. 그녀의 집안에도 대대로 내려오는 늑대에 관한 전설이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이야기였기에 늑대 설정세계관이 신기하기도 하고, 어딘지 친숙하기도 했다. 연이 단을 가리켰다."아까 도둑놈이라고 했잖아요. 둘이 무슨 원수예요?""원수지. 철천지원수. 내 주인의 힘을 훔쳐 간 아주 나쁜 도둑놈."은랑이 단을 째려보았다. 단은 콧방귀를 뀌며 와인을 들이켰다."말은 똑바로 해라. 훔친 게 아니라, 잘못 배달된 거지. 나도 피해자다.""웃기시네. 돌려줄 생각도 안 했으면서.""돌려줄 방법이 없었으니까."두 남자의 대화는
11화. 세계관 놀이"아니, 팔려 간 게 아니라! 정당한 고용 계약이거든요? 그리고 주인님이라고 부르지 마세요. 부담스럽게 초면부터 왜들 이러실까요?"연이 억울하다는 듯 외쳤다. 은랑은 충격받은 표정으로 잠시 말을 잇지 못하다가, 이내 결심한 듯 말을 이었다."얼마야?""네?""얼마에 팔려 갔냐고. 내가 갚아줄게. 당장 나와."오. 역시 톱스타. 스케일이 다르다. "궁금해 하시니까 말씀은 드릴께요. 50억인데요.""......!"은랑의 핸드폰 열던 손이 멈칫했다.50억. 물론 그가 못 벌 돈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아이돌이었다. 정산받은 돈은 부동산에 묶여 있고, 소속사와의 정산 비율 문제, 그리고 품위 유지비로 나가는 돈이 만만치 않았다.은랑이 멈칫하자, 단이 코웃음을 쳤다."돈도 없는 게 까불기는. 꺼져! 김 실장, 소금을 뿌려라. 재수 없는 개가 들어왔으니.""소금? 야! 나 멜차트 1위 가수야! 팬클럽 회원이 100만 명이라고! 내가 SNS에 글 하나만 올려도 넌 매장이야!""상관없어. 내 집에서 나가."단이 짜증스럽다는 듯 허공에 손가락을 까딱였다.쾅!갑자기 닫혀 있던 육중한 현관문이 스스로 활짝 열렸다. 바람도 불지 않았는데, 마치 누군가 거칠게 밀어젖힌 것처럼 문짝이 벽에 부딪혀 굉음을 냈다.연은 화들짝 놀라며 문과 단의 손을 번갈아 쳐다봤다.'뭐야? 방금 뭐지? 리모컨 눌렀나?'연은 두리번거렸다. 단의 손에는 리모컨이 없었다. 센서도 보이지 않았다.'이 집 자동문 시스템은 도대체 원리가 뭐야? 음성 인식인가? "나가"라고 하면 열리는 AI 시스템? 와, 역시 부잣집은 다르다. 이건가!'연이 혼자 성북동 최첨단 스마트 홈 시스템에 대해 진지하게 고찰하고 있는 사이, 은랑은 소파에 털썩 주저앉으며 다리를 꼬았다."싫은데? 안 나갈 건데?“"뭐?""나 오늘부터 여기서 살 거야. 우리 주인님이 여기 계신다는데, 감히 수호신인 내가 자리를 비울 수는 없지.""수호신?"연이 황당하다는 듯 물었다."은랑
10화. 저 오빠가 왜 여기서 나와?은랑의 시선이 연을 지나, 그녀의 손을 꼭 쥐고 있는 단의 손으로 옮겨갔다.혐오와 질투가 뒤섞인 소름 끼치는 살기가 고택의 공기를 압도했다.'주인님께서는 저 도둑놈이 구원받을 때까지, 주인의 피를 받은 가문을 지키라고 했지만...'은랑이 들리지 않게 으르렁거렸다."마음에 안 들어, 도둑놈. 우리 주인님의 힘을 빼앗은 도둑놈."은랑의 낮은 으르렁거림에 단은 연을 품에 단단히 안았고 서연은 단의 품 안에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뭐야? 저 오빠가 왜 여기서 나와? 여기 대체 뭐 하는 집이지?'"냄새 나는 도둑놈."은랑이 선글라스를 벗어 재킷 주머니에 꽂아 넣었다. 드러난 얼굴은 그야말로 화려함 그 자체였다.조명을 받지 않았음에도 자체 발광하는 백금발, 이국적인 이목구비, 그리고 사람을 홀리는 묘한 눈빛까지.대한민국 여성의 70%가 그를 배경화면으로 해놓았다는 전설의 아이돌, 그룹 더 울프의 리더 은랑이었다.'와우! 화면으로도 화려함의 극치였는데, 실물은 더 예술이네. 은랑을 이 거리에서 직관하다니...'하지만, 그의 눈빛은 팬 사인회에서 보여주던 그 달콤한 눈빛이 아니었다. 금방이라도 목덜미를 물어뜯을 듯한 적의가 단을 향해 꽂혀 있었다."......."단은 연을 안고 있던 팔을 풀지 않은 채, 천천히 고개만 돌려 무심하게 은랑을 바라보았다.마치 길 가다가 짖어대는 똥개를 본 사람처럼, 귀찮음과 불쾌함만이 서려 있을 뿐이었다."집 지키라고 마당에 풀어놨더니, 주인이 있는 안방까지 기어들어 왔군."단이 낮게 으르렁거렸다."나가라. 털 날리니까.""하! 웃기고 있네."은랑이 헛웃음을 치며 오히려 성큼성큼 거실로 들어왔다. 그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야생 짐승 특유의 위압적인 기운이 바닥을 울렸다."여기가 네 집인 줄 알아? 천 년 동안 우리 신선님의 힘을 훔쳐서 쌓아 올린 가짜 성 주제에."'천 년? 훔친 힘? 가짜 성?'두 남자의 살벌한 기싸움 사이에서, 연은 눈을 깜빡였다.'재벌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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