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희를 학교 앞까지 데려다 준 다음, 서영숙은 또 그녀에게 배를 조심하라고 당부한 후에야 기사에게 집으로 돌아가자고 분부했다.”“네, 사모님.”서영숙은 뒷줄에 앉아 그 못생긴 스카프를 보며 참지 못하고 입을 삐죽거렸다.보면 볼수록 눈에 거슬려, 그녀는 아예 그것을 좌석 아래로 던진 다음 재빨리 손을 뗐다. 마치 손에 무슨 더러운 것이라도 묻은 것 같았다.연희를 떠올리면 서영숙은 한숨을 금치 못했다.‘생김새도 보통, 행동거지도 대범하지 못해. 청순하다고 말하는 것도 다 억지로 칭찬하는 것일 뿐이야. 정말 가난한 티가 난다니깐.’서영숙은 다시 한번 그 스카프를 바라보았다.장밋빛의 스카프는 촌스러웠고, 아무리 고급스럽게 포장을 해도 그 수준 떨어지는 기운을 감출 수 없었다.‘일반 가정 출신은 정말 안목이 없다니까.’‘전에 소정은이 준 선물은 그래도 스카프에 주얼리, 가방 등이 있었지. 모든 게 정교할 뿐만 아니라 나와 얼마나 잘 어울렸는지. 딱 봐도 열심히 고른 게 분명해...’여기까지 생각하자 서영숙은 마음속으로 퉤퉤 했다.‘그 재수 없는 여자를 왜 생각하는 거야?!’...“사모님, 도착했습니다.”서영숙이 집에 들어오자마자 강서정이 내려왔다. 그녀의 손에 정교하게 포장된 상자가 있는 것을 보고, 서정은 그게 무슨 비싼 물건인 줄 알았다.그러나 그것이 뜻밖에도 장밋빛 스카프일 줄이야. 문제는 그 스카프는 바느질이 울퉁불퉁하여 예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촌스럽기까지 했다.“엄마, 이게 어디서 난 물건이에요?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이딴 촌스러운 물건을 산 거예요? 설마 이걸 쓰고 다니시려는 건 아니죠?”서정은 검지와 중지로 그들 집안과 어울리지 않는 그 스카프를 들었다.솔직히 그녀는 이렇게 못생긴 목도리는 정말 처음이었다.‘정말 구역질이 나네, 이 색깔이 뭐야? 집안의 개가 봐도 깜짝 놀랄걸.’서영숙은 씩씩거리며 말했다.“네 오빠의 여자친구가 준 거다. 자신이 더 정성스럽게 만든 선물이 더 성의가 있다나. 내가 보기에 그냥 나한테 돈
서영숙에게 있어 그녀의 아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이었다.‘그래도 내 며느리는 대학원 석사 정도 해야지. 해외 명문대에 유학한 배경이 있으면 더 좋고.’아무리 봐도 연희는 서영숙의 기대와 거리가 멀었다. 다만 그녀의 뱃속에 아이가 있었기에 서영숙은 마지못해 그녀와 만나겠다고 한 것이었다.‘우리 가문에 시집을 와? 헛된 망상을 하고 있어!’서정은 이 말을 듣고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녀는 서영숙의 계획에 놀라지 않은 것 같지 않았다.그리고 서정은 손에 들고 있던 스카프를 쓰레기통에 버린 다음 티슈로 손을 닦았는데, 행여나 그런 궁상맞은 기운이 몸에 묻을까 봐 두려웠다.“정말 그랬으면 좋겠네요. 서연희가 뭐라고, 내 올케 언니가 될 자격은 없죠... 심지어 소정은 만도 못하잖아요.”학교 퀸카라는 호칭을 갖고 있었으니, 얼굴은 겨우 합격이었지만, 집안이든 돈이든 학력이든 아무도 없었다.‘우리 오빠가 대체 그 여자 어디가 마음에 든 거야? 정말 정신이 나갔구나!’“귀찮아 죽겠으니까 듣고 싶지 않아요. 우리 오빠의 일들은 앞으로 나한테 말하지 마요. 나 밖에 나가볼게요!”서정은 선물과 비싼 과일을 챙긴 다음 외출할 준비를 했다.그녀는 오미선을 찾아가서 다시 한번 자신을 위해 기회를 쟁취하고 싶었다. 만약 오미선이 학생을 하나 더 모집하겠다고 승낙한다면, 서정은 아직 희망이 있었다!서영숙은 서정이 부랴부랴 외출하는 것을 보고 뒤에서 타일렀다.“날씨도 추워서 길이 미끄러우니까 운전할 때 주의해...”오미선의 집에 도착하자, 지난번 거절당했던 기억이 다시 머릿속에 떠올랐다. 서정은 입술을 깨물며 자기도 모르게 주눅이 들었다.그러나 성공하면 대학원 자격을 얻을 수 있었기에, 결국 서정은 선물을 들고 차에서 내렸다. 이번에 그녀는 선물을 많이 가져오지 않았는데, 주로 성의를 더 많이 선보이려 했다.오기 전에 서정은 이미 여러 번 연습한 적이 있었다. 어떻게 말을 하면 사람들이 기뻐하고, 또 어느 각도에서 웃을 때가 더 보기 좋은지.서정은 오
정은은 표정이 차가워졌다.“내가 면접시험을 본 영상은 이미 전 나라의 사람들이 봤으니, 내 점수에 이의가 있다면 학교측에 반영하지 그래. 입만 열면 허튼소리를 지껄이지 말고. 요즘 사회는 소문을 마구 퍼뜨려도 벌을 피할 수 있잖아. 나와 조 교수님의 사진을 인터넷에 올린 그 주모자가 누구인지, 난 아직 알아내지 못했거든.”정은은 말할 때 눈빛은 서정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그녀의 그 어떤 미세한 표정도 놓치지 않았다.정은이 ‘사진’과 ‘주모자’를 언급했을 때, 서정은 시선을 딴 데로 돌렸는데, 마음이 찔린 게 분명했다.정은은 즉시 알아차렸다.‘강서정이 한 짓이었구나. 예상했던 사람이긴 해.’“전부터 계속 날 비난하던데, 설마 날 질투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에이 정말, 내가 왜 진작에 교수님 비위를 맞출 방법을 생각하지 못했을까?’“넌 뭐가 그리 잘났는데요? 서연희가 우리 오빠의 아이를 임신을 했어요. 아직 모르죠?”정은은 조용히 대답했다.“너보다 조금 일찍 알았을 뿐이야.”“오늘 교수님을 찾으러 왔지? 지금 집에 안 계시니 그만 돌아가.”정은은 자신이 무슨 말을 잘못했는지 몰랐다. 서정은 마치 꼬리 밟힌 고양이처럼 순식간에 화를 내기 시작했다.“네가 뭔데?! 교수님이 안 계시면, 너도 날 쫓아낼 자격이 없어요! 난 오늘 꼭 들어갈 거예요. 그래서 날 어쩔 건데요?”“정은이는 어쩔 수 없지만, 주인인 난 거절할 수 있겠지?”뒤에서 오미선은 안경을 위로 밀었고, 얼굴은 무척 차가웠다.서정은 안색이 굳어졌다.‘교수님이 언제 오신 거지? 방금 내가 한 그 말들을 들었을까?’“교수님, 저는...”“나 너 기억해.” 오미선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서정을 훑어보았다. “지난번에도 날 찾아왔었지.”서정은 오미선이 자신을 기억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러나 기뻐할 겨를도 없이, 오미선은 엄숙하게 말했다.“내가 지난번에 분명하게 말하지 않았어? 난 교수님이니, 내 학생들이 자신의 실력으로 좋은 성적을 낼 수 있기를 바랄 뿐이야. 온갖 방법
서정은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 “정말이에요? 그래도 되는 거예요?!”“그럼.”“저 교수님의 학생으로 되고 싶어요! 사실 저도 교수님을 오랫동안 존경해 왔거든요. 교수님의 학생이 될 수 있다면, 정말 한이 없어요.”그녀는 자신이 방금 오미선의 집에서 나온 것을 잊은 것 같다.“그럼 그렇게 하자, 네 이름은...”서정은 영리하게 말을 이어받았다.“교수님, 저는 강서정이라고 해요. 서비대 생물학과 학생이고요.”“본교의 학생이었구나? 그럼 기초도 괜찮겠군.”송지혜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참, 서정아, 개학할 때, C강의동에 와서 날 찾아. 내가 널 네 선배님들에게 소개할게.”‘선배님?’서정은 송지혜가 지금 실험을 계획하고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그녀는 무척 흥분해졌다. ‘만약 기회가 있다면, 나도 그 실험팀에 가입할 수 있겠지? 서비대 실험팀은 손꼽히는 수준이잖아. 소정은도 들어갈 수 없을 거야!’여기까지 생각하니 서정은 웃음이 더욱 간절해졌다.송지혜는 서정이 눈치가 빠르고 말까지 잘하는 것을 보며 매우 만족했다. 그녀는 두 눈을 가늘게 뜨고 오미선의 집 방향을 바라보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흥, 우리 학교에 이름난 교수님이 둘이나 있을 필요가 있을까? 난 오미선보다 훨씬 실력이 있고, 심지어 인맥 방면에서 한 수 위였지만, 하필 학교는 과제 경비, 교육 자원, 심지어 학생 분배까지 모두 오미선의 편을 들어줬지. 대체 왜? 오미선이 나이가 많아서? 경력이 많아서?’그동안 오미선의 과제는 줄곧 정체된 상태였고, 3년이 지나도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했다. 그리고 밑에 있는 대학원생들도 매우 평범했다.‘올해의 학생은 더욱 말할 것도 없지! 오미선이 이번에 선택한 세 명의 대학원생은 수준이 모두 별로라고 들었어. 그중에는 나이가 좀 많은 학생까지 있다나? 몇 번 만에 합격했을지 누가 알아. 늙어서 사람 보는 안목도 따라서 나빠진 거야. 이런 나이 많은 학생은 딱 봐도 천부적인 재능이 없는데. 오미선만 마음이 약해서 그런 학생을 받
오미선은 방금 소식을 얻었는데, 올해 70%의 대학원 연구 비용이 모두 송지혜의 팀으로 분배되었고, 그녀는 나머지밖에 얻을 수 없었다.잡다한 비용을 제외하면, 지배할 수 있는 부분은 오직 20%도 안 됐다.요 몇 년 실험에 줄곧 새로운 진전이 없었기 때문에, 자연히 논문을 쓸 수가 없었다. 논문이 없으면 학술 성과가 없는 것과 같았다.그렇게 오미선 팀의 비용이 점차 줄어들었다. 그녀도 몸이 안 좋은 데다가, 학생들 중 이 팀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여기까지 생각하자, 오미선은 길게 탄식을 했다.바로 그때, 맞은편에 사는 송지혜가 웃으며 다가왔다.“오 교수님, 지금 방금 실험실에서 돌아오는 길인가요? 실험팀이 최근에 새로운 발견을 했다면서요? 정말이에요?”오미선은 말을 하지 않았다.“아, 그럼 가짜겠네요. 오 교수님은 매일 실험실로 달려갔으니, 참 부지런해 보이던데, 어째서 성과가 없는 거죠? 올해 오 교수님의 팀에게 남겨준 비용이 또 줄어들었다면서요? 아이고, 나도 전에 이런 돈 없는 고생을 해봤는데. 그때는 오 교수님이 너무 부러웠죠. 뭐 세상일을 모르는 법이죠. 지금 그 운은 마침 나에게 돌아왔으니까요!”여기까지 말하자, 송지혜는 가볍게 웃었다.“하지만 오 교수님이 고생을 좀 해야겠어요.”오미선은 턱을 살짝 치켜들더니 숄을 꽉 잡았다.“10년 전의 실험 비용은 현재의 1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했지만, 전 생명과학원의 산출은 현재의 두 배예요. 자원의 많고 적음은 최종 학술 산출과 필연적인 연관이 없지만...”오미선은 말머리를 돌렸다.“어떤 사람들은 교수님으로서 나쁜 영향을 끼쳤기에, 대학원은 높은 비용을 지불하였지만 대등하지 않은 학술성과를 거뒀던 거죠.”송지혜의 안색이 갑자기 어두워졌다.“발뺌하긴요. 계속 이렇게 가다 오 교수님의 실험팀이 앞으로 존재할 수 있을지조차 문제가 될 텐데! 더군다나 요 몇 년 오 교수님의 학생들 중 아주 휼륭한 학생이 나오는 것을 본 적이 없는데. 선생님으로서 당신은 나보다 더 잘 알
정은에게 지금 다른 생각이 있었지만, 그 전에 좀 더 기다려야 했다.‘계약이 만료되어야만 움직일 수 있어.’...이날, 정은은 평소대로 외출하며 도서관에 가려고 했다.밖에 나오자마자 재석을 만났다.그는 최근에 새로운 과제를 준비해야 했기에 무척 바빴고, 며칠 밤을 새워 금방 실험실에서 돌아왔다.“선배님, 좋은 아침이에요.”정은은 웃으며 그에게 인사를 했다.“사실 학교 밖에서는 직접 내 이름을 불러도 되는데.” 재석은 고개를 가볍게 흔들었다.“참, 네 의견을 묻고 싶은데. 전에 너에게 말했던 그 완성하지 못한 과제 기억하니?”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는 당연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 과제는 지금 그녀가 접촉하고 있는 과제 방향과 매우 부합되었다.게다가 그것은 오랜 고민 끝에 나온 과제였기에, 이대로 포기하기엔 매우 아쉬웠다.“잘 생각해 봤어? 계속 연구하고 싶지 않아?”정은은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그럼요! 하지만... 지금 실험실이 없어서 데이터 부분을 완성할 수 없어요. 그래서...”모든 결론은 데이터가 필요하며, 수없이 많은 실험 기록에서 데이터를 얻을 수 있었다. 정은은 재료도 없고 도구도 없었기에 실험을 전혀 전개할 수 없었다.“내 실험실에 오면 돼.”잠시 멈칫하더니, 재석은 한마디 덧붙였다.“무료로 써.”재석의 실험실은 비록 최근에 설립되었지만, 있어야 할 설비가 하나도 빠지지 않았고, 모두 현재 세계 차원에서 가장 선진적인 기자재였다.“그래도 돼요?” 정은은 자기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떴다.‘이 세상에 공짜가 있을까? 그것도 나한테 이런 좋은 기회가 떨어지다니.’“내 말이 농담처럼 보여?”정은은 잠시 망설이다가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정말 고마워요!”재석은 담담하게 웃으며 눈빛에 미소가 번쩍였다.실험실은 실학동 8층에 있었다.서비대학교의 실험실은 수량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매 실험팀에 주어진 정원도 제한이 있었다.그러나 재석의 실험실은 비교적 특수했다. 그들은 직접 기업
재석이 말했다.“아무 시간이나 실험실을 사용할 수 있고, 매일 출근도장을 찍을 필요가 없어. 넌 시간이 있을 때 오기만 하면 돼.”정은은 현재 오미숙이 그녀에게 준 논문을 이해해야 할뿐만 아니라, 관련 분야의 최신 연구성과에도 관심을 돌려야 했다.이제 또 하나의 정식 논문 과제를 완수해야 했기 때문에, 그야말로 숨 돌릴 틈조차 없었다.재석은 이런 일들을 잘 알고 있었지만, 정은의 능력으로, 시간을 합리적으로 계획하고 적극적으로 추진한다면, 절대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곧이어 그는 또 정은에게 실험실의 주의사항을 알려주었다.실험실마다 역할이 달랐기에 주의사항도 달랐다. 정은은 열심히 들으며 중요한 점을 적기도 했다.“현재 내가 이끄는 실험팀만 이 실험실을 사용하고 있어. 나 말고도 네 명의 팀원이 더 있는데, 기회 되면...”말이 끝나기도 전에 안경을 쓴 마흔 살 정도 하는 남자가 탕비실에서 걸어 나왔다.그는 몸집이 크고, 근육까지 있어 언뜻 보기에는 건장한 반달곰 같았다.그런데 손에 보온컵을 들고 있었는데, 구기자가 둥둥 떠 있었다. 안에는 심지어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났다.“어? 조 교수, 우리 팀에 신입이 들어온 거야?” 남자는 정은을 훑어보았지만, 불편한 정도는 아니었다. 반면 궁금해하는 동시에 자제했다.‘예의가 있고 분수가 있는 사람이군.’“소개할게. 전진욱, 내 동료이자 실험팀 성원 중 하나야. 서비대에서 기초물리를 가르치고 있어.”“안녕.” 진욱은 방긋 웃으며 손을 내밀었고, 무서웠던 얼굴은 순식간에 어수룩해졌다. 그야말로 얌전하기 그지없는 사람이었다.정은은 잠시 놀라서 말을 잇지 못했지만, 얼른 웃으며 악수했다.“전 교수님, 안녕하세요. 저는 소정은이라고, 소 교수님의...”‘어...’“친구야.”전진욱은 눈썹을 치켜세우며 재석을 바라보더니 시선은 마지막에 정은의 얼굴에 떨어졌다.‘조 교수가 친구를 데리고 실험실을 참관하러 온 것을 본 적이 없는데...’“젊은 아가씨, 그렇게 긴장하지 마. 날 전 교수님이라
부츠를 신은 긴 다리가 눈에 들어왔다. 여자는 카멜색 코트에 흰색 니트를 입고 입었고, 손에는 회색 에르메스 가방을 들고 있었다.머리부터 발끝까지 정교함을 드러냈다.수아는 재석을 본 순간, 눈빛이 밝아졌다.“조 교수님, 좋은 아침이에요!”“좋은 아침.” 재석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수아야, 소개해 줄게. 우리 팀에 새로 들어온 멤버인데, 소정은이라고 해. 너보다 두 살 어려.” 태민은 가장 먼저 그녀에게 이 소식을 공유했다.수아는 그제야 오늘의 실험실에 한 사람이 더 많아진 것을 발견했는데, 웃음이 그대로 굳어졌다.정은이 오기 전, 수아는 실험팀의 막내였고, 모두들 그녀에게 양보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그러나 수아도 확실히 그럴 자격이 있었다.콜롬비아대학에서 졸업한 다음, 또 서비대에서 박사 과정을 공부하고 있었으니, 그야말로 얼굴과 지혜를 가진 미녀였다.게다가 재석의 실험팀에 성공적으로 진입할 수 있었으니, 그 연구능력, 학술수준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정은이 차례대로 인사를 하자, 수아는 눈썹을 치켜세우더니 간단하게 얼버무린 다음, 손을 거두어들였다.그녀는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정은은 오히려 수아가 자신을 향한 적의를 느낄 수 있었다.옆에 있는 미진은 두 여자아이를 훑어보더니 말을 하지 않았다.재석이 입을 열었다.“사실 정은 씨는 우리 실험팀에 가입한 성원이 아니야.”“...네?”“정은 씨는 자신의 실험 과제가 있는데, 단지 우리의 실험실을 빌려 쓰고 있을 뿐이야.”‘실험실을 빌린다고?’태민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조 교수님은 종래로 실험실을 남에게 빌린 적이 없는데. 어떻게 이번에...’다른 사람들도 같은 의혹이 들었다.미진과 진욱은 눈을 마주쳤고, 수아는 미간을 세게 찌푸렸다....재석은 정은을 단독실험대로 데려갔다.“앞으로 이곳은 네 실험대야. 무슨 필요한 것 있으면 나에게 말할 수 있고, 칠판에 적을 수도 있어. 매일 다른 사람들이 와서 재료를 보충할 거야.”정은은 고개를 살짝 끄
정은은 조수석 문을 열고 차에 올랐다. 안전벨트를 매고 창밖을 슬쩍 바라봤다. 공장은 호텔에서 10km 떨어진 개발지구에 자리 잡고 있었다.은혁이 운전대를 잡으며 말을 이어갔다. “그 구역은 첨단 기술 산업 클러스터로 지정돼 있어서, 기술 협력 프로젝트도 대부분 그쪽으로 집중되고 있어요.” “정은 씨가 찾는 그 새로운 감온 정확도 소재는 우리랑 CG그룹이 공동 개발한 건데, 지금까지 1세대부터 3세대까지 세 가지 버전이 있어요.”정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집중했고, 중간중간 전문적인 질문도 빠짐없이 던졌다. 은혁이 답할 수 있는 부분은 성의껏 설명했지만, 구체적인 수치나 실험 조건처럼 세세한한 부분은 바로 대답하기 어려운 것도 있었다.약 20분 후, 두 사람은 공장에 도착했다. 은혁이 미리 연락해 둔 덕분에, 정문 앞에는 담당자가 나와 있었다.정은은 안내받아 간단히 실험실과 공장을 둘러봤다. 연구 구역과 생산라인은 전혀 겹치지 않게 구획이 나뉘어 있었고, 현장도 전반적으로 정돈된 느낌이었다.정은이 요청한 소재의 1세대와 2세대는 이미 완제품으로 확보되어 있었지만, 3세대는 아직 실험 단계였기에 정식 생산은 되지 않았다. 따라서 실험실에서 직접 합성해야 했다.“시간은 얼마나 걸리죠?” 정은이 은혁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은혁은 옆에 있는 연구원을 바라봤다.“8시간 정도 걸릴 것 같아요. 내일 오전엔 제품 받아보실 수 있어요.”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관련 비용은 정산대로 처리해 주세요. 최종 결정되면 한 번에 입금할게요.”은혁은 급히 손사래를 쳤다. “아니에요. 비용은 무슨 비용... 정은 씨, 우리 사이에 뭘 그렇게 딱딱하게 굴어요.”정은은 침착하게 말했다. “그럴수록 더 딱딱하게 해야죠. ‘친할수록 돈 문제는 분명하게.’ 이건 기본이에요. 더군다나, 우리 둘은 그냥 ‘친구’일 뿐인데, 은혁 씨가 도와주는 것만 해도 충분히 고마워요.”“게다가 실험실도 예산이 따로 있는 조직이고, 모든 비용
실험실에서 진욱은 오늘만 몇 번째인지 모르게 재석을 힐끔거렸다. 결국 참지 못하고 다가갔다. “재석아, 너 오늘 길 가다 돈 주웠냐?”실험대 앞에서 입꼬리를 내릴 줄 모르던 재석의 손이 잠깐 멈췄다. “데이터 정리는 다 됐어? 3차 실험 가능성 평가 보고서는 언제 낼 건데?”“하, 이 사람 분위기 다 깨네.” 진욱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근데 말이야, 오늘 아침에 네가 샌드위치 먹는 거 봤거든.”“그래서?”“정은이가 해준 거지? 다 알아. 너희 둘, 다시 잘 되는 거야? 그것도 아니면, 이제 미련 접은 거야?” 재석은 살짝 고민하다가, 이제는 말해도 되겠다 싶어 입을 열려고 했다.바로 그때, 핸드폰에서 톡 알림이 떴다. 정은이었다.[도착했어요. 샌드위치는 맛있었어요?]재석은 바로 답장했다.[맛있었어.]정은은 곧장 자신의 일정을 재석에게 알려줬다.[지금 호텔 체크인하고, 오후엔 공장 갈 거예요.][응, 알겠어.]1분 정도 지났지만, 그다음 메시지는 오지 않았다. 재석은 괜히 허전해졌다.‘예전에도 이렇게 대화했었는데... 왜 지금은 이걸로는 부족하지?’정은과 더 오래 이야기하고 싶었다. 더 많은 말, 더 사적인 얘기, 더 가까운 거리. 그 마음은 마치, 가려운 곳을 손톱 끝으로 슬쩍 긁은 느낌. 절대 시원하지 않았다. 그냥 더 간지러워질 뿐.‘그냥, 정은이한테 세게 할퀴어지고 싶은데...’“누구랑 톡하냐?” 진욱이 슬쩍 핸드폰을 들여다보려 다가왔다.재석은 피할 틈도 없이 화면을 들킨 셈이 됐다. “뭘 감춰. 정은이랑 메시지 주고받는 거잖아. 왜? 뭐가 부끄럽다고.”“됐고.” 재석은 핸드폰을 집어넣고, 실험대에서 내려왔다. “오늘 점심은 내가 쏜다. 뭐 먹고 싶어?”진욱은 멍한 표정으로 몇 초 멈췄다. 옆에 있던 미진이랑 태민이 눈을 마주쳤다. “교수님, 무슨 좋은 일 있으세요? 갑자기 점심을요?”재석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먹고 싶은 거 생각나면 전 교수한테 말해.
비행기 이륙 직전, 은혁이 정은에게 제한했다. “정은 씨, 내 마일리지로 좌석 업그레이드해 줄게요.”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은혁의 얼굴에 아쉬움이 스쳤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자리로 돌아갔다. 잠시 후, 다시 다가와 말했다. “내가 정은 씨 옆자리로 바꿨어요.”비즈니스석에서 이코노미석으로 자리를 바꾸다니, 웬만한 사람이면 거절하고도 남을 일이었다. “은혁 씨, 이렇게까지 안 하셔도 돼요.” 정은은 단호한 어조였다.‘처음으로 이렇게까지 분명하게 말한 것 같아.’정은은 연애 한 번 안 해본 소녀가 아니었다. 은혁의 눈빛에 담긴 감정이 어떤 건지, 모를 리 없었다.하지만 그동안 굳이 선을 긋지 않은 건, 은혁이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며, 오히려 몇 번이고 도와줬기 때문이었다. 이번 Z시 출장도 은혁의 도움 덕에 가능했던 일이었다.게다가 은혁이 고백도 안 했고, 정은이 불편할 정도로 다가온 것도 아니었으니까... 정은도 자신이 먼저 딱 잘라 말하는 게 오히려 예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그리고 그때의 정은은 솔로였고, 재석이 입을 열게 하기 위해서라면, 어느 정도의 자극은 필요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정은은 이미 재석과의 관계를 정리했고, 은혁은 더 적극적으로 다가오고 있으니, 그녀도 이제 더 늦기 전에 확실히 은혁에게 말해야 한다고 결심했다. 그래야 서로 상처받지 않을 테니 말이다.은혁은 정은의 말에 잠시 당황한 듯하다가, 이내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난 정은 씨 옆자리에 있는 게 좋아서 그래요.”정은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비즈니스석 티켓을 사 놓고 누구랑 자리를 바꾸든, 그건 상대방의 자유니까. 굳이 뭐라고 할 필요는 없지.’그 후, 정은은 노트북을 열고 일에 집중했다. 은혁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틈틈이 정은을 흘끗거렸다.그러다 손을 들어 승무원을 불렀다. “저기요. 잠깐만요.”“네, 손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결국 재석은 아쉬움 가득한 눈빛으로 정은의 손을 놓았다. 그러고는 조용히 열쇠를 건네받아 현관문을 열어주었다.“정은아, 잘 자.”그 한마디.‘정은아’라는 이름이 너무나 자연스럽고도 부드럽게 흘러나왔다. 마치 수천 번은 불러본 것처럼.그 말에 정은은 순간 멍해졌다.‘왜 내 이름을 듣고도 가슴이 이렇게 설레지?’“네, 당신도 잘 쉬어요.”둘은 그렇게 짧은 인사를 나누고 각자의 문 안으로 들어갔다.그날 밤. 정은은 평소와 달랐다. 샤워를 마친 뒤 늘 하던 루틴, 논문 체크나 프로젝트 정리는 손도 대지 않았다.대신, 자기도 모르게 핸드폰을 들고 재석의 SNS를 열었다.‘뭐 하는 거야? 나...’그런데 이상하게, 자꾸만 궁금해졌다. ‘이 사람, 평소에 어떤 거 올리지?’재석은 SNS 설정 따위는 하지 않은 사람이었다.맨 아래까지 내리는 데 몇 초도 채 걸리지 않았다.포스트 총수, 대략 서른 몇 개. 그중 90%는 논문, 연구, 산업 동향 공유.‘진짜 성실한 연구자 모드네...’그나마 정은과 관련 있는 건 얼마 전 실험실이 SCI 논문 게재됐을 때 서비대학교 공식 계정에서 축하 포스팅한 걸 공유한 것뿐이었다.[축하합니다.]짧고 건조한 멘트.그 밑엔 전진욱과 조미진이 ‘좋아요’를 눌러뒀다.‘이게 전부야?’그렇게 핸드폰을 내려놓으려던 순간, 알림이 하나 떴다. 재석이 새로운 글을 올렸다.정은은 무심코 눌러봤다. [r = a(1 - sinθ)]‘...어?’정은의 손가락이 멈췄다. 이 수식, 익숙했다. 너무 익숙해서 순간 심장이 멈칫했다.댓글 첫 줄엔 진욱이 있었다.[극좌표 함수? 밤에 안 자고 뭐 하세요? 조 교수님?]조미진과 손태민은 말없이 ‘좋아요’만 눌렀다. 하지만 두 사람은 속으로 ‘다음 연구 주제가 광학 쪽인가?’ 생각하며 혼란스러워했다.아무도 몰랐다. 이 수식의 진짜 의미를.‘r = a(1 - sinθ)’, 하트곡선.‘설마 이게, 그거? 진짜 그거... 맞아?’정은은 손끝을
“그럼... 고백하기 전까지, 혼자서 그렇게 많이 고민한 거예요?”“응.”“어쩐지...”정은이 아주 작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뭐라고?” 재석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자, 정은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이젠 다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가요...”둘은 손을 꼭 잡고 복도로 향했다. 조용한 밤, 서로의 온기가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다.걷던 중, 재석이 문득 걸음을 멈췄다. 정은도 따라 멈춰 서며 돌아봤다.“왜요?”“정은아, 우리 지금... 사귀는 거 맞지?”정은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두 사람이 꼭 잡은 손을 살짝 들어 보였다.“그렇게 생각 안 해요? 조금 전부터 내가 ‘재석 씨’라고 부른 거 못 느꼈어요?”“혹시 지금... 꿈꾸는 거 아니지?”정은은 눈을 가늘게 뜨며 미소 지었다.“흠, 그렇게 말하는 거 보니까... 평소에도 꿈에서 날 자주 본 모양이네요?”재석의 몸이 순간 굳더니, 양 볼이 순식간에 빨개졌다.‘진짜 자주 꿨나 보다?’재석은 눈을 못 마주친 채, 그저 두 사람이 맞잡은 손만 바라보며 쑥스러운 듯 웃었다.“진짜 좋아.”‘정은이도, 나를 마음에 두고 있었구나.’‘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었구나.’같은 계단, 같은 복도, 수없이 함께 걸어온 길. 그동안은 늘 친구라는 이름으로, 앞서거나 뒤따르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 왔지만, 오늘은 처음으로, 손을 잡고 나란히 오르는 계단.정은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근데, 왜 나랑 은혁 씨한테 뭔가 있다고 생각했어요?”재석은 목소리를 낮추며, 살짝 눈을 피했다.“미안. 계산하러 나갔다가... 우연히 통화하는 거 들었거든.”정은의 눈이 살짝 커졌다.그리고 머릿속으로 자신이 통화 중 했던 말을 하나하나 되짚어봤다.‘공항에서 보자, 기대된다, Z시 출장... 뭐 이상한 말한 것도 없는데...?’그런데도 재석은 그걸 ‘여행 약속’으로 받아들였고, 그걸로 인해 혼자 삭이다가 결국 아래층에서 고백까지 해버린 거였다.“너희, Z시에 여행 간다고 했잖아.”
정은이 멍해 있는 사이, 재석이 한 걸음 다가섰다. 늘 부드럽고 점잖던 그가, 이 순간만큼은 전에 없던 강한 기운을 뿜어냈다. ‘이 남자... 이런 눈빛도 있었나?’정은은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등이 벽에 닿는 순간, 재석은 어느새 바로 눈앞에 와 있었다.정은이도 이제야 제대로 실감이 났다. 재석이 자신보다 훨씬 크다는 걸. 그리고 지금처럼 가까운 거리에서 내려다보면, 자신이 마치 남자의 품 안에 갇힌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도.재석이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이제 좀 알겠어?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그때 네가 학업이 먼저라고 했을 때, 난 받아들였어.”“그런데 장은혁한텐 기회를 줬지. 정은아...”그가 고개를 더 숙이자, 뜨거운 숨결이 그녀의 목선에 닿았다. 순간, 정은의 팔에 소름이 쫙 돋았다. “너, 나한테 너무 불공평해.”그 마지막 한 마디는 묘하게 서글픈 기운이 섞여 있었다.정은은 입술을 달싹이며 뭔가 말하려 했지만, 재석은 그녀의 여지를 주지 않았다.“알아, 내가 지금 어떤 입장인지. 묻고 따질 자격도 없고, 네가 누구를 좋아하든, 그건 네 자유라는 것도 알아.”“이 말 꺼냈다가, 우리 사이가 끝날 수도 있다는 것도 알고 있어. 근데... 계속 참다 보니까 알겠더라.”‘난... 그렇게까지 쿨한 사람이 아니었어.’“그래서 이제 참지 않기로 했어.”‘어떻게 되든, 그건 네가 정해.’그렇게 말한 재석은 고개를 숙인 채 멈췄다. 마치 판결을 기다리는 죄인처럼.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조용한 밤공기 속에서, 정은의 목소리가 아주 작게 울렸다.“이제, 제가 말해도 될까요?”“응...”“재석 씨.”정은은 처음으로 재석을 그렇게 불렀다.“고개 들어요. 나 좀 봐요.”재석의 어깨가 순간 굳어졌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그는 이미, 거절당할 각오까지 끝냈다.그런데 눈이 마주친 순간, 정은의 두 눈 속에서 재석이 본 건... 눈물이 아닌, 웃음이었다.억지로 짓는
“헤어졌다고요?”정은은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몰랐어?!”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진욱은 눈을 반짝이며 의자째로 다가오더니, 목소리를 낮추고 본격적인 ‘TMI’를 털어놓기 시작했다.“M시 출장 갔다 오고 며칠 안 돼서, 재석이가 바로 짐 싸서 수아를 내보냈다니까?”정은은 그 말을 듣고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재석과 수아 사이에 어떤 감정선이 있었는지, 그동안 몇 번 스쳐 지나갔던 장면들이 퍼즐처럼 빠르게 떠올랐다. 그녀의 표정은 담담했지만, 눈빛 속엔 미묘한 기류가 스쳤다.“아마 진짜 많이 좋아했나 봐. 그러니까 정리할 때도 그만큼 아프고, 오래 걸리는 거겠지. 조금만 시간 지나면, 태민이도 정리될 거야.”진욱은 이어서 말했다.“네.”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대답했다.그 이후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남의 연애는, 들을 수는 있어도 깊게 얘기하지 말아야 해. 괜히 나서 봤자... 괜히 끼어든 꼴만 되니까.’...해가 지고, 붉은 노을이 건물 유리에 비치기 시작할 무렵. 정은은 마침내 작업을 끝냈다.진욱은 기다렸다는 듯 프로그램을 열고 기능 하나하나를 테스트했다.그리고 30초쯤 흐른 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다.“어어!! 복구됐어! 됐다! 돌아왔어! 다시 쓸 수 있어!!”미진도 덩달아 벌떡 일어나 양손을 번쩍 들었다.“살았다, 진짜!! 여태 손으로 데이터 입력한 거 생각하면... 이건 거의 기적이야!”진욱은 시계를 힐끗 보더니, 정은을 향해 말했다.“지금 이 시간까지 남아서 도와준 우리 정은이, 완전 수고 많았어! 조 교수...”“응...?”갑작스레 이름이 불리자, 재석은 몇 초간 멈칫하다가 고개를 돌렸다.진욱은 능청스럽게 말했다.“아니, 정은이가 이렇게 큰일 해줬는데, 감사 표시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적어도 밥 한 끼는 사야지.”“맞아요, 맞아요. 조 교수님, 이건 진짜 밥으로도 모자라요.” 미진이 곧장 거들었다.재석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대략 1년 전, 정은은 한동안 재석의 실험실을 빌려 쓴 적이 있었다. 그 일을 계기로 전진욱, 조미진 등과 인연이 닿았다.처음엔 서로 어색하고 낯설었지만, 몇 달이 지나면서 조금씩 가까워졌고, 지금은 가볍게 농담도 주고받을 만큼 편해졌다.그러던 어느 날, 진욱은 우연히 정은이 실험 데이터를 처리하는 속도를 보고 깜짝 놀랐다. 너무 빠른 게 아닌가 싶어서 슬쩍 물어봤더니, 정은은 코딩도 할 줄 아는 공대 만능 캐릭터였다. 그녀는 직접 짠 프로그램으로 데이터를 자동 정리하고, 다차원 분류와 정렬까지 가능하다고 했다.“와, 뭐야... 완전 반칙인데?”진욱은 결국 정은에게 부탁해 실험실 맞춤형 프로그램 하나를 따로 제작해달라고 했고, 그 이후, 데이터 정리는 그야말로 신세계를 맞이했다. 진욱은 쓸 때마다 감탄하며 말했다.“진짜... 정은이 덕분이야. 이게 사람을 살리네.”하지만 어제 그 기특한 프로그램이 갑자기 먹통이 됐다. 손태민이 고쳐보겠다고 덤볐지만, 결과는... 풍비박산이었다. ‘이젠 누가 손댔다간 진짜 박살 나겠어...’ 결국 정은에게 SOS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재석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혹시 오늘 시간 돼? 안 되면, 며칠 뒤도 괜찮고...]진욱은 훨씬 급했다. 말 그대로 살려달라는 마음이었다.[야, 오늘 안 데려오면... 나 여기서 바로 싸버린다! 진짜라고, 어?!]그는 어제 약 먹고 좀 괜찮아진 줄 알았건만, 밤새 배가 또 난리였다. 오늘 아침부터 실험실 화장실은 진욱의 전용이 되었다. 오전에만 6회 방문.그 말은, 그냥 협박 아니었다. 진짜 실현 가능성이 있었으니 말이다.정은은 상황을 듣고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시간 돼요. 지금 바로 갈게요.”[그래. 그럼 내가 정문 앞으로 갈게.]‘굳이 마중까진 필요 없는데...’ 뚝-정은이 전화를 끊으려던 찰나, 전화는 이미 끊겨 있었다. ...10분 뒤, 정은은 학교 정문 앞에서 재석과 마주쳤다. 두 사람은 실험실로 걸어가며 프로그램
“언니, 이건 굳이 우리 의견 물을 필요도 없지 않아요? 언니가 해볼 만하다고 생각하면, 무조건 가는 거죠. 저희한텐 뭐든 시키기만 하세요. 무조건 따라갈게요!”민지가 단호하게 말하자, 서준도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맞아요, 저흰 누나 믿고 가는 거예요. 결정은 누나가 해요.”정은은 그 말에 잠시 멍해졌다가, 결국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너희들... 나 그렇게 믿어도 돼? 나도 가끔 실수하거든?”민지는 마치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정은 언니가 실수했다면, 그건 100% 저랑 서준 오빠가 뭔가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뜻이에요.”“그건 좀 과장이지만...”‘그래도... 이런 믿음을 받는다는 게 참 따뜻하네.’세 사람은 그렇게 식사를 마쳤다.계산은 서준이 맡았고, 정은과 민지는 먼저 주차장으로 향했다. “언니, 먼저 가요. 전 서준이 데리러 갈게요.”“응? 굳이?”“우리 집이랑 방향이 같잖아요. 서준이는 차도 없으니까, 그냥 태워다 주는 거죠, 헤헤.”“그래, 알겠어. 그럼 조심히 가. 운전 천천히 하고.”“네. 언니도 잘 들어가요!”...두 ‘파트너’와 방향을 맞춘 정은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바로 준비에 들어갔다.자료 조사부터 시작해 ‘신소재 최적화 계획안’을 정리하고, 모든 내용이 빠짐없이 정리됐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확인했다.벌써 밤 10시. 정은은 핸드폰을 들고 조심스레 메시지를 보냈다.[장은혁 씨, 시간 돼요? 상의드릴 게 하나 있어요.]그 시각, 은혁은 거실 소파에 앉아 어머니인 황희숙 여사의 ‘진실 공방’에 시달리고 있었다.“너 외할아버지한테 전화 왔어. 오늘 도시락 들고 회사 갔다며? 근데 그냥 말도 없이 두고 사라졌다고 난리야. 게다가 누가 너랑 어떤 여자가 같이 있는 걸 병원 약국에서 봤다던데? 솔직히 말해봐. 너, 여자 친구 생겼지?”은혁은 억울함 가득한 목소리로 외쳤다.“아니 외할아버지는 왜 또 엄마한테 바로 전화해요? 진짜 너무하신다니까요...”“이 자식 봐라, 말버릇 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