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수진은 이미숙의 손을 잡았다. “20여 년이 지난 오늘, 난 널 되찾을 줄은 정말 꿈에도 바라지 못했어. 다행히 하나님은 날 불쌍히 여겨 우리 가족 단란하게 모이게 했구나.”이춘재는 그녀가 눈시울을 붉히는 것을 보고 웃으며 슬픈 분위기를 깨뜨렸다. “또 의사의 말을 잊은 거야? 오늘 이렇게 즐거운 날에는 더욱 웃어야 한다고.”이미숙은 고개를 끄덕였다.“아빠 말이 맞아요. 엄마, 한번 웃어 보세요.”봉수진은 피식 하고 웃으며 말했다. “나이가 들면 울어도 못생기고, 웃으면 더 못생기는데, 참...”“어디가요? 분명히 세월이 흘러가면서 더욱 부드럽고 아름다워지셨는데.”한마디 말에 봉수진은 싱글벙글 웃었다.소진헌은 묵묵히 이미숙에게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정말 당신밖에 없다니깐!”갑자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더니 현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할아버지, 저예요.”이춘재는 가볍게 기침을 했다. “들어와.”현빈은 그제야 문을 밀고 들어섰는데, 한눈에 소진헌과 이미숙 사이에 서 있는 정은을 보았고, 눈에는 놀라움이 번쩍였지만 이내 그 감정을 숨겼다.“밖에 손님들이 거의 다 도착하셨으니 언제든지 시작할 수 있어요.”“그래.” 이춘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우리 나가자. 손님들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지 말고.”연회장은 지금 불빛이 찬란하고 매우 떠들썩했다. 이씨 가문의 초청을 받은 손님들이 적지 않은데, 각 업종과 관련되었다. 그러나 같이 비즈니스를 하는 사람이 많아 대부분 서로 아는 사이였다.“어? 나씨 가문도 왔네요? 그 집안은 요 몇 년 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는데. 누가 좀 도와달라고 하면 거절하면서 조훈 때문에 그러지 못한다더니, 어떻게 이번엔 시간을 낸 거예요?”선우는 샴페인을 들고 웃는 듯 마는 듯 구경을 했다.“그리고 주씨 가문의 그 감독도 얼마나 까다로운 분이신지. 내가 직접 찾아와서 광고를 찍으라고 해도 모두 거절을 한 거 있죠?”“또 밥을 사준다고 했는데, 뭐라고 대답한 줄 알아요? 너무 바빠서 접
“퉤! 재수 없어!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수민은 어이 없어 하며 눈을 부릅뜨고 말했다. “내가 그 남자를 좋아한다고? 내가 그렇게 멍청해 보여?”“아니면 됐어, 헤헤.”동건은 수민의 뒤를 바라보며 물었다. “너 혼자 왔어?”“응.”“너희 집에서 널 대표로 파견한 거야?”“쳇, 나 오늘 우리 가문 대신 온 거 아니야.”동건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럼 누구를 대신해서 온 거야? 우리 가문 대신일 리는 없잖아. 헤헤, 사실 생각해보면 안 되는 것도 아니지.”“결국 너는 지금 내 여자친구이니 우리 가문 예비 며느리잖아. 고씨 가문을 대표하는 것도 너무 적합하지 않아?”“흥! 꿈이나 깨! 난 남을 대표하러 온 게 아니야. 나 혼자 왔어.”“그게 무슨 뜻이야?”수민은 손에 든 초대장을 흔들었다. 다른 사람들의 초대장은 모두 붉은색이었지만, 그녀의 것은 핑크색이었다.“봤지? 개인 초대장이야.”“네가?” 동건은 의아해하며 물었다.“왜? 안 돼?”개인 초대장은 일반적으로 주인집에서 가까운 친척이나 중요한 인물에게 보내는 초대장이었기에 특별하고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었다.그런데 수민은 왜 갖고 있는 것일까?“너 이씨 가문과 아는 사이야?”‘아닌데, 수민이 이씨 가문과 무슨 관계가 있다는 걸 들은 적이 없는데. 설령 있다 하더라도 조씨 가문에게 줘야 하는 거 아니야?’수민은 미소 지으며 말했다. “한 번 맞혀봐.”동건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때, 선우가 손을 흔들며 말했다. “도겸이 형, 여기!”도겸은 그를 향해 걸어갔다.“형 안 오는 줄 알았어요.” 선우는 도겸에게 말했다.도겸은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그냥 얼굴 좀 내밀려고. 나중에 볼일 있어서 먼저 가봐야 해.”“그렇게 바쁜 거예요?” 선우는 놀라며 물었다.“응, 오늘 저녁에 G시에 가야 해서. 지사 쪽에 문제가 생겼어.” 도겸은 담담하게 말했다.선우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웨이터에게서 와인 한 잔을 가져왔다. “형, 마셔봐. 이 술 괜찮아.”도
이춘재가 손을 내밀자, 모두들 그의 손을 따라 바라보았다.이미숙과 소진헌이 손을 맞잡고 무대 위로 올라갔다.순식간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이춘재는 웃으며 말했다. “이 아이가 제 딸 이미숙이고, 옆에 있는 분은 제 사위 소진헌입니다.”“사실 저도 전에 이미 제 딸에 관한 소문이 돌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 소문이 무엇인지 저도 어느 정도 들었습니다.”이 말을 하자, 무대 아래 사람들의 표정이 다소 불편해졌다. 그 소문이 터무니없었던 이유는 바로 이 자리의 사람들이 거짓 정보를 퍼뜨렸기 때문이다.이춘재는 계속해서 말했다. “소문이란 것이란 본래 사실과 다르게 퍼지기 때문에 쉽게 믿을 수 없는 법이지요. 모두들 이렇게 궁금해하시니, 저도 조금 더 설명드리겠습니다.”“제 딸의 본명은 이미숙이고, 현재 소설을 집필하고 있는 작가입니다. 운이 좋아 미스터리 소설 분야에서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른 적도 있습니다.”모두들 눈을 크게 떴다. “그게 운이 좋은 거라고요?”이춘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그렇습니다.”그는 다시 사위인 소진헌을 바라보며 설명을 이어갔다. “우리 사위는 일반인입니다. 대학교를 졸업한 후 현재 고등학교에서 물리 교사로 재직 중이며, 성실하게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특별히 대단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훌륭한 일을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이춘재의 설명이 끝나자, 봉수진이 무대에 올라와 웃으며 말을 이었다.“그 외에도 한 사람을 더 소개하고 싶습니다. 바로 저희 손녀입니다. 이씨 가문의 공주님이자, 저희 부부의 소중한 손녀, 소정은입니다.”말을 끝내자, 현빈이 정은을 데리고 무대 위로 올라갔다.그 순간, 오빠라는 그의 신분이 온 세상에 발표되었다.현빈은 이미 이 순간을 예상했었다. 그동안 두 어르신은 이미숙을 그렇게 중시했으니 어떻게 대외적으로 발표하지 않겠는가?하지만 그 순간, 현빈은 여전히 말할 수 없는 씁쓸함과 허탈함을 느꼈다.‘이제부터, 남들 눈에 있어 우리는 남매일 뿐이야
“정은 누나가 이씨 가문의 손녀라니?” 선우는 다시 한번 경탄했다.‘정말 생각할수록 신기하네! 그런데 잠깐만...’“그럼 현빈이 형이랑 남매 사이인 거 아니에요?”이 발견에 선우는 깜짝 놀랐다.‘드라마야 뭐야, 애인이 결국 남매가 되다니?’선우의 첫 반응은 현빈이 미쳤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시 생각하다 고개를 돌려 도겸을 바라보았다.그는 무대 위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처음엔 멍해졌고, 후에는 의혹을 느꼈는지 당황해서 어쩔 줄 몰랐으며 마지막엔 광희와 격동이 뒤섞인 얼굴로 변했다.선우는 지금까지 한 사람의 얼굴에서 그렇게 많은 감정을 본 적이 없었다.감정은 마치 파도처럼 밀려왔다.“도겸이 형? 형?!”도겸은 갑자기 정신을 차렸다. “뭐라고?”“정은 누나랑 현빈이 형은 남매였어요...”“응, 남매였어. 그래서 가족사진에 정은이 있었던 거야...”‘어쩐지 심현빈과 함께 이씨 가문에 찾아갔더라니. 난 또 정은이 어르신들에게 인사하러 간 줄 알았지.’도겸은 더 이상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형, 표정 관리 좀 해요.”“그렇게 할 순 없어.”‘어! 이건 또 뭐야!’“지금 고소하다고 느끼는 거예요?”도겸은 차갑게 입을 열었다. “심현빈의 고의적인 행동에 비해 난 매우 착한 거 아니야?”‘분명히 엉뚱한 생각을 했으면서.’...다른 한 구석에서 이미윤은 무표정하게 무대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이춘재가 무대에 올라 정식으로 이미숙과 소진헌 부부를 소개했고, 이어서 봉수진까지 무대에 올라 대중 앞에서 정은의 신분을 공개했다.그뿐만 아니라 정은이 이씨 가문의 ‘공주’라는 말까지 덧붙이며, 마지막엔 자신의 친아들까지 정은과 함께 무대에 세웠다.마치 ‘우리가 정은을 전적으로 지지한다’는 메시지를 온 세상에 알리려는 듯한 분위기였다.그 광경을 보던 이미윤은 처음엔 냉소를 지었고, 점점 질투가 일어나더니 끝내 마음 한켠이 영 달갑지 않았다.‘생일잔치에 딸 되찾은 것을 발표하다니!’“미윤아? 미윤아!”“응? 방금 뭐라고 했어?”
이미윤은 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어 올라 표정이 점점 일그러졌다.그러나 그녀 곁에 서 있던 강서원은 그런 이미윤의 감정을 돌볼 여유가 없었다. 상대방이 지금 얼마나 짜증나고 있는지 알 리 없었고, 오히려 맞장구를 치며 말했다.“그렇지, 이렇게 고생을 많이 했으니 잘 대해줘야지...”말을 하면서도 강서원의 관심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막내아들에게 쏠려 있었다.그렇다. 재석도 오늘 이 자리에 참석했다.하지만 그는 개인 초청장을 받았고, 수민과 같은 핑크색 초청장이었다.그래서 두 사람 모두 가족과 따로 이 자리에 참석한 것이다.자신이 낳은 자식이니, 강서원은 자신의 아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재석이 꼼짝도 하지 않고 무대를 응시하는 걸 보니, 딱 봐도 정은을 보고 있는 게 분명했다.그리고 그가 바라보는 시선을 보면, 이미 넋을 잃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강서원은 심지어 자신이 자랑스러워하는 아들이 무대 위를 바라보며 정은에게 넋을 잃고, 정신을 놓고 헤어나오지 못하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었다.그녀는 이를 악물고 주먹을 쥐었다.‘못났어! 정말 못났어!’그리고 강서원은 또 조카딸 수민을 바라보았다.‘아니야, 차라리 보지 말자. 수민이는 재석보다 더 흥분해서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아. 정말 수준 떨어져.’‘소정은이 도대체 두 사람에게 무슨 약을 먹인 거야? 두 사람 왜 하나 같이 그 아이한테 푹 빠져 있는 걸까? 어째서 모두들 이렇게 마음을 빼앗긴 거냐고?’수민은 무척 흥분해했다.만약 이곳이 연회장이 아니었다면, 그녀는 벌써 탁자 위에 올라가 소리쳤을지도 모른다.“정은아, 네가 최고야! 정은아, 사랑해! 정은아, 난 너밖에 없어!”동건은 입을 삐죽거리며 말했다.“그렇게 소리를 지를 정도야? 누가 보면 네가 이씨 가문의 손녀인 줄 알겠어.”“무슨 소리야? 난 정은이를 위해서 기뻐하는 건데.”이제 이씨 집안으로 돌아갔으니, 앞으로 그 누구도 정은을 괴롭히지 못할 것이다.“강도겸도, 너도, 나도 정은이를 괴롭힐 순 없어!”동건은
이 말이 나오자 현장은 순식간에 고요해졌다.공기마저 흐르는 것을 멈춘 듯했다.‘소중한 외동딸?’‘무슨 뜻이지?’‘이씨 가문에는 딸이 둘 있지 않았어?’다들 알고 있듯이, 큰딸 이미윤은 J시에서 손꼽히는 재벌 집안 심씨 가문에 시집갔다.그런데 어째서 갑자기 인정받지 못하게 된 걸까?현빈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두 노인을 바라보았다.하지만 그는 분수를 알고 있었기에, 그 자리에서 바로 따지지는 않았다.이미숙과 소진헌은 서로 눈을 마주쳤다.‘올게 왔구나!’봉수진의 ‘폭탄'이 여기에 숨어 있었던 것이다.그렇게 결국 폭풍이 몰아치기 시작했다.하지만...이런 자리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미윤이 이씨 가문의 딸이 아니라고 선언하는 건 너무 과하지 않은가?봉수진은 제멋대로 굴며 이런 결정을 내렸다.이미윤이 자신의 딸을 해쳤으니, 이제부터 봉수진도 이미윤을 딸로 삼고 싶지 않았다.원래 피도 섞이지 않은 인연일 뿐이었다.이제껏 이미윤을 키워서 재벌 가문에 시집보냈으니, 두 사람의 인연도 다한 셈이었다.이제부터 그들은 ‘모녀’가 아니라, 남으로 될 것이다.무대 아래에서 이미윤은 두 어르신이 자신에게 미리 아무 말도 없이 일을 진행한 것에 서운함을 느끼고 있었다.오늘은 그녀 혼자 초대장을 들고 왔고, 심정훈은 아예 나타나지 않았다.정확히 말하면, 지난번 두 사람이 모든 걸 터놓고 이야기한 이후로, 심정훈은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이미윤은 그가 두 어르신에게 말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한동안 지켜본 결과, 심정훈이 그러게 하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되었다.왜냐하면, 이춘재와 봉수진이 그녀를 찾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다.만약 두 어르신이 이미숙의 실종이 이미윤의 소행이라는 걸 알았다면, 반드시 찾아와 따졌을 것이다. ‘두 분은 절대로 가만히 있지 않으실 거야.’불안한 마음으로 하루, 이틀... 일주일을 보냈고, 이주가 지나도 두 어르신에게서는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이미윤은 완전히 안심했다.아마 이미숙도 이 사실
주위에서 들려오는 이야기를 들으며 이미윤은 표정이 일그러지고 이마의 핏줄이 불거졌다.‘어떻게 이런 일이? 두 분 다 아신 거야? 아니... 그럴 리 없어... 절대로...’하지만 주변 사람들의 눈빛은 마치 날카로운 칼날처럼 이미윤을 향해 덮쳐왔다.심씨 가문에 시집간 지 20년이 넘은 이미윤은 항상 ‘사모님'으로서 호사스러운 삶을 살아왔다. 훌륭한 남편과 아들 덕분에 어디를 가나 환영을 받았으니, 이렇게 남들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욕을 먹는 적이 한 번도 없었다.이미윤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진정을 되찾았다. 그리고 웃음을 지으며 무대에서 내려오는 이춘재를 맞이했다.“아빠, 생신 축하드려요! 오늘은 아빠의 팔순 잔치이자, 미숙이까지 되찾았잖아요. 우리 집안에 경사가 겹쳤네요!”이춘재는 고개를 들어 차갑게 이미윤을 바라보았다.그리고 그녀가 내민 손을 피하며 말했다.“내가 방금 한 말, 못 알아들은 거야?”이미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이춘재는 조금의 여지도 주지 않았다.“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씨 가문의 딸은 미숙이 하나뿐이야. 그러니 나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아빠...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제가 무슨 잘못을 했나요? 고칠게요... 그러지 마세요...”이미윤은 이춘재가 관계를 끊겠다는 말을 부녀 간의 다툼으로 넘어가려 했다.이런 상황에서도 그녀는 여전히 상황을 무마하려고 애쓰고 있었다.그 순간, 주변의 손님들 역시 이 일을 부녀 간의 갈등으로 오해하며 말했다.“큰일인 줄 알았는데, 그냥 가족 싸움이었네.”“다들 흩어져요.”그런데 봉수진이 갑자기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낯가죽이 두꺼운 사람은 봤어도, 너처럼 두꺼운 사람은 처음이야.”“그동안 현빈이 때문에 널 봐줬던 거야. 조용히 있으면 겉으로는 네 체면을 봐줄 수 있었을 텐데, 넌 끝도 없이 우리 집안에 빌붙으려 하고 있으니, 더 이상은 봐줄 수 없겠군.”“엄마, 그만하세요...”이미윤은 봉수진을 막으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봉수진은 마치 그동안 쌓인 원한을 한꺼번에
“천만에요, 천만에요...”남의 집안 이야기를 이렇게 들으니, 손님들은 오히려 재밌는 구경을 했다는 느낌이 들었다.‘정말로 대박이야.’해프닝이 끝나자 모두들 기쁜 마음으로 자리로 돌아갔지만, 강서원만이 제자리에 서서 멍하니 있었다.방금 이미윤이 바로 옆에 서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이미윤의 반응을 가장 먼저 눈에 담을 수 있었다.공포, 당황, 무력감, 원망...너무나도 많은 감정이 이미윤의 얼굴에 드러났다.‘그럼 그때 정말로 자신의 동생을...’하지만 기억 속의 이미윤은 너무나도 당당하고 현명하며 마음이 너그러운 사람이었다.강서원은 처음으로 자신이 사람 보는 눈이 없다고 느꼈다.“강 여사? 왜 서 계세요? 자리로 가시죠?”“그래요, 곧 갈게요!”...이와 동시, 서영숙과 세정 모녀도 멍하니 있었다.세정은 설날 내내 집에서 보내며 방에 틀어박혀 있었다.음식도 가정부가 직접 들고 올라갔으니, 장애인과 다를 바 없었다.서영숙은 간신히 세정을 설득해 이춘재의 생일 잔치에 참석시켰다.그런데 이렇게 큰 충격을 받을 줄이야...“엄마... 이거 꿈이죠? 다 가짜죠, 그렇죠?”세정은 어쩔 줄 몰라 서영숙의 손을 잡았다.서영숙은 이미 멍해졌다.무대 위에는 이미 아무도 없었지만, 그녀는 여전히 그곳을 응시하고 있었다.마치 그곳의 무언가를 다시 확인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맞아, 꿈일 거야...”그녀는 세정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서정은이 어떻게 이씨 가문의 사람이란 말인가?’이씨 가문은 오래된 명문 집안이었다.부자는 3대를 못 이어간다는 말이 있지만, 이씨 가문은 조상부터 직위가 놓았고, 현대에 이르러서는 실업으로 나라를 구한 집안이었다.돈도 많았지만, 인성도 바르고 명망도 높았다.최근 20, 30년 사이에 조용해졌을 뿐이었다.정은이 이런 대가족, 이런 배경과 실력을 가진 집안의 귀한 손녀라니.서영숙은 어느 해 설날, 정은이가 선물을 들고 찾아왔을 때를 떠올렸다.그때 그녀는 정은이를 문턱에도 들이지 않았다.“세
“언니, 이건 굳이 우리 의견 물을 필요도 없지 않아요? 언니가 해볼 만하다고 생각하면, 무조건 가는 거죠. 저희한텐 뭐든 시키기만 하세요. 무조건 따라갈게요!”민지가 단호하게 말하자, 서준도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맞아요, 저흰 누나 믿고 가는 거예요. 결정은 누나가 해요.”정은은 그 말에 잠시 멍해졌다가, 결국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너희들... 나 그렇게 믿어도 돼? 나도 가끔 실수하거든?”민지는 마치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정은 언니가 실수했다면, 그건 100% 저랑 서준 오빠가 뭔가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뜻이에요.”“그건 좀 과장이지만...”‘그래도... 이런 믿음을 받는다는 게 참 따뜻하네.’세 사람은 그렇게 식사를 마쳤다.계산은 서준이 맡았고, 정은과 민지는 먼저 주차장으로 향했다. “언니, 먼저 가요. 전 서준이 데리러 갈게요.”“응? 굳이?”“우리 집이랑 방향이 같잖아요. 서준이는 차도 없으니까, 그냥 태워다 주는 거죠, 헤헤.”“그래, 알겠어. 그럼 조심히 가. 운전 천천히 하고.”“네. 언니도 잘 들어가요!”...두 ‘파트너’와 방향을 맞춘 정은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바로 준비에 들어갔다.자료 조사부터 시작해 ‘신소재 최적화 계획안’을 정리하고, 모든 내용이 빠짐없이 정리됐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확인했다.벌써 밤 10시. 정은은 핸드폰을 들고 조심스레 메시지를 보냈다.[장은혁 씨, 시간 돼요? 상의드릴 게 하나 있어요.]그 시각, 은혁은 거실 소파에 앉아 어머니인 황희숙 여사의 ‘진실 공방’에 시달리고 있었다.“너 외할아버지한테 전화 왔어. 오늘 도시락 들고 회사 갔다며? 근데 그냥 말도 없이 두고 사라졌다고 난리야. 게다가 누가 너랑 어떤 여자가 같이 있는 걸 병원 약국에서 봤다던데? 솔직히 말해봐. 너, 여자 친구 생겼지?”은혁은 억울함 가득한 목소리로 외쳤다.“아니 외할아버지는 왜 또 엄마한테 바로 전화해요? 진짜 너무하신다니까요...”“이 자식 봐라, 말버릇 좀
진욱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그렇게 마음이 있는 거면, 왜 정은이한테 솔직하게 말 안 해?”“겁나는 거지, 재석아? 말 꺼냈다가 거절이라도 당하면... 그땐 친구로도 남을 수 없을까 봐, 무서운 거잖아.”진욱은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재석을 똑바로 바라봤다.“그건 너답지 않아. 내가 아는 재석이는, 망설이지 않고 결정하는 사람이었어. 결과가 불확실하다고 물러서는 사람 아니었잖아.”“정은이가 ‘지금은 연애 생각 없다’고 했지? 중요한 건 ‘지금은’이라는 거야. 사람 마음은 바뀌는 거고, 그때 거절했다고 지금도 똑같을 거란 보장은 없어. 알겠냐?”재석은 말없이 진욱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 말이 생각보다 깊게 박혔다. ‘지금도 똑같을까? 아니, 혹시... 지금은 조금 다를 수도 있는 걸까...’진욱은 그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야, 진심으로 말하는 건데, 너 계속 질질 끌면, 정은이 뺏긴다. 그리고 뺏기고 나서 울어봤자, 소용없을 거야.”“우리 정은이 인기 많은 거 너도 알잖아. 예전에도 정은이 두고 싸운 애들 있었잖아. 그리고 오늘 그 남자 봤지? 얼굴 잘생겼지, 젊지, 에너지 넘치지, 옷차림 보니까 집도 잘 사는 거 같던데?”재석은 이런 말을 아주 듣기 싫었다.“닥쳐.”진욱도 더 이상 말하기 싫었다. “칫. 드디어 위기감이 좀 드나?”‘그래, 긴장 좀 해라. 맨날 냉정한 척만 하지 말고... 이번엔 너도 좀 불안해져 봐야지.’...한편, 정은은 봉수진을 집에 바래다준 뒤, 약을 가정부에게 전달하며, 복용 방법까지 하나하나 직접 설명했다. 봉수진은 저녁까지 먹고 가라며 붙잡았지만, 정은은 이미 서준, 민지와의 약속이 있었다.“외할머니, 며칠 안에 다시 올게요. 오늘은 친구들이랑 약속이 있어서요.”“그래그래, 알았어. 젊을 땐 많이 만나고 다녀야지.”정은은 웃으며 고개를 숙였고, 곧 차에 올랐다.약속 장소인 레스토랑에 도착했을 땐, 서준과 민지가 이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은 테이블 위에
은혁은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 “그러게요... 나야 뭐, 그랬으면 좋겠지만...”하지만 정은의 태도는 그리 확신을 줄 만큼의 호감은 아니었다.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분명히 좋아한다는 표시도 없는 애매한 선이 보이는 듯했다.‘그래서 더 미치겠어. 기대도 못 하고,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고... 이러니까 계속 마음이 붕 떠 있잖아...’그렇게 속으로 앓고 있었지만, 정은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봉수진의 약에 모든 관심을 쏟고 있었다.VIP 약국답게, 일 처리는 정말 빨랐다. 정성스럽게 달인 약이 곧바로 팩 단위로 나뉘어 밀봉되었고, 음용 방법까지 깔끔하게 안내되었다.냉장 보관 후, 따뜻한 물에 데워 마시면 된다는 안내였는데, 이 정도면 환자도 거부감 없이 약을 먹을 수 있을 것이었다. 약을 다 받은 후, 약 한 시간쯤 지나 두 사람은 병원을 나섰다.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은의 전화가 울렸다.“여보세요? 외할머니? 네, 약 다 받아놨어요.”“병원에서 달여줬어요. 네, 거기 계세요. 지금 바로 갈게요.”전화를 끊은 정은은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은혁을 바라보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오늘 고마웠어요. 외할머니 모시러 가볼게요. 안녕히 계세요.”“아, 어... 그래요! 잘 가요!”은혁은 여자의 뒷모습이 멀어질 때까지 멍하니 서 있었다.심지어 여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된 후에도 한참을 그렇게 바라본 후에야 아쉬움 가득한 시선을 거두었다.그 순간, 핸드폰이 울렸고, 화면엔 ‘황기' 두 글자가 떴다.“여보세요?”[야 이놈아! 도시락 던져놓고 도망가듯 나가버리면 어떡해?! 말도 못 붙였잖아! 뭐가 그렇게 급해? 뭐가 외할아버지보다 중요한 거냐고?!]“죄송해요... 헤헤.”황기는 순간 당황했다. ‘얘 지금 뭐야? 미쳤어? 웃음은 왜 이렇게 정직하게 새어 나오는 건데...?’...한편, 정은은 봉수진을 태우고 병원을 나서는 중이었다. 바로 그때, 재석은 약을 수령하고 외래 진료실 앞 벤치에 앉아 있었다.
정은도 여기서 재석을 만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선배님, 병원엔 무슨 일로 오셨어요?”재석은 그제야 시선을 거둬들였다. 눈길이 정은에게 닿는 순간, 표정이 한층 부드러워졌다. “난...”“날 데려다주러 온 거야.” 그 순간, 전진욱이 배를 감싸 쥐며 천천히 다가왔고, 재석 대신 대답을 건넸다.정은은 진욱을 바라보다가 눈이 살짝 커졌다. “교수님, 어디 아프세요? 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데요.”“하... 뭘 잘못 먹었는지, 아침부터 배탈이 나서... 약도 안 듣고... 이 사람이 막 끌고 오더라니까... 검사라도 받아보라고.”정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잘하셨어요. 괜히 방치하다가 더 심해질 수도 있잖아요. 미리 체크하면 마음도 편하고요.”“어우, 너희 둘 미리 맞췄냐? 말이 어쩜 그렇게 똑같냐?” 진욱이 짐짓 장난스러운 말투로 투덜댔다.정은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재석을 바라봤다. “그랬어요?”재석은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눈빛 속 어딘가 알 수 없는 감정이 일렁였다. ‘저 말투, 저 표정... 나만 아는 게 아닐 텐데...’“정은 씨, 이제 가야죠.” 그때, 은혁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아, 네.” 정은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희 먼저 갈게요.”그렇게 말한 후, 은혁과 나란히 병원 복도를 걸어 나갔다.재석은 그 자리에 멈춰 선 채 두 사람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봤다. 눈빛 속 감정은 복잡하고도 묘했다. ‘뭔데, 저 둘은 저렇게 자연스러워...’“재석아? 야, 재석아!”진욱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재석은 고개를 돌렸지만, 눈빛 속 싸늘함은 여전했다. 진욱은 그 눈빛에 소름이 돋아 어깨를 움찔거렸다.“너... 왜 그래?”“방금 정은이가 ‘저희’라고 했어.”“어...?”진욱은 멍한 표정으로 재석을 바라봤다. 몇 초간 멍하던 그는 그제야 이해가 된 듯 말했다. “아... 그 ‘저희’? 그게 뭐 어때서? 같이 왔으니까 ‘저희’지. 그럼
얼마 지나지 않아 황 원장은 처방전을 프린트해서 정은에게 건넸다.“수고 많으셨습니다, 원장님.”정은이 공손히 인사하자 황 원장은 손을 휘저었다.“아이구, 무슨... 이 아가씨는 인사도 참 반듯하게 잘하네요. 말도 예쁘게 하고, 얼굴도 예쁘고. 이런 손녀가 있으면, 어디 내놔도 자랑이겠네요.”봉수진은 바로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그럼요. 우리 손녀는 어디 하나 빠지는 데가 없어요.”황 원장은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장난스럽게 물었다.“이렇게 예쁜 아가씨한테 남자 친구가 없을 리 없는데? 그렇죠?”봉수진은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없어요! 보통 남자애들은 우리 정은이랑 안 어울려요.”“허허, 그래도 우리 손자 정도면 꽤 괜찮은데...?”황 원장이 살짝 떠보자 봉수진은 손사래를 쳤다.“아이구, 그 얘긴 그만해요. 정은이 아직은 시집 안 보낼 거예요. 지금이 제일 곁에 두기 좋을 때라니까요.”‘아이고, 또 시작이다...’정은은 속으로 헛웃음 치며 처방전을 가방에 쏙 넣고 눈치껏 자리에서 일어났다.“저, 약 지으러 먼저 다녀올게요!”...진료실 문을 나서는 순간, 정은은 누군가와 부딪혔다.“아, 죄송해요!”고개를 돌려 상대방을 본 순간 정은의 걸음이 멈췄다.“은혁 씨?”은혁은 보온 도시락 통을 들고 서 있었다.“정은 씨! 또 보네요. 우리 진짜 인연인가 봐요? 하하...”“여긴... 병원인데? 누가 입원하셨어요?”정은이 도시락을 보며 물었다.“아, 아니에요. 저 입원실 온 거 아니고요! 외할아버지가 이 병원 의사세요. 오늘 외래 당번이라 저희 어머니가 직접 도시락을 싸주셨는데, 제가 대신 가져다드리러 온 거예요.”“혹시 외할아버지 성함이 황 씨?”“네! 황기 원장님이세요. 한약재 이름에서 따오셨대요, 혹시... 아는 분이세요?”‘어머나, 진짜 인연인가?’정은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오늘 저희 외할머니 진료도 황 원장님한테 받은 거예요.”“정말요? 세상에... 진짜 대박. 어쩐지 자꾸 마주치네요.”은혁은 정은 손에 들
아침 햇살이 창문 틈 사이로 스며들었다. 부드럽게 퍼진 빛이 정은의 잠든 옆얼굴을 은은하게 감쌌다.살랑이는 바람에 커튼 끝자락이 가볍게 흔들렸고, 고요한 침실에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여보세요? 외할아버지?”이춘재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아직 자고 있었구나? 그럼 내가 이따가 다시...]“아뇨, 괜찮아요. 이제 깼어요. 요즘 집에서 쉬고 있어서요, 실험실을 좀 멈췄거든요. 왜요, 무슨 일 있으세요?”전화기 너머에서 이춘재는 짧은 한숨을 내쉬며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어젯밤에... 내 친구 하나가 심장마비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단다. 병원에서 못 버티고... 그냥 그렇게.]‘헉...’[오늘 아침에 그 집 식구한테 연락이 왔어. 장례 준비도 해야 하고, 남은 가족들도 어찌할 바를 모르니 내게 좀 도와달라고 하더구나. 그 친구는 진짜, 훅 떠났지만 남겨진 식구들은... 참 마음이 아프지.]이춘재는 말을 멈췄고, 한참 후에 덧붙였다.[원래는 오늘 네 외할머니가 병원 가는 날이라 내가 같이 가기로 했는데... 현빈이는 출장이란다. 생각해 보니까 내가 부탁할 사람은 너밖에 없더라.]정은은 웃으며 말했다.“외할아버지, 그게 어떻게 부탁이에요. 당연히 제가 가야죠. 외할머니랑 병원 가는 건 제 몫이에요. 외할아버지는 마음 놓고 다녀오세요.”[그래, 그래. 고맙다, 정은아.]...오전 9시. 정은은 외할머니댁 앞에 도착했다. 봉수진은 이미 외출 준비를 마치고 작은 가방을 손에 든 채 문 앞에 서 있었다.그 옆엔 이춘재가 말없이 함께 서 있었고, 두 사람은 뭔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당신 진짜 왜 그래요? 정은이는 실험실에서도 바쁜 애인데, 이런 일까지 시켜서 되겠어요? 괜히 애 걱정하게 만들고, 또 미안하게 만들고...”봉수진의 잔소리가 이어졌고, 이춘재는 구겨진 어깨로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맞아, 당신 말이 다 맞아. 근데 정은이가 요즘 쉰다길래... 그냥 부탁한 거지 뭐...”“쉰다고 병원까지 같이 가야 해요? 그
수민은 깜짝 놀라 반사적으로 손을 올려 한 대 갈겼다.짝!동건은 피하지 못하고 정통으로 이마를 맞았다.“야! 미쳤어?!”수민은 인상을 팍 구기며 외쳤다.“너 귀신이야 뭐야? 소리도 없이 뒤에서 들이대고... 맞을만 하니까 맞은 거지.”“뭐? 지금 그딴 태도를 보이는 이유가 뭐야? 딴 남자 생각하다가 놀란 거 아냐? 장은혁? 그 잘난 척하는 새끼?”수민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맞아. 잘생겼지, 말도 잘해, 심지어 마술도 하지. 매력 넘치는데?”“푸... 마술? 그건 여자들 꼬시려고 배운 거지. 허세로 가득 찬 새끼야.”“오히려 더 좋지 뭐... 허세라도, 적어도 표현은 하잖아. 넌 뭐 있어?”동건은 이를 악물었다.“그런 애가 뭐가 그렇게 좋다고. 딱 봐도 겉멋만 잔뜩 든 애송이잖아.”“내가 좋으면 된 거지. 근데... 잠깐만. 너, 여기 어떻게 들어왔어?”수민의 눈빛이 순간 날카로워졌다.“그냥.”“고동건!!!”“야, 소리 좀 그만 질러. 힘 좀 아끼라고. 이따가 쓸 데가 있을 테니까.” “꺼져.”수민은 문을 향해 손을 내저었다. 하지만 동건은 한 발도 움직이지 않았다.대신, 그녀를 천천히 바라보다가 작게 웃었다.“너 요즘... 왜 이렇게 자꾸 도망치는데? 솔직히 말해봐. 내가 그리웠지?”“웃기지 마.”“아닌데... 지금도 눈 흔들리는 거 보이거든.”수민은 숨을 고르며 조용히 말했다.잠시 후, 그녀는 동건에게 그대로 안겨 침대 위로 내던져졌다.동건은 셔츠 단추를 풀며 천천히 그녀 쪽으로 다가갔다.“한다고 했잖아. 내가 농담하는 사람으로 보여?”수민은 몸을 살짝 일으키며, 도발적인 미소를 지었다.“너 하나로 되겠어?”“해보면 알겠지.”밤은 길었고, 봄기운처럼 뜨거웠다.누군가는 그 열기를 마음껏 즐겼고, 누군가는 답답한 숨을 눌러 삼켰다....불 꺼진 침실. 어둠 속,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창문 너머로 달빛만이 희미하게 커튼 틈 사이로 비스듬히 들어왔다.재석은 거실 창 앞에 서 있었다. 등
부재중 10통 중 9통은 고동건, 그리고 나머지 1통...‘어? 우리 조재석 교수님?’수민은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톡 알림도 확인했다.읽지 않은 메시지 42개.대부분은 역시나 고동건.수민은 손가락으로 휙휙 넘기며 대충 읽었다.[야, 또 남자랑 밥 처먹냐?][여사친 모임엔 남자 안 끼운다며?][그 장은혁, 꽃미남 새끼 남자 아니냐?][조수민 너 진짜 표리부동이다?] [답장 안 해?][전화도 안 받아? 10초 준다!][기다려, 오늘 밤에 너 좀 혼나야겠어!!]수민은 손가락으로 한 번에 쭉 밀어내고, 심드렁하게 한 마디만 보냈다.[꺼져!!!]10초도 안 돼서 동건한테서 바로 또 메시지가 왔다.[답장할 줄은 몰랐네...][넌 진짜 사람 마음 찢어놓고 아무렇지 않지?] [아냐, 넌 원래 마음이 없지.][...]수민은 무표정하게 창을 닫았다. ‘이 인간은 진심으로 질린다...’그리고 재석과의 메시지함을 열었다.단 두 줄.[정은이랑 어디서 밥 먹었어?][장은혁도 함께였어?]수민의 눈썹이 절로 올라갔다.‘어라...?’‘우리 조재석 교수님이? 이런 문장을? 이렇게 빠르게? 이렇게 직접적으로?’‘우리 조 교수님... 평소에 ‘응’ 하나 치는 데도 심장 박동 조절하듯 하던 사람이었는데...’게다가 이 두 문장, 보통 사람이 보냈다면 ‘그냥 궁금했나 보다’ 하고 넘겼을 거다.하지만, 그게 ‘조재석’이라는 이름으로 오면 느낌이 전혀 달랐다.‘이거... 약간... 삐쳤다고 읽어야 하나?’수민의 눈이 반짝였다.‘뭐야, 이거 진짜네?’그녀는 살짝 웃으며 미용실에서 찍어둔 사진을 열었다.정은과 은혁이 나란히 앉은 각도, 분위기도 꽤 그럴싸한 장면.‘자, 실험 들어가자.’사진을 톡에 업로드. 손끝으로 부드럽게 터치.전송 완료.바로 이어 핸드폰에 내장된 스톱워치를 켰다.“시... 작!”1초, 2초, 3초... 5초...띵-[지금 어디야?]수민은 피식 웃으며 핸드폰을 내려놨다.‘오케이, 확정. 조재석 교수님
“은혁아, 우리 먼저 가볼게.”은혁이 손을 흔들며 인사하려던 찰나, 정은은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은혁 씨, 같이 식사하시죠? 어차피 저도 아직 안 먹었는데요.”“마침 예약도 해뒀으니까 괜찮다면 같이 가요.”“정, 정말요?! 괜찮을까요?”은혁은 말끝이 떨릴 정도로 들뜬 기색이었다.수민은 표정으로 정은에게 물었다. ‘진심이야?’정은은 눈빛으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수민은 한숨 쉬듯 웃으며 말했다.“좋지 뭐... 사람 하나 늘어난다고 달라질 거 없잖아. 같이 가자.”은혁은 기뻐서 입꼬리를 다 못 내렸다. ‘정말 같이 가는 거야...? 나 지금 약간... 꿈꾸는 거 아냐?’...레스토랑에 도착하자 직원이 안내한 자리로 세 사람이 들어갔다. 따로 마련된 룸이라 분위기도 아늑했다.음식이 나오기 전, 은혁이 갑자기 말했다.“기다리는 김에... 작은 마술 하나 보여드릴까요?”수민은 눈썹을 살짝 치켜세웠다.“마술도 해? 그러고 보니, 정은이 외할머니 생신 때도 뭐 하나 보여줬었지.”“이번엔 새로 배운 거예요.” 은혁이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그럼 해봐, 해봐!” 수민은 벌써 핸드폰을 꺼내 카메라 준비 완료 상태로 들고 있었다.“도구 필요해?” 그녀가 묻자, 은혁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옆 캐비닛에서 종이 티슈 한 팩을 꺼냈다.그중 다섯 장을 쏙쏙 뽑아냈다. 마침 티슈에 프린트된 꽃무늬가 하나하나 다 달랐다.그는 정은을 향해 말했다.“정은 씨, 가장 마음에 드는 거 하나 골라주세요.”정은은 망설이지 않고 무심하게 한 장을 집어 들었다.은혁은 그걸 받아 조심스럽게 반으로 접고 말했다.“잘 봐요.”다시 펴서 말한 뒤, 조용히 티슈를 손안에서 뭉쳤다. 그리고 그 주먹을 천천히 펴자 손안에는 작은 꽃 한 송이가 피어 있었다.“선물이에요.”은혁은 웃으며 그 꽃을 정은에게 건넸다.“진짜 꽃이에요?”정은은 놀란 듯 꽃을 받았다. 손에 올려놓고 한참을 들여다봤다.‘이거... 어떻게 한 거지?’수민은 슬쩍 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