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같은 남자였으니 현빈은 또 어찌 정은을 향한 재석의 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할 수 있겠는가?티가 나지 않았지만, 재석은 정은을 좋아하고 있는게 분명했다.‘그런 감정이 존재하는 한, 절대로 내 눈을 속일 수 없어.’현빈은 발걸음을 멈추며 갑자기 고개를 돌렸다.정은은 뒤에서 걷고 있었고, 현빈이 앞을 가로막으니 재석을 보지 못했다. 현빈이 갑자기 멈추자, 정은은 하마터면 그와 부딪칠 뻔했다.다행히 제때에 멈춰 섰다.“미안.” 현빈은 고개를 숙이고 정은을 바라보았다. “내가 뭐 하나 깜박했네.”다음 순간 정은의 손에 따뜻한 밀크티 한 잔이 나타났다.따뜻한 온도가 전해오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멍해졌다.“잘 들고 있어, 쏟으면 난 책임지지 않을 거야.”정은은 의혹을 느꼈다.“언제 샀어요?”두 사람은 내내 서로를 마주하고 앉아 있었고, 정은은 현빈이 주문하러 가는 것을 보지 못했다.현빈은 웃으며 말했다.“비밀이야.”“아.” 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이렇게 능숙한 것을 보니, 이런 수법으로 많은 여자를 꼬셨나 봐요.”“아니, 너 하나밖에 없어.”정은은 더 이상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그녀는 두 사람이 너무 가깝다고 생각하며 내색하지 않고 뒤로 물러섰다.현빈은 도망치고 싶은 정은의 마음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이럴 때일수록 그녀를 너무 몰아붙이면 안 된다.‘귀여운 여우가 급한 마음에 남의 품에 뛰어들면 안 되니까.’“자, 돌아가. 난 올라가지 않을게. 너도 내가 데려다 주는 것을 원하지 않을 거야.”“그럼 잘가요.”“음.”현빈은 오랫동안 머물지 않았다. 정은이 길을 건너는 것을 본 다음, 그는 차를 몰고 떠났다.정은은 밀크티를 들고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고개를 들더니 재석이 나무 밑에 서있는 것을 보았고, 그야말로 깜짝 놀랐다.“선배님, 아직 안 올라갔어요?”“너 기다리고 있었어.”말하면서 재석은 정은의 손에 있는 밀크티를 훑어보았다.“이런 거 좋아해?”“자주 안 마시는 편은 아니에요. 가끔 한 잔 마실
”만약 부족하다면, 또 다른 얘기를 해줄 수 있는데. 한 시간 전에 우린 정은 씨 집 근처의 카페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었어. 전부 사실이니 한 번 조사해봐.”선우는 안색이 극도로 어두워진 도겸을 바라보았다.‘지금 스피커를 끄면 안 될까?’그러나 현빈은 불난 집에 부채질까지 했다.“다 들었어? 내가 다시 한번 말할 필요가 없겠지? 녹음해서 자세히 들어봐.”‘앗, 그럴 필요는 없는데! 나 좀 살려줘!’[저기, 현빈 형, 그럼 계속 일 봐요. 난 일이 있어서 먼저 끊을게요.]말이 끝나자 선우는 재빨리 전화를 끊었다.현빈은 피식 웃더니 가속 페달을 밟았다.“도겸 형...”선우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현빈 형이 하는 말 듣지 마요. 가짜일 수도 있잖아요...”도겸은 무뚝뚝하게 몸을 돌려 룸으로 돌아왔다.선우는 재빨리 따라가며 이미 망했다고 생각했다.동건은 소파에 앉아 선우에게 미친 듯이 눈짓을 했다‘이게 무슨 상황이야? 담배를 피우러 나간 사람이 표정은 또 왜 이래?’‘아, 형 좀 묻지 마요. 나 너무 힘들어요.’도겸은 종업원을 불렀다.“위스키 두 병 더 가져와. 오늘 다 마시지 않으면 너희들 그 누구도 갈 수 없어.”...새벽 2시, 술은 다 마셨지만 사람도 취한 채로 소파에 엎드렸다.도겸은 바에 기대어 눈을 감고 있었고, 잠꼬대처럼 가볍게 중얼거렸다.“정은아...”선우는 가까이 다가가서 들었다.동건은 담배에 불을 붙인 다음, 손가락 사이에 끼웠는데, 그 말을 듣지 않아도 대충 알아맞힐 수 있었다.“또 소정은을 부르고 있는 거야?”“음.”“싸다 싸! 그러게 애초에 왜 헤어진 거야? 기어코 소정은의 체면을 봐주지 않고 그 난리를 벌여가며 헤어졌는데, 지금은 왜 또 후회하면서 이 꼴로 된 건데. 정말 싸다 싸.”“에헴!” 선우는 가볍게 목을 가다듬었다.“말 좀 작작 해요. 이제 어떡하죠? 집에 데려다 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우리 둘 다 술을 마셨으니 누가 운전을 하겠어? 그냥 호텔에 데려다줘. 방 하나 예약
도겸은 연희를 훑어보더니 곧바로 비웃었다.“배가 아프다며? 별일 없어 보이는데.”그의 예리한 눈빛에 연희는 자신의 거짓말이 간파된 느낌을 받았다.“오빠도 집에 없으니까 나랑 말동무 해주는 사람도 없잖아요. 너무 외로워요...”도겸은 귀찮아서 바로 연희의 말을 끊었다.“외로우면 책을 보고 문제나 풀어. 너 학생 아니었어? 수업 들을 필요가 없는 거야? 대학원 시험을 보겠다고 하지 않았어? 그렇게 한가하면 가서 이모님 좀 도와주지 그래? 이모님도 엄청 바쁘신 것 같은데.”연희는 우물쭈물하며 말을 하지 못했다.도겸의 검은 눈동자는 차갑고 냉담했다.‘또 감히 이런 수작을 부려? 내가 그동안 얼마나 많이 보았는데? 정말 수준도 없어!’도겸은 몸을 돌려 떠나려고 했지만, 부드러운 몸이 뒤에서 달려들어 두 손으로 그의 허리를 꽉 감았다.그는 부드러운 가슴이 자신의 등을 가볍게 문지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도겸 씨, 가지 마요. 저도 오랫동안 도겸 씨를 보지 못했단 말이에요. 정말 너무 보고 싶었어요. 나와 함께 있어주면 안 돼요? 제가 싫어도, 이 아이를 봐서...”도겸은 이를 악물며 순식간에 연희의 손을 뿌리쳤다. 그리고 혐오와 증오로 가득 찬 눈빛으로 말했다.“나한테서 떨어져! 그리고 그 아이를 가지고 날 협박하지 마. 난 지우라고 경고했지만, 오히려 몰래 우리 어머니에게 연락해? 내가 그대로 넘어갈 것 같아!”연희는 도겸의 눈빛을 피했다.“미안해요, 저는...”“경고하지만, 좀 조용히 있어. 그렇지 않으면 지금 당장 이 집에서 널 쫓아낼 수도 있으니까!”말을 마치자, 도겸은 위층으로 올라갔다.남자의 뒷모습은 차가울 정도로 무정했다.연희는 이를 악물고 심호흡을 하며 감정을 조절했다.그녀는 묵묵히 자신에게 참아야 한다고 말했다.도겸에게 시집가는 것은 그녀의 유일한 출로였고, 그녀는 이미 이를 위해 너무 많은 것을 바쳤다.‘질 수 없어. 지면 안 돼.’3초 후, 연희는 자신을 진정시키는 데 성공했다.그녀는 도겸이 가장 좋아하는
도겸이 엎어진 그릇을 발로 차자, 그릇은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연희는 놀라서 온몸을 떨었다.“내가 말했잖아, 내 앞에서 엄살 좀 부리지 말라고. 3초 줄게, 빨리 네 방으로 꺼져. 내 앞에서 걸리적거리지 마!”도겸은 위층을 가리키며 눈빛은 포악한 기운으로 가득 찼다.연희는 감히 제자리에 서 있지 못하고 벌벌 떨며 위층으로 올라갔다....그때 같이 식사를 한 다음, 정은은 실험실 사람들과의 관계가 더 친해진 것을 발견했다.물론 그녀의 요리 솜씨 덕분이기도 했다.그래서 정은은 지금 매일 점심을 많이 했는데, 모두들 나눠 먹도록 했다.그리고 미진 그들도 아주 친절하게 정은에게 실험 방법에 대한 문제를 알려주었다.변화가 가장 뚜렷한 것은 역시 전진욱이었다.정은이 그의 속산 노트를 다 보고 또 전부 배운 후부터, 정은을 바라보는 진욱의 눈빛이 변했다.진욱은 자주 정은을 붙잡고 속산문제를 토론했고, 정은도 새로운 지식을 배우려 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녀가 너무 빨리 배워서, 얼마 지나지 않아 진욱이 가르친 지식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었다.이렇게 되니 진욱은 더욱 힘이 났다. 그는 그야말로 정은을 자신의 제자로 삼아 키우는 것 같았다.두 사람은 틈만 나면 앉아서 토론을 했고, 수시로 초고지와 펜으로 계산을 했다.“전 교수, 지금 정말 제자라도 받은 거야? 이렇게 한 가지 일에 몰두하는 것을 오랫동안 보지 못했는데.”“전 교수님, 너무 정은이 편만 들면 안 돼요. 저도 전 교수님의 학생이니, 저도 그런 대우를 받고 싶어요.”태민은 농담을 하며 손을 들었다.“넌 가서 네 실험 보고서나 써, 쓸데없는 말 하지 말고.”사람들이 한바탕 웃고 떠들자, 정은조차도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재석이 부르는 것조차 듣지 못했다.“정은 씨? 소정은?!”“아, 네? 교수님, 저 부르셨어요?”“응, 이리 와봐.”“네.”...이튿날, 진욱은 더 이상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미진이 물었다.“전 교수, 왜 우거지상을 하고 있어? 조 사장이
정은은 잠에서 금방 깨어난 게 분명했다. 곰돌이 잠옷에 눈도 약간 빨갰다.그녀는 하품을 했는데, 반응이 평소보다 좀 느렸다.“나 때문에 깨어났어?” 낡은 집이라 방음이 잘 되지 않아, 그들은 문을 닫고 있어도 복도의 발자국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재석은 자신이 정은을 깨운 줄 알았다.정은은 눈을 비비며 고개를 저었다.“나도 원래 일어나려던 참이었어요. 지금 벌써 6시 30분이 됐잖아요.”오늘 오후에 백지영과 함께 쇼핑을 해야 했기에, 정은은 일찍 일어나서 논문을 보며 문헌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재석은 그녀가 아직 잠에서 덜 깬 것을 보고 자기도 모르게 목소리를 약간 낮췄다.“시간이 아직 이르니 좀 더 자.”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정은이 자신을 훑어보는 눈빛과 마주쳤다.“왜 나를 그렇게 보는 거야?”“감기에 걸렸죠?”재석은 쓴웃음을 지었다.“너한테 들켰네?”“목소리가 좀 쉰 것 같아서요. 열 나요?”재석은 자신의 이마를 재보았다.“나도 몰라. 뜨겁진 않으니 아마도 별일 없을 거야.”정은은 고개를 흔들었다.“선배님, 아마도 별일 없을 거라뇨? 이게 엄숙한 과학연구학자가 해야 할 말인가요?”재석은 웃음을 터뜨렸다.“집에 온도계가 없어.”“나한테 있으니까 먼저 집에 돌아가요. 이따가 가져다 줄게요.”“좋아.”정은은 몸을 돌려 서랍에서 온도계를 찾았다. 알콜로 소독을 한 다음, 또 소독면으로 닦은 후에야 재석의 집에 찾아갔다.남자는 이미 소파에 누워 있었다.평소에 그렇게 빈틈이 없는 사람이 지금 슬리퍼조차 벗지 않았으니 지금 괴로운 게 분명했다.정은은 살금살금 다가가서 작은 소리로 재석을 불렀다.“선배님? 선배님?”불러도 반응하지 않자, 정은은 걱정이 되어 저도 모르게 가까이 다가갔다.“선배님?”그런데 남자가 갑자기 눈을 뜰 줄이야.두 사람은 눈을 마주쳤다.재석은 여자의 작고 고운 얼굴이 자신의 코앞에 있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다소 막연하고 어찌할 바를 몰랐는데, 살짝 떨리는 속눈썹은 마치 날개를 펴게 될
비록 자기 아들의 가족카드를 긁은 거지만, 지난번에 못생긴 스카프를 주는 것보다 훨씬 나았다.두 사람은 사치품 가게에 들어갔고, 판매원은 예리하게 서영숙의 기세가 남다르는 것을 알아차렸다.그래서 그녀는 즉시 웃는 얼굴로 맞이했다.“사모님, 뭐 필요하신 거라도 있나요? 이건 모두 방금 출시한 신상이에요. 대범하고 화려해서 사모님과 너무 잘 어울리네요.”서영숙은 오늘 구찌의 클래식 블랙 코트에, 진주 목걸이를 하고 있어 자신의 기질을 돋보이게 했다.“그래요, 그럼 이 두 벌 좀 볼게요.”연희는 방금 이를 악물고 서영숙을 위해 카드를 긁어 가방 몇 개를 샀다. 비록 구름이 겉으로 보기엔 아무렇지 않았지만, 속으론 마음이 무척 아팠다.‘그게 수천만 원이잖아! 난 지금까지 이렇게 사치스러운 적이 없었는데.’비록 도겸의 가족카드를 가지고 있었지만, 남자에게 돈을 탐내는 인상을 남기지 않기 위해, 연희는 출산 검사와 임산부 용품을 구입할 때만 이 카드를 사용했다. 그리고 가끔 백만 원 이내의 작은 물건을 좀 살 때 빼고는 이렇게 함부로 돈을 쓸 엄두를 내지 못했다.지금까지 연희가 가지고 있던 그 두 개의 비싼 가방은 도겸과 서영숙이 선물한 것이었다.별장의 안방에는 에르메스 가방이 가득 걸려있었다. 거의 모두가 금색이었고, 게다가 일반 가죽, 귀한 가죽 등 없는 게 없었지만, 도겸은 그녀에게 절대로 만지면 안 된다고 경고했다.서영숙은 연희를 힐끗 보았다.그녀는 연희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고작 이만한 돈을 썼다고 마음이 아픈 거야? 허, 가난한 집구석에서 자란 사람은 돈을 줘도 인색하다니깐. 대범하지 못해.’서영숙은 마음속으로 연희를 경멸을 못했다. ‘돈을 쓸 줄도 노르다니, 만약 대담하게 그 카드로 자신에게 물건을 좀 사준다면, 그래도 대범하고 당당한 것을 봐서 나름 칭찬을 할지도 모르는데. 애석하게도 원하지만 감히 인정하지 못하다니. 탐 나서 눈까지 빨개졌는데도 고상한 척하긴. 너무 가식적이야. 됐어, 뱃속의 아이를 봐서라
”네, 아주머니.” 정은은 방금 화장실에 갔는데, 나오자마자 백지영이 가게에 서서 자신을 향해 손짓하는 것을 보았다.서영숙은 멈칫했다.백지영의 시선을 따라 바라보니,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다.‘소정은이라니!’연희도 자연히 그녀를 보았다.정은은 오늘 옅은 화장을 했고, 카멜색 트렌치코트에 갈색 스웨이드 부츠를 신으며 머리는 클립으로 간단하게 말아올렸다.편안하고 나른해 보이지만 또 독특한 매력을 선보였다.“아주머니.” 정은은 백지영의 곁으로 다가가서 자연스럽게 그녀의 팔을 안았다.“오래 기다리셨죠? 죄송해요.”그녀는 서영숙과 연희를 그냥 무시하며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서영숙은 정은이 망설임 없이 떠났지만, 자신의 아들이 오히려 잊지 않고 매일 그녀와 화해하려는 것을 생각하면 화가 치밀어 올랐다!연희는 이때 유난히 눈치가 빨라 다정하게 차 한 잔을 따라주었다.“아주머니, 오랫동안 돌아다니셨으니 많이 피곤하시죠? 얼른 물을 좀 드세요.”서영숙은 웃으며 말했다.“어머, 우리 연희는 정말 철이 들었구나. 예쁘면 그만이지만, 이렇게 다정하다니. 기본적인 예의도 없는 사람보다 훨씬 낫지.”백지영은 서영숙이 정은을 욕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담담하게 웃었다.“서 여사, 이분은?”그녀는 연희에게 눈길을 주었다.“아직 우리에게 소개하지 않았잖아요?”서영숙은 멈칫했다.연희의 뱃속에는 도겸의 아이가 있었지만, 지금 명분이 없었다. 듣기 좋게 말하면 여자친구였고, 듣기 나쁘게 말하면 그저 애인일 뿐이었다.그러니 어떻게 연희를 소개해야 할까?그리고 서영숙은 아들의 애인과 함께 쇼핑을 하러 나왔다. 만약 백지영이 이 소문을 퍼뜨린다면, 앞으로 그녀는 또 어떻게 재벌 집 사모님들 앞에서 고개를 들고 다니겠는가?재벌 집 사모님들은 입만 열면 ‘실력 있는 가문과 혼인을 해야 한다’는 말을 했으니, 만약 그녀들에게 자신이 아들의 애인과 다정하게 지낼 뿐만 아니라 사생아까지 생겼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연희는 엄청난 기대를 하고 있었다.그녀가 가
판매원은 잠시 멍해졌다.서영숙도 의혹을 느끼며 연희를 바라보았다.“아주머니, 저도 코디해 드리면 안 될까요?”서영숙은 백지영을 보았다.‘흥, 너만 옷을 코디해 주는 사람이 있나? 나도 있어!’그렇게 서영숙은 웃으며 연희에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나도 네 안목을 믿어.”이 말을 할 때, 그녀는 지난번에 자신이 연희의 안목이 나쁘다고 욕한 것을 완전히 잊어버렸다.연희는 즉시 옷을 고르러 갔다. 그리고 뒤에 있는 두 판매원에게 이 옷을 가리키기도 하고 저 옷을 가리키기도 했는데, 기세는 오히려 매우 보기 좋았다.정은은 완전히 달랐다.그녀는 옷을 선택할 때 먼저 색깔과 스타일을 본 후에 옷감을 만졌고, 마지막에 결정해서야 판매원에게 가져오라고 부탁하며 한 세트 한 세트씩 놓으라고 했다.“아주머니, 한 바퀴 돌았는데 이 두 세트가 괜찮은 것 같네요. 한 번 갈아입어 보시겠어요?”백지영은 즉시 옷을 받고 기대와 흥분을 했다.그녀는 정은의 패션 감각을 너무 믿었다. 전에 해준 코디도 정말 마음에 들었다.솔직히 말하자면, 백지영은 친딸 수민보다 정은과 함께 쇼핑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이게 바로 소울메이트겠지?’그때 연희가 다가왔다. “저도 다 골랐어요.”서영숙은 피팅룸에 갔다.그리고 서영숙이 먼저 갈아입고 나왔다. 연희는 그녀에게 빨간 탱크톱 긴 치마를 매치했는데, 위에 샤넬 외투를 걸치니 많이 젊어 보였다.서영숙은 전신거울을 보며 나름 만족스러운 편이었다.“정말 괜찮네.”연희는 겸손하게 웃었다.“아주머니가 관리를 잘하셔서 그래요. 저보다 몸매가 훨씬 더 날씬하잖아요.” 서영숙은 기분이 좋아졌다.그러나 백지영이 옆의 피팅룸에서 나왔을 때, 그녀의 웃음은 굳어졌다.정은은 백지영에게 옅은 청색의 치파오를 선택했는데, 대나무 무늬는 이 간단한 비단 옷감에 질감을 더해주었다.개량된 스타일은 몸매를 더욱 잘 드러내, 백지영의 큰 키와 단아하며 우아한 기질을 선보였다.그녀의 옆에 서있으면 서영숙은 마치 ‘정교한 아주머니’처럼 보였
“그럼... 고백하기 전까지, 혼자서 그렇게 많이 고민한 거예요?”“응.”“어쩐지...”정은이 아주 작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뭐라고?” 재석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자, 정은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이젠 다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가요...”둘은 손을 꼭 잡고 복도로 향했다. 조용한 밤, 서로의 온기가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다.걷던 중, 재석이 문득 걸음을 멈췄다. 정은도 따라 멈춰 서며 돌아봤다.“왜요?”“정은아, 우리 지금... 사귀는 거 맞지?”정은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두 사람이 꼭 잡은 손을 살짝 들어 보였다.“그렇게 생각 안 해요? 조금 전부터 내가 ‘재석 씨’라고 부른 거 못 느꼈어요?”“혹시 지금... 꿈꾸는 거 아니지?”정은은 눈을 가늘게 뜨며 미소 지었다.“흠, 그렇게 말하는 거 보니까... 평소에도 꿈에서 날 자주 본 모양이네요?”재석의 몸이 순간 굳더니, 양 볼이 순식간에 빨개졌다.‘진짜 자주 꿨나 보다?’재석은 눈을 못 마주친 채, 그저 두 사람이 맞잡은 손만 바라보며 쑥스러운 듯 웃었다.“진짜 좋아.”‘정은이도, 나를 마음에 두고 있었구나.’‘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었구나.’같은 계단, 같은 복도, 수없이 함께 걸어온 길. 그동안은 늘 친구라는 이름으로, 앞서거나 뒤따르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 왔지만, 오늘은 처음으로, 손을 잡고 나란히 오르는 계단.정은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근데, 왜 나랑 은혁 씨한테 뭔가 있다고 생각했어요?”재석은 목소리를 낮추며, 살짝 눈을 피했다.“미안. 계산하러 나갔다가... 우연히 통화하는 거 들었거든.”정은의 눈이 살짝 커졌다.그리고 머릿속으로 자신이 통화 중 했던 말을 하나하나 되짚어봤다.‘공항에서 보자, 기대된다, Z시 출장... 뭐 이상한 말한 것도 없는데...?’그런데도 재석은 그걸 ‘여행 약속’으로 받아들였고, 그걸로 인해 혼자 삭이다가 결국 아래층에서 고백까지 해버린 거였다.“너희, Z시에 여행 간다고 했잖아.”
정은이 멍해 있는 사이, 재석이 한 걸음 다가섰다. 늘 부드럽고 점잖던 그가, 이 순간만큼은 전에 없던 강한 기운을 뿜어냈다. ‘이 남자... 이런 눈빛도 있었나?’정은은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등이 벽에 닿는 순간, 재석은 어느새 바로 눈앞에 와 있었다.정은이도 이제야 제대로 실감이 났다. 재석이 자신보다 훨씬 크다는 걸. 그리고 지금처럼 가까운 거리에서 내려다보면, 자신이 마치 남자의 품 안에 갇힌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도.재석이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이제 좀 알겠어?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그때 네가 학업이 먼저라고 했을 때, 난 받아들였어.”“그런데 장은혁한텐 기회를 줬지. 정은아...”그가 고개를 더 숙이자, 뜨거운 숨결이 그녀의 목선에 닿았다. 순간, 정은의 팔에 소름이 쫙 돋았다. “너, 나한테 너무 불공평해.”그 마지막 한 마디는 묘하게 서글픈 기운이 섞여 있었다.정은은 입술을 달싹이며 뭔가 말하려 했지만, 재석은 그녀의 여지를 주지 않았다.“알아, 내가 지금 어떤 입장인지. 묻고 따질 자격도 없고, 네가 누구를 좋아하든, 그건 네 자유라는 것도 알아.”“이 말 꺼냈다가, 우리 사이가 끝날 수도 있다는 것도 알고 있어. 근데... 계속 참다 보니까 알겠더라.”‘난... 그렇게까지 쿨한 사람이 아니었어.’“그래서 이제 참지 않기로 했어.”‘어떻게 되든, 그건 네가 정해.’그렇게 말한 재석은 고개를 숙인 채 멈췄다. 마치 판결을 기다리는 죄인처럼.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조용한 밤공기 속에서, 정은의 목소리가 아주 작게 울렸다.“이제, 제가 말해도 될까요?”“응...”“재석 씨.”정은은 처음으로 재석을 그렇게 불렀다.“고개 들어요. 나 좀 봐요.”재석의 어깨가 순간 굳어졌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그는 이미, 거절당할 각오까지 끝냈다.그런데 눈이 마주친 순간, 정은의 두 눈 속에서 재석이 본 건... 눈물이 아닌, 웃음이었다.억지로 짓는
“헤어졌다고요?”정은은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몰랐어?!”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진욱은 눈을 반짝이며 의자째로 다가오더니, 목소리를 낮추고 본격적인 ‘TMI’를 털어놓기 시작했다.“M시 출장 갔다 오고 며칠 안 돼서, 재석이가 바로 짐 싸서 수아를 내보냈다니까?”정은은 그 말을 듣고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재석과 수아 사이에 어떤 감정선이 있었는지, 그동안 몇 번 스쳐 지나갔던 장면들이 퍼즐처럼 빠르게 떠올랐다. 그녀의 표정은 담담했지만, 눈빛 속엔 미묘한 기류가 스쳤다.“아마 진짜 많이 좋아했나 봐. 그러니까 정리할 때도 그만큼 아프고, 오래 걸리는 거겠지. 조금만 시간 지나면, 태민이도 정리될 거야.”진욱은 이어서 말했다.“네.”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대답했다.그 이후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남의 연애는, 들을 수는 있어도 깊게 얘기하지 말아야 해. 괜히 나서 봤자... 괜히 끼어든 꼴만 되니까.’...해가 지고, 붉은 노을이 건물 유리에 비치기 시작할 무렵. 정은은 마침내 작업을 끝냈다.진욱은 기다렸다는 듯 프로그램을 열고 기능 하나하나를 테스트했다.그리고 30초쯤 흐른 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다.“어어!! 복구됐어! 됐다! 돌아왔어! 다시 쓸 수 있어!!”미진도 덩달아 벌떡 일어나 양손을 번쩍 들었다.“살았다, 진짜!! 여태 손으로 데이터 입력한 거 생각하면... 이건 거의 기적이야!”진욱은 시계를 힐끗 보더니, 정은을 향해 말했다.“지금 이 시간까지 남아서 도와준 우리 정은이, 완전 수고 많았어! 조 교수...”“응...?”갑작스레 이름이 불리자, 재석은 몇 초간 멈칫하다가 고개를 돌렸다.진욱은 능청스럽게 말했다.“아니, 정은이가 이렇게 큰일 해줬는데, 감사 표시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적어도 밥 한 끼는 사야지.”“맞아요, 맞아요. 조 교수님, 이건 진짜 밥으로도 모자라요.” 미진이 곧장 거들었다.재석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대략 1년 전, 정은은 한동안 재석의 실험실을 빌려 쓴 적이 있었다. 그 일을 계기로 전진욱, 조미진 등과 인연이 닿았다.처음엔 서로 어색하고 낯설었지만, 몇 달이 지나면서 조금씩 가까워졌고, 지금은 가볍게 농담도 주고받을 만큼 편해졌다.그러던 어느 날, 진욱은 우연히 정은이 실험 데이터를 처리하는 속도를 보고 깜짝 놀랐다. 너무 빠른 게 아닌가 싶어서 슬쩍 물어봤더니, 정은은 코딩도 할 줄 아는 공대 만능 캐릭터였다. 그녀는 직접 짠 프로그램으로 데이터를 자동 정리하고, 다차원 분류와 정렬까지 가능하다고 했다.“와, 뭐야... 완전 반칙인데?”진욱은 결국 정은에게 부탁해 실험실 맞춤형 프로그램 하나를 따로 제작해달라고 했고, 그 이후, 데이터 정리는 그야말로 신세계를 맞이했다. 진욱은 쓸 때마다 감탄하며 말했다.“진짜... 정은이 덕분이야. 이게 사람을 살리네.”하지만 어제 그 기특한 프로그램이 갑자기 먹통이 됐다. 손태민이 고쳐보겠다고 덤볐지만, 결과는... 풍비박산이었다. ‘이젠 누가 손댔다간 진짜 박살 나겠어...’ 결국 정은에게 SOS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재석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혹시 오늘 시간 돼? 안 되면, 며칠 뒤도 괜찮고...]진욱은 훨씬 급했다. 말 그대로 살려달라는 마음이었다.[야, 오늘 안 데려오면... 나 여기서 바로 싸버린다! 진짜라고, 어?!]그는 어제 약 먹고 좀 괜찮아진 줄 알았건만, 밤새 배가 또 난리였다. 오늘 아침부터 실험실 화장실은 진욱의 전용이 되었다. 오전에만 6회 방문.그 말은, 그냥 협박 아니었다. 진짜 실현 가능성이 있었으니 말이다.정은은 상황을 듣고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시간 돼요. 지금 바로 갈게요.”[그래. 그럼 내가 정문 앞으로 갈게.]‘굳이 마중까진 필요 없는데...’ 뚝-정은이 전화를 끊으려던 찰나, 전화는 이미 끊겨 있었다. ...10분 뒤, 정은은 학교 정문 앞에서 재석과 마주쳤다. 두 사람은 실험실로 걸어가며 프로그램
“언니, 이건 굳이 우리 의견 물을 필요도 없지 않아요? 언니가 해볼 만하다고 생각하면, 무조건 가는 거죠. 저희한텐 뭐든 시키기만 하세요. 무조건 따라갈게요!”민지가 단호하게 말하자, 서준도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맞아요, 저흰 누나 믿고 가는 거예요. 결정은 누나가 해요.”정은은 그 말에 잠시 멍해졌다가, 결국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너희들... 나 그렇게 믿어도 돼? 나도 가끔 실수하거든?”민지는 마치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정은 언니가 실수했다면, 그건 100% 저랑 서준 오빠가 뭔가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뜻이에요.”“그건 좀 과장이지만...”‘그래도... 이런 믿음을 받는다는 게 참 따뜻하네.’세 사람은 그렇게 식사를 마쳤다.계산은 서준이 맡았고, 정은과 민지는 먼저 주차장으로 향했다. “언니, 먼저 가요. 전 서준이 데리러 갈게요.”“응? 굳이?”“우리 집이랑 방향이 같잖아요. 서준이는 차도 없으니까, 그냥 태워다 주는 거죠, 헤헤.”“그래, 알겠어. 그럼 조심히 가. 운전 천천히 하고.”“네. 언니도 잘 들어가요!”...두 ‘파트너’와 방향을 맞춘 정은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바로 준비에 들어갔다.자료 조사부터 시작해 ‘신소재 최적화 계획안’을 정리하고, 모든 내용이 빠짐없이 정리됐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확인했다.벌써 밤 10시. 정은은 핸드폰을 들고 조심스레 메시지를 보냈다.[장은혁 씨, 시간 돼요? 상의드릴 게 하나 있어요.]그 시각, 은혁은 거실 소파에 앉아 어머니인 황희숙 여사의 ‘진실 공방’에 시달리고 있었다.“너 외할아버지한테 전화 왔어. 오늘 도시락 들고 회사 갔다며? 근데 그냥 말도 없이 두고 사라졌다고 난리야. 게다가 누가 너랑 어떤 여자가 같이 있는 걸 병원 약국에서 봤다던데? 솔직히 말해봐. 너, 여자 친구 생겼지?”은혁은 억울함 가득한 목소리로 외쳤다.“아니 외할아버지는 왜 또 엄마한테 바로 전화해요? 진짜 너무하신다니까요...”“이 자식 봐라, 말버릇 좀
진욱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그렇게 마음이 있는 거면, 왜 정은이한테 솔직하게 말 안 해?”“겁나는 거지, 재석아? 말 꺼냈다가 거절이라도 당하면... 그땐 친구로도 남을 수 없을까 봐, 무서운 거잖아.”진욱은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재석을 똑바로 바라봤다.“그건 너답지 않아. 내가 아는 재석이는, 망설이지 않고 결정하는 사람이었어. 결과가 불확실하다고 물러서는 사람 아니었잖아.”“정은이가 ‘지금은 연애 생각 없다’고 했지? 중요한 건 ‘지금은’이라는 거야. 사람 마음은 바뀌는 거고, 그때 거절했다고 지금도 똑같을 거란 보장은 없어. 알겠냐?”재석은 말없이 진욱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 말이 생각보다 깊게 박혔다. ‘지금도 똑같을까? 아니, 혹시... 지금은 조금 다를 수도 있는 걸까...’진욱은 그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야, 진심으로 말하는 건데, 너 계속 질질 끌면, 정은이 뺏긴다. 그리고 뺏기고 나서 울어봤자, 소용없을 거야.”“우리 정은이 인기 많은 거 너도 알잖아. 예전에도 정은이 두고 싸운 애들 있었잖아. 그리고 오늘 그 남자 봤지? 얼굴 잘생겼지, 젊지, 에너지 넘치지, 옷차림 보니까 집도 잘 사는 거 같던데?”재석은 이런 말을 아주 듣기 싫었다.“닥쳐.”진욱도 더 이상 말하기 싫었다. “칫. 드디어 위기감이 좀 드나?”‘그래, 긴장 좀 해라. 맨날 냉정한 척만 하지 말고... 이번엔 너도 좀 불안해져 봐야지.’...한편, 정은은 봉수진을 집에 바래다준 뒤, 약을 가정부에게 전달하며, 복용 방법까지 하나하나 직접 설명했다. 봉수진은 저녁까지 먹고 가라며 붙잡았지만, 정은은 이미 서준, 민지와의 약속이 있었다.“외할머니, 며칠 안에 다시 올게요. 오늘은 친구들이랑 약속이 있어서요.”“그래그래, 알았어. 젊을 땐 많이 만나고 다녀야지.”정은은 웃으며 고개를 숙였고, 곧 차에 올랐다.약속 장소인 레스토랑에 도착했을 땐, 서준과 민지가 이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은 테이블 위에
은혁은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 “그러게요... 나야 뭐, 그랬으면 좋겠지만...”하지만 정은의 태도는 그리 확신을 줄 만큼의 호감은 아니었다.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분명히 좋아한다는 표시도 없는 애매한 선이 보이는 듯했다.‘그래서 더 미치겠어. 기대도 못 하고,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고... 이러니까 계속 마음이 붕 떠 있잖아...’그렇게 속으로 앓고 있었지만, 정은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봉수진의 약에 모든 관심을 쏟고 있었다.VIP 약국답게, 일 처리는 정말 빨랐다. 정성스럽게 달인 약이 곧바로 팩 단위로 나뉘어 밀봉되었고, 음용 방법까지 깔끔하게 안내되었다.냉장 보관 후, 따뜻한 물에 데워 마시면 된다는 안내였는데, 이 정도면 환자도 거부감 없이 약을 먹을 수 있을 것이었다. 약을 다 받은 후, 약 한 시간쯤 지나 두 사람은 병원을 나섰다.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은의 전화가 울렸다.“여보세요? 외할머니? 네, 약 다 받아놨어요.”“병원에서 달여줬어요. 네, 거기 계세요. 지금 바로 갈게요.”전화를 끊은 정은은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은혁을 바라보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오늘 고마웠어요. 외할머니 모시러 가볼게요. 안녕히 계세요.”“아, 어... 그래요! 잘 가요!”은혁은 여자의 뒷모습이 멀어질 때까지 멍하니 서 있었다.심지어 여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된 후에도 한참을 그렇게 바라본 후에야 아쉬움 가득한 시선을 거두었다.그 순간, 핸드폰이 울렸고, 화면엔 ‘황기' 두 글자가 떴다.“여보세요?”[야 이놈아! 도시락 던져놓고 도망가듯 나가버리면 어떡해?! 말도 못 붙였잖아! 뭐가 그렇게 급해? 뭐가 외할아버지보다 중요한 거냐고?!]“죄송해요... 헤헤.”황기는 순간 당황했다. ‘얘 지금 뭐야? 미쳤어? 웃음은 왜 이렇게 정직하게 새어 나오는 건데...?’...한편, 정은은 봉수진을 태우고 병원을 나서는 중이었다. 바로 그때, 재석은 약을 수령하고 외래 진료실 앞 벤치에 앉아 있었다.
정은도 여기서 재석을 만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선배님, 병원엔 무슨 일로 오셨어요?”재석은 그제야 시선을 거둬들였다. 눈길이 정은에게 닿는 순간, 표정이 한층 부드러워졌다. “난...”“날 데려다주러 온 거야.” 그 순간, 전진욱이 배를 감싸 쥐며 천천히 다가왔고, 재석 대신 대답을 건넸다.정은은 진욱을 바라보다가 눈이 살짝 커졌다. “교수님, 어디 아프세요? 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데요.”“하... 뭘 잘못 먹었는지, 아침부터 배탈이 나서... 약도 안 듣고... 이 사람이 막 끌고 오더라니까... 검사라도 받아보라고.”정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잘하셨어요. 괜히 방치하다가 더 심해질 수도 있잖아요. 미리 체크하면 마음도 편하고요.”“어우, 너희 둘 미리 맞췄냐? 말이 어쩜 그렇게 똑같냐?” 진욱이 짐짓 장난스러운 말투로 투덜댔다.정은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재석을 바라봤다. “그랬어요?”재석은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눈빛 속 어딘가 알 수 없는 감정이 일렁였다. ‘저 말투, 저 표정... 나만 아는 게 아닐 텐데...’“정은 씨, 이제 가야죠.” 그때, 은혁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아, 네.” 정은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희 먼저 갈게요.”그렇게 말한 후, 은혁과 나란히 병원 복도를 걸어 나갔다.재석은 그 자리에 멈춰 선 채 두 사람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봤다. 눈빛 속 감정은 복잡하고도 묘했다. ‘뭔데, 저 둘은 저렇게 자연스러워...’“재석아? 야, 재석아!”진욱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재석은 고개를 돌렸지만, 눈빛 속 싸늘함은 여전했다. 진욱은 그 눈빛에 소름이 돋아 어깨를 움찔거렸다.“너... 왜 그래?”“방금 정은이가 ‘저희’라고 했어.”“어...?”진욱은 멍한 표정으로 재석을 바라봤다. 몇 초간 멍하던 그는 그제야 이해가 된 듯 말했다. “아... 그 ‘저희’? 그게 뭐 어때서? 같이 왔으니까 ‘저희’지. 그럼
얼마 지나지 않아 황 원장은 처방전을 프린트해서 정은에게 건넸다.“수고 많으셨습니다, 원장님.”정은이 공손히 인사하자 황 원장은 손을 휘저었다.“아이구, 무슨... 이 아가씨는 인사도 참 반듯하게 잘하네요. 말도 예쁘게 하고, 얼굴도 예쁘고. 이런 손녀가 있으면, 어디 내놔도 자랑이겠네요.”봉수진은 바로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그럼요. 우리 손녀는 어디 하나 빠지는 데가 없어요.”황 원장은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장난스럽게 물었다.“이렇게 예쁜 아가씨한테 남자 친구가 없을 리 없는데? 그렇죠?”봉수진은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없어요! 보통 남자애들은 우리 정은이랑 안 어울려요.”“허허, 그래도 우리 손자 정도면 꽤 괜찮은데...?”황 원장이 살짝 떠보자 봉수진은 손사래를 쳤다.“아이구, 그 얘긴 그만해요. 정은이 아직은 시집 안 보낼 거예요. 지금이 제일 곁에 두기 좋을 때라니까요.”‘아이고, 또 시작이다...’정은은 속으로 헛웃음 치며 처방전을 가방에 쏙 넣고 눈치껏 자리에서 일어났다.“저, 약 지으러 먼저 다녀올게요!”...진료실 문을 나서는 순간, 정은은 누군가와 부딪혔다.“아, 죄송해요!”고개를 돌려 상대방을 본 순간 정은의 걸음이 멈췄다.“은혁 씨?”은혁은 보온 도시락 통을 들고 서 있었다.“정은 씨! 또 보네요. 우리 진짜 인연인가 봐요? 하하...”“여긴... 병원인데? 누가 입원하셨어요?”정은이 도시락을 보며 물었다.“아, 아니에요. 저 입원실 온 거 아니고요! 외할아버지가 이 병원 의사세요. 오늘 외래 당번이라 저희 어머니가 직접 도시락을 싸주셨는데, 제가 대신 가져다드리러 온 거예요.”“혹시 외할아버지 성함이 황 씨?”“네! 황기 원장님이세요. 한약재 이름에서 따오셨대요, 혹시... 아는 분이세요?”‘어머나, 진짜 인연인가?’정은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오늘 저희 외할머니 진료도 황 원장님한테 받은 거예요.”“정말요? 세상에... 진짜 대박. 어쩐지 자꾸 마주치네요.”은혁은 정은 손에 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