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야말로 조 교수님과 한 팀인데, 이런 주목받는 기회가 소정은에게 돌아갔다니. 이거 명백한 편애 아니야!’오전 포럼이 끝나고, 점심은 호텔에서 단체로 식사를 한 뒤, 한 시간 휴식을 가진 후 다시 오후의 일정이 이어졌다.같은 절차지만, 발표자와 주제 분야는 모두 달랐다.정은은 펜을 쉴 새 없이 움직였고, 작은 공책은 어느새 빼곡히 채워졌다.뒤로 갈수록 학문 연구의 놀라운 연결성과 상호작용이 더욱 선명하게 느껴졌다.마치 하나의 음악회 같았다.피아노와 바이올린의 하모니, 플루트와 쟁의 울림, 가야금과 하프가 어우러진 선율처럼, 서로 다른 분야가 어우러져 하나의 아름다운 오케스트라를 만들어내는 듯했다.‘이것이 바로 융합 연구의 매력이구나. 지식이 한꺼번에 머릿속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느낌이랄까...’정은은 그렇게 느꼈다.늘 자신의 연구에만 몰두해 왔던 정은에게, 천체물리학, 응용화학, 의생명과학 같은 낯선 분야와 갑작스레 마주한 그 순간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신선한 충격이었다.아직은 정리하고 소화할 시간이 필요했지만, 분명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간 기분이었다.오후 5시, 포럼이 마무리되었다.정은은 오미선과 함께 회의장을 나와 호텔 방으로 돌아왔다.오미선은 외투를 갈아입고 머리도 정성스레 손질했다.“정은아, 준비해. 이따 나랑 같이 저녁 먹으러 나가자.”“네? 호텔에서 안 드시고요?”“예전의 친구들과 모이는 자리야. 간만에 얼굴 좀 보려고.”정은은 잠시 망설였다. “이런 자리에 제가 가도 괜찮을까요?”“안 괜찮을 게 뭐가 있겠어? 넌 내가 가장 아끼는 제자잖아. 선배님들에게 인사도 할 겸, 가자.”그 말은 곧, 정은에게 인맥을 넓혀줄 기회를 준다는 것이었다.오미선이 그녀를 데리고 가는 이유는 단순한 식사 때문이 아니었다.“네, 알겠어요. 옷 갈아입고 올게요.”“그래, 천천히 해, 서두르지 말고.” 오미선은 흐뭇하게 웃었다.약속 장소에 도착했을 때, 정은은 재석도 그 자리에 있다는 사실에 조금 놀랐다.오미선이 들어서자,
“하하... 그래! 당연하겠지!”“어머, 말하느라 신경을 쓰지 못했군. 미선아, 서 있지 말고 얼른 앉아!”“정은이도 함께 앉아야지...”정은은 이런 학계의 비공식적인 자리엔 처음이었고, 평소 근엄하기만 했던 교수나 학자들이 일반 사람들과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이 꽤 신기하게 느껴졌다.친구들끼리 주고받는 유쾌한 농담, 어쩌다 앞뒤가 안 맞는 말도 오가고, 흥분하면 목소리가 커지기도 하고, 기쁘면 호탕하게 웃는 모습들이 그저 재밌을 뿐이었다.연회가 이어지는 중, 오미선은 보기 드물게 먼저 잔을 들었다.이 자리에 있는 모두는 알고 있었다. 이건 정은을 위한 행동이란 것을.정은도 그걸 알았기에, 몇 잔은 기꺼이 받아 마셨다.술잔이 세 바퀴쯤 돌고,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무렵, 한 베테랑 교수가 정은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둘은 전공 이야기에서 시작해, 꿈에 대한 이야기, 논문, 실험 이야기도 나누며 점점 대화를 깊이 이어갔다.이야기가 길어질수록 그 교수의 눈빛에는 감탄과 호의가 점점 더 선명해졌다.“하하하... 역시 젊은 세대는 다르다니까. 새로운 머리가 참 잘 돌아가네! 내 제자 중엔 왜 이런 애가 하나도 없는 거야? 아이고, 사람은 비교하면 안 된다더니, 진짜 열받네!”그러더니 오미선을 바라보며 웃으며 물었다.“그런데 오 교수, 이런 학생을 어디서 발굴한 거야? 왜 좋은 인재는 전부 너한테만 가는 거지?”“정말 우리에겐 숨통도 안 틔워주는구나.”오미선은 잠시 생각하다가 웃으며 말했다.“글쎄... 아마 내가 보는 눈이 좀 있는 모양이겠지? 한눈에 알아봤으니까? 어쩔 수 없어. 나도 이렇게 귀한 인재는 딱 보면 알겠더라고.”농담인 줄 알면서도 그 교수는 못마땅한 듯 입을 삐죽였다.“내가 네 제자 데려갈 것도 아닌데, 누가 보는 눈이 없다는 거야?”옆에 앉아 있던 다른 교수가 못 참고 끼어들었다.“고 교수님, 그렇게 말씀하시면 섭섭하죠. 지난번엔 누가 자긴 눈도 안 좋고 나이도 많다고, 제가 2년간 아껴둔 와인을 억지로 가져가신 거죠?”
복도에서, 오미선은 먼저 방으로 돌아갔다.재석은 팔에 걸쳐 있던 정은의 숄을 건네주며 말했다.“괜찮아?”정은은 재석이 무엇을 걱정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기에 숄을 받으며 웃었다.“걱정 마요. 나 안 취했어요.”“그럼 다행이네.”“선배님, 오늘 오전에 고마웠어요.”재석은 웃으며 말했다.“나한테 고맙다고? 내가 너에게 질문을 부탁한 거잖아. 오히려 고맙다고 해야 할 사람은 나지.”“질문은 어렵지 않았어요. 다른 사람도 대답할 수 있었을 텐데, 그때 날 불러줘서 내가 대답할 수 있었던 거예요.”“내가 기회를 준 건 맞지만, 그걸 잡은 건 너야. 그러니까 나보다 너 자신에게 고마워해야지.”정은은 멍한 표정으로 되물었다.“나 자신에게요?”“그래.”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가 평소에 얼마나 노력하고, 얼마나 집중했는지는 네가 제일 잘 알잖아. 그 모든 시간에 감사하면 돼. 정은아, 기회는 준비된 사람에게만 오는 거야.”“네, 맞아요.”“이제 들어가. 오늘 일찍 쉬고, 내일 하루 더 남았으니까.”“네.”재석은 정은이 들어가는 걸 지켜본 뒤, 그녀가 문을 꼭 닫은 걸 확인하고서야 룸카드를 꺼내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수아는 문구멍을 통해 이 모든 장면을 똑똑히 보았다.재석이 정은에게 그렇게 다정하게 굴던 모습, 그리고 자신에게 보여준 차가운 태도가 겹쳐지자, 수아는 입술을 거의 깨물 뻔할 정도로 질투를 느꼈다.그때 책상 위에 두었던 핸드폰이 진동하며 울렸다.수아는 혹시나 하는 기대를 하며 잽싸게 집어 들었지만, 화면에 뜬 이름은 ‘손태민’이었다.그녀는 짜증이 치밀어 올라 핸드폰을 침대에 내던졌다.“왜 또 쟤야? 정말 짜증나 죽겠네!”“하루 종일 연락을 하다니, 지치지도 않나 봐!”수아는 차갑게 핸드폰을 노려보다가, 계속 울리는 진동음을 그대로 두었다. 결국 화면은 꺼졌다.그녀는 침대에 누워 몸을 뒤척이고는 눈을 감았다.그 전에, 핸드폰을 무음 모드로 바꾸는 것도 잊지 않았다.“그래, 이제 실컷 울려봐라.”...
무엇보다 생명과학 분야는 오미선의 대표적인 인맥 기반이었다.누구나 정은이라는 젊은 후배에게 호의적인 반응을 선보이기 마련인데, 그것도 다 같은 전공에서 이어져온 인연 덕분이었다.우수한 학생을 싫어할 선생님이 어디 있겠는가?비록 정은이 직속 제자는 아니더라도, 생명과학계에서 보기 드문 유망주라는 점은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이었다.그다음은 물리학 분야였다. 다른 요소를 다 떠나서, 재석의 신뢰와 명성만으로도 정은은 충분히 인정받을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이 친구는 소정은이라고, 오미선 교수님의 제자예요...”재석은 정은을 데리고 거리낌 없이 자신의 지인들에게 소개했다.말하는 도중, 자연스레 두 사람의 관계가 언급되긴 했지만, 사람들은 그 어떤 악의도 없었다.“난 재석이 누굴 위해 이렇게까지 나서는 거 처음 보네. 오늘 제대로 구경을 좀 하는구나, 하하하!”재석은 차분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저 전에 오 교수님 밑에서 공부했거든요. 정은이랑은 사실 선후배 사이고요. 그게 뭐 문제 될 거라도 있나요?”“아니! 전혀. 네가 좋다면야 뭐든 좋은 거지.”재석은 어이가 없었다.수아는 기회를 엿보며 조심스레 다가가려 했지만, 재석의 소개도, 옹호도 없이 혼자 움직이는 모습은 마치 조롱거리 같았다.국제 영화제에 자비로 입장해 레드카펫에 슬쩍 올라가서 사진을 찍어 SNS에 올리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플래시가 아무리 번쩍여도, 그것은 수아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오전의 네트워킹 세션이 끝나고 점심시간은 한 시간이었다.오후에는 참석자 전원이 버스를 타고 한 어촌 마을로 이동했다.이곳은 M시에서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살아 있는 어촌’으로 불린다.10여 년간의 보호 및 개발 정책을 통해 전통 어업 기반에서 관광 및 체험형 마을로 점진적인 전환에 성공했지만, 가능한 한 어촌 고유의 생활 문화는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다.이처럼 수준 높은 포럼이 열릴 때면, 지역 지자체에서는 인문학적 탐방 프로그램을 함께 운영하곤 한다.일종의 힐링이자, 참가자들에게 새로
정은은 정말 조개를 주웠다.무슨 조개인지 모르지만, 보랏빛에 주황색이 섞여 있어서 정말 예뻤다.그녀는 기뻐해하며 재석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선배님! 이리 와서 봐요!”마치 보물을 발견한 아이처럼, 당장이라도 친구에게 자랑하고 싶어 안달이 난 모습이었다.재석은 빠르게 걸음을 옮겨 정은의 곁으로 다가갔다.정은이 손바닥을 펼치자, 조개 하나가 드러났다.“예쁘죠?”재석은 정은의 들뜬 얼굴을 바라보다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쁘네.”“그럼... 신발 벗고 같이 놀아볼래요?”남자는 순간 놀란 듯 당황하며 말했다. “아, 아니. 다음에.”정은은 억지로 설득하지 않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재석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봐, 정은이도 다음에 나와 같이 바다에 올 거라 생각하고 있잖아.'두 사람은 해변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바닷물이 때때로 정은의 종아리까지 차올랐다.재석은 해변에 서서 미소를 지으며 그 모습을 바라봤다.“선배님, 계속 걸어가면... 끝은 어디일까요?”정은은 뒤로 걸으며 손을 등 뒤로 모은 채 고개를 돌려 물었다.여유롭고 편안한 자세였다.재석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해변의 끝은 모래사장이고, 모래사장의 끝은 바다겠지.”정은은 잠시 멈칫하더니 웃음을 터뜨렸다.정은은 잠시 머뭇거리다 웃음을 터뜨렸다.“난 또 선배님이 정색하면서, ‘해안선은 해양과 육지의 경계선이고, 대조평균고조면을 기준으로 정의돼. 조석이나 풍랑에 따라 달라지는 고정되지 않은 선이 아니라, 띠처럼 형성되는 공간적 개념이지. 물리적으로 접근하면 말이지...’ 이렇게 말씀하실 줄 알았는데요.”그녀는 재석의 말투를 흉내 내며 말했다.진짜 베테랑 학자처럼 그럴듯한 모습을 보였다.재석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웃었다.“이미 답을 다 생각해놓고, 나한테 왜 묻는 거야? 그래도 듣고 싶다면 물리학적으로도 설명해줄 수 있어.”정은은 재빨리 손을 내저었다. 바닷바람에 그녀의 긴 머리카락이 휘날리며 몇 가닥이 뺨을 스쳤다.“아니에요. 난 선
“이건 뭐죠?”정은은 속으로 어느 정도 짐작은 했지만, 감정을 억누른 채 조심스럽게 물었다.스태프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소정은 씨, 오늘 저녁 학술 만찬에서 뵙기를 기대하겠습니다. 정말 뛰어난 연구자시네요.”그 말을 끝으로 스태프는 돌아서서 자리를 떠났다.정은은 손에 든 초대장을 바라보며 잠시 멍해지더니, 놀람과 당황이 스치고 지나간 끝에 이내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매년 열리는 정상희의가 끝나면 ‘학술 만찬’가 열리는데, 포럼 기간 동안 뛰어난 성과를 보인 연구자들이 초청된다.그 만찬의 입장권이 바로 이 붉은 초대장이었다.오미선과 재석처럼 뛰어난 학자들은 포럼 첫날에 이미 초대장을 받았다.예년처럼 초대장 한 장으로 본인 외의 다른 한 사람만 초대할 수 있으며, 그 이상은 허용되지 않았다.오미선은 정은과 미리 약속해두었다.“포럼 마지막 날 밤, 너 나랑 같이 가자.”정은은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수락했다.그런데 다음 날, 재석이 또 찾아와 물었다.“나랑 같이 갈래?”‘앗!’정은은 솔직히 말할 수밖에 없었다.“교수님이랑 같이 가기로 했어요.”“그렇겠지.”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오 교수님이 초대장을 받으셨는데 널 안 데려가실 리 없지.”사실 정은도 의아했다.애초에 재석은 수아를 데리고 포럼에 참석했으니, 당연히 그녀와 함께 만찬에 갈 거라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자신에게 물어보다니.‘만약 내가 동의한다면, 이수아 선배는...’‘어휴, 생각만 해도 괜히 민망해지네.’그런데 이번엔 정은이 자신의 성과로 초대장을 받았다.놀라지 않을 수 없었고, 들뜨지 않을 수도 없었다.비록 초대장은 별거 아니지만, 정은은 사람들의 인정을 받았던 것이다.이건 ‘소정은’이라는 이름 자체가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는 뜻이고, 단순히 ‘오미선의 제자’라는 이유로 인정받은 게 아니란 것이다....하지만 수아는 운이 그리 좋지 않았다.포럼 내내 존재감 없이 지냈으니 당연히 단독 초대장을 받을 리 없었다.하지만 그녀는 재석이 초대장을 가지
밤은 깊어졌고, 달빛이 휘영청 밝았다. 만찬은 호텔의 가장 큰 연회장에서 열리며, 참석자들은 잠시 방으로 돌아가 휴식을 취한 후 바로 올 수 있게 했다. 레드카펫도, 꽃도, 고급 차도 없고, 열어놓은 술장과 음식 코너만으로 만찬의 분위기가 조금 느껴진다. 대부분 남성들은 양복 차림을 하고 있었고, 몇몇은 간단한 셔츠를 입고 이번 만찬에 참석했다. 상대적으로, 만찬에 참석한 여성들은 좀 더 신경을 쓴 모습이었다. 머리는 깨끗이 감은 데다가 옷차림도 단정했다. 캐주얼한 정장을 입은 사람도 있었고, 한복을 입은 사람도 있으며, 일부 교수들은 새로운 한복을 곁들은 패션을 선호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남자 교수는 여자 교수보다 훨씬 더 많았다. 물론 젊은 사람들도 많았다. 대부분은 자신이 따르는 교수나 연구원을 따라 참석한 이들로, 이번 만찬을 통해 학문적 시야를 넓히고 싶어했다. 정은은 초대장을 들고 재석과 함께 연회장에 들어섰다. 두 사람이 들어오자, 수많은 시선이 그들에게 집중되었다. 오미선은 먼저 도착했는데, 두 사람이 함께 들어오는 것을 보고 잠시 멍해졌다. 재석은 여전히 양복을 입었고, 너무 격식을 차린 느낌보다는 약간 캐주얼한 디자인이 가미되어 있어 좀 더 자유롭고 친근한 느낌을 주었다. 정은은 화장을 하지 않았지만, 안색을 위해 립스틱을 발랐고, 카멜색 외투에 베이지색 니트를 입고 있었다. 그녀의 옷차림은 단순했지만, 엄청나게 젊고 아름다운 얼굴이 오히려 돋보였다. 너무 젊어서 이런 만찬에 참석할 자격이 없다고 믿는 이가 대부분이었고, 또한 정은이 학문과 연구에 종사하는 사람이라고 믿는 사람도 드물었다. 재석은 살짝 기침을 하며 담담한 눈빛을 던졌다. 그 시선에 압박감을 느낀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렸다. 정은은 가벼운 한숨을 쉬며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오미선이 다가와 웃으며 말했다. “긴장돼?” “조금이요.” “걱정 마, 이따가 내가 사람 소개해줄게.” “좋
이 어르신들은 재석이라는 이 인기 있는 인물을 자신의 ‘사위’로 삼고 싶은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 건 아니었다. 어떤 사람은 자기 친척에게 소개하고 싶었고, 또 어떤 교수는 자신의 학생들에게 인연을 맺어주고 싶었다. 그렇게 여러 해가 지나며, 수많은 시도 속에서 재석의 답변은 언제나 그 한마디뿐이었다.“당분간 그럴 생각이 없어요.”원래 임 교수도 이번에는 말을 꺼내지 않으려 했고, 어차피 말해도 소용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그는 오혜정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국제 물리 교류회가 벌써 2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오혜정은 여전히 재석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모든 교수들에게 각자의 ‘정은’이 있었다. 임 교수도 자기 학생들을 위해서 한 번 더 기회를 쟁취하고 싶었다.“거절하면 거절했지 뭐, 허허. 거절 안 당한 것도 아니지만, 만약 일이 잘 풀릴 수도 있잖아?”임 교수는 ‘당분간 그럴 생각이 없어요’라는 말을 들을 준비를 했지만, 뜻밖에도...“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니?!”너무 놀란 임 교수는 재석이 떠났어도 여전히 그 자리에 멍하니 서서 한동안 반응하지 못했다.‘누구를 좋아하는 거지?’...한편, 정은은 오미선을 따라 몇몇 교수들과 인사를 나눈 후, 그들의 대화를 조용히 들으며 서 있었다.오미선은 정은이 지루해할까 봐 조심스럽게 말했다.“배고프지? 가서 뭐 좀 먹어.”“네.”교수들의 대화에 끼어들 수는 없었지만, 전공에 관한 이야기는 흥미로웠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야기하다가 결국 화제는 집안 이야기로 흘러갔다.‘역시, 노부인들이 모이면 이런 얘기는 피할 수 없지.’정은은 곧장 그 자리를 떠났다.‘이런 얘기는 내가 듣기엔 좀 너무 과하잖아.’술장과 디저트 코너를 한 바퀴 돌면서, 정은은 따뜻한 음료를 한 잔 마시며 과자도 몇 개 먹었다.‘음, 이제야 배부르네.’오미선이 옛 친구들과 즐겁게 이야기하는 것을 보고, 정은은 방해하지 않기 위해 조용히 연회장 뒷문으로 향했다.밖에는 작은 화원이 있었는데, 밤바람이 서서히
“그럼... 고백하기 전까지, 혼자서 그렇게 많이 고민한 거예요?”“응.”“어쩐지...”정은이 아주 작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뭐라고?” 재석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자, 정은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이젠 다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가요...”둘은 손을 꼭 잡고 복도로 향했다. 조용한 밤, 서로의 온기가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다.걷던 중, 재석이 문득 걸음을 멈췄다. 정은도 따라 멈춰 서며 돌아봤다.“왜요?”“정은아, 우리 지금... 사귀는 거 맞지?”정은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두 사람이 꼭 잡은 손을 살짝 들어 보였다.“그렇게 생각 안 해요? 조금 전부터 내가 ‘재석 씨’라고 부른 거 못 느꼈어요?”“혹시 지금... 꿈꾸는 거 아니지?”정은은 눈을 가늘게 뜨며 미소 지었다.“흠, 그렇게 말하는 거 보니까... 평소에도 꿈에서 날 자주 본 모양이네요?”재석의 몸이 순간 굳더니, 양 볼이 순식간에 빨개졌다.‘진짜 자주 꿨나 보다?’재석은 눈을 못 마주친 채, 그저 두 사람이 맞잡은 손만 바라보며 쑥스러운 듯 웃었다.“진짜 좋아.”‘정은이도, 나를 마음에 두고 있었구나.’‘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었구나.’같은 계단, 같은 복도, 수없이 함께 걸어온 길. 그동안은 늘 친구라는 이름으로, 앞서거나 뒤따르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 왔지만, 오늘은 처음으로, 손을 잡고 나란히 오르는 계단.정은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근데, 왜 나랑 은혁 씨한테 뭔가 있다고 생각했어요?”재석은 목소리를 낮추며, 살짝 눈을 피했다.“미안. 계산하러 나갔다가... 우연히 통화하는 거 들었거든.”정은의 눈이 살짝 커졌다.그리고 머릿속으로 자신이 통화 중 했던 말을 하나하나 되짚어봤다.‘공항에서 보자, 기대된다, Z시 출장... 뭐 이상한 말한 것도 없는데...?’그런데도 재석은 그걸 ‘여행 약속’으로 받아들였고, 그걸로 인해 혼자 삭이다가 결국 아래층에서 고백까지 해버린 거였다.“너희, Z시에 여행 간다고 했잖아.”
정은이 멍해 있는 사이, 재석이 한 걸음 다가섰다. 늘 부드럽고 점잖던 그가, 이 순간만큼은 전에 없던 강한 기운을 뿜어냈다. ‘이 남자... 이런 눈빛도 있었나?’정은은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등이 벽에 닿는 순간, 재석은 어느새 바로 눈앞에 와 있었다.정은이도 이제야 제대로 실감이 났다. 재석이 자신보다 훨씬 크다는 걸. 그리고 지금처럼 가까운 거리에서 내려다보면, 자신이 마치 남자의 품 안에 갇힌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도.재석이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이제 좀 알겠어?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그때 네가 학업이 먼저라고 했을 때, 난 받아들였어.”“그런데 장은혁한텐 기회를 줬지. 정은아...”그가 고개를 더 숙이자, 뜨거운 숨결이 그녀의 목선에 닿았다. 순간, 정은의 팔에 소름이 쫙 돋았다. “너, 나한테 너무 불공평해.”그 마지막 한 마디는 묘하게 서글픈 기운이 섞여 있었다.정은은 입술을 달싹이며 뭔가 말하려 했지만, 재석은 그녀의 여지를 주지 않았다.“알아, 내가 지금 어떤 입장인지. 묻고 따질 자격도 없고, 네가 누구를 좋아하든, 그건 네 자유라는 것도 알아.”“이 말 꺼냈다가, 우리 사이가 끝날 수도 있다는 것도 알고 있어. 근데... 계속 참다 보니까 알겠더라.”‘난... 그렇게까지 쿨한 사람이 아니었어.’“그래서 이제 참지 않기로 했어.”‘어떻게 되든, 그건 네가 정해.’그렇게 말한 재석은 고개를 숙인 채 멈췄다. 마치 판결을 기다리는 죄인처럼.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조용한 밤공기 속에서, 정은의 목소리가 아주 작게 울렸다.“이제, 제가 말해도 될까요?”“응...”“재석 씨.”정은은 처음으로 재석을 그렇게 불렀다.“고개 들어요. 나 좀 봐요.”재석의 어깨가 순간 굳어졌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그는 이미, 거절당할 각오까지 끝냈다.그런데 눈이 마주친 순간, 정은의 두 눈 속에서 재석이 본 건... 눈물이 아닌, 웃음이었다.억지로 짓는
“헤어졌다고요?”정은은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몰랐어?!”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진욱은 눈을 반짝이며 의자째로 다가오더니, 목소리를 낮추고 본격적인 ‘TMI’를 털어놓기 시작했다.“M시 출장 갔다 오고 며칠 안 돼서, 재석이가 바로 짐 싸서 수아를 내보냈다니까?”정은은 그 말을 듣고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재석과 수아 사이에 어떤 감정선이 있었는지, 그동안 몇 번 스쳐 지나갔던 장면들이 퍼즐처럼 빠르게 떠올랐다. 그녀의 표정은 담담했지만, 눈빛 속엔 미묘한 기류가 스쳤다.“아마 진짜 많이 좋아했나 봐. 그러니까 정리할 때도 그만큼 아프고, 오래 걸리는 거겠지. 조금만 시간 지나면, 태민이도 정리될 거야.”진욱은 이어서 말했다.“네.”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대답했다.그 이후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남의 연애는, 들을 수는 있어도 깊게 얘기하지 말아야 해. 괜히 나서 봤자... 괜히 끼어든 꼴만 되니까.’...해가 지고, 붉은 노을이 건물 유리에 비치기 시작할 무렵. 정은은 마침내 작업을 끝냈다.진욱은 기다렸다는 듯 프로그램을 열고 기능 하나하나를 테스트했다.그리고 30초쯤 흐른 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다.“어어!! 복구됐어! 됐다! 돌아왔어! 다시 쓸 수 있어!!”미진도 덩달아 벌떡 일어나 양손을 번쩍 들었다.“살았다, 진짜!! 여태 손으로 데이터 입력한 거 생각하면... 이건 거의 기적이야!”진욱은 시계를 힐끗 보더니, 정은을 향해 말했다.“지금 이 시간까지 남아서 도와준 우리 정은이, 완전 수고 많았어! 조 교수...”“응...?”갑작스레 이름이 불리자, 재석은 몇 초간 멈칫하다가 고개를 돌렸다.진욱은 능청스럽게 말했다.“아니, 정은이가 이렇게 큰일 해줬는데, 감사 표시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적어도 밥 한 끼는 사야지.”“맞아요, 맞아요. 조 교수님, 이건 진짜 밥으로도 모자라요.” 미진이 곧장 거들었다.재석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대략 1년 전, 정은은 한동안 재석의 실험실을 빌려 쓴 적이 있었다. 그 일을 계기로 전진욱, 조미진 등과 인연이 닿았다.처음엔 서로 어색하고 낯설었지만, 몇 달이 지나면서 조금씩 가까워졌고, 지금은 가볍게 농담도 주고받을 만큼 편해졌다.그러던 어느 날, 진욱은 우연히 정은이 실험 데이터를 처리하는 속도를 보고 깜짝 놀랐다. 너무 빠른 게 아닌가 싶어서 슬쩍 물어봤더니, 정은은 코딩도 할 줄 아는 공대 만능 캐릭터였다. 그녀는 직접 짠 프로그램으로 데이터를 자동 정리하고, 다차원 분류와 정렬까지 가능하다고 했다.“와, 뭐야... 완전 반칙인데?”진욱은 결국 정은에게 부탁해 실험실 맞춤형 프로그램 하나를 따로 제작해달라고 했고, 그 이후, 데이터 정리는 그야말로 신세계를 맞이했다. 진욱은 쓸 때마다 감탄하며 말했다.“진짜... 정은이 덕분이야. 이게 사람을 살리네.”하지만 어제 그 기특한 프로그램이 갑자기 먹통이 됐다. 손태민이 고쳐보겠다고 덤볐지만, 결과는... 풍비박산이었다. ‘이젠 누가 손댔다간 진짜 박살 나겠어...’ 결국 정은에게 SOS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재석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혹시 오늘 시간 돼? 안 되면, 며칠 뒤도 괜찮고...]진욱은 훨씬 급했다. 말 그대로 살려달라는 마음이었다.[야, 오늘 안 데려오면... 나 여기서 바로 싸버린다! 진짜라고, 어?!]그는 어제 약 먹고 좀 괜찮아진 줄 알았건만, 밤새 배가 또 난리였다. 오늘 아침부터 실험실 화장실은 진욱의 전용이 되었다. 오전에만 6회 방문.그 말은, 그냥 협박 아니었다. 진짜 실현 가능성이 있었으니 말이다.정은은 상황을 듣고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시간 돼요. 지금 바로 갈게요.”[그래. 그럼 내가 정문 앞으로 갈게.]‘굳이 마중까진 필요 없는데...’ 뚝-정은이 전화를 끊으려던 찰나, 전화는 이미 끊겨 있었다. ...10분 뒤, 정은은 학교 정문 앞에서 재석과 마주쳤다. 두 사람은 실험실로 걸어가며 프로그램
“언니, 이건 굳이 우리 의견 물을 필요도 없지 않아요? 언니가 해볼 만하다고 생각하면, 무조건 가는 거죠. 저희한텐 뭐든 시키기만 하세요. 무조건 따라갈게요!”민지가 단호하게 말하자, 서준도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맞아요, 저흰 누나 믿고 가는 거예요. 결정은 누나가 해요.”정은은 그 말에 잠시 멍해졌다가, 결국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너희들... 나 그렇게 믿어도 돼? 나도 가끔 실수하거든?”민지는 마치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정은 언니가 실수했다면, 그건 100% 저랑 서준 오빠가 뭔가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뜻이에요.”“그건 좀 과장이지만...”‘그래도... 이런 믿음을 받는다는 게 참 따뜻하네.’세 사람은 그렇게 식사를 마쳤다.계산은 서준이 맡았고, 정은과 민지는 먼저 주차장으로 향했다. “언니, 먼저 가요. 전 서준이 데리러 갈게요.”“응? 굳이?”“우리 집이랑 방향이 같잖아요. 서준이는 차도 없으니까, 그냥 태워다 주는 거죠, 헤헤.”“그래, 알겠어. 그럼 조심히 가. 운전 천천히 하고.”“네. 언니도 잘 들어가요!”...두 ‘파트너’와 방향을 맞춘 정은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바로 준비에 들어갔다.자료 조사부터 시작해 ‘신소재 최적화 계획안’을 정리하고, 모든 내용이 빠짐없이 정리됐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확인했다.벌써 밤 10시. 정은은 핸드폰을 들고 조심스레 메시지를 보냈다.[장은혁 씨, 시간 돼요? 상의드릴 게 하나 있어요.]그 시각, 은혁은 거실 소파에 앉아 어머니인 황희숙 여사의 ‘진실 공방’에 시달리고 있었다.“너 외할아버지한테 전화 왔어. 오늘 도시락 들고 회사 갔다며? 근데 그냥 말도 없이 두고 사라졌다고 난리야. 게다가 누가 너랑 어떤 여자가 같이 있는 걸 병원 약국에서 봤다던데? 솔직히 말해봐. 너, 여자 친구 생겼지?”은혁은 억울함 가득한 목소리로 외쳤다.“아니 외할아버지는 왜 또 엄마한테 바로 전화해요? 진짜 너무하신다니까요...”“이 자식 봐라, 말버릇 좀
진욱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그렇게 마음이 있는 거면, 왜 정은이한테 솔직하게 말 안 해?”“겁나는 거지, 재석아? 말 꺼냈다가 거절이라도 당하면... 그땐 친구로도 남을 수 없을까 봐, 무서운 거잖아.”진욱은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재석을 똑바로 바라봤다.“그건 너답지 않아. 내가 아는 재석이는, 망설이지 않고 결정하는 사람이었어. 결과가 불확실하다고 물러서는 사람 아니었잖아.”“정은이가 ‘지금은 연애 생각 없다’고 했지? 중요한 건 ‘지금은’이라는 거야. 사람 마음은 바뀌는 거고, 그때 거절했다고 지금도 똑같을 거란 보장은 없어. 알겠냐?”재석은 말없이 진욱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 말이 생각보다 깊게 박혔다. ‘지금도 똑같을까? 아니, 혹시... 지금은 조금 다를 수도 있는 걸까...’진욱은 그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야, 진심으로 말하는 건데, 너 계속 질질 끌면, 정은이 뺏긴다. 그리고 뺏기고 나서 울어봤자, 소용없을 거야.”“우리 정은이 인기 많은 거 너도 알잖아. 예전에도 정은이 두고 싸운 애들 있었잖아. 그리고 오늘 그 남자 봤지? 얼굴 잘생겼지, 젊지, 에너지 넘치지, 옷차림 보니까 집도 잘 사는 거 같던데?”재석은 이런 말을 아주 듣기 싫었다.“닥쳐.”진욱도 더 이상 말하기 싫었다. “칫. 드디어 위기감이 좀 드나?”‘그래, 긴장 좀 해라. 맨날 냉정한 척만 하지 말고... 이번엔 너도 좀 불안해져 봐야지.’...한편, 정은은 봉수진을 집에 바래다준 뒤, 약을 가정부에게 전달하며, 복용 방법까지 하나하나 직접 설명했다. 봉수진은 저녁까지 먹고 가라며 붙잡았지만, 정은은 이미 서준, 민지와의 약속이 있었다.“외할머니, 며칠 안에 다시 올게요. 오늘은 친구들이랑 약속이 있어서요.”“그래그래, 알았어. 젊을 땐 많이 만나고 다녀야지.”정은은 웃으며 고개를 숙였고, 곧 차에 올랐다.약속 장소인 레스토랑에 도착했을 땐, 서준과 민지가 이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은 테이블 위에
은혁은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 “그러게요... 나야 뭐, 그랬으면 좋겠지만...”하지만 정은의 태도는 그리 확신을 줄 만큼의 호감은 아니었다.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분명히 좋아한다는 표시도 없는 애매한 선이 보이는 듯했다.‘그래서 더 미치겠어. 기대도 못 하고,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고... 이러니까 계속 마음이 붕 떠 있잖아...’그렇게 속으로 앓고 있었지만, 정은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봉수진의 약에 모든 관심을 쏟고 있었다.VIP 약국답게, 일 처리는 정말 빨랐다. 정성스럽게 달인 약이 곧바로 팩 단위로 나뉘어 밀봉되었고, 음용 방법까지 깔끔하게 안내되었다.냉장 보관 후, 따뜻한 물에 데워 마시면 된다는 안내였는데, 이 정도면 환자도 거부감 없이 약을 먹을 수 있을 것이었다. 약을 다 받은 후, 약 한 시간쯤 지나 두 사람은 병원을 나섰다.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은의 전화가 울렸다.“여보세요? 외할머니? 네, 약 다 받아놨어요.”“병원에서 달여줬어요. 네, 거기 계세요. 지금 바로 갈게요.”전화를 끊은 정은은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은혁을 바라보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오늘 고마웠어요. 외할머니 모시러 가볼게요. 안녕히 계세요.”“아, 어... 그래요! 잘 가요!”은혁은 여자의 뒷모습이 멀어질 때까지 멍하니 서 있었다.심지어 여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된 후에도 한참을 그렇게 바라본 후에야 아쉬움 가득한 시선을 거두었다.그 순간, 핸드폰이 울렸고, 화면엔 ‘황기' 두 글자가 떴다.“여보세요?”[야 이놈아! 도시락 던져놓고 도망가듯 나가버리면 어떡해?! 말도 못 붙였잖아! 뭐가 그렇게 급해? 뭐가 외할아버지보다 중요한 거냐고?!]“죄송해요... 헤헤.”황기는 순간 당황했다. ‘얘 지금 뭐야? 미쳤어? 웃음은 왜 이렇게 정직하게 새어 나오는 건데...?’...한편, 정은은 봉수진을 태우고 병원을 나서는 중이었다. 바로 그때, 재석은 약을 수령하고 외래 진료실 앞 벤치에 앉아 있었다.
정은도 여기서 재석을 만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선배님, 병원엔 무슨 일로 오셨어요?”재석은 그제야 시선을 거둬들였다. 눈길이 정은에게 닿는 순간, 표정이 한층 부드러워졌다. “난...”“날 데려다주러 온 거야.” 그 순간, 전진욱이 배를 감싸 쥐며 천천히 다가왔고, 재석 대신 대답을 건넸다.정은은 진욱을 바라보다가 눈이 살짝 커졌다. “교수님, 어디 아프세요? 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데요.”“하... 뭘 잘못 먹었는지, 아침부터 배탈이 나서... 약도 안 듣고... 이 사람이 막 끌고 오더라니까... 검사라도 받아보라고.”정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잘하셨어요. 괜히 방치하다가 더 심해질 수도 있잖아요. 미리 체크하면 마음도 편하고요.”“어우, 너희 둘 미리 맞췄냐? 말이 어쩜 그렇게 똑같냐?” 진욱이 짐짓 장난스러운 말투로 투덜댔다.정은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재석을 바라봤다. “그랬어요?”재석은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눈빛 속 어딘가 알 수 없는 감정이 일렁였다. ‘저 말투, 저 표정... 나만 아는 게 아닐 텐데...’“정은 씨, 이제 가야죠.” 그때, 은혁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아, 네.” 정은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희 먼저 갈게요.”그렇게 말한 후, 은혁과 나란히 병원 복도를 걸어 나갔다.재석은 그 자리에 멈춰 선 채 두 사람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봤다. 눈빛 속 감정은 복잡하고도 묘했다. ‘뭔데, 저 둘은 저렇게 자연스러워...’“재석아? 야, 재석아!”진욱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재석은 고개를 돌렸지만, 눈빛 속 싸늘함은 여전했다. 진욱은 그 눈빛에 소름이 돋아 어깨를 움찔거렸다.“너... 왜 그래?”“방금 정은이가 ‘저희’라고 했어.”“어...?”진욱은 멍한 표정으로 재석을 바라봤다. 몇 초간 멍하던 그는 그제야 이해가 된 듯 말했다. “아... 그 ‘저희’? 그게 뭐 어때서? 같이 왔으니까 ‘저희’지. 그럼
얼마 지나지 않아 황 원장은 처방전을 프린트해서 정은에게 건넸다.“수고 많으셨습니다, 원장님.”정은이 공손히 인사하자 황 원장은 손을 휘저었다.“아이구, 무슨... 이 아가씨는 인사도 참 반듯하게 잘하네요. 말도 예쁘게 하고, 얼굴도 예쁘고. 이런 손녀가 있으면, 어디 내놔도 자랑이겠네요.”봉수진은 바로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그럼요. 우리 손녀는 어디 하나 빠지는 데가 없어요.”황 원장은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장난스럽게 물었다.“이렇게 예쁜 아가씨한테 남자 친구가 없을 리 없는데? 그렇죠?”봉수진은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없어요! 보통 남자애들은 우리 정은이랑 안 어울려요.”“허허, 그래도 우리 손자 정도면 꽤 괜찮은데...?”황 원장이 살짝 떠보자 봉수진은 손사래를 쳤다.“아이구, 그 얘긴 그만해요. 정은이 아직은 시집 안 보낼 거예요. 지금이 제일 곁에 두기 좋을 때라니까요.”‘아이고, 또 시작이다...’정은은 속으로 헛웃음 치며 처방전을 가방에 쏙 넣고 눈치껏 자리에서 일어났다.“저, 약 지으러 먼저 다녀올게요!”...진료실 문을 나서는 순간, 정은은 누군가와 부딪혔다.“아, 죄송해요!”고개를 돌려 상대방을 본 순간 정은의 걸음이 멈췄다.“은혁 씨?”은혁은 보온 도시락 통을 들고 서 있었다.“정은 씨! 또 보네요. 우리 진짜 인연인가 봐요? 하하...”“여긴... 병원인데? 누가 입원하셨어요?”정은이 도시락을 보며 물었다.“아, 아니에요. 저 입원실 온 거 아니고요! 외할아버지가 이 병원 의사세요. 오늘 외래 당번이라 저희 어머니가 직접 도시락을 싸주셨는데, 제가 대신 가져다드리러 온 거예요.”“혹시 외할아버지 성함이 황 씨?”“네! 황기 원장님이세요. 한약재 이름에서 따오셨대요, 혹시... 아는 분이세요?”‘어머나, 진짜 인연인가?’정은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오늘 저희 외할머니 진료도 황 원장님한테 받은 거예요.”“정말요? 세상에... 진짜 대박. 어쩐지 자꾸 마주치네요.”은혁은 정은 손에 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