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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10화

Author: 십일
이미숙은 계속 말했다.

[정은아, 생일 축하해. 원래 나와 네 아빠는 며칠 전에 J시에 가서 너와 같이 생일을 보내려고 했는데, 출판사에서 임시로 『7일담』 재판을 하기로 한 거야. 심지어 속표지 세 상자나 부쳤고. 정말 떠날 수가 없어서 네 아빠와 상의 끝에 다음에 시간 나면 다시 널 보러 가기로 했어.]

이미숙도 어쩔 수 없었다.

새 책이 대박 나서, 이미 세 번째로 재판되었고, 지금 서재에는 아직도 수천 개의 속표지가 사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때로는 책이 너무 잘 팔리는 것도 고민이었다.

정은은 눈을 깜빡이며 다정하게 말했다.

“우리 엄마가 얼마나 인기 많으신데, 좀 바쁘신 것도 다 정상이잖아요.”

자랑스러운 정은의 말투에 이미숙은 웃음을 터뜨렸다.

[참, 넌 몰라, 네 엄마 지금 인기가 정말 장난도 아니야! 얼마 전에 한 독자가 어디에서 네 엄마의 핸드폰 번호를 얻었는지, 전화하면서 자신에게 따로 사인을 해달라고 한 거 있지? 심지어 돈 2천만 원을 주겠다잖아.]

이미숙이 전화를 받을 때, 소진헌은 마침 옆에 있었는데,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독자의 요구대로 축복의 말을 써주기만 하면 2천만 원을 받을 수 있다니?

소진헌은 놀라서 말문이 막혔다.

“어?”

정은조차도 좀 놀랐다.

“이런 일이 있었어요?”

[그때 네 엄마는 멍해서 반응하지 못했는데, 상대방은 네 엄마가 가격에 불만이 있는 줄 알고 직접 4천만 원을 주겠다고 했어. 쯧쯧...]

지금 생각해도 소진헌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럼 엄마는 허락하셨어요?”

[사인해 주겠다고 했지만, 돈은 받지 않았어. 그 사람도 J시 사람인 것 같아!]

전화를 끊자, 정은은 택배가 도착했다는 문자를 받았다.

그녀는 어렵게 침대에서 일어나 신발을 신고 커튼을 열었다.

어젯밤에 또 눈이 내렸기에 창밖은 온통 새하얬다.

이때 갑자기 초인종이 울렸다.

정은이 달려가서 문을 열었다.

펑!

리본이며 반짝이는 종이가 정은의 머리와 몸에 떨어졌다.

정은은 멍해졌다.

수민은 검은색 양복을 입고 있었다. 가슴 앞에 붉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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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711화

    “자, 내가 끼워줄게.”수민은 팔찌를 정은의 가녀린 손목에 끼워주었고, 이는 정은의 손을 더욱 하얗게 돋보이게 했다.“이럴 줄 알았어! 이 디자인과 컬러는 너와 아주 잘 어울려!”정은은 고개를 숙이며 팔찌를 바라보았고, 볼수록 마음에 들었다.수민이 입을 열었다.“이게 끝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응?” 정은은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뭐가 더 있어?”수민은 웃으면서 말을 하지 않고 웨이터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순간, 레스토랑에서 베토벤의 ‘환희의 찬가’가 울려펴졌다.잔잔한 음악소리 속에서 재석은 케이크를 밀며 두 사람을 향해 걸어왔다.핑크색 크림 위에 예쁜 인형이 하나 서 있었다. 커다란 눈, 자신감 넘치는 표정은 정은과 똑 닮았고, 주위는 핑크색 진주로 장식되었다.심플하면서도 예뻤다.“선배님?” 정은은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재석은 그녀의 눈빛을 마주하며 담담하게 웃었다.음악이 점차 클라이맥스에 이르러서, 레스토랑 안이 너무 따뜻해서, 남자의 미소가 너무 눈부시고, 눈빛이 너무 뜨거워서, 수많은 촛불이 흔들리는 가운데 정은은 일시에 멍해졌다.재석은 정은의 앞에 멈춰 서며 손에 든 파란 아이리스를 건넸다.“생일 축하해.”정은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고, 고마워요, 선배님. 꽃과 케이크 정말 너무 예뻐요...”파란 아이리스의 꽃말은 우아함과 생기, 꿈과 희망, 그리고 찬양과 애모였다.수민은 이 상황을 보고 웃으며 일깨워주었다.“정은아, 잘 봐봐, 정말 꽃과 케이크밖에 안 보여?”정은은 멈칫하더니 고개를 숙이며 그 파란 아이리스를 바라보았다.그 순간, 정은은 멈칫했다.은색과 핑크색으로 된 작은 선물함이 꽃다발 속에 숨겨져 있었다.수민의 주시와 재석의 기대를 감지한 정은은 그 선물함을 열었는데, 예쁜 목걸이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이건...?”수민이 대답했다.“우리 오빠가 준비한 생일 선물이야.”목걸이 외곽은 둥근 호형으로, 마치 행성 궤도와 같았다. 그리고 그 ‘궤도’에는 9개의 다이아몬드가 분포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712화

    두 사람의 학술 토론이 마침내 끝나자, 수민은 그제야 한숨을 돌렸다.“다음에 또 이런 얘기할 거면 나 부르지 마, 정말 지루해...”수민은 중얼거리며 손을 들어 웨이터에게 음식을 올리라고 했다.그리고 모두 정은이 좋아하는 음식이었다.밥을 다 먹은 뒤, 수민은 정은과 쇼핑을 하려 했는데, 레스토랑을 나서자마자 회사의 전화를 받았다.“알았어, 알았다고! 하루조차 기다릴 수 없는 거야 뭐야?!”비록 말은 그렇게 했지만, 수민은 전화를 끊고 급히 회사로 달려갔다.떠나기 전에 재석에게 당부했다.“오빠, 오늘 정은 생일이니까 뭐든 다 들어줘야 지!”“알았어.”“어디로 가고 싶어?” 수민을 보낸 후, 재석은 웃으며 정은을 바라보았다.“어디든 다 되는 거예요?” 정은의 눈빛은 반짝반짝 빛났다.재석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내가 해줄 수 있는 거라면.”“그럼 그 다이아몬드를 만든 곳으로 가봐도 돼요?”“정말 가고 싶어?”“네!”“좋아.”정은은 그곳이 실험실이나 조작실 같은 곳일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재석이 자신을 공장으로 데리고 갈 줄은 몰랐다.“조 교수! 무슨 일로 또 온 거야?” 재석이 공장에 들어서자마자 경비 아저씨가 열정적으로 인사를 했다.“아저씨, 안녕하세요, 점심 드셨어요?”“그럼! 오늘 식당에서 족발을 삶았는데, 얼마나 맛있는지 몰라! 맞다. 그 다이아 목걸리 여자친구가 어땠어?”콜록콜록-재석은 좀 어색해하며 자연스럽지 않게 몇 번 기침을 했다.정은은 옆에서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경비 아저씨가 그제야 재석 곁에 한 여자아이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설마? 이 친구가 바로 네 다이아몬드를 받은 여...”“아저씨! 7호 작업장의 열쇠 좀 주시겠어요?” 재석은 소리를 높여 경비의 말을 끊었다.“그래!” 경비는 바로 열쇠를 찾으러 고개를 돌렸다.재석은 어색하게 정은을 바라보았다.“아저씨가 워낙 농담을 좋아하셔서...”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런 거 같았어요.”열쇠를 받고 재석은 정은을 데리고 7호 작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713화

    정은은 그런 자신을 비웃으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재석은 순간 숨이 멎을 듯했다. 왜인지 그녀의 그 미소가 왠지 모르게 가슴을 덜컥하게 만들었다.마치... 무언가 중요한 걸 놓쳐버린 것만 같았다.두 사람이 공장을 나섰을 때는 이미 해가 저물어 있었다.경비도 교대 시간이라, 유쾌하고 농담을 잘하던 아저씨는 퇴근했고, 대신 젊은 청년이 근무를 서고 있었다.성격이 조금 내성적인지, 청년은 말없이 열쇠를 받아 제자리에 두고는 조용히 문을 열어 두 사람을 배웅했다.밤이 완전히 찾아오기 전, 하늘가에는 어스름한 빛이 스며들었고, 길가의 앙상한 나뭇가지들이 황혼 속 적막함을 한층 더 짙게 만들었다.정은과 재석은 나란히 걸으며, 둘 사이에는 자연스레 고요함이 내려앉았다.재석은 입을 떼려다 망설였다. 그녀의 감정이 흔들리는 걸 느꼈지만, 그 이유까지는 알 수 없었다.결국, 조심스럽게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그러던 중, 정은은 문득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선배님이 정성껏 준비해 준 생일 선물, 정말 의미 있었어요. 덕분에 기뻤어요. 고마워요. 그럼, 나도 보답으로 저녁을 살 테니, 뭐 먹고 싶어요?”재석은 그녀가 눈을 드리우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가, 눈 깜짝할 사이에 다시 환하게 웃는 모습을 바라보며 순간 멍해졌다.정은이 다시 입을 열기 전까지, 그는 잠시 말을 잃었다.“결정했어요?”재석은 살짝 미소 지으며 답했다.“매운 요리 어때? 괜찮겠어?”“좋아요!” 정은은 망설임 없이 답하며 밝게 웃었다.매운 걸 먹고 나오자, 정은은 입김을 불며 목도리를 꼭 맸다.재석은 그녀의 모습을 보고는 망설임 없이 목도리를 벗어 숄처럼 그녀의 어깨에 걸쳐 주려 했다.그러나 정은은 한 발짝 물러서며 환하게 웃었다.“괜찮아요, 선배님. 안 추워요.”재석은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가 곰곰이 생각하기도 전에 정은은 이미 성큼성큼 앞서 걸어갔다.어둠이 완전히 내려앉았고, 차가운 바람이 스산하게 불었다. 가로등 불빛마저 옅은 안개에 덮인 듯 흐릿하게 퍼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714화

    “정은아, 우리 카페에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나...”“어? 조 교수님, 정은아! 두 사람 여기서 뭐 해? 안 올라가고?”갑자기 밝은 목소리가 들려왔다.그것은 두 사람의 아래층에 사는 아주머니였다. 지금 그녀는 커다란 장바구니를 들고 단지 입구로 들어오며 활짝 웃었다.“이 추운 날씨에 하마터면 꽁꽁 얼 뻔했네... 할인만 아니었으면 나도 이 늦은 시간에 나올 리가 없었을 텐데!”근처 대형 마트는 밤 9시 이후부터 할인 행사를 했다.살림에 알뜰한 아주머니는 종종 늦은 저녁 장을 보러 나가곤 했다.지금 이런 분위기에서 재석은 더 이상 무슨 말을 하기가 어려웠다.재석은 입가까지 올라왔던 말을 조용히 삼켰다.“같이 올라가자.” 아주머니가 따뜻하게 말했다.정은은 곧장 다가가 그녀의 장바구니를 받아 들었다.“제가 도와드릴게요.”그런데 바로 다음 순간, 재석이 자연스럽게 정은의 손에서 장바구니를 넘겨받으며 앞장섰다.“내가 들게.”말투는 담담했지만, 그 행동은 다정하고 자연스러웠다.아주머니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말했다.“조 교수님은 말이야, 정말 다정해! 너희 젊은이들은 그걸 뭐라고 했더라... 매너! 맞아, 매너!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정은아?”정은은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네.”“이렇게 좋은 총각이면 진작에 여자친구가 있어야 하는데, 조 교수는 그저 연구와 학술밖에 모르잖아! 하루 종일 실험하고 논문 쓰느라 바쁘다니까!”“노벨상이라도 받으려는 건지 원. 그래, 남자가 일 열심히 하는 건 좋지! 그런데 연애도 좀 하고, 일도 하면 더 좋잖아?”아주머니는 한숨을 쉬더니, 갑자기 정은을 보며 말을 이었다.“정은아, 넌 몰라서 그래. 나랑 3층 왕 교수님이 조 교수한테 여자아이를 얼마나 많지 소개해 주려고 했는지 알아? 말로는 좋다고 해놓고, 막상 약속 잡으려고 하면 갑자기 사라지는 거야! 며칠씩 집에도 안 들어오고! 우리가 그걸 모를 줄 아나 봐?”앞에서 조용히 걸어가던 재석은 갑자기 움찔했다.“넌 이렇게 똑똑하고 착하니,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715화

    현빈이 말했다.[일단 생각 좀 해볼게. 만나서 얘기하자.]“좋아요.”통화를 마치고 정은은 3분 안으로 패딩 코트를 걸치고 두꺼운 스노우부츠를 신은 뒤 가방을 들고 외출했다.소한이 지난 후, 그렇게 춥지 않은 것 같지만, 태양은 여전히 구름 뒤에 숨어 얼굴을 내밀려 하지 않았다.정은은 아래층에 도착하자마자 현빈이 골목 어귀에 서서 한정판 마이바흐 옆에 기대어 검은색 외투를 입고 자동차 열쇠를 들고 노는 것을 보았다.그녀를 본 순간 현빈은 갑자기 똑바로 섰다.정은은 웃으며 그를 향해 걸어갔다.아까까지만 해도 얼굴이 덤덤했던 남자가 순식간에 입꼬리를 들어올렸다.차에 오르자 현빈은 그녀에게 아침을 건네주었다.“두유와 만두, 뜨거울 때 먹어.”정은은 눈썹을 치켜세웠다.“심 대표님은 기사로 됐을 뿐만 아니라 특별히 아침까지 사온 거예요? 쯧쯧, 꿈도 꾸지 못한 대우를 받았네요.”현빈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왜? 넌 심지어 더 대담하게 생각할 수 있는데.”정은은 말을 받지 않고 두유만 들고 몸을 녹였다. “왜 안 먹어?”“뜨거우니까요.”“에헴! 방금 수리점에서 전화가 왔는데, 네 차 앞부분이 심하게 손상된 것은 아니니, 다시 페인트를 칠한 후에는 이미 흔적을 볼 수 없대.”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20분 후에 두 사람은 수리점에 도착했다.정은은 사인을 하고 차를 운전했고, 현빈에게 밥을 사야 한다는 것도 잊지 않았다.“생각 다 했어요? 뭐 먹을래요?”“이렇게 추운 날에는 샤브샤브 먹기 딱이지.”정은은 표정이 환해졌다.샤브샤브 가게는 현빈이 골랐는데, 정은은 도착해서야 그것이 아주 유명한 가게라는 발견했다.입구에 길게 줄이 늘어졌고, 모두 젊은이들이었다.정은은 침을 삼켰다.“우리 그냥 다른 집으로 갈까요?”‘언제까지 줄을 서야 하는 거야?’그러나 현빈은 그녀를 데리고 당당하게 안으로 들어갔다.“뭘 바꿔? 따라와.”“아니... 이렇게 정정당당하게 새치기를 하는 거예요?”그러나 종업원은 현빈을 보자 제지하기는커녕 웃으며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716화

    “켁...” 정은은 놀라서 기침을 했다.밥을 잘 먹고 있다가, 갑자기 자신을 언급하다니? 정은은 기분이 좀 이상했다.“우린 사귀는 사이가 아니지만, 심 대표님에게 있어 이번 식사는 확실히 공짜와 다름없죠. 왜냐하면...”정은은 웃으며 사장을 바라보았다.“제가 사는 거니까요.”사장은 멍하니 있다가 이어서 의미심장하게 현빈을 바라보았다.‘이 녀석도 당하는 날이 있군! 잘됐어!’다 먹고 정은은 주동적으로 계산하러 갔다.사장은 현빈을 잡아당겨 목소리를 낮추었다.“야, 너도 열심히 노력 좀 해. 얼른 그 친구의 마음을 얻어야지. 다음에 올 때 성공하지 못한다면, 나 정말 널 비웃을 거야!”현빈은 한숨을 내쉬었다.“나도 그러고 싶지.” “이야, 이 세상에 드디어 너를 혼내 줄 여자가 나타났구나, 희한하다.”“야...”“그래! 이 친구가 도와줄게.”정은은 이미 계산대에 가서 결제를 하려 했다.결제한 후, 그녀는 뒤에 있는 현빈을 바라보았다.“갈까요?”“에이, 잠시만요!” 사장이 먼저 입을 열더니 웃으며 계산대로 갔다. 그리고 직원에게 물건을 건네달라고 손을 내밀었다.“네?” 직원은 어리둥절해졌다.“티켓.”“아!”사장은 받아서 현빈에게 주었다.“자, 내 여동생이 피아노 연주회 티켓 두 장을 구했는데, 음치인 내가 또 어떻게 그걸 들으러 가겠어? 자리에 앉으면 정말 쇠귀에 경 읽기가 되는 거잖아! 하하... 오늘 마침 만났으니 너한테 줄게!”현빈은 참지 못하고 눈썹을 치켜세웠다.“이건 정말 구하기 어려운 건데, 정말 나한테 줄 거야?”“그럼, 가져가!”“그래, 그럼 나도 고맙게 받을게.”두 사람은 사장의 배웅을 받고 샤브샤브 가게를 떠났다.현빈은 손에 든 티켓을 흔들며 정은에게 물었다.“맥심 피아노 연주회, 가고 싶어?”“맥심이요? 진짜예요?” 정은은 의아함을 참지 못했다.“연주회 티켓은 정말 구하기 어려운데.”“자, 직접 확인해 봐...”정은이 머리를 숙였는데 정말 맥심의 연주회였다.“내 친구가 호의로 우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717화

    어떤 곡인지, 어떻게 변주를 했는지 현빈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그리고 현장의 어두운 조명은 가장 좋은 은폐가 되어, 현빈이 거리낌 없이 부드러움과 깊은 감정을 드러낼 수 있게 해주었다.그의 시선은 통제되지 않고 정은의 하얀 손에 떨어졌다. 몇 번이나 그 손을 꽉 쥐고 영원히 놓지 않으려 했다.하지만 잠시 후, 현빈은 스스로를 억제하며 이성을 되찾았다.그는 자신에게 말했다. ‘조금만 참아, 이 밤만 지나면... 더 이상 급해할 필요 없어, 정은이를 놀라게 해선 안 돼...’두 시간, 어떤 사람에게는 괴로움과 시련이겠지만, 정은에게는 엄청난 시청각 향연이었다.그렇기에 공연이 끝난 후에도 정은은 입맛을 다셨다.“방금 그 ‘크로아티아 랩소디’ 들었어요? 록 요소를 추가한 거 있죠! 예상치 못한 낭만과 생동감이 넘쳤고, 특히 중간의 변주는 더욱 놀라웠어요! 심 대표님은 어떻게 생각해요?”현빈은 잠시 딴 생각을 하다가 대답했다. “응? 그래, 듣기에는 확실히 괜찮았지.”정은은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남자의 이상한 반응을 놓쳤다.홀을 나서자, 가로등이 켜지고, 네온사인이 땅에 비추는 빛과 그림자가 쏟아져 내리며, 그때서야 정은은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깨달았다. 날이 이미 어두워진 것이다.정은은 논문을 아직 끝내지 못했고, 내일 실험실에 가져갈 점심도 준비하지 않았기에 먼저 가려고 했다.하지만 입을 열기도 전에 현빈이 갑자기 말했다.“나랑 어디 좀 가줄래?”“네?”“안 돼?” 남자의 검은 눈 속에서 한 줄기 빛이 반짝이며 놀라울 정도로 밝았다.정은은 조금 의심스러웠지만 결국 승낙했다.하지만...“9시 전에 집에 가야 돼요.”“좋아.” 현빈은 그저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정은은 자신의 차에 올라 현빈의 차를 따라 근교로 향했다.구불구불한 산길을 지나 두 사람은 산 꼭대기에 도달했다.“정은아, 봐봐...”두 사람은 바람을 맞으며 차를 멈추자, 정은은 고개를 숙이고 패딩으로 자신을 꼭 싸맸다. 이때 현빈이 갑자기 입을 열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718화

    “맞아, 자연계에는 천연의 푸른 장미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은 실현할 수 없는 희망이나 완성할 수 없는 소원을 의미하지.”현빈은 정은을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네 손에 있는 이 꽃다발을 더 자세히 봐봐...”“...어? 천연이네요?! 염료로 물들인 게 아니에요?!” 정은은 놀라서 고개를 들어 현빈의 표정에서 답을 찾으려 했다.남자의 입가에 옅은 웃음이 피어오르자, 정은은 자신이 알아맞혔다는 것을 알았다.정은은 충격을 받았다.“어떻게 이럴 수가?!”“에서 최근 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는데, 제1저자는 T대 의약대학 국제박사 안카나할리 남가바야.”“먼저 이중표현 입자를 구축한 다음, 이 입자는 파란색 합성에 참여하는 두 개의 세균 유전자를 포함할 수 있어. 그리고 이 입자는 농균으로 전환되고, 그 다음에...”여기까지 말하자 현빈은 잠시 멈추더니 마치 무언가에 걸린 것 같았다.필사적으로 회상해도 소용없었다.“풉...” 정은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지금 논문을 외우고 있는 거예요?”현빈은 보기 드물게 어색해졌다.“에헴! 미안, 이건 내 전공이 아니어서, 억지로 외워도 기억할 수가 없네...”정은은 그를 대신해 남은 부분을 보충했다.“그리고 농균이 흰 장미의 꽃잎에 주사되는 거 맞죠? 이변이 없는 한, 농균은 식물 호르몬인 아세틸라일락톤의 유도로 장미꽃잎 세포 게놈에 유전자를 전이 시켜 장미 세포가 짙은 남색의 효소를 합성하게 되는 거죠.”“맞아, 맞아! 바로 이 효소를 합성하는 거야! 너도 이 논문을 본 적이 있니?”“아니요. 심 대표님이 말한 것을 들은 뒤, 이 결론을 충분히 유도할 수 있죠.”“대단해.”현빈은 혀를 내둘렀다.“이 꽃은... 엄청 비싸겠죠?”“너한테 주는 거야, 아무리 비싸도 너보다 중요하지 않으니까.”“고마워요. 시간도 늦었으니 이제 그만 돌아가야겠어요.”“정은아.” 현빈은 갑자기 정색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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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62화

    정은은 조수석 문을 열고 차에 올랐다. 안전벨트를 매고 창밖을 슬쩍 바라봤다. 공장은 호텔에서 10km 떨어진 개발지구에 자리 잡고 있었다.은혁이 운전대를 잡으며 말을 이어갔다. “그 구역은 첨단 기술 산업 클러스터로 지정돼 있어서, 기술 협력 프로젝트도 대부분 그쪽으로 집중되고 있어요.” “정은 씨가 찾는 그 새로운 감온 정확도 소재는 우리랑 CG그룹이 공동 개발한 건데, 지금까지 1세대부터 3세대까지 세 가지 버전이 있어요.”정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집중했고, 중간중간 전문적인 질문도 빠짐없이 던졌다. 은혁이 답할 수 있는 부분은 성의껏 설명했지만, 구체적인 수치나 실험 조건처럼 세세한한 부분은 바로 대답하기 어려운 것도 있었다.약 20분 후, 두 사람은 공장에 도착했다. 은혁이 미리 연락해 둔 덕분에, 정문 앞에는 담당자가 나와 있었다.정은은 안내받아 간단히 실험실과 공장을 둘러봤다. 연구 구역과 생산라인은 전혀 겹치지 않게 구획이 나뉘어 있었고, 현장도 전반적으로 정돈된 느낌이었다.정은이 요청한 소재의 1세대와 2세대는 이미 완제품으로 확보되어 있었지만, 3세대는 아직 실험 단계였기에 정식 생산은 되지 않았다. 따라서 실험실에서 직접 합성해야 했다.“시간은 얼마나 걸리죠?” 정은이 은혁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은혁은 옆에 있는 연구원을 바라봤다.“8시간 정도 걸릴 것 같아요. 내일 오전엔 제품 받아보실 수 있어요.”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관련 비용은 정산대로 처리해 주세요. 최종 결정되면 한 번에 입금할게요.”은혁은 급히 손사래를 쳤다. “아니에요. 비용은 무슨 비용... 정은 씨, 우리 사이에 뭘 그렇게 딱딱하게 굴어요.”정은은 침착하게 말했다. “그럴수록 더 딱딱하게 해야죠. ‘친할수록 돈 문제는 분명하게.’ 이건 기본이에요. 더군다나, 우리 둘은 그냥 ‘친구’일 뿐인데, 은혁 씨가 도와주는 것만 해도 충분히 고마워요.”“게다가 실험실도 예산이 따로 있는 조직이고, 모든 비용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61화

    실험실에서 진욱은 오늘만 몇 번째인지 모르게 재석을 힐끔거렸다. 결국 참지 못하고 다가갔다. “재석아, 너 오늘 길 가다 돈 주웠냐?”실험대 앞에서 입꼬리를 내릴 줄 모르던 재석의 손이 잠깐 멈췄다. “데이터 정리는 다 됐어? 3차 실험 가능성 평가 보고서는 언제 낼 건데?”“하, 이 사람 분위기 다 깨네.” 진욱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근데 말이야, 오늘 아침에 네가 샌드위치 먹는 거 봤거든.”“그래서?”“정은이가 해준 거지? 다 알아. 너희 둘, 다시 잘 되는 거야? 그것도 아니면, 이제 미련 접은 거야?” 재석은 살짝 고민하다가, 이제는 말해도 되겠다 싶어 입을 열려고 했다.바로 그때, 핸드폰에서 톡 알림이 떴다. 정은이었다.[도착했어요. 샌드위치는 맛있었어요?]재석은 바로 답장했다.[맛있었어.]정은은 곧장 자신의 일정을 재석에게 알려줬다.[지금 호텔 체크인하고, 오후엔 공장 갈 거예요.][응, 알겠어.]1분 정도 지났지만, 그다음 메시지는 오지 않았다. 재석은 괜히 허전해졌다.‘예전에도 이렇게 대화했었는데... 왜 지금은 이걸로는 부족하지?’정은과 더 오래 이야기하고 싶었다. 더 많은 말, 더 사적인 얘기, 더 가까운 거리. 그 마음은 마치, 가려운 곳을 손톱 끝으로 슬쩍 긁은 느낌. 절대 시원하지 않았다. 그냥 더 간지러워질 뿐.‘그냥, 정은이한테 세게 할퀴어지고 싶은데...’“누구랑 톡하냐?” 진욱이 슬쩍 핸드폰을 들여다보려 다가왔다.재석은 피할 틈도 없이 화면을 들킨 셈이 됐다. “뭘 감춰. 정은이랑 메시지 주고받는 거잖아. 왜? 뭐가 부끄럽다고.”“됐고.” 재석은 핸드폰을 집어넣고, 실험대에서 내려왔다. “오늘 점심은 내가 쏜다. 뭐 먹고 싶어?”진욱은 멍한 표정으로 몇 초 멈췄다. 옆에 있던 미진이랑 태민이 눈을 마주쳤다. “교수님, 무슨 좋은 일 있으세요? 갑자기 점심을요?”재석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먹고 싶은 거 생각나면 전 교수한테 말해.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60화

    비행기 이륙 직전, 은혁이 정은에게 제한했다. “정은 씨, 내 마일리지로 좌석 업그레이드해 줄게요.”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은혁의 얼굴에 아쉬움이 스쳤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자리로 돌아갔다. 잠시 후, 다시 다가와 말했다. “내가 정은 씨 옆자리로 바꿨어요.”비즈니스석에서 이코노미석으로 자리를 바꾸다니, 웬만한 사람이면 거절하고도 남을 일이었다. “은혁 씨, 이렇게까지 안 하셔도 돼요.” 정은은 단호한 어조였다.‘처음으로 이렇게까지 분명하게 말한 것 같아.’정은은 연애 한 번 안 해본 소녀가 아니었다. 은혁의 눈빛에 담긴 감정이 어떤 건지, 모를 리 없었다.하지만 그동안 굳이 선을 긋지 않은 건, 은혁이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며, 오히려 몇 번이고 도와줬기 때문이었다. 이번 Z시 출장도 은혁의 도움 덕에 가능했던 일이었다.게다가 은혁이 고백도 안 했고, 정은이 불편할 정도로 다가온 것도 아니었으니까... 정은도 자신이 먼저 딱 잘라 말하는 게 오히려 예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그리고 그때의 정은은 솔로였고, 재석이 입을 열게 하기 위해서라면, 어느 정도의 자극은 필요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정은은 이미 재석과의 관계를 정리했고, 은혁은 더 적극적으로 다가오고 있으니, 그녀도 이제 더 늦기 전에 확실히 은혁에게 말해야 한다고 결심했다. 그래야 서로 상처받지 않을 테니 말이다.은혁은 정은의 말에 잠시 당황한 듯하다가, 이내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난 정은 씨 옆자리에 있는 게 좋아서 그래요.”정은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비즈니스석 티켓을 사 놓고 누구랑 자리를 바꾸든, 그건 상대방의 자유니까. 굳이 뭐라고 할 필요는 없지.’그 후, 정은은 노트북을 열고 일에 집중했다. 은혁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틈틈이 정은을 흘끗거렸다.그러다 손을 들어 승무원을 불렀다. “저기요. 잠깐만요.”“네, 손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59화

    결국 재석은 아쉬움 가득한 눈빛으로 정은의 손을 놓았다. 그러고는 조용히 열쇠를 건네받아 현관문을 열어주었다.“정은아, 잘 자.”그 한마디.‘정은아’라는 이름이 너무나 자연스럽고도 부드럽게 흘러나왔다. 마치 수천 번은 불러본 것처럼.그 말에 정은은 순간 멍해졌다.‘왜 내 이름을 듣고도 가슴이 이렇게 설레지?’“네, 당신도 잘 쉬어요.”둘은 그렇게 짧은 인사를 나누고 각자의 문 안으로 들어갔다.그날 밤. 정은은 평소와 달랐다. 샤워를 마친 뒤 늘 하던 루틴, 논문 체크나 프로젝트 정리는 손도 대지 않았다.대신, 자기도 모르게 핸드폰을 들고 재석의 SNS를 열었다.‘뭐 하는 거야? 나...’그런데 이상하게, 자꾸만 궁금해졌다. ‘이 사람, 평소에 어떤 거 올리지?’재석은 SNS 설정 따위는 하지 않은 사람이었다.맨 아래까지 내리는 데 몇 초도 채 걸리지 않았다.포스트 총수, 대략 서른 몇 개. 그중 90%는 논문, 연구, 산업 동향 공유.‘진짜 성실한 연구자 모드네...’그나마 정은과 관련 있는 건 얼마 전 실험실이 SCI 논문 게재됐을 때 서비대학교 공식 계정에서 축하 포스팅한 걸 공유한 것뿐이었다.[축하합니다.]짧고 건조한 멘트.그 밑엔 전진욱과 조미진이 ‘좋아요’를 눌러뒀다.‘이게 전부야?’그렇게 핸드폰을 내려놓으려던 순간, 알림이 하나 떴다. 재석이 새로운 글을 올렸다.정은은 무심코 눌러봤다. [r = a(1 - sinθ)]‘...어?’정은의 손가락이 멈췄다. 이 수식, 익숙했다. 너무 익숙해서 순간 심장이 멈칫했다.댓글 첫 줄엔 진욱이 있었다.[극좌표 함수? 밤에 안 자고 뭐 하세요? 조 교수님?]조미진과 손태민은 말없이 ‘좋아요’만 눌렀다. 하지만 두 사람은 속으로 ‘다음 연구 주제가 광학 쪽인가?’ 생각하며 혼란스러워했다.아무도 몰랐다. 이 수식의 진짜 의미를.‘r = a(1 - sinθ)’, 하트곡선.‘설마 이게, 그거? 진짜 그거... 맞아?’정은은 손끝을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58화

    “그럼... 고백하기 전까지, 혼자서 그렇게 많이 고민한 거예요?”“응.”“어쩐지...”정은이 아주 작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뭐라고?” 재석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자, 정은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이젠 다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가요...”둘은 손을 꼭 잡고 복도로 향했다. 조용한 밤, 서로의 온기가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다.걷던 중, 재석이 문득 걸음을 멈췄다. 정은도 따라 멈춰 서며 돌아봤다.“왜요?”“정은아, 우리 지금... 사귀는 거 맞지?”정은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두 사람이 꼭 잡은 손을 살짝 들어 보였다.“그렇게 생각 안 해요? 조금 전부터 내가 ‘재석 씨’라고 부른 거 못 느꼈어요?”“혹시 지금... 꿈꾸는 거 아니지?”정은은 눈을 가늘게 뜨며 미소 지었다.“흠, 그렇게 말하는 거 보니까... 평소에도 꿈에서 날 자주 본 모양이네요?”재석의 몸이 순간 굳더니, 양 볼이 순식간에 빨개졌다.‘진짜 자주 꿨나 보다?’재석은 눈을 못 마주친 채, 그저 두 사람이 맞잡은 손만 바라보며 쑥스러운 듯 웃었다.“진짜 좋아.”‘정은이도, 나를 마음에 두고 있었구나.’‘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었구나.’같은 계단, 같은 복도, 수없이 함께 걸어온 길. 그동안은 늘 친구라는 이름으로, 앞서거나 뒤따르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 왔지만, 오늘은 처음으로, 손을 잡고 나란히 오르는 계단.정은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근데, 왜 나랑 은혁 씨한테 뭔가 있다고 생각했어요?”재석은 목소리를 낮추며, 살짝 눈을 피했다.“미안. 계산하러 나갔다가... 우연히 통화하는 거 들었거든.”정은의 눈이 살짝 커졌다.그리고 머릿속으로 자신이 통화 중 했던 말을 하나하나 되짚어봤다.‘공항에서 보자, 기대된다, Z시 출장... 뭐 이상한 말한 것도 없는데...?’그런데도 재석은 그걸 ‘여행 약속’으로 받아들였고, 그걸로 인해 혼자 삭이다가 결국 아래층에서 고백까지 해버린 거였다.“너희, Z시에 여행 간다고 했잖아.”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57화

    정은이 멍해 있는 사이, 재석이 한 걸음 다가섰다. 늘 부드럽고 점잖던 그가, 이 순간만큼은 전에 없던 강한 기운을 뿜어냈다. ‘이 남자... 이런 눈빛도 있었나?’정은은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등이 벽에 닿는 순간, 재석은 어느새 바로 눈앞에 와 있었다.정은이도 이제야 제대로 실감이 났다. 재석이 자신보다 훨씬 크다는 걸. 그리고 지금처럼 가까운 거리에서 내려다보면, 자신이 마치 남자의 품 안에 갇힌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도.재석이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이제 좀 알겠어?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그때 네가 학업이 먼저라고 했을 때, 난 받아들였어.”“그런데 장은혁한텐 기회를 줬지. 정은아...”그가 고개를 더 숙이자, 뜨거운 숨결이 그녀의 목선에 닿았다. 순간, 정은의 팔에 소름이 쫙 돋았다. “너, 나한테 너무 불공평해.”그 마지막 한 마디는 묘하게 서글픈 기운이 섞여 있었다.정은은 입술을 달싹이며 뭔가 말하려 했지만, 재석은 그녀의 여지를 주지 않았다.“알아, 내가 지금 어떤 입장인지. 묻고 따질 자격도 없고, 네가 누구를 좋아하든, 그건 네 자유라는 것도 알아.”“이 말 꺼냈다가, 우리 사이가 끝날 수도 있다는 것도 알고 있어. 근데... 계속 참다 보니까 알겠더라.”‘난... 그렇게까지 쿨한 사람이 아니었어.’“그래서 이제 참지 않기로 했어.”‘어떻게 되든, 그건 네가 정해.’그렇게 말한 재석은 고개를 숙인 채 멈췄다. 마치 판결을 기다리는 죄인처럼.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조용한 밤공기 속에서, 정은의 목소리가 아주 작게 울렸다.“이제, 제가 말해도 될까요?”“응...”“재석 씨.”정은은 처음으로 재석을 그렇게 불렀다.“고개 들어요. 나 좀 봐요.”재석의 어깨가 순간 굳어졌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그는 이미, 거절당할 각오까지 끝냈다.그런데 눈이 마주친 순간, 정은의 두 눈 속에서 재석이 본 건... 눈물이 아닌, 웃음이었다.억지로 짓는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56화

    “헤어졌다고요?”정은은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몰랐어?!”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진욱은 눈을 반짝이며 의자째로 다가오더니, 목소리를 낮추고 본격적인 ‘TMI’를 털어놓기 시작했다.“M시 출장 갔다 오고 며칠 안 돼서, 재석이가 바로 짐 싸서 수아를 내보냈다니까?”정은은 그 말을 듣고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재석과 수아 사이에 어떤 감정선이 있었는지, 그동안 몇 번 스쳐 지나갔던 장면들이 퍼즐처럼 빠르게 떠올랐다. 그녀의 표정은 담담했지만, 눈빛 속엔 미묘한 기류가 스쳤다.“아마 진짜 많이 좋아했나 봐. 그러니까 정리할 때도 그만큼 아프고, 오래 걸리는 거겠지. 조금만 시간 지나면, 태민이도 정리될 거야.”진욱은 이어서 말했다.“네.”정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대답했다.그 이후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남의 연애는, 들을 수는 있어도 깊게 얘기하지 말아야 해. 괜히 나서 봤자... 괜히 끼어든 꼴만 되니까.’...해가 지고, 붉은 노을이 건물 유리에 비치기 시작할 무렵. 정은은 마침내 작업을 끝냈다.진욱은 기다렸다는 듯 프로그램을 열고 기능 하나하나를 테스트했다.그리고 30초쯤 흐른 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다.“어어!! 복구됐어! 됐다! 돌아왔어! 다시 쓸 수 있어!!”미진도 덩달아 벌떡 일어나 양손을 번쩍 들었다.“살았다, 진짜!! 여태 손으로 데이터 입력한 거 생각하면... 이건 거의 기적이야!”진욱은 시계를 힐끗 보더니, 정은을 향해 말했다.“지금 이 시간까지 남아서 도와준 우리 정은이, 완전 수고 많았어! 조 교수...”“응...?”갑작스레 이름이 불리자, 재석은 몇 초간 멈칫하다가 고개를 돌렸다.진욱은 능청스럽게 말했다.“아니, 정은이가 이렇게 큰일 해줬는데, 감사 표시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적어도 밥 한 끼는 사야지.”“맞아요, 맞아요. 조 교수님, 이건 진짜 밥으로도 모자라요.” 미진이 곧장 거들었다.재석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55화

    대략 1년 전, 정은은 한동안 재석의 실험실을 빌려 쓴 적이 있었다. 그 일을 계기로 전진욱, 조미진 등과 인연이 닿았다.처음엔 서로 어색하고 낯설었지만, 몇 달이 지나면서 조금씩 가까워졌고, 지금은 가볍게 농담도 주고받을 만큼 편해졌다.그러던 어느 날, 진욱은 우연히 정은이 실험 데이터를 처리하는 속도를 보고 깜짝 놀랐다. 너무 빠른 게 아닌가 싶어서 슬쩍 물어봤더니, 정은은 코딩도 할 줄 아는 공대 만능 캐릭터였다. 그녀는 직접 짠 프로그램으로 데이터를 자동 정리하고, 다차원 분류와 정렬까지 가능하다고 했다.“와, 뭐야... 완전 반칙인데?”진욱은 결국 정은에게 부탁해 실험실 맞춤형 프로그램 하나를 따로 제작해달라고 했고, 그 이후, 데이터 정리는 그야말로 신세계를 맞이했다. 진욱은 쓸 때마다 감탄하며 말했다.“진짜... 정은이 덕분이야. 이게 사람을 살리네.”하지만 어제 그 기특한 프로그램이 갑자기 먹통이 됐다. 손태민이 고쳐보겠다고 덤볐지만, 결과는... 풍비박산이었다. ‘이젠 누가 손댔다간 진짜 박살 나겠어...’ 결국 정은에게 SOS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재석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혹시 오늘 시간 돼? 안 되면, 며칠 뒤도 괜찮고...]진욱은 훨씬 급했다. 말 그대로 살려달라는 마음이었다.[야, 오늘 안 데려오면... 나 여기서 바로 싸버린다! 진짜라고, 어?!]그는 어제 약 먹고 좀 괜찮아진 줄 알았건만, 밤새 배가 또 난리였다. 오늘 아침부터 실험실 화장실은 진욱의 전용이 되었다. 오전에만 6회 방문.그 말은, 그냥 협박 아니었다. 진짜 실현 가능성이 있었으니 말이다.정은은 상황을 듣고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시간 돼요. 지금 바로 갈게요.”[그래. 그럼 내가 정문 앞으로 갈게.]‘굳이 마중까진 필요 없는데...’ 뚝-정은이 전화를 끊으려던 찰나, 전화는 이미 끊겨 있었다. ...10분 뒤, 정은은 학교 정문 앞에서 재석과 마주쳤다. 두 사람은 실험실로 걸어가며 프로그램

  •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제954화

    “언니, 이건 굳이 우리 의견 물을 필요도 없지 않아요? 언니가 해볼 만하다고 생각하면, 무조건 가는 거죠. 저희한텐 뭐든 시키기만 하세요. 무조건 따라갈게요!”민지가 단호하게 말하자, 서준도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맞아요, 저흰 누나 믿고 가는 거예요. 결정은 누나가 해요.”정은은 그 말에 잠시 멍해졌다가, 결국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너희들... 나 그렇게 믿어도 돼? 나도 가끔 실수하거든?”민지는 마치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정은 언니가 실수했다면, 그건 100% 저랑 서준 오빠가 뭔가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뜻이에요.”“그건 좀 과장이지만...”‘그래도... 이런 믿음을 받는다는 게 참 따뜻하네.’세 사람은 그렇게 식사를 마쳤다.계산은 서준이 맡았고, 정은과 민지는 먼저 주차장으로 향했다. “언니, 먼저 가요. 전 서준이 데리러 갈게요.”“응? 굳이?”“우리 집이랑 방향이 같잖아요. 서준이는 차도 없으니까, 그냥 태워다 주는 거죠, 헤헤.”“그래, 알겠어. 그럼 조심히 가. 운전 천천히 하고.”“네. 언니도 잘 들어가요!”...두 ‘파트너’와 방향을 맞춘 정은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바로 준비에 들어갔다.자료 조사부터 시작해 ‘신소재 최적화 계획안’을 정리하고, 모든 내용이 빠짐없이 정리됐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확인했다.벌써 밤 10시. 정은은 핸드폰을 들고 조심스레 메시지를 보냈다.[장은혁 씨, 시간 돼요? 상의드릴 게 하나 있어요.]그 시각, 은혁은 거실 소파에 앉아 어머니인 황희숙 여사의 ‘진실 공방’에 시달리고 있었다.“너 외할아버지한테 전화 왔어. 오늘 도시락 들고 회사 갔다며? 근데 그냥 말도 없이 두고 사라졌다고 난리야. 게다가 누가 너랑 어떤 여자가 같이 있는 걸 병원 약국에서 봤다던데? 솔직히 말해봐. 너, 여자 친구 생겼지?”은혁은 억울함 가득한 목소리로 외쳤다.“아니 외할아버지는 왜 또 엄마한테 바로 전화해요? 진짜 너무하신다니까요...”“이 자식 봐라, 말버릇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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