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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뭔데 용서를 바라?
네가 뭔데 용서를 바라?
Author: 연등등

1 화

Author: 연등등
장례식을 마치고 조문객을 모두 보내고 나니 어느덧 밤 열 시가 넘었다.

고현아는 천근만근 같은 발걸음으로 집에 돌아왔다. 별안간 현관에 놓인 구두 한 켤레가 눈에 들어왔다.

일주일간 연락이 두절되었던 남편이 돌아온 것이다.

아버지의 죽음은 너무 갑작스러웠다. 임종을 앞둔 사흘간, 그녀는 남편 주강인에게 쉰 통이 넘는 전화를 걸었지만 전부 연락이 닿지 않았다.

병원에서 장례식장, 그리고 발인까지 친지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고현아는 진작 무너졌을 것이다.

아직도 그녀의 몸에는 장례식장의 향냄새가 짙게 배어 있었다. 집 안을 채운 차가운 삼나무 향과는 결코 섞일 수 없는 냄새였다.

녹초가 된 얼굴로 가방을 신발장에 내려놓고 슬리퍼로 갈아 신으며 안으로 들어서던 그때, 거실에는 주강인이 창가에 비스듬히 기대어 누군가와 통화 중이었다.

고현아는 걸음을 멈추고 그 모습을 가만히 응시했다. 남자의 목소리는 아주 낮았고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별안간 고현아의 입가에 씁쓸한 웃음이 번졌다.

‘통화 잘 되네. 난 또 휴대폰 잃어버린 줄 알았더니.’

이미 지칠 대로 지친 그녀는 말 한마디 섞기도 귀찮았다. 주강인이 왜 연락을 받지 않았는지는 더더욱 따져 묻기 싫었다.

다 부질없는 노릇이니까.

애초에 그와 결혼한 것은 순전히 그가 가진 의료 자원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떠난 이상 그런 건 이제 아무런 의미가 없다.

3년을 버틴 이 허울뿐인 결혼 생활도 이쯤에서 끝내야 했다.

고현아는 위층으로 올라가 씻고 그대로 쓰러져 잠들고 싶었다.

계단 세 번째 칸을 밟았을 때, 뒤에서 문득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디 갔다 이제 와? 왜 이렇게 늦은 거야?”

책망이 짙게 묻어나는 말투, 남자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고현아는 늘 규칙적이었다. 친구를 만나는 일도 드물었고, 퇴근하면 곧장 집으로 돌아와 남편의 저녁 식사 준비에 시간을 쏟았다.

아버지가 입원해 있을 때도 주강인이 퇴근하기 전엔 집안일을 완벽하게 마무리해 놓던 그녀였다.

현관의 정갈한 슬리퍼, 옷장에 다림질되어 걸린 셔츠, 매일 밤 9시 전까지 서재에 세팅해 두는 향초와 홍차까지.

그 모든 건 아버지의 치료를 부탁하기 위한 노력이었으나 정작 돌아온 결말은 무엇이던가.

애초에 예약해두었던 신경외과 전문의는 주강인의 지시로 독일로 떠나버린 상태였다.

사실 고현아 아버지의 병세는 갑작스러운 악화가 아니었다. 줄곧 위태로운 상태였음에도 주강인은 그녀와 상의 한마디 없이 그 의사를 다른 곳으로 보냈다. 주강인에게 그쪽이 우선이니까.

고현아는 발걸음을 멈췄지만, 뭐라 대답하지 않았다.

등 뒤로 발소리가 가까워지더니 훤칠한 체구의 남자가 그녀를 앞질러 계단을 막아섰다.

“독일 수술은 아주 성공적이었어. 조만간 홍 교수님이 두천으로 돌아올 테니 그때 네 아버지 수술 일정을 잡을 거야.”

고현아는 양옆으로 늘어뜨린 손끝을 가늘게 떨며 움켜쥐었다. 가슴 속 사무치는 슬픔을 그림자 뒤로 숨긴 채 그녀가 무미건조하게 답했다.

“그럴 필요 없어요.”

주강인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가 그저 연락 문제로 투정을 부린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남자는 짐짓 인내심을 짜내며 덧붙였다.

“지난 며칠 동안 은지를 계속 돌봐야 했어. 은지 아버님 수술 때문에 그 아이가 많이 불안해해서 말이야.”

그가 말하는 은지란 주씨 가문과 세대교류가 깊은 성씨 가문의 둘째 딸 성은지였다.

핑계치고는 제법 그럴싸했다.

고현아는 눈을 내리깔았다. 기가 차서 헛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녀가 없었다면 성은지는 진작 주강인의 곁에 당당하게 서 있었을 것이다.

성은지의 불안을 달래주기 위해서라면 이 남자는 일주일 내내 연락을 끊고 잠적하는 것마저 주저하지 않았다.

“알았어요.”

고현아는 기운 없는 목소리로 대답하고는 그를 피해 위로 올라가려 했다.

그때 주강인이 앞을 가로막으며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감싸 쥐었다.

“이제 다 해결하고 곧바로 달려왔잖아.”

‘곧바로?’

그녀는 실소가 새어 나왔다.

“그럼 지금 고맙다고 해야 하나요?”

성은지를 일주일이나 보살피고 돌아와 그녀에게 ‘곧바로 달려왔다’라는 식의 변명을 건네는 남자에게 고맙다고 해야 할까?

고현아의 반응에 주강인의 미간이 더욱 깊게 구겨졌다. 참을 수 없다는 듯 그의 입에서 불만이 터져 나왔다.

“너 오늘 대체 왜 이래? 왜 이렇게 삐딱하게 구냐고? 설명했잖아! 도대체 뭐가 불만인 거야?”

삐딱하다니...

고현아는 웃음이 터질 뻔했다.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조문객을 모두 배웅하기까지 사흘이 걸렸다. 이토록 큰일을 치르는 동안 주강인은 그 어떤 소식조차 듣지 못했다.

아버지가 입원했던 병원마저 주성 그룹 소유였는데도 말이다.

비밀 결혼이라 할지라도 그가 정말 몰랐을까? 매일 옆에서 그를 수행하는 비서는 대체 뭘 한 걸까?

생각해보니 답은 간단했다. 그 비서들조차 고현아의 일은 주강인에게 보고할 급이 아니라고 판단했던 모양이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주강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모든 게 덧없게 느껴졌다.

마침내 그녀가 옅은 숨을 내뱉듯 나지막이 말했다.

“강인 씨, 우리 이혼해요.”

남편 없는 과부 같은 이 결혼 생활에 신물이 났고 그저 남자에게 매달려 사는 일상에도 진절머리가 났다.

그의 비위를 맞추려 애쓰던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도 혐오스러웠다.

한편 주강인은 말의 의미를 더듬는 듯 멍하니 그녀를 바라봤다. 차가운 늪 같은 두 눈이 그녀를 날카롭게 훑었다.

“고작 전화 몇 통 안 받았다고 이러는 거야?”

고현아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눈가에 남아 있던 마지막 온기마저 사그라들었다.

“네, 맞아요.”

덧붙일 말 따위 없었고 입씨름할 기운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그녀는 앞을 가로막은 주강인을 밀치고 제 갈 길을 가듯 계단을 올랐다.

“생각 잘해! 나를 떠나서 네가 어떻게 살아갈 건데? 그 비싼 아버지 병원비를 감당할 수나 있겠어?”

계단 모퉁이에서 고현아가 걸음을 멈췄다.

주강인은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실눈을 뜨고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

“방금 한 말은 안 들은 거로 할게. 가서 쉬어.”

계단은 어두웠지만 고현아는 남자의 눈에 담긴 감정을 단번에 읽어냈다.

그건 바로 경멸, 상위 포식자가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을 내려다보는 철저한 경멸이었다.

그때 주강인의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 그는 발신자를 확인한 뒤 화면을 끄고는 뒤돌아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고현아는 손톱이 손바닥에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쥐었다. 멀어지는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울음을 삼켰다.

“이혼합의서는 조만간 작성해서 퀵으로 사무실에 보낼게요.”

그 말에 주강인의 발걸음이 잠시 멈췄지만, 곧 다시 멀어졌고 몇 초 뒤 현관문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거실에는 다시 정적만이 감돌았다. 자동차 엔진 소리가 멀어지더니 이내 사라졌다.

고현아는 힘이 풀려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대리석 바닥의 냉기가 뼛속까지 파고들었지만, 심장 속의 한기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별안간 휴대폰이 진동했는데 해외에 있는 절친 도지혜였다. 아버지의 장례식에 오지는 못했지만, 사람을 보내 모든 것을 챙겨주던 친구였다.

“현아야, 내가 사람 시켜서 다 알아봤어. 이혼 얘기는 언제 꺼낼 거야?”

고현아의 손끝이 저렸다. 잠시 말을 고르던 그녀가 답했다.

“방금 말했어.”

그녀는 웅장한 저택을 둘러보았다. 지난 3년간, 이곳의 가구 하나하나를 수없이 닦아왔다.

주강인이 조용한 걸 좋아한다기에 가정부도 없이 청소 업체를 제외한 모든 가사 일을 스스로 도맡았었다.

한때는 이곳을 ‘내 집’이라 여기며 순진하게 살았지만, 지금은 그저 낯선 공간일 따름이었다.

따지고 보면 자업자득인 것을. 스스로 몸을 낮췄으면서 남자가 자신을 귀하게 여겨주길 바랐던 대가였다.

상대편에서 그녀의 예상치 못한 속도에 놀란 듯 떠보듯이 되물었다.

“그래서... 주강인이 순순히 응했어?”

고현아가 대답했다.

“그 사람 의견 따윈 중요하지 않아.”

이토록 단호한 태도에 도지혜도 더 캐묻지 않았다. 지난 3년간 고현아가 겪은 비굴함을 옆에서 지켜봐 왔고 더욱이 그녀의 아버지를 대하는 주강인의 태도는 결코 용서할 수 없었기에 이혼은 천 번 만 번 찬성이었다.

하지만 주강인이 순순히 물러날 것 같지는 않았다. 그에게 이혼은 손해뿐인 장사니까.

“이혼 얘기 꺼냈으면 그만 나와야지. 원더힐 열쇠 너한테 있잖아. 이틀 안에 짐 뺄 거면 말해, 사람 보내서 도울게.”

고현아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왠지 모르게 코끝이 찡해지는 순간이었다.

“고마워, 지혜야.”

이에 도지혜가 웃으며 받아쳤다.

“그런 말 마. 내가 있는 한 너한텐 언제든 돌아올 자리가 있다는 것만 기억해 둬.”

도지혜가 한숨을 쉬며 진심 어린 충고를 건넸다.

“더 이상 아무런 가치 없는 관계에 널 가두지 마, 현아야. 너라는 빛과 자존감을 잃게 만드는 건 그 무엇도 가치가 없어!”

뜨거운 눈물이 대리석 바닥 위로 툭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고현아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참, 깜빡할 뻔했네. 고하준이 귀국한 것 같아.”

고하준!

고현아는 휴대폰을 쥔 손끝에 다시금 힘을 주었다. 그녀의 눈동자에 미묘하고 복잡한 감정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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