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강인은 밤새 들어오지 않았다.
오전 아홉 시, 고현아의 카톡으로 파일 하나가 전송되었다.
[현아 씨, 이혼합의서 작성했습니다. 검토 후 수정할 부분이 있으면 말씀해주세요.]
그녀는 곧바로 노트북을 열고 문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읽어 내려갔다.
[이상 없습니다. 고마워요, 진 변호사님.]
프린터에서 종이가 느릿하게 밀려 나왔다. 정리하고 스테이플러로 찍고 서명하기까지의 과정은 막힘이 없었다.
펜 뚜껑을 닫는 순간, 고현아는 마음 깊은 곳 어디선가 묵직한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었다.
그녀는 곧장 휴대폰을 꺼내 퀵서비스를 불렀다. 정오가 되면 이혼합의서는 주성 그룹 본사, 주강인의 사무실로 정확히 배달될 것이다.
샤워를 마치고 옷을 갈아입은 뒤 고현아는 짐을 싸기 시작했다.
다만 그녀의 짐은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고작 캐리어 하나에 다 담았으니까.
삼 년 전, 이 집에 들어올 때도 캐리어 하나였는데 갈 때도 마찬가지였다.
나름대로 유종의 미를 거두는 셈일까?
거울 속의 얼굴은 퀭했지만 늘 미간을 찌푸리게 했던 그늘은 사라지고 없었다. 제대로 자지 못한 탓에 피곤한 기색은 역력했으나 표정만큼은 한결 가벼워 보였다.
모든 게 곧 끝날 것이다.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데 늦었을 때란 없는 법.
오전 열 시 반, 그녀는 캐리어를 끌고 별장을 나섰다.
마당에서 호스로 꽃에 물을 주던 청소부가 그녀를 보더니 반갑게 인사했다.
“사모님, 출장 가시나 봐요?”
고현아는 옅은 미소만 지을 뿐 가벼운 목례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청소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평소 같으면 그새를 못 참고 ‘향이 너무 강해요’, ‘이 장식품은 위치가 영 별로네요’라며 사사건건 잔소리를 늘어놓던 사모님이었는데 오늘은 웬일인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퀵서비스 직원에게 서류 봉투를 건네고 고현아는 곧장 차를 몰아 원더힐로 향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녀는 단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
주성 그룹 대표이사실.
주강인은 막 끝난 국제회의에서 벗어나 의자에 기대어 잠시 눈을 붙였다.
해외 사업에 문제가 생겨 밤새 회사로 달려와 새벽부터 일했던 터라 머리가 지끈거렸다.
또한 열 시간 가까이 끼니를 거른 탓에 배가 슬슬 아파왔다.
참, 고현아 덕에 위장이 너무 편해진 게 문제였다.
주강인은 원래 일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워커홀릭이었다. 잦은 술자리와 불규칙한 식사로 그의 위는 이미 성한 곳이 없었다.
그 사실을 안 고현아는 삼 년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식단에 맞춰 위를 보호하는 음식을 해다 바쳤다. 또한 약을 넣은 보양식도 잊지 않았다.
그가 새벽에 퇴근해도 보온 통 속의 죽은 항상 적당한 온기를 유지하고 있었다.
최근 출장이 잦고 업무가 몰린 탓에 위가 탈이 난 모양이다.
문득 수행비서 류태현이 서류 봉투를 들고 사무실로 들어왔다.
“대표님, 사모님께서 퀵을 보내셨습니다.”
주강인은 시선 한번 안 올리고 미간을 문지르며 툭 내뱉었다.
“거기 놔둬.”
류태현이 봉투를 내려놓고 나가려는데 남자가 그를 불러 세웠다.
“잠깐.”
주강인이 졸음 가득한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렸다. 목소리는 밤샘 작업으로 살짝 잠겨 있었다.
“현아한테 전화해서 해물죽 끓여오라고 해.”
그는 잠시 멈칫하더니 뭔가 생각난 듯 덧붙였다.
“아, 그리고 병원에 연락해서 홍 교수님 두천 오면 바로 합동 진료 잡고 수술 일정도 당겨달라고 전해.”
그 말을 내뱉는 순간, 어젯밤 고현아의 차가운 대답이 떠올랐다.
“그럴 필요 없어요.”
남자의 미간이 확 좁혀졌다.
요 며칠 바쁘게 몰아치느라 그녀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잠시 생각하던 주강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가서 괜찮은 장신구 하나 골라 놔. 저녁에 들어갈 때 가져가게.”
요즘 회사 일로도 충분히 바쁘고 정신없어서 제발 고현아라도 적당히 했으면 싶었다.
한편 류태현은 그의 말에 어리둥절해져서 의아한 눈빛으로 변했다.
‘합동 진료라니요? 사모님 아버님은 이미 돌아가셨잖아요.’
“그렇지만 사모님 아버님은 이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책상 위에 놓였던 주강인의 휴대폰이 울렸다.
해외에서 걸려온 전화라 남자는 표정을 굳히며 류태현에게 나가보라고 손짓했다. 곧이어 통유리창 앞으로 다가가 유창한 영어로 대화를 시작했다.
밖으로 나온 류태현은 대표이사실 문을 닫으면서 혀를 찼다.
“대표님이 요즘 확실히 과로하셨나 보네.”
좀 전의 당부를 떠올리며 그는 일단 고현아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몇 번 울리더니 이내 뚝 끊겼다. 류태현은 곧장 본가에 전화를 걸었는데 도우미가 받고서 사모님이 출장을 가셨다고 전했다. 그제야 류태현도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대표님, 아직 식사도 못 하셨을 텐데. 괜히 불똥이 튀기 전에 여울정 해물죽이랑 밑반찬 몇 가지 주문해 드려야지.’
...
주강인이 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아홉 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집 안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잠겨 빛 한 점 새어 나오지 않았다.
그는 걸음을 옮기며 넥타이를 풀어헤쳤고 팔에 걸쳤던 재킷은 현관 수납장 위에 툭 던져두었다.
불을 켜지 않은 집 안에는 오직 그의 발소리만이 나지막하게 울려 퍼졌다.
주강인은 미간을 찌푸리며 벽에 있는 스위치를 눌렀다. 이 낯선 냉기가 그는 못내 불편했다.
전에는 고현아가 아무리 출장을 가도 집 안 어딘가에는 꼭 조명을 켜두곤 했으니까.
주강인이 어둠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그녀는 누구보다 잘 안다.
다만 오늘은 거실을 둘러보니 썰렁하기 그지없었다. 씻어놓은 과일도, 냉장고 속 식재료도 보이지 않았다.
남자는 카톡을 열어 고현아의 프사를 찾았다. 익숙한 그녀의 닉네임 옆에 작게 뜬 [방해 금지] 아이콘이 눈에 띄었다.
대화창의 마지막 기록은 사흘 전이었다.
[왜 전화를 안 받아요?]
[집에 올 수 있어요?]
[대체 언제 수술 일정을 잡을 거예요?]
답장을 받지 못한 채 취소된 수많은 부재중 통화 기록까지 고스란히 나열되어 있었다.
그 당시 성은지 아버지의 상태가 워낙 위급했던 터라 주강인은 그녀의 투정을 받아줄 여력이 없었다.
이미 확인해 본 결과, 고현아의 아버지는 상태가 줄곧 안정적이었고 결코 서두를 상황이 아니었다.
대화창을 더 위로 올려보았지만, 내용은 하나같이 그녀의 일방적인 메시지들이었다.
자신이 인터뷰한 내용을 공유하고, 별장 정원에 핀 장미꽃 사진을 보내고, 어떤 과일을 더 좋아하는지 묻고, 출장길에 추울까 봐 옷을 챙겨 입으라는 당부까지. 심지어 여행 가방 어디쯤 위장약을 넣어두었는지도 세세하게 일러두었다.
다만 주강인은 그저 알겠다고 대답하거나 읽씹이 대다수였다.
매일 보는 사이인데 굳이 이런 영양가 없는 질문에 일일이 대꾸하며 에너지를 낭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선물 꾸러미를 식탁 위에 내려놓고는 물 한 잔을 따랐다. 그러고는 잠시 고민하다 휴대폰 화면에 텍스트를 입력했다.
[출장은 잘 되어가? 언제 끝나? 돌아오면 네가 좋아하던 그 레스토랑에 가자.]
잠시 멈칫하던 주강인은 어쩐지 제 말투가 아닌 것 같아 싹 다 지워버리고 다시 입력했다.
[거긴 좀 어때? 출장은 며칠 정도 걸려? 언제쯤 돌아와?]
또다시 지우는 이 남자...
[언제 돌아와?]
결국 그는 이 짧은 문구만을 전송했다.
잔에 담긴 물이 완전히 식을 때까지 휴대폰은 묵묵부답이었다.
주강인은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어 황급히 전화를 걸었다. 세 번의 연결음 끝에 통화가 끊기고 이어 몇 차례 더 시도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위층으로 향했다. 드레스룸을 살펴보니 고현아의 옷과 가방, 장신구들이 여전히 가지런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화장대 위 화장품들도 그대로였다. 눈에 띄지 않는 자잘한 물건 몇 개를 제외하면 평소와 다를 것 하나 없는 일상의 풍경이었다.
그제야 남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현아 어디 있는지 알아봐.”
전화도 안 받고 문자도 무시하다니.
대체 언제 이렇게 변한 걸까?
휴대폰 너머로 류태현이 멈칫했다.
“사모님 출장 가신 거 아니었나요?”
“그러니까 그게 어딘지 알아내라고!”
주강인의 목소리는 차갑고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억눌린 짜증이 역력한 투였다.
이에 상대방은 곧바로 대답했다.
“회사 측에 확인해 봤는데 최근 직원들 중에 출장 일정이 잡힌 사람은 없다고 합니다. 사모님 이동 경로도 살펴봤지만 티켓을 예매한 기록이 전혀 없어요.”
류태현이 머뭇거렸다.
“아마도 사모님 아버님 일로 마음이 상하셔서... 잠시 친구 집에 간 게 아닐까 싶습니다.”
사모님이 옹졸하게 구실 분은 아니지만, 이번 일은 확실히 대표님이 무심했다. 가족의 생사가 달린 문제인데 그렇게 독단적으로 결정해 버렸으니 화를 내는 건 고사하고 당장 이혼하자고 해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물론 류태현은 차마 이런 말까지 입 밖에 꺼낼 순 없었다. 간이 배 밖에 튀어나온 게 아닌 이상 대표님 앞에서 어찌 그런 소리를 할 수 있겠는가.
대표님이 한동안 말이 없자 류태현이 조심스레 덧붙였다.
“대표님, 이참에 사모님 며칠 동안만이라도 혼자만의 시간을 갖게 하시는 게 어떨까요? 마음이 풀리거든 그때 다시 사과하는 게...”
별안간 주강인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가까스로 억누르며 그가 쏘아붙였다.
“너 이번 달 보너스 없을 줄 알아.”
류태현은 말문이 턱 막혔다.
전화를 거칠게 끊어버린 주강인의 얼굴은 흙빛으로 변해 있었다.
‘나보고 사과를 하라고? 투정도 정도껏 부려야지 버릇을 아주 잘못 들였네 이거! 오냐오냐했더니 눈에 뵈는 게 없나 봐.’
그는 답장이 없는 대화창을 노려보며 끓어오르는 화를 주체하지 못했다.
‘냉전으로 대응하겠다는 거야? 좋아! 어디 한번 해보자는 거지.’
주강인은 한 손으로 허리를 짚고 다른 손은 휴대폰을 부서지라 쥐고 있었다.
[네가 뭘 잘못했는지 깨달으면 그때 다시 연락해.]
텍스트를 입력하는 손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빨랐고 메시지를 전송한 뒤에는 휴대폰을 침대에 던져버리고 욕실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