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예전에도 사람들이 오늘처럼 엄마한테 그랬어요?” 심태하는 심미연의 목을 꼭 끌어안으며 애틋하게 물었다. 그는 엄마가 너무나 안쓰러웠다. 과거에 그 나쁜 아빠와 함께했을 때 엄마가 얼마나 많은 서러움을 겪었을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심미연은 순간 놀라 살짝 붉어진 눈으로 심태하의 얼굴을 바라보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 “아니야.” 사실 문소영이 그녀에게 차가운 태도를 보인 건 주로 가족 모임에서였고 평소엔 마주칠 기회조차 없었다. 문소영이 그녀를 괴롭히고 싶어도 기회가 없었던 셈이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강지한이었다. 강지한은 언제나 냉당했고 심미연은 그의 차가운 태도에 익숙해질 수밖에 없었다. 지금 돌아보면 그 시절의 자신은 정말 강했던 것 같다. 그렇게 힘든 나날들도 다 버텨냈으니까.“나중에 그 사람이 또 엄마한테 그러면 바로 경찰에 신고해요. 가만두지 말고 본때를 보여줘야죠. 엄마가 만만한 줄 알면 안 돼요.” 심태하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차가운 눈빛으로 단호하게 말했다. 그 모습은 강지한과 너무나도 닮아 있었다. 그 순간 심미연의 가슴은 철렁 내려앉았다. ‘태하가 이렇게 어린 나이에 강지한을 미워하고 있다니...’ ‘나랑 강지한 사이의 문제가 태하에게 너무 큰 상처를 준 걸까?’‘아직 어린 아이인데 이렇게 마음에 증오를 품고서 제대로 성장할 수 있을까?’ 심미연은 처음으로 자신이 잘못한 건 아닌지 깊이 반성했다. ‘이대로는 안 되겠어. 강지한과 진지하게 얘기할 기회를 만들어야 해.’ 비록 두 사람의 관계는 끝났지만 적어도 아이만큼은 사랑이 가득한 환경에서 자라도록 해야 한다. 그게 심태하를 위한 길이니까.“엄마, 걱정 마세요. 제가 빨리 자라서 엄마를 지켜줄게요. 누가 엄마를 괴롭히면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심태하는 살짝 붉어진 심미연의 눈을 바라보며 속으로는 밥도 많이 먹고 고기고 많이 먹어 빨리 자라겠다고 다짐했다. 심미연은 그런 아들의 말에 가슴이 아려
심미연은 심태하의 작은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조용히 물었다. “태하야, 너는 상미 아빠를 싫어하면서 왜 상미는 좋아하는 거야?” 심태하는 고개를 살짝 갸웃거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처음 봤을 때부터 지켜주고 싶었어요. 내가 좋아하는 장난감도 간식도 다 주고 싶고... 그냥 좋아요.”아직 세 살밖에 되지 않은 아이는 마음속의 감정을 더 이상 말로 표현하지 못했지만 그 순수한 진심은 고스란히 전해졌다. 심미연은 아들의 천진난만한 모습에 가슴이 뭉클해져 그저 대견하다는 듯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어쩜 이렇게 귀엽고 사랑스러운 말을 할 수 있지?’그때 핸드폰 벨소리가 울리면서 심미연은 하려던 말을 꾹 삼켰다. 전화를 받자 부드럽고 상냥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심미연 씨, 남편이 빠르게 회복해서 오늘 오후에 퇴원했어요. 저녁에 식사 대접하고 싶은데 시간 괜찮으세요?] 목소리의 주인은 며칠 전 심미연이 구해준 남자의 아내였다. 원래는 주말에 식사를 대접하려 했지만 일이 예상보다 빨리 진행된 모양이었다. [오늘 바쁘시면 다른 날로 조정해도 괜찮아요.] 여성이 덧붙였다. 심미연은 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미소 지었다. [아니요. 오늘 괜찮아요. 장소만 알려주시면 돼요.] [네. 그럼 이만 끊을게요. 이따 뵐게요.] 전화를 끊고 심미연은 전에 조사했던 그 남자의 신분이 떠올랐다. 군부대 고위 간부로 젊은 나이에 이미 수많은 전공을 세운 인물. 이런 인연이라면 당연히 잘 관계를 맺어야 했다.“엄마, 오늘 약속 있어요? 아니면 제가 택시 타고 아빠 회사에 가서 기다릴까요?” 심태하는 배려 깊게 물었다. “엄마가 널 집에 데려다줄게. 요즘 아빠가 바빠서 시간 맞추기가 힘들어. 너도 아빠 사무실에 가면 심심할 거야.” “알겠어요.” 심미연은 아이에게 안전벨트를 채워주고 운전석에 올라 차를 몰고 집으로 향했다. 같은 시각 VIP 병실.강상미는 창백한 얼굴로 병상에 누워 있었다. 기운이 없어보이
문소영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그가 가진 차가운 얼굴에 질투가 일었다. “방금 임지혜 씨한테 전화했어. 지금 식당으로 가고 있대. 너도 지금 가는 게 어때?” 그녀의 의도는 명백했다. 강지한에게 새로운 여자를 소개하고 싶었던 것이다. 심서연은 이미 죽었고 돌아올 일은 없었다. 강상미는 엄마가 필요했다. 강지한이 차갑게 얼굴을 굳히자 문소영은 그가 거절할 것이라 확신한 듯 먼저 말을 꺼냈다. “너 전에 분명히 약속했잖아.” 그 말에 강상미가 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 상미 새엄마 찾으러 가는 거예요? 저는 싫어요.” 문소영은 분노가 치밀어 올라 강상미를 더욱 강하게 노려보며 말했다. “강상미, 너는 어른들 일이 뭔지 모르면서 왜 끼어들어. 입 좀 다물어.” ‘이 아이는 그때 죽였어야 했어.’ ‘강지한에게 맡기지 말았어야 했다고.’ ‘따지고 보면 심서연이 제일 멍청해.’ ‘3년이나 강지한 옆에 있으면서 그 침대 한 번 못 차지하다니.’ ‘그렇게 쓸모없는 여자를 왜 썼을까.’ 강상미는 그 말에 겁을 먹고 눈물을 터뜨렸다. 강지한은 급히 강상미를 안아 올리고 부드럽게 달래며 말했다. “울지 마. 괜찮아. 아빠 여기 있어.” 강상미는 그의 목을 꽉 붙잡고 문소영의 시선을 피하며 눈물을 흘렸다. 강지한은 얼굴을 굳히고 차가운 눈빛으로 문소영을 쏘아보며 말했다. “다시는 여기에 발도 들이지 마세요.”강지한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비록 강상미가 친딸은 아니지만 그 아이는 그가 데려다 키운 딸이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 함께 지내면서 애정이 없을 리 없었다. 그런데 왜 문소영은 강상미에게 그렇게 차갑고 냉정한 태도를 보이는 것인지 그 이유를 도저히 알 수 없었다. 문소영은 잠시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상미는 내 손녀야. 내가 상미를 보러 오는 것도 당연한 일이지. 왜 날 못 오게 하는 거야?” 그녀는 강지한이 강상미를 소중하게 여긴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유치원에서 더 많은 친구들을 사귈 수 있고 혼자 외롭게 지내는 일도 없을 거야.’ “아빠, 빨리 오빠 엄마한테 전화해요.” 강상미는 작은 목소리로 강지한을 재촉했다. 아이는 이미 그들과 만날 생각에 들떠 있었다. 강지한은 고개를 끄덕이며 핸드폰을 꺼내 심미연의 번호를 눌렀다. 그 번호는 성무진에게 부탁해서 구한 업무용 번호였다. 개인 번호는 아니었다. 전화가 울리던 중 아무도 받지 않았다. 강지한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가 심미연이 전화를 받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을 때 전화기 너머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야?][상미가 태하랑 놀고 싶다고 해서 지금 네 집에 보내려고.] 그의 말투는 단호하고 거절할 여지가 없어 보였다. [저녁 약속 있어. 내 아들도 집에서 가정부가 돌보고 있고 네 딸은 몸이 안 좋다며? 집에서 쉬게 해. 무슨 일이 생기면 누가 책임져?] 심미연은 차분한 목소리로 거절했다. ‘강지한, 진짜 한심하다.’ ‘자기 딸이 아프면 자기가 돌봐야지. 왜 나에게 떠넘기려는 거야? 진짜 웃기지도 않네.’[약속 취소하고 집에서 내 딸 좀 돌봐.]강지한은 마치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말했다. ‘여자는 집에서 남편과 자식을 돌봐야지. 왜 밖에서 나돌며 얼굴을 내밀고 다니는 건데?’ 심미연은 그 말을 듣고 입술이 비틀리며 비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네 딸에겐 엄마가 있는데 왜 나한테 맡기려고 해? 나는 그저 남인데, 무슨 얼굴로 나한테 명령하는 거야?] ‘강지한, 자기가 뭐라도 되는 줄 알는 거지?’‘한마디 반박도 없으니 자기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 줄 착각하는 모양이네.’[심미연, 너무 냉정하게 굴지 마.]강지한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하며 분노가 서서히 감돌았다. ‘심미연이 내 딸을 돌보는 걸 거절한다고?’ ‘상미가 이 사실을 알면 얼마나 상처받을까...’“아빠, 아줌마 시간이 없으신 거예요? 그럼 저는 그냥 병실에 있을게요.” 강상미는 아주 똑똑했다. 강
강지한은 핸드폰을 손에 쥔 채 화면을 가볍게 스치며 전화를 끊었다. 그 순간 주변의 모든 소음과 혼란이 마치 사라진 듯했다. 그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단단해지며 깊어졌고 품에 안은 어린 아이를 바라보며 입가에 부드럽고 따뜻한 미소가 스쳤다. “상미야, 아빠가 지금 오빠 엄마한테 데려다줄게. 괜찮지?” 방금 전 그는 문득 깨달았다. 심미연은 그를 거절할 수도 있고 그를 싫어할 수도 있지만 강상미에 대한 사랑만큼은 진심이었다. 강상미가 무엇을 요구하든 심미연은 결국 다 들어줄 것이다. 이제 그는 매일 딸을 핑계로 심미연을 찾아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기분이 한층 나아졌다. 예전엔 심미연이 곁에 있을 때 그녀가 그저 귀찮고 피하고 싶기만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녀의 얼굴을 보고 싶다면 아이 핑계로만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어이없으면서도 웃기게 느껴졌다. 강상미는 아빠의 말을 듣고 눈을 반짝이며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그 눈빛은 마치 밤하늘에서 가장 밝은 별처럼 반짝였다. 작은 손은 아빠의 목을 꽉 감으며 얼굴에는 억누를 수 없는 기쁨이 가득했다. “정말요? 빨리 가요.”아이의 목소리엔 순수한 기쁨과 흥분이 묻어 있어 마치 세상 모든 것이 그 순간 빛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강지한은 딸을 더 꼭 안아주며 미소를 지었다. “그래. 빨리 가자.” 강상미는 아빠의 품에서 행복하게 웃으며 작은 손을 공중에 가볍게 치면서 그 순수하고 진심 어린 기쁨이 주변의 모든 공기를 감동시키는 듯 퍼져 나갔다. 바로 그때 엘리베이터 문이 천천히 열리며 ‘딩’하는 가벼운 소리가 울렸다. 마치 모험을 떠나려는 아빠와 딸의 여정을 위한 서곡처럼 들렸다. 강지한은 단호한 걸음으로 엘리베이터에서 나왔다. 그의 걸음은 묵직하고 강인했으며 품에 안은 강상미는 더욱 꽉 껴안으며 아빠의 품에서 세상의 모든 안정을 느끼는 듯했다. 문소영은 급히 병실을 빠져나왔지만 눈앞에는 이미 아무도 없었다. 공기 속에는 여전히 강지한과 강상미 부녀의
심미연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으며 다급하게 말했다. [주소 보내줘요. 바로 갈게요.] 전화를 끊고 그녀는 곧바로 돌아서서 심태하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빠르고 또박또박 말했다. “태하야, 엄마는 지금 당장 바다에 가야 해. 긴급한 상황이 생겼어. 조금 있으면 상미랑 상미 아빠가 올 텐데 태하가 잘 맞이해줄 수 있지?” 심태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엄마. 얼른 다녀오세요.”아이의 대답을 들은 심미연은 망설임 없이 방을 나섰다. 밤은 어둡고 깊었다. 심미연은 차를 몰아 텅 빈 도로를 질주했다.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은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았지만 그녀의 시선은 어디에도 머물지 못했다. 심장은 차의 속도에 맞춰 점점 더 빠르게 뛰었고 머릿속에는 심서연의 과거가 끊임없이 떠올랐다. 심서연을 미워했지만 그녀의 죽음을 바란 것은 아니었다. 짭짤한 바닷바람이 얼굴을 강하게 스쳤다. 바닷가에 도착했을 때 심미연의 눈앞에는 깜빡이는 경고등과 몰려든 인파가 보였다. 그 순간 그녀의 가슴속에 남아 있던 작은 희망은 차가운 불빛 아래에서 서서히 꺼져갔다.심장이 쿵쿵 뛰고 발걸음은 무겁게 내딛어졌다. 바람은 마치 울부짖듯 불었고 자연마저 이 순간을 슬퍼하는 듯했다. 심미연은 온 힘을 다해 바다로 달려갔다.한 걸음 한 걸음이 무겁고 불안한 짐처럼 느껴졌고 마침내 붉게 물든 바다를 마주했을 때 모든 것이 현실로 다가왔다. 해변에는 차가운 파도에 잠긴 여인이 조용히 누워 있었다. 파도가 그녀의 몸에 닿을 때마다 마치 생명이 사라졌음을 고백하는 듯한 고요함이 느껴졌다. 심미연의 발걸음이 멈췄다. 시간이 멈춘 듯 모든 것이 정적에 잠겼다. 천천히 다가가자 점차 또렷해지는 심서연의 창백하고 고요한 얼굴이 보였다. 바다에 젖은 머리카락이 얼굴에 붙어 예전의 생기와 활력을 모두 잃은 모습이었다. 심미연의 가슴은 손에 움켜쥔 듯 조여들었고 숨조차 쉬기 어려웠다. 그녀는 그 아픔에 짓눌려 발이 땅에 박힌 듯 움직일 수
심미연은 순간 얼어붙었지만 이내 조은하의 손목을 거칠게 움켜쥐고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좋은 마음으로 알려줬더니 되레 나한테 죄를 뒤집어씌우세요? 저를 비난하기 전에 서연이가 최근에 무슨 일을 했고 누구를 만났는지나 제대로 생각해보시죠.”이게 바로 그녀의 어머니였다. 평생 단 한 번도 자신을 사랑해준 적 없는 사람. 조은하의 눈과 마음에는 오직 심서연만이 존재했다. 어릴 때부터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애지중지하던 보물같은 존재. 심서연이 사라졌을 때 조은하에게는 인생에서 가장 깊은 상처이자 후회로 남았고 심미연은 그 상처의 원흉으로 낙인찍혔다. 마치 심서연의 복수를 위해 살아가는 존재처럼. 그러다 심서연을 다시 찾은 날부터 그녀는 그 집에서 완전히 외면당한 타인이 되었다. 결혼 후 강지한이 집에 돈을 보내준 덕분에 폭력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그녀의 가슴 깊은 곳에는 부모에 대한 원망이 서려 있었다. 어릴 때부터 그녀가 살아온 것은 삶이 아니라 끝없는 고통의 연속이었다. 예전엔 상처받고 눈물 흘렸지만 이제는 그런 감정조차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들은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제 그녀도 그들을 낯선 사람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낯선 사람에게 마음 아파할 이유는 없으니까.조은하는 심미연의 차가운 표정에 압도당해 순간 얼어붙었다. “분명히 심동현이야.” 그녀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얼마 전 심서연이 심동현에게 칼을 휘두른 일이 있었다. 심동현은 그 일로 심서연을 증오했고 그가 심서연에게 손을 썼을 가능성도 충분했다. 심미연은 미묘하게 눈썹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확실해요?” 심동현이 밖에서 내연녀와 아들을 키우며 심서연을 눈엣가시처럼 여긴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정말 서연이를 죽일 만큼 잔인할까?’ “확실해...” 조은하는 말끝을 흐리며 눈앞에 서 있는 심미연을 의식하곤 입을 닫아버렸다. “내가 왜 너한테 이런 걸 말해야 하지? 심미연, 이 못된 것아. 내 손 놔.” 조은하는
“심미연 씨, 살려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남자가 한 걸음 다가오며 고마움을 표했다. 그때 심미연이 아니었다면 그는 이미 죽었을 것이다. 어떻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심미연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살리고 치료하는 건 의사의 본분이에요. 그날 다른 의사라도 같은 결정을 내렸을 겁니다.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어찌됐든 심미연 씨가 저를 살려주셨으니 감사한 건 당연한 일이죠.” 남자는 아직 몸 상태가 좋지 않아 얼굴이 창백해 보였다. “몸이 아직 회복되지 않았으니 앉아서 편히 얘기하죠.” 여자가 다가와 심미연의 손을 잡았다. “심미연 씨, 그날 제가 오해한 거 정말 죄송해요. 진심으로 사과드려요.” 그날 그녀가 심미연이 남편을 구하는 것을 막았다면 지금쯤 그녀는 홀로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그동안 그날의 일을 계속 떠올리며 왜 그렇게 남의 말에 휘둘렸을까 고민해왔다. “그때 심정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사과하지 않으셔도 돼요.” 심미연은 예의 바르게 답했다. “자, 먼저 앉으세요. 밥 먹으면서 계속 이야기 나누죠.” 남자는 신사답게 심미연의 의자까지 당겨주며 말했다. “심미연 씨, 앉으세요.” 심미연은 감사의 뜻을 전하며 조용히 앉았다. 남자는 아내를 데리고 심미연의 맞은편에 앉았다. “곧 음식이 나옵니다.” 남자가 미소를 지으며 먼저 입을 열었다. 심미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괜찮다고 답했다. “먼저 제 소개를 할게요. 저는 오태진입니다. 이분은 제 아내 장혜윤입니다.” “심미연입니다.” 서로 인사를 나눈 후 오태진이 심미연에게 물었다. “심미연 씨는 지금 어디 병원에서 일하고 계신가요?” 심미연은 웃으며 답했다. “저는 변호사로 천성 로펌에서 일하고 있어요. 병원에서는 일하지 않아요.” “아! 맞아요. 어제 실시간 검색어에 올라온 그 심 변호사님 맞죠?” 장혜윤이 존경의 눈빛을 보내며 말했다. “정말 대단하세요.” 심미연은 부끄러워하
심미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의아한 기색을 담아 물었다.“무슨 일이길래 그래요?”이지연은 숨을 깊이 들이쉬고 일부러 속도를 늦추며 차분하게 말했다.“온지유 씨가 도망쳤어요.”“언제요?”심미연의 눈빛이 반짝이며 날카로워졌다. 누가 이 일을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는 건지 의심이 스쳤다.“어젯밤에요.”이지연의 목소리는 한껏 가라앉아 있었고 자책감이 가득 배어 있었다.“죄송해요. 제가 방심했어요.”심미연은 손을 저으며 말했다.“미안해하지 마요. 이건 지연 씨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어요.”이지연은 입술을 꼭 깨문 채 불안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그럼 이제 어떻게 하죠? 제가 당장 찾아올까요?”심미연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녀는 손끝으로 휴대폰을 천천히 만지며 생각했다.“잠깐만 생각 좀 해볼게요.”어젯밤 강지한이 교통사고를 당한 장면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맴돌았다. 혹시 온지유의 실종과 강지한이 관련 있는 걸까? 만약 강지한이 온지유를 구한 거라면 도대체 어디서 그런 정보를 얻은 거지? 끝도 없이 밀려드는 의문들이 머리를 지끈거리게 했다.“참, 보스. 어젯밤에 스승님 못 보셨어요?”이지연이 물었다.심미연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사실은 봤었다. 그녀는 진운혁이 차를 몰고 떠나는 걸 보고 따라붙었다가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는 걸 말하지 않았다.“그럴 리가요? 제가 분명히 확인했는데... 스승님께서 이진영 씨랑 같이 식사하고 계셨어요!”이지연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심미연은 다시 한번 미간을 찌푸렸다.문득 이전에 마주쳤던 진운혁의 모습들이 떠올랐고 그 순간 한 가지 의심이 그녀의 마음속을 훑고 지나갔다.‘그때 내가 본 스승님은... 정말 스승님이 맞았을까? 만약 누군가가 스승님을 사칭하고 있었다면 그 목적은 대체 뭘까?’그때 이지연의 흥분한 목소리가 심미연의 생각을 끊어냈다.“보스! 새로운 정보를 발견했어요!”“무슨 정보예요?”심미연은 본능적으로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눈을 가늘게 뜨고 귀를 기울이자 이지연의 들뜬 목소
백선영이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어 진은숙의 팔을 살짝 끌어당기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우리 이제 가요.”진은숙은 손바닥 위에 놓인 봉투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가 망설이면서 입을 열었다.“이건... 어쩌죠?”백선영은 잠시 고민하다가 이 난처한 상황을 심미연에게 넘기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봉투를 조심스럽게 심미연 앞에 내려놓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사모님, 마음은 충분히 받았지만... 이 돈은 받을 수가 없어요.”심미연은 미소를 지으며 눈길을 봉투 위로 흘렸다.“오빠가 직접 드린 건데 마음 편히 받으세요. 저한테 돌려주실 필요는 없어요. 자, 얼른 가서 일 보세요. 저 벌써 배가 고파졌는걸요.”그러나 말하다가 알 수 없는 서운함이 스르르 마음 한쪽에 올라와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박유진은 예전에 밤하늘을 보며 수없이 약속했었다.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그녀와 아이를 평생 지키겠다고. 그런데 지금 그 약속들은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처럼 금세 꺼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오빠, 나랑 약속한 거 잊은 거야?’“정말 감사합니다, 사모님! 사모님과 사장님 두 분 다 참 요즘 보기 드물게 좋은 분들이세요. 두 분, 좋은 일만 가득하시고 영원히 행복하시길 빌게요!”진은숙은 기쁜 얼굴로 연신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고 백선영의 팔을 붙잡고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오늘 정말 행운이 따랐다 싶었다. 이렇게 따뜻한 사람들을 만나다니.심미연도 가볍게 한숨을 쉬고 나서 주방으로 들어가 컵에 따뜻한 물을 따라 목을 축였다. 어쩐지 목이 바싹 마른 게, 감정이 몰려서 그런 걸까.막 물을 다 마셨을 무렵 문밖에서 귀엽고 여린 목소리가 들려왔다.“엄마! 어디 있어요?”그 소리는 마치 봄날에 막 피어난 꽃처럼 듣는 사람 마음을 몽글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심미연은 표정이 풀렸고 얼른 얼굴을 내밀며 따뜻하게 웃었다.“우리 태하, 엄마 여기 있어!”심태하는 쏜살같이 달려와 그녀 품에 안겼다.“엄마, 아빠가 나 버렸어요!”심미연은 깜짝
백선영은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모깃소리만큼이나 작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말했다.“사장님께서 떠나시기 전에... 집에 안 계시는 동안 꼭 사모님과 도련님을 잘 챙기라고 당부하셨습니다.”진은숙도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맞아요, 맞아요! 사장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고는 바로 캐리어 들고 곧장 나가셨거든요.”심미연은 그 말을 듣고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마음속으로 박유진의 말뜻을 곱씹어 보았지만 마치 안개 속을 걷는 듯 선명하게 와닿지 않았다.“그런데요, 사모님...”진은숙이 심미연을 흘끗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눈빛에는 망설임과 불안이 뒤섞여 있었다.“왜 그러세요?”심미연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지만 말투는 여전히 부드러웠다. 언제나 그래왔듯 도우미 아주머니들에게 함부로 대하는 법이 없었고 태도가 마치 봄바람처럼 따뜻하고 너그러웠다.진은숙은 잠시 그녀의 얼굴을 살펴보더니 마음을 굳힌 듯 입술을 깨물고 말했다.“어젯밤에 제가 목이 말라서 물을 마시러 나왔는데 계단 모퉁이에서 사장님을 마주쳤었어요. 사장님도 물 마시러 나오신 것 같았어요.”곁에 서 있던 백선영도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거들었다.“저도요! 밖에서 인기척이 들리길래 문 열고 나왔더니 사장님이 아래층으로 내려가고 계셨습니다.”심미연은 입을 다문 채 생각에 잠겼다.‘어젯밤에 오빠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진은숙은 마음을 가다듬고 이어서 말했다.“불빛이 비쳐서 얼핏 봤는데 사장님 눈가가 벌겋게 부어 있더라고요. 꼭 방금 울기라도 한 사람처럼요. 아마 제가 눈치챌까 봐 인사만 툭 하고는 곧장 자리를 피하셨어요. 전 그냥 물만 마시고 방으로 돌아갔는데 보니까 사장님은 그 자리에 그대로 멍하니 서 계셨어요. 제가 방에 들어간 뒤에도 안 들어오시더라고요.”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조심스럽게 덧붙였다.“오늘 아침에 사장님께서 나가신 뒤에 서재를 청소하러 들어갔는데 휴지통에 담배꽁초가 가득 쌓여 있었어요. 어젯밤 내내 잠도 못 주무시고 담배만 피우셨던 것 같아요..
휴대폰 화면이 켜지고 그 익숙하면서도 가슴을 죄는 번호가 뜨는 순간, 박유진의 심장은 마치 보이지 않는 손에 움켜잡힌 듯 조여들었다.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가슴속에서 일렁이며 축축한 솜처럼 뭉쳐져 목덜미를 틀어막았고 숨조차 제대로 쉬기 힘들었다. 말은 더더욱 나올 리 없었다.그 번호는 마치 꿈결 속 가장 마주하고 싶지 않은 유령처럼 소리 없이 다가와 그의 마음 가장 깊은 곳의 고통과 갈등을 다시 불러냈다.박유진은 손을 떨며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다가 한참을 망설인 끝에 결국 전화를 받지 않기로 했다.그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다. 공기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긴장감과 묘한 압박이 가득했다. 박유진은 숨을 들이쉬며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썼고 손끝으로 천천히 휴대폰 키보드를 두드려 문장을 써 내려갔다.[진성에 가서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돌아가면 다시 이야기하자. 그래도 되지?]그 메시지엔 그의 복잡한 심경이 담겨 있었다. 현실을 피하고 싶은 마음도, 언젠가 다시 마주하길 바라는 희미한 기대도 모두 그 짧은 문장 안에 섞여 있었다.메시지 전송을 마친 박유진은 망설임 없이 전원을 꺼버렸고 휴대폰을 한쪽으로 툭 던졌다. 마치 그렇게 하면 마음속 어지러운 생각들까지 함께 던져버릴 수 있을 것처럼.주변은 순식간에 조용해졌고 텅 빈 공간엔 그의 심장 뛰는 소리만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 규칙적이고도 묵직한 박동이 마치 그 존재를 스스로 확인하려는 듯했다.박유진은 눈을 감았다. 피로한 몸은 본능적으로 가장 편한 자세를 찾아갔고 그 짧은 정적 속에서 조금이나마 위로를 찾고자 했다.비록 밤새 한숨도 못 잤고 눈은 충혈되어 있었지만 정신만큼은 유난히 또렷했다. 보이지 않는 힘이 그를 지탱해 주듯 그는 끝내 무너지지 않았다.하지만 피하고 싶을수록 심미연의 모습은 그의 머릿속에서 더욱 선명해졌다. 그녀의 미소는 때론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처럼 순수하고 따스했으며 때로는 눈빛 하나로도 사람 마음을 뒤흔드는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품고 있었다. 또 부끄러워하던 그 순간순간들
박유진은 자신의 앞날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심미연이 어떤 결정을 내리든 그는 언제나 그녀의 편이 될 것이란 사실.만약 그녀가 아이를 데려오겠다고 마음먹는다면 그는 가진 것을 다 내어주어서라도 그녀를 돕고 그 아이를 보살필 것이다. 마치 자신의 친딸인 양 지극정성으로.박유진은 자신의 행동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자신은 심미연을 사랑하고 그녀의 아이와 그녀가 지닌 모든 것을 함께 안아줄 준비가 되어 있음을.심미연의 눈가는 어느새 붉게 물들고 있었다. 그녀의 두 손은 마치 물에 빠진 이가 살고 싶어서 지푸라기를 붙잡고 있는 것처럼 박유진의 옷깃을 꼭 움켜쥐었다. 수많은 감정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한 마디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그녀가 박유진에게 진 빚은 너무나도 많고 무거웠다. 그 빚을 다 갚기 위해서는 평생이라는 시간이 필요할지도 몰랐다.“시간이 늦었으니까 이젠 좀 쉬어. 나도 방으로 돌아갈래.”박유진의 목소리엔 알아채기 어려울 정도로 미세한 떨림이 묻어났다. 그는 본능적으로 심미연을 더욱 꼭 안았다. 마치 그녀를 자신 뼛속 깊이까지 끌어안고 다시는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이.어쩌면 이 다정함이 그들 사이 마지막 남은 따뜻함이 될지도 모른다...박유진의 마음속은 쓸쓸함으로 가득했다. 머릿속 이성은 매서운 바람처럼 그를 휘감으며 이제는 놓아줄 때라며 끊임없이 속삭였다.하지만 감정은 뿌리 깊은 덩굴처럼 박유진을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는 얼마나 바랐던가. 단 한 순간이라도 더 심미연의 곁에 머물 수 있기를. 이 찰나의 시간이 남은 생을 따뜻하게 데워줄 수만 있다면...심미연은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박유진의 얼굴을 어루만졌고 그녀의 손끝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박유진의 마음속 한기를 모두 녹이는 듯했다.심미연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부드럽게 말했다.“이생에 오빠를 만나 알아가고 수많은 인파를 뚫고 함께 걸을 수 있었던 건... 정말 큰 복이었어. 앞으로 어떤 길을 가더라도 우리 손 놓지 말고
박유진은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눈빛이 그녀를 감쌌고 낮지만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응. 말해 봐.” 심미연은 용기를 내어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과 마주친 순간, 마음 한켠에서 설명할 수 없는 두려움이 피어올랐다. 마치 오래도록 감춰온 비밀이 이제야 드러날 것만 같은 예감처럼. “왜 그래, 미연아?” 박유진의 목소리는 조심스러우면서도 따뜻했다. 그녀의 불안을 감싸 안으려는 듯 아주 섬세하게 묻는 말이었다. 심미연은 입을 열 듯 말 듯 망설였다. 떨리는 입술이 달싹이기만 할 뿐 말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마음 깊은 곳에서 끌어올리고 있는 건 누구에게도 쉽게 털어놓을 수 없던 진실이었다. 그러다 마침내 결심한 듯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강지한의 딸, 강상미. 들어본 적 있지?” 박유진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 아이가 왜?” 툭 튀어나온 말이었지만 그의 마음속에 조용한 파문이 일었다. ‘미연이랑 강지한의 딸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왜 지금에서야 그 아이를 말하는 걸까.’ 심미연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다짐하듯 눈을 감았다가 뜨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사실 예전에 내가 잃어버린 내 딸... 그 애는 세상을 떠난 게 아니었어.” 그 말 한마디를 꺼내기 위해 그녀는 거의 모든 용기를 다 쏟아부었다. “정말이야?” 박유진의 목소리는 놀라움에 젖어 있었다. 그의 심장이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그때 너 분명히 말했잖아. 아이 숨 안 쉬고 있었다고. 직접 확인했었잖아... 확신했었어.” 그 순간, 박유진의 머릿속을 스친 단 하나의 가능성. ‘설마... 지금 미연이가 말하려는 게... 그 아이가 강상미라는 말이야?’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지금껏 맞춰지지 않던 조각들이 하나로 이어지고 복잡하게 얽혔던 퍼즐이 비로소 그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박유진의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쳤다. 손끝이 얼어붙고
박시훈은 눈을 깜빡이며 바로 앞에 있는 얼굴을 바라봤다. ‘세상에 어떻게 이렇게 예쁜 여자가 있을 수가 있지?’ 심장이 터질 듯 뛰는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심장 박동이 너무 빠른데요? 정상은 아닌 것 같네요.” 심미연은 이마를 찌푸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박시훈은 민망해서 땅속으로 숨어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내가 왜 비정상이야... 완전 정상이거든...’ 심미연은 아무렇지 않게 그의 상처를 확인했다. 상처는 붉게 부어 있었고 피도 조금 배어 있었다. 그녀는 말없이 약을 꺼내 상처 위에 다시 발라주었다. 상처는 쓰라렸지만 박시훈은 이 순간이 영원히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곁에 있는 지금이 너무도 소중했다. 심미연은 조심스럽게 상처를 감싸고 도구들을 하나씩 정리했다. 마무리를 한 뒤 장갑을 벗으며 병실을 나갈 준비를 했다. “저... 방금 야식 시켜놨는데... 같이 먹고 가주면 안 돼요?” 박시훈은 괜히 목이 메여 말끝이 흐려졌다. 자신이 이렇게 소심한 사람이었다니, 스스로도 놀라웠다. ‘내가 왜 이 사람 앞에만 서면 작아지는 거야...’ “저는 밤에 야식 먹는 습관 없어요.” 심미연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야식 너무 자주 먹지 마요. 건강에 안 좋아요. 전 이만 갈게요. 야식 먹고 푹 쉬세요.” 그녀의 말에 박시훈은 마치 한겨울 찬물이라도 뒤집어쓴 듯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얼어붙었다. 심지어 발끝까지 저릿했다. 그녀가 간다. 그를 남겨두고 그냥 떠나버린다. 속이 텅 빈 것처럼 허전했다. 심미연은 이미 등을 돌린 채 병실을 나서고 있었고 박시훈의 낙담한 얼굴은 그녀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병실을 벗어난 심미연은 엘리베이터 앞에서 깊게 숨을 들이켰다. 몇 시간째 이어진 수술에, 온몸이 녹초가 된 상태였다. 하지만 강지한을 살릴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로비로 걸어 나왔을 때 문 앞에 서 있는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심미연의 시선이 하얗게 눈처럼 샌 강준형의 머리카락에 머물렀다. 가슴 어딘가가 저릿하게 아려왔다. 만약 시간이 되돌릴 수 있다면. 그저 아무 걱정 없이 웃던 그 시절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땐 주저 없이 말했을 것이다. ‘네. 할게요.’그때 그녀는 강지한을 사랑했고 그의 가족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더 이상 강지한을 사랑하지 않는다. 그리고 강준형이 걱정된다고 해서 그 바람을 무조건 들어줘야 할 이유도 없었다. 곁에서 조용히 그녀를 훔쳐보던 가정부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사모님은 역시 마음이 떠나신 거구나...’ ‘이러다 어르신 또 며칠을 우울하게 보내시겠네...’강준형도 그녀의 침묵에서 모든 걸 느낄 수 있었다. 인연이란 게 억지로 붙잡는다고 이어질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비록 아쉬움은 남지만 그 역시 그녀의 선택을 존중할 수밖에 없었다.“할아버지, 사실 저랑...”“딩.” 심미연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려는 순간,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고개를 든 그녀는 곧장 부드러운 눈빛을 머금은 박유진과 눈이 마주쳤고 그 말은 다시 목구멍 깊숙이 삼켜졌다. “오빠, 여긴 어떻게 왔어?”박유진은 따뜻한 미소로 대답했다. “너 데리러 왔어.” 그리고 곧 예의를 갖춰 강준형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할아버지.”강준형은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며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유진아, 너랑 미연이...?” 어딘가 모르게 다정해 보이는 둘의 분위기. 설마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의심이 스쳤다.“할아버지, 제가 차까지 모셔다드릴게요.” 심미연은 사실 내일 박유진과 혼인신고를 하러 갈 거라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조금 전, 강준형이 ‘강지한과 다시 잘해봤으면 좋겠다’고 했던 말이 떠오르자 그 말을 도저히 꺼낼 수 없었다.‘말하지 말자. 괜히 말했다가 할아버지 마음만 상할 수도 있어.”그 순간, 박유진의 손이 저절로 움켜쥐어졌다. ‘할아버지한테
하지만 정작 온지유의 칼끝을 막나낸 사람은 그다지 친하다고 할 수 없었던 박시훈이었다. 심미연의 진지한 얼굴을 본 강준형은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는 걸 단박에 알아챘다. 더는 묻지 않았다. 그녀는 조심스레 그를 의자에 앉히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잠깐만 앉아 계세요. 옷만 갈아입고 금방 나올게요.” “그래. 다녀오너라.” 강준형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가볍게 흔들어 보냈다. 심미연이 등을 돌려 복도로 사라지자 그는 그녀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눈길을 거두지 못했다. 그리고 이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곁에 서 있던 가정부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요즘 사모님이 예전보다 훨씬 더 예뻐지신 것 같아요. 성격도 훨씬 부드러워지셨고요. 만약 사모님이 도련님과 다시 재결합하신다면 어르신께서도 도련님 혼자 남을까 봐 걱정 안 하셔도 될 텐데요.” 강준형은 그 말에 잠시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러게 말이다. 미연이가 돌아온다면 지한이도 지금처럼 외롭진 않겠지. 상미도 엄마 손길이 필요하고... 지한이가 아무리 잘 챙긴다 해도 아빠는 아빠일 뿐이지. 엄마처럼 섬세하긴 어렵잖니. 게다가 지한이는 이노하이브를 이끄는 입장이라 상미를 온전히 돌보기엔 시간도 턱없이 부족하고 말이다.” “나중에 사모님께 슬쩍 한번 말씀드려보시는 건 어떠세요?” 가정부는 늘 심미연을 좋게 봐왔다. 도련님과 이혼했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도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요즘 세상에 외모, 인품, 성격, 효심까지 갖춘 여자를 다시 만나긴 정말 쉽지 않으니까. 강준형은 또다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분위기 봐서 말해보지. 미연이가 듣기 싫어하면 더는 꺼내지 않을 거다.” “네. 그게 좋을 것 같아요.” 가정부도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옷을 갈아입은 심미연이 다시 나타났다. 그녀는 다가와 손을 내밀며 말했다. “가시죠. 할아버지. 제가 집까지 모셔다드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