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년 전, 강지한을 처음 만났던 그 순간, 심미연의 시간은 멈춘 듯했다. 그리고 3년 뒤, 그녀는 강씨 가문의 며느리가 되어 강지한의 아내가 되었다. 평생을 함께하며 서로를 사랑할 든든한 배우자가 생겼다고 믿었다. 3년간 심미연은 그의 마음을 얻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자존심도, 꿈도, 그리고 자기 자신마저 포기하며 오직 그의 가장 소중한 여자가 되길 바랐다. 하지만 강지한의 마음속엔 이미 첫사랑이 깊게 자리 잡고 있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그녀가 들어설 자리는 없었다. 3년 후, 심미연은 자신이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같은 날, 그의 첫사랑이 임신 소식을 공개적으로 알리며 사람들 앞에 섰다. 억눌린 감정을 품고 그녀는 조심스럽게 강지한에게 물었다. “지한 씨, 내가 임신했다면... 어떻게 할 거야?” 그는 냉담하게 대답했다. “지워.”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다시 물어보았다. “그 여자도 임신했대... 지우라고 할 거야?” 강지한은 차가운 태도로 답했다. “그럴 리가 있겠어? 그 아이는 강씨 가문의 장손이 될 거야.” 그 순간, 심미연의 마지막 희망은 완전히 부서졌다. 실망과 절망 끝에 그녀는 결국 이혼을 결심했다. 그러나 강지한은 그녀가 제출한 이혼 서류를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그리고 문 뒤로 그녀를 몰아붙이며 위협하듯 말했다. “이혼? 어림없어. 넌 내 여자야. 평생... 영원히!” 결국 심미연은 협의 이혼을 포기하고 소송을 제기했다. 하지만 판결을 기다리던 중, 의문의 사고를 당하며 유산 위기에 처했다. 자신의 아이를 지키기 위해 그녀는 망설임 없이 임신 사실을 숨긴 채 멀리 떠났다. 몇 년 후, 경성으로 돌아온 심미연 앞에 강지한이 나타났다. 그는 변하지 않는 차가운 눈빛, 비웃는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 “심미연 변호사님, 내 아들을 훔쳐 간 대가... 이제 제대로 계산해야겠죠?”
View More하지만 정작 온지유의 칼끝을 막나낸 사람은 그다지 친하다고 할 수 없었던 박시훈이었다. 심미연의 진지한 얼굴을 본 강준형은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는 걸 단박에 알아챘다. 더는 묻지 않았다. 그녀는 조심스레 그를 의자에 앉히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잠깐만 앉아 계세요. 옷만 갈아입고 금방 나올게요.” “그래. 다녀오너라.” 강준형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가볍게 흔들어 보냈다. 심미연이 등을 돌려 복도로 사라지자 그는 그녀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눈길을 거두지 못했다. 그리고 이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곁에 서 있던 가정부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요즘 사모님이 예전보다 훨씬 더 예뻐지신 것 같아요. 성격도 훨씬 부드러워지셨고요. 만약 사모님이 도련님과 다시 재결합하신다면 어르신께서도 도련님 혼자 남을까 봐 걱정 안 하셔도 될 텐데요.” 강준형은 그 말에 잠시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러게 말이다. 미연이가 돌아온다면 지한이도 지금처럼 외롭진 않겠지. 상미도 엄마 손길이 필요하고... 지한이가 아무리 잘 챙긴다 해도 아빠는 아빠일 뿐이지. 엄마처럼 섬세하긴 어렵잖니. 게다가 지한이는 이노하이브를 이끄는 입장이라 상미를 온전히 돌보기엔 시간도 턱없이 부족하고 말이다.” “나중에 사모님께 슬쩍 한번 말씀드려보시는 건 어떠세요?” 가정부는 늘 심미연을 좋게 봐왔다. 도련님과 이혼했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도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요즘 세상에 외모, 인품, 성격, 효심까지 갖춘 여자를 다시 만나긴 정말 쉽지 않으니까. 강준형은 또다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분위기 봐서 말해보지. 미연이가 듣기 싫어하면 더는 꺼내지 않을 거다.” “네. 그게 좋을 것 같아요.” 가정부도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옷을 갈아입은 심미연이 다시 나타났다. 그녀는 다가와 손을 내밀며 말했다. “가시죠. 할아버지. 제가 집까지 모셔다드릴게요.
박시훈은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수술복을 입은 심미연을 단번에 알아봤다. 마스크를 쓰고 있었지만 그녀의 맑고 빛나는 눈동자는 도저히 다른 사람과 헷갈릴 수 없는 것이었다. “날 좀 밀어줘.” 박시훈이 간병인에게 다급히 말했다. 간병인은 곧장 그의 휠체어를 밀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 뒤를 이어 강준형도 하인들의 부축을 받으며 심미연 쪽으로 빠르게 다가왔다. “미연아, 상황이 어때?” 강준형의 목소리엔 감추지 못한 초조함이 담겨 있었다. 그때 박시훈의 시선이 다시금 심미연에게로 향했다. “당신 의사예요?” 그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나직이 말했다. 세계 최고 해커, 그리고 의사. 그녀가 가진 아우라는 더없이 눈부셨다. 박시훈은 점점 더 그녀에게 빠져들고 있었다. “상태가 조금 위중해요. 지금은 언제 깨어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어요.” 심미연이 조심스럽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생명엔 지장이 없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강준형이 가장 궁금해할 말이었다. 그녀는 그걸 알고 있었고 일부러 마지막 문장을 강조했다. “그래... 다행이구나.” 강준형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심미연의 손을 꼭 잡았다. “미연아, 정말 고맙다. 수고 많았어.” 심미연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별 말씀을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어요.” 강지한은 그녀를 구해준 적이 있다. 이제 그녀가 그를 구하는 건 너무나도 당연했다. “할아버지, 강지한이 깨어나면 병원에서 바로 연락드릴 거예요. 지금은 먼저 집에 가 계세요.” 심미연은 그의 머리 위로 보이는 은빛 머리카락을 보며 괜스레 마음 한구석이 시려왔다. 몇 년 만에 다시 본 강준형은 이전보다 훨씬 나이 들어 보였다. 그는 여전히 그녀의 손을 잡고 있었다. “미연아, 혹시 아이 좀 데려와서 나한테 보여줄 수 있겠니?” 그는 줄곧 강지한이 그녀와 아이를 데리고 집에 돌아오기를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도 그
심미연은 순간 숨이 턱 막히는 듯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강지한은 자신을 구하려다 사고를 당한 것이었다. 그 순간, 이지연이 했던 말이 스쳐 지나갔다. ‘누군가 보스를 죽이려고 해요.’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면 오늘 밤 그 대형 교통사고는 단순한 사고가 아니었다.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대형 트럭을 이용해 그녀를 노렸고 때마침 강지한의 차량이 그 사이에 끼어들면서 그가 대신 사고를 당한 것이었다. 게다가 차량이 폭발했다면 강지한이 그 안에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생사조차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미연아?” 말이 없던 심미연을 걱정한 강준형이 다급하게 그녀를 불렀다. 전화를 끊은 줄 알고 불안해졌는지 목소리엔 떨림이 섞여 있었다. “지금 바로 갈게요. 걱정 마세요. 할아버지. 제가 꼭 강지한 살려낼게요.” 심미연은 단호하게 말한 뒤 전화를 끊었다. 핸드폰을 꼭 쥔 채 깊게 숨을 들이마신 그녀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옷장 안으로 들어가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핸드백과 폰을 챙겨 계단을 내려섰다. 그녀는 몰랐다. 서재 문 앞에 조용히 서 있던 박유진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는 걸. 박유진의 눈빛은 텅 빈 허공을 떠돌 듯 쓸쓸했다. 그녀가 향하는 곳이 누구인지, 그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가야만 했다. 강지한이 목숨을 걸고 그녀를 지켰다면 그녀는 그를 외면할 수 없었다. 아마 오늘 구청이 문을 열었더라도 심미연은 박유진과 그곳에 가지 못했을 것이다. 박유진은 마음이 아프지 않은 척 조용히 스스로를 다독였다. ‘괜찮아. 당연한 거야. 나라도 갔을 거야.’ 아무리 그렇게 말해도 그건 위로가 아니었다. 그저 자신을 속이는 자기합리화에 불과했다. 잠시 후, 그는 조용히 서재로 돌아가 문을 닫았다. 책상 앞에 앉아 컴퓨터를 켰지만 화면 속 글자는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머릿속엔 오직 한 사람, 심미연. 지금 그 순간에도 그녀만이 그의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
‘강 할아버지’라는 이름이 핸드폰 화면에 뜨는 순간, 박유진의 눈빛이 잠시 어두워졌다. 강지한의 할아버지. 직접 전화를 걸어왔다는 건 분명 강지한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는 뜻이었다.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강지한이 심미연을 구하려다 사고를 당했다는 사실을. 그래서 그녀가 당연히 그를 찾아갈 거라 예상하고 있었다. “미연아, 갑자기 급한 회의가 생각났어. 먼저 전화 받아. 난 서재에서 회의 좀 하고 있을게.” 박유진의 목소리는 여전히 다정했고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 또한 신중했다. 마치 그녀의 마음을 흔들지 않기 위해 최대한 조심스레 말하려 애쓰는 듯했다. 심미연은 정신을 가다듬고 고개를 들었다. “응. 다녀와. 나도 통화 좀 할게.” 박유진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녀의 이마에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통화 끝나면 따뜻한 물로 샤워하고 푹 쉬어. 알았지?” “응. 오빠도 회의 끝나고 푹 쉬어.” 심미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박유진은 언제나 그녀에게 따뜻하고 세심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를 몇 번이나 외면하고 져버렸다. 그래서 더 미안했다. “그럼 난 먼저 갈게.” 그는 그녀의 체온을 놓치기 아쉬운 듯 한동안 손끝을 망설였지만 결국 손을 놓고 조용히 자리를 떴다. 예전에 박유진의 어머니는 그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미연이와 결혼하고 싶다면 그 아이를 절대 놓치지 마라.’ 하지만 만약... 심미연이 자신을 원하지 않는다면? 그녀가 원하지 않는 선택을 강요하는 건 박유진이 가장 피하고 싶은 일이었다. 무엇보다 그녀가 불편해하거나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는 것 자체가 그에겐 견딜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서재 문이 조용히 닫히자 심미연은 곧장 안방으로 향했다. 소파에 앉자마자 아까 걸려온 전화를 다시 눌러 받았다. “미연아, 나야. 혹시 내가 깨운 건 아니지? 이렇게 늦은 시간에 전화해서 미안하구나.” 강준형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훨씬 지쳐 있었고 그 안엔
강지한이 살아 있다는 사실에 안도한 박시훈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방금 뉴스 봤어. 네 카이엔이 폭발했다길래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 네가 무사하니까 이제야 좀 안심이 된다.” “그 대형 트럭, 당장 확인해. 전부 조사하고 운전자는 반드시 찾아.” “알겠어. 지금 바로 확인해볼게.” 순식간에 분위기가 무거워지자 박시훈의 표정도 금세 굳어졌다. “조금만 기다려. 바로 연락할게.” “응. 최대한 빨리.” 강지한은 단호하게 말한 뒤 전화를 끊었다. 그와 동시에 눈앞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마치 깊은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한편, 심미연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곧장 2층 서재로 향했다. 노크를 하려던 순간, 가방 안에서 핸드폰이 진동을 울렸다. 잠시 망설인 끝에 그녀는 전화를 먼저 받았다. “보스, 큰일 났어요. 누가 보스를 죽이려고 해요.” 이지연의 다급한 목소리가 그대로 귀에 박혔다. 심미연의 머릿속엔 낮에 있었던 사고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그 대형 트럭. 정말 자신을 노리고 달려든 게 맞았던 거다. 만약 그 카이엔이 없었다면 지금쯤 자신은 이 세상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지연 씨, 천천히 말해봐요.” 심미연은 깊게 숨을 들이쉬며 최대한 침착하게 반응했다. ‘도대체 누가 날 죽이려는 거지?’ ‘온지유?’ 하지만 그럴 리 없었다. 온지유는 지금 그녀 손에 있고 외부와 완전히 단절된 상태다. “저도 방금 들었어요. 육현성 씨가 누군가랑 통화한 녹음이 있었는데 거기서 보스를 반드시 죽여야 한다는 얘기가 나왔어요.”이지연은 숨도 고르지 못한 채 말을 쏟아냈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알아봤어요?” 육현성이 자신을 증오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게다가 지금 온지유까지 그녀 손에 있는 상황이니 원한을 품었을 가능성도 충분했다. 하지만 이지연이 말한 그 목소리는 육현성이 아니었다. 그게 더 혼란스러웠다. ‘그렇다면... 대체 누구지?’
심미연은 무의식적으로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건 불길에 휩싸인 자동차였다.순간, 차가 폭발했다. ‘설마... 저 안에 있는 사람이 강지한은 아니겠지?’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순간, 핸드폰 벨소리가 울렸다. 심미연은 급히 전화를 받았다. “미연아! 너 괜찮아?” 수화기 너머로 들려온 박유진의 다급한 목소리에 긴장으로 굳어 있던 그녀의 마음이 조금 풀렸다. “응. 나 괜찮아. 뒤에 경호원들도 있어.”하지만 말을 내뱉자마자 머릿속에 강지한의 말이 떠올랐다. “속도 더 올려. 앞만 보고 달려.”‘강지한은 어떻게 알았던 걸까. 내가 고속도로에서 대형 트럭한테 쫓기고 있었단 걸.’‘혹시...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건 아니야? 아니면 강지한이 모든 일의 배후...?’‘설마 날 죽이고 태하를 데려가려는 건가?’‘아니야. 강지한이 그런 짓까지 할 사람은 아니야.’심미연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말도 안 되는 상상을 떨쳐내려 했지만 오히려 그의 목소리는 점점 더 또렷하게 맴돌았다. “미연아, 지금 어디야? 내가 데리러 갈게.” 박유진의 따뜻한 음성이 그녀를 현실로 다시 끌어당겼다.“괜찮아. 나 지금 집 가는 중이야. 안 와도 돼. 피곤하면 먼저 자.”박유진도 지금 진성 지사 문제로 정신이 없을 텐데 더는 걱정 끼치고 싶지 않았다. “그럼 조심해서 와. 난 서재에서 일 좀 더 하고 있을게. 집에 오면 얘기하자.”“응. 이따 봐.” 전화를 끊은 뒤 박유진은 한참을 핸드폰만 멍하니 바라보았다.지금 심미연이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는 상황인데... 곁을 지켜야 할 사람은 자신이 아닌가. 하지만 진성 지사 문제 역시 손을 놓을 수 없었다. 그때 다시 울린 벨소리. 그는 빠르게 전화를 받았다. “도련님, 심미연 씨는 집으로 돌아가는 중입니다. 그런데... 그 카이엔 운전자가... 강지한 대표님이었습니다.”머뭇거리는 말투엔 조심스러움이 가득했다. 괜히 말 실수로 박유진의 기분을 상하게 할까 전하는 사람도 눈치를 보고
일부러 강조한 말투였다. 다른 기대는 하지 말라는 단호한 선을 긋는 경고였다. 그 말에 심미연은 조용히 웃었다. 입가에 맺힌 미소엔 담담함과 함께 단단한 확신이 스며 있었다.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20분 안에 홍원각에 도착하겠습니다. 이진영 씨와 변호사님, 두 분 모두 뵐 수 있길 기대하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그녀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봤다. 어둠이 내려앉은 하늘 아래, 도심의 불빛이 반짝이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차가워 보였다. ‘20분 후, 정말로 스승님을 마주하게 될까?’ ‘만약 마주한다면... 첫마디는 뭐라고 해야 하지? 오랜만이에요...? 그건 좀...’ 하지만 곧 병원에서조차 자신을 모른 척했던 진운혁의 차가운 얼굴이 떠올랐다. ‘이번에도... 또 모른 척하겠지.’ 그렇게 생각하던 순간, 창밖으로 스쳐 지나간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진운혁이었다. 심미연은 숨을 들이마시며 정신을 가다듬고 차 문을 열고 그대로 뛰어내렸다. 그는 이미 다른 차에 올라탔고 시동이 걸리자 곧바로 멀어져갔다. 심미연은 재빨리 차로 돌아와 그의 차를 뒤쫓았다. 꽤 먼 거리까지 따라갔지만 어느 순간 차는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이상하네. 대체 어디로 간 거지?’ 잠시 생각에 잠긴 그때, 뒤쪽에서 달려오던 대형 화물차 한 대가 갑자기 속도를 높였다. 심미연은 반사적으로 핸들을 움켜쥐고 엑셀을 밟았다. 하지만 뒷차는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손바닥이 식은땀으로 미끄러질 정도였다. 더는 착각할 여지도 없었다. 누군가 분명히 자신을 죽이려 하고 있었다. ‘누구지? 왜?’ ‘나올 때 경호원을 데리고 나왔어야 했는데... 이러다 진짜 사고라도 나면...’ 그때 핸드폰 벨소리가 울렸다. 심미연은 곧장 전화를 받았다. “심미연, 지금 내 말 잘 들어. 속도 더 올려. 뒤는 보지 말고 앞만 보고 달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남자의 낯익고 단단한 목소리. “강지한?
이지연의 눈동자가 반짝이며 흥분으로 빛났다. 마치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비밀을 알아챈 사람처럼 목소리를 떨며 심미연을 향해 외쳤다. “보스, 저 이제 알겠어요! 이건 하늘의 뜻을 대신해서 세상을 바로잡으려는...”하지만 그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심미연이 단호하게 끊어냈기 때문이다. “그런 말은 내 앞에서만 하세요. 밖에서 들리면 진짜 큰일 나요.”평소와 달리 가라앉은 그녀의 목소리엔 단 한 톨의 유쾌함도 없었고 표정은 숨 쉴 틈 없이 진지했다. 그제야 이지연은 분위기의 심각함을 눈치챘다. 그녀는 입을 꾹 다문 채 두 손으로 지퍼를 올리는 시늉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표정은 과장됐지만 그 속에 담긴 의지만큼은 진심이었다. “걱정 마세요. 보스. 저는 다른 건 몰라도 입단속 하나는 끝내줘요. 칼이 목에 와도 입 안 뗍니다.”심미연은 그런 이지연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였지만 그녀의 눈빛엔 신뢰가 스쳤다. “계속 육현성 씨 움직임 지켜봐요. 겉으론 멀쩡해 보여도 속은 알 수 없는 사람이에요. 작은 이상 징후라도 보이면 바로 보고해요.” 이미 그녀는 육현성의 인맥과 배경을 철저히 조사해 본 상태였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단 하나, 지금 그가 가진 세력으로는 온지유를 그렇게 자연스럽게 빼내는 건 불가능하다는 것. ‘그렇다면... 온지유를 빼낸 건 대체 누구지?’“네! 바로 수행하겠습니다.” 이지연은 어깨를 쫙 펴고 경례하듯 반듯하게 섰다. 그 당찬 모습에 오히려 살짝 귀엽기까지 했다. 심미연은 입술을 다문 채 한동안 생각하다가 조용히 물었다. “진운혁 씨랑 이진영 씨, 지금 어디서 식사 중이에요?” “홍원각입니다.”“알겠어요. 내가 직접 가볼게요.” 말을 마친 심미연은 곧장 빠른 걸음으로 자리를 나섰다. 그녀가 떠난 뒤 이지연은 컴퓨터 앞에 앉아 빠르게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목표는 단 하나, 육현성의 현재 위치 추적. 한편, 심미연은 어느새 홍원각
그는 심미연이 원하지 않는 일은 절대 강요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럼 나 먼저 갈게.” 신발을 갈아 신고 급히 현관문을 나서는 심미연. 닫힌 문을 가만히 바라보던 박유진은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함에 마음이 뒤숭숭해졌다.심미연은 평소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도착했다. 이지연은 기다렸다는 듯 두꺼운 서류 뭉치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보스, 이건 진운혁 씨가 최근 몇 년간 맡았던 주요 사건 자료예요.” 심미연은 아무 말 없이 자료를 받아들고 자리에 앉았다. 눈빛이 날카롭게 바뀌며 그녀는 빠르게 페이지를 넘기기 시작했다. 눈동자가 바쁘게 움직였고 오래 걸리지 않아 전부 읽어냈다.그녀가 마지막 페이지를 넘길 즈음, 이지연은 조심스럽게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보스의 눈가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보스... 괜찮으세요?” 심미연은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며 억지로 웃어 보였다. “괜찮아요.” 하지만 그 말 속엔 수많은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스승님은 자살로 꾸며진 가짜 죽음으로 그녀를 속였다. 그리고 무려 10년. 그녀는 그 죽음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홀로 어둠 속을 헤매고 있었다. 단 한 번도 의심하지 못했다. 왜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스승님이 살아 있었던 거야... 그 모든 진실을 나만 모르고 있었던 거네.’“보스, 진운혁 씨에게 뭔가 사정이 있었던 걸까요?” 이지연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쩌면 그녀는 심미연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그랬을 수도 있죠.” 심미연은 웃었지만 그 웃음은 쓸쓸하고 쓰라렸다. 하지만 사정이 있었더라도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단 한 번이라도 그녀에게 진실을 말할 기회는 있었어야 했다. 그녀는 어리석게도 그가 죽은 줄만 알고 끝없이 진실을 좇으며 그의 억울함을 풀어주려 애썼다. “보스, 그럼... 그때 사건은 계속 조사할 건가요?” 이지연은 다시 조심스레 물었다. 심미연이 이 사건을 파고든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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