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도현은 심미연의 표정이 굳은 걸 보고 머리를 쉴 새 없이 굴리기 시작했다.‘안 되겠어. 일단 지금 이 상황부터 어떻게든 모면해야 해.’하지만 심미연은 그렇게 쉽게 속을 여자가 아니었다. 그가 아무 말이나 둘러대면 단번에 꿰뚫어 볼 게 뻔했다.‘어쩌지?’그때 마침 심미연의 휴대폰이 울렸다.“잠깐 전화 좀 받고 올게요.”“네, 가서 일 봐요. 난 여기 있을게요!”문도현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심미연은 대답도 제대로 못 하고 황급히 사무실을 나섰다.문도현은 기지개를 한껏 켠 뒤 슬며시 일어나 그녀의 책상 앞으로 걸어갔다. 책상 위에 액자 하나가 놓여 있었는데 그 안에 심미연이 다른 사람과 같이 찍은 사진이 한 장 있었다.그런데 그 사진 속에서 심미연의 옆에 박유진이 서 있는 걸 본 순간 문도현은 마치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박유진이랑 심미연이 왜 같이 있어? 말도 안 돼! 절대 이 둘이 이어지게 두면 안 돼!’문도현은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못한 채 홱 돌아서 사무실 밖으로 나가려 했다. 그때 마침 임현이 문을 열고 들어오다 그와 정면으로 부딪쳤다.“아야! 아이고, 아파라...”임현이 낮게 신음하며 얼굴을 찡그렸다.하지만 문도현은 그녀를 밀치고 나가버렸다.임현은 어이없다는 듯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아니, 누가 건드리기라도 했나? 왜 저렇게 화가 나 있지?”마침 그때 심미연이 다시 들어왔다.“뭐라고 중얼거리고 있어요? 문 대표님은요?”“방금 나가면서 저랑 부딪혔어요. 엄청 화난 얼굴이던데요? 아무 말도 안 하고 나가더라고요.”임현은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저 남자, 감정 기복 진짜 심하네.’“잘됐네요. 나 급한 일이 있어서 나가야 해요. 오늘은 임현 씨가 사무실 좀 맡아줘요.”심미연은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가방을 챙겨 들고 서둘러 나가버렸다.방금 강지한이 의식을 되찾았다고 한다.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에게 직접 물어봐야 했다.그가 어떻게 그녀가 교통사고를
“문자를 보낸 건 그 여자가 아니라 나예요!”강혁승의 음울한 얼굴에 스며든 미소는 왠지 모르게 오싹했다.이건명의 시선이 그의 얼굴에 멈췄다. 얼굴에 난 깊은 흉터만 아니었다면 이건명 본인과도 놀랍도록 닮은 얼굴이었다.하지만 그의 아내가 낳은 자식은 이다은, 이진영 남매 둘뿐이었다. 그렇다면 이 남자는 누구란 말인가?“건명 씨는 여기 왜 왔어요? 어서 나가요!”문소영이 다급하게 외쳤고 목소리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왜 이렇게 쫓아내려고 안달이에요? 여기까지 왔는데 문제는 해결하고 가야죠.”강혁승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고 그의 눈빛엔 싸늘한 냉기가 서려 있었다.“왜 저 사람한테 문제를 해결하라고 해? 저 사람이랑은 아무 관련도 없어!”문소영은 이건명을 붙잡아 두고 싶지 않았다.심미연은 눈을 가늘게 떴다.‘이 와중에도 이건명을 감싸려 하다니, 그래도 한때는 진심으로 사랑했던 사람이었나 보네.’“관련이 없다고요? 저 사람이 내 아버지인데?”강혁승은 조소를 띤 채 반문했다.“내가 저 사람이 수십 년 동안 도와준 일들을 전부 알고 있는데 한 번 읊어볼까요?”문소영의 눈빛이 순간 흔들렸다.“헛소리하지 마!”“입 다물지 못해!”이건명이 서늘한 눈빛으로 강혁승을 노려보며 날카롭게 쏘아붙였다.하지만 마음속으로는 큰일 났다고 생각했다.‘저 자식이 모든 걸 알고 있단 말이야?’심미연은 입술을 깨문 채 이건명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방원호가 넘겨준 자료가 전부 사실이었던 것이다.하지만 이건명이 한 여자를 위해 불법까지 저질렀다는 건 예상 밖이었다. 진심으로 사랑해서였을까? 아니면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던 걸까?“심미연, 이리 와!”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귀에 들려왔다. 심미연이 깜짝 놀라 돌아보니 깊고 검은 눈동자와 마주쳤다.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그는 의식이 없었는데 분위기는 여전히 무게감이 있었다. 이런 것이 바로 한 회사를 이끄는 대표만의 카리스마와 아우라인가.“멍하니 있지 말고 어서 오라고.”강지한의 말에 심미연은 정신을
육현성이 입가를 만지며 말했다.“이진영, 네가 감히 나한테 주먹질을 날려? 내가 집에 가서 이다은 저년을 아주 제대로 혼쭐 내줄 거야. 이번엔 최소 몇 달은 못 일어날걸?”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하나같이 기고만장했다.“보아하니 육씨 가문이 요즘 꽤 살 만한가 보네. 감히 나 이건명의 딸을 건드려?”이건명이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육현성의 뺨을 힘껏 후려쳤다.“감히 어디서 제멋대로 굴어!”그는 자신의 앞날을 위해 딸을 육씨 가문에 시집보냈었다. 그래도 육씨 가문은 4대 가문 중 하나인데 비록 육현성이 이다은을 사랑하진 않더라도 최소한의 예우는 할 줄 알았다.그래서 이다은이 이혼하겠다고 했을 땐 괜히 유난 떠는 줄 알았는데 방금 그 모든 생각이 송두리째 무너졌다. 이다은이 육씨 가문에서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 이제야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이건명의 등장에 육현성은 순식간에 기세가 꺾였다. 아무리 육씨 가문이 돈 많고 배경 있는 집이라도 지금의 이건명을 함부로 건드릴 수는 없었다.“아버님, 화내지 마세요. 이건 오해예요. 저는 전혀 그런 뜻이 아니었어요.”육현성이 다급히 변명하려 들었다.“됐어. 변명은 필요 없어.”이건명이 이다은의 손을 꽉 잡았다.“다은아, 미안해. 아빠가 잘못했어. 너 이혼하고 싶으면 해. 내가 최고로 실력 좋은 변호사를 붙여줄게.”이다은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아빠가... 나를 이렇게 감싸준다고? 늘 냉정하기만 했던 사람이?’그때 어디선가 박수 소리가 들렸다.“정말 감동적인 부녀지간이네요. 좋은 아버지십니다, 정말.”이진영이 자신의 아버지를 조롱하는 그 목소리의 주인공을 바라본 순간 눈빛이 싸늘하게 변했다.“그... 그쪽이 왜 여기 있어요?”강혁승은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는 한 모금 빨아 연기를 뿜으며 웃었다.“나요? 부모 찾으러 왔죠.”이미 이진영이 그의 정체를 눈치챘기에 더 숨길 이유도 없었다. 오늘 이 자리에 이 사람들이 모두 모인 것도 하늘의 뜻이라 생각한 강혁승은 오늘 결판을 보려 했다.“너...
수화기 너머로 울먹이는 여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심미연, 나 임신했어. 지한 씨랑 빨리 이혼해. 우리 아이가 아빠도 없이 태어나는 걸 원하는 거야? 아이는 죄가 없잖아... 얼마나 불쌍하겠어!”심미연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러나 감정이 묻어나지 않은 차가운 목소리로 응수했다.“더 하고 싶은 말 있어? 어차피 녹음 중이니까 지금 다 말해. 나중에 이혼 소송할 때 도움 될 테니까.”“심미연, 너 진짜 갈 데까지 가보겠다는 거야? 나쁜 년, 녹음까지 하다니...”욕설과 함께 전화가 끊겼다. 들려오는 삐 소리를 들으며, 심미연은 천천히 손에 든 임신 테스트기를 내려다보았다.[임신 4주 차]또렷한 글자가 눈에 박혔다. 원래는 오늘 밤 강지한에게 임신 사실을 알리려 했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어 보였다.‘이 아이는 나에게 찾아온 구원이야...’...퇴근 후 집에 들어서자, 도우미 임혜자가 반갑게 다가왔다.“사모님, 아침에 알려주신 레시피대로 요리 준비 다 해놨어요. 옷 갈아입고 내려오시면 바로 시작하시면 됩니다.”심미연은 신발을 벗으며 무심히 답했다.“아주머니가 해주세요. 저는 목욕 좀 할게요.”임혜자는 잠시 당황했지만 곧 고개를 끄덕였다.“아, 네. 알겠습니다.”그녀는 고개를 숙이며 중얼거렸다.‘사모님이 평소에는 몸이 안 좋아도 도련님 밥은 꼭 직접 준비하셨는데... 무슨 일이 있으신 건가?’심미연은 피곤한 몸을 욕조에 담그며 눈을 감았다. 차가운 물소리가 하루의 무게를 씻어내는 듯했지만, 깊은 피로는 그녀를 그대로 잠들게 했다.깨어난 것은 갑작스러운 움직임 때문이었다. 몸이 들어 올려지는 느낌에 눈을 떠보니 강지한의 깊고 날카로운 눈동자와 마주쳤다.“아주머니한테 식사 준비를 부탁했다고 했다던데, 어디 안 좋은 거야?”강지한은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어떤 감정도 섞여 있지 않았다.심미연은 온지유의 전화가 떠올라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형님... 임신하셨다면서? 아이를 낳으실 생각인가 봐?”강지한은
심미연은 방금 무례하게 끼어든 남자를 힐끗 보았다. 그는 바로 강지한의 소꿉친구이자, 경성에서 유서 깊은 육씨 가문의 자제인 육현성이었다.육현성은 언제나 심미연을 업신여겼다. 몰락한 가문 출신이라는 이유로 그녀를 깔보는 태도는 노골적이었다.그러나 육현성은 자신감 넘치는 모습 뒤에서 온지유의 도구처럼 움직이는 존재였다. 온지유가 원하는 방향으로 그녀를 공격하곤 했으니, 그의 행동은 예측할 수 있을 만큼 단순했다. 그 생각에 심미연은 옅게 미소를 지으며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큰형수님이란 호칭은 저희 아주버님의 아내를 말하는 거 맞죠? 방금 하신 말씀, 누가 들었다면 지한 씨가 큰형수님과 부적절한 관계라도 되는 줄 오해했을 겁니다.”육현성이 심미연을 불쾌하게 하려고 던진 말이었으니, 그녀도 굳이 체면을 살려줄 이유는 없었다. 심미연은 강지한을 사랑했지만, 그의 친구들 앞에서까지 참으며 굽힐 생각은 없었다.그녀의 대답에 온지유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원래 흐뭇하게 웃고 있던 그녀는 손이 떨릴 정도로 화가 났지만, 억지로 미소를 유지하며 부드럽게 말했다.“나랑 지한 씨는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랐어. 내가 돌본다고 해서 사람들이 이상하게 보진 않아. 오히려 너야말로 지한 씨 좀 잘 챙겼으면 좋겠네. 지난달 건강검진에서 위 안 좋다고 나왔더라.”온지유의 말은 억울함과 은근한 비난을 담고 있었다. 심미연은 그런 그녀를 보며 전혀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더 선명한 미소를 보이며 답했다.“그런 식으로 따지면, 아주버님 돌아가신 건 형님 얼굴이 과부상을 띠어서 그런 거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심미연의 말이 끝나자, 온지유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일그러졌다. 강지한의 위 건강을 위해 3년 동안 애쓴 자신을 무시한 채 꾸며내는 비난에 어처구니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상대가 심리전을 걸어온다면, 자신도 한 방 먹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과부상’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온지유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손을 들어 심미연의 뺨을 때리려 했다. 과거에 시어머니에게 들었던 똑같
“혹시 진짜 죽었나 싶어서 확인하는 거야.”강지한의 목소리엔 비아냥이 섞여 있었다.심미연은 무의식적으로 휴대폰을 꽉 쥐며 한 글자씩 힘을 주어 말했다.“난 목숨이 질겨서 죽지 못했나 봐!”그렇게 말하고는 망설임 없이 전화를 끊었다. 번호를 차단하는 일까지 한순간이었다....이노하이브 그룹 산하 병원의 VIP 병실.온지유는 창백한 얼굴로 침대에 누워 있었다. 병적으로 푸석한 안색과 마른 몸은 바람만 불어도 날아갈 듯 연약해 보였다.강지한은 병실 한쪽에서 휴대폰을 손에 쥔 채 어두운 표정으로 서 있었다.온지유는 그를 불안한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지한 씨, 미연 씨는... 괜찮은 거야?”강지한은 휴대폰을 내려놓으며 짧게 답했다.“괜찮아.”온지유는 속으로 심미연을 몇 번이나 저주하면서도, 겉으론 부드럽게 말했다.“돌아가서 미연 씨랑 함께 있어줘. 여기 의사랑 간호사가 있어서 괜찮아.”강지한의 표정엔 별다른 감정이 없었다.“자. 오늘 밤은 내가 여기 있을 테니 잠이나 자.”온지유는 속으로 기뻤지만 겉으로는 난처한 얼굴을 지어 보였다.“오늘 밤 안 돌아가시면, 내일 미연 씨가 분명 할아버지께 고자질할 거야. 할아버지 건강이 안 좋으시잖아. 자주 화내시면 안 되는데...”강지한은 그녀의 말을 끊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만하고 얼른 자.”온지유는 입술을 깨물며 강지한을 올려다봤다.“정말 여기서 나랑 같이 있어 줄 거야?”“그래. 자라.”...다음 날 아침.심미연이 눈을 뜨자마자 신하린의 얼굴이 먼저 보였다. 하린은 잔뜩 화가 난 듯 입술을 깨물고 서 있었다.“아침부터 왜 그렇게 화가 난 거야?”심미연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묻자, 신하린은 휴대폰을 내밀며 씩씩댔다.“온지유 그 뻔뻔한 게 자작극을 벌이고 실시간 검색에 올랐어! 이번엔 완전 자극적이야.”심미연은 하린이 내민 휴대폰 화면을 흘긋 보았다.[충격 폭로! 유명 무용가, 임신설?! 약혼남과 함께 병원 방문 포착]기사 내용을 확인하자 초음파
강지한은 입술을 굳게 다물고 깊은 눈빛으로 신하린을 바라보았다.“심미연이 교통사고를 당했다고?”어젯밤 심미연에게서 걸려 온 전화가 떠올랐다.‘만약 그게 사실이라면...’그 순간 병실 문이 열리며 심미연이 들어왔다. 차가운 분위기를 풍기며 문을 닫고 들어온 그녀를 본 온지유의 눈에 순간적으로 살기가 스쳤다. 그러나 그 살기는 이내 감쪽같이 사라졌다.온지유는 침대에서 급히 몸을 일으키며 걱정스러운 척 다가와 말했다.“교통사고가 났다고 들었어. 어디 다친 데 없어? 괜찮은 거 맞아?”그녀의 태도는 마치 심미연을 진심으로 걱정하는 듯 보였다.강지한의 눈빛은 어두워졌고, 마음속에 의심이 피어올랐다.‘심미연이 친구와 짜고 나를 속이려 한 건가?’심미연은 침착하게 신하린을 뒤로 밀었다.“하린아, 너 먼저 가. 여기 일은 내가 알아서 처리할게.”신하린은 급히 말했다.“내가 한 거 아니야. 저 여자가 스스로...”심미연은 그녀의 말을 단호하게 끊었다.“알겠어. 그러니까 먼저 가.”지금 강지한의 태도가 어떤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신하린이 계속 머물러 있는 건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킬 뿐이었다.신하린은 입술을 깨물며 눈가가 붉어진 채 병실을 나섰다.성무진도 강지한을 한 번 바라본 뒤 병실을 빠져나갔다.병실에는 강지한, 온지유, 그리고 심미연, 세 사람만 남았다.심미연은 침대 옆으로 걸어가 온지유를 내려다보았다.“때렸다면서? 많이 다쳤어? 진단은 받았어?”온지유의 얼굴에는 희미한 손자국이 남아 있었지만, 진단이 필요할 만큼 심각해 보이진 않았다.온지유는 입술을 깨물며 억울한 표정으로 심미연을 쳐다보았다.“보이는 데는 안 때렸어. 그래서 진단도 못 받아. 믿기 싫으면 안 믿어도 돼!”심미연이 무언가 대답하기 전에 강지한이 목소리를 높였다.“바보야? 맞았으면 그 자리에서 다 말해야지. 만약 큰일이라도 생겼으면 어쩔 거야?”온지유의 눈가가 금세 붉어지더니 억울함을 애써 참으며 말했다.“두 사람이 싸우는 모습 보고 싶지 않아서 그냥 참았어
심미연은 한동안 강지한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다가, 입가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날 희생해서 그 여자를 완벽하게 만들겠다고? 절대 안 돼. 그리고 하나 더 말하자면, 강지한, 난 이미 이혼하기로 마음먹었어. 언제 시간이 되는지 말해. 법원에 다녀오는 데 오래 걸리진 않을 테니까.”그녀의 얼굴에는 밝은 미소가 떠올랐으나 마음 깊은 곳은 고통으로 얼룩져 있었다. 강지한이 온지유를 편애하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노골적일 줄은 몰랐다.‘온지유가 나를 딛고 올라가게 놔둘 생각이라면, 꿈 깨!’강지한은 화가 난 듯 단호히 말했다.“이혼하고 싶으면 먼저 온지유 실검 사건부터 해결해. 그러면 너를 놓아줄게. 하지만 내가 나서게 된다면, 단순히 해명으로 끝나지 않을 거야.”그는 망설임 없이 그렇게 말했다.강지한은 심미연의 이혼 이야기를 그저 관심을 끌려는 또 다른 수작으로 여겼다. 그녀가 진심으로 이혼하려 한다고는 전혀 믿지 않았다. 결혼 전 그녀가 그와 결혼하기 위해 어떤 방법을 동원했는지 그는 기억하고 있었다.그리고 지난 3년 동안 그녀는 늘 자신을 낮추고 강지한을 정성껏 보살피는 모습을 보여왔었다.‘남편을 위해 그렇게 헌신하던 여자가 그렇게 쉽게 떠날 리가 없지.’심미연은 정떨어지는 강지한이 모습에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좋아. 지한 씨가 원하는 대로 할게. 지한 씨도 방금 했던 말을 꼭 기억해. 하린이 일도 이걸로 끝내.”어차피 자신이 받아들이지 않아도 결과는 변하지 않을 테니, 차라리 주도권을 쥐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다. 그렇게 하면 적어도 자신에게 돌아올 피해를 최소화할 방법을 마련할 수 있었다.강지한은 그녀의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눈빛을 마주하며 잠시 불안감을 느꼈지만, 곧 자연스러운 태도로 돌아갔다.‘심미연이 지금은 이렇게 강하게 나오더라도 곧 다시 굽히고 들어오겠지.’“그럼 네 소식을 기다릴게.”는 그렇게 말하고 병실 문을 열어 안으로 들어갔다.심미연은 그 강렬한 압박감이 사라지자, 온몸에 힘이 풀리며 벽에 손을 짚
육현성이 입가를 만지며 말했다.“이진영, 네가 감히 나한테 주먹질을 날려? 내가 집에 가서 이다은 저년을 아주 제대로 혼쭐 내줄 거야. 이번엔 최소 몇 달은 못 일어날걸?”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하나같이 기고만장했다.“보아하니 육씨 가문이 요즘 꽤 살 만한가 보네. 감히 나 이건명의 딸을 건드려?”이건명이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육현성의 뺨을 힘껏 후려쳤다.“감히 어디서 제멋대로 굴어!”그는 자신의 앞날을 위해 딸을 육씨 가문에 시집보냈었다. 그래도 육씨 가문은 4대 가문 중 하나인데 비록 육현성이 이다은을 사랑하진 않더라도 최소한의 예우는 할 줄 알았다.그래서 이다은이 이혼하겠다고 했을 땐 괜히 유난 떠는 줄 알았는데 방금 그 모든 생각이 송두리째 무너졌다. 이다은이 육씨 가문에서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 이제야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이건명의 등장에 육현성은 순식간에 기세가 꺾였다. 아무리 육씨 가문이 돈 많고 배경 있는 집이라도 지금의 이건명을 함부로 건드릴 수는 없었다.“아버님, 화내지 마세요. 이건 오해예요. 저는 전혀 그런 뜻이 아니었어요.”육현성이 다급히 변명하려 들었다.“됐어. 변명은 필요 없어.”이건명이 이다은의 손을 꽉 잡았다.“다은아, 미안해. 아빠가 잘못했어. 너 이혼하고 싶으면 해. 내가 최고로 실력 좋은 변호사를 붙여줄게.”이다은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아빠가... 나를 이렇게 감싸준다고? 늘 냉정하기만 했던 사람이?’그때 어디선가 박수 소리가 들렸다.“정말 감동적인 부녀지간이네요. 좋은 아버지십니다, 정말.”이진영이 자신의 아버지를 조롱하는 그 목소리의 주인공을 바라본 순간 눈빛이 싸늘하게 변했다.“그... 그쪽이 왜 여기 있어요?”강혁승은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는 한 모금 빨아 연기를 뿜으며 웃었다.“나요? 부모 찾으러 왔죠.”이미 이진영이 그의 정체를 눈치챘기에 더 숨길 이유도 없었다. 오늘 이 자리에 이 사람들이 모두 모인 것도 하늘의 뜻이라 생각한 강혁승은 오늘 결판을 보려 했다.“너...
“문자를 보낸 건 그 여자가 아니라 나예요!”강혁승의 음울한 얼굴에 스며든 미소는 왠지 모르게 오싹했다.이건명의 시선이 그의 얼굴에 멈췄다. 얼굴에 난 깊은 흉터만 아니었다면 이건명 본인과도 놀랍도록 닮은 얼굴이었다.하지만 그의 아내가 낳은 자식은 이다은, 이진영 남매 둘뿐이었다. 그렇다면 이 남자는 누구란 말인가?“건명 씨는 여기 왜 왔어요? 어서 나가요!”문소영이 다급하게 외쳤고 목소리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왜 이렇게 쫓아내려고 안달이에요? 여기까지 왔는데 문제는 해결하고 가야죠.”강혁승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고 그의 눈빛엔 싸늘한 냉기가 서려 있었다.“왜 저 사람한테 문제를 해결하라고 해? 저 사람이랑은 아무 관련도 없어!”문소영은 이건명을 붙잡아 두고 싶지 않았다.심미연은 눈을 가늘게 떴다.‘이 와중에도 이건명을 감싸려 하다니, 그래도 한때는 진심으로 사랑했던 사람이었나 보네.’“관련이 없다고요? 저 사람이 내 아버지인데?”강혁승은 조소를 띤 채 반문했다.“내가 저 사람이 수십 년 동안 도와준 일들을 전부 알고 있는데 한 번 읊어볼까요?”문소영의 눈빛이 순간 흔들렸다.“헛소리하지 마!”“입 다물지 못해!”이건명이 서늘한 눈빛으로 강혁승을 노려보며 날카롭게 쏘아붙였다.하지만 마음속으로는 큰일 났다고 생각했다.‘저 자식이 모든 걸 알고 있단 말이야?’심미연은 입술을 깨문 채 이건명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방원호가 넘겨준 자료가 전부 사실이었던 것이다.하지만 이건명이 한 여자를 위해 불법까지 저질렀다는 건 예상 밖이었다. 진심으로 사랑해서였을까? 아니면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던 걸까?“심미연, 이리 와!”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귀에 들려왔다. 심미연이 깜짝 놀라 돌아보니 깊고 검은 눈동자와 마주쳤다.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그는 의식이 없었는데 분위기는 여전히 무게감이 있었다. 이런 것이 바로 한 회사를 이끄는 대표만의 카리스마와 아우라인가.“멍하니 있지 말고 어서 오라고.”강지한의 말에 심미연은 정신을
문도현은 심미연의 표정이 굳은 걸 보고 머리를 쉴 새 없이 굴리기 시작했다.‘안 되겠어. 일단 지금 이 상황부터 어떻게든 모면해야 해.’하지만 심미연은 그렇게 쉽게 속을 여자가 아니었다. 그가 아무 말이나 둘러대면 단번에 꿰뚫어 볼 게 뻔했다.‘어쩌지?’그때 마침 심미연의 휴대폰이 울렸다.“잠깐 전화 좀 받고 올게요.”“네, 가서 일 봐요. 난 여기 있을게요!”문도현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심미연은 대답도 제대로 못 하고 황급히 사무실을 나섰다.문도현은 기지개를 한껏 켠 뒤 슬며시 일어나 그녀의 책상 앞으로 걸어갔다. 책상 위에 액자 하나가 놓여 있었는데 그 안에 심미연이 다른 사람과 같이 찍은 사진이 한 장 있었다.그런데 그 사진 속에서 심미연의 옆에 박유진이 서 있는 걸 본 순간 문도현은 마치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박유진이랑 심미연이 왜 같이 있어? 말도 안 돼! 절대 이 둘이 이어지게 두면 안 돼!’문도현은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못한 채 홱 돌아서 사무실 밖으로 나가려 했다. 그때 마침 임현이 문을 열고 들어오다 그와 정면으로 부딪쳤다.“아야! 아이고, 아파라...”임현이 낮게 신음하며 얼굴을 찡그렸다.하지만 문도현은 그녀를 밀치고 나가버렸다.임현은 어이없다는 듯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아니, 누가 건드리기라도 했나? 왜 저렇게 화가 나 있지?”마침 그때 심미연이 다시 들어왔다.“뭐라고 중얼거리고 있어요? 문 대표님은요?”“방금 나가면서 저랑 부딪혔어요. 엄청 화난 얼굴이던데요? 아무 말도 안 하고 나가더라고요.”임현은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저 남자, 감정 기복 진짜 심하네.’“잘됐네요. 나 급한 일이 있어서 나가야 해요. 오늘은 임현 씨가 사무실 좀 맡아줘요.”심미연은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가방을 챙겨 들고 서둘러 나가버렸다.방금 강지한이 의식을 되찾았다고 한다.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에게 직접 물어봐야 했다.그가 어떻게 그녀가 교통사고를
문도현의 치명적인 얼굴에 서서히 미소가 떠올랐고 깊고 그윽한 눈빛엔 묘하게 사람 마음을 사로잡는 기운이 스쳤다. 그 눈으로 마음속 깊은 비밀까지 꿰뚫어 볼 것만 같았다.“정말 여기서 얘기할 거예요?”그는 나직하면서도 묘하게 귀를 간질이는 목소리로 말했다.“누가 사진이라도 찍으면 어쩌려고요?”그의 목소리는 낮고 묵직하면서도 이상하리만치 매혹적이었다. 마치 한 음절 한 음절이 심장을 울리는 현처럼 듣는 이의 감정을 툭툭 건드렸다.유흥가를 오래 드나든 남자답게 문도현의 말투나 몸짓 하나에도 범상치 않은 분위기가 서려 있었다. 그의 존재만으로도 상대방은 쉽게 그에게 빠질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그 뒤에 자리 잡은 견고한 집안 배경은 그의 존재에 신비로움과 권위를 덧씌웠다. 한 번만 눈빛을 주고받아도 수많은 여자가 그를 위해 기꺼이 심연으로 빠져들곤 했다.심미연은 가늘고 곧은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그래요. 그럼 위에 올라가서 얘기하죠.”그녀는 말을 마치자마자 차 문을 잠그고는 성큼성큼 앞서 걸었다. 그녀의 발걸음엔 흔들림 없는 결의가 담겨 있었다. 아무리 개인적으로 복잡한 감정이 얽혀 있더라도 문도현은 사건을 의뢰하러 온 손님이었다. 심미연은 일과 사적 감정을 분명히 구분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문도현의 시선은 무심결에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라인을 훑고 지나갔다. 그러자 곧 뇌리에 수많은 기억의 파편이 번뜩이듯 스쳐 지나갔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길들지 않은 야수 하나가 깨어나는 느낌이었다.이제야 그는 자신이 여자에게 설레는 감정을 잃은 게 아니란 것을 깨달았다. 다만 평범한 여자들에게 더 이상 설레지 않았던 것뿐이었다. 흔한 여자들은 이제 그의 마음을 건드릴 수 없지만 심미연은 예외였다.그 순간 심미연의 차분하고 냉정한 목소리가 그의 흐트러진 정신을 다시 현실로 끌어당겼다.“문 대표님께서 소송을 의뢰하신다네요. 임 변호사님께서 맡아주세요.”“알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문 대표님.”임현이 공손하게 몸을 살짝 기울이며 안내했
심미연은 흩날리던 생각을 차분히 거두고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띠었다. 그리고 궁금한 듯 물었다.“우리 태하 진짜 똑똑하네. 어떻게 그런 질문을 할 수 있는 거야?”아직 겨우 세 살이지만 심태하의 마음은 놀랄 만큼 세심하고 예민했다. 또렷한 눈망울은 마치 세상의 감정 흐름을 꿰뚫어 보는 듯했고 그렇게 꼼꼼히 살피는 모습에 심미연은 종종 놀라곤 했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박유진이 심태하를 정성스럽게 길러온 시간이 아이를 이토록 똑똑하고 배려 깊게 자라게 만든 것이다.“아까 아빠랑 통화할 때 엄마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어요. 뭔가 걱정하는 게 있는 것 같았어요. 그리고 저한테 말 걸었을 때도 평소처럼 웃고 있지 않았어요. 그래서 엄마가 혹시 슬픈 건가 하는 생각이 떠올랐어요.”심태하의 말은 또렷하면서도 조심스럽게 흘러나왔다. 단어 하나하나에 엄마를 향한 깊은 애정과 이해가 담겨 있었다.심태하가 보기에 박유진이 집에 있을 땐 심미연은 늘 기분이 좋아 보였고 환하게 웃는 얼굴이 참 예뻤다.“엄마가 안 웃었어?”심미연은 웃음을 터뜨렸다.‘녀석, 정말 못 말려.’겨우 세 살에 이 정도인데 나중에 더 크면 얼마나 영리해질지.“네, 안 웃었어요.”심태하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엄마, 아빠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런 거예요?”심태하의 목소리는 여전히 앳됐지만 말투는 왠지 어른스러웠다. 꼭 사람 마음속을 들여다볼 수 있기라도 한 듯했다.심미연의 마음은 그 말 한마디에 확 풀렸다. 그녀는 아들의 코끝을 살짝 잡아당기며 말했다.“자, 얼른 아침 먹자.”그녀의 말투엔 아낌없는 사랑이 담겨 있었다.이 아이는 정말 하늘이 내려준 선물이다.“아빠가 보고 싶으면 아빠한테 전화하면 되죠!”심태하가 장난기 가득한 눈빛으로 윙크했다.‘나도 아빠가 보고 싶은데 엄마가 안 보고 싶을 리가 없지. 맞아, 분명 그럴 거야!’심미연은 그 말에 또 한 번 웃음을 터뜨렸다.“그래, 네 말대로 할게.”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물론 박유진이 보고 싶지만 그에게 전화하진
하지만 그 깊은 애정과 놓기 싫은 마음은 오히려 박유진을 현실이라는 갈림길 앞에서 망설이게 만들었다.그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지금 결정을 내리지 않으면 심미연만 괴로운 상황에 빠질 것이라는 걸. 그 맑고 투명한 눈동자가 자신의 망설임으로 인해 흐려지는 건, 그녀의 세상이 자신 때문에 흔들리는 건 차마 보고 있을 수 없었다.그렇다고 그녀를 놓아버리면 영원히 잃게 될 텐데... 그 아픔을 자신이 감당할 수 있을지 박유진 본인조차 알 수 없었다.“아빠, 왜 말이 없으세요? 허락한 거죠?”심태하의 목소리는 천진난만하게 들떴다. 마치 머릿속에 따뜻한 한 가족의 그림이 그려지기라도 한 듯.‘아빠가 돌아오면 엄마랑 나랑 셋이 모여 저녁 먹고 같이 웃고 얘기하고...’심태하의 마음속에서 그려낸 가장 순수한 행복의 모습이었다.그러나 그 순수한 소망 앞에서 박유진의 마음은 송곳에 찔린 것처럼 아팠다.그는 알고 있다. 이번 결정을 가볍게 내려서는 안 된다. 누구도 상처받지 않게 하려면 정말 신중해야 했다.하지만 사랑과 책임 사이에서 그가 걸어갈 수 있는 길은 대체 어디란 말인가? 그는 지금 사랑을 저버리지 않으면서 심미연과 아이를 지킬 방법을 찾고 있다.하지만 그런 길이 과연 있을까? 이 선택은 너무나도 어려웠다.“아빠, 나 이렇게 열심히 얘기하고 있는데 왜 아무 말도 안 해요?”심태하는 고개를 갸웃하며 미간을 찌푸렸다.평소 같았으면 박유진은 재밌는 얘기도 해주고 자기 말에 웃어주었을 텐데, 오늘따라 너무 이상했다.‘혹시... 내가 말실수했나?’그때 박유진의 다급하지만 부드러운 목소리가 심태하의 귀에 들려왔다.“태하야, 곧 비행기가 이륙해서 아빠가 휴대폰을 꺼야 돼. 오늘 밤에 다시 이야기하자. 꼭이야.”박유진은 심미연을 당장이라도 보러 가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억눌렀고 말하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네! 알겠어요, 아빠! 그럼 오늘 밤에 꼭 통화해요. 약속했으니까 안 하면 안 돼요!”심태하의 목소리에 눈치채기 힘든 외로움이 살짝 섞여 있었다.
심미연은 멍해졌고 아까 자신이 박유진에게 연락을 시도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때 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대신 날아온 건 단 한 줄의 차갑고 무미건조한 메시지. 기대했던 목소리는 끝내 들을 수 없었다.그런데 지금 아들 심태하가 전화를 걸자 박유진은 놀랍게도 전화를 받았다.“아빠, 지금 어디예요? 이틀 뒤면 제 생일이에요! 아빠가 놀이공원 같이 가자고 했던 거 잊으시면 안 돼요!”심태하의 말투엔 아이 특유의 해맑은 기쁨이 가득 담겨 있었고 단어 하나하나가 살아서 튀어나오는 듯했다.전화기 너머로 들려온 박유진의 목소리는 한겨울 얼음도 녹일 만큼 다정했다.“아빠 지금 진성으로 가는 비행기 타러 가는 중이야. 곧 이륙이라 휴대폰 꺼야 해. 진성에 도착하면 바로 전화할게. 약속!”그 말에는 미안함과 애틋함이 가득 실려 있었다.사실 박유진은 심태하가 생일 이야기를 할 줄은 전혀 예상 못 했다. 어젯밤에 워낙 정신이 없어 그런 중요한 약속마저 깡그리 잊고 있었던 것이다.“아빠가 보내준 선물 잘 받았어요! 너무너무 마음에 들어요, 고마워요!”심태하는 아직 다 하지 못한 말이 많은 듯 아빠에게 털어놓고 싶은 게 가득한 눈치였다.박유진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는데 햇살이 쏟아져 내려 유난히 눈부셨다. 그는 천천히 눈을 가늘게 떴고 그 강렬한 빛이 속눈썹 아래에 그림자를 드리웠다.그 순간 그의 마음속엔 오로지 한 사람, 심미연의 얼굴만이 떠올랐다. 그녀와 떨어져 있는 모든 시간이 하나같이 그리움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 그리움이 너무 커서 박유진은 당장이라도 비행기에서 뛰어내려 달려가고 싶을 만큼 벅찼다.“아빠... 지금 너무 힘들죠? 그럼 회사 팔고 그냥 집으로 돌아와요. 제가 돈 많이 벌어서 아빠랑 엄마 다 먹여 살릴게요!”심태하의 순수한 눈빛에 진심 어린 다짐이 담겨 있었다. 그에겐 돈을 많이 벌어서 가족을 지킬 거라는 꿈이 있었다.심미연은 그런 아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통통한 볼살에 아직 아기 티가 남았지만 심태하의 마음속
심미연 역시 조금 당황했다. 하지만 이지연이 잘못 알아본 것일 수도 있기 때문에 확신이 서지 않았다.“지연 씨, 다시 한번 제대로 확인해 봐요. 결과가 똑같은지 꼭 잘 봐요.”혹시라도 착오가 있을 수도 있으니까.“그럼 제가 다시 확인해 볼게요! 뭐든 나오면 바로 보고드리겠습니다. 보스, 그럼 끊을게요!”이지연은 말 끝나기가 무섭게 전화를 뚝 끊었다.심미연은 휴대폰을 쥔 채 한참 멍하니 앉아 있었다. 아까 이지연이 했던 말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이건명과 문소영이 예전에 그런 사이였다고?’그런데 왜 아무도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던 걸까? 아무도 깊게 파고들지 않았기에 묻혀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결혼 전에 누굴 만나든 그건 사생활인데 그걸 굳이 숨긴 이유가 뭘까?심미연이 이 모든 게 어딘가 석연치 않다고 느끼고 있을 즈음, 밖에서 누군가 소리쳤다.“엄마! 나 배고파요! 우리 빨리 아침 먹으러 가요!”심미연은 생각을 접고 고개를 들어 활짝 웃는 아들을 바라봤다.“그래, 가자.”심태하가 달려와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엄마, 며칠 뒤면 제 생일이잖아요. 생일 파티에 상미도 초대하고 싶은데, 그래도 돼요?”심미연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어젯밤의 친자 확인 결과가 떠올랐다. 강상미는 그녀의 딸, 즉 심태하와 쌍둥이였다. 그래서 둘의 생일도 당연히 같았다.심태하의 생일 파티에 강상미가 온다면 그건 곧 둘이 같이 생일을 보내게 되는 셈이다.“엄마, 안 돼요?”심미연이 대답하지 않자 심태하가 다급히 물었다.그녀는 웃으며 아이를 안심시켰다.“그럼, 당연히 초대해야지. 너희 둘이 같이 생일 파티하면 되겠네.”“정말요? 엄마 최고! 사랑해요!”심미연은 아들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태하야, 너 엄마가 어제 말한 거 잊은 거 아니지? 상미가 바로 태영이야. 너랑 똑같이 엄마 배에서 나왔고 너희 둘은 쌍둥이야. 그래서 생일도 똑같아.”강상미에 관한 일은 이미 방원호에게 조사를 맡긴 상태였다. 꼭 알아내야 한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심미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의아한 기색을 담아 물었다.“무슨 일이길래 그래요?”이지연은 숨을 깊이 들이쉬고 일부러 속도를 늦추며 차분하게 말했다.“온지유 씨가 도망쳤어요.”“언제요?”심미연의 눈빛이 반짝이며 날카로워졌다. 누가 이 일을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는 건지 의심이 스쳤다.“어젯밤에요.”이지연의 목소리는 한껏 가라앉아 있었고 자책감이 가득 배어 있었다.“죄송해요. 제가 방심했어요.”심미연은 손을 저으며 말했다.“미안해하지 마요. 이건 지연 씨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어요.”이지연은 입술을 꼭 깨문 채 불안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그럼 이제 어떻게 하죠? 제가 당장 찾아올까요?”심미연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녀는 손끝으로 휴대폰을 천천히 만지며 생각했다.“잠깐만 생각 좀 해볼게요.”어젯밤 강지한이 교통사고를 당한 장면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맴돌았다. 혹시 온지유의 실종과 강지한이 관련 있는 걸까? 만약 강지한이 온지유를 구한 거라면 도대체 어디서 그런 정보를 얻은 거지? 끝도 없이 밀려드는 의문들이 머리를 지끈거리게 했다.“참, 보스. 어젯밤에 스승님 못 보셨어요?”이지연이 물었다.심미연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사실은 봤었다. 그녀는 진운혁이 차를 몰고 떠나는 걸 보고 따라붙었다가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는 걸 말하지 않았다.“그럴 리가요? 제가 분명히 확인했는데... 스승님께서 이진영 씨랑 같이 식사하고 계셨어요!”이지연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심미연은 다시 한번 미간을 찌푸렸다.문득 이전에 마주쳤던 진운혁의 모습들이 떠올랐고 그 순간 한 가지 의심이 그녀의 마음속을 훑고 지나갔다.‘그때 내가 본 스승님은... 정말 스승님이 맞았을까? 만약 누군가가 스승님을 사칭하고 있었다면 그 목적은 대체 뭘까?’그때 이지연의 흥분한 목소리가 심미연의 생각을 끊어냈다.“보스! 새로운 정보를 발견했어요!”“무슨 정보예요?”심미연은 본능적으로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눈을 가늘게 뜨고 귀를 기울이자 이지연의 들뜬 목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