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모의 눈빛에 광이 돌았다.김단은 마치 자신이 꿈을 꾸는 것 같았다.천천히 다가가 조심스럽게 불렀다.“조모…”조모가 눈을 들어 미소를 지어 보였다.“단아, 이리 와서 안아주렴.”곧이어 김단이 다급하게 그녀의 품에 안겼다.“흑흑, 농이 지나치십니다. 소녀는, 조모께서...”김단은 끝내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울고 나서 허약해졌던 몸은 조모 덕분에 활기를 되찾은 것 같았다.잃었다가 다시 얻은 기분에 묘해졌다.이때, 그들의 뒤로 목소리가 들려왔다.“조모.”다름 아닌 임학이었다.김단은 눈살을 찌푸렸다.조모의 품에서 나와 그를 쳐다보았다.혹여 임학이 임원을 데리고 방 안으로 들어오면, 뺨을 때려 내쫓을 생각이었다.하지만 다행히도 임학은 조모께 피해를 끼치지 않았다.그는 천천히 조모의 침상 곁으로 다가갔다.두 눈이 빨갛게 달아 올랐다.“조모께서 눈을 뜨시니 다행이옵니다.”조모는 그를 보고 마음이 복잡했다.임학은 관저의 유일한 남식이다.어렸을 때부터 많은 사랑을 받아 왔으며, 마찬가지로 그녀도 임학을 아꼈다.하지만 김단에게 한 짓을 떠올리자 마냥 기쁘지 않았다.잠시 생각하고는 결국 임학에게 손을 내밀었다.임학은 마음이 쓰렸다.곧이어 조모의 손을 붙잡았다.조모는 그의 손을 잡고 미소를 지어 보였다.“아이고, 우리 학이가 이렇게나 컸구나. 이 조모의 손보다 훨씬 크다.”웃자고 하는 말에 임학의 눈가가 더욱 붉어졌다.조모가 계속 말을 이었다.“내 네 두 사람이 어렸을 때가 아직도 눈에 훤하다. 하나는 나무에 달려 있는 복숭아를 먹고 싶어 했지, 하필 제일 꼭대기에 있는 게 맛있다면서 고집을 피웠어. 또 하나는 여동생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원숭이처럼 나무 위로 올라갔지. 이 조모가 얼마나 놀랐는지 아느냐? 진산군을 불러서 망정이지, 잘못해서 넘어지기라도 하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몰라.”임학과 김단은 조모가 과거 일을 말하는지 알 수 없었다.두 사람은 이미 잊은 듯 했다.조모는 미소를 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조모..”임학의 목소리가 떨렸다.이유는 모르지만 불안해지기 시작했다.조모는 전보다 더 정정해 보였다.목소리에도 힘이 가득했다.하지만..알지 못하는 불안감이 엄습했다.가만히 있는 임학을 보고 조모의 안색이 어두워졌다.“어찌, 조모의 말이 말 같지가 않느냐?”“오해십니다!”임학은 서둘러 부인했다.다급한 마음에 목소리가 떨렸다.“손자, 어떠한 것이든 다 따르겠나이다!”“그래야지!”조모는 그제야 안심한 듯 보였다.잡고 있던 임학의 손을 놓고 다시 미소를 지었다.“가서 네 아비를 불러와라. 조모가 할 말이 있다, 전하라.”임학이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김단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마음에 다급하게 눈물을 닦아냈다.그는 그제야 방에서 나갔다.임학이 나가자마자 김단이 조모를 불렀다.“조모..”떨리는 목소리에 두 눈에는 걱정이 가득했다.“피로하시지 않사옵니까? 아니면 잠시 쉬시는 것이 어떠 하옵니까?”조모는 고개를 저었다.그리고 손가락으로 장농을 가리켰다.“가서 물건을 가져오너라.”김단이 멈칫했다.이 전에 조모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장롱 안에는 자신을 위해 남겨 둔 물건이 들어 있다고 했다.허나 지금 보여 주려는 이유가 무엇일까.마음속 깊은 곳에서 불안함이 밀려왔다.김단은 움직 일 수가 없었다.곧이어 조모가 그녀를 보고 재촉했다.“단아, 가져 오거라.”김단은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장농을 열자 작은 나무 상자가 들어 있었다.금사남목으로 제조되어, 사방에는 금이 둘러져 있었다.김단은 조심히 상자를 들어 조모에게 가져다주었다."여기 있사옵니다."조모는 상자를 건네받았다.마른 손으로 상자를 쓰다 듬었다.마치 먼 과거를 생각하는 듯한 표정이다.“내 어머니가 남겨주신 유품이다…”금사남목의 나무 상자는 조모의 혼수 중 하나다.작은 탄식을 몇 번 하고는 그제야 상자를 열었다.안에는 정갈하게 싸인 은지폐와 토지 증서를 제외하고, 투명하고 윤기있는 옥패가 들어있었다.옥패에는 '목' 이라는 글자가 적혀있다.
김단은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하지만 도중에도 여러번 고개를 돌려 조모를 바라보았다.그녀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그러고는 서둘러 매화당으로 달려갔다.나무 상자를 방 안에 놓고, 다급하게 세수를 했다.옷도 갈아입지 않은 체 다시 안채로 향했다.김단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진산군이 조모의 침상 옆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하지만 두 사람의 기류가 이상했다.김단에게 보였던 미소는 온데간데 없고,조모는 그저 어두운 위엄 있는 표정을 짓고 있다.김단이 돌아오자 조모가 입을 열었다.“단아, 이리 오거라.”그녀의 말에 서둘러 다가갔다.진산군의 옆으로 다가가자 조모가 말했다.“꿇거라.”김단은 조모의 말에 의도를 알아차릴 수 없었다.하지만 거부할 수 없는 위압감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조모가 다시 말을 이었다.“김단, 넌 임 씨 가문에서 열여덟 해를 보내었다. 혈연의 관계는 없다, 허나 네 아비와 어미는 어렸을 때부터 널 지키고 아껴주며, 친자식처럼 대해주었다. 그 점은 인정하느냐?”15년 동안 김단을 지키고, 아껴준 것은 사실이다.김단은 고개를 끄덕였다.“인정하는 바옵니다.”“그리하면 네 아비께 머리를 조아리거라.”조모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김단은 감히 원망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곧이어 몸을 돌려 진산군에게 머리를 조아렸다.조모가 다시 말을 이었다.“네 친 여식이 돌아오고 나서, 넌 양녀를 엄격하게 대했다. 몸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다치게 한 점에 대해 인정하느냐?”진산군의 어깨가 떨렸다.그저 고개를 떨구어 그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하지만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조모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그리하면 부녀의 정은 다 하였다. 내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결정하겠노라, 내 앞에서 세 번 손뼉을 치거라.”손뼉을 세 번 치는 것은 절연을 의미한다.진산군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어머니!”그는 조모가 이러한 결정을 내릴 줄은 몰랐다.김단은 심장이 떨려왔다.자신에게 머리를 조아리라 한 것은 임 씨 가문에게 길러준 은혜를
“조모!”“어머니!”김단과 진산군이 그녀를 불렀다.하지만 조모는 눈을 뜨지 않았다.김단이 다급하게 의원을 불렀다.“의원! 어서 의원을 부르거라!”말하는 도중에도 조모의 손을 놓지 않았다.조모의 손을 자신의 얼굴에 붙였다.“조모, 눈을 뜨시옵소서. 제발, 제발!”김단과 진산군이 아무리 불러도 조모는 눈을 뜨지 않았다.미소를 지은 체 움직이지 않았다.의원이 문밖에 있다가 그들의 고함 소리에 서둘러 안으로 들어왔다.그가 손을 뻗어 조모의 코에 갖다 댔다.그리고 목의 맥을 짚고는 손을 걷었다.얕은 탄식을 내쉬고는 입을 열었다.“대감마님, 아씨. 큰 마님께서 숨을 거두셨습니다...”“그럴 리가 없다!”진산군이 다급하게 부인했다.“방금 전까지 아무렇지도 않으셨단 말이다!”김단도 믿을 수 없었다.“열흘은 버틸 수 있다고 하셨지 않으셨습니까? 하루도 지나지 않았소!”의원이 눈살을 찌푸렸다.그들에게 예의를 갖추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남아있는 힘을 다 쓰셨을 거라고 추측되옵니다.”마치 해가 지기 전에 햇살이 있는 힘을 다해 비추는 것과 같다.하지만 의원도 정확하게 알 도리가 없었다.며칠 더 버틸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하지만 수 나인은 알고 있었다.그녀는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훌쩍거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큰 마님께서는 큰 아씨께서 다시 수모를 겪을까 두려워하시었을 것이옵니다. 젖 먹던 힘까지 다하여 큰 아씨를 도우려 하신 것이지요.”그녀의 말에 의원이 깨달은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큰 마님이 깨어난 것은 다름 아닌 집념, 때문이었다.집념 때문에 흐려진 의식에도 깨어 날 수 있었던 것이다.수 나인의 말에 김단은 미친 것처럼 울기 시작했다.“다 제 탓입니다, 조모...”조모를 벼랑 끝까지 내민 것은 자신이다,남아있는 힘을 쓰게 한 것도 자신이다.결국 자신의 자유를 쓰기 위해 조모가 희생 한 것이다.자신이 아무 힘이 없기에, 조모가 걱정을 하고, 조모가 마지막 힘을 내뱉었다.모두 자신의 탓이다.김단
그가 15년 동안 키운 여식이다…비통함이 순식간에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진산군의 눈가가 붉어졌다.하지만 사람들 앞이라 꾹 참을 수밖에 없었다.그는 앞으로 계속 걸었다.어디까지 왔을까.비통한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았다.정신을 차려 주위를 살폈다.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등불 하나, 빛 하나조차 없었다.진산군은 그제야 힘이 다 풀린 듯 바닥에 엎드렸다.곧이어 마치 거대한 바위가 깨질 것 같은 고함을 질렀다.비통함이 어느새 통곡으로 변했다.날이 밝기도 전에 조모의 부고가 사가의 종친들에게 전해졌다.소한은 부고 소식을 받고 서둘러 진산군 관저로 향했다.빈소 안.흰 비단이 높게 걸려 있다.임학은 임 씨 부인과 나란히 무릎을 꿇고 있었다.소한이 향을 피우러 들어오고 그들에게 예의를 갖추었다.하지만 그는 빈소를 둘러보기 바빴다.임학은 소한의 행동에 눈살을 찌푸렸다.임 씨 부인에게 몇 마디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곧이어 소한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임학이 입을 열기도 전에 소한이 물었다.“단이는 어딨소?”임학은 짜증이 밀려왔다.“울다가 몇 번이나 기절했는지 모르네, 지금은 의원이 준 약을 먹고 쉬는 중이오.”그는 말하는 도중에도 소한을 노려 보았다.하지만 소한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임학은 분노를 억누르며 물었다.“소한, 원이는 궁금하지 않은 것이오?자네는 누구의 약혼자인지 인지하시오!”그의 말에 소한은 눈을 내리 깔았다.하지만 눈썹은 움찔거렸다.당연하다는 듯 임원의 안위는 묻지 않았다.임학은 그의 이러한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하지만 어찌 할 도리가 없었다.곧이어 소한의 뒤를 한 번 보고 물었다.“정암은 어디갔소?”정암은 무조건 소식을 들었을 것이다.그를 만나고 싶지는 않지만 지금 김단을 위로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정암뿐이다.소한이 입을 열었다.“갔소.”“어디를?”임학이 이해가 가지 않는 듯이 물었다.“어디를 갔단 말이오?”“당우리의 산적이 촌 사람을 죽였소, 전하께
곧 많은 사람들이 추모를 위해 진산군 댁으로 모여들었고, 임원의 울음소리가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임씨 가문의 친딸이 양녀에게 무릎을 꿇고 애절하게 통곡하는 모습을 보자 사람들은 순식간에 수군거리기 시작했다.친척 중 한 명이 다가와 김단을 꾸짖었다. “김단, 너는 어릴 적부터 성격이 거칠어서 원이를 괴롭히곤 했었지. 오늘은 큰 마님께서 하늘에서 보고 계실 거다!”김단이 어려서부터 성격이 급하고 예민했기 때문에 모두 김단이 임원을 괴롭혔다고 생각했다.허, 정말 기가 찼다!김단의 얼굴은 여전히 평온했지만, 핏발 선 눈에는 증오가 가득했다.김단은 임원을 죽일 듯 노려보며 차갑게 말했다. “들으셨소? 큰 마님께서 지켜보고 계신다는 군!”임원이 바로 큰 마님을 죽인 살인범인데, 어떻게 감히 그녀의 장례식에 참석할 수 있을까?!임원은 그 말을 듣고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그녀 역시 두려웠다!지금 이 순간 큰 마님이 어딘가에서 자신을 노려보고 있을 것 같았다!하지만...그녀는 진산군 댁의 친딸이었다. 그런 그녀가 큰 마님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뭐라고 수군거리겠나?그렇기에 두려웠음에도 와야 했다.가슴이 죽을 듯이 아파와도, 오래 못 버티고 기절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녀는 큰 마님의 장례식에서 쓰러져야 했다!그런 생각을 하자 임원의 몸이 떨리기 시작했고, 가슴의 압박이 더욱 아프게 조여왔다. 창백했던 얼굴은 더욱 초췌해 보였다. “김씨 낭자, 비록 내가 큰 마님과 겨우 3년밖에 살지 못했고 낭자만큼 큰 마님과 정이 깊지는 않지만, 나는 큰 마님의 친손녀이오. 큰 마님을 보내드리게 해주시오!”'친손녀'라는 말에 힘을 주어 강조했다.주변 사람들은 이를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암, 그렇지. 임원이야말로 큰 마님의 친손녀이지. 너는 양녀인 주제에게 왜 저 아이를 막는 거냐?”“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지. 오늘처럼 중요한 날, 양녀인 네가 어떻게 이렇게 행동할 수 있는게냐?”김단은 다른 사람들의 말 따위는 조금도 신경 쓰이지
그렇게 말하고는 몸을 돌려 영정 앞으로 향했다.조모의 죽음으로 인해 그녀는 마치 심장을 잃어버린 망자와 같았다. 가슴속 텅 빈 공허함 외에는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그녀는 그들과 더 이상 얽히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가족의 연이 끊어졌으니, 일단 지금은 조모를 잘 보내드리는 것이 더 중요했다.만약 임학이 제정신이라면, 오늘 임원을 영정 앞에 오게 하지 않을 것이다.그렇지 않다면, 그녀는 바로 사람을 불러 임원을 내쫓아 버릴 것이다!김단의 힘 없는 뒷모습을 보며, 임학의 마음도 저절로 아파왔다.품 안의 누이가 흐느끼는 소리를 들은 임학은 정신을 차리고 임원을 바라보며 말했다. “원아, 몸에 상처도 생겼으니 일단 돌아가서 쉬거라.”그는 남들이 들을까 작은 목소리로 말하며 임원의 상처로 화제를 돌렸다.그래야 임원이 조모를 화나게 해 죽였다는 사실이 드러나지 않을 터였다.하지만 임원은 초조해하며 임학의 팔을 붙잡고 눈물을 글썽거렸다. “오라버니...”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임학에게 가기 싫다고 말하고 싶었다.영정 앞에 무릎을 꿇고 임씨 부인 옆에 앉아 사람들에게 자신이 임씨 집안의 딸임을 보여주고 싶었다.하지만 임학은 인상을 찌푸리며 더욱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 몸이 중요하다.”말투는 걱정하는 듯했지만, 임원은 그가 다른 것을 걱정하고 있음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그는 김단이 했던 말을 더 신경 쓰고 있었다.조모가 그녀를 원하지 않는다!임원은 포기하지 않고 두 손으로 임학의 팔을 꽉 붙잡았다.하지만 임학은 이미 마음을 굳혔고, 옆에 있던 하인에게 명령했다. “어서 아씨를 방으로 데려가 쉬게 하거라.”그의 말에는 반박할 수 없는 강한 어조가 담겨 있었다.임학이 임원 앞에서 이렇게 단호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처음이었다. 임원은 가슴이 답답해지며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오늘 영정 앞에 갈 수 없다.그녀는 이내 하인의 부축을 받고 천천히 일어섰고, 일부러 다리를 후들거리며 비틀거렸다.사람들이 자신을 보고
이틀 후, 큰 마님의 장례가 치러졌다.김단은 이틀 동안 거의 잠을 자지 못했다. 조모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었고, 임씨 가문 사람들이 자신이 잠든 사이에 임원을 데려와 조모를 괴롭힐까 봐 걱정했기 때문이다.그래서 그녀는 아무것도 먹지 않았고, 울지도 않았다.감정을 조절하지 못해 울다가 기절해서 임원에게 기회를 주고 싶지 않았다.임원이 조모를 죽게 만든 것도 모자라, 그녀의 장례를 이용해 자신의 효심을 과시하게 둔다?그녀는 절대로 용납할 수 없었다!김단은 그렇게 조모의 곁을 떠나지 않고 조용히 자리를 지켰다.임씨 가문 사람들은 김단의 성격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큰 마님의 마지막을 편안하게 보내드리고 싶었고, 집안의 추악한 일을 외부에 알리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임원은 영정은 물론 그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김단은 임원이 영정 앞에 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은 건 물론, 큰 마님의 장례 행렬에 따라가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임씨 가문 사람들은 임원이 슬픔에 잠긴 나머지 몸이 아파서 내내 모습을 보이지 않았는 것이라고 말했다.그 말을 몇 명이나 믿을지 김단은 알지 못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그녀는 조모가 편안하게 저세상으로 가시기를 바랄 뿐이었다.김단은 장례 행렬을 따라 산에 올라가 조모의 무덤에 흙을 덮고 나서야 힘이 빠져 쓰러졌다.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3일 뒤였다.김단은 눈을 뜨고 익숙한 방을 둘러보았지만, 마치 다른 세상에 와 있는 것 같았다.머리가 멍하고 오늘이 몇일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몸에 힘이 하나도 없는 것이 마치 큰 병을 앓고 난 것처럼 느껴졌다.목이 너무 말랐다.그녀는 억지로 몸을 일으켜 물을 한잔 마시려 했다. 두 발이 아직 땅에 떨어지기 전, 그녀의 눈에 침대 옆에 놓인 나무 상자가 들어왔다.작고 아름다운 금색 상자로, 사방이 금으로 둘려져였다.김단의 머릿속에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고, 문득 조모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그녀를 가장 아끼고 보호해주었던, 모든 것을 그녀에게 주었던 조모가, 떠났
이튿날 아침, 김단은 궁무를 맡지 않았기에 평양관저에 머물며 맹영지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낯선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탓인지 맹영지의 눈빛에는 두려움이 서려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김단의 곁에 있을 때만큼은 그녀의 표정이 한결 편안해졌다.조용한 정원, 김단은 맹영지와 함께 은은한 향기를 풍기는 계수나무 아래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숙희가 건네준 과자가 들려 있었고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번져있었다. 맹영지는 고개를 들어 만개한 계화를 바라보며 평온한 표정을 지었다. 어제 소하가 평양관저를 찾아왔으나 그는 맹영지와의 만남을 최대한 피하려 애썼다. 아마도 불필요한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함이었을 것이다.김단은 맹영지를 바라보며 과거 소하가 왜 그리도 그녀를 칭찬했는지 알 것 같았다. 한때 소하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여인답게 그녀는 고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하지만 동시에 의문이 들었다. 그렇게 가까웠던 두 사람이었는데 맹영지는 어쩌다 소하에게 독을 먹이려 했던 것일까?김단은 서두르지 않기로 했다. 맹영지의 몸과 마음이 회복되면 그때 자연스럽게 그 답을 들을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김단이 생각에 잠겨 있던 찰나 평양관저의 겸인이 급히 달려와 말했다.“아가씨, 맹가 사람들이 도착했습니다.”이런 큰일이 발생했으니 맹씨 집안에서 그녀를 보러 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김단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겸인에게 말했다.“알겠소. 이리로 모셔오시오.”잠시 후, 맹씨 부인이 정원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김단에게 예를 갖추어 인사한 뒤 슬픈 눈으로 자신의 딸을 바라보았다. “김 의원님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의원님이 아니었다면 제 딸이 그 짐승 같은 자에게 학대받으며 살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을 것입니다.”말을 마친 맹씨 부인의 눈동자가 붉어졌다.김단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맞이하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과찬이십니다, 맹씨 부인. 민태훈, 그 자의 말에 따르면 맹영지 아가씨의 병은 이미 4~5년 전부터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완전히 회
소한은 코웃음을 치며 말없이 등을 돌렸다. 그때 뒤에서 들려오는 소하의 조용한 목소리가 방안의 침묵을 깨뜨렸다.“이번에는 정말 잘했어.”영의정 저택에서 벌어진 일은 소한이 형벌을 받은 후에야 비로소 소하의 귀에 들어갔다. 만약 소한이 과감하게 영의정 저택에 침입하지 않았다면 김단은 쉽게 그곳을 빠져나오지 못했을 것이다.비록 민씨 사람들이 직접적으로 김단을 해치지 못한다고 해도 그녀가 겪었을 모욕과 고통은 상상하기 어려웠다.소하의 갑작스러운 칭찬에 소한은 많이 당황한 듯했다.“제가 충동적이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때로는 그 충동이 좋은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지.”소한은 아무 말 없이 그저 김단의 얼굴을 떠올렸다. 처음에 그녀도 자신을 발견하고 놀란 듯했지만 곧 냉랭한 표정으로 일관하였다. 김단은 마차에 오를 때까지 자신에게 한마디도 건네지 않았다.과거의 그녀였다면 그가 나타나자마자 바로 그의 품에 안기며 그를 향해 미소 지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그녀는 너무나도 차갑게 변해버렸다. 자신을 외면하는 그녀가 소한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그는 자신이 무엇을 잃었는지 그리고 얼마나 큰 실수를 저질렀는지를 다시금 깨달았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주먹을 꽉 쥐며 굳게 결심했다.그는 잃어버린 것을 되찾기 위해 이미 어떤 대가든 치를 준비가 되어 있었다.반 시진 후, 김단은 방 안에서 멍하니 앉아 있었다.그러자 숙희가 조심스럽게 그녀를 불렀다.“아가씨?”김단은 정신을 차리고 숙희를 바라보았다.“무슨 일이냐?”“두 도련님께서는 모두 돌아가셨습니다.”김단은 고개를 끄덕이며 방금 전 발생한 일을 되새겨 보았다. 그녀는 소한이 오랫동안 계획해 온 것을 포기하면서까지 자신을 선택했다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과거에도 그는 소가를 위해, 전하를 위해 심지어 임원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다. 그러나 그녀만은 제외였다.그녀는 소한이 자신의 어머니를 걱정하는 척하며 평양관저로 따라온 것도 단지 자신의 동정심을 얻기 위한 수단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상처
김단은 아무 말 없이 소한을 부축하며 걸었다. 궐에서 나오는 길은 유난히 길고 고요했다. 그들의 발걸음은 무겁고 느렸으며 말없이 흐르는 시간 속에서 서로의 존재를 느끼고 있었다.궐문에 도착했을 때 소한의 마차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는 아마도 말을 타고 왔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의 상태로 다시 말을 타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된 김단은 곁에 있던 경씨에게 부탁했다.“도령님, 장군님을 먼저 집으로 모셔다 주실 수 있겠습니까?”그러자 소한이 놀란 듯 김단을 바라보며 물었다.“내게 약을 발라주지 않겠다는 것이오?”김단도 당황해하며 되물어 보았다.“소가에는 의원이 없습니까?”소한은 김단의 물음에 할 말을 잃었다. 자신의 의도가 너무 노골적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어머니께서 내가 또 다쳤다는 걸 아시면 얼마나 걱정하겠소? 그러니 그냥 근처에서 치료받을 것이오. 낭자는 신경 쓰지 말고 먼저 돌아가시오.”김단은 그의 말을 듣고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그렇다면, 먼저 평양관저로 함께 가서 약을 바르시죠.”소한은 그녀의 제안에 놀란 기색을 내비쳤다.“불편하지 않겠소?”김단은 그를 바라보며 단호히 말했다.“괜찮습니다.”그렇게 소한은 김단과 함께 평양관저로 향했다. 그곳에서 그들을 맞이한 것은 김단의 몸종 숙희였다.소한을 발견한 그녀는 깜짝 놀라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그러자 김단이 숙희를 달래는 듯한 목소리로 차분히 말했다.“숙희야, 장군님을 객실로 안내해 주거라. 나는 약을 준비하러 가야겠구나.”그녀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김단의 지시를 따랐다.객실에 혼자 남은 소한은 조심스럽게 상의를 벗고 등을 드러냈다. 그의 등에는 형벌로 인한 상처가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그는 거울을 통해 자신의 등을 바라보며 오늘의 형벌이 생각보다 가볍지 않았음을 깨달았다.하지만 그는 김단이 이 상처를 보면 마음 아파할 것이라 생각하며 기대감으로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잠시 후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약을 들고
긴장감이 맴도는 분위기 속에서 전하는 이해 안 되는 듯한 어투로 물었다,“조선의 장군인 네가, 수많은 전공을 세운 네가, 원하는 여인 하나 얻는 것이 그리 어렵단 말이냐? 어찌 김단 하나 때문에 수년간 공들여 쌓아온 모든 것을 무너뜨리려 하는 것이야? 그 낭자가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느냐?”전하의 말투는 엄중했지만 그 속에는 실망과 안타까움이 섞여 있었다.그러자 소한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단호하게 한 마디를 내뱉었다.“그렇습니다.”전하는 눈썹을 찌푸리며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김 의원, 들었소?”그 순간 소한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그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조용히 서있는 김단이 있었다. 그녀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담담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소한은 그녀의 존재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가 이 모든 대화를 들었다는 사실에 당황했지만 그녀의 표정에서는 어떠한 감정도 읽을 수 없었다.소한은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물었다.“김단, 왜 이곳에 있는 것이오?”그녀는 천천히 방 안으로 들어와 무릎을 꿇고 전하에게 예를 올렸다.“소녀 김단, 전하를 뵙습니다.”전하는 손짓으로 그녀를 일으키며 말했다.“일어나거라. 오늘 발생한 일에 대해 자세히 말해 보거라.”김단은 소한을 보지 않기 위해 시선을 정면에 고정한 채 차분하게 사건의 전말을 설명했다. “제가 직접 목격한 바는 없습니다. 하지만 민대부를 제외하고는 영의정 댁 장남의 부인에게 감히 손을 댈 수 있는 자는 없을 것입니다.”전하는 그녀의 말을 듣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맹 낭자의 상처를 확인하기 위해 두 명의 궁녀를 보내겠다. 평양관저에서 확인해 보도록 하거라.”학대의 이유가 무엇이든 맹영지는 필시 중전의 친척이었다. 만약 폭력을 가한 사람이 민대부라고 할지라도 이는 중전의 가문을 모욕하는 행위와 다름없었기에 결코 그를 용납할 수 없을 것이다.전하는 소한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어쩌면 네 죄가 묻힐 수도 있겠구나.”민씨 가문의 잘못이 드러나게 된다면
소한은 곧바로 병사들과 함께 어서재에서 물러났다. 그가 다시 돌아왔을 때는 이미 향 한 자루가 탈 정도의 시간이 흘러 있었다.소한이 걸어 들어오는 것을 본 전하는 하던 일을 멈추고 냉랭하게 물었다.“영의정이 너를 더 때리라고 명하지 않았느냐?”소한은 조용히 전하 앞으로 걸어가 무릎을 꿇고 허리를 곧게 세운 채 대답했다.“전하의 깊은 뜻을 아는 자입니다. 그러니 더 심한 처벌을 요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전하는 코웃음을 치며 다시 물었다.“그렇다면, 내 뜻이 무엇이더냐?”소한은 고개를 들어 전하를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전하께서는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대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을 겁니다. 그래서 영의정을 불러 제가 벌을 받는 장면을 직접 목격하게 하셨죠. 그리고 동시에 제가 전하의 사람이라는 것을 명확히 하셨습니다. 전하께서는 영의정이 이 사실을 눈치채기 바라신 것 아니었습니까?”전하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손에 들고 있던 붓을 책상에 내던지며 소리쳤다.“이 불경한 자식아! 내 너를 아낀다고 해서 이렇게 제멋대로 행동해도 된다고 생각하느냐? 영의정 저택 외에 또 어디에 첩자를 심어두었느냐?”소한은 눈을 내리깔며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3품 이상의 모든 관료의 집에 첩자를 두었습니다.”그 말을 들은 전하는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소한을 가리켰지만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였다.그는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짓더니 한참 동안 방안을 서성이었다.잠시 후 그는 분노를 억누르지 못하고 다시 한번 소리쳤다.“네가 감히! 그렇게 많은 곳에 첩자를 심어두고 무슨 일을 꾸미려는 것이냐? 이렇게 행동하면 내가 소씨 집안을 멸문시켜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소한은 여전히 고개도 들지 못한 채 조용히 말했다.“저도 위험한 짓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전하께서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다섯 해 전, 저희 소가는 거의 멸문 당할 뻔했습니다.”그 해 소하가 지닌 병권은 다른 집안의 탐욕스러운 먹잇감이 되었고 그로 인해 조정의 문
김단은 그제야 잊고 있었던 민태훈을 떠올렸다.그녀는 맹영지를 몸종에게 맡기고 민태훈 곁으로 다가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그의 허벅지에 박힌 은침을 뽑아냈다.침이 빠져나가자마자 민태훈은 마치 고통에서 해방되기라도 한 듯 온몸의 긴장이 풀리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이를 지켜보던 사람들은 한 가닥의 은침이 이토록 큰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큰 마님은 김단을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했다.그녀는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고 말이다.그때 경씨가 마차를 몰고 도착했다. 김단과 몸종이 맹영지를 부축하며 걸어 나오자 경씨는 놀란 얼굴로 다가와 안부를 물었다.“낭자, 괜찮소?”방금 전 김단이 영의정 저택에서 곤란한 상황을 겪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소한은 급히 그녀가 있는 곳으로 달려왔다.덕분에 한발 늦게 도착한 경씨는 자신이 더 일찍 김단을 챙기지 못한 것을 자책하며 말했다.“내가 미처 신경 쓰지 못했소.“김단은 고개를 끄덕이며 부드럽게 대답했다.“저는 괜찮습니다. 먼저 맹 아가씨를 평양관저로 모시고 가야 할 것 같습니다.“그는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김단과 몸종이 맹영지를 부축하며 마차에 오르자 경씨는 바로 마차를 출발 시켰다.김단은 마차에 오르기 전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시선은 조용히 서 있는 소한에게로 향했다. 소한은 그녀를 바라보며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김단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돌려버렸다. 소한은 그런 김단의 뒷모습을 씁쓸하게 바라보더니 옅은 미소를 지었다.그 후 소한은 곧장 궁으로 향했다.어서재에 도착한 그는 곧바로 무릎을 꿇고 앉아 오늘 영의정 저택에서 있었던 일을 전하에게 보고했다.그의 말을 들은 전하는 노여움을 감추지 못하며 소한을 꾸짖었다.“네가 감히 허락도 없이 영의정 저택을 침입했단 말이냐? 정말 대담하구나! 내가 너를 벌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느냐?”그러나 소한은 그저 묵묵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벌을 달게 받겠습니다.“전하는 그의 담담한 태도에 더 분노하며 외쳤다.“민가
김단은 민씨 부인의 말에 담긴 의미를 정확히 파악했다.보내서는 안 된다라...오늘 이 자리에서 맹영지뿐만 아니라 김단 자신도 민가를 벗어날 수 없다는 뜻이었다. 김단은 민씨 부인이 자신의 아들을 위해 이런 결정을 내릴 줄 몰랐다.그녀는 자신의 아들을 보호하기 위해 어떤 선택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김단의 눈빛이 서서히 날카롭게 변해갔다. 그녀의 내면에서는 분노와 실망이 교차했다.큰 마님은 민씨 부인의 표정을 보고 심각한 상황임을 직감했다.맹영지의 몸에는 증거가 남아있었고 그 사실이 세간에 알려지게 된다면 엄청난 파장을 불러올 것이다.하지만 지금 김단을 보내지 않는다면 그녀는 분명 궐로 들어가 이 일을 고발할 게 뻔했다.지금 김단을 적으로 돌린다면 그에 따른 후과도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다.큰 마님은 사랑하는 손자를 바라보며 깊은 고민에 빠졌다.김단을 보내면 민태훈의 입지가 위험해질 것이고 보내지 않는다면 민가 전체가 위태로워질 수 있었다. 그러기에 그녀는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그때, 한 하인이 급히 달려와 외쳤다.“큰 마님! 소 장군님께서 오셨습니다!”소 장군? 소한을 말하는 것인가?그의 이름이 언급되자 큰 마님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소한이 이렇게 빨리 이곳에 올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김단도 그가 왜 이곳에 나타났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그녀가 생각에 잠긴 사이 뒤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큰 마님 이렇게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뵙게 되어 송구합니다.”모두들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보이는 것은 당당하게 정원으로 걸어 들어오는 소한의 모습이었다.“소한, 주인의 허락도 없이 들어오다니! 대체 영의정 저택을 무엇으로 보시는 것이오? 이곳은 마음대로 들락날락할 수 있는 곳이 아니오.”소한은 그 말을 한 사람을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이런 무례를 범한 것은 제 잘못입니다. 곧 전하 앞에서 사죄드리지요.”그는 정원에 있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더니 큰 마님에게 다가가 정중히 인사했다.
머뭇거리는 그들의 모습에 김단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마님, 만약 지금 이 자리에서 저를 막으신다면 저는 곧장 궐로 가 이 모든 일을 고할 것입니다.”그녀의 말은 칼날처럼 날카로웠고 그 안에는 확고한 결의가 담겨 있었다.김단의 말이 끝나자 민가의 사람들은 긴장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특히 큰 마님은 눈썹을 찌푸리며 깊은 고민에 빠졌다.그녀는 김단이 단순한 의원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김단은 진산군 댁의 적녀이자 평양원군의 의남매이다. 그리고 그녀는 소가의 두 형제와도 깊은 인연이 있었다. 지금 그녀를 적대시하는 것은 곧 여러 권세 있는 가문을 적으로 만드는 것과 다름없었다.큰 마님은 민태훈을 바라보았다. 그는 고통에 찬 얼굴로 땀을 흘리며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그녀의 마음은 찢어질 듯 아팠다.그러나 동시에 마음속에는 김단에 대한 의심도 피어올랐다. 만약 그녀의 말이 과장된 것이라면 민씨 가문은 부당한 비난을 받게 될 것이다.한참을 고민하던 큰 마님은 굳게 결심한 듯 민씨 부인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네가 직접 확인해 보거라. 만약 낭자의 말이 거짓이라면 반드시 그에 따른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다.”민씨 부인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김단과 함께 방으로 들어갔다.김단은 조심스럽게 맹영지의 소매를 걷어 올렸다. 그녀의 팔 안쪽에는 선명한 멍 자국이 여러 개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민씨 부인은 숨을 들이켰다.“이런 상처가… 정말로…”그녀가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자 김단은 차분하게 말했다.“다리 쪽은 더 심각합니다. 보시겠습니까?”민씨 부인은 고개를 저으며 물었다.“이 상처, 정말로 태훈이의 짓입니까?”김단은 잠시 침묵하더니 그녀의 말에 대답해 주었다.“제가 직접 본 것은 아닙니다.”그 말에 민씨 부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우리 태훈이는 절대 그럴 애가 아닙니다. 어릴 적부터 착하고 작은 생명도 소중히 여기던 사람이었단 말입니다.”김단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지만 겉으로는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았다.
공주의 이름이 거론되자 민씨 일가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스쳤다. 그러나 큰 마님은 여전히 태연한 표정을 유지한 채 입을 열었다.“낭자가 공주의 명을 받고 우리 영의정 저택에 들어와 병자를 돌보는 것은 알겠소. 허나 공주의 허락 없이 사람을 해치는 것은 무엄한 일이오. 공주라 할지라도 국법을 지켜야 하지 않겠소? 그러니 함부로 공주의 이름을 빌어 협박하지 마시오.”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김단은 박수를 치며 말했다.“참으로 옳은 말씀이십니다.”민가의 큰 마님은 김단이 드디어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자신을 치켜세운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김단의 입가에는 더욱 짙은 미소가 떠올랐고 눈빛에는 경멸이 스쳤다.“공주님께서도 국법을 지키셔야 하는데 민가의 사람들은 더욱 그러셔야 하지 않겠습니까?”민가의 사람들은 일제히 소리를 높이며 반박했다.“그게 무슨 뜻이오? 우리 민씨 일가는 예로부터 법을 준수하며 국법에 어긋나는 일을 한 적이 없소!”“김 의원께서 자신의 잘못을 덮기 위해 우리 민가에 누명을 씌우려는 것 아니오?” 김단은 그저 조용히 서서 그들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두려운 기색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김단의 이런 차분한 태도가 큰 마님의 신경을 건드렸다.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김단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여러분도 아시다시피, 큰 며늘 아씨는 중전마마의 친조카이시며 공주자가의 사촌이십니다. 그래서 제가 그분의 치료를 맡게 되었지요. 원래는 상태가 호전되고 있었으나 오늘 갑자기 증상이 악화되었습니다. 이는 분명 누군가가 큰 며늘 아씨의 회복을 방해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의원으로서 제 환자가 이곳에서 고통받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으니 제가 데려가야겠습니다. 만약 제 앞을 가로막으신다면 다음번에는 민대부님의 다리에 은침을 꽂아 버릴 것입니다.”이에 큰 마님은 지팡이를 바닥에 세게 내리치며 외쳤다.“허튼소리 마시오! 낭자의 의술이 부족해서 생긴 일을 왜 우리한테 덮어씌우려는 것이오?”“맞소! 무슨 명의의 제자라더니... 다 헛소리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