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15년간 진산군댁의 금지옥엽으로 살아가던 김단은 우연히 자신이 진산군의 친딸이 아님을 알게 된다. 한때 자신을 사랑해 주던 부모님과 오라버니, 그리고 호국 장군이었던 정혼자까지 어느새 진산군의 친딸, 임원의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들은 친딸 때문에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김단에게 누명을 씌우는 것도 모자라, 세답방의 무수리로 전락하게 한다. 무수리로 고생하는 3년간 아무도 그녀를 찾아오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진산군과 정부인이 눈물을 훔치며 그녀의 앞에 나타났다. “딸아, 못난 아비와 어미를 용서해다오. 우리랑 집으로 돌아가자꾸나.” 그녀를 무시하며 하대하던 오라버니는 밤새 무릎까지 꿇으며 애원했다. “단아, 이 오라비를 용서해 주면 안 되겠니?” 전쟁에서 공을 세우며 승승장구하던 소 장군은 피로 얼룩진 몸을 이끌고 찾아왔다. “낭자, 내게 한 번만 더 마음을 주면 안 되겠소?” 허나,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던 지난날들 속에서 그녀의 마음은 이미 차갑게 식었다. 훗날, 그녀만 바라보고 사랑해 주는 남자를 만나 행복하게 사는 김단의 모습에, 괜히 그녀의 눈 밖에 나 한때 가족이었던 인연조차 저버리게 될까 봐 두려웠던 진산군댁 사람들은 다시는 그녀를 찾아오지 못하는데….
View More“그러고 보니 고지운한테서도 며칠 전에 편지가 왔어요.”김단은 바느질거리를 바구니 안에 가지런히 넣으며 말했다.“편지 내내 소하가 자기를 얼마나 엄하게 구는지 투덜거렸네요. 원래는 아이 둘을 데리고 살짝 빠져나와 저희를 보러 오려 했는데, 성문 밖으로 나가기도 전에 소하한테 붙들렸대요.”“그 일이라면 나도 들었소.”최지습의 눈가에 장난기 어린 빛이 스쳤다.“고지운이 그 일로 며칠이나 소하에게 곰살궂게 성을 내고, 떼를 썼다 하더이다. 결국에는 서달이 울면서 아버지를 찾겠다고 매달리는 바람에 겨우 마음을 풀었다 하더이다.”두 사람은 마주 보며 웃었다.시끄럽게 티격태격하는 그 부부의 모습이 눈앞에 선히 그려지는 듯했다.밤빛이 점점 짙어졌다.최지습은 자리에서 일어나 기름등 하나에 불을 붙여 처마 밑에 걸었다.희미한 불빛이 작은 마당을 포근히 감싸 안았고,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몇 번 들려왔다.“또 한 가지 소식이 있소.”최지습이 다시 자리에 앉으며 온화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지난달에 임학과 소정원이 혼례를 올렸다 하오.”김단은 잠시 놀란 듯 눈을 깜박이더니 곧 미소를 지어 보였다.“마침내 인연을 맺었네요. 소정원 그 낭자는 오래전부터 그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는데요.”“그러게 말이오.”최지습은 먼 산쪽을 바라보았다.“진산군 댁이야 예전만 못하다 하나, 임학이 지금은 장군의 벼슬을 받았다 하니 소정원에게도 더는 부끄럽지 않을 것이오. 혼례도 몹시 성대했다 하더이다. 소하와 고지운도 모두 갔다 하오. 다만…”그는 말끝을 살짝 흐렸다.“소한은 나타나지 않았소.”김단은 낮게 숨을 내쉬며 짧게 대답했다.“네.”손끝은 무심코 옷자락을 쓰다듬고 있었다.“하지만 며칠 전 암위가 전갈을 보내 왔소.”최지습이 그녀의 손을 가만히 잡았다.“강남 일대에서 그를 보았다 하더이다. 큰 호숫가에 자그마한 찻집을 열고, 온종일 차를 마시고 곡을 들으며 지낸다 하더이다.”“그렇다면 다행이에요.”김단이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등불
늦봄의 저녁 햇살이 작은 산골 마을을 따뜻한 금빛으로 물들였다.멀리 겹겹이 포개진 푸른 산은 옅은 안개에 싸여 있었고, 가까이에서는 몇 줄기 저녁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마을 동쪽 끝, 푸른 기와와 흰 담으로 둘러싸인 작은 집 안에서 은은한 약향이 흘러나왔다.김단은 부엌 아궁이 앞에서 약을 달이고 있었다.세 살 난 딸 난이는 그녀의 무릎에 몸을 기대고 앉아 방금 배운 약초 이름을 또박또박 따라 했다.“복령…… 당귀……”“난이는 정말 영리하구나.”김단은 다정하게 딸아이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쓸어 주었다.그러나 시선은 저도 모르게 창밖 굽이진 산길 쪽으로 흘러갔다.“어머니, 아버지는 언제 돌아오세요?”두 살 난 아들 안이가 비틀거리며 안으로 뛰어 들어와 그녀의 품에 털썩 안겼다.“곧 올 거야.”김단은 아들의 붉게 상기된 볼을 쓰다듬으며 속으로 시간을 가늠했다.이 시각이면 돌아올 때가 됐다.“아버지!”난이의 눈이 갑자기 반짝이더니, 김단의 품을 벗어나 문쪽으로 달려 나갔다.마당 문이 끼익 소리를 내며 열렸다.최지습이 활을 등에 메고 산꿩 두 마리와 들토끼 한 마리를 손에 든 채 걸어 들어왔다.그의 허리는 여전히 곧게 펴져 있었다.다만 예전의 날카롭던 눈매는 많이 부드러워졌고, 검은 무명 옷자락에는 먼지가 조금 묻어 있었다.“아버지!”두 아이가 작은 제비처럼 그의 품으로 날아들었다.최지습은 사냥감을 내려놓고 두 아이를 한꺼번에 번쩍 안아 올렸다.난이는 그의 목에 팔을 감았고, 안이는 옷자락을 꼭 움켜쥐었다.작은 머리 두 개가 나란히 붙어 종알종알 떠들어댔다.“오늘은 얌전했냐?”최지습이 웃으며 물었다.그러나 그의 시선은 아이들 머리 위를 넘어 문가에 서 있는 김단과 마주쳤다.해질녘 햇살이 그녀의 뒤에서 부드러운 빛의 테두리를 그려 주었다.그녀는 거친 삼베 앞치마를 두르고 머리에는 막 꺾어 온 들꽃 한 송이를 꽂고 있었다.예전 그가 마음을 빼앗겼던 모습 그대로였다.“다 얌전했어요.”김단이 다가와 자연스럽게 그의
최지습은 말에서 가볍게 몸을 내리더니, 여유 있는 걸음으로 마당 안쪽을 향해 걸어 들어갔다.햇빛이 그의 어깨 위로 내려앉자, 검은 혼례복 위에 수놓인 금빛 자수가 반짝이며 빛을 흘렸다.오늘 그는 머리카락 한 올 흐트러지지 않게 단정히 빗어 올려, 또렷한 눈매와 고운 이목구비가 한층 더 살아났고, 풍모는 더욱 비범해 보였다.고지운과 소정원은 방문 앞을 지키고 서 있다가, 최지습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서로 눈을 맞추며 웃었다.“대군자가 신부를 데려가시려면, 먼저 우리 관문부터 지나셔야 합니다.”고지운이 웃으며 말을 건넸다.소정원이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맞아요, 청면 시를 먼저 지으셔야 해요.”최지습은 옅게 웃음을 머금고 잠시 생각을 가다듬더니, 낮게 시를 읊었다.“붉은 예복 아래 옥 같은 얼굴을 살며시 가려 두었으나, 가리개를 들어 올리면 누구보다 눈부신 아름다움이 드러나네. 오늘 그 고운 손을 내가 잡아, 거문고 소리 같은 봄밤을 너와 함께 걸어가리.”순간 마당 안에서는 탄성이 터져 나왔다.호랑이군은 손뼉을 치며 떠들썩하게 외쳤다.“대군자, 문재가 참으로 뛰어나시옵소이다!”사람들의 웃음과 추임새가 뒤섞이는 가운데, 안쪽 방문이 천천히 열렸다.희파를 뒤집어쓴 김단이 숙희와 목몽설의 부축을 받으며, 발걸음을 조심스레 옮겨 문밖으로 나왔다.최지습의 시선은 곧장 그녀에게로 가닿았고, 그 자리에서 한 치도 움직이지 못한 채 그대로 멈춰 섰다.그는 한 걸음 다가가 조심스럽게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얇은 비단 사이로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감촉이 또렷이 전해졌다.“당신을 데리러 왔소.”그가 낮게 속삭이듯 말하자, 목소리에는 소중히 아끼는 마음이 가득 담겨 있었다.사람들의 축복 소리가 연달아 터져 나오는 가운데, 최지습은 두 팔을 뻗어 김단을 번쩍 안아 들었다.김단은 무의식중에 그의 목을 감싸안았고, 희파 너머로 전해지는 그의 고르고 깊은 심장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그의 품은 따뜻하면서도 든든해,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온몸의 힘을 풀
한 달 뒤였다.이른 새벽, 옅은 빛이 방 안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김단은 경대 앞에 앉아 놋거울 속의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정홍색 혼례복에는 금실로 복잡한 난봉무늬가 정교하게 수놓여 있었고, 소맷부리와 치맛자락 곳곳에는 잘게 박힌 진주들이 아침빛을 받아 은은한 광을 돌렸다. 붉은 금에 비취를 박은 봉관이 묵직하게 올린 머리 위를 누르고 있었고, 구슬과 비취 장식이 머리 둘레를 에워싼 채 가느다란 보요가 살며시 드리워져 흔들렸다.그녀는 천천히 손을 들어 관에서 내려온 유술을 한 번 쓸어 보았다. 손끝이 아주 조금 떨렸다.“아씨, 오늘은 정말 곱습니다.”숙희가 옷깃을 다듬어 주며 낮게 말했다. 목소리에는 알게 모르게 울음기가 배어 있었다. 김단이 여기까지 오는 동안 얼마나 쉽지 않은 길을 걸어왔는지 떠올랐기 때문일 것이다.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김단의 가슴에도 별의별 감정이 한꺼번에 밀려왔다.그녀가 혼례를 치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익숙한 절차와 순서를 이미 한 번 모조리 밟아 본 몸이었다.조금 전 머리를 빗어 준 이도 지난번 그때처럼, 복이 좋다던 그 할미였다.하지만 지난번 혼례는 내린 어명을 피하기 위한 궁여지책이었다.이번만은 달랐다.이번에는 진심으로, 한 사람과 평생을 함께하고 싶어 선택한 혼례였다.어쩌면 그래서일 것이다.지금 이 순간이 유난히 더 긴장되게 느껴지는 것도.그렇게 생각에 잠겨 있던 찰나, 문발이 살짝 흔들리는 소리가 나더니 고지운이 소정원의 손을 이끌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두 사람은 혼례복을 차려입은 김단을 보자 나란히 걸음을 멈추었다.“단이…”고지운이 성큼 다가왔다. 붉은 빛이 도는 혼례복 차림의 김단을 바라보는 그의 눈이 금세 환해졌다. 그는 다가와 그녀의 손을 꼭 잡으며 웃었다.“이렇게 고운 자는 처음 보오.”소정원도 급히 다가와 김단 앞에 서더니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이 혼례복 자수 정말 정교하네요. 궁 안 수장들이 한 솜씨지요? 지난번 우리 오라버니께 시집가실 때 입
밤이 깊었는데도 임학이 머무는 사랑채 안은 등불이 훤히 밝혀져 있었고 진한 약 냄새가 자욱이 감돌고 있었다. 하인들은 이미 모두 물러나 있었고, 몇 개 남은 등불만 산들바람에 흔들리며 그림자를 길게도 짧게도 늘였다.임학은 비단 이불 속에 반쯤 파묻힌 채 누워 있었다. 얼굴은 여전히 새하얗게 질려 있었고 입술은 마른 틈이 잔뜩 가 있었다. 평소 활기가 넘치던 눈썹과 눈매도 깊이 찌푸려져 있었다.손목과 목덜미에는 쇠사슬에 졸린 자국이 깊은 자줏빛 멍으로 남아 있었고, 몸부림치며 부딪힌 곳마다 퍼렇게 멍이 들어 있어 보는 이의 가슴을
김단은 곧장 대답하지 않고 임학의 손목에 남은 멍 자국을 바라보다가 낮게 물었다.“……많이 아팠지요?”임학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이내 고개를 저으며 우는 얼굴보다 더 일그러진 웃음을 지었다.“안 아프다. 오라버니는 하나도 안 아프다.”그의 가슴 한켠은 뜨겁게 데워지고 있었다.김단은 그런 임학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가슴속에 남아 있던 차가운 조각이 마침내 조금씩 갈라지는 것을 느꼈다.“이제 자세요.”그녀의 목소리는 깃털 한 줄기처럼 부드러웠다.“제가 여기서 지켜보고 있을게요.”임학은 침상 곁을 지키고 앉아 있는 그녀의
그 말은 마치 구천에서 내리꽂힌 벼락처럼 김단의 머릿속에서 굉음을 터뜨렸다.발끝에서부터 서늘한 한기가 곧장 정수리까지 치솟았다.손끝마저 희미하게 저려 왔다.“조선만이 아니라고요? 만약 그자의 야심이 정말 크다면, 당국은…”김단의 목소리는 다급함에 떨렸다.그녀는 훌쩍 몸을 기울여 최지습의 팔을 꽉 붙잡았다.“현면객의 손이 어쩌면 이미 당국까지 뻗었을지도 모릅니다. 당장 목몽설에게 소식을 보내서, 무엇보다 경계를 늦추지 말라고 알려야 합니다.”최지습은 그녀 손끝에 서린 차가운 온기와 미세한 떨림을 느꼈다.그는 손을 거꾸로
고지운의 몸속을 파고든 충독은 어째서 하필 식원비전으로만 풀 수 있는 것일까.하필 이때, 유 사형과 진맹 두 사람의 시신이 발견된 것도, 그것도 그렇게까지 끔찍한 몰골로 누워 있었던 것도, 정말 우연일까.결국은 김단을 궁지로 몰아 식원비전을 쓰게 만들어 고지운을 살려 놓고, 그다음 유 사형과 진맹의 죽음을 자연스럽게 약왕곡의 짓으로 몰아가려는 수작일 뿐이었다.아니다.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심지어 정체를 알 수 없는 그 현면객까지도, 끝내는 모두 약왕곡이 뒤에서 부린 짓으로 엮을 셈일 것이다.지금 지켜야 하는 것은 약왕곡 사
Ratings
reviewsMore